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6. 11:46ㆍ경전 이야기
1차 종교회의
니케아에서의 제1차 범 종교회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
콘스탄티누스의 속셈은 한창 번창중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업고 로마제국을 굳혀놓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318명의 주교들을 선발, 소집했던 배후에는 이빨을 드러낸 파워폴리틱스(Power Politics)에서였고, 종교야 어찌되건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던 주교들도 짐작 못한 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①회의를 사회했고 ②내 뜻은 바로 교회의 법률이라는 성명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를 <세계의 주교>격으로 영입시켜 속세의 왕으로서 교리에 관한 투표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니 뭐니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그는 미트라의 태양숭배를 받들었었고 기독교세상이 된 뒤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신(神)의 초상을 조각,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놓고 있다.
희랍에 옛날부터 있어 오는 비잔틴에 자기 이름을 붙여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고쳤는가 하면, 여기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했을 때에도 역시 기독교적인 겸허따위는 오불관언,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노예를 폐지하려는 생각은 커녕 오히려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럼, 이 폭군은 교회정책의 어떤 결정에 참여했던 것일까?
당시에는 신과 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하는 아타나시우스의 설과 신은 오직 하나뿐이므로 그리스도는 신을 닮아 있을 뿐이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설이 대립되어 있었다. 이것이 많은 사제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파급되어 대립이 심각해지자,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 고문관인 오시우스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케 했다. 오시우스는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라고 했다.
만일 '예수가 신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허물어지고 믿음에 혼돈이 생겨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당시는 유럽, 이집트, 서남아시아의 전지역에 퍼져있던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그 대신 기독교가 국교(313)화된 시점이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로마제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없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속적, 정치적 속셈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회의를 주도하고 토론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대부분은 극단의 양 견해를 피하고 중간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도록 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해 아버지격이 되는 여호와와 예수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결의케 했다.
결국 단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참석자가 아타나시우스에게 표를 던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니케아회의의 결정이 신의 감화에 의한 것이라고 자랑했고,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본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세례를 받은, 신학적 논리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영향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신앙의 의식이나 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그 후 황제의 입법으로서 손질을 한, 이 변경은 교회의 핵심<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비기독교인인 콘스탄티누스는 또 그 이상의 공적도 교회에 기여했다. 예수의 무덤을 사상 처음 발견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 다. 그해에 그는 근친 몇몇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들 그리스프스, 처 파우스타를 끓는 열탕 속에 처넣어 죽였고, 장인 마키시미안을 체포하여 자결시켰다.
<니케아의 신앙 선언>을 주재하여 회의를 끝낸 뒤, 318명 주교들의 합의야말로 여호와의 결정이라는 것을 기독교 교단에 회람을 돌린 인물은 대주교격인 황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르메니아, 그리이스, 러시아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받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끝.. [출처] 기독교, 1차종교회의|작성자 솔한나
제2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2차 종교회의를 소집한 주역은 교회가 대제(大帝)의 칭호를 봉헌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이 황제는 도덕적 소질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황제에 뒤지지 않았다.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들볶는 악취미가 있어 하류층 백성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중세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권한으로 만약 누가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도 했었던 폭군이었다.
경건한 종교회의가 있은 지 10년 뒤, 즉 기원 390년에는 데사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을 참살시키기도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때는 기독교에서 <할렐루야>라는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의 기도가 도입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테오도시오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그는 암브로시우스로 하여금 타종교의 성소(聖所)들을 모조리 파괴시켜 버리게 하였다.
이 소행은 실제로 이단심문(異端審問)의 시조라고 불러 주어야 마땅한 처사였다.
그럼 콘스탄티노플의 제2차 종교회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났던 것일까?
