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건축학개론 1장엔 "도시 탈출’ 욕망이.....

2013. 9. 25. 22:58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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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건축학개론 1장엔 "도시 탈출’ 욕망이.....

 

등록 : 2012.06.26 20:20 수정 : 2012.06.27 .

 

 

다산의 제자인 초의선사가 다산이 강진 유배 시절 10년동안 머물던 다산초당(아래)을 그린 <다산초당도>다산은 이곳에 못을 파고 채마밭을 일구며 자신이 늘 꿈꾸던 이상적 생활 공간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냈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도시의 일상은 지금처럼 팍팍했다. 생활 경제는 파탄 나고 주거 환경은 열악했다. 이 시기 ‘전장’(田莊: 개인이 소유한 논밭)과 ‘별서’(別墅: 농토 근처에 지은 한적한 집) 등 이상적 주거공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은 도시 탈출의 웰빙 욕구와 무관치 않다.

다산은 젊어서부터 생활 공간 꾸미기에 관심이 많았다. 원예에 대한 취미도 특별했다. 젊은 시절 자신이 살던 서울 명례방의 좁은 마당을 반으로 갈라 난간을 세우고, 그곳에 왜석류와 매화·치자·동백·수선화·파초·벽오동 등 여러 가지 화훼를 가꾸었다. 특히 국화에 대한 집착은 대단해서 수십 종이 넘는 다양한 국화를 길렀다. 절기마다 벗들과 어울려 꽃나무를 감상하며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동인 모임을 열곤 했다.

    전라도 강진에 유배 가서 주막집 골방을 겨우 얻어 생활하면서는 직접 가꿀 수 있는 작은 채마밭과 꽃밭에 대한 꿈이 더 간절했다. 그는 이웃의 채마밭에 나가 이런저런 간섭도 하고, 어떡해야 근처 금곡사의 땅뙈기를 조금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조바심을 쳤다.

한번은 제자 황상이 숨어사는 선비의 거처를 묻자 다산은 신이 나서 ‘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이라는 긴 글을 써 주었다. 이 글은 주거 공간의 위치 설정과 내부 구성, 주변과 외곽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의 일상과 가계 운영에 대해서도 청사진을 제시했다.

    유배 8년 만인 1809년 봄에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그토록 간절하게 꿈꾸었던 이상적 생활 공간을 현실 공간 위에 실현하는 작업을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먼저 채마밭을 조성했다. 비탈에 아홉 단의 돌계단을 쌓고, 층마다 무와 부추, 늦파와 올숭채, 쑥갓, 가지, 아욱, 겨자, 상추, 토란 등 갖가지 채소를 심었다. 못을 넓혀 파고, 산 위 샘물을 홈통으로 이어 끌어왔다. 대나무와 버드나무를 울타리 대신 둘렀다. 못가에는 당귀·작약·모란·동청 등 약초와 화훼를 심었다. 연못 위편에는 바닷가에서 주워온 기암괴석으로 석가산(石假山)을 꾸몄다. 다산은 이렇게 산속의 황량하던 별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다산은 틈만 나면 자식과 제자들에게 생활 공간을 어떻게 배치하고 경영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유거론’(幽居論)이란 글에서도 자신이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 이상적 주거에 관한 내용을 정리했다. 승려 제자인 철선(鐵船)에게는 승려의 이상적 거처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제안을 남겼다.

 

 

다산은 “앞에 시내가 흐르고 뒤에는 적당한 높이의 산이 서 있으며, 탁 트인 너른 들이 있지만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을 최적의 택지로 꼽았다. ` <한겨레> 자료사진

 

 

채소밭에 푸성귀, 약초 심고
과수원 둔 이상적 주거 설계
멋진 집보다 자급에 무게 둬

사대부 경제활동 권했지만
이익추구 속물적 삶은 경계
고상한 운치 즐길 것도 주문

 

 

 

이상적 주거의 구체적 조건

 


    다산은 터잡기와 국세(局勢: 어느 장소에서 한눈에 조망되는 땅의 형세), 내부 배치, 주거 주변과 외곽, 가계 경영과 기거일상(起居日常)으로 구분해서 자신이 꿈꾼 이상적 주거의 형상을 구체화했다. 이는 뒤에 제자 초의(草衣)의 일지암(一枝庵)과 황상의 일속산방(一粟山房) 등의 공간으로 구현되어 호남 원림미학의 한 원형으로 남았다.

