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7. 01:10ㆍ파미르 이야기
# 10 파미르고원 종주기- 호로그 * 식닉국(識匿國)이었던, 슈그난(Shughnān, 錫格南)지방
와칸계곡의 입구인 호밀국 이스카심에 도착한 혜초사문과 삼장법사 현장은 다음 행선지로 예정되어 있는 곳에 관심을 두었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들은 판지강을 건넘 다음 북쪽 산속에 있다는 도읍지로는 가지 않고, 다만 그 나라의 변두리 마을을 경유하면서 그들이 주워들은 정보들만 몇 줄 정도 기록으로 남기고는 바로 파미르천을 따라 동쪽으로 떠나 총령을 넘어 갔다. 이른바 직접 가보지 않고 전해들은 것을 기록한 전문국(傳聞國)에 해당되는 나라들은 ‘식닉국1)’이란 곳인데, 자금의 파미르고원의 서남쪽 경사면 골짜기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마을들로써 지금의 타지크령 고르노바닥샨(Gorno-Badakhshan/ Горно-Бадахшан)의 슈그난 또는 쉬그난(Shighnān) 지역에 해당된다. 바로 파미르지역의 최대도시인 호로그(Khrog)를 중심으로 한 산골마을들을 말한다. 식닉국은 지금 지도상에 쓰이는 슈그난 또는 쉬그난의 음사로 한문권에서는 식닉, 시기니, 슬닉(瑟匿), 적닉(赤匿) 식닉(式匿)으로, 티베트어의 『돈황연대기(敦煌年代記)』에서는 쉬키난(Shikinān), 쉬카나(Shikāna) 등으로, 아랍문헌에서는 쉬끼나(Shiqīna)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 슈그난으로 표시된 지도 속의 호로그
▲ 판지강과 군트강이 만나는 호로그의 전경
혜초는 이 나라를 ‘9개 식닉국’으로, 현장은 ‘5개 시기니국’으로 부르면서,
또 호밀국 북쪽 산 속에는 아홉 개의 식닉국이 있다. 아홉 왕이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사는데, 그 중에 한 왕은 호밀국왕에게 예속되어 있고, 나머지는 다 독립해 있어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 그 근처에 두 명의 석굴 속에서 사는 왕이 있는데 중국에 투항하여 안서(安西)도호부까지 사신을 보내어 왕래가 끊어지지 않는다. 왕과 수령만 면직 옷과 가죽옷을 입고 나머지 백성들은 가죽옷에 모직 상의를 입는다. 날씨가 매우 춥다. 눈으로 덮인 산 속에 사는데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산물로는 양과 말과 소와 노새가 있다. 언어는 각기 달라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2). 그 나라 왕은 항상 2,3백 명의 백성을 파밀천에 보내어 무역하는 호족을 덮쳐서 물건을 빼앗는데 거기서 빼앗은 비단을 창고에 쌓아 두고 못쓰게 되도록 내버려두고 옷을 지어 입을 줄을 모른다. 이 식닉국에는 불법이 없다.
이 기록으로 보아서는 한 나라라고 보기보다 산골에 동굴에 은거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도둑들의 소굴로 보이는데, 이는 현장도 "살육하는 것을 태연스레 저지르고 도적질을 일삼고 있고 예의를 알지 못하며 선악도 판가름하지 못한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신당서』에서도, “사람들은 즐겨 공격하고 상인들의 물건을 겁탈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왜 혜초와 현장이 이들 나라를 피해서 바로 동쪽으로 갔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혜초는 이들 나라를 모두 9개라 했지만, 『신당서』나 『오공행기』에는 ‘5개의 식닉국’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에 파밀천의 4개 골짜기를 더하여 9개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라고 비정된다.
