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검은구록 - 청향비/ 박재환의 영화리뷰 外

2013. 12. 5. 12:10잡주머니

 

 

 

 

 

      

[리뷰 by 박재환 2005/4/14]  무협종사 김용의 첫 소설작품은 1955년에 쓴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이다. 우리나라에선 (이젠 부도로 없어진 출판사인) 고려원에서 [소설 청향비]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었다. [서검은구록]을 원작으로 한 TV드라마는 홍콩-중국에서 몇 차례 만들어졌다. 영화로는 쇼 브러더스에서 초원 감독에 의해 1981년도에 영화화되었다. 그 후 허안화 감독에 의해 [서검은구록]과 [향향공주]라는 연작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선 이 두 편이 [진가락]이란 타이틀로 재편집=압축 비디오 출시되었다.

 

  김용의 원작소설 [서검은구록]은 무척 흥미로운 두 가지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만주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의 최절정 시대를 다스린 건륭 황제의 출생의 비밀을 담고 있고 또 하나는 그런 최고최강의 황제에게 어울리는 기막힌 황비 '청향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는 (이른바 입관 후) 열 명의 황제가 278년 간 지속된 중국제국 마지막 왕조인데 그중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세 황제의 시대가 최고의 국운 융성기에 해당한다. 이 세 황제의 파란만장한 제국이야기는 최근 중국에서 이월화라는 필명의 작가가 굉장히 긴 대하소설로 만들어내었다. 어쨌든 이중 건륭제의 출생의 비밀이라니? 아시다시피 중국의 전통적 왕위 계승은 그야말로 피로 얼룩진 광란의 기록이다. 장자(큰아들) 상속이 아니고 황제의 어명으로 낙점된 황태자가 황제가 되는 구조였으니 야심에 가득 찬 비빈이나 아들들이 군사력과 환관들과 결탁하여 골육상쟁의 비극사를 만드는 것이다. 무려 61년간 황제 자리를 지킨 '명도 길었던' 강희제는 네 번째 아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 사람이 바로 옹정제이다. 옹정제때 왕위계승을 둘러싼 살벌한 역사를 잘 알기에 새로운 계승법을 만들어낸다. 살아 생전 '누구'라고 적시하는 말을 남기지 않고 종이에 후계자가 될 아들 이름을 써둔다. 그리곤 그걸 자금성 건청궁의 '정대광명' 액자 뒤에 숨겨둔다 황제가 죽으면 문무대관들과 수많은 황태자들이 모여 그 종이를 꺼내들고 "the winner is gone........"이 되는 셈이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었던 윤진(胤禛)은 아들이 있었지만 별로 시원찮았다. 그런데 옹정제의 와이프가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 시간에 묘하게도 문연각 대학사로 있던 한족 출신의 진세관(陳世倌)이라는 신하도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윤진 왕자는 진세관의 아들을 궁으로 들이고 딸을 줘버린다. 신생아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놈이 나중에 건륭제가 되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국가이고 이 당시 나온 영화나 소설, 역사적인 개념은 모두 한족이 '반청복명'(청나라를 멸하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다. 건륭제의 친부 진세관은 한족이다. 그럼 청나라 최고의 명군 건륭제는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수립한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는 진세관의 고향마을인 절강성 해령 지방에서 전설같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작가 김용의 고향도 이 동네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이 이야기에 익숙해 있고 자신의 소설에서 이 설정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럼 결론부터! 과연 신생아 바꿔치기가 있었고 건륭제는 한족인가? 이는 역사적인 문제이다. 중국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이미 "아니올시다!"라고 결정한 상태이다. 여기에 대한 질문을 줄곧 받아온 김용도 시간 날 때마다 "소설일 뿐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남의 역사를 너무 쳐다보지 마시길.

