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서 본 죽음 이후의 세계 / 장영란 교수

2014. 4. 3. 14:18잡주머니

 

 

 

 

 

      

죽음, 그 너머의 세계
- 그리스 사상과 죽음 이후의 세계

 

 

1. 죽음 이후의 세계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일반적으로 죽음은 삶과 대립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인들은 살아있는 것은 생명 혹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어 영혼(psyche)은 호메로스 시대에는 ‘목숨’ 또는 ‘생명’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은 죽음이란 영혼이 신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호메로스는 인간이 죽을 때 빠져나가는 어떤 것이라 말한다. 더욱이 영혼은 생명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도 자연히 살아남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만일 영혼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딘가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영혼은 죽음 이후에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분명히 산 자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아닐 것이다. 죽은 자는 산 자와 함께 이 세계에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죽은 후의 인간은 존재하는 방식이나 차원이 달라진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이 따로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해냈다.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곳은 ‘곰팡내 나는’ 하데스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도 하데스로 가는 길을 알 수는 없다. 아니, 아무도 알 수 없어야 한다. 죽음의 세계에 산 자든 죽은 자든 아무 상관없이 들락댈락 할 수 있다면, 죽음이란 별 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산 자는 죽은 자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죽은 자의 세계로 가면 되고, 죽은 자도 산 자가 보고 있으면 산 자의 세계로 가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아무도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곳은 인간들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에게도 노출되어서 안 되었다. 트로이 전쟁 중에 그리스 동맹군 편을 들던 포세이돈이 대지와 산을 흔들어대자 트로이의 도시들과 그리스군의 함선들까지도 흔들렸다. 그러자 하데스가 깜짝 놀라 고함을 치며 지상으로 올라왔다. 왜냐하면 신들조차도 싫어하는 하데스의 집이 인간들과 심지어 신들에게 드러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하데스(Hades)는 ‘보이지 않는 곳’ 또는 ‘알 수 없는 곳’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죽음 이후에 대해 추측하고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까지도 넘나들 수 있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데스로 가는 지도를 그려냈다.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가는 하데스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였을까? 우리는 쉽게 지하 세계를 떠올릴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은 땅 속에 묻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섣부른 추측은 더 많은 의문들을 불필요하게 만들어낼 수도 있다. 땅에 묻는 매장 풍습 외에 화장을 하거나 동물에게 내어주는 풍습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경우에도 매장 풍습과 화장 풍습을 모두 갖고 있다. 그리스 서사시로부터 죽음 이후의 세계를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하데스라는 이름을 쓴다. 하데스(Hades)라는 이름 자체는 ‘지하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을 의미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특정한 공간을 가리키는 말보다 보이지 않는 곳이라 말이 훨씬 죽음 이후의 세계를 잘 표현하며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인들이 하데스와 관련하여 특정한 위치를 설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데스의 위치에 대해 약간씩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에서 하데스는 지하에 있는 걸로 묘사된다.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에서 ‘영혼이 땅 밑으로 사라진다’라거나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다’는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땅 ‘아래’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오뒷세이아』의 다른 부분에서는 하데스의 위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데스를 찾아가는 오뒷세우스는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가는 것으로 나온다. 아무도 배를 타고 하데스로 간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오뒷세우스가 키르케의 도움을 받아 항해하였다. 하데스는 땅 밑에 있으나 ‘서쪽’으로 땅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케아노스를 건너 있는 곳이다. 산 자들은 그림자의 나라 하데스로 살아서 올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그리스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세계가 서쪽에 있다고 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태양이 지는 곳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양이 지면 자연히 어둠이 내리게 되고, 어둠의 세계는 바로 죽은 자의 세계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은 살아서는 결코 하데스에 도달할 수 없다. 오뒷세우스가 하데스를 방문할 수 있던 것은 바로 키르케의 도움 때문이었다. 키르케는 태양신의 딸이었다. 처음에 오뒷세우스의 일행이 자신의 궁전을 찾아왔을 때 키르케는 마법을 사용하여 돼지로 변하게 만들었지만 키르케는 오뒷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인물이다. 『오뒷세이아』제 11권에서 키르케는 오뒷세우스에게 하데스로 갈 수 있는 배를 제공해주면서 북풍에 의해 오케아노스를 넘어가면 페르세포네의 숲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케아노스 해안가에서 내려 하데스로 가면된다고 말한다. 또한 마지막 권에서도 하데스의 위치가 다시 설명되고 있다. 오뒷세우스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모두 죽여 버렸고 헤르메스가 나타나 죽은 자들을 하데스로 데리고 간다. 여기서 죽은 자들의 영혼은 오케아노스 강과 레우카스 바위 옆으로 지나고 헬리오스, 즉 태양신의 문들과 꿈들의 나라 옆을 지나 아스포델로스(Asphodelos), 즉 수선화 핀 풀밭에 당도하는 것으로 나온다.

