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 무상선사/ 박정진의 한국의 차맥

2013. 10. 1. 12:15차 이야기

 

 

 

박정진의 한국의 차맥  정중무상선사

 

   

[박정진의 차맥]〈23〉 불교의 길, 차의 길 ① 한국 문화영웅 해외수출 1호, 정중무상선사

무상선사 ‘차를 마시는 것이 道’ 실천 앞장섰다

   

                                                                                                                                     2013 10. 1.  세계일보 기사

 

    정중무상선사(淨衆無相禪師, 684∼762)라고 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모른다. 도대체 학교교육에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불교학의 본산인 동국대학교 불교학자들 사이에도 모르거나 외면하거나 부정하기 일쑤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은 귀화승인 탓이겠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나 문서가 빈약해 그의 활동상과 업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사천성 대자사에 모셔진 무상선사(無相禪師) 영정 앞에서 차를 올리는 한국의 차인들.

 

    그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둔황문서의 발굴 덕이다. 여기서 그의 ‘오경전’(五更傳)이 세상에 빛을 본 때문이다. 그는 중국은 물론 티베트에까지 영향을 미친 동아시아 최고의 선승으로 점차 자리 잡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동아시아 선종의 뿌리 같은 존재로 그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선종의 초조인 달마(達磨) 이후 최고의 중흥조라고 칭송을 받는 마조(馬祖), 그 마조의 스승이 무상이었다면 동아시아 선종사는 실은 한국에 큰 빚을 진 셈이다. 신라의 구산선문은 실은 무상의 정중종이 제자들에 의해 금의환향하여 돌아온 셈이다.

   무상의 정중종은 한국 사상사가 이룬 최초의 국제적 브랜드인 것이다. 무상은 1200여 년 만에 빛을 보았지만 아직도 국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학자들이 전공의 벽에 갇힌 점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학문적 사대주의 때문이다. 한국인은 사대하는 것이 문화인이 되는 길이고, 정통이 되는 길이라고, 학문적 권력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면 무시하는 자기부정의 심리를 가지고 있다.

   무상의 공적이 과연 그렇게 큰 것인가. 예컨대 조계종 승려들은 무상이 육조혜능(慧能)을 능가한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육조 혜능은 선종사에서 태산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산을 넘는 존재로 무상이 부각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무상선사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한국 불교의 과제이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로도 의미심장하다.

   신라의 불교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후 견당 승려들을 배출하고, 원측(圓測, 612∼696)을 필두로 하여 기라성 같은 인물을 낳았고, 마침내 원효(元曉, 617∼686), 의상(義湘, 625∼702)에 이르러 토착불교의 꽃을 피운다. 원효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세계적 승려가 되는 위업을 이루어 한국불교의 자생적 자존심을 세웠고, 의상은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신라불교를 세계적 보편성의 지평에 올라서게 함으로써 완전히 국제화에 성공한다.

   원효와 의상으로 한국불교는 한국적 특수성과 국제적 보편성의 통합을 획득하고, 이러한 선배들의 업적 끝에 최초로 한국 불교의 위용을 중국 대륙에 드러낸 인물이 바로 김화상(金和尙)이라고 불리는 무상(無相, 684∼762)이고, 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칭송되는 김지장(地藏, 696∼794), 즉 김교각(金敎覺)이다. 무상과 김지장은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 대륙의 동서에서 신라불교의 수준을 뽐냈다. 이에 국제적 자신을 얻는 혜초(慧超, 704∼787)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세계적 인도순례기를 남긴다.

   최근에 경제성장과 더불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신감을 보이지만, 아직도 자긍심과 주체성을 가지기에는 역부족이다. 주체성이라는 것이 말로만, 이데올로기로만 떠들어댄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성이라는 것은 문화적으로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의 물심 양면에서 나름대로 축적된 볼륨, 문화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중국 강서성 동림사 나한전에 모셔진 무상공존자(無相空尊者). 팻말에 455라는 숫자가 보인다.

  

 

    ‘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라는 대열에 가장 먼저 선 인물이 바로 정중무상선사이다. 정중무상선사는 지금 중국의 오백나한의 455번째 무상공존자(無相空尊者)로, 나한전이나 조사선에 당당히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불교연구가 최석환씨에 의해 발견됐다.

