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10. 12:11ㆍ산 이야기
명선(茗禪)이 새겨진 나무표주박 - 茗禪이라는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차를 보내준 답례로
초의선사에게 쓰서 준 휘호로 유명하다.
차싹 명(茗)자는 중국의 설문해자(設文解字)라는 책에서 어느 정도 자란 찻잎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요지음 호사가들이 차를 잘못 배워 곡우전에 딴 아주 어린 차싹으로 만든
우전차(雨前茶)를 선호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추사가 초의선사와 교우할 조선조 후기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자란 찻잎으로 만든 차가 통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 중의 하나이다.
찻잎은 움이 틀 때에 그전 해에 뿌리나 줄기에 비축한 영양분으로 초봄에 겨우 싹이 튼다.
이렇게 차나무 자체의 영양분으로 막 돋아난 어린 찻잎을 따면 차나무는 자체 방어기재를
동원하여 찻잎에 떫은 성분인 탄닌과 쓴맛의 다른 성분을 많이 만들어 차맛이 떨어지게 하는
영리한 식물이다.
모든 고등식물들이 초식동물이나 사람들의 탐욕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진화된 까닭이다.
어느 정도 찻잎이 자라 새로 난 찻잎은 따사로운 봄볕을 받아 자체로 광합성을 하고 이슬과
바람을 맞아 다소(茶素)라고 통칭되는 차의 성분들을 만들어서 풍미가 풍부해지고,
또한 찻잎의 크기도 커져서 적은 량의 찻잎으로도 더 많은 차를 만들 수 있고, 차나무의
영양고갈을 최소화하여 튼튼한 차나무로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 데, 작설차(雀舌茶)라는 것은 찻잎이 참새의 혓바닥 처럼
도톰하게 자랐을 때 딴 움차 찻잎으로 만든 것이 차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찻잎을 찌거나 덖어 말렸을 때 즉 가공한 찻잎의 크기가 참새의 혓바닥 만한 차를 말하는
것이다.
이 명선(茗禪) - 어느 정도 자란 찻잎으로 만든 차를 마시며 선(禪) 도리에 든다는
것은 인류가 창안한 여러 문화체계 중에서 가장 최상승(最上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선(禪)자는 보일 시(示)와 홑 단(單)자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불교 선종에서 여러가지 주장을 감안하더라도 홀로 자기 자신에게 보여준다라는
것이 본뜻이다.
고요와 청정 속에 몰입하여 홀로 자기자신에게 보여줄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이 때에 조용히 한잔의 차를 따르고 찻잔에 비친 대자연 속에서의 나를 돌아보며
청정한 말없음(不立文字 , 默言 ㅡ> 寂滅 )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자연과 더불어 더 나아가서는 이 작은 우리집인 우주와 내가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의 수레바퀴(時輪)도 공간의 흐름(空轉)도 없어진다.
- 티베트 불교경전인 時輪經(THEKALACKRA TANTRA)의 含意
우주가 된 나만 남아있다가 차차 나도 우주도 없어진 적멸보궁(寂滅寶宮)에
들어간다.
지하철 3호선 불광역에서...........
산신제(山神祭)
정의
신을 주신으로 모시면서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제의. 산신제·산제·산제사 등으로 불리며,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 산신제는 고대사회에서부터 명산으로 알려진 산과 산악지대 또는 산악과 인근한 마을들에서 행해졌다. 산신제는 산악숭배의 표현이며, 산악숭배 사상은 천신신앙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산신숭배 사상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편 고조 선조에서 “단군은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민족에게 매우 오래된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국토 70%가 산이다. 최고봉인 백두산(2,744m)을 위시하여 수없이 많은 산이 국토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다. 이러한 산악 지형적 여건과 환경은 한국인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이로 인해 한국 역사와 문화는 자연스럽게 산으로부터 시작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로부터 수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하강한 곳이 산(태백산)이요,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린 단군왕검이 산신이 되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이 이를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집에 집 지킴이가 있듯이 산에도 주인이 있다. 그가 바로 산신령(山神靈)이다. 산신령은 초능력적 영험력을 발휘하여 인간세상을 지배하여 왔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산을 숭배하여 온 것이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이 오악신(五嶽神)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사실은 한민족이 오래전부터 산을 숭배한 풍습을 잘 알려 주고있는 좋은 대목이다.