신학전문가들로부터 <산송장 회의(殘骸 會議)>라는 욕을 먹고 있는 이 모임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중차대한 신앙조항이 교회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출처] 기독교, 2차 종교 회의|작성자 솔한나 제3차 종교 회의
에페소스에서의 제3차 종교회의. 소집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3세였다. 두 황제 모두가 종교는 고사하고 정치마저도 아예 관심이 없었던 플레이보이들로서 회의에도 얼굴조차 제대로 내보이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 그는 도락에만 철저했던 무기력자로 방탕생활에 돈이 많이 들게 되다 보니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인정사정 없이 세금을 갈퀴질해 냈다. 그러나 그녀는 종교에만은 열심이었던 관계로 성녀 품에 오르기에 이르렀고, 동생이 죽은 뒤 그 유능한 라이벌인 크류소프스를 살해하고서도 태연했던 그녀였다. 그럼 에페소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 회의에서는 마리아를 신이 되어 버린 예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었다. 이것이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국법이 되었다. 순번(順番)식이 된 셈이다. 언제나 거기에는 성령이 따라 붙고 있었다. 끝. [출처] 기독교, 제3차 종교회의|작성자 솔한나
제4차 종교회의 주교측들보다도 자신의 목적을 잘 분별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신학자 에드알트 슈바르츠는 부르케리아가 각 교회의 의사에 반하여 압력적으로 종교회의를 소집, 자신 스스로 주도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럼 칼케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교황 레오1세는 <도그마 편지>에서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신조를 도입시켰다. 이 회의에서 예수라고 하는 인격 안에 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칼케돈 신조>라는 이름으로 이 이중성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 이에 로마 교황의 탄생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뒤에 전개될 기초가 여기에서 문서상으로 명시되었던 것이다. [출처] 기독교, 제4차 종교회의|작성자 솔한나
살인마와 길 잃은 양 경전비방과 성령모독 신앙과 씨뿌림의 비유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삼위일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삼위일체설은 지금까지도 교회의 주식(主食)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끝,
(바이블의 진실)
권력욕에 탐닉되어 있던 음모덩어리인 누나 부르케리아에게 완전히 잡혀 휘둘려지고 있었던 것도 지당했던 일로서 그녀는 잠깐 섭정으로 앉기도 했었다.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비웃어댔지만 처녀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는 모친인 태후 프라키디아가 섭정을 맡았었고, 발렌티아누스는 권신인 아에티우스를 미워하여 살해하려다가 황후 에우독시아를 탐낸 막시무스에게 살해되었다.
(바이블의 진실)
칼케돈에서의 제4차 종교회의. 정식으로는 비잔틴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흑막은 역시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를 남편으로 삼은 처녀(?) 부르케리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칼케돈에서는 교리 통일의 호지(護持)가 교황의 개입에 의해 가능할 수 있게 확정되었다.
지금의 바티칸은 빈말로라도 부르케리아가 음모를 꾸며 칼케돈의 종교회의를 열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라고 본다. 끝.
(바이블의 진실)
성경, 신약은 불경의 복사판
비록 원수일지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예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불경에 수록되어 있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에도 여러번 되풀이 되고 있다.
불경『열반경 범행품』『아함경』에서 석가모니는 '부모를 죽인 원수도 갚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마주 때리거나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다짐을 받는다. 또 '부모와 원수를 대할 때에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6:27∼35』『마태복음 5:38∼46』에서 예수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했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강조했다.
불경『아함경』에는 '99명을 살해한 아힝사카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통해 악인도 바른 마음을 깨치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15:3∼10』『마태복음 18:12∼16』에도 '99마리의 양과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이야기를 통해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99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비유해서 죄지은 자를 구원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불경은 '99명의 피살자와 한 명의 죄인'을 들어 죄 지은 자를 구제하고 있는데, 가르치고자 한 점은 다 똑같이 악(惡)을 선(善)으로 구해주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성경『누가복음 12:4∼10』『마태복음 23:23∼29』에는 예수의 설교를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은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으며 지옥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라고 극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또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는 곧 하나님의 용서를 못받고 최후의 심판에 의해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전도를 위해 파송한 제자들을 박대한 자들도 폐망하게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다.
