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차의 역사 / 찻빛마을 완정 의 글 중에서

2013. 11. 2. 01:04차 이야기

 

 

 

 

      

1. 차와 역사
 
 우리나라에서 차를 마신 역사는 멀리 고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에는 삼국 시대 이전의 고조선 시대부터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은 장백 산중에 있는 석남과(石南科) 식물의 잎으로 차를 만들었다는 백산차(白山茶)입니다. 그러나 이 차는 대용차로 다도에서 쓰이는 차, 즉 정통차는 아니었습니다. 차는 원래 우리나라 땅에 자생하던 것이 아니라 중국 또는 인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차의 전래에 관한 기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에 보면 수로왕비 허황옥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차의 전래에 관해 관심이 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즉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이 불과 열여섯 나이에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올 때인 서기 48년경, 인도에서 가져온 물품 중에 차가 포함됐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더구나 가락국의 문화가 꽃피웠던 김해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세시에는 과일, 술 그리고 차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차 전래에 관한 공식적인 최초의 문헌은 '삼국사기'입니다. 삼국사기 권 10 '흥덕와조'와 동국통감 권 11 '흥억왕조'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632~647) 때이지만 차 종자가 본격적으로 파종된 것은 흥덕왕 때(828)에 이르러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흥덕왕 3년, 대렴이 당에서 차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당나라 황제인 문종으로부터 받아 온 것을 지리산 일대에 파종해 쌍계사나 화엄사들을 중심으로 점차 전파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대를 기점으로 차나무를 적극 재배하고 제다법이나 차 의례도 발달하고 중국 다문화가 폭넓게 수용되어 우리 나라에 음다 풍속이 시작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신라시대의 차 생활
 
 신라 시대의 차 생활을 말할 때 신라 화랑(花郞)들의 차문화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차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고려시대의 학자인 이곡(李穀 : 1298~1351)의 기행문 동유기(東遊記)에는 화랑들이 사용하던 차도구가 동해 바닷가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강릉 한송정(寒松亭)에 그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화랑들은 차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서로 강하게 결속할 수 있었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예(禮)로써 화합할 수 있었습니다.이렇듯 화랑들의 수행을 돕는데 차 생활이 한 몫을 차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차 생활은 통일 신라로 이어지면서 더욱 화려한 꽃을 피우는데, 문무왕 때 김수로왕의 시제(時祭)에 차를 올린 것을 비롯해 각종 의례에 차를 흔히 썼다는 기록이 많이 발견됩니다.
 특히 불가에서는 차가 정신을 맑게 해주고 졸음을 쫓게 해주어 선(禪)을 하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하여 다도 풍습이 널리 퍼녔고 불전에 공양할 때 차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통일 신라 초기의 원효대사(617~686)를 비롯해 많은 스님들이 차를 즐겨 마시던 차인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의 차 생활
 

 신라의 차 생활이 고려 시대로 이어지면서 불교 문화의 발전과 함께 더욱 융성해 왕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국가 의식, 불교 의식에 차를 올리는 것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차는 귀중한 예물로 여겨져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흔히 하사하는 하사품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려에 와서 차의 사용이 늘어나자, 궁정에는 다방(茶房)이라고 하는 차를 공급하는 관청이 생겼고 큰 사원 주위에는 다소라고 하여 차를 생산하여 사원에 바치는 부락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차와 다기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귀족과 승려들은 앞다투어 중국의 차와 다기를 사 모으기도 했습니다.

 고려 전반에 걸쳐서 국왕과 귀족, 관리, 선비와 일반 백성들 모두 일상적으로 차를 즐겼으나 초엽에는 귀족 중심의 차문화였고, 무신난 이후 중엽부터는 주로 선비들이 차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고려의 문인들은 서로 약속하여 찻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문인들 간에는 훌륭한 찻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찻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어야 했고 않는 서열이 있었으며, 예의와 범절이 바르게 지켜졌습니다. 또한 고려의 문인들은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손수 차를 끓였고, 차를 마시어 선을 수행하고 도에 이르렀습니다. 또 차는 사람이 없어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수신하게 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매개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다점에서 돈이나 베를 주고 차를 사먹을 만큼 기호음료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고려인들의 생활 속에 차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 와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4. 조선시대의 차 생활
 

 조선 왕조가 건국되면서 차 생활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조선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쇠퇴하고 차 대신 술이 의식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차 생활 풍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일부 선승(禪僧)이나 선비들, 그리고 궁궐에서의 관례적인 제전에서 차는 그 명맥을 이어 나갔습니다.
 조선이 처음 건국되었을 때만 해도 조정과 왕실의 제도나 의례에서 고려의 음다 풍속을 잇고자 노력하였고, 선비 차인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차문화가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어 차의 품격도 떨어졌고 다시(茶時)나 다모(茶母) 등도 본래의 뜻이 없어지고 형식적으로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 말엽 다산과 신위, 추사, 초의를 중심으로 한때 차의 중흥기가 있었습니다. 이때는 차의 제다 기술도 상당히 좋아져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에는 '동차(東茶 : 우리나라 차)는 맛과 약효가 겸비된 차로서 색과 향기와 맛이 훌륭함은 육우도 인정할 것'이라고 우리 차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첫째는 불교문화와 함께 도입된 차가 조선 시대 성리학의 도입과 사원에 대한 억압책으로 사원이 쇠퇴함에 따라 음다 풍습도 사라졌던 것입니다.

 둘째는 차 산지 주민들에 대한 차세의 부과로 민폐를 끼치게 되어 차 생산지가 줄고 민중의 차에 대한 거부감이 심화되어 기호음료로 정착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수질이 맑고 깨끗하여 그냥 마셔도 탈이 없고 물맛이 좋으며, 밥을 지은 뒤 마시는 숭늉이 곡차로서 차를 대행했던 탓도 있습니다.
 마지작으로 술과 담배의 선호로 인해 기호음료로서의 차의 필요성이 감퇴한 것도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조선에서 차가 쇠퇴의 길을 걸을때 이웃 일본은 무사들에게 차를 장려하여 정서를 순화시키고 단결력을 고양시겼던 것을 떠올리면 차 생활 쇠퇴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차빛마을 완정 >의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