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새재와 문경의 유적 > 2. 비 석

2014. 5. 14. 13:41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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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령  산  성  

 

 

Ⅴ. 새재와 문경의 유적 > 2. 비  석  

 

   비  석

    현감 신후길원 충렬비(縣監 申侯吉元 忠烈碑)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신국량(申國樑)의 아들로 45세에 벼슬길에 올라 선조 23년 경인(庚寅:1590)에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다가 임진년(壬辰年:1592) 4월 27일 문경을 사수하다 순국하였다. 임란 때 지방관으로 순국한 이가 많지 않았으며 나라에서는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하여 그의 충렬을 기렸다.
  이 비의 당초 건립지는 문경의 비석거리였다는 구전이 전하나 잘 알 수 없으며, 문경읍 상리 296번지인 문경초등학교 교문 곁에 충렬각(忠烈閣)을 세웠으며, 1923~1926년 사이 보수되고, 1947년에 보수하였으나 허물어져 비석만 있던 것을 문경군에서 사적지 정화로 제1관문을 보수한 후 지금 위치인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주흘관) 뒤에 1976년 10월에 공사비 79천원을 투입하여 이전했다<현재는 다시 주흘관 뒤에서 조금 위인 촬영장 입구 아래로 옮겼다.>.
  문경읍 상리의 옛터에는 비각을 세웠던 주춧돌이 4개 남아 있었으며, 이 비는 화강석으로 지대석(地臺石)과 비신(碑身), 비개(碑蓋)를 만들었으며, 비부는 높이 23㎝, 가로 146㎝, 세로 86㎝이며, 비신은 높이 190㎝, 폭 89㎝, 두께 27㎝이고, 비개는 높이 77㎝, 가로 122㎝, 세로 63㎝이다. 
  임란 당시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상주를 거쳐 문경을 침공하자 현감은 피신하지 않고 문경을 사수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왜적에 잡히어 항복을 거절하고 관인도 주지 않으니 왜적이 현감의 몸을 수색하자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주지 않으므로 적은 비수로 오른손을 자르니 왼손으로 관인을 쥐자 또 비수로 왼손을 자르므로 현감은 입에다 관인을 넣으려 할 때 적은 장검으로 목을 쳐서 순국하였다. 1706년[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79년 병술(丙戌 숙종 32]년 3월에 나라에서 비를 세워 충절을 표창하니 비문은 선무랑 전수사간원 정언 지제교(宣務郞 前守司諫院 正言 知製敎)인 채팽윤(蔡彭胤)이 지었으며 통훈대부 전 행 성균관 전적(通訓大夫前行成均館典籍)인 남도익(南圖翼)이 쓴 글씨이다.
  이 지방에서 충렬사를 건립하여 고장과 나라사랑의 표본으로 삼고자 활동하고 있다. 달성군 공산면의 표충사(表忠祠)에 배향(配享)됐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도 실려 있다.

    고 안동부사 김상국 정문공 수근 추사타루비(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墮淚碑) 
  타루비(墮淚碑)란 옛날 진(晋)나라 때 양양사람들이 양고(羊고)를 생각하고 그 비를 보기만 하면 눈물을 흘렸으므로 고사(故事)에서 타루비라 하였다. 이 양고야말로 양양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원근 사람들에게 선정한 인물이다. 그가 오(吳)나라를 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양사람들은 저자를 파하고 길거리에서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방하여 선조 36년에 영(營)의 수졸(水卒)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여수에 타루비를 세우고 이순신 장군을 사모한 것이 처음이다. 
  문경읍 상초리 초점(草岾) 교귀정(交龜亭) 동쪽에 세워진 김수근 타루비는 비신(碑身) 높이 143㎝, 폭 55㎝, 두께 30㎝이고, 비부(碑趺)는 높이 48㎝, 가로 108㎝, 세로 84㎝이고, 팔작형 비계(碑蓋)는 비신과 함께 6.25의 총흔이 남아 비문도 일부가 훼손되어 있으나 1855년(함풍5, 철종 6) 9월에 안동부사로 재직시 주휼(周恤) 선정하여 안동의 38방(坊)의 소민(小民)들이 세운비이다.
  김수근은 정조 22년(1798)에 태어나서 철종 5년(1854)까지 산 헌종때의 중신으로 자(字)는 회부(晦夫), 호(號)는 계산초노(溪山樵老), 시호는 문정(文正? 正文), 본관은 안동, 목사 인순(麟淳)의 아들로 철종의 장인인 문근(汶根)의 형이다. 진사가 되어 문벌로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순조 34년(1834) 문과에 장원급제,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죽은 뒤 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병국(炳國), 병학(炳學)은 재상이 되고, 동생 문근은 영은 부원군에 봉군되었으며 저서로는 삼연연보(三淵年譜)가 있다.
  비신의 전면에는 비명(碑銘)외에(                           )라는 찬명(贊銘)이 있으며, 그 옆에는 공거 16년 몰월명□□□(公去十六年沒월明□□□) 본부 38방소민등입개(本府三十八坊小民等立豈) 함풍5년(咸豊五年) 9월 일로 새겨져 있다. 좌측에는 비문을 지은 사람, 쓴 사람과 함께 비를 세운 사람들이 면면히 나타나니 다음과 같다. (                           ) 등이 기록되고 비신 뒷면에는 김정문공추사비음명(金正文公追思碑陰銘)의 횡서에 다음과 같이 비문이 종서로 기록되어 있다. (                    )