불경『법화경 비유품』에도 경전을 비방하거나 가르침에 의혹을 품고 믿는 자를 미워하고 천대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법화경 법사품』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한 겁 동안을 부처님을 항상 훼방하고 꾸짖더라도 그 죄는 오히려 가벼우려니와 어떤 사람이 한마디 나쁜 말로써 집에 있는 이나 집을 떠난 이가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것을 비방하고 방해한다면 그 죄는 매우 무거우니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성경에서도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하리라"고 한 것은 석가모니나 예수를 비방하는 것보다 경전을 비방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불경『슛타니파아타』『아함경』『미린다 왕문경 6장』과 성경 『마가복음 3:2∼9』『마가복음 3:14∼20』『마태복음 13:31∼32』『마태복음 13:36∼40』에서 석가모니가 자기 자신을 농사짓는 농부로 비유하고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고 설법한 것은 예수가 자신을 씨뿌리는 자라 비유한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예수가 '길가에 뿌려진 씨앗'과 '돌밭에 뿌려진 씨앗''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든 것과 똑같이 석가모니도 '돌과 나무가 무성한 황무지에 뿌려진 씨앗'을 비유로 들어 잘못된 신앙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점은 불경과 성경이 똑같은 비유,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가 씨를 뿌려서 얻는 수확은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이니 곧 불교의 이상이자 목표인 '해탈'에 이르는 것이요, 예수가 씨를 뿌리는 목적은 '추수 때인 종말의 때'에 천사들의 구원을 얻게 하는 데 있으니 석가모니와 예수가 씨뿌리는 목적 또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말법시대와 말세
불경『아함경』과 성경『마가복음 13:4∼13』『마태복음 24:6∼22』에는 불경의 말법시대와 성경의 말세에는 똑같은, 비참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이 미혹하여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잡아 죽이며,
둘째, 기근과 재앙이,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며,
셋째,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형제가 형제를 잡아 죽이게 되고,
넷째,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활과 칼로 죽이려 싸우게 되고.
다섯째, 불법이 횡행하게 되며,
여섯째, 그러나 서로 죽이는 것을 싫어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깨달은 자들이나 여호와의 선택을 받은 자는 다시 구원을 받아 살 수가 있다는 점에서 불경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말법시대와 말세는 똑같이 묘사되고 있다.
이 세상의 빛
불경『슛타니파아타』『법화경 안락행품』『법화경 서품』과 성경"누가복음 2:30∼32" "누가복음 11:33∼36"『마태복음 5:14∼16』"요한복음 1:4∼11"『요한복음 8:12』를 보면 석가모니와 예수 모두 자신도 빛이요, 횃불이요, 광명이며, 이 성자들의 가르침도 빛이요, 등불이요, 광명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에서 똑같다.
악마와 마귀
성경『마태복음 4:1∼11』『마가복음 1:12∼13』『누가복음 4:1∼13』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도 악마의 시련을 받는 이야기가 『본생경』『아함경』『불소행찬』『불본행경』『잡아함경』등 불경에도 많이 실려 있으며 그 이야기의 구성이나 전개,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려 한 것까지도 불경과 성경이 서로 똑같은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귀가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금식시켜 주리게 해놓고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것이나, 석가모니에게 걸식을 못하도록 해서 주리게 해놓고 다시 걸식하게 권해서 '식욕의 유혹'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나, 마귀와 악마가 한 짓은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향해 던진 미끼였다.
이 때 예수는 배고픔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식욕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대답하였고,
석가모니 또한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광음천처럼 기쁨을 양식으로 먹고 산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던 것이다.
또 마귀가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려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한다.
