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국전(혜초스님) / 깐슈 정수일 역주

2013. 11. 19. 10:05우리 이웃의 역사

 

 

 

 

 

      

왕오천축국전(혜초스님) 깐슈 - 정수일역주 [ 도서 정보 ]

2004/07/0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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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정수일(깐수) 약력 >>

 

중국 연변에서 출생하여 연변고급중학교와 북경대학교 동방학부를 졸업했다. 카이로대학교 인문학부에 국비 연구생으로 유학했고, 중국 외교부와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근무했다. 평양국제관계대학교와 평양외국어대학교 동방학부 교수를 지냈고, 튀니지대학교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및 말레이대학교 이슬람아카데미 교수로 있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을 거쳐(문학박사), 같은 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5년간 복역하고 2000년에 출소한 뒤 2003년에 사면복권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전공은 문명교류사이다.
저서로 『신라·서역교류사』 『세계 속의 동과 서』 『기초 아랍어』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문명교류사 연구』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이슬람문명』이 있으며, 역주서로 『이븐 바투타 여행기』(1·2)와 『중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

 

 

1. 번역문에서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풍습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

    여행이나 여행기를 읽는 일의 즐거움 중 하나는 우리와 다른 풍물과 풍습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혜초도 자기가 살던 곳의 풍습과 다른 이국땅의 낯선 풍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이 나라를 비롯해 오천축국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오천축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술이 취해서 서로 치고받는 자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설령 마셨다 하더라도 의기나 좀 양양하고 기운이나 좀 얻을 뿐, 노래하고 춤을 추며 떠들썩하게 술자리를 벌이는 자는 보지 못하였다. --- (229쪽 ‘신두고라국’절에서)

     털옷과 베옷을 입기 때문에 서캐와 이가 대단히 많은데, 이를 잡기만 하면 곧바로 입속에 넣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 (263쪽 ‘토번국’절에서)

    식사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 같이 한 그릇에서 먹는다.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도 들었으나 보기에 매우 흉하다. --- (360쪽 ‘대식국’절에서)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파사국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토화라국을 비롯해 계빈국이나 범인국, 사율국 등에서는 형제가 열 명이건 다섯 명이건, 세 명이건 두 명이건 간에 공동으로 한 명의 아내를 취하며, 각자가 부인을 얻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안 살림이 파탄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373쪽 ‘호국’절에서 )


 


   <인도와 중앙아시아 불교 전파 상황>

    혜초는 가는 곳마다 불교 사원과 승려의 수,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우세 정도, 이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전파 정도를 기록하여,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불교 전파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세 번째 탑은) 가비야라국(迦毗耶羅國)에 있는데, 그곳이 바로 불타가 태어난 성이다. 거기서 무우수(無憂樹)는 봤으나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탑은 있으나 승려는 없고 백성도 없다. --- (181쪽 ‘중천축국 4대탑’절에서)

    왕과 수령, 백성들은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더불어 행해진다. --- (197쪽 ‘남천축국’절에서)

 


    <다섯 편의 시가 포함된 서정적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성지에 도착했을 때 느낀 기쁨이나 험난한 여로에서의 고단한 심정을 읊은 오언시 다섯 편을 포함하고 있어 서정적 여행기라 불린다. 남천축으로 가던 도중 읊은 다음의 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향수에 젖은 혜초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 (198쪽 남천축국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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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석에서

    <가장 원문의 뜻에 가깝고 정확한 번역>

    역주자는 기존에 나온 국내외 『왕오천축국전』 번역서와 연구서를 비교하고 그 중에서 해석이 판이하게 다른 부분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관련 서적과 그 시기 그 지역의 상황을 근거로 원문을 복원하여 가능한 한 정확한 번역을 시도한다.