    창의대장 도체찰사 운강 이공 전승기념비(倡義大將 都體察使 雲岡李公 戰勝紀念碑) 
  문경읍 갈평리 입구 산기슭에 경모각(景慕閣)이 있었으나 1979년 운강 유적 정화사업으로 와비(臥碑)를 설치하고 갈평리 초등학교 뒤에 이건(移建)했다. 그 속에 1967년(丁未) 8월 3일 김일진(金馹鎭) 글씨, 고영익(高永翼) 찬(撰)으로 비고(碑高) 149㎝, 폭 54㎝, 두께 24㎝의 화강석 뒷면에 16줄의 비문을 새기고 향우측(向右側)에 건립연대와 비문을 지은 사람을 새겼다.
  비두(碑頭)는 팔작지붕형이고, 높이 52㎝, 가로 88㎝, 두께 57㎝이다.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공(李公)은 종실(宗室) 효령대군(孝寧大君) 18세손(世孫)으로 아버지는 기태(起台:서울 강남구 수서동 장손집 호구단자엔 鍾台)요,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 복영(福永)의 따님이다. 문경군 가은읍 도태리(都台里:上槐里)에서 철종(哲宗) 무오(戊午 1858)년에 출생하였으니 어려서부터 총명이 영특하고 신체가 헌출한 거구였다. 장성하여 무과에 등과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낙향하였다.
  왜적의 침범으로 국가가 위기를 당하게 되자 비분통곡하고 국가존망지추를 당하여 어찌 집에 앉아 있을까부냐고 가산을 버리고 창의하여 병사를 일으켰으니 이때 나이 38세 병신년(丙申年 1896) 1월 11일이었다. 당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으나 모두가 오합지중으로도리어 민폐만 끼치는 자가 많았는데 운강진만은 모병한 날로부터 결사적으로 진두에서 탄환을 무릅쓰고 격전하니 사졸 또한 후퇴하지 못하였으며 김상태(金尙台), 편강열(片康烈), 이해수(李海秀), 백남규(白南奎), 하모서(河謨瑞), 권용유(權用侑), 천보락(千普洛) 등을 각기 임용하고 원주(原州) 대장 민긍호(閔肯鎬) 또한 전군(全軍)을 이끌고 합세하니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왜적을 맞아 크게 이기어 그 전과(戰果)는 실로 다대(多大)하였다.
  의장(義將) 조동교(趙東敎) 군사가 갈평에 주둔하였으나 왜적이 오니 격퇴하지 못하고 흩어져 적은 방화(放火), 살인 등으로 전멸 상태에 있을 때 사인(士人) 이면정(李冕正)이 공에게 급보(急報)하여 즉시 말을 타고 달려와 일전(一戰)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하였고, 그 공적은 오늘의 갈평을 계승케 하였으며 주민들은 공을 사모하기를 부모같이 하였는데 금년 정미년(丁未年 1967)이 60년이 되는 해라 부근 인사가 서로 상의하기를 운강선생은 잠시라도 잊을 수 없으나 만약 세월이 오래되어 잊는다면 양심에 부끄러우니 비를 세워 오래도록 사모하여야겠다고 기공할 때 김벽규, 이면옥, 신태영, 김원응 제군이 운강선생 약사와 이진연(李震淵)이 기술한 전후기(戰後記)를 가지고 비문을 간청하여 사양타 못해 적는다. 공의 자는 낙인(樂寅)이고 호는 운강이니 무신년(戊申年 1908) 9월 한성 옥중에서 순국하시다.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비 
  문경읍 갈평리에서 평천으로 가는 길섶 옛 ‘창의대장 도체찰사 운강이공 전승기념비’ 자리에 와비(臥碑)를 세웠으니 높이 30㎝, 폭 40㎝, 두께 70㎝의 기단석에 높이 120㎝, 폭 200㎝, 두께 52㎝의 화강석비에 높이 90㎝, 폭 150㎝, 두께 21㎝의 오석을 박아서 비문을 새겼다.
  79년 1월~4월까지 운강선생의 생가지 표석 및 가은역전의 해동의사 운강이선생강년지비(海東義士雲岡李先生康秊之碑)의 주변 정화 등을 포함하여 박대통령의 정화지시에 의해 도비 11,900천원으로 합자회사 신일기업(대표 주의수)의 시공과 김영일 현장대리(문화재 보수기술자)의 지도로 건립 및 정화하였으며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대장 雲岡 李康秊선생 기념비

  세상에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이로되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도 아낌 없이 바치는 것이니 이것이 선비의 길이요 우리 겨레의 빛나는 전통이다. 여기 조국을 위해 정의의 피를 뿌린 이가 계시니 그가 바로 효령대군(孝寧大君) 18대손 운강 이강년선생(雲岡 李康秊)으로 부친은 기태공(起台公), 모친은 의령남씨(宜寧南氏)며 무오(戊午) 1858년 12월 30일 문경군 가은읍 도태리에서 태어났고, 용력이 절륜했으며 유학과 병서 등 문무를 겸전했다.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고향 문경에서 의거의 깃발을 높이 들고서 가산을 흩어 의병 수백명을 모으니 38세이었다. 
  이듬해 봄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대장 아래서 유격장이 되어 수안보의 왜적을 치고 조령에서도 적을 무찌르더니 형세가 불리하여 의암의 진이 요동으로 건너가므로 선생도 군사를 풀고 잠시 요동으로 나갔다 돌아와 영호남(嶺湖南) 지사들과 의리를 토론하며 때를 기다렸었다. 그뒤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기울어지자 다시 일어나 김상태, 백남규 등과 함께 청풍·단양에서 항전했었고, 정미년에 군대가 해산되자 40여진이 제천에 모여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의 밀칙(密勅)도 내렸으며 탁월한 전술로 갈평(葛坪), 죽령(竹嶺)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무신년 2월 민긍호 대장이 체포되자 강원도로 나가 백담사, 강릉, 양양 등 영동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안동, 내성 등지의 전투에서 용맹이 전국에 떨치더니 6월 4일 청풍 작성전투에서 왼발 복사뼈를 상해 사로잡혀 서울의 옥중에서도 추상같이 적을 꾸짖고 의병항쟁 13년만인 무신 1908년 9월 19일 교수형으로 큰별이 떨어지니 향년 51세이었고, 해방후 우리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중장을 추서하고 박정희대통령 특별분부로 승전한 유적지를 정화하여 선생의 의혼을 위로하고 높으신 공로를 표창하였다.
  열세 해 일편단심 나라 구하려 싸우셨고 / 마지막 조국의 제단에 피를 뿌리신 이여 / 그 정신 겨레의 가슴마다 깊이 새기오리다.

