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네스토리우스교파, 그리스도교)가 한반도(고구려,백제, 신라)를 거쳐 일본에 전래된 내력

2013. 12. 25. 21:56우리 이웃의 역사

 

 

 

 

 

경교(크리스트)가 고대 중국(唐)을 통하여 한반도(고구려, 신라,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된 내력이 궁금하다. / 豊基秦氏와 연관성 중심으로

 

일본의 크리스트교가 전래한 시기는?

 

 

 

 

    일본에 크리스트교가 도래한 것은 중국에서 경교(景教:크리스트교의 종파)라고 부르는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Nestorius, 네스토리우스/시리아의 성직자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451?)가 5C경 전후로 진하성(秦河勝)등에 의하여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진(秦氏)의 집단은 6C경 조선반도(특히 新羅)를 경유하여 일본열도인 왜국에 도래한 집단으로 그 뿌리는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라고 전한다. 이름 하승(河勝)에 대하여는 진(秦氏)의 족장으로 일본 성덕태자(聖徳太子)의 스승으로 활약했고, 성덕태자(聖徳太子)에게서 미륵보살반가사유상(弥勒菩薩半跏思惟像)을 하사받아 광융사(廣隆寺)를 건립하여 이 상을 안치했으며, 610년 신라(新羅)의 사절을 맞을 때 책임자의 일을 맡았다고 전한다.

 

 


 


1. 610년경 수(隋)

 

 

 

 

 

 


2. 신라의 지도(6C후반)

 

 

 

 


3. (Hatano Kawakatsu/진하성/秦河勝)

 

 

 

 

 


4. 미륵보살반가사유상(弥勒菩薩半跏思惟像)京都 広隆寺

 

 

 

 

 

 

 


     일본에서 위와 같은 이설(異說)은 사에키 요시로우(佐伯好郎)가 1908년 1월 『지리역사 백호(地理歴史 百號)』의 수록논문에 「태진 (우두마좌를 논함/太秦(禹豆麻佐)を論ず」이라는 논문에서 제기하고 있다. 진(秦氏)는 경교((Nestorius,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신앙하는 유대인의 일족이었다는 설을 발표했다. 진일족(秦一族)이 도래한 6C이전에 이미 당(唐)에 동방크리스트교인 경교(景教)가 전해졌고 그 사원은 당에서 대진사(大秦寺)라고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진(大秦)은 로마제국을 의미한다. 즉 당에 로마제국사원이 건립되어 있었음을 말하고 이로서 경교가 이 시기에 충분히 일본으로 전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또한 사에키 요시로우(佐伯好郎)는 일본 헤이안(平安:794년 환무천황(桓武天皇)이 평안경(平安京/지금 京都)의 도시가 바둑판 모양이었는데 이것은 결국 십자가(十字架)를 나타낸 것이며, 이것은 경교(景教)와 관계가 깊은 것이라는 것이다. 로-마를 대진(大秦)이라 불렀고, 또한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의 부친이 벽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진시황의 아버지가 중동에서 이주하여 왔다는 설이 존재하며, 현 이라크와 이란(고대 페르시아), ‘아라무’지방, ‘에라무’지방에는 조로아스터교 등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전신인 종교가 존재하고 있었고, 고대 유대인도 살고 있었음으로(바빌로니아 참조) 충분히 동방으로의 전파는 이 시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특히나 페르시아, 당(唐), 신라, 일본의 사이에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교역과 사람의 이동이 있었을 것임으로 이 같은 설은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5 대진탑(大秦塔:大秦寺는 중국 당시대에 장안에 존재했던 사원(교회)

 

 

 

 

 

 

 


여기서 잠시 중국에 경교(景教)가 전래한 역사를 살펴본다,

 

 

 


    중국에 경교(景教)가 전래한 것은 당대 정관9년(唐代貞観9年/635)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장안(長安)에 도착하고 부터이다. 이 때 중국 당태종의 명령으로 재상인 방현령(房玄齢)이 선교단의 단장인 아라본(阿羅本/Alopen)을 맞이했다(『당회요唐会要』). 아라본(阿羅本)은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사절로 당을 방문했다(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国碑). 이 때 재상이 마중을 나갔다는 것은 적어도 조정에 대한 어떤 작용을 행사한 사람이 이미 장안(長安)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높게 보여준다. 이 정도로 고관의 환대를 받은 것은 선교단이 서역(西域)의 몇 나라(사산朝/Sassanid/226년 - 651년 이란 고원의 페르시아가 유력하다)로부터 온 외교사절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3년 후 정관12년 (688)에 경교는 당에서 공인되고 당조는 자금을 원조하여 장안에 사원을 건립했다. 이 단계에서는 파사사(波斯寺 혹은 파사경사(波斯経寺), 파사(波斯)는 페르시아)라 불리고 「대진사(大秦寺=대로마제국사원)」의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6.Heiankyo map(平安京의 大路小路)

