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의 청장관전서 해제 / 한국고전종합DB

2014. 2. 28. 12:43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판심제  없음
간종  사본(寫本)
간행년  1900년대 전기 필사
권책  67권 3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9×16.2(cm)
어미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917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57~259
 저자
성명  이덕무(李德懋)
생년  1741년(영조 17)
몰년  1793년(정조 17)
 무관(懋官)
 청장관(靑莊館), 형암(炯菴), 아정(雅亭), 선귤당(蟬橘堂), 단좌헌(端坐軒), 사이재거사(四以齋居士), 주충어재(注蟲魚齋), 학상촌부(鶴上村夫), 학초목당(學草木堂), 향초원(香草園), 한죽당(寒竹堂)
초자  명숙(明叔)
본관  전주(全州)
특기사항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
 가계도
 李必益
 府使
 李聖麟
 
 金澋의 女
 
 李聖濡
 
 李聖沃
 
 尹漢壽의 女
 
 李聖浩
 
 潘南朴氏
 朴師濂의 女
 李德懋
 
 水原白氏
 白師宏의 女
 李光葵
 檢書官
 鄭義進의 女
 
 女
 
 柳烍
 
 女
 
 金思黃
 
 李功懋  
 檢書官
 李彦懋  
 知彀官
 女
 
 徐理修
 檢書官

기사전거 : 遺事(李光葵 撰, 雅亭遺稿 卷8, 奎章閣), 韓國系行譜, 本集內容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영조 17 1741 신유 乾隆 6 1 6월 11일, 서울 中部 寬仁坊 大寺洞에서 태어나다.
영조 22 1746 병인 乾隆 11 6 鄕校洞 樓泉으로 이사하다.
영조 28 1752 임신 乾隆 17 12 三湖에 있는 外叔 朴淳源 집에 기거하다.
영조 29 1753 계유 乾隆 18 13 龍湖의 季父 집에 기거하다.
영조 30 1754 갑술 乾隆 19 14 5월, 박순원의 집으로 옮겨 기거하다.
영조 32 1756 병자 乾隆 21 16 8월, 水原白氏 白師宏의 딸과 혼인하다.
영조 34 1758 무인 乾隆 23 18 박순원의 水明亭에 기거하다.
영조 35 1759 기묘 乾隆 24 19 2월, 표류해 온 福建 商人 黃森 등과 문답하고, 問答錄을 짓다. ○ 박순원의 집에 기거하다가 이모부 呂弼周의 집에 기거하다.
영조 36 1760 경진 乾隆 25 20 3월, 長興洞으로 이사하다. ○ 여름, 장흥동 南復秀 집에 기거하다.
영조 37 1761 신사 乾隆 26 21 9월, 南復秀, 南鴻來와 北漢山城을 유람하고, 시 41수를 짓다.
영조 38 1762 임오 乾隆 27 22 確橋洞으로 옮겨 기거하다.
영조 39 1763 계미 乾隆 28 23 7월, 일본으로 들어가는 元重擧, 成大中을 송별하다. ○ 10월, 2살된 딸이 죽다.
영조 40 1764 갑신 乾隆 29 24 觀讀日記를 짓다.
영조 41 1765 을유 乾隆 30 25 5월, 모친상을 당하다. ○ 6월, 아들 李光葵가 태어나다.
영조 42 1766 병술 乾隆 31 26 1월, 族姪 李光錫에게 편지를 보내 학업에 정진할 것을 권하다. ○ 5월, 大寺洞으로 옮겨 기거하다. ○ 耳目口心書를 완성하다.
영조 44 1768 무자 乾隆 33 28 1월, 字를 明叔에서 懋官으로 고치다. ○ 10월, 황해도 長淵에서 助泥鎭 萬戶로 있는 從姊壻 兪彦鏘에게 다녀오며, 滿月臺, 延安, 海州 芙蓉堂, 長山串, 金沙寺 등을 유람한 日記인 〈西海旅言〉을 짓다.
영조 45 1769 기축 乾隆 34 29 5월, 靑莊書屋을 완성하다.
영조 46 1770 경인 乾隆 35 30 4월, 南有斗, 李光錫과 南漢山城을 유람하다.
영조 47 1771 신묘 乾隆 36 31 3월, 宗兄 李敬懋, 族姪 李光燮, 朴趾源, 白東脩와 黃州, 平壤을 유람하다. ○ 9월, 李光錫과 廣州에 있는 九龍山을 유람하다. 이때 崇禮門에서 漢江에 이르기까지 聯句 24수를 짓다.
영조 49 1773 계사 乾隆 38 33 윤3월, 박지원, 柳得恭과 함께 平壤을 유람하다. 이때 〈癸巳春遊記〉를 짓다. ○ 6월, 郭執桓의 「繪聲園詩稿」를 評하다. ○ 11월, 〈塾講規約九圖〉를 짓다.
