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다구 / 칠불사 禪拳道 다도의 향기 에서

2013. 11. 2. 01:21차 이야기

 

 

 

 

 

      

한국의 다구

 

 

1.풍로

 

    차 끓이는 풍로는 동철로 주조하는데, 그 모양이 옛 솥 모양이니, 풍로에는 세 발이 달렸고, 그 발에는 옛 글로 21개의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동철은 구리쇠다. 붉은 빛에 광택이 나는 이 금속은 전성(展性)과 연성(延性)이 풍부하며 열전도율이 좋은 도체(導體)이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은.주(殷周)시대 이래 여러 가지 동기(銅器)들을 만드는 것이 발달해 왔다. 술항아리, 술잔을 비롯 해서, 거울, 칼, 북도 만들었으며, 부처도 구리오 만들었다. 차 끓이는 풍로를 구리쇠로 만든 것도, 구리쇠의 특성을 잘 이해했고, 그만큼 동기의 발달이 컸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그 모양은 옛 솥 같은데, 두께는 3푼으로 하고, 가장자리 넓이는 9푼으로 하였으며, 솥발, 즉 정족(鼎足)은 3개인데, 한 발에는 ‘감상손하리우중(坎上巽下離于中)’의 7글자를 새기고, 또 한 발에는 ‘체균오행거백질(體均五行去百疾)’의 7글자를 새겼으며, 다른 한 발에는 ‘성당멸호명년주(聖唐滅胡明年鑄)’의 7글자를 새겨서, 모두 21개의 글자를 새겼다. 21개 글자 중 감 ‧ 손 ‧ 리(坎巽離)는 각각 물 ‧ 바람 ‧ 불을 상징하니, 바람이 불을 일으켜 물을 끓게 한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며, ‘체균오행거백질(體均五行去百疾)’이란 인체가 균형 잡혀 오행이라는 우주 운행 법칙과 인체 생리의 정상 운행의 다섯 패턴에 어긋남이 없을 것을 의미한다. 차의 약효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성당멸호명년주(聖唐滅胡明年鑄)’란 당나라의 극성기에 동으로는 만주, 연해주, 사할린 일대를 손에 넣고, 서로는 토번(吐藩)을 토벌했으며, 남으로는 인도차이나로 손을 뻗쳐 교주(交州)를 거점으로 인도와 남양제도에까지 위엄을 떨쳤으며, 북으로는 동돌궐(東突厥)을 쳐 없애고 철륵(鐵勒)을 토벌했기 때문에, 성당멸호(聖唐滅胡)라는 문귀를 새기고 풍로를 주조한 것을 말한다. <다경(茶經)>의 저자 육우(陸羽)가 당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에서 당시으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3개의 솥발 사이에는 3개의 구멍을 만들었는데, 그중 밑의 한 구멍은 바람을 통하고 재를 홀리는 곳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 구멍마다에 두 글자씩 세 구멍에 여섯 글자를 또 새겼으니, 즉 한 곳에는 이공(伊公), 또 한 곳에는 갱륙(羹陸), 다른 한 곳에는 씨다(氏茶)라고 새겼다. 소위 ‘이공갱륙씨다(伊公羹陸氏茶)’의 여섯 글자가 된다. 이공(伊公)은 맹자(孟子)마저 성현으로 꼽을 정도로 어질고 현명한 은(殷)나라 재상이었던 이윤(伊尹)을 말한다. 이름이 지(摯)로서, 그가 유신씨(有辛氏)의 들에서 밭을 갈 때 탕왕(湯王)이 세 번이나 찾아와, 마치 훗날 유비가 제갈량을 예로써 초빙하듯 그렇게 그를 불러들여, 걸왕(桀王)을 정복하고 천하통일을 하게 되었으므로, 그 공로를 인정하여 아형(阿衡)의 벼슬을 주어 우대하였다. 그는 현상(現相)으로서 맡은 바에 충실하고, 백살에 죽었을 때는 천자의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로 한다. 그는 처음 솥과 도마를 맡아 오미(五味)를 조리하는 사람, 곧 요리사로서 탕왕에 간택된 사람이기 때문에, 솥 모양의 차 끓이는 풍로에 그의 이름을 새기계 된 것이다.