 

 



2. 영혼의 안내자


    죽음 이후의 세계의 위치에 대한 호메로스의 설명은 실제로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뒷세이아』의 이야기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가 오케아노스에 도착하였다고 말했다. 오케아노스는 강의 신이나 지상에 있는 특정한 강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으며 모든 것의 기원이 되는 우주적인 강이다. 따라서 이 우주의 끝이라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그 곳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어떻게 하데스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인간이 죽으면 영혼을 하데스로 데려다주는 신적 존재를 생각해 내었다. 그가 바로 ‘영혼의 안내자’(psychopompos)라 불리는 헤르메스이다. 그리스인들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의 경계를 훨씬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등장하는 상징물들이 바로 지하세계를 흐르는 ‘강’과 지하세계의 문을 지키는 ‘개’ 등이다. 여기서 강이나 문 및 개는 ‘분리’와 ‘경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선 강은 두 세계를 분리시키고 독립적으로 만드는 경계이다. 이것은 산 자가 죽은 자의 세계로 가는 것과 죽은 자가 산 자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스인들은 오케아노스 외에도 다시 죽음의 세계를 흐르는 강들을 설정하여 경계를 훨씬 더 강화하였다. 그것들은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스튁스의 지류인 ‘불타는 강’을 의미하는 퓌리플레게톤과 ‘한탄의 강’을 의미하는 코퀴토스와, ‘비통의 강’을 의미하는 아케론이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에 강을 설정한 후에 그리스인들은 또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지하세계의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으로 카론이라 불렸다. 카론은 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그는 죽음의 세계로 가는 영혼들을 태워주지만 아무도 되돌아오게 해주지 않는다.


    다음으로 개도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넘나들 수 없도록 지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하데스의 문을 지키는 개인 케르베로스(Kerberos)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우호적이지만, 문에서 나오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잡아 먹어버린다고 전해진다.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의 마지막 경계를 지키는 케르베로스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은 자의 세계를 산 자의 세계와 유비적으로 생각하여 길을 알지 못하면 안내자를, 강이 있으면 뱃사공을, 문이 있으면 문지기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히려 산 자에게 죽음의 세계를 보다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3. 죽은 자들의 심판


   원래 호메로스 시대에 죽은 자에 대한 처벌 개념은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하데스에 있는 죽은 자들의 영혼들은 어떤 특정한 처벌을 받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단지 하데스를 떠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들이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죽음 이후에 단지 이승이 아닌 저승에 있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호메로스에서는 아직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의 보상과 처벌에 대한 개념이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호메로스의 세계 속에도 보상과 처벌에 대한 일련의 암시들을 볼 수 있다. 호메로스는 에리뉘에스(Erinyes)가 거짓 맹세를 한 죽은 자들을 지하 세계에서 벌을 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친숙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이전부터 그리스인들에게 내려오는 전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에게는 영혼이 아직 인격적인 의미가 들어가지 않는 생명력 정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이 아무런 인격도 갖지 못하거나 인격적인 요소가 빠져 있는 것이라면 처벌이나 보상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는 죽은 자들이 지하 세계에서 심판을 받는 걸로 나타난다. 오뒷세우스는 지하세계에 내려갔을 때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Minos)가 황금 홀을 쥐고 앉아 죽은 자들에게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플라톤은 『변명』에서 하데스의 심판관으로 미노스를 비롯하여 라다만튀스(Rhadamanthys), 아이아코스(Aeacos), 트립톨레모스(Triptolemos), 그밖에 다른 이름 모를 영웅들을 일컫는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에서는 미노스, 라다만튀스, 아이아코스 등 단 세 명만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스퀼로스와 같은 비극 작가는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일을 하데스가 직접 하는 걸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는 지하 깊은 곳의 위대한 심판관인 하데스가 모든 것을 보고 마음에 새겨둔다고 말한다. 그리스 문화에서 죽음 이후의 심판과 지상에서 한 행위들을 평가하는 심판관에 대한 믿음은 대중적이었다.