마찬가지로 악마도 석가모니에게 '나라 전체를 직접 통치'하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예수는 '여호와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였으니 이는 곧 하나님의 진리대로만 살 것이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요,
석가모니가 '물욕을 따르는 자 물욕에 결박될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그 결박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진리, 곧 법을 취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예수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돌에 부딪혀 죽게 하려 한 것이나 데바닷타가 높은 산에서 돌을 던져 그 돌에 맞아 석가모니가 죽게 하려고 한 점이나 '돌'로 해치려고 한 점에서는 그 발상이 같다.
한 명의 배신과 도망친 제자들 이야기
불경『아함경』과 성경『누가복음 22:20∼21』『마태복음 26:20∼25』『마태복음 26:31∼35』『마태복음 26:45∼56』을 보면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기를 배반하고 팔아넘길 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 데바달타가 자기를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제자들에게 얘기했던 점과 같다.
그리고 예수가 검과 몽치를 들고 온 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되자 그의 모든 제자들이 모조리 다 도망갔듯이 석가모니의 제자들도 그의 스승이 코끼리의 위해(危害)에 처했을 때 5백 명이 모두 도망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경고한 것처럼 석가모니는 '악은 악으로 망하는 법'이라고 경고한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야기는 불경『본생경 길상초품』『본생경 바수나품』『아함경 카필라성의 비극』『유마경 향적불품』등과 성경『마가복음 6:35∼45』의 '오병이어(五餠二魚)' 『마가복음 8:1∼9』『마태복음 15:32∼39』의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 이야기가 있다.
불경의 유마힐과 성경의 예수가 똑같이 수많은 사람을 앉혀놓고 없던 음식을 순식간에 만들어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킨 사실이 똑같다는 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먹을 것이 없는 상황, 기적을 일으키는 유마힐과 예수, 배불리 먹는 신자들, 그러고도 남는 여유있는 음식, 이 얼마나 똑같은 구성과 전개이며, 이 얼마나 똑같은 공식에 의해 이야기가 엮어져 있는가?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렵다
불경『방등경』『법사경』과 성경『마가복음 10:21∼30』『누가복음 18:22∼30』에서는 석가모니가 재물을 버리고 법을 따르라고 한 것이나 예수가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한 것이나 그 가르침은 똑같다.
또 석가모니는 재물에 집착하면 열반에 들 수 없다고 하였고, 예수는 부자는 여호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그 말씀인 것이다.
네 자신을 뒤돌아 보라
성경『요한복음 8:1∼11』에서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잡아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다.
이는 '너 자신부터 죄가 있는지 없는지 솔직하게 되돌아 보라'는 이야기이고 여자를 잡아왔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도망쳐 나간 것이다.
불경『불전(佛典)』에도 석가모니가 물건을 훔쳐 도망친 창녀를 잡으려고 찾아다니던 젊은이들에게 '죄지은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들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급하냐'고 힐문하자 젊은이들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다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더 급하다'고 대답하고는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여자와 값진 물건을 훔쳐 도망쳐버린 창녀, 그리고 그 여자를 벌주기 위해 끌고온 사람들과 도망친 창녀를 붙잡기 위해 찾아다니던 젊은이들, 그들에게 너 자신부터 되돌아보라고 요구한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같은 것이다.
남을 비방하기 전에
불경『사십이장경』『법구경』에서 '남의 잘못을 보기는 쉽지만 자기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등겨나 쭉정이처럼 까불어 날리지만 자기잘못은 교활한 도박꾼이 제게 불리한 주사위 눈을 숨기듯 한다'고 한 것이나 성경『마태복음 7:1∼5』의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한 것은 똑같은 내용의 비유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이나 불경에서 '남 듣기 싫은 성낸 말 하지 말라. 남도 그렇게 네게 답할 것이니'라고 한 말이나 그 표현은 똑같은 것이다.
