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오늘의묵상]아! 주님!

2014. 4. 9. 15:47경전 이야기

제  목 : 

아!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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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찬미예수님

어영부영 하다보니까 사순절이 다 지나가고 있지요?

부활준비 잘 하고 계십니까?

그래도 부활 한주를 남기고 이렇게 기도 찬미의 밤에 여러분들이 오셨습니다.

원래 예정보다 한주일이 빠르다보니까 제가 딱 세어보니 항상 자리 채우던 그 숫자에 비해서 여든 두 명이 덜 왔습니다.

정확합니다. 여러분은 모르셔도 저는 척 보면 압니다.

앞자리 얼마나 비어있나~~ 이걸 보면 압니다.

아마 또 다음 주에 기도찬미의 밤인 줄 알고 오후부터 열심히 올 쉰두 명,,,,,

와서 또 “오늘은 왜 안합니까?” 이렇게 얘기하실 겁니다.

지난달에 못 오신 분들은 다음 주 토요일인줄 알고~~

또 혼자만 오겠습니까? 또 동네사람들 다 데리고 오겠지요!

그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지금부터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을 통해서 40일이 성서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 40일은 정화와 심판을 뜻합니다.

 

누구를 심판하고 누구를 정화해야 되는 겁니까?

바로 본인을 정화하고 본인을 심판해야 됩니다.

 

내 악습을 심판해야 되고

내 교만을 심판해야 되고

우상숭배에 빠지려고 하는 나를 심판하는 시기가 사순절입니다.

 

그런데 마귀라고 하는 놈은 그렇게 만만하게 우리를 내버려두질 않습니다.

사순절이 되면 유독 다른 사람을 심판하게 만듭니다.

남편을 심판하게 만들고~~

구역반원들을 심판하게 만들고~~

본당신부를 심판하게 만들고~~

또 신자들을 심판하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을 정화시켜서

자기 자신을 심판해야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사탄이라고 하는 놈은 천국 문이 활짝 열리는 이 사순절을

은혜가 못 내려가게끔 죽을힘을 다해서 막습니다.

 

사순절은 모세가 시나이산 위에서 십계명판을 받으면서 은총을 받기위한

준비기간으로 두 번째 등장이 됩니다.

단식과 기도로써 준비를 했습니다.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놀고먹다가 어떡하다가 복권 맞듯이

우리 집에 떨어지는 것이 은총이 아닙니다.

 

은총은 희생의 결과입니다.

물론 은총자체가 거저주시는 거라고 했지만 아무한테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받을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지

은총을 받으면서도 받은 줄 모르는 은총의 불감증 환자들은

은총을 산더미처럼 쏟아 부어도 모릅니다.

내가 지금 은총가운데 살고 있는지 조차를 모릅니다.

 

모세는 단식과 기도를 통해서 십계명이라고 하는

천국 가는 지름길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과 싸우면서 시련과 유혹을 겪습니다.

예수님이나 모세나 40일 동안 승리를 거두는 그 영적무기는 뭐냐?

단식과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지름길을

단식과 기도로 설명하지만 지금은 뭐 단식도 다 흐지부지 없어져버렸고

일 년에 단 두 끼, 재의 수요일 한 끼, 성금요일 날 한 끼....

그러나 그거 지키는 신자가 40%가 채 안됩니다.

 

사순절은 천국 문이 활짝 열리는 시기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다가 재를 바르면서

‘사람아! 너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사십일을 지냈습니다.

 

사십일을 지내는 것과 사는 것과는 천지차이일 겁니다.

사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겁니다.

뭔가 변화가 오는 겁니다.

그러나 지내는 것은 작년에도 사순절이 왔듯이~~

올해도 왔고~~

내년에도 그냥 오는 겁니다.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겁니다.

 

우리들은 부활이라고 하는 고지를 바로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힘을 모으기 위해 구호를 외칩니다.

“싸워 이기자!”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나갑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저 고지를 향해서

우리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영적싸움에서 승리를 거둬야 됩니다.

 

이제껏 사순절을 어영부영 지내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남은 이 일주일만큼이라도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분명히 부활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을 부활시키는 주간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부활하는 때입니다.

