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종주기 : 13. 와칸의 고성들 1 / 다정 김규현

2014. 4. 7. 01:14파미르 이야기

 

 

 

 

 

      

13) 파미르종주기- 와칸의 고성들 1

 

* 파미르의 고고학 연구서적들  

 

 파미르에서의 필자의 관심은, 물론 두 말할 것도 없이, 순례승들의 궤적을 쫒는 일이다. 그러자면 역사, 고고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슬람권에서는 타종교의 유적들을 도무지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의  타종교에 대한 파괴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반달리즘(Vandalisim)1)이라는 파괴행위가 최고조에 달한 것이 바로 바미얀(Bamyan)2)대석불의 파괴였다. 물론 우상숭배는 당연히 배격해야할 그들의 교리상의 의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그 우상들이라는 것들이 바로 자기의 직계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까지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국제사회의 바람이다. 무릇 오래된 것은 오늘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바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할 역사 바로 그것이니까…    

 

둔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의 장건출사서역도, 당나라초기(618~714년

 

 

▼ 바미얀 대석불의 전, 후 

 

 

 각설하고, 파미르에서의 고고학 연구는 현대에 들어와서 그 동안 선구자적인 연구를 해온 마쿠스 하우설(Markus Hauser)에 의해 정리되어 그의 허락하에 타지크 과학아카데미3)의 알렉세에브나(Mira Alekseyevna Bubnova)에 의해 편집되어 2000년 중앙아시아대학(The University of Central Asia(UCA)) 호로그 캠퍼스에서『서부 파미르, 고르노 자치주의 고고학 지도』4)라는 제목으로, 그것도 단지 30부정도만 발간하였다.

 그러다가 2010년에 들어와서 로버트 미들톤(Robert Middlton)에 의해

『 피미르의 고고학과 문화의 역사(The Pamirs-History, Archaelogy and Culture)』와 역시 같은 저자에 의해 2012년에『파미르의 전설(Legends of the Pamirs)』같은 이 방면에 관련된 가이드북 성향의 서적들이 호로그에서 발간되어서 현재 어렵지 않게 구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는 파미르고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로노바닥샨을 현재 행정구역별로 나누어 각기의 지도 위에 암각화, 성터, 스투파, 조로아스터 사원터, 고분, 고택, 고 광산, 대상숙소 등을 표시하고 그리고 순서에 의해서 간략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이슬람과 관계된 중, 근대의 것들이 대부분이고, 또한 지극히 편중된 시각으로 편집되었기에 문제가 많아 보인다. 예를 들면, 마르코폴로 같은 서구쪽 자료는 보이나 현장법사 같은 세계적인 여행가의 이름은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중국쪽의 자료를 조금도 참조하지 않아서 절름발이 사서에 가깝다는 비판을 금할 수 없다.

 

▼ 파미르의 역사 가이드 책  

 

▼ 파미르의 역사  지도

 

▼ 파미르의 역사 가이드 책  인덱스

 

 

그렇기에 필자같이 5-8세기 당시의 자료들, 특히 순례승들에 얽힌 자료들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마저 발견하지 못했으면…” 하고 중얼거리면서 여행 내내 틈틈이 꺼내들곤 하였다.

 물론 필자의 관심은 와칸계곡에 있기에, 이 책들을 가이드북 삼아 먼저 이스카심을 기점으로 왔다갔다 반복하면서 고대의 역사와 전설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 와칸의 요새들

 와칸계곡은 실크로드의 주된 루트의 한 갈레로 일명 ‘부디스트 루트’로 또는 ‘와칸주랑’으로 알려졌다는 것은 필자도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한 바 있는데, 위의 책들도 서론에서는 이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현재 와칸계곡 곳곳에는 유서 깊은 이 실크로드 루트를 지키기 위한 거대한 성곽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난공불락의 요새들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다. 옛날부터 이곳을 통과하는 수많은 대상들과 순례승들은 가지고 통과하는 진귀한 물건중에서 일정한 비율을 현물 또는 은화 같은 화폐로, 일종의 통과세를 물어야했다. 그리고나서야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기도 하였다. 와칸은 외통수 루트이기에, 통과하는 대상들의 숫자가 많을 때는 통과세의 수입이 짭짤했던지 와칸의 요소요소 길목마다 이런 통과세를 뜯어내기 위한 일종의 초소 같은 성곽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한다.

