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금지한 비밀

2013. 12. 26. 13:17경전 이야기

 

 

 

 

 

       교회가 금지한 비밀


기독교의 가르침이란 것이 수 세기를 전해내려 오는 동안 삭제되고 편집, 수정되어 특정 이익집단(이 일에 중요한 이해가 걸려 있는 단체와 개인들)의 필요에 맞게 예수와 그 시대를 그려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익집단을 곤란케 만드는 모든 것(예를 들면 <비밀복음> <마가복음>)들은 신약에서 삭제되었다. 너무 많이 삭제되는 바람에 일종의 공백마저 생겼다. 이 공백을 상상이 메워 정당화되고 또 불가결해졌다.

 

만일 예수가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라면 그가 적어도 초기에는 소수의 민중(갈릴리에서 온 가족, 그 자신의 귀족 계층, 유데아와 예루살렘의 소수 고관)으로 부터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지원으로는 왕위를 계승하는데는 여건이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계층에서 더 많은 추종세력을 규합해야 했을 것이다.

다수의 추종세력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 십중팔구 사람들의 충성과 지지를 끌어내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방법이 적합했을 것인데 아마도 매우 고상하고, 불타는 이상주의를 갖춘 훌륭한 신앙의 형태로 선포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바로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메시지를 선포했다. 가난한 사람들, 피해를 입는 사람들, 약탈당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에게 그는 희망을 주었으며, 동시에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색채도 띠고 있었고, 그 메시지는 언제나 가난한 피압박 민중 속에서 메아리쳤기 때문에 수 많은 추종자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복음서를 통해 볼 때 예수의 메시지는 완전히 새로운 것도, 유별난 것도 아니다. 예수 자신이 바리새인(人)이어서 그의 가르침에 여러 가지 바리새적 교리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 자신은 무한히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그는 어쩌면 병의 치료나 기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것이며, 신기하고 생생한 우화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전파하는 천부의 재능을 가졌었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그의 가족과 귀족, 부자, 그 밖의 영향력 있는 핵심 지지자들이 이미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예수 왕국을 건설한다는 정치적 목적에 있어서는 이해가 일치되었으나 그 동기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따라서 그 과업이 실패하자 메시지를 중시하는 세력과 왕통을 찾으려는 세력 간의 불안한 동맹은 붕괴되었으며, 조직의 붕괴와 학살에 직면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갔다.

왕통복위론자들은 그들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보존하려는 혈통을 위해 망명을 작정했다. 그러나 메시지에 매혹된 사람들에겐 혈통의 장래 같은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엔 혈통은 2차적 문제였으며 그들에게 꿈과 약속을 심어준 메시지의 전파가 목전의 과제였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이들 메시지 신봉자들의 덕분에 수많은 세월을 거쳐 오늘에 이른 셈이다.
성 바오로 때 <메시지>는 이미 집약되었으며, 종교의 기본적 골격이 완성되었다.


기독교는 1차적으로 로마인 또는 로마화 된 청중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를 신(神)으로 모시는 데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미 시저(케사르)를 신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도 신격화돼야 했다.

기독교가 팔레스타인에서 시리아, 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로마, 서유럽에 이르기까지 성공리에 전파되기까지는 그 지역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끔 만들어져야 했으며, 기존 신(神)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력, 장엄함, 기적의 시행 등 여러 분야에서 타 종교와 필적할 만해야 했다.

시리아, 포에네시아, 이집트 등의 '메시아'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현신 할 신(神)이 돼야 했으며, <부활>의 중요성을 띠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를 타무스, 아도니스, 아티스오시리스 같은 신(神)과 동격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함이었다. 똑같은 이유로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얘기도 널리 선포되었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극복하는 부활절도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봄 의식에 때를 맞추었다.

여호와의 종교를 전파하는 필요성에 밀려 현실의 왕족 혈통과 그에 따른 정치적 왕조적 요인들은 2차적 일로 밀려났다. 그런 방향으로의 관심을 더욱 깊게 하기 위해 예수의 경력에서 정치적이고 왕조적인 요인들은 제거되었다. 또한 제알롯과 에세네 교리에 관한 흔적도 철저히 말살되었다.