    호메로스의 지하 세계에 나오는 대부분의 영혼들은 지상에서와 별로 다르지 않게 살아간다. 그러나 소수의 특별한 인물들이 지하세계의 가장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Tartaros)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다. 그들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물들이다. 가령 제우스의 아내 헤라를 범하려했던 티튀오스(Tityos), 신들의 음식을 훔치고 신들에게 가사적인 음식을 먹이려 했던 탄탈로스(Tantalos), 신들을 속이고 죽음을 회피하려 했던 시쉬포스(Sisyphos) 등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 오만을 부리다가 이 세계와 우주의 질서를 파괴시키려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가장 고통스러우리라 생각하는 벌을 받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저주를 받았다.

 


4. 죽은 자들의 처벌

    죽은 자들의 처벌은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아비규환과는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죽음 이후의 처벌에 대해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육체에 상해를 입히는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는 않다. 프로메테우스처럼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는 형벌을 받는 티튀오스의 경우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기독교의 지옥에 대한 상상이 ‘부분적으로’ 그리스로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 문화에서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특징이 강화된다. 가령 아리스토파네스는 죽은 이후에 입문자들이 가는 곳을 두 종류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입문자들이 가는 곳으로 엘뤼시온과 비슷하게 더 없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며, 다른 하나는 지옥과 비슷하게 죄를 지은 사람들이 큰 진창과 오물구덩이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그리스의 처벌 개념은 기독교보다는 더 형이상학적인 고통을 지향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육체에 대한 고통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보다 견디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주는데 목적이 있다. 가령 시쉬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보다 더 많이 살기 위해 신을 기만하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삶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처벌을 받았다. 그것은 무거운 돌을 언덕꼭대기까지 어렵게 굴려 올리면 다시 아래 떨어지는 일을 무수히 반복하며 삶의 허무함과 부조리를 영원히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다나오스의 딸들도 구멍이 숭숭 난 채반으로 밑 빠진 독을 채워야 하는 벌을 받는다. 시쉬포스나 다나오스의 딸들이 받는 육체적인 고통의 경중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코 끝낼 수 없는 일을 아무런 희망 없이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절망과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이야말로 죽음보다도 더한 형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르타로스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인물들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죽은 자들이 육체를 갖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영혼은 육체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할 수는 없다. 즉 이것은 호메로스의 영혼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영혼은 거의 의식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영혼 개념에 인격적인 측면이 포함될 때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이러한 생각이 섞일 수가 있었는가? 아마도 이것은 일부 학자들이 말하듯이 민담과 종교가 혼돈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이야기 내에서도 전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설명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죽은 이후의 처벌과 보상 개념이 체계적으로 사유되지 않던 시기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5. 죽음 이후의 보상