    최씨는 중국 전역을 답사하다가 오백나한에 관한 기록인 천녕사(天寧寺) 석굴본 ‘오백나한도’를 보다가 우연히 455번째로 무상공존자가 들어 있음을 확인했다. 2001년 8월이었다. 이는 일종의 천우신조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지만 자나 깨나 무상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던 그에게 무상선사는 오백나한도에서 깨우쳐준 셈이다.

    그는 즉시 사천성(四川省)의 여러 사찰 중에서 마조가 출가한 절인 나한사를 찾아 눈으로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나한사의 한 스님이 문을 반쯤 열자 밖의 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밝아졌다. 나한당 안을 걷다가 오백나한 중 455번째에서 멈추었다. 무상공존자였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분명 신라인 무상 선사였다. 왜 1000년간 조사당에 감춰져 있었을까.”

    그는 나한사를 비롯하여 사천의 공죽사, 그리고 여행일정에 잡혀 있던 항주의 영은사에서도 확인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쾌재를 불렀다. 그동안의 온갖 고초와 난관이 눈 녹듯 녹고 순간 열락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무상공존자가 오백나한전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2001년 10월 한국의 여러 매체에 대서특필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무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던 학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 오백나한에는 한국 조사선(祖師禪)이 그토록 섬기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그의 제자라고 섬기는 마조(馬祖道一, 709∼788)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백나한에 포함된 우리가 아는 인물은 초조인 달마(達磨)와 무상뿐이다.

    일본학자들은 무상선사의 존재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클로즈업하면 한중일 불교사에서 일본의 위치가 후퇴할 것을 우려하여 감췄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국제선문화연구소장 오키모토 가쓰미 교수의 “일본과 중국 선학계가 영원히 무상을 지하창고 속에 매몰시켜버리기를 바랐습니다”라는 말은 중국과 일본의 학자가 공모하여 무상을 매장시켜버리고 싶은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도도한 진리는 언젠가는 햇빛을 보게 마련이다.

    무상선사가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 40여 년 전이다. 1979년 9월 4일 대한민국학술원 주최 ‘제5회 국제학술강연회’에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의 중국인 란윈화 교수가 둔황에서 발견된 ‘무상오경전’을 소개하면서 ‘무상의 무념철학’(mu-sang and his philosophy of no thought)을 발표하면서였다. 그는 당시 중국 후스(胡適, 1891∼1962) 박사의 뒤를 이어 무상을 연구 중이었다.

   염 교수가 공개한 ‘무상오경전’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둔황문서 중 스테인(stein) 컬렉션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가로, 세로 27㎝의 정방향 한지 11행(각 행 15∼16)이었다. 오경전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당시 염 박사의 해독에 따르면 무상오경전은 김화상의 ‘삼구(三句)사상’인 무억(無憶), 무념(無念), 막망(莫妄)을 오경(五更)의 시간에 따라 1시간 단위로 풀어낸 게송이었다. 그 후 무상은 또다시 국내 학계의 게으름과 보수적 시각으로 다시 10여 년간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불교사를 뒤엎고도 남을 역사적 사실을 되살린 것은 당시 창간과 더불어 새 정신을 담는 신문으로 발돋움하던 세계일보가 연세대 서여(西餘) 민영규(閔泳圭) 교수를 중심으로 ‘무상발굴팀’을 구성하고, 현지답사 결과로 ‘촉도장정(蜀道長征)’ ‘사천강단’(四川講壇)이라는 제하의 연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민 박사는 당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연세 국학학맥을 잇는 원로학자로 필생의 작업으로 1954년 12월 하버드 대학의 흥업 선생 댁에서 처음 만나 후스 박사로부터 전해들은 무상선사에 대한 연구와 함께 중국 남종선의 법계조작을 밝히려는 야심찬 계획을 하였던 것이다.

    민 교수는 현지조사를 통해 선종의 중흥조로 알려진 마조(馬祖)가 무상의 제자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동아시아 선종사에 한국의 역할을 새롭게 자리매김할 의도였다. 무상선사의 발굴에 무엇보다도 세계일보의 공적은 크다.

