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1. 02:00ㆍ들꽃다회
13. 남산 목멱(木覓)다회 - 20140118 오전
다실 <풀옷>에서 차유희(茶遊戱)
나눔잔 (공도배)에 들어 있는 염료는 찻물+ 말린 맨드라미 꽃 우려낸 물
갑골문체의 다선(茶禪)을 찻물을 흘려 쓰고 있는 중임.........
외곽의 검은색은 쥐똥나무 열매에서 검은색 염료를 추출한 것임......
장춘단 공원에 있는 전통찻집 <다담에 뜰> - 전통식당을 겸함.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부분)은 신라호텔.
중국대륙은 차 상용인구가 우리나라 보다 훨씬 많고 전국민이 차를 일상에서 자주 마신다.
중국 여행을 하다가 보면 우리나라 처럼 차만 전문적으로 파는 전통찻집은 흔하지 않고
차관(茶館)이라고 간판이 붙은 집을 들어가 보면 차와 식당을 겸하고 한자리에서 주류도 곁들여
마실 수 있는 공간이 흔하다. 아니면 Shop in shop 방식으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과
식당을 층을 달리하거나 한층내에서도 공간을 구획하여 운영하는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리 흔하지도 않은 차전문점을 하다가 운영난으로 문을 닫는 곳을 가끔
볼 수 있는 데, 차의 상용인구가 중국보다 휠씬 적은 점을 감안하면 차만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소수만을 유지하더라도 전통식당과 차전문점이 하나로 통합된 만남의 공간이나 장소 등이
많이 생겨나야 차문화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고, 상용음료화된 커피전문점과 경쟁성이 있으며,
차의 보급이 지금 보다 훨씬 수월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담에 뜰> 전경
다담에 뜰의 번와(燔瓦)할때 나온 기와를 재활용한 꽃담
부산에서 목멱다회에 참석하러 오신 안다(安茶)님
<다담에 뜰> 건축미를 감상하는 안다님
아차산 뚝섬, 서울의 숲 하이야트 호텔
남산에서 바라 본 강남일대 풍광 한남대교 하이야트 호텔 반포대교
청계산 반포대로 관악산 용산구 일대
남산타워 - 전망대와 방송용탑
언약의 자물쇠와 남산 팔각정 - 사진 오른쪽에 있는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팥배나무
남산 정상에 있는 팥배나무
팥배를 물고 있는 직박구리..........
남산은 조선시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궁궐 남쪽에 있는 산으로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목멱산은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남산의 고유명은 목멱산, 인경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을 목멱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산 위에 목멱신사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태조 4년(1395) 12월에 북산인 백악산신을 진국백,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하여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게 하고 목멱대왕을 봉사하는 사당을 목멱신사, 이 신사가 있는 산을 목멱산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남산 꼭대기에 자리한 목멱신사를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사당이라 하여 일명 '국사당'이라고도 했다. 이 국사당 건물은 지금의 서울타워가 있는 언저리 성벽 안에 자리했다.
남산은 그 모습이 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은 것 같다(走馬脫鞍形)고 하고, 남산의 서쪽 봉우리를 누에머리라고 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누에는 뽕 잎을 먹고 살기 때문에 남산의 지덕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뽕잎을 대어 줄 필요가 있으므로 남산이 맞바로 보이는 한강 건너 사평리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의 지명은 잠실로 바뀌어 잠원동이 되었다.
남산은 중구와 용산구 경계로, 북쪽의 북악,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 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중의 하나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였을 때 남산은 풍수지리상 안산 겸 주작(朱雀)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었다.
1394년 한양천도 이전까지만 해도 남산은 한갓 작고 평범한 뫼에 지나지 않아 인경산이라고 불렸지만, 조선의 도읍지로 되면서 역사의 중심무대에 올려졌다. 조선 정부는 남산을 남쪽의 외적을 막는 자연의 방패로 삼아 태조 5년(1396) 1월에 1차로 18km의 도성을 쌓고, 다시 2차로 그해 8월에 보수했다.
남산은 조선초 태종 6년(1406) 12월부터 갑오개혁 때까지 500년간 국방의 중요한 시설인 5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전국의 봉수를 받아 국경이나 해안의 이상 유무를 병조(兵曹)에 보고했다. 조선 후기에는 어영청의 분영인 남소영과 금위영의 분영인 남별영이 남산 기슭에 자리하여 남산 일대를 무예훈련장으로 삼았다.
정부는 1955년 7월 11일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을 확장했고, 1959년 3월 12일에는 내무부에서 '남산대공원'으로 명칭을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음 카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무심재 님의 글 중에서
남산 팔각정 앞마당의 크리스마스 트리
남산 정상에 있는 통신용탑 - 현대판 봉수대 역활을 함..........
팥배는 겨울철 산새들에게 휼륭한 먹이감이 되고.......
- 도심지에서 정원이 있는 집일 수록 이런 작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를 조경수로 심으면
봄철에 꽃을 감상하기 좋고 , 꽃향기에 취할 수 있으며 (이런 자연의 향기는 인위적인
향례(香禮) 보다 훨씬 고결한 향을 즐길 수 있다) 겨울에 소동물이나 산새들을 불러들여
우리의 삶을 한결 운치있고 윤택하게 해 준다.
