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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5. 00:25美學 이야기

 

 

 

  금년 5월 어느날-천안함 폭침 후 - 울적하던 날에 모 카페에 올려 놓은,

 

제가 가끔은 만나는 사람이 그려준 북한산인호도(北漢山仁虎圖)를 다시 올려 드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북한산의 인수봉인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도읍을 정하매, 한강 건너편의 하남 위례성이 적지(適地)임을,같이 등산한

 

일행들과 의논한 후, 북한산 산신에게 고마움의 산신제(山神祭)를 올렸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만하여도 비류와 온조가 두려워 하던 적대적 세력은 떠너온 고구려의 장갑기병들로써,

 

기병들은 큰강을 방어선으로 하면 물리치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지금의 풍납토성이 있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명태조 주원장이 몽고군 세력인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도읍을 정할 때 현재의

 

북경,남경 등의 여러 후보지가 검토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만리장성과 가까운 북경이 새 도읍지로

 

선정되었는 데, 백성들의 어버이로 여겨지던 천자가 사직의 안녕만 도모하여,백성들이 사는 땅을 버리고

 

 강남의 남경 지방 등으로 도읍을 정한다면, 만리장성 북쪽으로 물러나 있던 몽고군 세력에게

 

재침의 기회를 허락하는 구실을 줄 수 있다는 점이 크게 고려되어, 북경이 선택되었다고 합니다.

 

 

  즉금의 연평도 포격 사태를 보고서, 옛 이야기들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각 정파적 이해관계로

 

결정한 행정복합도시 이전 계획이, 북쪽의 적대적인 세력에게는 새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전에 일본에 통신사로 간 두 사람의 상반된 보고를 당시의 조선국왕인 선조가 잘못 판단하여,

 

치욕적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불러들인 결과를 낳게하였다는 것이, 각 정파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이 그 후에 국토를 유린케 하고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하는 전란의 참화를

 

낳게 되었는 지는 새삼스럽게 설명드리지 않아도, 역사적인 사실이 증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가장 큰 책무 중의 하나입니다.

 

국가의 위기를 맞아서도 각 정파 간의 이해관계나 이데올로기에 따라서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 민주주의의 장점일 수 있으나, 각 정파에 소속된 그들이 국가의 실제적인 주인인 국민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기울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집권기반인 국민들과 영토가 존재하고 있어야  차기집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하는 언행과 행동들을 계속할 때는, 그들은 국민들 손에 의해서 역사에서 제거될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 : 백담 그 시절...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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