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7. 01:12ㆍ파미르 이야기
# 12. 파미르 종주기 -치트랄
* 힌두쿠시산맥 넘어 상미국(商彌國)이었던, 치트랄(Chitral)로… 이스카심을 떠난 현장법사의 발길은 생뚱맞게도 상미국으로 향했다. 바로 타지크가 아닌 현 파키스탄 북부 마을인 치트랄1)이란 곳으로 혜초가 구위국(拘衛國)으로, 송운사문이 사미국(賖美國)으로 불렀던 곳이다.
“달마실철제리국의 큰 산을 남쪽으로 지나면 상미국에 도착한다. (…國 大山之南至 商彌國)“ 여기서 ‘생뚱맞게’ 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현장이 귀국로인 와칸주링을 별안간 벗어나 버렸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기록을 유심히 읽어보면 상미국 역시 시기니국인 호로그와 마찬가지로, 현장이 직접 가지 않고 단지 주워들은 것은 기록한 예의 전문국(傳聞國)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귀국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기 전에 이스카심 근처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기록해두고 싶은 현장의 왕성한 지식욕에서 온 일종의 보너스 가이드포인트로 풀이된다
▼ 『대장서역기』 권 12 목판본 이미지 현장은 달마실철제국으로 표기된 이스카심 다음에 상미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큰 산을 남쪽으로 넘으면” 의 큰 산이란 바로 힌두쿠시(Hindu Kush山脈)2)이다. 힌두쿠시란 ‘힌두의 살해자’라는 뜻으로 이슬람세력이 인도대륙을 점령하고 수많은 힌두, 즉 인도인 노예로 잡아서 이 산맥을 넘어 아프간 땅으로 끌고 갈 때 수많은 사상자가 났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그러나 아프간 쪽에서는 ‘아버지의 산’ 이라는 뜻의 ‘코히바바(Khi-Baba)’라고 부른다.
▼ 힌두쿠시 산맥과 치트랄 시가지
▼ 치트랄의 중심지 바자르의 전통모자, ‘파골’을 쓴 사람들 일반적으로 아프간의 반군모자로 알려진 이 모자는 실은 다르디스탄의 전통모자로 양털로 짜는데, 아랫부분이 신축성이 있어 말려 있는 것을 내리면 귀 밑까지 덮어 쓸 수 있어 요긴하게 쓰인다.
▼ 파골모자의 다르치스탄 악사들
그러나 반면에 우리의 혜초는 직접 이 나라 땅을 밟는다.
“또 오장국(우디야나)로부터 동북쪽으로 산으로 들어가 15일을 가면 구위국에 이른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마라갈자국(摩褐羅闍國)’이라고 부른다. 이 나라 왕도 역시 삼보를 공경하여 신봉하고, 절도 있고 승려도 있다. 의복과 언어는 오장국과 비슷하고 모직 웃옷과 바지를 입으며 또 양과 말 등도 있다.3)
위의 원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又從烏長國[行]東北 入山十五日程 至拘衛國” 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예의 ‘시문구(始文句)’에 해당되는 구절이 분명하다, 현장의 경우와 달리 혜초는 직접 가본 나라와 가보지는 않았지만 귀 동냥으로 주워들은 나라를 구별하여 적었는데,4) 직접 다녀온 곳은『從… 行… 日… 至』즉『어디에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동안 가서, 어디에 이르렀다.』라는 문장향식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은 비록 가보지도 않고 주워들은 정보를 기록하였지만, 오히려 직접 가본 혜초다 자세하게 기록하였기에 지리학적인 정보로써의 가치는 오히려 더 소중하기에 전문을 읽어보자.
상미국의 주위는 2천5백 여 리에 달하며 산과 강이 사이사이에5) 있고 구릉이 높거나 낮게 솟아있다. 곡식은 고루 잘 자라며 보리와 콩이 풍작이다. 포도가 많이 나고 자황(雌黃)6)이 생산되는데 자황은 벼랑을 뚫고 돌을 깎아 낸 뒤에 얻을 수 있다. 포악한 산신이 살고 있어 여러 차례 재해를 일으킨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뒤에 산에 들어가면 평온하게 오고 갈 수 있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폭풍과 우박이 사납게 휘몰아친다. 기후는 춥고 풍속은 조급하다. 사람들의 성품은 순박하고 풍속은 예의가 없다. 지혜가 적고 기민하지 못하며 기능이 천박하다. 문자는 토카라국과 같지만 언어는 차이가 있다. 대부분은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이 나라의 왕은 석가(釋迦/Sakya)종족으로서 불법을 존숭하고 있다. 나라 사람들도 왕의 교화를 따라서 독실한 믿음을 지니지 않은 이가 없다. 가람은 두 곳이 있는데 승려는 적다.