 

 

  [서검은구록]의 두 번 째 흥미거리! '청향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청향비는 청나라의 향비. 즉 향기로운 왕비라는 소리이다. 사람이 얼마나 향기로우면 냄새가 났을까. 청향비는 '향향공주'라고도 한다. 이 여자에 얽힌 전설도 꽤 많다. 청나라가 위구르 회족들을 물리치고 그 지휘자의 아내를 포로로 잡아 북경에 데려온다. 건륭 황제는 이 여자에 홀딱 반한다. 고향(사막)을 잊지 못하는 이 여자를 위해 사막과 이슬람식 건축물도 지어준다. 어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이 여자는 죽을 때까지 고향을 잊지 못 했다고 한다. 참, 이 역사적으로 이 여자는 건륭보다 23살이 어렸다고 한다. 여자는 건륭 황제가 없을 때 황태후(건륭의 어머니)가 이 여자에게 사약을 먹인다. (이것도 거짓말이란다. 역사적으로 향비로 알려진 '용비(容妃)'는 황태후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다니 말이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건륭 황제는 향비의 시신을 고이 모셔 고향마을에 안장시키도록 한다. 관에 넣고 66,666명(무려 6만 6천 6백 6십 6명)으로 하여금 향비의 관을 모시게 했다.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땅에 내려놓지 못하게 했단다. 갖은 고생 끝에 고향마을에 도착했을 땐 겨우 '6명' 만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거짓말이다!) 중국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카스(喀什)에는 청향비가 묻혀 있다는 이슬람식 사원이 있다. 놀랍게도 북경 황제들의 능이 모여있는 청 동릉(淸東陵)에도 청향비의 묘가 있다. 어느게 진짜 청향비의 묘인지는 '강희제가 한족인가'만큼이나 호사거리이다.

 

 

  어쩄든 최근 역사적 발굴 이야기를 하면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1979년 말경에 청동릉의 발굴했는데 놀라운 부장품이 나왔다. 무덤 속 웬만한 부장품은 다 사라졌고 머리카락(변발)와 옷 등이 남아있었다. 물론 건륭 황제를 사로잡은 향기로움은 남아있지 않았다. 유골을 감식한 결과 이 여자는 50세 전후에 죽었다고 한다. 혈액형은 'O'형이다. 향향공주가 O형이란 말이다. (건륭제가 한족인가 궁금하다면 DNA조사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서검은구록]의 시대적 배경인 건륭황제 시대의 두 가지 미스테리는 저렇다! 소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진가락은 멸청흥한(滅淸興漢)의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 홍화회(興華會)를 이끌 새 총타주(대장)가 된다. 젊은 진가락이 갑자기 총타주가 된 것은 전임 총타주인 우만정(于萬亭)이 어느날 밤 자금성으로 건륭 황제를 만나고 돌아오다 갑자기 병사하였기 때문이다. 청을 멸하다고 나선 흥화회 최고 우두머리가 왜 한밤중에 몰래 건륭을 만났을까.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제쳐놓더라도 말이다) 우만정이 건륭을 만났을 때 배석한 홍화회 4번째 인물 문태래가 그 비밀을 알 것 같지만 건륭은 문태래를 잡아두고 뭔가 입막음을 하려고 애쓴다. 알고 보니 건륭은 어릴 때 태어나자마자 진세관의 집에서 청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 진가락은 진세관의 또 다른 아들이다. 즉 건륭과 진가락은 형제인 것이다. 한 사람은 청의 황제, 한 사람은 그를 죽이려는 홍화회의 총타주이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설정인가. 소설에서는 이것과 함께 향향공주를 주요인물로 삼는다. 위구르 지역 회족 공주였던 향향공주는 워낙 아름다운 청순녀라서 건륭 황제와 진가락 두 사람이 모두 첫 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향향공주의 언니인 곽청동의 이야기도 아주 매력적인데.. 그것까지 할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이제 충분히 김용 소설과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럼 81년 쇼브라더스 초원 감독의 [서검은구록]은 어떨까. 영화는 1시간 42분짜리 영화이다. 원작 소설이 4권이니 '사조삼부작' 같은 대하 소설에 비해선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이들 내용을 100분 짜리에 압축시키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일 것이다. 그래서 쇼 브라더스는 효율적인 방식을 택했다. 향향공주 이야기를 모두 들어낸다. 즉, 광활한 사막과 수많은 낙타, 그리고 소설을 읽자면 [반지의 제왕]의 명장면 저리 가라 할만큼 판타스틱한 늑대 출몰 장면과 비밀의 궁전 같은 결정적 장면들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자연히 여자 하나를 두고 진가락과 건륭이 얼굴 붉히는 일 따위는 등장할 틈도 없다.