 

주님은 이 천 년 전에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성부오른편에, 당신 고향에 자리 잡고 앉아계십니다.

우리가 뭐라고 주님을 부활시킵니까?

건방지게....

 

부활은 내가 부활해야 되는 거지 무슨 주님을 부활시키겠습니까?

앞으로 남은 일주일동안 우리는 영신전쟁에서 승리를 거둬야 됩니다.

골고다를 올라가서 몇 번 쓰러지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려 부활에 이르러야 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이 마지막 순간을 놔두고 우리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처럼 삼대 구호를 외쳐야 됩니다.

 

신앙인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느님에게 외쳐야 되는 구호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군인들이 매일 똑같이 일어나서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

똑같은 훈련을 받는 이유는

유사시에 몸이 자동으로 나가게끔 하기 위해 훈련을 받는 겁니다.

 

세속, 육신, 마귀의 싸움에서 늘 흔들리고

내 악습에 늘 지고 마는 우리들이

영적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느님 곁으로

한발자국이라도 나가게끔 마귀가 그냥 내버려두질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침에 눈이 떠지면

모든 잡생각이 내 의식과 몸뚱아리를 지배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에게 신앙구호를 외쳐야합니다.

세 가집니다.구호를 외칠 때는 드러누워서 외칩니까?

아니면 적어도 손은 들죠?

오른손 들어보십시오.

<신앙구호 외칩시다.>

오직 예수님께 대한 사랑

오직 예수님께 대한 충성

오직 예수님께 대한 순명

 

손 내리십시오.

세 개,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랑, 충성, 순명 그런데 앞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오~직> 이 오직이라고 하는 말은 순도를 나타냅니다.

뭘 나타낸다구요?

순~도

여러분 손에 끼고 있는 금반지가 14K냐? 18K냐? 99.9% 순금이냐? 하듯이 순도 100%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 순도 100%짜리 하느님에 대한 충성, 순도 100%짜리 하느님에 대한 순명으로 불타야 우리는 부활할 수가 있습니다.

 

왜 순도 100%를 지향해야하느냐?

많은 이들이 90%의 순명의 생활을 잘 하다가도

 

많은 이들이 99.9% 충성의 생활을 하다가

 

불충성 때문에 여호와증인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적어도 지향하는 목표만큼은 순도 100%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있어야 됩니다.

 

순도 100%를 지향을 하더라도 어느 누가 순도 100%를 이르고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예 목표자체가 적당히 순종, 마음에 맞으면 충성, 생각나면 사랑, 이런 정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일 겁니다.

 

순도 100%를 지향하며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려고 하면~~

예수님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우상숭배입니다.

뭐라구요? 

우상숭배!

 

우상숭배의 개념은 하느님보다 내가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

그것은 다 우상숭배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내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

다섯 가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속으로 대답하십시오.

자매님들은 1번이 뭡니까?

남편?? 

저 할머니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시네요.

하기는 뭐 이제는 쓴물 단물 다 빼먹어서 뭐 남편이 당 서열 1위에서 밀려난 지가 아주 옛날 얘기지요.

그럼 두 번째가 뭐겠습니까?

첫 번째는 내가 볼 때 우리 자매님들에게는 자식이 아닐까?

두 번째 남편이 그 자리에 올라가 있으면 그래도 대접받는 남편입니다.

아무튼 두 번째 남편이라고 합시다.

세 번째 건강,

네 번째 재산,

뭐 다섯 번째 내 취미생활,

뭐 이렇게 따지다보면 우리 주님은 당 서열 10위에도 못 들어갑니다.

전국구 공천도 못 받습니다.

 

주님을 첫째자리에 놓고 순도 100%를 지향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가려고 할 때마다

이 우상들이 내 발목을 잡습니다.

 

현대판 우상은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때로는 건강이 우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식이 우상이 될 때가 있고

때로는 내 재산이 우상이 될 때가 있고,

때로는 허황된 사상이라든지 철학적인 개념이 우상이 돼서

내 삶을, 하느님 앞을 가로막고 거기에 탐닉하게 만듭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이것들이 내 발목을 잡습니다.