1979년 3·1독립선언 60돌에
노산 이은상 글  우송 이상복 씀

 

   선정비(善政碑)·불망비(不忘碑)

  ‘설화 한국의 역사(說話 韓國의 歷史)’에 실려 있는 선정비 유래는 다음과 같다. 「비를 세우는 것은 왕이 승하하면 장사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돌을 세운다는 것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뜻에서 고인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것을 민간이 모방하여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 참으로 그들의 시책이 잘 되어야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게 하였다.
  중국의 후한 때 오장(吳章)이 군의 태수로 선정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묘전에 선정비를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양리(良吏) 최석(崔碩)이 선정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선정비의 시초같이 생각되며 최석이 승평부(昇平府)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하였다.
  고려시대 풍속으로 태수가 교대 될 때면 그 고을 백성들이 태수에게 기념품으로 말 8필을 주었다. 이것은 일종의 백성을 착취하는 수단이다. 최석은 벌써 그 뜻을 짐작하고 자기가 승평부 태수를 그만두고 돌아올 때 전례에 의하여 말 8필을 받았다. 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고 도중에 말이 망아지를 낳아 9필이 되었다. 자기 집에 짐을 풀고 최석은 망아지까지 9필의 말을 도로 보내 주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감격하였고 양리로서 한번 모범을 보이자 그런일을 그후부터 못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그의 덕을 칭송하여 비를 세우니 그의 선정을 칭송한 선정비라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팔마비라 하고 지방장관의 최초의 선정비 같다.
  이러한 선정비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며 급작스럽게 많아졌고 명종 때에 벌써 한 읍에 4~5개의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정조 때에 이르러 세운지 30년 이내의 것은 모두 뽑으라고 하였다. 이렇게 선정비의 난립을 방지하니 백성들이 살기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대신 목비(木碑)를 세우는 자가 생겼다. 그러자 이것 역시 30년 이내의 것은 철훼하라고 하였다.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군수 누구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니 송덕이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중 크고 글자도 많이 새겨져 있을수록 백성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된다. 거리 거리 선정비요, 골목마다 송덕비라, 선정비가 수천개 섰었으니 얼마가지 않아 파손되었으므로 금석학으로 가치를 인정할 수 없으나 지금 땅에 묻혀 있는 것 중에는 중요한 것이 있는 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선정비의 주인이 갈려가고 그의 세력이 떨어지면 비석에 대한 파괴 행위가 심했다. 이러한 짓을 하므로 그 비석은 그 근처 논두렁의 다리가 되기도 하고 논물을 막는 물고가 되기도 했다. 어느 곳을 막론하고 예전 읍자리에 아직도 십여개 혹은 수십개의 비석이 서 있어 선정의 허욕을 장식하고 있다. 선정비를 더욱 간수하고 옥석(玉石)을 가려 보관할 것을 보관하면 그래도 선인들의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문경 군내에도 유곡 초등학교에 10여기의 비가 있으니 유곡역에 세웠던 것을 찾아서 지금과 같이 옮긴 것이고, 문경 제1관문 뒤에 비석을 역시 당초 있던 비석과 문경읍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17기나 된다.

    관찰사 김공 연 거사비(觀察使 金公 演 去思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 여러비와 함께 있으며, 비신(碑身)은 높이 156㎝, 폭 68㎝, 두께 29㎝이고, 비대(碑臺)는 복련(伏蓮)을 새긴 장방형이며, 높이 30㎝, 가로 130㎝, 세로 58㎝이며, 기축년(己丑年 1709 숙종 35) 9월에 세웠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를 형조참판(刑曹參判)에서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 6월 1일에 도임하여 한성좌윤(韓城左尹)으로 병술년(丙戌年 1706 숙종 32) 7월 18일 갈 때까지 선정한 김연의 선정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이다.

    관찰사 김상국 세호 영세 불망비(觀察使 金相國 世鎬 永世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 여러비와 함께 있으며 비개(碑蓋)는 팔작형으로 높이 35㎝, 가로 94㎝, 세로 67㎝이며, 비신(碑身)은 높이 153㎝, 폭 59㎝, 두께 29㎝이고, 비대(碑臺)는 높이 18㎝로 경오년(庚午年 1810) 8월에 세웠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대구도호부사를 기사년(己巳年 1809 순조 9) 6월 15일 제수(除授)받아 8월 12일 상영(上營)하고 신미년(辛未年 1811 순조 11) 4월 1일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가자(加資)되고 계유년(癸酉年 1813 순조 13) 12월 30일 대호군(大護軍)에 이배(移拜)되어 갑술년(甲戌年 1814) 2월 2일 이영(離營)할 때까지 선정한 김세호 관찰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이고 찬명(鑽銘)이 있다.