신라 때에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긴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숭배하였고, 오악산으로 불린 토함산·계룡산·태백산·부악·지리산에 제사를 지내기도하였다. 고려 때에도 지리산, 삼각산, 송악산, 비백산의 사악신(四嶽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지리산, 삼각산을 오악산으로 숭배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의 500여 고을에서도 주산(主山)이나 진산(鎭山)을 설정하고 정기적인 산신제를 봉행하여 산악신앙의 맥을 이었다.
산악신앙의 맥은 오늘날 산신제라고 하는 민간제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산신제는 지역민의 평화와 안녕을 도모하고 국가의 시화연풍(時華年豊)을 염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산신제를 통해 인간 세상의 일들을 하늘세계에 알리면서 신과 소통하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달성하기 위함이다. 즉 인간들이 산을 매개체로 하여 하늘과 연결 통로를 만들어 신과 교감대를 형성하면서 기원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러한 산신제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어 온 대규모적 제천의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신인합일사상(神人合一思想)에 근거하고 있다. 산신제의 전통이 오늘날에 와 지역 또는 마을 단위의 소규모 행사로 축소되면서 본래 의미보다는 지역민 보호와 안녕 추구로 목적이 바뀌게 된 것이다.
산신제의 전통을 잇게 하는 산의 주인인 산신령은 산신, 산신할아버지, 산할아버지, 할아버지, 산신령님, 신령님, 산왕, 산왕산신, 산군, 산령, 산귀신 등으로 불린다. 또한 산명을 붙여 태백산 산신령, 지리산 산신령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산신들은 나라를 다스리던 통치자가 사후에 산의 주인으로 신격화된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넓게는 국가, 좁게는 부락을 수호하는 신으로 추대된다.
한편 산신령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산신도이다. 그림에 보면 호랑이의 변화신인 신선이 호랑이 등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선은 인적이 드문 깊은산 속에서 근엄하게 백발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간혹 선녀나 동자를 데리고 다닌다. 산 중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는 영험력을 소유한 신격이나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서 변화성, 개혁성, 기술성, 생산성 등을 상징한다. 산신령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는 음양오행의 목성(木性)에 해당된다. 이는 곧 아침 해가 뜨는 동방(東方)을 상징하면서 시작과 솟음을 뜻한다.
서낭당에 소나무가 신목(神木)으로 모셔지고, 신 내림굿의 일월(日月)대를 동쪽으로 뻗어 자란 소나무 가지로 삼는 데서도 그 뜻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나무는 음(陰)의 나무로서 맑고 깨끗한 깊은 산중에서 사시사철 푸른 색채를 지니며 자란다. 여기서의 푸른색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산신령 두상 후광의 빛은 곧 산신령이 늘 신비스러움과 영험스러움을 나타내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산신령이 들고 다니는 죽순은 남성 성기를 상징한다. 이는 자손 점지를 암시하는 동시에 권력을 뜻한다.
산신령은 영초(靈草)인 산삼과 조롱박 안의 불사약(不死藥)인 영약(靈藥)을 소지함으로써 죽음에 다다른 사람도 회생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산신령 옆에 있는 동자의 오른손과 왼손에도 산삼과 영지가 들려 있기도 한다. 애기씨(선녀) 오른손에는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영적인 꽃이 들려 있다. 또한 왼손에는 인간 세상을 내려다볼 때 사용되거나 바람을 일으켜 인간사회를 오갈 수 있도록 돕는 부채가 들려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산신령 그림에 나타나는 영지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곧 아기를 생산함을 상징한다.
다음 카페 <광한루산악동호회> 김호진 님의 글 중에서
장군바위
인왕산을 장군바위에서 본 모습
인왕산과 안산(鞍山) 그리고 질마재라고 부르던 무악재 고개
산신제와 시산제의 구별에 대한 것은 아래의 글과 같이 시산제라는 용어가
일제 잔재에서 온 말이여서 산신제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오늘날 새해 초 특히 음력 정월달 경에 올리는 산신제를 시산제라고 부르는
관행이 여러 산악단체에서 관습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정초 또는 초봄에 한해의 산행을 시작함에 앞서서, 산이라는 신성 영역에 대하여
속세에 물든 속인(俗人)들이 한해 동안의 입산함을 알리고 산신에게 입산허락을 구함과
동시에 산신의 영역인 청정자연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함으로써 청정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입산허락에 대한 감사함과 한해 동안의 무사한 안전산행을 아울러 기원하는
의미로 올리는 제례를 시산제라고 부르는 것이 산이라는 대자연에 대한 예의범절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지금에 와서는 정초 또는 초봄에 드리는 시산제를 제외하고 연중 무시로 올리는
산신에 대한 차례를 산신제라고 부르는 관행이 점차 굳어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산신제와 시산제란?