 

 

  소설에서 건륭황제는 뛰어난 명군의 면모라기 보다는 만주족이 세운 나쁜 청나라의 나쁜 황제 정도로 그려진다. 영화에서도 진가락은 잘생긴 적룡([영웅본색]에서의 대머리가 아니라 쇼브라더스의 간판스타 시절의 적룡임!)이 팬들의 시선을 끈다. 원작 소설에서는 건륭 황제의 오른팔 무사로는 장소중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그의 무공은 아주 막강하여 진가락도 쩔쩔 맬 정도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진가락(적룡)이 최고의 무공을 가진 주인공을 나온다. 소설에서는 14명의 협객(나중엔 진가락을 시중들던 심연이 포함되어 15당가가 된다!)들이 골고루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4거, 7거, 13제..." 등등 이름만 부르는데도 한참 걸린다. 생각해 보라. 지금 문태래가 아문에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총타주 진가락이 지시를 내린다. (중국에서는 첫째 형은 一哥, 둘째를 二哥식으로 부른다. 哥는 '꺼'로 발음한다)

 

  "1꺼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하고, 2꺼는 3꺼와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하고, 5꺼, 6꺼, 7꺼는 어디서 어떻게 하고, 8꺼, 9꺼, 10꺼는 어쩌구, 11꺼, 12꺼는 어떻게 하고, 13꺼는 여기 있고, 14꺼는 어떻게 해라."

  그런데 2꺼가 "대장님 그런데 4꺼에게는 5꺼가 가고, 6꺼는 9꺼와 함께 있는 게 좋겠고, 10꺼는 몸이 안 좋으니 여기에 남는 게 좋을 듯 한 대요." 그러면... 진가락이 "아 그래요? 그럼 1꺼는 어쩌구, 2꺼는 저쩌구...." 정말 작전 한번 치르려면 꺼이꺼이 하다가 세월 다 보낸다.

  [영웅본색]에서 장국영의 형으로 나왔던 적룡이 한창 '꽃미남 외모'를 자랑하던 젊은 시절에 출연한 영화이다. 그 외 쇼브라더스의 알만한 인물로는 우선 나열과 곡봉 등이 있다. 요즘 홍콩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정칙사가 홍화회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출연한다.

 

  소설부터 읽고 영화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갈 내용이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보다 위에 말한 건륭제 출생비밀이나 향향공주에 얽힌 뒷 이야기가 내겐 더 흥미롭다.

  참. 소설에서는 탑 안에서 싸우는 장면이 꽤나 치열하고, 거창하고, 중요하다. 영화에서 폼은 냈다. 그런데 마지막 탈출 장면은 정말 '판타스틱'하다. 소설에는 없는 '창의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감독인 초원에 대한 이야기를 또 못했다. 다음에 초원 감독 소개한다.