현장과 혜초는 이구동성7)으로 치트랄이 불교국가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슬람화가 진행된 지 천년이 지난 현재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불교유적은 한 곳도 없다. 그것들 모두 인위적으로 파괴되었거나 천년이란 세월 속에 스러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뒷받침되고 있지는 않지만, 향토사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치트랄 인근 토르코우(Torkhow)라는 곳에는 ‘탁발하는 돌(Mendicant of Stone), Kalandar-i-Bohtni)이라 불리는 돌무더기가 바로 불교 스투파의 유지로 그 윗부분에 불상이 있었는데 현재 잘려 나갔다고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각설하고 또한 위 기록에서 눈에 띠는 대목이 한 군데 더 있다. 혜초는 구위국이라 불렀지만, 이 나라사람들은 “그들은 스스로를 사마라갈자국(摩褐羅闍國)이라고 부른다.” 라는 대목으로 이 명칭이 현장과 송운의 호칭인 상미국 또는 사미국의 어원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마갈라사’는 산스크리트 ‘Śamarājā’의 음사이다. 한편 치트랄[현 奇特拉爾]은 중국쪽 기록에서는,『한서』에는 쌍미(雙靡)로, 『위서』에는 사미(賖美)로, 『대당서역기』권2와『신당서』권221에는 상미(商靡)로, 오공행기『悟空행기』에서 구위(拘緯) 등으로 나타난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아시아권의 입축구법승(入竺求法僧) 중에서 제일 먼저 이 나라를 방문한 사람은 위(魏)의 송운사문으로 그가 남긴 여행기를 편집한『송운행기』에는,
[519년] 11월 중순에 사미국으로 들어갔다. 이곳으로부터 점점 총령을 벗어나게 되는데 땅이 척박하여 백성들이 매우 궁핍하였다. 길은 사람과 말이 겨우 다닐 정도였는데 험준하고 위험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북사』권97에는 또 다른 기록이 보여서 『송운행기』의 불완전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미국은] 파지(波知)8)의 남쪽 산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불법은 믿지 않고 여러 신을 섬기고 있다. 갈달국(蠍噠國, Ephthall)9)에 부속되어 있는데, 동쪽으로는 발로륵국(鉢盧勒國)10)이 있다.
* 파키스탄의 국립공원 치트랄로 가는 길 현재 현장과 혜초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스카심에서 치트랄은 이웃지간이다. 다만 중간에 힌두쿠시라는 7천m급의 대 산맥이 가로막혀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그러나 그 산맥을 넘나드는 고개가 있다면 두 마을 간의 소통은 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아래 지도들을 보면 와칸에서 치트랄로 넘는 고개는 남서쪽의 도라고개(Dorh Pass)와 남동쪽의 부로길고개(Broghal pass) 등이 있다.
▼ 지도 속의 붉은 색의 둥근 원 속의 (1)은 이스카심, (2)는 호로그, (3)치트랄, (4)길깃트, (5)중국 총령진 타쉬쿠르간, (6)은 앞으로의 행선지인 브랑, (7) 랑가르를 표시한다.
▼ 지도 오른쪽 위에 보이는 두 고개는, 와칸에서 볼 때 남동쪽의 힌두쿠시를 넘는 부로길 고개는 다시 다르코트(Darkot pass)를 넘어서 카라코람하이웨이[KKHy]의 중심도시인 길깃트로 가는 코스로, 바로 고선지의 행군로에 해당된다.
그러나 우리도 혜초사문처럼11), 이 고개를 넘을 수 없기에 치트랄로 가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으로 건너가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와야 한다. 그러려면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람아바드 또는 아프간의 길목인 페샤와르에서 차를 타고 천불천탑의 계곡으로 알려진 스와트계곡으로 올라 온 다음 다시 로와리(Rowari, 3,118m)고개를 넘어 반나절을 더 올라와야 한다. 현재는 여름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기에 파키스탄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비행기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하여간 심심산골 첩첩산중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고생을 각오하고서라도 가볼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로 맑고 아름다운 곳이다.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부는 흔히들 코히스탄(Kohistan)이라 부른다. “산의 지방” 이란 뜻으로 여기서 ‘코히’는 산이고 ‘스탄’이 땅이란 뜻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치트랄, 마스츄지(Mastuj,馬斯圖吉), 스와트계곡 고지대와 길깃트 서북부를 아우르는 지역을 다르디스탄(Dardistān)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들의 언어는 다르딕(Dardic)어라고 부르는데, 현장과 혜초의 지적처럼, 이란어와 인도 아리안어와의 특징을 보유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온 독특한 언어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한다.
