일천미터 빙벽 단독산행 , 부산산악연맹 SC이사 박정용 / 월간 마운틴 기사

2013. 9. 25. 07:16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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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산사람] 1천미터 빙벽의 단독행, 부산산악연맹 SC이사 박정용씨

“이젠 가족과 지역 산악계를 살피며 함께 가고 싶습니다” 월간마운틴 | 글 곽정혜 기자 사진 이영준 기자 | 입력 2013.09.13 11:16 | 수정 2013.09.13 11:22
 

↑ 금정산 부채바위를 오르고 있는 박정용씨. 그는 한대 스포츠클라이밍에서 5.13급 난이도를 자랑하던 '선수'였다.

 

 

    이 등반은 모든 것을 내가 계획하고 원했던 등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등반 가능성에 대한 나의 판단이 확실성에서 불확실성으로 바뀐다면 언제든지 벽에게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콩데 북벽 등반기 中

    네팔 쿰부 히말라야의 중심이자 최대 번화가인 남체 바자르(Namche bazar). 해발 3440m의 이 마을에서는 멋진 스카이라인을 뽐내는 산들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봉우리가 하나 있다. 남체 계곡 바로 건너편에 있어 가장 먼저 보일 수밖에 없는 콩데가 바로 그것. 이 산은 콩데눕(6035m), 콩데로(6187m), 콩데샤르(6093m)의 연봉으로 이루어졌으며, 네팔등산협회가 관리하는 트레킹 피크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이 봉우리의 북벽 루트는 8천미터급 자이언트봉보다 더 높은 등반성을 자랑하며, 알파인스타일의 경량·속공 등반지로 여러 등반가들의 도전을 받아온 곳이다.


    콩데 북벽의 초등은 1982년 미국의 제프 로우와 데이비드 브레쉐어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2008년 독일의 여성 3인조가 동계 등반을 이루어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리고 2009년에 첫 솔로등반 기록이 탄생했는데, 부산 출신 산악인 박정용(37세·부산빌라알파인클럽)씨가 그 주인공이다.

   "2004년에 첫 해외원정인 로체 남벽 가는 길에 콩데를 보고 '언젠가 올라가야지' 하고 마음먹었어요. 같이 있던 선배에게 그 얘길 슬쩍 건넸더니, 못 오를 나무를 쳐다보는 한심한 놈처럼 여기더라고요. 그때 약간의 오기가 발동하기도 했고, 대규모 원정에 비해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 조금씩 준비를 했죠."

   그로부터 3년 뒤, 그는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 지역 선배인 복진영씨(부산클라이머스)와 함께 콩데 북벽에 도전하게 된다. 당시 산악연맹으로부터 지원금도 받는 등 주변의 기대를 안고 떠났지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던 듯하다.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열병이 있어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는데,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땐 입이 돌아가는 등 안면마비가 오기도 하고 기상이 나빠 제대로 등반도 못한 채 돌아와야 했다.

    이듬해에는 대규모 원정대에 참가해 마칼루(8463m)를 등정하기도 했지만, 콩데에 대한 미련을 떨쳐낼 수 없었다. 당시 그는 산을 통해 스스로 무엇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남편이 해외원정 떠나는 걸 탐탁찮게 여기던 아내가 이젠 더 이상 산에 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때껏 등반가로서 쌓아온 행위들을 마무리한다는 생각으로 솔로등반을 택하게 된다.

    "처음 등반을 시작할 땐 나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런데 벽에 가까울수록 두려운 마음이 커지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났죠. 그 공포감 때문에 오로지 등반에만 집중했고, 하산할 때도 환청이 계속 들려 얼음을 먹어가며 정신을 가다듬곤 했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콩데 등반 이후 그는 현재까지 4년째 은거 중이다. 아내와의 약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등반의 가치를 찾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더 채우기 위한 전략적 후퇴이기도 하다. 당시 '콩데 북벽의 사나이'로 유명세를 탔던 그는 유명 아웃도어 업체에 스카우트 되어 서울에서 3년 여간 직장생활을 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유약함을 되돌아볼 수 있는 나름대로 가치 있는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어린 딸이 자라는 모습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게 늘 마음에 걸렸죠. 그래서 지난해 가을에 서울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부산으로 내려왔어요."

    그는 요즘 아내와 함께 실내암장(부산클라이밍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암장은 그가 본격적으로 해외 등반을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운영해온 소중한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그는 원래 부산기계공고 졸업 후 한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며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꾸준히 등반활동을 했지만, 로체 원정 당시 회사에서 휴가를 내주지 않자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고 한다. 이후 그가 새로운 직장으로 실내암장을 생각하게 된 건, 어린 시절부터 산만 타던 촌놈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자 로망이었다.

    어린 시절 금정산 자락에서 뛰어 놀며 자란 박씨는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산악부에 입회를 하며 본격적으로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스포츠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여러 대회에 나가 늘 결승까지 올라갔고, 고교재학중인 1994년부터 10여 년간 부산 해운대에서 치러졌던 전국우정암벽대회에서 루트세터로 일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90년대 후반에는 아시안컵 스포츠클라이밍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보여 산악계의 기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내 실력은 딱 거기까지였어요. 나는 그 자리만 맴돌고 있는데, 재능 있는 후배들은 벌써 나를 앞질러 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고산등반으로 눈을 돌리게 된 거죠."

    직장까지 내던지고 다녀온 로체 등반 이후, 그는 앞만 보고 달리는 말처럼 2005년 파키스탄 쉽튼스파이어(5950m), 2007년 콩데 북벽, 2008년 마칼루, 2009년 콩데 북벽 단독등반까지 5년간 고산등반에 '올인'했다. 다른 등반가들에 비해 특별히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는 프로필일지라도, 그에게는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던 소중한 삶의 기록들이다. 그는 "내가 이만큼이나마 자유롭게 등반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내의 희생이 컸다"고 말했다.

    "집사람과는 1994년에 다니던 암장에서 함께 운동을 하다가 만나 결혼했어요. 클라이밍 부분에서는 서로 잘 맞지만, 아내는 고산등반에 대해 위험하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했죠. 그런 아내를 뒤로한 채 5년간 산에 다니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시켰고,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혼자 암장을 지키고 애 보느라 몸 고생도 많이 시켰어요. 요즘은 함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 고교 입학과 함께 20년 가까이 해온 등산은 박정용씨에게 숨 쉬는 것 만큼 자연스런 일상과도 같다.

 

 

    그가 돌아온 곳은 가족의 품만이 아니었다. 부산 산악계 내에서도 그의 복귀는 무척 반가운 일이라, 올해 초 부산시산악연맹 스포츠클라이밍 이사에 임명되었다. 그 첫 행보로 지난 6월에 전국금정암벽대회를 맡아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며 "앞으로도 스포츠클라이밍 대중화와 심화 교육 등에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그는 7년째 몸담고 있는 부산산악구조대 일도 '산에게 할 수 있는 봉사'라는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돌아왔다'는 표현은 어색하지만, 어쨌든 부산으로 돌아왔으니 당분간은 우리 가족과 제가 해야 할 산악계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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