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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세력 확장을 위하여 유럽을 침공하였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크게 이겼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훗날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요나 예언자는 적국의 수도인 니네베에서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지만 니네베의 반대 방향에 있는 타르시스로 도망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나를 극적으로 붙잡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한 율법 교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제시하신다.
이에 율법 교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곧 자기 스스로가 먼저 이웃이 되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고 이르신다(복음).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려고 길을 나섰다.>
▥ 요나 예언서의 시작입니다. 1,1─2,1.11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길을 나서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뱃삯을 치르고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그러자 뱃사람들이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배를 가볍게 하려고 안에 있는 짐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그런데 배 밑창으로 내려간 요나는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선장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자,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닥쳤는지 알아봅시다.”
그래서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다.
그러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재앙이 닥쳤는지 말해 보시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느 민족이오?”
요나는 그들에게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뭍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요나가 그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그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지자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지겠소?”
요나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이 큰 폭풍이 당신들에게
들이닥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었다.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주님, 당신께서는 뜻하신 대로 이 일을 하셨으니,
저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
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
주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분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사랑이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애써서 고기를 잡아 보려고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루카 5,1-11 참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 그 안에 새겨진 온갖 슬픔과 고독,
분노, 죄악,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깊은 데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그를 사랑하려고 애써도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깊은 데로 가시어 그물을 치시는 것입니다.
눈먼 이의 깊은 곳인 두 눈을 어루만져 주시고,
귀먹은 이에게는 그의 귀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으십니다.
나병 환자를 위해서는 그의 피부를 매만지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 모두의 깊은 곳,
곧 십자가상의 죽음에까지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사마리아인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쳤습니다.
그는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곧 강도를 만난 사람이 느꼈을 당황과 두려움, 절망, 분노,
가족에 대한 걱정, 강도에 대한 원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한 여러 가지 그물을 칩니다.
그 반면, 사제와 레위인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출처 매일 미사-
♬ 예수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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