 

    아울러 솥 내부에 볼록하게 높은 체선(滯船)을 그어 세 등분해서, 각각 꿩, 표범, 물고기를 표시했으니, 꿩은 불새요 리(籬)에 해당하고, 표범은 바람 짐승이료 손(巽)에 해당하며, 물고기는 물 것이요 감(坎)에 해당하니, 곧 불 ‧ 바람 ‧ 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다시 말해 이는 바람으로 불을 일으키고 불로 물을 덥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회승작삼족철판주지(灰承作三足鐵板鑄之)’라 하였듯이, 재받침 역시 삼발의 쇳대로 만들어졌다.

 

 

2.숯광주리

 

   숯광주리는 대나무로 짠다. 혹은 등나무로써 거형(筥形)의 목훤(木煊)을 만든다. 대나무로 짠 숯광주리는 대개 높이 한자 두치, 직경의 넓이 일곱치로 하며, 등나무로 짤 때는 여섯 군대에 둥근 눈을 내고, 협구(篋口)는 양(鑲:쇠갈고리)으로 잠근다.

 

 

3.부삽

 

    숯 뜨는 부삽, 즉 탄과(炭檛)라 불리는 부손은 철로써 육각이 지게 만들되, 총 길이는 한자로 하고, 끝을 뾰족하게 만들며, 가운데는 넓게 하여 숯이 잘담기게 하고, 손잡이는 가늘게 하며, 손잡이 머리에는 한 개의 작은 환(鐶:고리)을 매달아 꾸민다.

한편 화로에 꽂아 두고 불덩이를 집는 데 쓰는 부젓가락을 화협(火莢)이라 하는데, 일명 화저(火箸)라 하며, 길이는 한자 세치로 하고, 둥글고 곧게 만들며, 그 끝은 평평하게 한다.주로 철이나 숙동(熟銅)으로 만든다.

 

 

4.솥

 

    차 끓이는 가마솥은 생철로 만드는데, 이것은 야장(冶匠:대장장이)의 이른바 급철이라는 것이다.

즉 생철은 급철, 또는 수철(水鐵), 주철(鑄鐵), 선철(銑鐵)이라 불리는 무쇠를 말하므로, 숙철(熟鐵)이라고 불리는 시우쇠와는 다르다. 1.7 ~ 7%의 탄소가 함유되어 있고, 그밖에 규소, 망간 따위가 들어 있는데, 빛이 검고 바탕이 연하며, 강철보다 녹기 쉬우므로 주조하기 편해서 솥같은 것을 만드는 데 쓰이는데, 잘 닳지 않고 잘 깎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물론 쇠솥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차를 끓이는 데 구리, 운, 금, 흙 등도 다 쓰인다. 쇠나 구리는 녹이 잘 슬기 때문에 질솥이나 사기솥을 쓰기도 하며, 사치스럽게 은이나 금을 재료로 응용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솥 안에서 물이 끓을 때 가장 청아한 소리가 나면서 맑고 운치 있는 감성을 자아내는 용기를 우선으로 한다.

 

 

    부, 쉽게 말해서 차정(茶鼎)을 생철로 만들 때는 연이주지내모토이외모사 토활어내 이기마척사삽어외흡기화염(鍊而鑄之內模土而外模沙 土滑於內 易其摩滌沙澁於外吸其火焰)의 방법을 택한다고 하였다.

   즉 주물할 때 안에는 흙을, 밖에는 모래를 덮는데, 이것은 흙이 내부를 윤활하게 해서 마척을 쉽게 하려함이요, 모래가 외부를 조잡하게 해서 화염을 흡수하게 하려 함이다.

方其耳以正令也 방기이이정령야

廣其緣以務遠也 광기연이무원야

長其臍以守中也 장기제이수중야

    솥의 모양은 솥의 귀를 모나게 하고, 가장자리는 넓게 하며, 배꼽은 깊게 한다. 즉 솥바닥 가운데는 좁고 깊게 하며, 가장자리는 넓고 퍼지게 만든다. 그 이유는 정령(正令) ‧ 무원(務遠) ‧ 수중(守中)이라는 차의 철학적 법도를 실천하고자 함이다.