 

현대판 우상은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차라리 옛날처럼 출애굽기에 나오는 것처럼 금송아지였다면 내가 즉시 알고 ‘아이구 내가 우상숭배에 빠지면 안 되지......’

경계를 하지만 현대판 우상은 얼마나 교묘하게 아이들을 통해서도 들어갑니다.

아무튼 내가 하느님보다 현재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있는 것은 다 우상이라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갈 길이 없습니다.

 

행복은 포기하는 것만큼 옵니다.

현재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뭔가 불안하고 힘이 든다면~~

마음에 평화가 없다고 한다면~~

그 원인은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것이 뭔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행복은 포기하는 것만큼 옵니다.

 

기적은 내가 애착하는 것에 마지막 한 조각을 포기할 때 일어납니다.

 

기쁨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욕심의 마지막 한 조각을 포기하십시오.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이 암덩어리 낫는 기적을 원하십니까?

암까지도 하느님에게 감사하십시오.

 

내가 애착하는 것에 마지막 한 조각이 포기될 때~~

바로 그 순간 하느님은 일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그것을 붙들고 있는 이상

하느님은 절대 내 삶 가운데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묵시록 3장 21절에 보면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고 있으니,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너와 만찬을 같이 하리라.’

 

유명한 성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밖에서 문 두드리고 있는 그림,

그 그림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압니까?

들어가는 문에 문고리가 없습니다.

죽었다 깨도 안에서 내가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보아도 밖에서는 문을 열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영혼의 문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마리아야! 베드로야! 요셉아! 문 좀 열어다오. 문만 열어주면 내가 들어가서 너와 같이하리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우상이 내 발목을 잡습니다.

 

그 때 우리는 과감히 주님을 앞자리에 놔야 됩니다.

주님이 아닌 것은 전부다 우상이라고 하는 거, 깊이 명심합시다.

 

두 번째, 오직 예수님께 대한 충성!

 

뭐에 대한 애착이라고 그랬습니까?

생명에 대한 애착입니다.

 

여러분들! 신앙이라는 게 뭡니까?

이 세상에는 특히 우리 한국에는 종교인은 많지만

신앙인이 없는 나라라고 그럽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가 뭡니까?

내가 들고 있는 이것이 흰 종이입니까? 검은 종이 입니까?

지금 이것이 검은 종이로 보이면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흰 종이입니까? 검은 종이 입니까?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해도 분명히 흰 종이입니다.

거기 있는 수녀님 흰 종이 맞죠? 맞죠....

누가 봐도 흰 종인데 하느님이

“얘 그게 어찌 흰 종이냐? 내 눈에는 꺼멓게 보인다.”

요랬을 때 종교인들은 눈알 땡그랗게 뜨고 덤빕니다.

“아이구!  이제는 하느님 연세가 많으니까 이제는 헥가닥했어. 아니 어찌 이게 검은 종이여? 흰 종이지?” 요렇게 대들고 따지고 드는 것은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내가 흰 종이로 알고 있는데~~

하느님이 ‘그게 검은 종이다.’ 이렇게 나왔을 때,

신앙인들은 속으로는 무지하게 떫어도

“아니 자세히 보니까 검은 종이네요. 이게~~”

이게 신앙인이 아닌가?

이게 바로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입니다.

 

신앙은 그 자체가 합리성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니 새끼 배를 갈라서 번제물로 바치라.’ 고 하는 것이

어디 그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얘깁니까?

여러분 같으면 주님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서

‘너 니 자식 번제물로 바쳐라!’

바칠 사람 여기 없습니다.

번제물이 뭡니까?

배를 갈라서 창자를 포로 떠서 불에 태워 날려 보내는 겁니다.

 

 

“줄때는 언제데 뭐하는 겁니까? 지금 하느님이 사람가지고 장난치는 겁니까? 뭐하는 겁니까? 내 당신 안 믿으면 안 믿었지 내 새끼 나 못 죽여!”

백이면 백사람 다 뒤로 돌아설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야훼께서 이런 명을 내리셨을까? 왜 이 귀한 자식을 주시고, 또 거둬 가신다고 그러실까?”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순명했지요.

 

이삭에 가슴에다 칼을 내리꽂았습니다.