▼ Chitral today, net 시작화면
* 알렉산더의 동방원정군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는 칼라쉬(Kalash)계곡 근래 들어 나그네들이 이 심심산골 치트랄 지방을 심심치 않게 찾는 이유는 본토인들은 여름철의 피서휴양이 목적이지만, 나머지 이방인들은 문화인류학적 호기심으로 무언가를 찾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 치트랄은 접근성의 어려움으로 근대까지 완전히 감추어진 비장의 오지였는데, 모 매스컴에 마치 전설 같은 흥밋거리 기사가 소개된 뒤부터 호기심의 대상지로 변해 이색 관광지로 변해 버렸다. 필자는 오래전에 혜초의 발길따라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치트랄 이외에 칼라쉬계곡은 꽁꽁 숨겨진 곳이어서 스쳐지마갈 수밖에 없었다.
▼ 알렉산더의 동방원정도
이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마치 전설 같은 이야기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웅장한 한 편의 영웅서사시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B,C 334년 마케도니아와 헬라스 동맹군을 거느리고,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 다리우스3세(DariusⅢ)를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격퇴시키고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함락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는 대장정 길을 떠나 아프간 전역과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소그드 전역을 점령하고는 점령지에 많은 식민도시, 즉 알렉산드리아12)를 건설하여 동서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꿈꾸었다. 그런 다음 그는 현재의 발흐(Balkh:Bactra/縛底耶)13)에 1만3천여 명의 군대를 남겨두고 자신은 인도 공략을 위해 주력부대를 이끌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인더스 강 유역에 이르렀으나 여름철 열병이 퍼져 12년에 걸친 원정을 마무리하고 귀국하는 도중에 33세의 나이로 요절을 하게 된다.
이렇게 알렉산더가 아무 대책 없이 떠나버리자 3개 대륙에 걸쳐 있었던 대제국은 분열을 거듭하면서 본국과의 유대관계가 멀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발흐에 있던 주둔군은 할 수 없이 독자적으로 그리스인을 지배층으로, 원주민들을 피지배층으로 한, 그리스풍의 그레코-박트리아(Greco-Bactria)왕국을 세워 한 세기[B.C 246∼B.C 138]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장기간에 걸친 내전이 계속되고 서쪽 이란계의 파르티아 부족과 스키타이계의 토카라(Tokhara)부족과 북방계의 대월지(大月氏)부족의 칩공으로 인해 발흐에 세웠던 이채로운 왕조 박트리아는 ‘동서문화의 융합’의 산물인 헬레니즘이란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이 때 일단의 유민들이 심심산골 힌두쿠시 산골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외부와 단절한 채 고유의 혈통과 문화를 고수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가설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os)14)의 유명한 『역사』에서도 등장하는 다르드(Dard)인의 정착설인데, 그들은 무슨 이유인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아리아인에서 갈라져 나와 펀자브 평야에서 인더스강 계곡을 따라 치트랄까지 거슬러 올라와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길깃트 말의 방언들을 쓰고 페르시아 문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런 사연을 가진 원주민들이 정착해 사는 곳이 바로 3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진 칼라쉬(Kalash)계곡인데 치트랄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그들은 14세기에 이르러 이슬람교로 개종을 강요당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원주민은 원시종교와 조로아스터 등을 믿으며 독특한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다.
▼ 칼라쉬의 민속 원무
▼ 칼라쉬의 소녀들
1) 현 파키스탄 서북쪽 산악지대의 치트랄계곡을 말한다. 지형적으로는 페샤와르(Peshsawar)에서 스와트(Swat)로 올라가는 도중에 바트케라(Bat khela)라는 분기점에서 북향하여 디르(Dir)를 지나는 루트로써, 아프칸의 와칸(Wakhan)계곡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여러 개 있다. 2) 힌두쿠시 산계는 파키스탄과 중국 사이의 국경 근처의 동쪽 부분에서 파미르 고원지대와 접한 후 남서쪽으로 뻗어 파키스탄을 관통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아프가니스탄 서부지방에서 몇 개의 작은 산맥들과 이어진다. 1,600km에 걸쳐 뻗어 있는 대 산맥으로 파미르 고원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티리치미르(7,690m)를 비롯해 높이가 7,000m 이상인 것이 24개나 된다. 3) 본문 17장에 “又從烏長國東北 入山十五日程 至拘衛國” 피136) 自呼奢摩褐羅闍國 此王亦敬信三寶 有“有僧 衣着言音 餘烏長國 相似 着氈衫袴等 亦有羊馬等也 4) 이 문제는 ‘혜초학’의 난제중의 하나였는데, 국내 혜초학의 권위자인 정수일선생이 <「慧超의 西域기행과 8세기 西域佛敎」『文明交流史 硏究』, 사계절, 2002.