 

▼ 쿠샨제국의 영토

 

카니슈카대왕의 하반신 소상

 

 

▼  우즈벡 카라테페 유적지에서 한국 발굴단이 발굴한 쿠샨시대의 동전즐 

 

▼ 쿠샨왕조의 동전 

 

▲  쿠샨시대의 벽화

 

▲  간다라 미술풍의 불상들

  

 

 혜초사문의 아래 구절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는데, 여기서 ‘9개의 식닉국’ 이란 정확하게 9개라기보다 그저 ‘많다’ 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또 호밀국 북쪽 산 속에는 아홉 개의5) 식닉국이 있다. 아홉 왕이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사는데, 그 중에 한 왕은 호밀국왕에게 예속되어 있고, 나머지는 다 독립해 있어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중략) 그 나라 왕은 항상 2, 3백 명의 군사를 파밀천에 보내어 무역하는 호족을 덮쳐서 물건을 빼앗는데 거기서 빼앗은 비단을 창고에 쌓아 두고 못쓰게 되도록 내버려두고 옷을 지어 입을 줄을 모른다.

 

 또한『신당서』권221 하「식닉전」에도 이런 약탈의 기록이 보인다.  

 

 큰 골짜기 5개가 있는데, 각자 수장이 다스리고 있어 오식닉(五識匿)이라고 한다. (중략) 사람들은 즐겨 공격하여 대상들의 물건을 겁탈한다. 파밀천 네 개 골짜기에는 왕의 명령이 별로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5개 또는 9개 식닉국이란 말로만 왕국이지 실제로는 계곡의 험준한 외통수 길목에 성곽을 세워놓고 지나가는 대상들이나 행인들에게 통과세조로 물건을 빼앗는 일종이 산적들의 집단에 불과하다고 보여진다. 『당서』라는 공식기록에 그런 사실이 올라올 정도라면 그냥 좀도독들은 아닐 것이라는 점도 그런 근거의 배경이다.  

 

▼ 와칸의  인조 동굴들

 

 

* 나마드구티의 ‘하하(Khakha Fortress)요새’     

와칸계곡에 이런 성곽들이 세워지기 시작된 시기는 BC2~AD3세기의 쿠샨왕조(Kushan)6) 때이다. 영어 알파벳으로 ’Kha-kha‘라고 쓰니 ‘카카’ 라고 읽어야 마땅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K'자 발음을 못하는지 그냥 계속 ‘하하’ 라고만 되풀이 한다. 별 수 있나? 나도 ’하하‘ 해야지…

마찬가지로 ‘와칸’도 ‘와한’이라고 발음해야 마땅하지만, 이미 ‘와칸’으로 습관화된 용어이기에 여기서도 그냥 ‘이라고 표기하니 이점 혼동 없기 바란다.

 

 각설하고, 와칸을 비롯한 파미르에는 기원전에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쿠샨시대의 성터의 유지가 여러 개 남아 있다. 그 첫째가  이스카심에서 15km 떨어진 나마드구티(Namadguti)마을 근처에 있는데, 옛 실크로드의 바로 길가 천연 바위산 위에는 기원전 3세기에 세워졌다고 전하는 커다란 성터가 잘 보존되어 있어서 지금도 옛 실크로드를 지나는 길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또한 이곳 초소에서는 타지크의 군인들이 강 건너 아프간을 바라다보며 경계를 서고 있는데, 이곳에서 판지강을 건너 아프간 땅을 내려다보면,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사이로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 보리밭사이로 보이는 하하 요새의 전경 

 

  ▼ 하하요새의 표지판 

 

▼  강건너 아프간 풍경

 

▼ 하하요세에서 바라본 와칸주랑 옛 길 

 

▼  하하요새

 

 이 요새를 처음 지은 쿠샨왕조의 선조들은 원래 중국서부의 현 타림분지의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족인 월지(月氏)족이었는데, 기원전 176~160년경 북방의 흉노족에 쫓겨 서쪽으로 서쪽으로 정착할 곳을 찾아서 이동하다가 당시 발흐(Balkh)를 중심으로 한 그레코-박트리아로 몰려가 그 나라를 무너뜨리고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여기서 ‘쿠샨’의 어원은 한자 '귀상(貴霜)'에서 비롯되었지만, 서양쪽 자료에서는 쿠샨으로 전해졌고, 한편 중국쪽 사서에서는 계속 그냥 월지라고 불렸다. 중국 최초의 여행가인 장건(張騫,?~114BC)7)의 목적지였던 바로 그 월지가 바로 쿠샨이다.  