신(神)은 애당초 정치적 음모 따위에는 관련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결국 복음서에는 신화 같은 얘기, 로마 점령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우연히 일어난 전설 같은 내용만이 수록되었다.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 <메시지>신봉자들에게는 이들 예수 후손의 존재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 존재가 언젠가는 상당한 위험 요인으로 등장할지 몰랐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증언자인 그 가족은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진 진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작된 신화쯤은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예수의 혈통에 관한 무서운 비밀을 보존하기 위해, <메시지 신봉자>들과 새로운 신화의 포교자 들은 유대인을 책망하고 로마인을 면책해줌으로써 사실상 이중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들은 신화와 <메시지>를 로마 청중에게 솔깃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가족의 신뢰를 헐뜯었다. 그래서 그들이 조장한 반 유대 감정은 갈수록 깊어갔다.

로마 청중의 비위를 맞추고 예수를 신격화하며 유대인을 속죄양으로 이용함으로써 뒤에 정통 기독교가 된 새 신화의 전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정교의 입장은 2세기에, 특히 기원 180년 경 리용의 주교 이레나에우스에 의해 스스로의 터전을 확정적으로 굳혔다.

초기 기독교에서 옆길로 간 여러 가지 형태의 교파 가운데 그노시스파가 있다. 이 교파는 이레나에우스의 분노를 가장 극심하게 자아냈다. 그노시스 교리는 개인적 경험, 개인과 신과의 연합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레나에우스가 볼 때 이 교리는 사제와 주교들의 권위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일체성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그노시스 교리를 탄압했다.

이레나에우스는 개인적 경험과 그노시스 교리에 대항하여 사도적 기반과 계승에 입각한 단일 <카톨릭>(우주적인) 교회를 주장했다.

그는 모든 자료를 동원하여 더러는 빼고 더러는 삽입하면서 신약의 기초가 된 성전을 최초로 저술하였다. 그 후 콘스탄틴 치하에서 로마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왕국이 되었다.
 
콘스탄틴은 「로마 제국을 기독교 제국으로 바꾼」사람으로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실제로 콘스탄틴은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의「개종」은 기독교가 아니라 이교인 것 같다. 당시 그의 군대를 수행한 목격자에 의하면 그가 본 환영은 태양신이었다.

콘스탄틴은 계시를 받기 전「솔 인빅투스(보이지 않는 태양)」숭배에 가입했다는 증거가 있다. 로마 원로원은 원형경기장에 전쟁승리의 아치를 세웠다. 그 아치에는 <콘스탄틴의 승리는「신의 덕택」>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 신은 예수가 아니며 이교도들이 받드는 태양신이었다.


 전설과는 달리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지는 않았다. 콘스탄틴 자신은 전 생애를 통해 이 이교의 사제로 봉사했다. 그의 왕국은 「태양 제국」으로 불려졌으며, 「솔 인빅투스」라는 제국의 깃발과 동전 등 도처에 그 흔적을 남겼다.

그는 임종의 침상에 누워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는 그의 상태가 너무 쇠잔하여 세례에 대해 「항의」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또 한 군대에 '그리스도' 문장을 휴대케 한 것도 그가 아니었다. 폼페이의 무덤에서 이 문장이 새겨진 명각이 나왔는데, 그건 2세기 반 전에 만들어 진 것이었다.


솔 인빅투스교의 가장 중요한 날은 12월 25일 이었다. 이 날은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기점으로 <태양의 생일>로 기념되었다. 이런 점에서도 기독교는 정부 및 기존 국교와 제휴한 셈이다.


기원 303년 디오클레티아 황제는 모든 기독교 서적을 파괴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기독교 서적들, 특히 로마에 있던 서적들은 거의 없어졌다. 콘스탄틴이 새로운 성경의 작성을 지시하자 정교 관계자들은 그들의 교리에 맞게 성경 내용을 수정·편집·가필했다.

신약 내용에 결정적 변경이 생기고 예수가 지금과 같은 별난 지위를 갖게 된 건 바로 이때부터였다.


콘스탄틴이 취한 조처의 중요성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초기의 신약성서 5천부 가운데 4세기 전에 나온 건 한 권도 없다. 오늘날 존재하는 신약은 본질적으로 4세기 때 편집자와 저자들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들은 정교의 관리자인 동시에 이른바 <메시지 신봉자>들로서 예수의 실상에 대해 숨겨야 할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다


(바이블의 진실)

[출처] 예수, 교회가 금지한 비밀|작성자 솔한나                     블로그 <부자 되세요.  진정한 부자가.... >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