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문화탐방에서 본 향례 ㅡ 백제금동대향로 / 서정록 교수

2013. 5. 14. 07:18향 이야기

 

 

 

 

백제의 기상,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제 287호

전체높이 64cm, 지름 20cm이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회랑 부근에 위치한 건물터 바닥 구덩이에서 진흙 속에 묻힌 채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대형 향로(香爐)이다.

 

 

능산리 고분리 및 능산리사지 일원전경

 

목관수조내 향로 출토 모습

 

 

 

백제금동대향로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맨 위의 봉황과 뚜껑의 산악도,

그리고 연꽃이 장식된 노신과 이를 물고 있는 용받침이다.

그리고 맨 위의 봉황과 뚜껑의 산악도는 하나의 주물로 만들어져 있고,

따라서 향로는 본래 세 부분으로 분리되어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향로 본체는 가운데 테두리의 '흐르는 구름문양'을 경계로,

위쪽의 삼산형 산악도와 아래쪽의 연지의 수상생태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산악도에는 삼산형 산들을 배경으로 기마수렵인물들을 포함한 신선풍의 인물들과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곳곳에 장식된 폭포, 나무들, 불꽃문양, 귀면상 등은 산악도의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었으며,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산에는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춤을 추고 있었고,

봉황의 바로 아래에는 5악사가 완함 등 서역 악기를 연주하며 둘러앉아 있었고

다시 그 주위에는 다섯 봉우리에 다섯 마리의 새가 봉황과 함께 너울너울 춤추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서 잘못 된 정보들도 있습니다.

이 백제금동대향로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야기나,

중국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백제인들에 의해서 제작되었음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증거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첫번째,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銅托銀盞)]이다.

 

 

[동탁은잔(銅托銀盞)]

 

 

뚜껑 중앙에 장식된 연꽃과 연꽃 형태로 된 손잡이 부분을 제외하면,

뚱겅의 둘레에 산악도가 장식되어 있고,

잔의 윗 부분에  자 형태의 '유운문', 즉 흐르는 구름무늬가 있으며

다시 그 아래에 세 마리의 용이 연꽃을 둘러싸고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산악도 - 유운문 - 연꽃과 용 으로 이루어진

백제대향로의 구성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탁은잔의 산악도 위에는 두 마리의 봉황이 천공을 날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대향로의 산악도 위에 봉황이 장식되어 있는 것과 기본 발상이 동일하다.

따라서 백제대향로는 동탁은잔의 구성을 보다 확대한 경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양자의 구성은 뚜렷한 연속성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백제대향로를 제작한 장인들이 동탁은잔의 실물을 본 적이 있거나 그 구성을

익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백제대향로가 무령왕 때(501~523)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두번째, 부여외리에서 출토된 산수산경문전과 산수봉황문전이다.

 

     

    

    ▲ 산수봉황문전                                                    산수산경문전

 

 

백제대향로의 산악도는 '삼산형' 산들이 중첩된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위의 문양전에 묘사된 산들의 양식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특히, 산수봉황문전의 산악도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와 그 정상에 장식된 봉황의 구도와 거의 동일합니다.

 

 

반룡문전

 

뿐만 아니라 백제대향로의 용장식 역시 같은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반룡문전에 장식된

용과 대단히 흡사합니다.

전자가 3차원의 공간에 입체화되어 있고 후자가 평면에 부조로 장식된 점을 제외하면 사실 동일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닮아 있는 것이다. 

 

세번째,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에 장식되어 있는 수렵도

 

백제대향로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중국 남북조시대 향로의 산악도에는 수렵도가 장식된 예가 없습니다.

비록 한나라 때의 박산향로 중에 그러한 유의 수렵도를 가진 향로들이 있다지만,

그러한 향로들은 후한 시대에 이미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해 위진 시대에 이르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산악도가 한나라 때 박산향로의 산악도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졋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왜냐하면 수세기 전에 사라진 이국의 향로를 복원해 재현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대향로 산악도의 수렵도는 동시대 중국 향로의 산악도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수렵도가 갖는 의미와는 별도로 중국에서 백제대향로가 왔을 가능성을 차단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네번째, 백제대향로의 공간 구분방식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공간 구획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사실.