영조 50 1774 갑오 乾隆 39 34 가을, 增廣 初試에 합격하다.
영조 51 1775 을미 乾隆 40 35 11월, 士小節을 완성하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36 3월, 元重擧를 방문하고, 〈峽舟記〉를 쓰다.
정조 1 1777 정유 乾隆 42 37 가을, 禮記臆을 완성하고, 紀年兒覽을 增修하다. ○ 柳琴이 저자, 유득공, 李書九 및 朴齊家의 詩文 400여 수를 엮은 「韓客巾衍集」을 燕京에 가지고 가, 淸의 문인들에게 보이고 序文 및 詩評을 받아오다.
정조 2 1778 무술 乾隆 43 38 3월, 陳奏使 沈念祖의 수행원으로 燕京에 가다. 이때 박제가도 正使 蔡濟恭의 수행원으로 함께 가다. 潘庭筠 등 청의 문인들과 교유하다. 
정조 3 1779 기해 乾隆 44 39 6월, 外閣 檢書官이 되다. ○ 7월, 「奎章韻瑞」를 編校하다. 御命으로 〈奎章閣八景七言律詩〉, 〈登瀛洲二十韻排律〉을 製進하여 居首하다. ○ 10월, 承文院 吏文學官을 겸하다. 「資治通鑑綱目」을 懸吐校正하다.
정조 4 1780 경자 乾隆 45 40 1월, 어명으로 「圖書集成」의 部目을 抄出하다. ○ 3월, 「宮園儀」를 교정하다. ○ 11월, 「東方人物考」를 교정하다.
정조 5 1781 신축 乾隆 46 41 1월, 奎章閣 檢書官이 되다. ○ 3월, 司䆃寺 主簿가 되다. 兼檢書官이 되다. ○ 5월, 「八子百選」을 校正하다. ○ 12월, 沙斤道 察訪이 되다.
정조 6 1782 임인 乾隆 47 42 1월, 「國朝寶鑑」을 編校 監印하다. ○ 2월, 합천 가야산을 유람하고 〈伽倻山記〉를 짓다.
정조 7 1783 계묘 乾隆 48 43 5월, 「毛詩講義」를 교정하다. 沙斤道 郵民을 위해 公債의 이자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여 혁파하다. ○ 6월, 智異山을 유람하다. 大廟洞으로 이사하다. ○ 11월, 廣興倉 主簿가 되다.
정조 8 1784 갑진 乾隆 49 44 2월, 司饔院 主簿가 되다. ○ 5월, 「奎章閣志」와 「弘文館志」를 교정ㆍ감인하다. ○ 6월, 積城 縣監이 되다. ○ 7월, 「宋史筌」을 改定하다.
정조 9 1785 을사 乾隆 50 45 7월, 「宮園儀」를 監印하다. ○ 8월, 「大典通編」을 교정하다.
정조 10 1786 병오 乾隆 51 46 3월, 「羹墻錄」을 監印하다. 정조의 御製集을 교정하다. ○ 8월, 兼檢書官이 되다.
정조 11 1787 정미 乾隆 52 47 2월, 적성 현감에서 체직되어 다시 檢書官이 되다. 「文苑黼黻」을 監印하다. ○ 5월, 당시 京畿 監司인 徐有防의 청에 의해 적성 현감에 仍任되다. ○ 11월, 「宋子大全」을 교정하다.
정조 12 1788 무신 乾隆 53 48 仲弟 李功懋가 檢書官이 되다.
정조 13 1789 기유 乾隆 54 49 6월, 瓦署 別提가 되다. 「海東邑誌」를 編校하다.
정조 14 1790 경술 乾隆 55 50 3월, 〈飮中八仙圖序〉를 製進하여, 居魁하다. ○ 4월, 정조의 명으로 박제가와 함께 「武藝圖譜通志」를 편찬 완성하다. ○ 6월, 兼檢書官이 되다. 〈銀愛傳〉을 製進하다. ○ 7월, 司䆃寺 主簿가 되다. ○ 10월, 「箕田攷」를 編校하다. ○ 12월, 「綱目講義」를 校正하다.
정조 15 1791 신해 乾隆 56 51 2월, 尙衣院 主簿가 되다. ○ 3월, 掌苑署 別提가 되다. ○ 5월, 司饔院 主簿가 되다. 「宋史筌」의 義例를 改正하다. 「顯陵園志」, 「訥齋集」을 교정하다. ○ 6월, 〈金申夫婦傳〉을 製進하다. ○ 7월, 「莊陵志」를 編校하다.
정조 16 1792 임자 乾隆 57 52 4월, 〈城市全圖百韻古詩〉를 製進하다. ○ 윤4월, 「詩觀小傳」을 撰進하다. ○ 6월, 〈御射記〉를 짓다. 「西庫書目」을 교정하다. ○ 7월, 〈七夕策〉, 〈文字策〉을 製進하다. ○ 9월, 季弟 李彦懋가 武科에 합격하다.
정조 17 1793 계축 乾隆 58 53 1월, 중국을 羨慕하고 小說을 좋아하는 文體라고 비판받아, 自訟文을 쓰라는 정조의 명을 받다. 25일, 大廟洞 本家에서 졸하다. ○ 2월, 廣州 樂生面 板橋村에 장사 지내다.
정조 19 1795 을묘 乾隆 60 4월, 정조가 500兩을 특별히 하사하며 「雅亭遺稿」를 간행하라고 명하다. ○ 12월, 「아정유고」의 詩文과 遺事를 印行하기 시작하다.
정조 21 1797 정사 嘉慶 2 「아정유고」의 인행을 마치다.

