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 12:29ㆍ차 이야기
지증대사(智證大師) 적조탑비(寂照塔碑) 국보 315호
지증대사 적조탑(智證大師 寂照塔) 보물 제137호
정진대사 원오탑(靜眞大師 圓悟塔) 보물 171호
정진대사 원오탑비(鳳巖寺 靜眞大師 圓悟塔碑) 보물 172호
봉암사 마애보살좌상(鳳巖寺 磨崖菩薩坐像)
가은에서 서북쪽으로 길을 잡아 가다보면 멀리 흰 봉우리가 불쑥 솟아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희양산이다. 그처럼 흰 바위봉우리를 이고 있는 희양산은 예부터 ‘절이 들어서지 않으면 도적이 들끓을 자리’로 지목되어 왔다.
그 희양산 중턱에 봉암사가 들어앉아 있다. 절집 뒤로 희양산 허리에 구름이 걸려 짙은 녹빛과 어우러져 있는데 이 산자락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속리산국립공원에 잇대어 있다.
이렇게 높은 산 중턱에 제법 너른 터를 닦아 자리한 봉암사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 열린 절이다. 신라 헌강왕 5년(879)에 도헌 지증대사(道憲 智證大師, 824~882)가 창건했다. 봉암사에 있는 지증국사 비문에 따르면 도헌은 경주사람 김찬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불도에 뜻을 두고 부석사에서 출가하였다. 열일곱에 구족계를 받고 정진에 힘썼고, 스물에 이미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임금의 간곡한 권유에도 수도인 경주로 나아가지 않고 수행정진에 힘썼다. 그러던 중에 심충이란 사람이 희양산에 있는 땅을 내면서 선원을 세우기를 청하니 와 보고 “이땅을 얻었다는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느냐? 승려들이 살지 않는다면 도적굴이 될 것이다.” 하면서 봉암사를 세웠다. 이렇게 하여 신라 하대의 새로운 사상인 선종의 구선선문 가운데 희양산문이 개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삼국이 대립하게 되면서 이곳 문경은 견훤과 왕건의 격전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 봉암사는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고 극락전만 남게 되었다. 정진대사 부도비의 비문에 따르면 대사가 희양산에 다다라보니 그때의 형상은 “부처를 모시던 뜰과 승려들이 살던 방은 반 이상이 황폐해 있었”고, “우뚝 솟은 것은 이무기의 머리를 지고 있는 거북이 받침 위에 놓인 새김돌로 덕 있는 선사의 행적을 새긴 것이고, 높이 서 있는 것은 금칠한 불상으로 신령한 빛을 비추고 서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었던 것을 정진대사가 주석하게 되어 크게 다시 일으켰다. 그러나 그 후 임진왜란때 큰 불이 나서 극락전을 빼고 모두 불탔고, 그뒤에도 1907년에 대웅전에 불이 나는 등 여러 번 화재가 나 지금 남은 당우들에서는 옛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1992년에 중창한 대웅보전과 금색전․조사전․극락전 등의 당우와 몇채의 요사채만 해도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조화를 갖추고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지속되고 있는 불사는 아늑하고 조용했던 절집의 모습을 자꾸 변질시키고 있어서 안타깝다. 특히 최근에 얹은 새 기와들은 너무 깔끔해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집을 지은 뒤 약 150년에서 200년쯤 지나서 재목이나 기와를 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20년마다 기와를 갈지 않으면 부서져 나갈 만큼 근기가 없다고 한다. 이런 기와를 보노라면 개발을 내세우며 무엇이든 ‘빨리 빨리’ 해치웠던 성급한 산업화 시대의 후유증을 보는 듯하다.
근래에 지은 이런 못난 건물들 사이에서도 유서 깊은 유물․유적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봉암사의 역사가 만만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금색전 앞쪽에 서 있는 잘생긴 삼층석탑은 창건 당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보이며, 대웅보전 앞마당에 양쪽으로 늘어선 상당한 크기의 노주석도 그 속에 깃든 시간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대웅보전 서편에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인 지증대사 적조탑과 그 탑비가 보호각 안에 모셔져 있으며, 절의 동쪽 산기슭에는 고려 초에 절을 크게 중창한 정진대사의 부도와 비가 남아 있다. 또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백운대로 가는 계곡 옆의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도 봉암사의 유서 깊음을 보여주는 데 한몫 하고 있다.
목수현(직지성보박물관 학예실장)
찬자는 최치원(崔致遠)이며, 서자 및 각자는 분황사(芬皇寺) 석혜강(釋慧江)이다.
이 비문은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서 그 가운데 가장 늦은 진성왕 7년(893) 무렵에 찬술되었다. 이 비문은 신라불교사를 3기로 시기구분하고 있는데, 제3기에 관한 서술은 일종의 신라하대 선종사에 해당한다. 특히 도헌은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신라 하대에 중국에서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하는 남종선과는 구분된다. 그리고 주인공인 도헌(道憲) 이외에 당시 활약한 상당수의 선종 승려 이름을 전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비문은 신라시대 선종사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도헌의 행적을 열 두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형식은 열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한 최치원 자신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함께 이 비문이 갖는 특색이다.
다음 카페 <갤러리 번>의 세석평전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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