산신제,시산제 뜻은 똑 같습니다.
단지 다르다면 시산제라면 일본에서 쓰던 말인데.
그 당시 일본을 방문한 한국 산악인이 산에 제를 올리는 데.......
시산제라는 플랫카드를 보고 귀국해서 쓰게된 것이 시산제의 원조이고,
우리 산악인들은 그 당시 일본을 따라 하는 게 싫고 또한 산에 제를 올리는
산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해의 안녕을 기원하며 올리는 우리의 산신제를
올려 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산악인들은 산신제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또한 반일 감정이 좋지 않았던 선대들이 일본의 잔유물이라 시산제를 잘 쓰지 않는
답니다.
지금 한창 제를 올리는 때인 데, 참고로 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 다음 카페 < 초계중학교 총동창회> 정무상 님의 글 중에서
장군바위
산신제를 지내는 시기와 장소 선택
산신제를 지내려 할 때 가장 먼저 닥치는 문제는 언제, 어디서 지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 고유의 산신제는 음력 정월 초하루(설날)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에
지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양력이 보편화된 지 오래이므로 양력 1월 1일부터
음력 대보름날까지 편한 날을 하루 택하여 지내는 것이 요즘 보편화된 산신제이다.
산제 장소로는 산정에 널찍한 공터가 있는 이름난 산이면 우선 합격이지만
방향도 문제다. 즉,제사상은 북쪽에 차리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가정에서 차례를 지낼 때 병풍을 친 쪽을 북으로 가정하듯,
산신제 때도 '00산악회 00년 00월 00산악회 산신제'라고 쓴 플래카드를 설치한
곳을 북으로 간주하고 지내고 있다.
최근의 산제는 일종의 축제이므로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높은 산보다는 낮은 산을 택하며, 매년 같은 장소에서 지내는
산악회도 있다.
제를 올리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인원이 많으면 먼저 산행을 끝내고 산제를
올리며, 인원이 적을 때는 산제부터 올리고 산에 오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반적인 산제의 순서는 먼저 국민의례가 끝나면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우수산악인표창, 격려사, 결산보고나 공지사항 등이 삽입된다.
이러한 순서가 끝나면 산제로 들어간다.
산신제에 쓸 음식인 제수는 어떤 것을 얼마나 준비해야 할까?
원칙대로라면 그 양이 엄청나다.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높은 산정으로 가져가야 하므로 양이 너무
많아서도 곤란하다.
때문에 극히 간단히, 반드시 필요한 것만 챙겨간다. 돼지머리를 비롯해
대추, 밤, 감, 배에 사과까지 5과, 그리고 북어포와 시루떡을 제기에
담았을 때 초라한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만 준비한다.
여기에 향과 향로, 양초 두 자루, 깔개, 플래카드와 플래카드를 걸 때 쓸
끈만 준비하면 된다.
술은 거의 모든 산악회들이 탁주나 청주같은 곡주를 쓴다.
산신은 곧 지신이니 땅에서 수확한 과실로써 빚은 술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산제의 제수는 돼지머리와 북어, 시루떡, 3가지 색 이상의 과일, 초 2자루와
향, 술 등이 기본이다.
음식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올릴 수도 있으나 술만큼은 반드시 탁주를
써야 한다.
소주가 휴대하기에 편하다고 편법으로 소주나 양주, 포도주 등을 올리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무지는 피해야 하는 것이 연로한 산악인들의 지적이다.
- 다음 카페 < 3040대구산사랑 > alth(왕비) 님의 글 중에서
산신제 등을 올릴 때에 사소한 것 중에는 모자와 신발을 벗고 지내는 것이 옳으냐
쓰거나 신고 지내는 것이 맞느냐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경우를 가끔씩 볼 수 있는 데,
원래 예송논쟁이란 말이 있듯이 제례의식은 가가호호 또는 각 단체 마다 달라서
어떠한 것이 옳고 바른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종묘제례나 문묘제례에서도 제관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헌주와
헌다를 하고 절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은 채로 제(祭)를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다만 각 문중이나 단체 마다 제례의 관습이 다르기 때문에 모자와 신발을 벗고 지내는
것이 자기의 마음에 편하게 여겨진다면 그리하여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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