    관찰사 김상국 희순 불망비(觀察使 金相國 羲淳 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비와 함께 있으며, 비신(碑身) 높이 113㎝, 폭 48㎝, 두께 22㎝이고, 병신(丙申 1836 헌종 2)년 9월에 성내(城內)에 세웠으니 이 비석은 당초 이곳에 세웠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로 갑자(甲子 1804 순조 4)년 정월에 도임하여 병인(丙寅 1806 순조 6)년 2월에 체임될 때까지 선정한 김희순 관찰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세웠으나 이임후 30년이나 후에 세운 점이 특이하다.

    관찰사 조상국 병현 불망비(觀察使 趙相國 秉鉉 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선정비와 같이 있는 이 비석은 비신(碑身) 높이 113㎝, 폭 47㎝, 두께 23㎝이고, 비부(碑趺)는 자연석이다. 병신(丙申 1836)년 9월에 성내(城內)에 세웠다는 기록으로 봐서 이 비석은 현위치가 당초 건립위치임을 알 수 있다. 조병현은 조선 현종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경길(景吉), 호(號)는 성제(成齊), 본관은 풍양(豊壤)으로 이조판서 득영(得永)의 아들로 1822년(순조 22)에 문과에 급제하고 병구(秉龜)와 함께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견인물로서 안동 김씨 일문의 세도를 견제하면서 조김(趙金) 양파의 연립 세도 형태를 형성케 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관찰사겸 병마수군 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를 갑오(甲午 1834 순조 34)년 12월 21일 충청감사(忠淸監司)에서 이배(移拜)되어 12월 29일 도임하여 병신(丙申 1836 헌종 2)년 9월 13일 동경연(同經筵)으로 갈 때까지 1년 9개월간의 선정을 잊을 수 없어서 세운 비이다.
  1839년(헌종 5) 형조판서일 때 이조판서 조만영(趙萬永)과 함께 천주교 신도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호조판서, 좌찬성을 지내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러 상시관(上試官)으로 과장(科場) 협잡 문제로 평안감사에 좌천되고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옮겨 갔다가 파면되고 거제도에 귀양갔다가 다시 나주 목지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관찰사 권상국 돈인 불망비(觀察使 權相國 敦仁 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선정비와 같이 있는 이 비석은 하단부가 부러졌으며, 비신(碑身) 높이 124㎝, 폭 44.5㎝, 두께 15㎝이고, 자연석 비부(碑趺)는 높이 15㎝, 폭 82㎝, 두께 50㎝이며, 기해(己亥 1839)년 2월에 세운 것이다. 
  권돈인은 1783년(정조 7)에 태어나서 1859(철종 10)년까지 산 헌종 때의 사람으로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제(彛齊),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우의정 상하(尙夏)의 5대손이다. 1813년(순조 13) 문과에 급제하였고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관찰사겸 병마수군 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를 무술(戊戌 1838)년 4월 25일 병조판서에서 제수(除受)받아 이듬해인 기해(己亥 1839)년 2월 20일 지경연(知經筵)으로 갈 때까지 약 1년간 선정한 것을 잊을 수 없어 세웠다.
  그후 1842년(헌종 8) 영의정이 되고 1846년(헌종 12) 훈련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에 임금의 친병(親兵)을 두고 내영(內營)을 폐하고자 주장 했으며, 1851년(철종 2) 진종조천례(眞宗조遷禮)를 논하다가 쫓겨 났으며 서도에 능하여 이름이 높았다.

    순찰사 김상국 대근 선정비(巡察使 金相國 大根 善政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비와 함께 세워 있는 이 비석은 여기 있는 많은 비석이 제자리가 아니듯이 이것 역시 신해(辛亥 1851 철종2)년 4월에 요성에 세웠던 것이 이곳에 이건(移建)됐다. 비신(碑身)의 형태가 위의 폭은 넓고 아래는 좁아서 불안정해 보이는데 높이 144㎝, 폭 위쪽이 70㎝, 아래쪽은 52㎝, 두께 30㎝이다.
  이 비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를 무신(戊申 1848 헌종 14)년 7월 23일 직제학(直提學)에서 제수(除受)받아 8월 28일 도임하여 기유(己酉 1849 헌종 15)년 8월 11일 호군(護軍)에 이배(移拜)되어 9월 25일 갈 때까지 선정한 김대근의 선정을 추모하여 세운 비이다.

    관찰사 이상국 삼현 불망비(觀察使 李相國 參鉉 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선정비와 함께 서 있는 이 비석은 비신(碑身) 높이 144㎝, 폭 52㎝, 두께 29㎝이고, 비부(碑趺)는 자연석이며, 정묘(丁卯 1867 고종 4)년 12월에 세웠고, 세울 때 감관(監官)은 김만길(金萬吉), 좌주(座主)는 임취득(林取得)이었다.
  이삼현은 1807년(순조 7)에 태어난 조선조 말의 문신으로 자(字)는 태경, 호(號)는 종삼(鍾三), 본관은 용인으로 물제(勿齊) 숭우(崇祐)의 손자이다. 1834년(순조 34) 사마(司馬)에 합격, 1841년(헌종 7)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를 을축(乙丑 1865 고종 2)년 2월 3일 배수(拜受)받아 같은달 29일 상영(上營)했으며, 무진(戊辰 1868 고종 5) 1월 5일 예문관 제학을 배수받고, 2월 19일 이영(離營)할 때까지 약 3년간 선정한 것을 후세에 잊지 않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후에 예조판서에 이르렀고, 1896년(고종 6)에는 용인이씨족보(龍仁李氏族譜)를 중보 간행했다.