    엄밀히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자는 있어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 자는 없다. 하데스에서 영혼들은 서로 별다른 특징이 없이 지낸다. 일단 죽은 자들에게는 특별히 좋은 조건과 장소가 제공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그들은 대개 의식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호메로스는 예외적으로 지하세계에 있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지적인 능력과 예언적 능력을 죽기 전과 같이 유지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하데스에서 방금 죽어 매장되지 못해 아직 하데스로 들어가지 못한 엘페노르의 영혼 외에 다른 영혼들은 거의 의식이 없는 듯이 보인다. 오뒷세우스 자신은 알지만 죽은 자들의 영혼들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아들을 그리워하다 죽은 오뒷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이아도 아들을 못 알아보는 걸로 나온다. 이 영혼들은 나중에 오뒷세우스가 바친 동물들의 피를 마시고 겨우 의식을 되찾는 것으로 나온다. 사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엄밀히 처벌을 받거나 보상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처벌이나 보상을 받더라도 죽은 자의 영혼이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자신이 처벌을 받거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는 분명히 죽음 이후의 세계 혹은 하데스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영혼은 없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자는 타르타로스로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올바르고 선하게 살았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호메로스에게서는 이러한 영혼이 지하세계에서 머무를 만한 곳은 없다. 아직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윤리적 성찰이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지만 그리스의 신화적 세계관에도 기독교의 천국과 비슷한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 곳은 흔히 엘뤼시온 또는 축복받은 자들의 섬이라 불린다. 엘뤼시온은 에우로페의 아들이자 미노스 왕의 형제인 라다만튀스(Rhadamanthys)가 지배하는 곳이다. 눈도 비도 폭풍도 없이 인간이 가장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엘뤼시온이다. 그러나 엘뤼시온에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다. 헤시오도스는 인류의 다섯 종족 신화에서 영웅 종족이 ‘축복받은 자들의 섬’으로 간다고 말하였다. 흔히 엘뤼시온과 축복받는 자들의 섬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엘뤼시온과 달리 축복받은 자들의 섬은 살아있는 존재가 가는 곳이 아니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축복받은 자들의 섬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트로이 전쟁과 테베 전쟁에서 죽은 영웅들이다. 그 곳은 이 세계의 끝에 있는 오케아노스 강 근처에 있으며, 일 년에 세 번이나 과일을 맺는 땅으로 크로노스가 통치한다. 아르카익 시대에 이러한 경향은 나중에 죽음 이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의 모델로 제공되는 새로운 종말론적 요소로 발전되었다.


6. 죽음의 철학


    그리스 철학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것은 경험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 일부는 비유나 신화를 통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신화의 형식을 빌어 설명하고 있다. 에르(Er)라는 사람은 전쟁터에서 죽었다가 하데스를 여행한 이야기를 통해 플라톤은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에르의 영혼이 신체를 벗어나 다른 영혼들과 함께 한편으로는 땅 쪽을 두 개의 넓은 구멍들이 나란히 나있고, 다른 편으로는 하늘 쪽으로 다른 두 개의 넓은 구멍이 나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죽은 자들의 영혼들 중 올바르지 않는 영혼들은 땅 쪽으로부터 오물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내려오고, 올바른 영혼들은 하늘 쪽으로부터는 순수한 상태로 내려오는데 약 1000년간의 여행을 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분명히 선악의 원리가 지배한다. 영혼이 살아있을 때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들과 올바르지 않게 살았던 사람들은 적절한 처벌과 보상을 받게 된다. 근본적으로 플라톤은 영혼윤회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죽은 자의 영혼은 하데스에서 계속해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혼은 살아 있을 때 올바르게 살았느냐에 따라 보상과 처벌을 받는다. 플라톤의 계산에 따르면 보상과 처벌은 인간의 수명을 약 100년으로 잡아 10배에 해당하는 1000년 동안 받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 시대로부터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신들과 달리 인간들은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에게 죽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 대개 극단적인 두 가지 태도를 취하게 된다. 한편으로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편으로는 죽음 이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는 죽음 앞에 가까이 갈수록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성향을 드러낸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견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혼이 소멸하는지 또는 불멸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한편으로 그리스의 신비주의 전통에 있는 피타고라스학파와 엠페도클레스와 플라톤은 영혼이 불멸한다고 전제한다.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과 신체로 이루어진 존재로 신체는 복합적이지만 영혼은 비복합적이기 때문에, 신체는 소멸되지만 영혼은 불멸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인간 내부에서 신적인 요소, 즉 불멸하는 영혼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시대에 비하면 일종의 철학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플라톤 이전에도 영혼이 불멸한다고 전제하는 오르페우스종교와 같은 견해들이 발견되지만, 플라톤은 학문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의 과학주의 전통에 있는 동시대에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나 헬레니즘 시대의 에피쿠로스학파 등은 영혼이 소멸한다고 생각하였다. 영혼도 원자들로 구성되어 신체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면 소멸된다고 생각하였다.

장영란 l 교수는 그리스 철학으로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 외국학종합연구센터의 연구원이다. 저서로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영혼의 역사』, 『플라톤의 국가, 정의를 꿈꾸다』, 『장영란의 그리스신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 『아테네, 신들의 도시』, 『위대한 어머니여신: 사라진 신들의 도시』, 『플라톤의 교육론』, 『동서양철학콘서트』, 『성과 사랑, 그리고 욕망에 관한 철학적 성찰』 등이 있다.

글쓴이 / 장영란
(기독교 사상 2011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