기사전거 : 年譜(李光葵 撰), 遺事(李光葵 撰, 雅亭遺稿 卷8, 奎章閣), 行狀(朴趾源 撰, 雅亭遺稿 卷8, 奎章閣), 墓碣銘(尹行恁 撰, 雅亭遺稿 卷8, 奎章閣)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定宗의 別子 茂林君 李善生의 10대손인 李聖浩의 아들로, 宗室이었으나 서출이어서 出仕의 제약이 있었다. 1779년 正祖가 才士 중에서 奎章閣 檢書官을 뽑을 때, 柳得恭ㆍ朴齊家ㆍ徐理修와 함께 선발됨으로써 四檢書官이라 불렸다. 이후 14년간 규장각에 봉직하며 수많은 서책을 校正ㆍ監印하고 저술하였다.
저자의 저술은 刊本인 「雅亭遺稿」와 寫本인 「靑莊館全書」가 남아 있다. 먼저 1795년에 「아정유고」의 간행이 있었다. 저자가 53세에 졸하자, 1795년에 정조는 저자의 생전의 수고를 생각하여, 저자의 아들 李光葵를 검서관에 임명하고, 문집을 편찬하는 데 쓸 비용으로 500냥을 특별히 하사하며 閣臣, 抄啓文臣, 至親 등에게도 힘닿는 대로 간행 비용을 보태라고 하교하였다. 이에, 沈煥之, 金載瓚, 徐龍輔, 徐有防, 徐榮輔, 李書九, 李敬懋 등이 비용을 내 거의 2,000냥의 문집 간행 비용이 마련되었다. 정조의 명으로 저자의 문집 간행을 주관하게 된 尹行恁이 刊本을 抄選하고 序文과 墓碣文을 썼고, 南公轍이 序文과 墓表를, 朴趾源이 行狀을, 李書九가 墓誌銘을, 成大中이 跋을, 아들 이광규가 遺事를 지어, 1797년에 「雅亭遺稿」가 芸閣活字로 印行되었다. 이 「아정유고」는 저자의 家藏 原稿 중 일부를 뽑아 만든 것으로, 처음에는 「靑莊館遺稿」로 書名을 정했으나 정조가 「雅亭遺稿」로 바꾸어 간행하게 했다고 한다. 8권 4책이며 권1~2는 詩 187題, 권3은 序(7), 跋ㆍ題後(3), 記(6), 傳(8)이며, 권4는 95명의 宋人들의 열전인 「宋遺民補傳」, 권5는 議(1), 「武藝圖譜通志」에 대한 것(2), 兵志에 대한 것(4), 奎章全韻凡例(1), 祭文(2), 箋(2) 등 文 17편이 있고, 권6~7은 書(21), 권8은 附錄이 실려 있다. 이 간행본은 본집 안에 수록되어 있는 寫本인 「아정유고」와 書名은 동일하나 별개의 것이다. 즉 寫本 「아정유고」는 詩ㆍ書를 위주로 수록되었으나, 간행본은 遺稿 전체에서 저자의 詩와 文을 골고루 뽑아 실었다는 차이가 있다. 현재 규장각(奎4143)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寫本 「靑莊館全書」가 편찬되었다. 이미 인행된 「아정유고」 외에, 상당량의 家藏 遺稿가 남아 있었다. 이는 아들 이광규가 지은 〈先考府君遺事〉에 “遺稿를 抄選하고 校讎한 것은 직각 윤행임이 그 일을 주관하였으니, 이 또한 왕명이었다. 시문이 모두 14권인데, 刪削하여 4권으로 만들었다. 그 나머지 저서들은 총 50여 권이 家藏되어 있다.”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가장 유고를 편차한 사본이 「청장관전서」이다. 현재 규장각에 「청장관전서」 사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卷首題에 아들 이광규가 整理 編輯하고, 德水李氏 李畹秀가 校訂하여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교정자인 이원수와 저자가 어떤 관계였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다만 이원수는 李舜臣의 후손으로, 자는 蕙隣이고 1759년에 출생하여 1801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牙山에 살던 덕수이씨라는 정도의 자료가 「司馬榜目」에 있을 뿐이다. 이원수가 저자와 18년 정도 나이가 차이나는 것으로 보아, 師弟 關係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것의 轉寫本이 현재 규장각(奎4917, 古0270-12)에 소장되어 있다.
이원수 교정본의 原本은 散佚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李丙燾는 그 轉寫本의 하나라고 여겨져왔던 淺見文庫本이 이원수 교정본일 것으로 추측했다. 천견문고본은 캘리포니아대학 淺見文庫에 소장된 본으로, 日人 淺見倫太郞이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서 수집해 간 것을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사들여 소장한 것이다. 분량은 14권이 빠진 낙질본이나, 그래도 다른 사본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57권 26책이고, 영문으로 된 同 文庫의 書目解題에 의하면 이원수의 印章이 찍혀 있고 每冊의 表題도 그의 글씨라는 것으로 보아, 이원수가 교정한 原本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원수 교정본의 필사 시기는 각 권의 끝에 작은 글씨로 己巳年과 庚午年을 명기한 것에서 1809년에서 1810년 사이에 필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필사년과 함께 筆寫者도 附記되어 있다. 姓名이 명시된 필사자는 모두 14명으로, 友 洪學洙, 戚弟 金民城, 三從叔 李漢晟, 선전관 卞永植, 典牲署 庫直 吳俊恒, 典牲署 書員 朴孝彬ㆍ申景桓, 典設司 書員 洪繼忠, 少年 南應煥ㆍ金永福ㆍ金聖配ㆍ李養天ㆍ沈灝, 그리고 三從姪 李書彬이다. 