    관찰사 김상국 세균 유애비(觀察使 金相國 世均 遺愛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선정비와 같이 있는 이 비는 비신(碑身) 높이 122.5㎝, 폭 44.5㎝, 두께 15㎝로 경오(庚午 1870 고종 7)년 8월에 세운 비이다. 김세균은 1812년(순조 12) 태어나서 1879년(고종 16)에 죽은 조선조 고종 때의 문신으로 자(字)는 공익(公翼), 호는 만제(晩齊),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841년(헌종 7)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과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고, 그간 감사와 유수(留守)를 역임한 바 있으며 완염통고(琬琰通考)를 지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를 경신(庚申 1860 철종 11)년 4월 27일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제수받아 6월 25일에 왔으며, 임술(壬戌 1862 철종 13)년 정월 24일 대사성(大司成)에 이배(移拜)되어 2월 21일 갈 때까지 과거에 공정을 기했고 유학진흥에 힘썼으며 청렴결백하여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의 피해를 최대한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였기 때문에 세운 비이다. 대구시 남구 남산동 대구향교 내에도 1863년 2월에 세운 관찰사 김상국 세균 영세불망비가 있다.

    관찰사 박상국 제인 불망비(觀察使 朴相國 齊寅 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비와 함께 있으며,비신(碑身) 높이 144㎝, 폭 42㎝, 두께 16㎝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서 행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도순찰사 대구도호부사(行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大丘都護府使)를 을해(乙亥 1875 고종 12)년 6월 14일 제수받고 7월 21일 경상도에 다달았으며, 28일에 상영(上營)하고 정축(丁丑 1877 고종 14)년 12월 2일 체임되어 무인(戊寅 1878)년 2월 29일 환조할 때까지 경상도를 다스린 박제인(1818년생)의 선정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이다. 세운 연대의 기록은 없으나 재직기간 동안 등을 봐서 1878년경으로 생각된다.

    관찰사 겸 남영사 김상국 명진 영세불망비(觀察使 兼 南營使 金相國 明鎭 永世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선정비와 함께 있는 이 비석은 비신(碑身) 높이 133㎝, 폭 41㎝, 두께 16㎝이고, 비부(碑趺)는 높이 14㎝, 가로 76㎝, 세로 52㎝로 경인(庚寅 1890 고종 27)년 5월에 세운 비이다. 남영사는 1887년(고종 24) 대구에 두었던 친군영(親軍營)의 으뜸 벼슬인데 경상도 관찰사가 겸하였으며, 1894년(고종 31)까지 존속했다.
  1888년(고종 25) 6월 30일부터 1890년(고종 27) 윤 2월 5일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전임(轉任)될 때까지 경상도 관찰사 겸 남영사 대구도호부사로 재임했던 김명진의 선정을 후대에 남기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재임 중 큰 흉년으로 백성중에 굶어 죽는자가 속출하자 조정에 긴급 장계를 올려 구호 양곡 백미 1만석과 진전(賑錢) 30만냥을 하사 받아 골고루 백성에게 나누어 허기를 면하게 하고, 전답 1만6천결(結)에 대해 감세하고 영문(營門)의 공금 1만냥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농자에게 농토를 주어 정착시켰으며 대구시 남구 남산동 735-4 대구향교 내에도 순상국 김공 명진 불망비(巡相國 金公明鎭不忘碑)가 있다.

    관찰사 엄상국 세영 송덕비(觀察使 嚴相國 世永 頌德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선정비와 함께 있는 이 비석은 비신(碑身) 높이 134㎝, 폭 44.5㎝, 두께 20㎝이고, 비부(碑趺)는 높이 33㎝, 가로 110㎝, 세로 90㎝이고 광무원년 정유(光武元年 丁酉 1897 고종 34)년 10월에 세운 비이다. 건양원년(建陽元年 1896 고종 33 개국 505) 8월 6일 지방관제를 개정하여 전국을 13도로 재편성하는 동시 관찰사를 두게 되었는데 경상북도 관찰사에 이성열(李聖烈), 조한국(趙漢國), 채하귀(蔡河龜), 민형식(閔亨植)에 이어 종1품(從1品)으로서 9월 10일에 발령을 받았으니 한달간에 다섯 번째 관찰사가 되었다.
  후임 관찰사 김직현(金稷鉉)이 광무 3년(1899) 2월 4일 발령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엄세영 관찰사가 1899년까지 재임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으나 송덕비를 1897년 세운 것으로 봐서 엄세영 관찰사가 1897년까지 재임했다고 생각된다. 엄세영은 조선조 말의 개화파로 자(字)는 윤익(允翼), 시호(諡號)는 숙민(肅敏), 본관은 영월이고 우(愚)의 아들이다. 
  1864년(고종 1) 문과에 급제하고 동학난 때 삼남초무사(三南招撫使)로 활약하여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신진 인물을 뽑아 일본에 파견할 때 홍영식(洪英植) 등 11명과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과 우의를 주장하여 당시 사람이 개화파라고 했다.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한때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이 되어 1885년(고종 22) 영국 군함이 거문도 점령시 일본 나가사끼에 정박중인 영국 함대 사령관 도우웰 중장에게 항의하고 영국 정부의 회답을 속히 전달할 것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벼슬은 판서를 거쳐 농상공부(農商工部) 대신에 이르렀다.