신통술과 기적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대목이 곳곳에 수없이 나오고 있다. 장님을 눈뜨게 하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4천명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벼라별 기적을 자유자재로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예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도 '병자를 고치면서' 복음을 펴고 다녔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가 행하고 다녔다는 기적들의 유형은 이미 불경의『본생경』에 거의 다 있으며, 이외에도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 이야기는 불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독룡(毒龍)을 잡아 밥그릇 속에 담기도 했고, 허공 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기도 했고, 용왕의 세계에 나타나기도 했고, 병자를 고쳤으며, 전염병을 물리치고 홍수를 물리쳤으며, 하늘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를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했으며
석가모니의 제자가 하늘 나라 향적국을 마음대로 왔다갔다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 음식을 얻어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했고, 하늘나라의 왕 제석천왕으로 하여금 하늘밥, 하늘옷을 내리게도 했는가 하면, 석가모니의 제자는 지옥에까지 내려가 지옥중생을 구제하기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은 형용할 수 없이 먼 거리도 잠깐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신통자재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불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과 이적의 원형은 수많은 불경 여기저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불경의 기적들이 조금씩 변형되어 성경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불경『방등경』『유마경』『미린다 왕문경』에는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병든 환자로 비유하고 있으며 '병든 자에게만 의사와 약이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와 약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성경『누가복음 5:30∼32』『마가복음 2:16∼17』에도 예수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괴로움의 바다를 헤매는 중생을 병자로 비유한 불경이나 죄인을 곧 병자요,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성경이나 똑같은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와 그 제자들을 의사로 비유하고 있는 부분이나 예수가 자신을 의원에 비유한 것도 똑같은 이야기이다.
깨우침의 경지와 여호와의 나라
불경의 '해탈'의 경지와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석가모니와 예수의 대답은 똑같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다. 불경『원각경 보안보살장』을 보면 '극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속에 있다' 즉 '心卽是佛'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누가복음 17:20∼21』에서 예수도 '여호와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여호와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한 예수의 가르침이나
'네 마음이 곧 부처다'고 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보물
불경『소송경(小誦經)』『잡아함경』과 성경『마태복음 6:19∼20』『요한복음 17:14∼16』에서 세속적인 재물은 참다운 보물이 아니며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다운 보물은 자비, 경건, 절제, 침착함'이라고 가르친 석가모니의 말씀과'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가르친 예수의 말씀은 똑같으며
그 다음에 계속되는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고 도둑이 훔쳐갈 수 없는 보물을 가지고 떠나라'는 석가모니의 말씀이나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한 예수의 말씀도 똑같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장소가 엄청나게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들려준 가르침은 서로가 서로의 경전을 옮겨놓은 듯이 똑같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대단한 '경전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평등한 사랑
불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면 석가모니의 길고 긴 설법 내용 가운데서 그 핵심부분만을 간단히 추려내어 다이제스트처럼 축약시켜 놓은 대목이 성경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경『법화경 약초유품』『법화경 신해품』과 성경『마태복음 5:39∼47』의 경우도 이와같은 예(例)라 할 것이다.
석가모니가 어떤 차별도 없이 골고루 비를 내리듯이 모든 중생들에게 가르침의 비를 내린다고 했듯이 예수 또한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하나님이 해를 비춰주시고,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서로 돕고 존중하라
불경『백유경(百喩經)』과 성경『고린도전서 12:14∼31』에서는 서로 아끼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화합하라는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석가모니는 뱀의 머리와 꼬리를 비유해서 설법했고, 바울은 같은 가르침을 펴기 위하여 몸과 지체(肢體)의 비유를 들고 있는데 불경과 성경이 똑같이 강조하고자 했던 점은 교단의 화합과 결집이었다.
머리라고 해서 귀중하고 꼬리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 아니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자기만 제일이라고 주장하고 우기다가는 뱀의 몸통은 물론 머리와 꼬리 전체가 다 죽는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만일 한 지체(肢體)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의 수명과 예수의 수명
불경『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는 낳고 죽는 일에서 벗어난 분이요,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미래까지도 그 수명이 늘지도 줄지도 않고 항상 머무르며 무한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깨우치고 지켜주며 괴로움의 바다에서 건져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도 영원히 살아 있으되, 중생들의 깨우침을 위하여 인간의 모습을 잠시 보였을 뿐이라고 불경은 강조하고 있다.