이서빈은 교정자 李畹秀의 삼종질이고, 이한성도 이원수의 삼종숙인 것으로 보아, 여기서 관계를 나타내는 戚弟ㆍ從姪ㆍ友 등은 교정자인 이원수와의 관계로 추정된다. 따라서 1809년 봄에서 1810년 여름에 걸쳐 이원수는 자신의 친척과 知人들을 동원하여 全書를 筆寫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서는 규장각장본(奎4917)을 저본으로 영인한 것이다. 淺見文庫本은 다른 사본의 祖本으로 추정되는 李畹秀의 校訂 稿本이고, 분량면에서도 가장 많은 양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본으로 선정되어야 하나, 이 본은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소장하고 있어 수집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천견문고본과 분량과 내용이 거의 일치하며, 국내에 소장되어 있는 사본 중에서는 가장 많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으며, 등사 상태도 양호한 규장각본을 저본으로 선택하였다. 이 규장각본은 저자의 아들 이광규가 편집하고 이원수가 교정한 사본을 轉寫한 것으로, 전체 71권 중 16권이 낙질된 55권 25책이다. 落帙된 내용은 雅亭遺稿에 해당하는 권13~14와 권17~18, 編書雜稿에 해당하는 권23~24, 淸脾錄에 해당하는 권32~35, 磊磊落落書에 해당하는 권36~39, 蜻蛉國志에 해당하는 권64~65이다. 결락된 부분은 異本에 의하여 보충하였는데, 권23~24는 同館藏本(古0270-12)으로, 권32~35는 국립중앙도서관장본(한45-가108)으로, 권36~39는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고920-뇌21)으로, 권64~65는 일본 동양문고장본으로 보충하였다. 이렇게 보충 편집을 거치고도 아정유고의 書3~4에 해당하는 2책이 여전히 缺冊되어 있다. 轉寫 時期는 1900년대 초로 추측되는데, 이것은 용지가 일본 白紙이고 表裝도 일본식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외에, 국내에 현존하는 轉寫本으로 규장각장본, 국립중앙도서관장본 2종, 성균관대학교본, 東洋文庫本, 이화여자대학교본 등이 있다. 규장각장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全書 중 일부를 등사한 것들이다.
우선 奎章閣에는 도서번호〈古0270-12〉인 본이 있는데, 1900년대 초에 필사한 謄寫本이고 권13~14, 권17~18, 권32~39, 권56~57, 권64~65, 권70~71이 缺落되어 51권 23책이다. 권23~24(編書雜稿)는 예외적으로 이원수 교정본이 아닌 徐晩輔가 편집한 것을 등사한 것으로 보아, 이후에 추가로 보충한 듯하다. 규장각본은 71권 32책으로 原 全書의 총권수가 같고, 編書雜稿를 제외하고는 落帙된 양과 내용이 같다는 점, 그리고 천견문고본의 英文 書目에 나타난 目次도 거의 일치하는 점에서 천견문고본을 謄寫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은 〈위창古3619-1〉본과 〈한45-가108〉본이 있는데, 〈위창古3619-1〉본은 권62~63의 輪回梅十箋, 洌上方言, 蟬橘堂濃笑, 丙丁表를 뽑아 등사한 것이고, 〈한45-가108〉본은 淸脾錄의 校訂 稿本으로 4권 2책이다. 성균관대학교본은 4권 2책으로, 蜻蛉國志와 磊磊落落書補編을 뽑아 등사한 것인데, 권1~2의 청령국지는 世系圖와 輿地圖 부분이 빠져 있고, 권3~4의 뇌뢰낙락서보편은 후반부의 내용이 缺落되어 있는 불완전한 사본이다. 또 다른 전사본으로 東洋文庫本이 있다. 이것은 청령국지를 등사한 2권 2책의 玉版書屋本으로, 金澤庄三郞의 인장이 찍혀 있고,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본(고920-뇌21)은 磊磊落落書만을 등사한 것으로, 12권 6책 중 4권 2책인데, 全書가 만들어지기 전에 단행본으로 만들어진 寫本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규장각본과 천견문고본 등에 수록되지 않은 뇌뢰낙락서 前半部 2책이 목차와 함께 실려 있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의 아들 李光葵가 全稿를 再編하고 李畹秀가 교정하여 1809~1810년에 등사한 것을 祖本으로 하여 1900年代 前期에 傳寫된 寫本으로, 규장각장본(奎4917)이다. 본 영인 저본 중 권13~14, 권17~18, 권23~24, 권32~39, 권64~65가 결락이므로 이 중 권23~24(編書雜稿3~4)는 同館藏本(古0270-12)으로, 권32~35(淸脾錄)는 국립중앙도서관장본(한45-가108)으로, 권36~39(磊磊落落書)는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고920-뇌21)으로, 권64~65(蜻蛉國志)는 일본 동양문고장본으로 보충하였다. 본 영인 저본은 謄寫로 인하여 다수의 誤脫字가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邊欄의 上段에 附記하였다.