 그들은 정복한 나라의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여 그리스를 본 따 동전을 만들고 인도양을 통한 무역과 실크로드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등 동서양의 문화를 포용하여 그리스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간다라문화를 꽃피웠고 나아가 대승불교를 동아시아에 전파하는 등 역사문화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쿠샨의 제3대왕 카니슈카(Kanishka)1세8)는 인도의 아소카와 함께 불교를 부흥시킨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되고 있는데, 타림분지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제국의 후반기인  1세기~2세기에 그들은 북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엣 선조들의 고향인 타림분지의 일부까지 점령하면서 중국의 한(漢) 나라와 문화적인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때 중국으로의 길목인 와칸에 ‘하하’ 같은 요새가 세워졌다고 비정된다.  

 그러니까 현재까지 와칸계곡을 지키고 있는 이 요새의 기능성과 기원전에 세워진 연대로 감안하면 5세기 초의 법현, 6세기의 송운 혜생, 7세기의 현장 그리고 8세기의 혜초 등 모든 입축순례승이 이곳을 통과하여 다시 행장을 정비하여 다시 인도로 또는 중국으로 떠났을 것이다. 며칠 동안 정 들었던 요새를 돌아보며, 그렇게 낙타방울 울리며 떠나갔을 것이다.

 

▼ 와칸의 아이들

 

▼ 판지강 건너 아프간령 와칸의 풍경

 

 ▼ 와칸의 시골풍경 


1) 문화예술 유적지를 파괴하는 행위를 ‘반달리즘’이라 하는데, 이 말의 유래는 5세기초 민족대이동 때 로마를 점령한 '반달(Vandal)'족이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로마에 걸쳐 약탈과 파괴로 악명을 떨쳤던 데서 유래된 말이다. 반달리즘을 막기 위한 대표적 국제기구인 유네스코는 ‘문화재 보호협약’ 등을 만들어 시행한다. 이 협약에 따르면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재는 식별표시를 해놓고 전쟁이 발생했을 경우 문화재 집중 분포지역은 보호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러나 고의적인 경우는 대책이 있을 리 없다.  

2)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주의 힌두쿠시 산맥의 절벽 한 면을 파서 세워져 있었던 석불들로 6세기경에 세워졌으며 간다라 양식이다. 2001년 3월 8일과 3월 9일 이슬람 국가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탈레반 정권에 의해 로켓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3) Tajik Academy of Sciences:A. Donish Institute of History, Archaeology and Ethnography

4) 『Archaeological Map of Gorno-Badakhshan Autonomous Oblast』라는 책은 호로그에 있는 중앙아시아대학의 역사고고학 연구소 또는 타지크의 역사고고학 연구소나 두산베의 박물관 등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한다.  

5) 혜초가 말한 9개 왕국은, 아마도『신당서』권221하 「식닉전」에 언급된 ‘오식닉’, 즉 5개의 식닉국과 파밀천의 4개 골짜기에 있었을 4개 식닉국을 합쳐 이른 말이라고 생각된다.

6) 쿠샨왕조(1세기 BC - 3세기 AD)는 타지키스탄, 카스피 해, 아프가니스탄, 갠지스 강 상류를 가로지르던 제국이었다. 월지 민족이 세웠으며, 중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등과 교역했다. ‘쿠샨'은 중국어로 월지족의 다섯 민족 중 하나를 일컫는 말인 '귀상(貴霜)'에서 왔다.

7)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8) 쿠샨왕조의 제3대 왕으로 아소카 왕 이래 대국가를 건설하고 페샤와르에 도읍을 정하였다. 당시에는 불교가 성하고,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불상 제작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불교 미술은 불상이 만들어진 지방이 북서 인도의 간다라 부근이었기 때문에 '간다라 미술'이라고 불린다.
불교도는 그를 아소카 왕과 함께 불교의 전륜성왕으로 불러왔다. 그의 재위시에 제4회의 불전 결집이 행하여졌으며, 또 불교 시인 아슈바고샤(馬鳴)나 나가르주나(龍樹)가 활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니슈카왕이 불교와 함께 그리스 여러 신의 숭배와 조로아스터교·힌두교 등을 보호한 것은, 이들 신상(神像)이 당시의 화폐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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