꽂으려고 만지작만지작 한 것이 아니라 정말 빼서 꽂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칼끝이 이삭의 심장에 닿기 전에 야훼의 천사가 탁 움켜쥐면서

“멈춰라!” 천사의 입술을 통해서 야훼가 얘기하십니다.

“이제야 내가 니 믿음을 알았다.”

 

신앙은 무식하리만치 우직한 겁니다.

 

하느님에 대한 순도 100%의 충성을 하다보면

늘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첫 번째 사제가 누구지요?

김대건 신부님.

두 번째 사제가 최양업 토마입니다.

최양업토마를 신학교로 보내고 나서 그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는 포졸들에게 끌려서 모진 매를 맞습니다.

최경환프란치스코는 목이 잘리는 순교를 원했지만, 매에 맞아서 맷독으로 감옥에서 죽습니다.

그 어머니, 마리아가 두 번째로 끌려옵니다.

젖먹이 최양업신부님의 막내 동생이 엄마와 같이 끌려 들어옵니다.

하루 종일 나가서 주리를 틀고 매를 맞고, 그 갓난아이는 감옥에서 배고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웁니다.

저녁에 만신창이가 된 그 몸을 가지고 젖을 물리니 젖이 나옵니까?

먹은 게 없으니........

나중에는 그 신자들이 흘린 피고름이 범벅이 되어있는 가마떼기를 뜯어서 입에다 씹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젖을 한 번 내 보려고 가마떼기를 먹고, 그것이 식도에 찔리고 위에 찔려서 피를 토합니다.

결국에 그 갓난아기는 감옥에서 굶어죽습니다.

아이가 죽고 나니까 어머니 마리아는 눈이 뒤집어지지요.

“나 천주님 안 믿겠소! 나 나가서 밖에 있는 새끼들 셋 데리고 나 살거요. 나 내보내주시오.”

풀려납니다.

집으로 달려가니까 고만고만한 최양업신부님의 남동생 셋이서 어머니 앞을 가로막으면서

“엄마! 어쩌려고 천주님을 배반하셨어? 형님이 사제가 돼서 조선 땅에 올 때, 형님의 얼굴을 어찌 보려고 천주님을 배반하셨어? 우리걱정은 하지마시고 다시 돌아가시오.”

그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마리아는 충격을 받고 정신이 들어서

“맞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왔나? 우리 양업이를 나중에 내가 어떻게 볼려고.... 천주님을 배반했던고?” 다시 돌아가서

“나 아까 한 말 취소요. 다시 잡아 가두시오.”

모진 매를 맞고 머리를 잘리는 군무효수형이 결정이 됩니다.

내일 목이 잘리는 군무효수형이 결정된 그날 바로전날, 아이들 셋은 장례 집을 찾아다니면서 쌀을 얻습니다.

쌀 한 말이나 반말정도를 얻어가지고 그거를 짊어지고 누구를 찾아갔느냐?

엄마의 목을 자를 망나니 집을 찾아갑니다.

망나니에게 그 쌀자루를 주면서

“아저씨 부탁이 있습니다. 오늘 밤새도록 칼을 잘 갈아서 내일 아침에 엄마 목을 자를 때, 단 한번에, 고통당하지 않게 단 한 번에 목을 잘라주십시오.”

천주교신자들, 목을 자를 때는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처음부터 한 번에 목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칼등으로 목뼈만 부러뜨립니다.

기술 껏 목뼈를 부러뜨려서 목이 덜렁덜렁 되어있으면 그다음에 칼을 바로잡아서 목을 한 번에 끊지 않고 세 번, 네 번에 나누어서 끊습니다.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겁니다.

천주교신자들을 죽일 때만 그렇게 모질게 죽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자식들은 엄마가 그렇게 죽을 것을 생각하고 쌀을 얻어다가 망나니에게 주면서

“아저씨 밤새 칼을 갈아서 우리엄마 내일 아침에 한 번에 목을 잘라주십시오.”

사람 목을 베는 망나니지만 자식을 기르고 있는지라

“그래 알았다. 가 있거라.”