기사전거 : 年譜(李光葵 撰), 遺事(李光葵 撰, 雅亭遺稿 卷8, 奎章閣), 해제(이병도, 국역 청장관전서), 異本의 內容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67권 31책으로, 序跋은 없다. 각 권마다 卷頭에 目錄을 실었다.
권1~2는 嬰處詩稿로, 302題의 시가 실려 있다. 맨 앞에 붙인 注에 따르면, 嬰處稿는 저자의 소년 시절에 지은 시문을 모은 것으로, 탈락된 것이 많으며 8編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시가 실려 있다. 〈次丘瓊山首尾吟〉은 저자가 「丘瓊山百韻」을 보고 丘濬의 〈首尾吟〉에 次韻하여 지은 것이고, 〈歲題〉의 序에는 저자가 자신의 협소한 거처를 ‘蟬殼橘皮’에 비유하여 蟬橘이라 堂號를 정한 것과 자신의 시문집을 嬰處稿라 命名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香娘詩〉는 貞女로 표창된 善山의 한 가련한 여인인 香娘의 내력을 자세히 기술하고, 그 내용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또 書記로서 日本에 가는 元重擧에게 준 시인 〈奉贈書記遜菴元丈重擧隨副使之日本〉도 있다.
권3~4는 嬰處文稿로, 序(9), 記(13), 題後(17), 傳(4), 說(4), 論(1), 箴(3), 銘(8), 頌(1), 墓文(1), 上樑文(1), 기타(4) 등이 실려 있다. 서에는 嬰處稿에 대한 본인의 自序인 〈嬰處稿自序〉와 1761년을 보내며 쓴 〈箋辛巳序〉, 봄을 맞으며 쓴 〈迎春序〉 등이 있다. 〈記福建人黃森問答〉은 康津에 표류한 福建 商人 黃森 등 43人을 1760년 2월에 만나 땅에 글씨를 써가며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말미에서 禮義를 숭상하는 우리나라에 태어나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記遊北漢〉은 저자가 21세 때 벗들과 北漢山 주변의 文殊寺ㆍ普光寺ㆍ太古寺 등 11곳의 菴ㆍ寺를 유람하고 지은 시 41수를 기록한 것이다. 〈廣陵散人哀辭〉는 저자와 한집안으로 동년배인 李世懋가 1761년 22세로 요절하자, 그 슬픔을 기록한 誄辭이다. 〈鵲巢上樑文〉은 저자가 三湖에 살 때, 집앞 산수유나무에 집을 짓던 까치가 돌아오지 않자 마저 짓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상량문이다.
권5~6은 嬰處雜稿로, 권5에는 〈戊寅篇〉, 〈歲精惜譚〉, 〈瑣雅〉, 〈妹訓〉이 실려 있고, 권6에는 觀讀日記가 실려 있다. 〈무인편〉은 저자가 18세 때인 1758년에 지은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고, 〈세정석담〉은 세월이 갈수록 정신이 쇠할 것을 대비하여 틈틈이 자신의 단상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적어 둔 것이다. 〈쇄아〉는 古人의 저서 중에서 名句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1768년 저자가 24세 때 작품이다. 〈매훈〉은 저자의 두 여동생들에게 훈계하는 글로, 16章으로 되어 있다. 관독일기는 저자가 24세 때인 1764년 9월 9일부터 11월 1일까지 「中庸」을 중심으로 독서하고 날짜별로 자신의 느낌을 기록한 讀書 日記이다.
권7~8은 禮記臆이 실려 있다. 예기 46편에 대해 권7에는 曲禮부터 樂記까지, 권8은 雜記부터 喪服四制까지 각 章마다 注疏를 검토하고 비판한 연구서이다.