성경『누가복음 24:13∼53』『마가복음 16:1∼20』『마태복음 28:5∼20』에서 예수도 이와 똑같이 세상 끝날이 있음을 알려 주고 그들을 구원에 들게 하기 위하여 잠시 그 모습을 이 세상에 보였다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 갔을 뿐, 결코 죽은 것이 아니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깨어 있으리라'고 하였으니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살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석가모니도 그 수명이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無量壽)니 영생(永生)이요, 예수도 영생(永生)이라, 불경과 성경은 교조(敎祖)의 죽음 그 이후까지도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무덤에서 일어나는 기적
불경에는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성경『마가복음 16:1∼6』『누가복음 24:1∼6』『마태복음 28:1∼4』『요한복음 20:1∼14』에서는 '불경의 무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설명 그대로를 '재현'시켜 놓고 있다.
『미린다 왕문경』에서 나아가세나 존자가 '향이나 화환이나 의복 중 한 가지를 탑, 묘에 바치면 죽은 자를 묻은 탑이나 묘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설명한 그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미리 준비해둔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으며 무덤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무덤의 기적'은 이미 불경의 『미린다 왕문경』에 이론과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 불경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 이른바 예수의 '무덤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기타
석가는 49일 단식했을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예수는 40일간 단식 후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
석가는 12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파견했다.
예수는 12제자를 이스라엘 전역에 파견했다.
석가는 갠지스강을 걸어서 건넜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서 건넜다.
석가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예수는 과부의 한 냥 헌금이 거룩하다고 했다.
[ S. 라다 크리슈난 <석가와 예수의 대화> 중에서 ]
불경과 신약성서가 왜 이렇게 같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인도에서의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와 기독교의 영지주의와 불교와의 관계 등을 알면 자동적으로 풀리는 문제이다.
영지주의가 활짝 꽃 피었을 당시는(서기 80년 ~200년) 그리이스-로마 세계와 극동지역간의 무역로가 열리고 있었던 중이었고, 불교 포교사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알레산드리아에서 포교하고 있었다.
또한 그리이스어를 아는 기독교인이었던 로마의 히폴리투스(225년경)가 인도의 브라만교도들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전승을 이단의 원천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 일레인 페이젤 <성서 밖의 예수> 방건웅,박희순譯, p24, 정신세계사, 1989 ] 볼 때 불교나 힌두교가 기독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영지주의 복음서인 "토마스(도마)복음서"에 있었던 말 중에 '여호와는 너희들 안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는 말은 불교의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이고 또 그 다음에 계속된 문장은 "법화경 방편품"의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다 『도마복음서』의 존재는 예수의 사상이 불교사상 그 중에서도 불성내재론(佛性內在論)을 역설한 『법화경』과 유사하다.
유태교의 토양에서는 이러한 사상이 발생할 여지가 없으므로 불교의 『법화경』사상이 실크로드를 거쳐 이스라엘에까지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예수 자신이 인도와 간다라, 티벳트에서 배워 왔을 가능성도 있다. [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p27, 가이아, 1999 ]
이러한 불교적인 색채들이 비단 영지주의 복음서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소위 '정경(正經)'으로 분류해 놓은 복음서에서조차도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불교적인 요소들을 빼어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예수가 영적인 스승이었다기보다는 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으며, 종말을 예언한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뿐이다.