팥배나무 열매를 물고 잇는 직박구리
한양(고려 남경)의 명칭과 조선의 남경(한양)천도
조선의 도읍지 한양(고려 남경)
참고 고려의 3경=송경(=송도=개경=개성),남경(한양),동경(경주)
고려의 400년 수도 개성은 고구려시기에 동비홀(冬比忽)과 부소갑(扶蘇岬)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후기신라 때에 동비홀은 개성(開城)으로, 부소갑은 송악(松岳)으로 고쳐졌다. 고려 건국 후 919년 개성과 송악이 통합되어 개주(開州)가 되면서 고려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 개성은 개경, 황도, 황성, 경도 등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주로 송도, 송경, 중경, 개성이라고 불리웠다.<백과사전>
고려의 삼경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성종 때 경주에 동경(東京)이 설치되면서 수도인 송경(=개경(開京, 또는 中京)=송도=개성)과 평양에 설치된 서경(西京)을 합해 삼경이라 칭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문종 때에 남경(한양)이 설치되어 사경(四京)이 되었다. 그러나 사경이라는 호칭을 피해 때로는 송경(개경)을, 때로는 동경을 제외시켜서 삼경이라 칭하였다. 송경(개경)을 제외시킨 삼경은 지방 행정 구획상의 지칭이고, 동경을 제외시킨 삼경은 국왕 순수경(巡狩京)으로서의 지칭이었다.
남경(한양)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1067년(문종 21)인데, 남경 궁궐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 해이다. 문종이 남경을 설치한 동기는 『도선기(道詵記)』·『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에, 삼각산 아래 지역이 제왕(帝王)의 도읍이 될 만하다는 내용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을 믿었기 때문이다.
상서의 내용은 삼각산의 남쪽 종남산(=목멱산(木覓山)=남산)(한국의 종남산은 경남 밀양에 있음)의 북쪽 평지에 남경도성을 건립하고 수시로 순주(巡駐 : 임금이 나라 안을 순행하며 머묾.)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뒤 1099년 왕명으로 남경의 재설치를 논의했고, 2년 뒤 9월에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였다.
남경이 설치된 지역은 원래 양주 땅으로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여 있었다.
그러나 1069년(문종 23) 경기를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신경기(新京畿)가 만들어지자 남경은 이 신경기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문종은 이곳에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을 설치하였다.남경유수관에는 3품 이상으로 임명하는 유수(留守) 1인, 4품 이상의 부유수(副留守) 1인, 6품 이상의 판관(判官) 1인, 8품 이상의 법조(法曹) 1인, 9품 이상의 문사(文師)·의사(醫師) 각 1인 등의 관원이 배속되었다.그 뒤 남경유수관은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고, 윤(尹)·판관(判官)·사록(司錄) 등의 관원이 두어졌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연구(硏究)』(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0)
「고려시대(高麗時代) 경기(京畿)의 통치제(統治制)」(변태섭, 『고려정치제도사연구(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혼성여단이 주둔한 만리동 고개에서 바라본 남산과 경성 남쪽의 풍경.
남산 일대 풍경을 담은 가장 오래된 사진 가운데 하나다.
남산의 유래
남산이 역사의 무대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문종 21년(106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이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하고 유수관을 두어 지방제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동으로 대봉(大峰·낙산), 서로 기봉(岐峰·안산), 북으로 면악(面嶽·북악산), 남으로 사리(沙里·용산 남단)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공간 범위의 설정은 남산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역사에서 남산의 지리적 중요성이 명실상부하게 갖춰지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조선시대에 이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던 때부터다. 이씨 왕조가 주산을 백악산(현 북악)으로 삼고, 좌청룡 인왕산과 우백호 낙산 그리고 안산(案山)으로 남산을 삼아서 도성의 풍수적 국면을 형성하면서, 남산은 조선시대 한양의 랜드마크로 우뚝 섰던 것이다. 이름도 한양 도성의 남쪽에 자리잡은 산이라고 하여 남산이 되었으니, 목멱산(木覓山)·종남산(終南山)·인경산(仁慶山 또는 引慶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 다른 고유지명이 있지만, 위치를 가리키던 남산이라는 이름이 대표지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수선전도(민화풍)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성균관과 사대문이 나타나 있음,
경복궁은 임난때 화재로 궁궐터만 나타냄
- 다음 아고라 hydi95 님의 글 중에서 발췌
목멱다회
강진요 청자잔과 안다님의 분청찻잔
가평요의 자고새(鷓鴣) 문양의 다관에는 운남성의 대엽종 차로 만든 홍차인 전홍(滇紅)
은다관에는 중국 오룡차 계열인 철관음
오동다관에는 운남성의 보이차 - 2011년산 노반장
다포의 글씨는 한단고기에서 따온 갑골문체의 제세핵랑(濟世核郞 : 배달국 환국을 처음으로 연 무리들)
안다님이 직접 만든 명선(지리산 녹차) , 그리고 손으로 비벼 말린 황차계통인 다독다독(잭살)
나무표주박에 각한 글씨도 갑골문체 명선(茗禪), 손잡이의 검은 글씨는 담한초당(曇閒草堂)
남산 봉수대 - 전국 각처의 산봉우리에 있는 봉화 신호의 시발점이자 종착역.........
미세 먼지로 대기상태는 다소 뿌염........
여의도, 용산 일대 풍경 63빌딩 LG쌍동이빌딩
안산 무악재 인왕산
남산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시내 풍경 인왕산 비봉 문수봉 보현봉 삼각산 도봉산
향로봉 비봉 문수봉,보현봉 삼각산(만장봉,백운대,인수봉) 도봉산
북한산 (원래 이름은 삼각산 三角山),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도심지 숲은 궁궐로 좌로부터 덕수궁, 창경궁, 종묘........ 수락산 불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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