권9~20은 雅亭遺稿이다. 권9~12에는 373題의 시가 실려 있다. 시들은 대체로 연대순으로 배열되었으며, 觀軒 또는 觀齋, 白塔, 夢踏亭, 挹淸亭 등 서울 근교에서 벗들과 노닐며 읊은 것들과 摛文院에서 검서관으로 봉직할 때 지은 것들이 많다. 그중에 〈庚申夜與朴美仲……〉는 朴趾源, 徐常修, 尹可基, 柳璉, 柳得恭, 朴齊家, 李應鼎이 함께 지은 聯句의 시이고, 〈七夕翌日……〉은 서상수, 유연, 유득공, 박제가 등과 三淸洞 挹淸亭에서 지은 시이다. 〈延安府〉, 〈金沙寺〉, 〈登沙峯望西海〉, 〈曉發延安〉은 28세 때인 1768년에 黃海道 助泥鎭 萬戶로 있던 從妹壻 兪彦鎬를 방문한 길에 유람한 곳의 풍광을 읊은 것이다. 〈花石亭遠眺仍渡臨津〉, 〈善竹橋〉, 〈滿月臺別朴美仲……〉, 〈黃州月波樓〉, 〈大同江泛舟〉 등은 1771년 31세 때 李敬懋, 李光燮, 朴趾源, 白東脩와 함께 黃州와 平壤 등지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이다. 〈早發坡州……〉는 1773년 33세 때 박지원, 유득공과 함께 평양을 유람하러 떠나며 읊은 시이고, 〈澹園八咏……〉은 중국인 郭執桓을 위해 그의 시집 「繪聲園詩稿」에서 차운하여 지어 준 것이다. 권13~14는 缺卷이다. 권15~19는 書(178)이다. 권17~18은 缺卷인데, 권19의 권수제가 ‘書五’인 것으로 보아, 편지글로 보인다. 서는 李光錫(79), 朴宗山(14), 白東佐(1), 尹可基(15), 成大中(25), 柳得恭(7), 金鍾厚(3), 李晩中(3), 趙衍龜(6), 尹宗成(1), 沈象奎, 柳璉, 白東脩 등에게 준 것이고, 潘庭筠(3), 李調元(3), 李鼎元 등 청의 문인에게 주는 편지도 있다. 그중에 族弟 李光錫에게 보내는 편지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시와 독서에 대한 담론이 대부분이어서 叔姪간이라기보다 절친한 벗과의 교류를 연상시킨다. 권19에 실린 〈潘秋〉는 柳璉을 통해 받은 「韓客巾衍集」의 評序를 보고 潘庭筠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 것으로, 감사 인사와 함께 靑莊館이란 세 글자를 직접 써 주고 또 靑莊館記와 靑莊館集序를 지어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李雨邨〉은 淸人 李調元에게 1777년에 「한객건연집」의 평서를 받고 보낸 편지이다. 그 내용 중에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를 소개하기를, “柳泠菴은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성품이 溫雅하고 욕심이 없이 담백하며, 옛글을 연구하는 데 노력하며, 붓을 대기만 하면 모두가 전할 만한 絶品인데, 특히 시에 능합니다. 朴楚亭은 작은 키에 매우 강직 강개한 마음을 가졌으며, 재주와 사상이 풍부하고, 草書와 隸書가 출중하며, 중국을 충심으로 사모하고, 비범한 기상이 특출합니다. 李素玩은 간략하고 담박함으로써 자신을 지키고 정직 결백한 마음을 지녔으며, 經史에 해박하고, 正論과 異論을 밝게 분별하며, 六書에 밝고 文辭가 절묘합니다. 이들은 다 저의 畏友이므로 항시 사랑하고 공경할 뿐만 아니고 같은 세상에 살게 됨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적었다. 권20은 應旨各體로, 13편의 글이 실려 있다. 〈奎章閣八景……〉과 〈登瀛洲七言排律〉은 1779년 39세 때 검서관으로서 어명을 받고 應製하여 居首한 작품이다. 전으로 〈銀愛傳〉과 〈金申夫婦傳〉이 있는데, 〈은애전〉은 1790년에 정조가 獄案을 審理하다가 金銀愛ㆍ申汝倜傳을 지어 올리라고 내린 명에 따라 製進한 것이고, 〈김신부부전〉은 金橲集과 平山申氏 부부에 관한 전이다. 〈六書策〉은 1792년에 「奎章全韻」의 편찬이 끝난 후, 정조가 윤행임, 서영보, 남공철, 이서구, 이가환, 성대중, 유득공, 박제가에게 교정을 명하고 제신들에게 대책을 제진하게 하였는데, 이때 지어 올린 것이다.