    오위장 이공 영직 추사비(五衛將 李公 泳稙 追思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비와 함께 있는 이 비는 비신(碑身) 높이 105㎝, 폭 37㎝, 두께 14㎝이고, 계축(癸丑)년 3월에 세웠으니 오위장은 조선조 때 5위의 으뜸 벼슬로 처음에는 종2품 벼슬로 12명이었으나, 임란 뒤는 정3품으로 15명이 있었으며 1882년(고종 19) 5위가 폐지될 때까지 있었다. 5위는 1451년(문종 1) 군제를 고쳐 정한 다섯 위(衛)이니 중위(中衛)로 의흥(義興) 좌위(左衛)로, 용양(龍양) 우위(右衛)로, 호분(虎賁) 전위(前衛)로, 충좌(忠左) 후위(後衛)로, 충무(忠武)를 두고 한 위를 다섯 부(部)로 나누고 한 부를 네 통(統)에 나누어 통에는 각각 약간의 여(旅)를 두었으며, 여는 각각 다섯 대(隊)로 대는 다시 졸(卒)로 편성되었으며, 이에 딸린 벼슬은 위장(衛將), 상호군(上護軍), 대호군(大護軍), 호군(護軍), 부호군(副護軍), 사직(司直), 부사직(副司直), 사과(司果), 부장(部將), 부사과(副司果), 사정(司正), 부사정(副司正), 사맹(司猛), 부사맹(副司猛), 사용(司勇), 부사용(副司勇)의 군직(軍職)이 있어서 직품(職品)을 따라서 다른 관원(官員) 또는 군교(軍校)들로 겸하게 하였었는데 이 비는 오위장을 지낸 이영직을 돌이켜 생각하여 세운 비로 어느 해에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다른 비석과 비교하여 조선 후기에 세운 것은 틀림없다.

    현감 이공 덕령 청덕선정비(縣監 李公 德齡 淸德善政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비석과 같이 있으며, 비신(碑身) 높이 187㎝, 폭 66.5㎝, 두께 29.5㎝이며, 비대(碑臺)는 높이 26㎝, 가로 149㎝, 세로 78㎝의 장방형 화강석에 약간의 무늬까지 조각 되었다. 을해(乙亥 1695 숙종 21)년 6월에 지부랑(地部郞)에서 부임하여 을해년 대기근에 백성을 규휼하여 곳곳에 청덕 선정비가 섰으나 무인(戊寅 1698 숙종 24)년 암행 파직됐고, 이 비는 현감의 청덕과 선정을 기리기 위해 기축(己丑 1709 숙종 35)년 12월에 세운 비이다. 이덕령은 관직이 목사에 이르렀고 청덕 선정 영세불망비가 가은읍 상괴리에도 있다.

    현감 김공 희노 청덕선정비(縣監 金公 希魯 淸德善政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비와 함께 있으며, 비신(碑身) 높이 115㎝, 폭 52㎝, 두께 23㎝이며, 계사(癸巳 1713 숙종 39)년 11월 호조좌랑(戶曹佐郞)에서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여 병신(丙申 1716 숙종 42)년 5월 벼슬을 버리고 갈 때까지 선정을 하여 그해 9월에 이 비를 세웠으며 김희로는 벼슬이 음호참(陰戶參)에 이르렀다.

    현감 엄후 사면 거사비(縣監 嚴侯 思勉 去思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비와 함께 있으며, 비신(碑身)은 장방형에서 상부의 모서리를 없앤 형태로 높이 128㎝, 폭 54㎝, 두께 22㎝이고, 숭정기원후 4 갑오(崇禎紀元後 4 甲午 1834 순조 34)년 12월에 무교(武校)가 세웠으며, 엄사면은 임술(壬戌 1802 순조 2)년 3월에 문경현감으로 제능령(齊陵令)에서 도임하여 병인(丙寅 1806 순조 6)년 12월까지 재직하면서 가창(加倉) 북고(北庫)와 관우(官宇)를 중건하고 객사(客舍)와 호창남고(戶倉南庫)를 중수하고 선정하였기에 세운 비이다.

    현감 이후 호숙 영세불망비(縣監 李侯 鎬肅 永世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비와 같이 있으며, 비신(碑身)은 높이 104㎝, 폭 40.5㎝, 두께 17㎝이고, 비개(碑蓋)는 팔작형으로 높이 33㎝, 가로 61㎝, 세로 41㎝이다. 신미(辛未 1871 고종 8)년 8월 연풍현감(延豊縣監)에서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여 갑술(甲戌 1874 고종 11)년 6월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이배(移拜)될 때까지 치적을 기려 계유(癸酉 1873)년 10월에 세운 비이다.

    현감 이후 인면 청덕선정비(縣監 李侯 寅冕 淸德善政碑) 
  문경읍 상초리 제3관문 뒤에 2기(基)의 비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비신(碑身) 높이 94㎝, 폭 36㎝, 두께 13㎝이고, 1888년(고종 25)에 고성에서 도임하여 문천으로 이배(移拜)된 현감을 위해 세운 비이고, 이 현감에 대한 마애비로 거사비(去思碑), 애휼비(愛恤碑), 선정비(善政碑)가 있어 이것까지 4개가 있으며, 이 비는 1890년 9월에 세웠다.

    별장 이후 명의 영세불망비(別將 李侯 明宜 永世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3관문 뒤에 이인면(李寅冕) 현감 선정비와 같이 있는 이 비석은 조령진 별장을 지낸 이명의를 잊지 않기 위해 세웠으니 높이 77㎝, 폭 37㎝, 두께 12㎝이고, 건립연대는 비석의 글자 새김질이며 모든 수법이 현감 선정비와 같아 1890년경으로 추정된다.