앞에 시내가 흐르고 뒤에는 적당한 높이의 산이 배경으로 서 있고, 탁 트인 너른 들이 있지만, 밖에서 보면 잘 드러나지 않는 곳을 다산은 택지의 최적 조건으로 꼽았다. 풍속은 순후하며 산천이 맑고 깨끗한 곳이라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내부는 흙손질한 벽에 순창에서 나는 설화지(雪華紙)로 도배를 하고, 문미(門楣: 방문 위에 가로댄 나무)에는 엷은 먹으로 그린 횡폭의 산수화를 붙였다. 방 안에는 서가 두 개를 놓아두고, 1300~1400권의 책을 꽂았다. 책상 위엔 <논어>를 펴놓고, 곁의 탁자에는 여러 시집을 얹어두었다. 여기에 오동(烏銅) 향로와 거문고·바둑판 등 삶의 운치를 더해줄 물건을 더 꼽았다. 소박하나 문아(文雅)한 삶, 지적 탐구욕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의 서책에 대한 욕심만은 굳이 감추지 않았다.

주거 주변 공간도 세분했다. 뜰에 야트막한 담장을 세워 공간을 분할하고 각종 화분을 기르는 안뜰과, 연꽃을 심고 붕어를 기르는 연못, 담장 밖으로 이어진 채마밭과, 사립문과 근처 물가에 세운 휴식공간 등이 있다. 연못은 유사시 화재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고, 연꽃과 물고기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주며, 채마밭에 공급할 수원(水源)도 되는 등 다목적의 포석이었다.

    거처의 앞쪽에는 수백 이랑의 논을 마련해, 이곳의 소출로 1년 양식을 삼게 했다. 집 뒤편 채마밭에는 각종 약초 등 특용작물을 길러 가용(家用)으로 쓰고, 남는 것은 내다 팔아 생활에 보탬이 되게 했다. 또 뽕나무 수백 그루를 심고 누에를 쳐서 의복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면화와 삼과 모시도 따로 심었다. 다산의 이상적 주거 공간은 이처럼 관념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급자족의 삶이 가능한 형태였다.

 

 

 

소박하나 풍요로운 삶

 

    제자 윤혜관에게 준 글에서는 특별히 ‘원포’(園圃)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園)은 과수원이고 포(圃)는 채소밭이다. 농사는 너무 이문이 박해, 많이 지을수록 더 낭패를 보게 마련이므로 원포 농사로 이를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과수 열 그루를 심으면 1년에 엽전 50꿰미를 얻을 수 있고, 좋은 채소 몇 이랑을 길러 20꿰미를 얻고, 누에 5, 6칸에서 30꿰미를 얻는다면 추위와 굶주림을 충분히 구할 수 있으므로, 가난한 선비라면 농사에만 기대지 말고 원포의 경영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은 이렇듯 과수와 채소 재배, 누에치기를 통해 창출할 수 있는 예상 이득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사대부의 경제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강조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더욱 구체적이다. “국화 한 두둑이면 가난한 선비의 몇 달치 양식을 지탱할 수가 있다. 생지황·반하·도라지·천궁 등속과 쪽풀과 꼭두서니 따위도 마음을 쏟아야 한다. 채마밭을 정돈할 때는 평평하고 반듯반듯하게 해야 한다. 흙손질도 몹시 곱고 깊게 하여 가루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씨를 뿌리는 것은 고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모종은 널찍하게 심어야 한다. 아욱과 배추, 무를 한 구역씩 기르고, 가지와 고추 등속은 각각 구별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마늘과 파를 심는 데 가장 힘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 미나리 또한 심을 만 하다. 한여름 석 달의 농사로는 참외만한 것이 없다.” 이런 편지 내용은 생계형 원포 경영의 구체적 사례에 해당한다.

다산은 또 사대부로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명확히 구분했다. 장사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엄격히 금하고, 노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생산물을 내다 파는 것은 적극 권장했다. 한편 생활이 경제활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경계했다. 주인은 모든 집안일을 지휘 감독하는 한편, 학문에 몰두하고 풍류를 즐기며 삶 속에 고아한 운치를 깃들이기에 힘써야 한다. 이끗만을 따지는 속물적 삶에 떨어지면 안 된다. 이를 위해 다산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뜻 높은 선비나 시를 아는 승려를 벗으로 두어 왕래하며 교유를 나눌 것을 주문했다.

 

 

 

정민 한양대 교수(국문학)
    다산이 제안한 이상적 주거는 관념적이고 심미적인 이상론에 머물지 않고, 자족형 주거론이라 부를 만한 경제적 자급력까지 갖추었다. 다산은 가계 경영의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했다. 경제 활동을 통한 이익 추구에만 머물지 않고 삶 자체가 ‘상심락사’(賞心樂事: 즐거운 마음과 즐거운 일)의 고상한 운치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음미할 만하다.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 삶과도 아무 거리가 없다.

 

 

                                                                                           정민 한양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