[ 루이아모르著, 류시화譯 <성서 속의 부다> p257 ]
[출처] 성경, 신약은 불경의 복사판|작성자 솔한나 블로그 <부자 되세요. 진정한 부자가.... > 글 중에서
로마제국시대의 종교회의 /< 반기독교 안티예수> 글 중에서
1. 제1차 종교회의 |
글쓴이 : . 날짜 : 2002-07-29 (월) 12:07 |
니케아에서의 제1차 범 종교회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소집. 속셈은 한창 번창중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업고 로마제국을 굳혀놓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가 318명의 주교들을 선발, 소집했던 배후에는 이빨을 드러낸 파워폴리틱스(Power Politics)에서였고, 종교야 어찌되건 관심밖의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던 주교들도 짐작 못한 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①회의를 사회했고 ②내 뜻은 바로 교회의 법률이라는 성명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를 <세계의 주교>격으로 영입시켜 속세의 왕으로서 교리에 관한 투표에 참가시켰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니 뭐니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그는 미트라의 태양숭배를 받들었었고 기독교세상이 된 뒤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神의 초상을 조각,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놓고 있다. 희랍에 옛날부터 있어 오는 비잔틴에 자기 이름을 붙여 330년 콘스탄티노플로 고쳤는가 하면, 여기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했을 때에도 역시 기독교적인 겸허따위는 오불관언,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노예를 폐지하려는 생각은 커녕 오히려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하였다. 그럼, 이 폭군은 교회정책의 어떤 결정에 참여했던 것일까? 당시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하는 아타나시우스의 설과 신은 오직 하나뿐이므로 그리스도는 신을 닮아 있을 뿐이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의 설이 대립되어 있었다. 이것이 많은 사제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파급되어 대립이 심각해지자,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 고문관인 오시우스를 보내어 진상을 조사케 했다. 오시우스는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라고 했다. 그는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허물어지고 믿음에 혼돈이 생겨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 당시는 유럽, 이집트, 서남아시아의 전지역에 퍼져있던 미트라 신앙이 쇠퇴하고 그 대신 기독교가 국교(313)화된 시점이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 교리의 절대적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로마제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없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속적, 정치적 속셈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친히 회의를 주도하고 토론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 대부분은 극단의 양 견해를 피하고 중간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채택되도록 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해 아버지격이 되는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는 동등하다고 결의케 했다. 결국 단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참석자가 아타나시우스에게 표를 던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니케아회의의 결정이 신의 감화에 의한 것이라고 자랑했고,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본래 페르시아의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세례를 받은, 신학적 논리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이러한 황제의 영향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신앙의 의식이나 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미트라 신앙이 기독교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따로 후술할 것임) 그러나 그 후 황제의 입법으로서 손질을 한, 이 변경은 교회의 핵심<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비기독교인인 콘스탄티누스는 또 그 이상의 공적도 교회에 기여했다. 예수의 무덤을 사상 처음 발견하여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그해에 그는 근친 몇몇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들 그리스프스, 처 파우스타를 끓는 열탕 속에 처넣어 죽였고, 장인 마키시미안을 체포하여 자결시켰다. <니케아의 신앙 선언>을 주재하여 회의를 끝낸 뒤, 318명 주교들의 합의야말로 하느님의 결정이라는 것을 기독교 교단에 회람을 돌린 인물은 대주교격인 황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르메니아, 그리이스, 러시아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받기까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 미트라(Mithras) 신앙과 기독교 흔히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미트라 신앙을 고대의 잡신 신앙이나 원시신앙으로 매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미트라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뿌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태양신으로 널리 알려진 미트라에 대한 신앙은 약 사천년 전,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라 신앙은 동으로는 인도에서 중국까지 서로는 로마국경의 전 범위, 즉 스코틀랜드에서 사하라 사막, 스페인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미트라를 숭배했던 장소들이 영국,이태리,루마니아,독일,헝가리,불가리아,터기,페르시아,아르메니아,시리아,이스라엘,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된다. 미트라 신앙은 로마제국에서 로마 군인들의 종교가 되었고, 제국 전역에 사원과 성전이 세워진다. 그들은 미트라에움이라는 자연적인 동굴모양을 모방해서 만든 사원에서 의식을 행했는데,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미트라" 동굴에서 꼭 발견되는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한 인물이 황소의 목을 따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황소를 제압하는 인물이 "미트라"로써 태양신의 아들이다.