    면장 김병채 불망비(面長 金炳采 不忘碑) 
  문경읍 갈평리 갈평출장소 담장 밖인 국민학교 앞에 있는 이 비는 비신(碑身) 높이 113㎝, 폭 41㎝, 두께 17.5㎝이고, 팔작형 비개(碑蓋)가 있다. 지금의 문경읍이 문경면과 신북면의 2개면이었고, 지금 문경읍의 갈평출장소 관할이 신북면의 전신으로 갈평리에 소재지가 있었으며 지금도 갈평지서, 갈평우체국 등이 있다. 신북면장의 선정비라는 갈평 주민의 얘기이다. 찬명(鑽銘)이 다음과 같이 비면에 새겨 있고 1921년(大正 10) 8월 20일에 세웠다.
  將孝彰烈 / 只銘是均 / 敬老恤貧 / 勤之片石

    문경군 신북면 관음리 제2구장 김병채불망비(聞慶郡 身北面 觀音里 第二區長 金炳采不忘碑) 
  문경읍 관음2리 과수원 울타리 사이에 있는 이 비는 비신(碑身) 높이 116㎝, 폭 46㎝, 두께 15㎝이며, 팔작형 비개(碑蓋)가 있다. 관음2리 구장(지금의 동장)을 지낼 때 동민을 잘 보살펴서 1920년(大正 9) 정월에 세웠으며 이듬해는 신북면장에 임명되었고 역시 선정하여 갈평리 갈평출장소 담장밖에 면장 김병채 불망비가 있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달성거 김석주 영세불망비(達城居 金錫柱 永世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 뒤에 여러 비와 같이 있는 이 비는 비신(碑身)은 높이 99㎝, 폭 44㎝, 두께 13㎝이며, 기축(己丑)년 8월에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지방관(地方官)의 선정비나 세우던 때에 달성에 사는 김석주를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으니 특이하며 이 지역을 위해 은혜를 끼침이 컸던가 본데 언제 어떤 일인지 알 수 없다.

 

   마애비(磨崖碑) 
    겸 수성장 홍후 역 거사석(兼 守城將 洪侯 역 去思石) 

  문경읍 진안리에서 하초리를 가는 새재길의 오른쪽 산록에 거대한 바위가 있고 바위에 비신(碑身)모양을 높이 167㎝, 폭 60㎝로 음각하여 그기에 역시 음각으로 겸수성장 홍후 역 거사석 계유 10월 일 제무사립(癸酉十月 日諸武士立)으로 새겼으며 선정비의 간략한 형태이다. 1750년(庚午 영조 26) 2월에 장악주부(掌樂主簿)로서 문경현감에 도임한 홍역이 조령산성을 지키는 무관의 벼슬인 수성장(守城將)을 처음으로 겸직한 현감으로 1753(癸酉 영조 29)년 4월 정선군수(旌善郡守)로 전임되어 가자 그해 10월에 여러 무사(武士)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자연석에 새겨 놓은 거사비석이다.

    상주목사 이후 익저 선정 영세불망비(尙州牧師 李侯 益箸 善政 永世不忘碑) 
  문경읍 상초리 제1관문을 지나서 조금 가면 오른쪽에 바위가 있고 이곳이 폭포동(瀑布洞)이고 자연석에 몇기의 비가 새겨 있는 가운데 하나이며 이 새재길이 옛날 한양을 오가던 길이라 상주목사의 선정비를 이곳에 새겨 두었는가 보다. 바위에 새긴 비는 비신만 새기는 것이 보통이나 비대며 비부까지 새긴 점이 특이하다.

    현감 구후 명규 청덕선정비(縣監 具侯 命奎 淸德善政碑) 
  문경읍 상초리 폭포동(瀑布洞) 자연석에 새긴 비로 구명규가 갑진(甲辰 1724 경종 4)년 9월에 도임하여 기사(己巳 1725)년 3월 무슨일로인지 파직되어 갈 때까지 선정과 청덕을 기리기 위해 높이 180㎝, 폭 69㎝, 비대 높이 10㎝, 폭 74㎝로 새긴 비이다.

    현감 이후 인면 애휼비(縣監 李侯 寅冕 愛恤碑) 
  문경읍 상초리 원터를 지나 용추 못미처 오른쪽 커다란 바위에 비신 형태로 높이 128㎝, 폭 66㎝로 경계를 지우고 높이 116㎝, 폭 46㎝로 오목하게 파내고 그곳에다가 기축(己丑 1889 고종 26)년 4월에 문졸(門卒)이 새겼으니 자연석을 이용한 비석이라 돌을 다듬어 세우는 비보다는 손쉬웠을 것이며 바로 옆에는 선정비가 있고 제2관문 못미처 응암에는 거사비가 있으니 이인면은 무자(戊子 1888,고종25)년 가을에 고성(高城)에서 도임하여 문천(文川)으로 이배(移拜) 되었으며, 3개의 바위에 새긴 비는 이를 기려서 세겼으나 이 애휼비 아래에 3괘를 음각으로 새겼음이 특이하다.

    현감 이후 인면 선정비(縣監 李侯 寅冕 善政碑) 
  문경읍 상초리 원터를 지나 용추 못미처에 이르면 오른쪽에 자연석 바위가 있고 애휼비와 나란히 있으니 애휼비는 비신 모양을 오목하게 파냈으나, 이 비는 폭 44㎝, 높이 126㎝되게 튀어 나오게 만들었으니 무자(戊子,1888,고종25)년에 고성에서 도임하여 문천으로 이배된 이인면 현감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기축(己丑,1889)년 3월에 상초에서 새겼으며, 상초(上草)라는 지명은 그 당시도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응암에는 거사비가 있다.

