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의 신라전래설

2013. 12. 25. 22:55우리 이웃의 역사

 

 

 

 

      

경교(景敎) - 경교는 과연 신라에 전래되었을까?

 

 

경교? 네스토리우스파(교)의 중국 명칭

 

경교는 그리스도교 종파의 하나인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주창한 그리스도교 일파의 중국 명칭이다. 경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635년(정관 9)이었다. 대진경교(大秦景敎)라고도 한다.

 

431년에 추방된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시리아를 거쳐 이란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 뒤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조로아스터교의 핍박을 받았으나 국왕의 비호를 받아 존속하면서 교세를 넓혔다.

 

중국에는 635년(태종 9)에 대진국(大秦國:로마, 페르시아) 사람 아라본(阿羅本) 일행이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선교한 데서 비롯된다. 당 태종은 21명의 선교단에게 의전 재상인 방현령(房玄齡)을 보내어 환영을 하게 된다.

 

주후 638년에는 태종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국비를 드려 파사사(波斯寺; 당시 교회를 寺로 표시하였음)라는 이름의 교회를 세워주고 경전(經典)을 번역하게 함으로 당나라에 선교의 길이 크게 열리게 된다.

 

처음에는 서역에서 색다른 종교가 페르시아에서 왔음으로 파사교(波斯敎)라고 하였는데 이 종교의 본거지가 로마인 것을 알고는 로마라는 한자인 대진(大秦)이라는 말에 교(敎자)를 부쳐서 대진교(大秦敎)라고 부르게 된다.

 

대진경교 또는 파사교, 경교

 

 그 후에는 광명한 종교라는 의미로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됨으로 당나라에서 경교, 또는 대진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은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秦國大法主) 라는 관직을 주고 10개 도와 385주(州)에 경교 사원을 세우도록 하였다.

 

태종 때는 성탄절이 되면 향과 음식을 주고 축하하기도 하였으며 경교는 당나라에서 주후 635-845년 동안의 210년간 국민들의 호응과 황실의 보호 속에서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 하였다. 당 숙종(肅宗:757-763)) 때 안록산의 난을 토벌할 때 경교도인 이사(伊斯)가 큰 공을 세웠고, 대종(代宗)시대에 토번(土蕃: 티베트)의 침공을 물리치는데도 이사가 혁혁한 공을 세워서 경교가 권력의 후대를 받았다.

 

대종의 뒤를 이은 덕종(德宗:763-779)도 경교를 숭상하였다. 이때가 당대 경교의 절정기로 경교의 선교역사와 그 상황을 요약한 대진경교류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덕종 2년에 건립하였다.

 

<대진경교류행중국비 진품, 비림박물관, 1625 : 교(敎)자 위에 희미하게 보통 십자가와 다른 특유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70명 이상의 경교 사제의 이름과 더불어 교리의 내용과 역사적인 결과 비석 건립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와 중국 불교와 도교적 개념이 혼합된 혼합주의 기독교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들은 하루에 일곱번 평신도들은 네번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

 

 당 말기에 쇠퇴, 원나라 때 부흥

 

 당나라 초기에 들어와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845년 무종회창(武宗會昌)5년에 실시된 회창금교(會昌禁敎)이다.

 

도교(道敎;Taoism; 유고중의 노자(老子) 중심의 도덕 종교의 한 형태) 신자인 무종(武宗 840-846)은 외래 종교가 지나치게 번창하는 것과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불교의 사원들은 많은 농토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승려들이 일하지 않으면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종교탄압 정책을 칙령으로 내리면서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경교와 회교,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의 사제들까지 성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의 사정을 보면 문을 닫은 불교가 4,600개, 환속되어 간 승려가 무려 26만 5천명이었다고 한다. 경교에 대한 탄압이 있게 되자 더 존속할 수 가 없게 되었다. 회창금교로 경교 사원이 파괴되고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많은 경교승들이 환속되었다.

 

경교승들은 약 600 내지 700명이 환속되었다고 보여지고, 경교도는 40,000내지 70,000명이 환속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박해로 경교는 크게 타격을 입었고 궁벽한 곳으로 도피하였다. 무종이 죽고 선종(宣宗)이 즉위하여 박해가 완화되자 불교에서는 사원을 새로 중건하는 등 차츰 원상태로 회복이 쉽게 되었으나 경교는 회복의 기회를 얻고도 재기를 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879년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 때 경교도 30,000명이 학살당하였다. 그후 경교는 중국에서 끊어졌고 살아남은 경교 선교사와 신자들은 거란, 몽고, 신강,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쫓겨 갔고 나머지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불교나 도교로 개종하였다. 200,000명을 헤아리던 경교도들은 다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당 이후 중국의 변두리에 있던 경교도들은 한(漢)민족의 문화에 동화 흡수되어 경교는 소멸되고 유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후에 원(元)나라 때에 경교도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원의 멸망과 더불어 중국에서 소멸되었다. 한편 칭기즈 칸 시대에 주변의 유목민족에는 경교가 들어와 있었는데 이는 9C 후반 이후 중국의 경교는 쇠퇴했지만 실크로드 주변국인 북중국에서는 명맥을 유지 하였다. 이유는 현지주민들의 개종에 성공 하였고 소그드인들의 노력 때문이다. 경교는 몽골 제국이 출현하기 전 초원 여러곳에 기반을 확보 하였는데 케레이트, 나이만, 웅구트 족 같은 유민족들의 집단 개종이 있었다.