권21~24는 編書雜稿 1~4이다. 주로 「宋史筌」의 編纂 關係를 기록한 것으로, 권21에는 〈宋史筌編撰議〉, 〈宋史筌光宗贊〉, 〈宋史筌儒林傳論〉, 〈讀宋史儒林傳〉, 〈宋史筌義例改正〉, 〈宋史筌遺民列傳〉이 실려 있다. 「宋史筌」은 정조의 명으로 「宋史」를 刪定하여 40책으로 만들고 補傳을 붙인 책으로, 高麗ㆍ遼ㆍ金ㆍ蒙古 등에 대한 補傳은 주로 저자가 담당하였다. 이 중 〈宋史筌遺民列傳〉에는 謝翶, 方鳳을 시작으로 119명의 열전이 실려 있다. 권22에는 〈宋史筌高麗列傳〉과 〈宋史筌遼列傳〉이, 권23에는 〈宋史筌金列傳〉과 〈宋史筌蒙古列傳〉이 실려 있다. 권24에는 〈武藝圖譜通志凡例〉, 〈武藝圖譜通志附進說〉, 〈兵志周軍制論〉, 〈兵志唐軍制論〉, 〈兵志明軍制論〉, 〈兵志備倭論〉, 〈詩觀小傳〉, 〈奎章全韻凡例〉가 있다. 1792년 저자가 52세 때 정조가 閣臣에게 명하여, 古代로부터 漢, 魏, 六朝, 唐, 宋, 元, 明에 걸쳐 시인들의 시를 詩體別로 뽑아 「詩觀」이라 이름하고 이들의 小傳을 쓰게 하였는데, 〈시관소전〉은 이때 저자가 맡은 唐ㆍ宋ㆍ明 부분으로, 唐太宗 李世民으로부터 張居正까지 80명의 열전이 실려 있다.
권25~26은 紀年兒覽 상ㆍ하권이다. 卷頭에 1777년에 저자가 지은 서문이 있다. 기년아람은 아동들이 보기 쉽도록 연표 형식으로 만들었다. 권25는 기년아람 상권으로, 중국의 上古紀부터 淸 高宗 때까지 왕조별로 역대 제왕의 姓名, 生沒年, 年號, 都邑地, 皇后 등을 기술하였고, 〈補編〉에는 〈歷代地界〉가 첨부되었다. 권26은 기년아람 하권이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檀君朝鮮, 箕子朝鮮, 衛滿朝鮮에서 高麗의 순서로 왕의 名, 世系, 在位 기간 등을 기술하였다. 조선 부분은 璿系, 本朝列聖傳授圖, 本朝世年紀로 나누어 실었다. 〈補編〉에서는 駕洛國, 渤海國, 日本國, 琉球國의 世系를 첨가하였다. 특히 삼국 아래에 보충한 〈屬國名號地界〉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속한 53개국의 이름과 간략한 설명이 곁들여 있다.
권27~31은 士小節이다. 권두에 1775년에 저자가 지은 서문이 있다. 士小節은 〈士典〉, 〈婦儀〉, 〈童規〉 3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사전〉은 선비인 자신의 잘못을 적게 하기 위해, 〈부의〉는 아내와 며느리를 위해, 〈동규〉는 子弟를 위해 지은 것이라 했다. 선비, 부녀자, 아동이 지켜야 할 禮節과 修身을 기록한 것이다.
권32~35는 淸脾錄 1~4이다. 권두에 유득공이 쓴 서문이 있다. 저자가 섭렵한 시와 시인들에 대한 詩評을 모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시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시도 포함되어 있으며, 남녀노소를 망라하여 9세 어린이의 작품이나 詩妓의 작품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권36~47은 磊磊落落書이다. 권두에 인용서목과 총목차가 있으며 각 권마다 목차가 있다. 이것은 明末 淸初의 인물들에 대한 列傳으로, 인용서목에 178종의 서적을 나열하고 撰者를 부기하였다. 인물의 총수는 720명인데, 이것은 권36~45의 磊磊落落書 1~10까지에 있는 528명의 열전과 권46~47 磊磊落落書補編에 있는 192명의 열전을 합한 수이다. 각 열전의 끝에는 인용한 서적명을 부기하였다.