臍長則沸中 제장즉비중

沸中則末易楊 비중즉말이양

末易楊則其味淳也 말이양즉기미순야

    그렇다고 솥의 모양을 단순히 철학적 실천 입장에서만 얽매여 주조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실용가치에 큰 비중을 두고 만든다. 즉 배꼽을 깊고 좁게 하면 솥의 물이 가운데에서 팔팔 끓는다. 불과 가장 가까운 솥의 바닥 중앙인 배꼽 부위에는 적은 물이 있기 때문에 쉽게, 그리고 빠르게, 완전하게 팔팔 끓는다. 그러면 넓고, 퍼진 솥의 가장자리 물이 쉽게 비양(飛揚)거리며 들날린다. 이렇게 가장자리 물이 비양거리며 들날리면, 그 물맛이 매우 순수해진다. 그래서 수중(守中)으로써 무원(務遠)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한편 솥을 받치는 상을 교상(交床)이라고 하는데, ‘교상이 십자교지 완중영허이지부야(交床以 十字交之 剜中令虛以支부也)’ 다시 말해 교상은 십자(十字)로써 교차하며 가운데를 파내어 비게 하여 솥을 받치게 한다.

 

 

5.다기의 종류

 

⑴협(夾)

    협은 작은 청죽으로 만드는데 길이는 한자 두치로 하고, 한치마다 마디가 있게 하여, 마디 이상은 쪼갠다. 만들 때 가는 대가치를 불에 구어 진이 나도록 한다. 협은 자차(炙茶)의 도구다. 불로써 진이 나게 하는 것은 그 향기를 빌어서 차맛을 더하게 하려 함이다. 청죽 대신에 정철(精鐵)‧숙동(熟銅)을 쓰기도 한다.

 

⑵지낭(紙囊)

   지낭은 섬등지의 희고 두터운 것으로 겉을 기워서 만든다. 지낭은 자차(炙茶)를 정장하는 도구이며, 종이 주머니를 두텁게 만드는 것은 차의 향기를 새지 않게 하려 함이다.

 

⑶연

    연은 귤나무로 만든다. 혹은 배‧뽕‧오동‧산뽕나무로 만들기도 하지만 귤나무로 만들기도 하지만 귤나무로 만든 것보다 못하다. 연의 내부는 둥글게 하여 운행이 자유롭게 하고, 밖은 모나게 하여 연이 기울거나 위태로와지는 것을 막는다. 연의 내부를 운행할 바퀴는 가운데가 모나고 손잡이는 둥글다. 연이란 자차(炙茶)를 가루내는 도구다. 그리고 그 가루를 연에서 털어내는 진구(塵具)를 불말(拂末)이라 하며 새털로써 만든다.

 

⑷나합(羅合)

    나합은 큰 대나무로 만드는데 쪼개고 휘어서 틀을 짓고 비단으로 옷을 입힌다. 그 합은 대나무 마디로써 만든다. 혹은 삼목(杉木)을 휘어서 만들고 옻칠을 한다. 나합은 자차를 연에 갈아 가루낸 것을 체로 쳐서 합(合)으로써 덮고, 그 가루를 저장하는 도구다.

 

⑸칙(則)

    칙은 나합의 합 안에 넣어두는데, 조개껍질로 만든다. 혹은 동(銅)‧철(鐵)‧죽(竹)등으로도 만들며, 그 형상은 숟가락과 비슷하게 하고, 크기는 한치 정방형(正方形)으로 만든다. 그래서 방촌비(方寸匕)라 한다. 1방촌비는 현대의 약 2.74㎖에 해당하며, 이 숟가락으로 차 가루를 뜨면 약 1g 조금 넘는다. 대략 물 한되에 1방촌비, 즉 1칙을 넣는다. 만약 엷은 맛을 좋아하면 조금 덜고, 짙은 맛을 좋아하면 조금 더한다. 까닭에 방촌비라고 불리는 계량 숟가락을 칙이라 명명한 것이다. 칙이란 헤아린다 ‧ 표준한다 ‧ 제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⑹수방(水防)

    물통인 수방은 그 안팎을 꽉 붙여서 만들고 겉에 옻칠을 하되, 물 한 말을 담을 수 있게 한다. 재료는 목질이 조밀(稠密)한 괴목(槐木)이나 추자를 주로 한다.