그 다음날 아침에 마리아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목을 내밀어 칼을 받을 준비를 했고 망나니는 그 주변을 돌며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면서 사람들이 그 앞에 쫘악 앉아있는데

“엄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들어 앞을 보니까 제일 큰아이가 동생들 둘 입을 막으면서 울지 못하게........엄마를 못 찾게 하고 있었어요.

망나니도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미뤄선 안 되겠다.’

그 순간에 단 한칼에 마리아의 목을 베어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조선 땅에 들어 와보니 아버지는 매에 맞아죽었고, 엄마는 목이 잘려 죽었고, 막내동생은 감옥에서 굶어죽었고....

동생 셋은 거지가 돼서 동네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최양업신부는 한국의 두 번째 사제로서 그때 당시에는 김대건 신부님은 순교를 한 직후였기 때문에 유일한 탁덕사제로서 가정사 일에 분노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따지면 얼마나 분노가 일어나고 죽고 싶었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나 때문에~~

내가 신학교 갔다는 그것 때문에 내 부모가 돌아가시고...

내 동생들이 거지가 돼서 떠도니 얼마나 죄의식이 컸겠습니까?

그러나 최양업신부님은 대범한 마음을 가지고

“천국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내 몇 배로 열심히 사제 생활하다가 부모님 따라가겠습니다.”

그 어렵고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십년동안을 전국을 혼자서 사목을 하셨습니다.

전라도 경상도 이북으로 돌아다니면서 십년동안을 사목하다가 영풍 그 위에서 과로사를 하셨던 거였지요.

 

하느님께 대한 충성으로 나가려고 할 때마다 늘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

생명에 대한 애착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사형수들입니다.

형이 언제 집행이 될지를 모를 뿐이지 한번은 죽어야 되는 사형수들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50년 후에 남아있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 뒤에서 뛰어노는 어린 아이들도 그때는 아마 환갑이 다돼있을 겁니다.

 

 

유한성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들은 교만이 생깁니다.

하느님 앞에 가는 것은 나이순서가 없습니다.

 

며칠 전에도 30이 갓 넘은 젊은 엄마가 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한밤중에 서울에 올라가 연도를 바치고 내려왔습니다.

일곱 살, 네 살 된 아이를 남겨놓고 40도 안된 남편을 남겨놓고

그 엄마는 몇 년 동안을 투병생활을 하다가

결국에는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 젊고 어린 나이에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오늘 하루가 내 생애에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떠서 하는 첫 번째 기도는

“주님 오늘 하루가 내생애에 마지막인 것처럼 살게 해 주십시오!”

성인들의 삶은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살았~~

그런 날들이 모여서 성인의 삶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내일이 있는데, 내년이 있는데... 이번 주에 성사 못 보면 다음 판공 때 보면 되지.’

다음 판공 때까지 살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서도 하룻밤사이에 수백 명이 죽습니다.

심장마비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맞아죽고 그 일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장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인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그분들은 매일매일을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날이 마지막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드린 이 묵주기도가 내 생애의 마지막 묵주기도구나!’

분심 들어올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미사를 가서 성체를 영할 때마다

‘이 성체가 내 생애에 마지막 영성체구나!’

하는 마음으로 성체를 영했지요.

눈물 콧물이 앞을 가릴 겁니다.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정성을 다하겠습니까?

 

임종이 가까운 분에게 가서 마지막 노자성체를 드릴 때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성체를 모시는지 모릅니다.

 

미사를 드릴 때마다 ‘오늘 이 미사가 내 인생에 마지막 미사를 드린다.’하는 마음으로 사제는 그 자리에 서있고 신자들도 마지막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있을 때 그게 바로 순도 100%를 지향하는 하느님에 대한 충성으로 변합니다.

 

세 번째 구호는 순도 100%를 지향하는 순명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옷을 잡아서 넘어뜨리는 것이 뭐냐?

바로 교만입니다.

뭐라구요? 

교만~ 교만입니다.

 

자 여기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

“신부님 저는 참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시는 분! 손들어보십시오.

“저는 별명이 김 겸손이구요. 특기도 겸손이구요.”

겸손한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여러분들 겸손이 뭡니까?

그냥 고개 숙이고 다닌다고 겸손입니까?

목소리 나긋나긋하게 한다고 겸손입니까?