 

삼위일체의 교리에 일신론적인 신관


 경교의 주요경전인 〈서청미시소경 序聽迷詩所經〉·〈세존포세론 世尊布世論〉 등에 의하면, 경교의 중심사상은 일신론적인 신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경교의 찬송문이나 예배서에 해당하는 〈존경 尊經〉과 〈경교삼위몽도찬 景敎三威蒙度讚〉은 엄격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의 교리를 보여주고 있다.

 

 경교가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 적응하려 했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교회의 명칭을 '경교'라 한 것이나, 성령을 '현풍'(玄風), 교당을 '사'(寺), 수도사를 '승'(僧), 사도를 '승가'(僧伽), 천부를 '천존'(天尊)으로 번역한 것은 중국 전통종교와의 연결성을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唐) 초기에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했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약 400여 년 동안 거의 소멸되었다가 원(元) 때에 일시적으로 재흥하였다. 이때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라는 명칭 대신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복음을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닌 몽골어 '아르카운'(Arkaun)을 음역한 것이었다.

 

 경교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781년에 건립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진상(眞常)의 도(道)는 현묘(玄妙)하여 이름짓기 어려우나 그 공용(功用)이 소창(昭彰)함을 보아 감히 경교(景敎)라고 칭한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956년 불국사에서 발견된 석제 십자가>

 

 

과연 신라에 경교가 전래되었을까?

 

 당과 삼국, 특히 통일신라와의 밀접한 관계를 근거로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경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몽골과 고려의 교류를 통해 몽골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야리가온 신앙이 고려인들에게 전래되었을 가능성 또한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몇 가지 자료들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1956년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는 신라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석제 십자가였다. 천년 전에 운명을 다한 신라왕조의 유물 중에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섞여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숭실대학교에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세운 사학자 김양선 목사가 1971년 <한국 기독교사 연구>를 출간하면서 이를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전래된 증거로 인용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한 학자는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인 고든(E.A. Gordon)이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점령될 무렵 약 4년간 한국에 머물렀던 고든은 기독교의 동양 전래 및 기독교와 불교의 교류에 대해 연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불교와 경교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그녀는 경주의 신장. 관음상. 나한상. 제천석상 등에서 페르시아 경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잇다고 주장했으며, 통일신라시대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상 부조나 괘릉 앞의 무인석에서도 경교의 영향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나라 장안의 대진사에 건립되었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모조비를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세우기도 했다.

 

 <불국사에서 발견된 일명 마리아 관음상>

 

 그럼 경교는 과연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을까? 경교가 고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문헌상의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출토된 돌십자가와 전라남도 해남의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동제 십자가, 그리고 마리아상과 비슷하다는 관음상(일명 : 마리아 관음상) 등이 경교의 우리나라 전래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최근에 jaye님의 블로그(http://blog.daum.net/dddss95) '성모'라는 글에서 경주 남산의 할매바위가 부처상이나 관음상이 아닌 경교의 영향을 받은 성모상이라는 의견을 관심있게 읽었다. 자세히 사진을 보노라면 그 의견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다. 

 

 

 <경주 남산의 할매 바위 : 두건을 쓴 모습은 관음상이 아니고 경교의 영향을 받은 '성모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학계에서는 이를 입증하지 못해 아직 객관적인 입증이 없는 가설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보인다. 사학계와 고고학계의 관심을 부탁드린다.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석제 십자가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둘러싼 초대 기독교의 교리 논쟁의 역사와 여기에서 패배한 네스토리우스파가 회복을 꿈꾸며 동방으로 진출했던 흥미로운 역사의 산물일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서방의 로마와 동방의 페르시아, 아라비아와 당나라, 그리고 세계제국인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인 의미가 담긴 유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참고서적 :  김양선 -  한국기독교사 연구

                    이덕일.이희근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

                    김병태 - 경교의 한국전래
            정수일 - 신라서역교류사

 

 

                                                                      다음카페 <금기름 붓는 집>  모리아 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