 

 

 

 

 

 

 


신라의 삼국통일과 진(秦氏)의 관계

 

 

 


    우리나라의 기록에서 본 진(秦氏)는 중국 성로 황제(黃帝)의 후손인 고신(高辛氏)의 아들 계중(季仲)의 증손인 미(靡)의 16세손 희자(熙子)가 주(周)나라 선왕을 섬기면서 많은 공을 세워 웅주(雄州)를 받았고 진(秦氏)를 사성(賜姓)을 받았다고 한다.

 

 


풍기진씨족보(豊基秦氏族譜)》에의하면 풍기진씨(豊基秦氏) 시조 진필명(秦弼明)은 당나라 고종 때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올랐으며, 660년(태종무열왕 7)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소정방(蘇定方) 등과 함께 나당(羅唐) 연합군의 장수로 참전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태원백(太原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15세손 진질명(秦礩溟)은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기주부원군(基州府院君: 기주는 풍기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진필명(秦弼明)을 시조로 하고 풍기(豊基)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백과사전)

 

 


    한편 일본에서 진하성(秦河勝)에 관한 기록은 현재 일본의 코류지 경내에 세워져 있는 사찰 연혁 비석(1971년 건립)에는 “진하성(秦河勝)은 진시황제(秦始皇帝)의 후손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 진시황은 성이‘瀛’氏이며 이름은 政이다.(『大漢和辭典』 大修書館書店 1976). 진 가문 연구의 권위인 이노우에 미쓰오 교수는 “진는 고대왕도 慶州를 터전으로 한 신라국에서 도래한 사람들이다.”(井上滿郞 『渡來人』)고 단정했다. 리쓰메이칸대학 史學科 하야시야 타쓰사브로(林屋辰三郞) 교수는 진하성(秦河勝)의 신라인 출신을 중국인으로 뒤바꾼 비석의 잘못된 글귀는 조속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기록과 주장은 우리나라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

 

 

 

 

 


일본에서 말하는 진하성(秦河勝)은 신라의 도래인인가? 당나라에서 직접 건너간 크리스트교(경교)의 교인인가? 신라에도 경교가 존재하였을까?

 

 

 

 

 


    풍기진씨(豊基秦氏)의 족보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진(秦氏) 일족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은 신라에서 기이 뿌리를 내기고 있었던 진(秦氏) 일족이 일본으로 건너왔고 그들은 이미 경교(景教)의 교도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로 입증되면 신라에서도 경교가 존재하였을 것이란 가정도 충분하다. 그리고 기술한 당나라의 경교(景教)에 대한 내력에서도 이미 당대 정관9년(唐代貞観9年/635)에 경교(景教)가 전래하였고 장안에 사원 대진사(大秦寺)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경교(景教)의 전파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래되었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당시 나당(羅唐)의 국제적 관계를 고려하면 신라에도 경교(景教)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여 연구과제로 남겨야 할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5C경에 경교(景教)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고 하는 데 당시 한반도에는 5C초에 고구려는 광개토태왕(広開土王)이서 20대 장수왕으로 넘어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475년 백제의 한성을 점령한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현 공주)로 천도하여 남하하였다. 신라는 수도를 금성(현 경주)에 머물고 있었던 시기다.

 

 


    이 때 일본(왜국)은 21대 왜왕 왕무(王武/雄略天皇)으로 478년 송의 순제(順帝)로부터 왜국 왕에 책봉되었다. 중국은 송(宋:420~479)으로 수도는 건강(현 남경)이었다. 송을 이은 제(斉:479~502)가 나라를 이었다.

 

 


    이 시기에 이란과 이락 등 아랍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성립되었다가 484년에 (Hūna)족에게 망하고 498년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총대사교(總大司敎)를 세운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는 고대 크리스트교의 교파의 하나로 콘스탄틴노포리스(Constantinopolis)에 따라 설경하였다. 432년 에페소서(Ephesos)공회의에서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후에 당대(唐代)의 중국에서는 경교(景教)라 불리고 후에 아시리아동방교회가 계승했다.