“자~매~님! 찬미예수! 호호호” 이런다고 겸손입니까?

아니지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영적 병입니다.

교만의 차이는 있는데 누구나 다 원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교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깊어지면 분명히 병입니다.

그런데 병중에서 그 병의 이름이 뭐냐?

‘불감증’ 즉 못 느끼는 병에 걸려있는데 그 불감증은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감기가 원인이 바이러스이듯이 아니면 무슨 결핵이 폐에 균이듯이

모든 병에는 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교만하게 되는 많은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

늘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합니다.

특히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늘 비교합니다.

일 년 내내 묵주기도 안하는 남편과 비교하면 하루에 5단씩 바치는 내가 훨씬 더 열심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냉담하고 있는 저 뒷집에 있는 마리아랑 비교를 하면 평일미사 매일 나가는 내가 훨씬 더 축복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열흘 전입니까? 

평일미사 복음이 뭐였습니까?

세리와 바리새이가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죠?

바리새이는 성전 맨 앞에까지 가서 아주 가슴을  딱 펴고 

“주님 저 축복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세리 같은 저놈이랑은 질적으로 다른 놈입니다. 저 십일조 바쳤구요. 일주일에 두 번 단식 철저하게 했구요. 저는 기도가 취밉니다. 특기가 묵주기도구요.”

요런 식으로 폼을 잡았어~~

그런데 하느님은 바리새이 기도를 안 들었습니다.

 

저 뒤에서 멀찍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감히 고개도 못 쳐들고 있는 그 세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주님 저는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저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만 했습니다.

결국에 의인으로 돌아간 것은 바리새이가 아니라 세리였습니다.

 

솔직히, 이 죄 덩어리인 우리가~~

교만 덩어리인 우리가~~

하느님 앞에 미사여구를 써가며 기도를 바칠게 뭐가 있습니까?

내 과거를 아시고, 내 속을 들여다보고 계신 주님 앞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여는 기도는 바로 세리가 했던 그 기도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늘 우리는 미사하면서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우리 가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우리가족들 죄인들 많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늘 사람과 비교하다보면 교만의 바벨탑을 쌓습니다.

우리 가슴 한가운데 두고 내 삶의 비교의 대상이 되셔야 할 분은 여러분 본당신부도 아니고, 주교도 아니고, 교황님도 아니고 오로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됩니다.

‘나는 예수님만큼 선한가?’

아무리 선하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

예수님이 선하신 것에 비하면 내가 착한 거는 착한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만큼 봉사하는가?

예수님의 봉사에 비하면 봉사가 아닐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만큼 기도하는가?

그 성당에서 성녀 소리 듣는 할머니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하신 기도에 비하면 기도도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 내 자신을 비교하면서 찾아오는 것은 영적 비참함!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 고백을 할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뭐냐?

‘겸손’이라는 겁니다.

 

겸손은 머리 숙이고 다니고 목소리 나긋나긋하게 한다고 해서 겸손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철저한 관상을 통해서 자기의 비참함을 깨닫고

“주님 죄인이니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때 주시는 선물이 바로 겸손이라는 거를 명심합시다.

 

우리가 부활하려면~~

남편이 부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부활하려면~~

오직 예수님에 대한 사랑

오직 예수님에 대한 충성

오직 예수님에 대한 순명

이 세 가지가 바로 주춧돌이 돼서 우리를 부활시킬 수 있는 영적인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한주일 남은 성주간동안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우상숭배에 빠져있지 않은가 묵상합시다.

 

예수님께 충성을 하겠다고 하면서 늘 내 생명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리 내가 좋은 보약을 먹고 오만 운동을 다 한다 하더라도

백 살을 못 넘기는 유한한 인생인 것을!

주님, 제 생명도 주님의 것이오니 주님께서 알아서 때가되면 걷어 가십시오! 

이런 기도를 바쳐야 됩니다.

 

나는 주님께 대한 순명의 삶을 살고 있는가?

교만한데도 불구하고 교만한지 조차도 모르는 불감증 환자는 아닌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과 순명의 삶을 한주일 동안 봉헌하면서

부활의 삶을 준비합시다. 아멘!

 

출처 :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리듬짝)
글쓴이 : 사랑과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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