권48~53은 耳目口心書 1~6이다. 저자가 25세 때인 1765년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내용은 주로 詩文, 社會狀, 人物, 活字, 신변잡기, 재정, 풍속, 사찰 등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권54~61은 盎葉記 1~8이다. 앙엽기는 일종의 자료집 또는 소백과사전으로, 각종 소제목에 대해 저자가 직접 해설하거나 자료를 인용하여 정리한 내용들이다. 400여 가지의 제목으로 서술하였으며, 내용은 역사, 풍속, 서적, 경전 등에 관한 것이 많다.
권62에는 〈西海旅言〉, 〈輪回梅十箋〉, 〈山海經補〉, 〈洌上方言〉이 있다. 〈서해여언〉은 황해도 長淵에서 助泥鎭 萬戶로 있는 從姊壻 兪彦鏘에게 다녀오며, 滿月臺, 延安, 海州 芙蓉堂, 長山串, 萊州, 金沙寺 등을 유람한 日記로, 저자가 28세 때인 1768년 10월 4일에서 24일까지의 기록이다. 〈윤회매십전〉은 輪回梅를 만드는 방식 10가지를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고, 뒤에 저자와 유득공, 박제가의 시를 첨부한 글인데, 윤회매는 밀납으로 만든 매화를 지칭한 것으로 선비의 책상에 꽂아 두고 보던 장식물이다. 〈산해경보〉는 저자가 자신이 저술한 耳目口心書를 囁愳라는 가상의 벌레에 비유하자, 박지원이 〈山海經補東荒〉을 지어 보내고, 저자가 다시 〈擬郭景純注〉를 덧붙인 해학적인 글이다. 〈열상방언〉은 주로 경기도 지역의 속담을 모아, 그 의미를 풀이해 놓은 것이다.
권63에는 天涯知己書, 蟬橘堂濃笑, 丙丁表가 있다. 천애지기서는 洪大容이 燕京에 갔을 때, 청의 문인인 嚴誠, 陸飛, 潘庭筠 등에게서 받은 편지 및 詩文 등과 그들과의 筆談을 기록해 놓은 모음집이다. 이것을 저자가 보고 발췌하여 기록하고, 評語를 곁들인 글이다. 선귤당농소는 저자의 短想을 모아 놓은 글이다. 병정표는 1636년~1637년의 丙子胡亂에 관한 사실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12월 9일에 淸兵이 義州에 도착한 날부터 이듬해 2월 8일에 鳳林大君과 麟坪大君이 볼모로 끌려 가던 날까지의 사실을 적었다.
권64~65는 蜻蛉國志이다. 청령은 잠자리의 유충으로, 일본의 지형이 잠자리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권64는 世系圖를 시작으로 世系, 姓氏, 職官, 人物, 藝文, 神佛의 순서로 기술하였고, 권65는 八道六十八州全圖 및 각각의 지역별 지도 12개를 시작으로 輿地, 風俗, 器服, 物産, 兵戰, 異國에 대해 기술하였다.
권66~67은 入燕記이다. 저자가 1778년 3월 17일부터 윤6월 14일까지 謝恩陳奏使書狀官인 沈念祖의 수행원으로 燕京에 가면서 적은 일기와 연경에서 청의 문인들과의 교유를 적은 燕行錄이다.
권68~69는 寒竹堂涉筆이다. 이것은 저자가 경상도 함양군 沙斤驛 察訪으로 부임하였을 때의 見聞記 겸 漫錄으로, 대부분 영남 지방의 名勝ㆍ古蹟ㆍ人物ㆍ風俗 등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명승으로는 정조의 御筆인 南原의 誕報廟, 星州의 關侯廟, 인물로는 崔致遠, 曺植, 吉再 등의 文士와 鄭希亮의 亂軍에 맞서 王庫를 지켰던 함양군의 倉守吏 朴春鳳, 安裕의 후손 安處順, 盧禛의 父 盧友明, 智證大師, 彗昭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 밖에도 1782년 2월 18일부터 22일까지 가야산을 유람하며 그 路程을 상세히 기록한 〈伽倻山記〉, 일본의 풍습을 우리나라와 비교하며 기술한 〈日本之俗〉, 신라의 방언을 기술한 〈新羅方言〉 등이 있다.
권70~71은 附錄으로, 아들 李光葵가 지은 年譜이다. 저자의 官歷과 규장각 검서관으로 있을 때의 職務를 자세히 기술하여, 정조 때의 檢書官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필자 : 김진옥(金鎭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