 

⑺녹수낭

    녹수낭은 물거르는 주머니인데, 그 곽은 생동(生銅)으로 만든다. 숙동(熟銅)이나 철(鐵)은 몰에 젖으면 이끼가 끼거나 녹이 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머니는 청죽(靑竹)으로 짜서 돌돌말고, 푸른 비단을 재단하여 깁고 비취색 명주로 꿰메어 잇고, 또 녹유낭을 만들어 저장한다.

 

⑻표(瓢)

    표는 물바가지인데, 회표라 하니, 그 까닭은 북두칠성 모양의 주걱을 닮았기 때문이며, 입은 넓고 아래는 얇으며 자루는 짧게 생겼다. 박을 쪼개어 만들거나, 혹은 간목(刊木)하여 만드는데, 나무는 주로 배나무를 사용했다.

 

⑼죽협(竹筴)

    죽협은 대젓가락인데, 때로 복숭아나무 ‧ 버드나무 ‧ 포규목으로 만둘고, 혹은 심지 들어 있는 감나무로 만들며, 길 한자의 죽협 끝머리 뒤쪽에는 은으로 감싼다.

 

⑽차궤(鹺簋)

    차궤는 자기로 만드며, 그 모양이 합을 닮았는데, 혹 병같기도 하고, 혹 잔같기도 핟. 그 게(揭)는 대나무로 만들며 길이는 네치 한푼, 넓이는 구푼이다. 차궤란 염화(鹽化)를 저장하는 도구이며, 게란 차궤에 쓰이는 막대기를 말한다.

 

⑾숙우(熟盂)

    숙우는 숙수(熟水)를 저장하는 그릇이니, 즉 탕(湯)을 식히는 도구로서 자기나 사기로 만들며, 두 되들이로 한다.

 

⑿완(盌)

    완은 제조지에 따라 다르다. 월주->정주->무주->악주->수주->홍주의 순으로 우열을 가린다.그러니까 월주의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완의 입과 입술부리는 말리지 않고, 밑은 말리며 얕아서 반 되 이하를 수용한다.

 

⒀분

    분은 완을 담는 삼태로서, 휜 버들을 엮어 짜며, 10개의 완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든다.

 

⒁찰(札)

    찰은 솥 씻는 솔로서, 병려나무 껍질을 모아 산수유 나무를 끼워 엮는다.

 

 

 

 

차의 효능

 

*녹차의 해독작용(니코틴 해독, 식중독 예방)

 

    찻잎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찻잎의 산지에 따라, 채취 시기에 따라, 그리고 저장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맛이 다르고, 향이 다르며, 약효가 다르다.

<다경>에는 음산파곡(陰山坡谷)에서 자란 찻잎은 응체의 성질이 있어서 오히려 이를 끓여 마시면 가질(痂疾)이라는 질병을 앓게 된다고 하였다. 가질이란 복부에 응어리가 형성되는 질병으로, 쉽게 표현하면 종양성(腫瘍性) 질병이다.

   그러면 어째서 음산파곡의 찻잎은 이런 질병을 일으키는 것인가? 전예형(田藝)의 자천소품(煮泉小品)에 으하면 지리적으로 음산파곡같이 음침한 지역은 장기가 서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기란 전염성 열성질환을 야기하는 사기(邪氣)다. 과연 장기가 서려있는 지역이 있는 것일까? 그야 물론이다. 제갈공명이 남만에 원정가서 맹획을 뒤쫓아 갔을 때도 수많은 군사들이 험산준령 음산한 곳에 있는 물을 마시고 벙어리가 되었으며, 그물에 목욕하고 피부질환을 일으켰다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각종 다서(茶書)에도「육안차(六安茶)는 맛에서 뛰어나고 몽산차(蒙山茶)는 약효로써 뛰어나다」고 한 것 역시 산지에 따라 찻잎의 색‧향‧맛, 그리고 약효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예라 하겠다.