   

  

쌍영총 현실의 모사도                                                  쌍영총 팔각석주

 

쌍영총 현실의 두 팔각기둥을 보면 기둥의 상단과 하단에 연꽃이 장식되어 있어 일종의

연꽃주두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바로 그 기둥에 황룡이 장식되어 있다.

이 황룡은 기둥을 휘감고 연꽃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어

용이 노신의 연꽃을 물고 비상하는 백제대향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여기서 우리 백제대향로와 고구려 고분벽화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우에 한쪽은 향로이고 다른 쪽은 벽화라는 기물상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공간 구획 방식이나 구성상의 유사성은 백제대향로의 세계관내지 우주관이

고구려인들의 그것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다만 고구려고분에서는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의 삼산형 산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백제대향로가 고구려 고분벽화와는 또 다른 양식상의 특징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다섯번째, 봉황을 중심으로 하는 5악사와 기러기의 상징 체계만 해도 그렇다.

이러한 상징체계는 중국의 향로사는 물론 중국의 미술사에 등장한 바가 없다.

또 5악사가 들고 있는 악시들의 구성은 남조나 북조보다는 오히려 고구려의 주악도의 구성과 친연관계를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백제대향로가 중국과는 그 문화적 배경을 달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상의 몇 가지 양식적 특징과 중국의 박산향로에서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상징체계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백제대향로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결코 아니며 백제인들의 손으로 직접 제작한 기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금동대향로에 담긴 내용은 무엇일까요?

정말 중국의 불교 연화화생론으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우선 많은 불교 학자들이 노신에 장식된 연꽃을 두고 연화화생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제대향로에서 연꽃을 제외하면 딱히 불교와 관련된 상징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연꽃의 줄기를 물고 비상하는 용을 불교의 용(naga)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지만,

이 경우에도 단지 그런 것 같다는 견해일 뿐 구체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대향로 노신의 연꽃은 백제의 장인들이 북위 향로의 노신에 장식된 로제트 문양이 갖고 있는

태양의 광명의 의미를 고대 동이계의 '광휘의 연꽃'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이는 백제대향로 노신의 연꽃장식이 불교의 연화화생설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고대 동북아인들은 불교가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연꽃을 태양의 광휘를 상징하는 '태양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지상의 연못에 대응하는 하늘연못이 있으며, 지상의 연꽃은

이 하늘연못에 거꾸로 심어진 연꽃(또는 태양)의 광휘를 받아 이 세상을 환히 밝힌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왕궁이나 고분 천정에 '하늘연못', 즉 천정(天井)을 만들고 거기에

연꽃을 거꾸로 심었던 겁니다. 중국 한대의 기남 화상석묘나 고구려고분의 천정에

장식된 연꽃이 그러한 예입니다.

 

연ㅁ소과 짝을 이루는 용에 대해서도 고대인들은 일찍부터 지상의 연못과 하늘의 연못 사이를

순환하며 물을 조절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백제대향로의 '연꽃과 용' 유의 상징체계를 갖고 있는

고대 동아시아의 유물 역시 한나라와 그 이전의 유물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연꽃과 용'의 상징체계를 무리하게 불교의

연화화생설로 풀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느낌.

 

이 이야기들은 제가 서정록 교수님의 백제금동대향로를 일고 적은 것입니다.

아직 제가 다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도 있고

더 자세하게 설명드리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 있는 이야기들만으로도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과 무관하게

백제인 고유의 생사관, 세계관을 반영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살았던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

이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연구가

조금 더 발전하고 왜곡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서정록 교수님의 백제금동대향로를 읽고

 

 

백제금동대향로 조금 더 자세한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