여기서 우선 『신당서』권221 하「식닉전」을 보면 당시 파미르의 골짜기들의 정황이 자세한데, 특이한 점은, 왕을 비롯해 이 나라 사람들은 ‘굴실(窟室)’ 즉 굴속에서 살기 때문에 ‘굴왕(窟王)’ 즉 ‘굴속에 사는 왕’이란 말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식닉국은 동남쪽에서 곧바로 장안까지는 9천리이고 동북방 5백리에는 총령수착소(守捉所)가, 남방 3백리에는 호밀이, 서북방 5백리에는 구밀(俱密)3)이 있다. 큰 골짜기 다섯 개가 있는데, 각자 수장이 다스리고 있어 오식닉(五識匿)이라고 한다. 전국 이천 리 땅에 오곡은 없으며, 사람들은 즐겨 공격하고 상인들의 물건을 겁탈한다. 파밀천(播密川)의 4개 골짜기에 대해서는 왕의 명령이 별로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보통 굴속에서 산다.“
당나라 때의 기록들은 계속된다. 정관 20년(646)에 사몰(似沒)과 역반(役槃) 두 나라의 사신이 함께 내조하였으며, 개원 6년(724)에는 왕 포차파자(布遮波資)에게 오위대장군(吾衛大將軍)직을 수여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이 기록은 혜초의 것, “그 근처에 두 명의 석굴 속에서 사는 왕이 있는데 중국에 투항하여 안서(安西)도호부까지 사신을 보내어 왕래가 끊어지지 않는다.” 과 정학하게 일치하고 있다.
삼장법사 역시 귀로에 호밀국의 한쪽 끝만을 통과하면서 이 나라들을 시기니국(尸棄尼國)이라 부르면서 그가 보고 들은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쉬기니국의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5∼6리이다. 산과 강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으며 모래와 돌이 들판에 두루 깔려있다. 보리가 많이 자라고 곡식은 적다. 나무가 성글고 꽃과 과일도 매우 적다. 기후는 매섭게 추우며 풍속은 난폭하고 용맹스럽다. 살육하는 것을 태연스레 저지르고 도적질을 일삼고 있다. 예의를 알지 못하며 선악도 판가름하지 못한다. 미래의 재앙과 복에 어두우며 현세의 재앙을 두려워하고 있다. 생김새는 천하고 가죽과 모직 옷을 입고 있다. 문자는 토카라국과 같지만 언어에 차이가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옛 고한성(苦汗城)이었던, 호로그(Khorog) 필자는 이틀 전에 이미 힘들게 지나 온 호로그를 다시 돌아가야 만했다. 그 이유는 아무다리아-판지강-파미르천의 발원지인 조로쿨호수(Zoro Kul), 즉 빅토리아호수를 가기위해서는 ‘허가증’4)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뒤늦게 이시카심의 하니스 게스트하우스에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혼자 다니는 배낭여행자에게는 큰 실수에 속하는 일로써, 그 아까운 돈, 시간, 체력을 모두 낭비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백조가 날아다닌다는 새들의 왕국 빅토리아호수를 가보기 위해서는 그놈의 허가증이 꼭 필요하다기에, 숙소에서 공짜로 주는 아침까지 거르고 신 새벽에 길을 나섰다.
▲ 조로쿨호수 방문 허가증
굳이 변병을 하자면, 처음 두산베에서 하루 낮과 밤을 달려 새벽녘에야 호로그에 도착했을 때 토요일에만 열리는 아프간바자르 날짜가 빠듯하여 마음이 조급해 호로그에서 겨우 하루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급히 이스카심으로 떠나왔기에 정보수집과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결국 호로그를 다시 찾을 수밖에 없지만, 순조롭게 퍼미트를 받아들고 오후 늦게 다시 이스카심으로 돌아오는 길은 오히려 홀가분하였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였다. 그래 혜초도, 현장도 못가 본 호로그를 나는 두 번씩이나 왔다리갔다리 했으니까 …. 이스카심과 호로그 간의 거리는 『신당서』의 기록에는 ‘3백리’라고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반나절 거리이다.
그러나 숙제 하나는 풀어야했다. 식닉국의 도읍이 과연 호로그일까 하는 문제였다. 현장은 “쉬기니국의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5∼6리이다.” 라고 하면서 도성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혜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당서』권221 하「식닉전」에서는 고한성이라고 찍어서 기록하고는 상황에 따라서는 중심지가 옮겨 다녔다고 하였으니 지리적으로 볼 때 고한성이 바로 호로그가 식닉국의 도읍지일 가능성은 거의 확실하다.