    찻잎은 일찍 딸수록 좋고 늦게 딸수록 품질이 떨어진다. 장원(張源)의 <다록(茶錄)>에는 묵은 차는 색, 향, 맛에서 모두 떨어진다고 했는데, 이는 찻잎의 저장시간의 경과에 따라 품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애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용할때는 갓 딴 찻잎보다 묵은 찻잎을 쓴다. 이를 석차(腊茶)라고 한다.

그렇다면 찻잎에는 어떤 약효가 있을까? 한, 두가지 약효만 있는 게 아닌데, 그중에서 해독작용이 우수한 것을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소련 카즈츄예프는 차의 카테친(Catechin)이 방사성 동위원소Sr90을 골수에 도달하기 전에 제거시켜 준다고 했다. 이 물질이 골수에 미치면 골수가 독성에 파괴되어 조혈(造血)능력이 떨어지고 골수암을 유발시킬 수도 있는데 차의 카테친이 이물질의 해독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술 더떠서 일본 시즈오가약대의 하야시에 이이치는 창의 카테친이 카드뮴이나 염화제 2수소 등과 결합하여 장에서의 흡수를 막는다고 했다.

결국 차가 있는 한, 이들 독성 물질들은 장을 통하여 흡수될 수 없으며, 그런 까닭에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킬 확률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시즈오카의 오카다 후미오는 카테친이 담배 니코틴을 해독한다고 했다. 또 다른 보고에 따르면 차는 식중독까지 예방하는데 효과적이고 한다.

차의 해독장용이 이렇게 뛰어나다면 요새처럼 공해에 시달리고, 오염된 공기는 물론 오염된 수질마저 어쩔 수 없이 마셔야하는 우리들에게 더할 수 없는 복음이 아니겠는가! 과음, 인스턴트 식품의 범람, 그리고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필수불가결의 음료라 할 수 있겠다.

 

 

고려의 차

 

    고려 초, 건국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는 적절한 보상이 돌아갔다. 물론 이들 중에는 요절했기 때문에 상류계급으로 행세 해보지 못했거나 큰 호강을 누리지 못한 자들도 있어지만, 신라에서 들어온 최승로(崔承老)‧최량(崔亮)등은 귀족계급으로 호강을 누렸다. 그래서 최승로가 죽었을 때 하사한 것은 포(布) ‧ 면(麵) ‧ 경미 ‧ 유향(乳香)을 비롯하여 뇌원차(腦原茶) 200각(角:약1홉), 대엽차(大葉茶) 10근이었으며, 최량에게는 보리‧쌀 및 뇌원차 1천 각이 하사되었다. 특히 뇌원차는 당시 80세 이상의 노인으로서 상류층에 속한 분들에게 하사하던 차였다. 상류층에는 쌀과 시초장(柴草場)까지 주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으나, <형법지(形法志)>에 의하면 국내 물건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어 외국품을 쓰고 살았다고 한다. 외국과의 거래때나, 상류층에서는 철전(鐵錢)을 사용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토산물로 바꾸어 가게 했다. 그러나 술‧차 등을 구입할 때는 철전을 사용했다. 차 마시는 풍속은 궁정을 중심으로 상류층에서만 성행했기 때문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이들은 토산차가 쓰고 떫다고 해서 중국에서 납차(臘茶)와 용봉차(龍鳳茶)등을 수입해서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치가 지나치게 성행하자 국법으로 외국차를 제지했으나, 고려말부터 이조 때에는 이 국법을 어기는 자들이 많았다.

 

 

    고려에서는 연동‧팔관이 연중행사로 행해졌다.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고 팔관은 천령(天靈) ‧ 오악(五岳) ‧ 명산대천 ‧ 용신(龍紳)을 섬기는 행사였다. 등산(燈山)이라 하여 등을 한군데 산같이 모아 달기도 했으며, 화수(花樹)라 햐여 큰 나무에 등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음식을 장만하여 흥청거렸고 밤새도록 음악이 연주되었다. 피리소리, 장구소리, 징소리, 태징소리, 그야말로 요란스레 음악이 울렸다. 아이들은 종이를 잘라 큰 장대 위에 꽂고 이를 깃발같이 만들어 성내 거리로 돌아다니며 돈을 거두어들였다. 이것이 호기희였다. 물론 이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차였다.