    현감 이후 인면 거사비(縣監 李侯 寅冕 去思碑) 
  문경읍 상초리 용추를 지나 제2관문 못미처에 응암이 있고 그곳에 몇 기의 비석을 새겼으니 그중의 하나이며, 비신의 폭은 48㎝, 높이 130㎝이다. 무자(戊子,1888,고종25)년 고성에서 도임하여 문천으로 이배(移拜)된 현감을 위해 새겼으며 용추 아래는 애휼비와 선정비가 나란히 있다.

    산불됴심비 
  이 비는 상초리 산 42-8번지에 있으니 교귀정을 지나 제2관문을 못미처 노변의 오른쪽에 세워 있다. 돌을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 높이 183㎝, 폭 75㎝ 정도의 돌에 “산불됴심” 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 관방(關防) 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이고 따라서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비를 세웠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始金石)이고 ‘조심’을 고어(古語)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한글비의 최초가 될 것 같다.

    문경새재 휘호비 
  문경읍 진안리 삼거리에 세워진 이 비는 박대통령 휘호비이며, 문경군이 문경관문 및 새재길을 정화하면서 삼거리 주변을 정화하여 1977년 7월에 착공하여 1977년 9월에 완공했으니 공사비 2,000천원을 투입하였다. 이곳부터 문경 새재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비의 전체 높이는 4.4m이고 지대석(地臺石)은 가로 3.6m, 세로 3.3m, 높이 0.4m이며, 하대석(下臺石)은 가로 1.8m, 세로 1.5m, 높이 1.0m이며, 좌대(座臺) 가로 1.2m, 세로 0.9m, 높이 1.4m이며, 비명(碑銘)을 새긴 자연석은 높이 1.6m 정도이고, 가로 2.4m 정도이며, 두께는 0.7m 정도이다. 간석에는 건립문을 새겨 놓았으니 다음과 같다.

건     립      문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비명(碑銘) 휘호를 내리신 이 곳 문경새재는 박달나무 울창했던 곳, 이고장 선비들이 청운(靑雲)의 꿈과 충효(忠孝)의 큰 뜻을 서울로 이어 나르던 옛길이다. 오랜 풍상(風霜)에 허물어진 관문(關門)은 옛 모습 되찾고 호젓한 산길따라 관광도로를 닦았으니 향기어린 역사의 발자취는 길이 후세에 빛나리라. 이 길에 다져진 조상의 얼과 우리의 푸른 슬기를 바탕으로 겨레의 새아침은 밝아 오리니 깃들인 산새들도 끝없는 조국의 영광을 힘차게 노래하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니 새역사를 엮어갈 알뜰한 정성, 줄기찬 의지를 돌에 새겨 길머리에 세우다.

1977년  월   일
경 상 북 도 세움

    청운기념비(靑雲紀念碑) 
  문경읍 상리 473-1번지에 78. 10월 경북 제1호로 보존초가옥(保存草家屋)으로 지정된 청운관(靑雲館)이 있다. 그 앞뜰에 기념비를 세웠으니 지대석 높이 20㎝, 폭 103㎝, 두께 30㎝이고 비대(碑臺) 높이 39㎝, 폭 140㎝, 두께 44㎝이고, 비 높이 93㎝, 위폭 140㎝, 아래폭 118㎝, 두께 25㎝로 전체높이 1.52m이다. 박대통령 각하의 문경국민학교 재직시 하숙집을 삼창광업(三昌鑛業) 김종호(金鍾鎬) 사장이 대지(垈地) 105평 목조 평가건 3동 25평을 매입 정화하여 문경군 교육청에 기부채납(奇附採納)하고 문경국민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청운기념비의 비문은 종서로 다음과 같다.

청운기념비

 이곳은 이 나라 민족중흥의 영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1937년 4월부터 1940년 3월까지 문경서부 공립심상 소학교 훈도로 재직시에 거류하시던 곳이다. 이 집이 주인이 바뀜에 따라 헐리게 되었을 때 이를 애석하게 여긴 문경출신이요 문경국민학교 동창회장 및 재경 문경군민회회장이신 김종호 선생께서 이 가옥을 매입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중수하고 모교인 문경국민학교에 기증한 것이니 이는 문경국민학교에 훈도로서 훗일 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모교의 자랑인 동시에 이 학교에서 수학하는 아동들에게 청운의 꽃을 펴는데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을 믿고 이를 보존케 할 것이다.

1970년 6월 30일
碑名  石泉  崔 常 壽
글씨  눈메  한 갑 수
 건립          김 종 호

    전나무비 
  문경읍 상초리 156-1번지 주흘산 뒤에 여러 개의 선정비와 함께 전나무가 길손의 벗이 되어 오더니 1978년 9월 11일 정오에 넘어 갔으나 주흘관이나 민가를 다치지 않았으며, 조선조 500년간의 조령로 애환을 지켜 보아 온 전나무의 소멸을 안타깝게 여기고 다음과 같은 전나무비를 세웠다.

전나무비

  원래 이곳에는 수령 600여년의 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어 예로부터 새재길을 오가던 길손들의 벗이 되어 오더니 1978년 9월 11일 수명을 다하였기에 20년생 전나무를 다시 심어 오랜 전통을 잇게 한다.

1978년 11월
문경군수 정 용 운

 



                - 네이버 블로그 <문경 향토 역사관> 산벗 박창희 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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