    당시 세계일보 문화부 차장이자 학술팀장으로 있었던 필자는 한양대학교 강사로 문화인류학을 강의했는데 같은 과 조흥윤(趙興允) 교수가 어느 날 서여 선생의 야심찬 계획을 소개하면서 새로 창간한 신문사인 세계일보에서 발굴팀을 구성하고 재정적 지원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한국과 중국 선종사를 다시 써야 할 만한 큰 연구테마가 있다’는 제안은 당시 학술팀장이던 필자를 흥분시켰다.

    이 제안은 당시 문화부장으로 있던 김징자(金澄子) 부국장에게 전달되고, 평소에 불교에 관심이 많던 김 부국장이 경영진을 설득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탐사르포의 제목은 ‘촉도장정’이었다. 촉도장정이 신문에 처음 나가자 불교계는 물론 여론을 떠들썩하게 했다. 서울의 몇몇 경쟁사들은 부러움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시 중국과 수교도 안 된 상태에서 많은 경비와 모험이 요구되는 언론사의 대기획이었다.

    세계일보에 연재된 ‘촉도장정’(세계일보 1990년 11월 28일∼1991년 1월 9일)과 그에 이은 ‘사천강단’(세계일보 1991년 1월 16일∼2월 27일)은 한국 불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상 스님과 정중종은 한동안 불교계에 두고두고 회자하면서 화제가 됐다.

    정중종(淨衆宗)은 신라출신의 정중무상 김화상이 당에 유학하여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두타행으로 새롭게 형성한 사천지방의 선종이다. 아시다시피 무상은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셋째 아들이었으며 당나라로 건너가서 장안에 도착(728)한 뒤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다가 다시 촉(蜀) 땅 사천성의 덕순사(德純寺)로 간다. 거기서 스승 처적(處寂)으로부터 무상이라는 법명을 받고 법통을 계승하게 된다. 그 후 지선(智詵, 609∼702)-처적(處寂, 669∼736)-무상(685∼762)으로 이어지는 사천지방의 선종은 당시에 중국의 정통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무상의 위대성은 사천지방의 검남종을 중국 전역에 보다 보편화하여 정중종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선종의 깨달음이 바로 평상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한 인물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차의 나라 중국에 진입하자마자 일상화된 차생활을 보고, 차야말로 선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매개, 영매임을 깨닫는다. 그의 깨달음은 마조로 이어져 북종선과의 경쟁에서 남종선이 헤게모니를 쥐게 하는 한편 종교적 심화와 대중적 지지를 얻게 한다.

    무상의 염불선은 정토종의 염불이 아니라 선종으로 나아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선이다. 이는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念佛是誰)라고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염불하는 자신을 화두로 삼는 방법이다. 여기엔 반드시 인성염불(引聲念佛)을 필요로 한다.

   인성염불은 내면의 소리(內耳聲)와 외면의 소리(外耳聲)를 구분하는 것으로 소리를 내뱉지 않고 관조해 들어가는 정통수행법이다. 일기(一氣, 一聲)의 숨을 전부 다 내쉬게 한 뒤에 목소리가 끊어지고 한 생각이 끊어졌을 때에 삼구(三句:無憶, 無念, 莫妄)를 설한다. 삼구는 달마조사로부터 전해오는 총지문(總持門)이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염불선은 부처님의 힘을 빌리는 타력신앙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자력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결정적 역할을 한 선이었다. 무상은 염불선으로 선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무상의 인성염불과 염불선은 그의 스승인 검남종의 선당(詵唐:智詵과 處寂) 두 화상이 가르친 바가 아니라는 주장에서도 그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무상은 염불선으로 염불에 의한 간화선을 개척하는 한편 선차지법(禪茶之法)으로 깨달음이라는 것도 실은 평상심에서 이루어짐을 역설하였다. 선차지법은 ‘차 마시기’와 ‘도’가 하나라는 것으로 마조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의 조주(趙州)의 ‘끽다거(喫茶去:차나 한 잔 하게)의 선구적 실천이었다. 중국 땅에서 차를 마시는 행위보다 더 평상심인 것은 없었다. 이는 우리가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세계일보 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