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월 25 일로 경축되었다.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하였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와 일치하며 12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즉, "미트라" 숭배자들이 믿었던 천국과 지옥, 죽은 자가 부활하는 심판의 마지막날,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위해 현존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최후의 전쟁, 구세주의 고통과 형벌이 신자를 구원하게 되리라는 교리, 영을 통해 거듭 태어난다는 것, 구원, 부활, 재림 등의 교리, 최후의 만찬 이야기 등등 너무도 흡사하다. 또 미트라신은 처녀한테서 태어났는데 예수도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또 미트라의 탄생을 경축하는 축제가 12월 25일에 열렸는데 이를 기독교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예수의 생일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세례의식과 피와 포도주에 의한 성화의례가 있다. 기독교 사제의 명칭인 파더(Father)는 미트라교 사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미트라교의 주교는 자신들 직책의 상징으로 미트라 또는 미테르(주교관)을 썼는데 기독교의 주교들 또한 이러한 미테르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은 연유로 라즈니쉬는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라고 선언한 것이다. " 믿기지 않겠지만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 황제이다. 기독교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중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도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인으로 죽었지만, 임종직전에 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다. 바로 이런 관계로 예수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다. 예수 역시 토요일을 안식일로 믿고 평생 살았다.. 태양의 숭배자들은 항상 태양의 날이 신성한 날이라고 믿어왔다. 실제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이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기 때문에 그의 압력하에 성직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찬성하게 된 것이다. 바로 콘스탄틴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신격화는 콘스탄틴의 착안이다. 또 콘스탄틴은 예수의 생일을 1월 6일에서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바꾸었다. 12월 25일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전세계적으로 경축해온 태양신의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발상 전체는 꾸며진 것이다. 예수는 1월 6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영향력에 의해 예수의 생일은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둔갑된 것이다. 태양숭배자들은, 태양이 12월 25일에 탄생했다고 생각해 왔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채..... 교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중들에게 철저히 감추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수호인가? 거짓의 방어일 뿐이다. 콘스탄틴은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케자리아의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콘스탄틴은 그 자신을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마지막 예언자로 만들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십자가에 매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왕권의 원조를 원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비지니스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틴이 참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런 사실은 대중들에게 공표된 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라즈니쉬) |
2. 제2차 종교회의 | ||||||||||||||||||
글쓴이 : . 날짜 : 2002-07-29 (월) 12:06 | ||||||||||||||||||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2차 종교회의를 소집한 주역은 교회가 대제(大帝)의 칭호를 봉헌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이 황제는 도덕적 소질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황제에 뒤지지 않았다.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들볶는 악취미가 있어 하류층 백성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중세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권한으로 만약 누가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도 했었던 폭군이었다. 경건한 종교회의가 있은 지 10년 뒤, 즉 기원 390년에는 데사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을 참살시키기도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때는 기독교에서 <할렐루야>라는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의 기도가 도입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테오도시오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여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그는 암브로시우스로 하여금 타종교의 성소(聖所)들을 모조리 파괴시켜 버리게 하였다. 이 소행은 실제로 이단심문(異端審問)의 시조라고 불러 주어야 마땅한 처사였다. 그럼 콘스탄티노플의 제2차 종교회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났던 것일까? 신학전문가들로부터 <산송장 회의(殘骸 會議)>라는 욕을 먹고 있는 이 모임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중차대한 신앙조항이 교회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삼위일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삼위일체설은 지금까지도 교회의 주식(主食)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출처] 반기독교 안티예수 - http://baroseum.net/bbs/board.php?bo_table=tb303&wr_id=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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