 

 

 


   한반도의 5C경 전후의 삼국의 전세변화를 볼 때 경교(景教)가 전래하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삼국을 국토를 확장하는데 전력을 경주하고 있고 수도를 옮기고 새로운 정치변화에 정신을 가늠할 여유가 없는 듯하다. 그리고 특히 불교를 국교로 섬기는 국가였다.

 

 

 

 


 


7. Carte empire Sassanide(사사朝/페르시아531-579)

 

 

 

 

 


8.불교의 동방전파(538년 경)경로

 

 

 


 

 

 

문헌상으로일본에 크리스트교가 최초로 전래한 것은 1549년이었다.

 

 

 

 


   문헌상으로 일본에 크리스트교가 전래된 사실로 확인된 기록은 1549년 캐톨릭 사제,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스페인 어:Francisco de Xavier) 등에 의한 크리스트교 최초의 선교였다. 크리스트교는 당시 큐슈(九州)에서 서일본(西日本), 낀키지방(近畿地方)을 중심으로 많은 신도가 생겨났다. 이즈음 크리스트교는 「야소교/耶蘇教」(야소/耶蘇는 라틴어 Jesus의 중국발음), 크리스트교도는 「절지단/切支丹/크리스탄」, 크리스트 선교사는 「반천련/伴天連/바테렌」이라 불렀다. 오다 노부나카(織田信長)가 선교사에 대하여 호의적이었고 그 정책을 답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당초는 크리스트교를 보호함으로서 일본의 16C 중 말에 걸쳐 크리스트교가 일시 성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에 경교가 전래되었을까?

 

 

 

 


   경상북도 영풍군 평은면 왕유동(王留洞)에서 1987년 8월 발견된 도마의 분처석상(分處石像)인데, 두부(頭部)가 떨어져나간 이 암각상이 기독교 흔적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다. 이 상의 높이는 약 5m, 가슴너비는 약 3.3m이며, 상면과 암면(岩面)에는 음각(陰刻)한 3점의 명문(銘文)이 있다. 즉 상의 좌측 암면에는 ‘도메’라고 읽을 수 있는 히브리어가 새겨져 있어 ‘성(聖) 도마상(像)’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상면 하단에는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라는 글과 ‘명전행’(名全行)이라는 한자 명문이 있다. 이곳의 조형기법이 특이하고 문양이 확연하여 여러 모로 고증이 가능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조형기법에 있어서 손 모양(手勢)이 불상의 수인(手印)과는 다르고 특히 1908년 중국 돈황(敦煌)에서 발견된 흔히 그리스도상이라고 추정되는 경교화상(景敎畵像)의 수세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형태로 간주되고 있다. 명문에서도 도메로 읽을 수 있는 히브리어 외에도 ‘야소화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도자’는 전도자를 칭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것이 후에 소개할 경교의 흔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흔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문헌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8세기 경 경교(景敎)가 소개되기 이전에도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소개되었다는 주장을 고대기독교 전래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규(고신대 교수. 역사 신학에서 전부 인용)

 

 

 

 


 


9.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국민일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진하성(秦河勝)은 일본에서 너무나 큰 존재로 남아 있다. 천황의 브레인으로서 사원을 짓게 하였고 지금 일본국보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弥勒菩薩半跏思惟像)을 진하성(秦河勝)이 천황으로부터 받아 보관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가 당나라에서 직접 일본으로 건너간 진 집단인지 아니면 신라에서 상당기간 머물다가 일족이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또는 그가 진정 경교(크리스트교)의 신자였는지 학술적으로 증명된 것이 없다.

 

 


   그러나 흥미 있는 것은 만약 그가 일본 학자가 말하는 경교(크리스트)교도이고 진시황의 후예인지는 궁금하다. 그는 또한 신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책임자로 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신라에 많은 시간 머물렀던지 이미 신라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신라에서 혹은 신라 외 백제나 고구려에서 경교를 설교하였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그는 신라인이었을까? 또한 그는 진정 경교(크리스트교도)도였는지를 알고 싶다. 그가 신라인이던 중국의 도래인으로 신라에 오래 산 이력이 있는 자이던지 경교도이던지 일본으로 바로 이주한 중국인이든 일본의 전래의 고유한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