    이 문장 중 ‘석(石)’자 앞의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와 또 같은 글자인 ‘오일(五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서 논란거리이다. ‘석’자 앞의 글자를 ‘오(五)’자로 보는 견해(藤, 12a; F, 459; 羽, 613; 李, 96)와 ‘오일(五一)’자로 보는 견해(Y, 41, 83; 鄭, 105)가 있는가 하면, 특이하게도 ‘일(一)’자로만 보는 학자(張, 28)도 있다. ‘오’자로 보는 학자들은 예외 없이 ‘다섯 섬을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였다. ‘오일’자로 보는 경우에는 ‘다섯 섬 중 한 섬을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기도 한다(桑, 31). 이색적인 것은 ‘오일’로 써놓고도 ‘다섯 섬을’로 옮겨 놓은 경우다(鄭, 105, 116). 그러나 당시 인도의 지세가 수확의 6분의 1을 공납하는 세제임을 감안할 때, ‘오일’로 인정하고 ‘땅에서 나는 곡식의 다섯 섬은 거두어들이고 한 섬은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171∼172쪽에서)



    <정수일 선생만이 달 수 있는 자세하고 풍부한 주석>

    혜초가 젓가락을 사용하는 식습관이나 근친혼, 일처다부제와 같이 서역의 풍습을 묘사한 부분에 대해 역주자는 주석에서 부연 설명을 해준다.

    유목 생활 유습으로 인해 아랍인들은 자고로 맨손(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관행이다. 간혹 국 같은 것을 먹기 위해 숟가락은 사용하나, 한(漢) 문명권 사람들처럼 젓가락〔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짐작하건대 혜초는 꼬치구이를 즐기는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꼬챙이 같은 것을 젓가락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대식인들이 수저를 쓰는 것이 그에게 ‘퍽 흉하게 보였던’ 것이다. ---(366쪽에서)

    혜초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는 ‘최근친혼(最近親婚)’을 ‘대단히 고약한 풍속(極惡風俗)’이라고 질타한다. 최근친혼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신봉자들을 비롯해 일부 민족들 속에서도 유행한 일종의 혼인 제도이다. 최근친혼을 비롯한 근친혼은 자고로 여러 민족들 속에서 혈통이나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혼인 비용에 의한 재화의 족외 유출을 방지하며 여자의 사향심을 달래기 위함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존재해왔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발단이 된 이 혼인 제도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헤로도토스(Herodotos)인데, 그는 역작 『역사(Historia)』 제9권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Cyrus)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에 관해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캄비세스 이전까지는 여형제를 아내로 취하는 관습이 페르시아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캄비세스는 자기의 여형제 중 한 명을 사모하여 구애하고 싶었으나, 이것이 관습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궁전 법관을 불러다가 여형제의 취처(娶妻)를 인정할 수 있는 법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왕자의 속내를 알아차린 법관은 법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왕자의 미움도 받지 않을 만한 묘안을 찾아내야 했다. 생각 끝에 법관은 여형제와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률은 없지만, 왕에게는 원하는 대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는 타면법(他面法)도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자는 그 여형제를 아내로 취하고 얼마 안 있다가 또 다른 여형제도 아내로 맞이했다. ---(389쪽에서)

    ‘공취일처(共娶一妻)’, 즉 여럿이 한 여인을 아내로 삼는 이른바 ‘일처다부(一妻多夫, polyandry)’도 일종의 혼인 제도로, 자고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성행하였다. 『수서』 「서역전」에 의하면 토화라국에서는 형제가 한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데, 방사(房事)가 있을 때면 방 밖에 옷을 걸어 표지하며 자식은 형에게 속한다. 그런가 하면 대월지 종족에 속하는 염달은 그 풍속이 돌궐과 비슷하여 형제가 아내 한 명을 취한다. 만일 형제가 없으면 처는 각이 하나인 모자를 쓰고 형제가 여럿이면 그 숫자만큼 각이 달린 모자를 쓴다(『위서』 「서역전」). ---(389∼390쪽에서)

 

 


                                         [출처] 왕오천축국전(혜초스님) 깐슈 - 정수일역주 |작성자 작은황사

                                                                             네이버 블로그 <황사의 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