고려는 신라 못잖은 차 국가였다. 완의 탄신일에는 전의사(典儀寺)에서 왕에게 차와 과자 등속을 바쳤으며, 왕의 의장(儀仗)속에 행로다담군(行爐茶擔軍)이 있어 향로와 차 도구를 가지고 가는 의식도 있었고, 송나라 사신에게 차를 대접할 대는 그들이 묵고 있는 순천과(順天館)마당에 백탄으로 숯불을 피우고 소위 차박사(茶博士)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끓였다, 궁내에는 다방(茶房)이 있어서 가장 잘 생기고 신분이 높은 자를 선발해 그긋에 두었다. 고려의 공녀(貢女)로 중국에 들어가 황후 자리까지 올랐던 기황후(奇皇后)도 처음에는 궁중에서 차를 나르는 여인이었다.

 

 

다구

 

    <스무고개>로 알아맞추기하는 놀이가 있듯이, 차를 10번 마셔보고 알아맞추거나 50번 맛보고 그 차의 산지를 알아맞추는 따위의 놀이가 일본에 있었다고 한다. 이를 10복차(十服茶)‧50복차‧100복차 따위로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도공들을 끌고가 일본의 다구(茶具)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외었다. 구다니 ‧ 아리다 ‧ 이마리의 도기들이 이를 계기로 발전했던 것이다. 도요도미의 휘하 장그들은 땅을 포상 받기 보다는 찻단지 한 개를 받는 것을 더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쓰마구이 등 8개의 도요(陶窯)를 조선 도공에 의해 흥성시키게 했으며, 도요도미는 리큐를 특히 우대했다는 애기까지 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여러 다구들이 있었다. 신라 때 이미 돌솥이 있어 떡차를 끓였으며, 떡차를 빻는 다구와 돌풍로 역할을 하는 다조등이 있었다. 여기서 비롯해서 우리의 자랑인 청자와 백자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고려 때 일이다. 서백사(西伯寺)승통(僧統)시의(時義)는 다도에 밝고 차맛을 사랑한 사람이었는데, 일찍이 귀정사(歸正寺)에 있을 때 안융(安戎) 태수가 귀정사에 있는 차 끓이는 와존강(瓦尊釭)을 빌어 가려 하였다. 승통 시의는 이 몰염치한 태수에게 시 한수를 읊어주어 크게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산승의 한 표주박 물로 된 그룻은 소용 없다만

쓸 곳이 없다고 빌려 줄까 보냐

지금 주금이 심한데

그대의 창자를 채울 물건이 없네

차탕을 만들어 그대에게 주고자 하나

몰풍류한 그대의 목에는 차가 안 들어가리

그애야말로 천지간 구복(口腹)뿐일세

 

    표주박은 보편적인 다구라 할 수 있다. <다신전>에도 “돌산에 있는 집이나 띠집에서는 그저 주석 표주박이 알맞고 또한 빛깔과 맛은 손상이 없다.”고 하였다. 일부에선 자기(磁器)를 쓰거나 은기(銀器)를 쓰기도 했다. 그래서 <다신전>에는 “은붙이란 단청 누각이나 화려한 집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검소한 다구를 사용할 것을 권했다. 다만, 구리나 쇠는 삼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찻잔은 흰 빛이 좋고 쪽빛은 버금간다고 하였다. 물론 다나라 때엔 남쪽에서는 청자를, 북쪽에서는 백자를 썼으며, 송나라 때는 흑갈색이나 짙푸른 색의 찻잔을 썼고, 명나라 때는 백색잔을 으뜸으로 여겼다. 찻물의 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라의 다도 문화

 

1)여유(餘裕)와 다도의 함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차의 역사는 유구하다. 예나 지금이나 차를 한 잔 마신다는 것은 '여유 있는 놀음‘이다보니 사람의 일상생활이 차를 한 잔 할 만큼의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또 일평생을 통해 차라는 단어를 입에 한 번 올려 보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면 차는 여유라는 것과 맥이 같을 수 있고 또 나아가서는 질 높은 생활과도 일맥해지는 것이다. 그 여유라는 정의가 애매모호하겠지만 수천만금을 갖고 있으면서도, 잠시 잠깐의 여유도 없는 자도 있고, 괴나리 봇짐 하나 둘러매고도 흰 구름과 명월과 산수를 벗하는 자즐이 있게 되니, 여유는 형이상학적인 마음이 얼마나 자신에게 자리하고 있나를 매김하는 척도가 된다.