서검은구록 書劍恩仇錄 (1981) Emperor and His Brother
감독: 초원(楚原)
출연: 적룡(狄龍), 손건(孫建), 백호(白彪), 나열(羅烈), 곡봉(谷峰), 문설아(文雪兒)
정칙사(鄭則士), 원빈(元彬), 원화(元華), 원덕(元德),

 

 

                                                                             

                                                                                                                        박제환의 영화 리뷰에서 발췌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위구르족인 향비가 만주 여진족의 후예인 청나라 건륭황제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 있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향비가 위구르 회족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포로로 잡아온

 

위구르지도자의 아내를 건륭에게 받치는 것으로 즉 한족중심의 역사관이나 세계관의 관점에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史實)은 그 반대이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즉 우리 고조선의 강역안에서 세력을 키워왔고 고조선에 소속된 일개부족에

 

지나지 않으며,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 고구려, 발해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들 중의 일개 부족이였을

 

뿐이다.  한족 중심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 땅에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은 초창기에 한족들의

 

저항과 반발 또는 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하여 한족 중심인 양자강 유역에 있는 지방에서 무자비한

 

대량살육과 약탈을 수시로 일삼아 한족부흥의 싹을 미리 잠재우는 작전을 폈다.

 

 

    이는 또 다른 고조선의 후예들인 몽고족의 징기스칸의 군대가 중원 땅이나 유라시아 대륙에서

 

벌인, 저항하는 국가들이나 성곽들에 대하여 무자비한 대량살육과 약탈을 일삼아서 인근에 있는

 

국가나 성주들이 스스로 항복하거나, 대량학살을 피하고자 하는 무리들을 심리적으로 부추겨서

 

성내 반란을 유도하여 무혈입성하는 전략과도 많이 닮아 있다.

 

 

 

   일본에서 지금도 볼수 있는 일본인들이 허리를 90도 정도 숙이고 머리를 길게 앞으로 빼어내어

 

인사하거나 사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도 부여, 고구려, 발해의 지배층이나 유민들이

 

일본열도에 상륙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싸울아비(후에 일본어화하여 사무라이)들인 본국무사들을

 

동원하여 굴욕적인 자세로 꿇어않게 하고 목을 앞으로 쑥내밀게 하여 시범적으로 참수를 하여

 

원주민들의 반발과 저항 잠재웠던 습관이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에도 "스미마셍...스미마셍....

 

(죄송합니다. 또는 미안합니다.)"하면서 그러한 자세를 취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몽고족이 지배하던 원나라나 여진족이 지배하던 청나라, 또는 청 이전의 거란족(고조선의

 

한 부족)이 지배하던 요,금나라에서도 우리 동이족들은 위구르 회교도들을 색목인이라고

 

우대하여, 고급관리나 대무역상으로 양성 또는 지원하는 정책을 써왔다. 

 

   티베트의 장족(藏族)이나 지금의 광서성 장족자치구의 장족(壯族)들을 우대하여

 

중간관리계층으로 양성하여 이들로 하여금 한족들을 직접 대면관리하는 중간관료나

 

중간상인층으로 두고 한족들의 반감이나 저항감이 일차적으로 이들에게 향하게 하는

 

국가제도와 관리기법을 사용하였다.

 

 

   원나라와 우리 고려는 서로 혼인 동맹으로 맺어진 지금의 동맹국 개념보다는 더

 

밀접한 사이였고, 특히 이 혼인동맹국간의 전통관습은 공주나 딸을 제공하는 나라가

 

왕자나 아들을 장가보내는 나라에 비하여 열위로 보는- 즉 형제국으로 비유하면

 

아우국으로 보는 것을 감안한다면, 유라시아 대륙을 대부분 지배하고 있었던 원나라도

 

고려에 대하여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적통성을 잇는 후예국임을 인정하여 형님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조 초 고려사를 지은 사대주의 유학자 사관들과 일제식민사학자들의 관점은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으로 아직도 고려를 원의 부마국으로 낮추어

 

부르는 오해를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청태종인 누르하치도 명나라와 전쟁 중에 조선을 형님국으로 예우하며, 서로

 

군사동맹을 맺고 명나라에 대한 합동군사작전을 수차례 요청하였으나, 모화사상

 

물든 성리학자들인 조정대신들의 반대로 이를 거절하다가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몽골 부족장 버얼리에게 비밀리에 3만의 군사를 주어 1627년 1월 14일 출병하고 1월 16일

 

의주를 돌파하며  그 후 9일 후인 1월 24일 개경을 함락당한 것이 정묘호란이고, 후에 친명파가

 

득세한 상태에서 명이 멸망하자,1636년 12월 9일 군사 10만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에 침입하는

 

병자호란을 겪고 국경을 돌파당한지 두달이 채 못되어 이듬해인 1월 30일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척화파인 김상헌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의 머리를 조아리는 三拜九叩禮를 올리며 항복하는 치욕스러운 일을 겪게 된다.