>에서 이러한 시문구가 모두 23군데 있는데, 이러한 곳들은 그가 직접 가서 보고 현지 견문록을 남긴 곳들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함으로 일거에 해결되었다 5) 지도를 보면 눈에 보이지만, 북쪽으로는 힌두쿠시가, 남쪽으로는 힌두라지 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6) 유황(硫黃)과 비소(砒素)의 화합물로 채색의 원료나 약용(藥用)으로 쓰인다. 7) 사족이지만, 공교롭게도 현장과 혜초의 기록의 번호가 같은 #17번이라는 우연의 일치가 필자의 눈에 들어온다. 8) 파지국은 『위서』,「서역열전」에는 “발화(鉢和)의 서남쪽에 있다. 땅이 좁고 가난하여 산속에 살아서, 왕이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다. 연못 3곳이 있는데,(중략)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심한 눈보라를 만난다.”라고 하였다. 9) 고대 월지족의 후에로 백흉노(白匈奴) 또는 엡탈리트, 갈달, 읍달, 하이탈, 타프탈레 등으로 기록된 유목민족으로 5세기 경부터 유라시아에서 큰 세력을 이루어 6세기 초에는 헬레니즘을 계승한 마지막 국가인 토카리스탄[吐火羅國]을 멸망시키면서 중앙아시아에 정착하여 동쪽으로는 호탄, 서쪽으로는 사산조페르시아 까지 미치는 판도를 형성하여 인도, 중국, 페르시아 그리고 남러시아를 잇는 교역루트의 차지함으로써 당시 실크로드의 실권을 장악하다가 560년경 페르시아와 연합한 돌궐에게 멸망되었다. 송운의 에프탈에 대한 기록은 사서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10) 현 파키스탄 북부의 카라코람하이웨이[KKH]상의 교통요지인 현 길깃트(Gilgit)로 현 파키스탄의 북부 발티스탄(Baltistan) 의 중심도시이다. 『구당서』「서융전(西戎傳)」에는 발률(勃律), 발로(鉢露)라고 기록되어 있다. 11) 혜초가 치트랄에서 힌두쿠시 고개를 넘어 바로 와칸주랑을 통해 파미르고원을 넘지 않고 다시 페샤와르로 내려와서 아프간으로 넘어가서 게속 서쪽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는 아마도 도둑놈들 노략질 때문이었다는 점은 필자가 누차 이야기한바 있다. 12) 현재로서 고고학적 발굴로 확인 된 곳은 6곳으로 투르크메니스탄의 마리[마르기아나], 아프간의 북부의 발흐[박트라], 서부의 헤라트 남부에 칸다하르[이라코소름], 우즈벡의 사마르칸트[마라간타], 키르키즈스탄의 호젠트[에스카테] 등이다. 13) 비록 현재는 아프간 북부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역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곳이다. 이 발흐에 대해서는 중국쪽 자료들과 서양쪽 자료들로 대별되는데, 『후한서』「서역전」에는 “대월지국은 람씨성(藍氏城), 바로 발흐에 도읍을 정하였다. 백 년이 지나서 귀상(貴霜, Kushan)이라고 자칭하고 안식(安息:Persia)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신당서』권221에는, “토화라는 토활라(土豁羅) 혹은 도화라(覩貨邏)라고 하며, 원위(元魏) 때는 토호라(吐呼羅)라고 하였다. 총령 이서와 오호하(烏滸河, Oxus江) 이남의 대하(大夏) 고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읍달인(悒怛人)들과 혼거하고 있다. 강병 10만을 가지고 있으며……왕은 엽호(葉護)라고 부른다. 무덕(武德)(618~626)과 정관(貞觀)(627~649) 연간에 다시 사신을 보냈으며 영휘(永徽) 원년(650)에는 대조(大鳥)를 헌상했는데 속칭 타조(駝鳥)라고 한다.” 이런 중국쪽 기록을 종합해보면 기원전 2세기 전반에 대월지(大月氏)가 흉노에게 격파되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대원(大宛::Fergana중)을 지나 박트라를 무너뜨리고 쿠샨왕조를 건국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동서양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니까 대월지와 토화라는 원래 두 개의 다른 민족이었으나 후일 이동하여 대하를 정복한 후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었다는 것으로 비정된다. 14) 그리스 역사가로 '역사의 아버지' 라고 불렀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다룬《역사》에는 일화와 삽화가 많이 담겨 있으며 서사시와 비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인 최초로 과거의 사실을 시가가 아닌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
'파미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미르 종주기 : 14. 얌춘(Yamchun) 고성 (0) | 2014.04.07 |
---|---|
파미르 종주기 : 13. 와칸의 고성들 1 / 다정 김규현 (0) | 2014.04.07 |
파미르 종주기 : 10. 호르그 / 다정 김규현 (0) | 2014.04.07 |
파미르 종주기 : 11. 파미르의 사람들 / 다정 김규현 (0) | 2014.04.07 |
9. 파미르 고원 종주기 / 다정 김규현 (0) | 2014.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