    그래서 차를 즐겼던 다인들을 보면, 생활이 그래도 나은 귀족이나 자신을 수양하는 수도자가 아니면 여유를 찾은 도인과 선비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날도 옛날과 다름없이 역사는 돌고 도니 차한다는 사람들과 다도하는 사람들 사이에 병폐가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2)화랑다도(花郞茶道)와 풍류도(風流道)

    흔히 다사(茶史)를 설명할 때 차는 흥덕와(828) 때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종(茶種)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삼국사기(三國史記)』에 선덕왕(632-647) 때 차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는 200년 앞선다고 본다. 『통도사 사적기』에는 자장율사의 차 재배가 나타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엔 문무왕(661)때 종묘사직의 제례에 헌다(獻茶)의 기록이 보이며 신문왕(681)때는 보천(寶川)과 효명(孝明)태자가 오대산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헌다(獻茶)한 것이 보인다.

 

    삼국시대 중에는 신라의 차 기록이 많이 있다. 특히 화랑도들의 흔적에서 돌화로인 석조와 다정(茶井)이 경포대오 한송정에 보이는데 화랑들에게 심신을 닦는 다도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고려시대의 유명한 학자로서 근제(謹齊) 안축(安軸)선생은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과 「경기체가(景幾體歌)」, 그리고 「죽계별곡(竹溪別曲)」의 저자인데 선생은 한송정(寒松亭)을 도장(道場)으로 삼았던 국선(國仙)들을 부러워하고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신선은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고

푸른 솔은 불에 타서 없어졌구나.

선경(仙境)을 찾으려니 푸른 숲 그립고

옛날을 회상하며 황혼에 서 있네.

남은 것은 오직 차 끓이던 다정(茶井)뿐

의연희 돌 뿌리 옆에 그대로 있구나.

또 이곡(李穀:1298-1351)선생의 「동유기(東遊記)에도 한송정에 사선(四仙), 즉 영랑.술랑.안상.남석행들이 곳에 기록을 남겼다.

선인(仙人)은 갔어도 송정(松亭)은 남아 있고

산에 있는 부뚜막은 그대로이네.

인정(人情)은 예와 지금이 달라도 물상들은 옛 그대로다.

만약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말만 듣고 근거 없다 하였으리.

 

 

선생은 또 어느 풍년 든 해 바다에 취해 경포까지 와서는

‘호수에 술을 실어 밝은 달을 부르고/ 돌 부뚜막에 차 달이니 자연(紫煙)이 일어나네/ 호랑이보다 무서운 정치 아니면/ 이곳에 모든 사람 신선의 무리라 하리/ 옥천자(玉泉子) 칠완(七碗)의 신묘(神妙)함이 빠르기도 하여/ 어느새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어 달에 까지 이른다.’라고 읊었다. 선생은 다도의 달인이셨다.

 

 

 

고려의 다도문화

 

1)다도문화의 르네상스

    오늘날 다문화라고 말할수 있는 근간은 아무래도 고려시대의 영향이 크다. 우리의 다사(茶史)를통해 볼 때 고려는 다문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특히 말차(末茶), 즉 가루차가 성행 하였는데 그 때 사용하였던 고려 청자(靑磁)다완(茶碗)은 바로 세계적인 유산이 되었다. 왕실과 조정 그리고 민간에까지도 모든 의식 절차에는 진다(進茶)를 하였다고 외국사신으로 온 송나라의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이 증명한다.

    연회(宴會)가 있으면 연꽃 모양의 은합(銀盒)으로 차를 돌리는데 가장 마지막에 받는 이는 냉차(冷茶)를 받았다. 홍색의 다조 위에 다구(茶具)를 붉은 비단 보자기로 닾었다. 차는 하루 세 번 다탕(茶湯)으로 주었고 이를 고려인들은 다약(茶藥)이라 불렀다. 차를 잘 마시면 기뻐하고 마시지 않으면 업신여겼다.

 

 

 

                                            <칠불사 禪拳道 다도의 향기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