 

 

   청향비는 이러한 무자비한 보복을 두려워하고 자신과 가문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명나라 

 

지배층 출신의 한족이 위구르족과 여진족과의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를 꿰뚫어보고 피부가

 

하이얀 위구르의 어린 아름다운 소녀들을 구하여 특별하게 양육된 여성들 중에서 선발된 사람이다.

 

   어린 소녀에게는 곡기를 끊게하고 유모들을 동원하여 모유만을 먹여서 피부를 마치

 

어린아이들과 같이 보드랍고 반투명하게 만들고 꽃과 각종 향료, 또는 정향성분이 많은 산나물

 

등을 먹게하여 온 몸에서 향기가 나도록 특별하게 양육되어서 황제나 대신들에게 인신공양용으로

 

받쳐진 인간뇌물로 키워진 사람들이다.

 

    이 향기나는 여성들에게는 페르시아나 서역의 교태로운 춤이나 악기 연주를 배우게 하여

 

연주회에 초대된 황제나 고관들이 이 향기로운 여성들을 스스로 선택하게끔 함으로서

 

이 여성들의 주인격인 명나라 지배층의 후손인 한족들의 성상납 과정까지 모호하게 하는

 

고도의 술수가 이 향비의 채택과정에는 숨겨져 있다.

 

 

   청나라 당시에는 지금의 우리나라의 여성가족부와 같은 정부기구가 없어서 인지  

 

여성들의 인권은 그리 존중받지 못하였고, 특히 소수 이민족인 위구르족의 여성인권에

 

대하여서는 재론할 여지도 없이 한족들에게는 무시되어도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치부되었던 것이다.

 

 

   최근에 많이 거론되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나, 우리나라 정치권이나 언론계에서는

 

애써 무시하고 있는 동북공정도 사실 따지고 보면 중화사관의 발로라기 보다는 중국정부당국이

 

구 소비에트연방공화국 붕괴와 이에 수반한 중앙아시아 소수민족들과 흑해연안에서의

 

신생독립국의 탄생과정을 지켜보면서 중국당국이 자구책으로 만든 서북공정과 서남공정에 이은

 

후속공정으로 만주족 - 옛 고조선족의 후예들에 의한 신생독립국 탄생을 막아보자는 정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동북공정이다. 

 

 

   서북공정은 중동지방의 회교국과 연계된 위구르 회교인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한 자구책으로

 

수립되었으며,서남공정은 당나라 때에  토번황제에게 문성공주를 시집보내면서 까지 굴욕적인

 

화친을 하였던 강성하였던 티베트제국의 영화를 지우고, 현재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달라이 라마 중심의 티벳트 망명정부의 독립의지를 꺽어 보려는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동북공정은 그들의 역사에서 한족 중심의 한,당,송, 명 등의 통치기간 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중원을 지배하여 왔고 그들 한족을 삼등국민으로 취급하였던 북방유목민 중심의

 

나라 요, 금 ,원, 청의 기원지에 대한 역사세탁과정이며, 이들의 후손들에게 국가통치권력을

 

빼앗겨 한족이 다시 삼등국민이 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고자 입안되었고 추진되는 한족중심의

 

역사편입정책이나, 이미 기존의 정사로 인정받고 있는 요사,금사, 원사와 청나라 때에 작성된

 

<흠정만주원류고> 등이 버젓이 남아 있는 한 , 그들 한족들의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일이여서 우리로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아도 무방한 일이 된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