“식닉국의 최초의 치소는 고한성(苦汗城)이었으나 후에는 산골짜기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타지키스탄 영토의 43%를 차지하고 있는 파미르, 즉 고르노-바다크샨(Gorno-Badahkshan;GBAO)자치주의 주도인 호로그는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도에 위치하며 판지강과 합류하는 군트강의 경사지를 따라 불규칙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튿이한 것은 시내를 가로 지르는 쿤트강의 물빛이 아침과 오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는 오전에는 만년설이 조금만 녹아 흐르기에 물빛이 옥색을 띠고 오후에는 만년설이 태양에 많이 녹아 탁한 물빛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호로그는 예부터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써 파미르를 넘나드는 대상로의 허브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역시 파미르하이웨이의 기점노릇을 하고 있다. 현재 호로그의 인구는 2만2천 명 정도로 주민 대부분이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교()5)도이다. 앞에서 파미르를 넘나드는 현대의 동맥인 ‘신 실크로드’ 중에서 현재 물동량이 가장 많은 도로는 두 곳을 꼽을 수 있다고 하였고 그 하나는 바로 파미르하이웨이(Pamir Highway)라고 하였다. 일명 ‘M41번 도로’로 더 많이 알려진 이 도로는 빨리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의 개념이 아니고 그냥 ‘하늘위로 난 길’이란 뜻이다. 장장 728(450마일)km의 이 ‘하늘 길’의 종점은 물론 키르기즈스탄의 오쉬(Osh)에서 타지크의 수도 두산베(Dushanbe)이지만, 실제로 대 파미르를 횡단하는 진정한 의미의 하이웨이는 “호로그에서 사리타쉬까지” 라고 할 수 있다.
▲ 파미르 하이웨이(Pamir Highway)
▼ 시민공원의 한가로운 풍경
▲ 호로그의 바자르 풍경
1) 한적과 기타 사적에 ‘식닉(識匿)’ ‘시기니(尸棄尼)’ ‘슬닉(瑟匿)’(『신당서』권221 하「식닉전(識匿傳)」), ‘시기니(尸棄尼, Śikini, Śikni)’(『대당서역기』권12), ‘적닉(赤匿)’ ‘식닉(式匿)’(『십력경(十力經)』, ‘Shig-nig’(티베트어, 티베트어의 『돈황연대기(敦煌年代記)』), ‘쉬키난(Shikinān)’ ‘쉬끼난(Shiqinān)’ ‘쉬카나(Shikāna)’ ‘쉬끼나(Shiqīna)’(아랍 문헌) 등 여러 가지로 음사되었다. 2) 현재 호로그를 비롯한 슈그난 일대에서 쓰는 언어는 동부이란어 가운데 파미르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갈차(Ghalcha) 방언에 속한다고 하며, 예로부터 주민의 이동도 적어 고립된 '언어의 섬' 과도 같은 지리적 상황도 있었으므로 옛 형태를 많이 남기고 있다고 한다. 현장이 말하는 도화라의 언어도 이란어 계통의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현재도 깊은 계곡에 거주하는 파미르인은 다양한 파미르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고 조사되고 있다. 3) 구밀은 『대당서역기』권1 중의 ‘구밀타(拘密陀)’, 『오공행기(悟空行紀)』중의 ‘구밀지(拘密支)’, 아랍 문헌 중의 ‘쿠메르(Kumedh)’ ‘쿠미지(Kumiji)’이며 현 다르와즈(Darwaz, 달이와자達爾瓦玆)이다. 4) 호로그의 중심지에 있는 넓고 아름답고 거대한 가로수가 높이 솟아 잇는 시민공원 귀퉁이에 있는 센터(Pamir Ecotourism Association Information Centre)발급해주고 있는데, 근차에 인도카레 맛이 좋은 델리호텔(Delhi Darba H)도 있어서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일반적으로 개별적인 배낭여행객이 많이 찾는 파미르롯지는 저렴하고 친절하지만, 시가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파미르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미르 종주기 : 14. 얌춘(Yamchun) 고성 (0) | 2014.04.07 |
---|---|
파미르 종주기 : 13. 와칸의 고성들 1 / 다정 김규현 (0) | 2014.04.07 |
파미르 종주기 : 12. 치트랄 / 다정 김규현 (0) | 2014.04.07 |
파미르 종주기 : 11. 파미르의 사람들 / 다정 김규현 (0) | 2014.04.07 |
9. 파미르 고원 종주기 / 다정 김규현 (0) | 2014.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