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주변

2014. 5. 14. 13:48나의 이야기






       


 

  조  령  산  성  

 

 

Ⅰ. 조령주변  

 

  태백산(太白山)에서 흘러온 산들이 경상도와 충청도 경계에 대미산(黛眉山)· 계립산(鷄立山)· 포암산(布岩山)· 주흘산(主屹山)· 조령산(鳥嶺山)· 희양산(曦陽山)· 대야산(大耶山)· 불일산(佛日山) 등으로 치솟아 소백산맥(小白山脈)을 이루어 나간다.
  문경 관음리(觀音里)에서 중원군(中原郡) 수안보(水安堡)로 통하는 신라 및 고려 때 대로(大路)인 계립령(鷄立嶺)과 문경 각서리(各西里)에서 괴산군(槐山郡) 연풍(延豊)으로 통하는 소로(小路)가 1925년 신작로(新作路)가 나서 국도(國道)가 됐으며, 1978~1979년 확장 포장된 이화령(梨花嶺, 옛이름 伊火峴), 봉암사(鳳岩寺)에서 연풍을 다닌 소로 주령(周嶺), 가은에서 괴산으로 개척된 불한령(弗寒嶺), 농암에서 청주(淸州)로 다닌 고모령(高毛嶺) 등은 신라와 고구려,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으며, 영남에서 한양을 오간 조선시대 가장 대로이던 곳이 조령(鳥嶺)이다.
  옛날의 유지(遺址)는 원지(院址)· 교귀정지(交龜亭址)· 봉수지(烽燧址)· 성지(城址)· 대궐지(大闕址) 등이 잔존하고 있다. 조령로의 번성(繁盛)을 말해주듯, 조령로변의 아애비(磨崖碑)는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새겼으며, 주흘관(主屹關) 뒤에는 선정비(善政碑)· 불망비(不忘碑)· 거사비(去思碑)가 비군(碑群)을 이루고 있다.
  주흘관· 조곡관(鳥谷關)· 조령관(鳥嶺關)· 열녀각(烈女閣)· 혜국사(惠國寺)· 여궁폭포(女宮瀑布)· 용담폭포(龍潭瀑布)· 약수터 등이 주위의 주흘산· 조령산· 마폐봉 등의 동식물자원(動植物資源)과 함께 관광자원으로 각광을 받아 1979. 5. 24 조령로 주변이 국민관광지(國民觀光地) 1호로 경상북도에 의해 지정되고 도립공원 지정을 위한 계획이 추진중에 있다.

 

   1. 계립령(鷄立嶺)

  문경 관음리에서 포암산(布岩山)과 부봉(釜峰) 사이의 하늘재〔寒喧嶺,한훤령〕을 넘어면 미륵리사지(彌勒里寺址)가 나오고 신라가 북진을 위해 156년(新羅阿達羅尼師三年신라아달라이사금3년, 漢恒帝永興三年한항제영흥3년) 4월에 죽령(竹嶺)과 조령(鳥嶺) 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개척한 계립령(속칭;겨릅산-麻骨山, 겨릅재라 하는데 방언으로 비슷하다.)은 신라의 대로이고 역시 소백산맥을 넘어 북진을 위한 죽령이 158년 3월(新羅阿達羅尼師今五年春三月신라아달라이사금오년춘삼월)에 개척되니 계립령보다 2년 뒤이고, 계립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28리(里)의 거리였으며 조령관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4㎞정도이다.
  태봉(泰封)의 궁예(弓裔)는 898년(光化元年광화원년) 왕건(王建)에게 정기대감(精騎大監)의 직(職)을 주고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를 주어 906년(天祐三年천우삼년)에 정기장군(精騎將軍) 금식(금式)을 인솔하고 상주를 칠 때 남하(南下)한 길이 계립령일 가능성이 있고, 1254년(고려 고종 41년) 9월 몽고(蒙古)의 차라대(車羅大)가 충주산성(忠州山城) 공격에 실패하고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한 때도 이 계립령으로 남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계립령로는 개척된 이후 신라, 고구려, 백제의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으며, 고려조에는 불교의 성지(聖地)로 충북쪽에 월광사지(月光寺址)·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 덕주사지(德周寺址)· 신륵사지(新勒寺址)가 있고
 하늘재에서 문경에 이르는 노변(路邊)에 관음리 반가사유상(觀音里 半跏思惟像)· 관음리 석조약사여래입상(觀音里 石造藥師如來立像)· 갈평리 5층석탑(葛坪里 五層石塔 ; 원 위치는 관음리)· 관음리 석불좌상· 관음리 3층석탑 등이 있으나 사찰은 북적(北賊)의 침략시 불타고, 관음사 외에는 사명(寺名)도 전하지 않는다.
  조선조 초에 조령로(鳥嶺路)가 개척되고, 중기(中期)의 임진(壬辰)· 정유(丁酉)왜란(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조령로가 중시(重視)되면서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떨어졌고, 말기(末期)의 정혼(鄭混)은 관방(關防) 설치의 방략(方略)을 제기하였고, 월악산(月嶽山) 아래 북문· 동문· 남문성벽과 성문이 축조 되었었다.

  계립령 주변은 관방(關防) 및 군사요로(軍事要路)로 고구려에서도 연개소문(淵蓋蘇文), 온달(溫達)장군 등에 의하여 실지(失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음을 삼국사기(三國史記) 제5권 선덕왕(善德王) 11년(…麗王謂曰竹嶺本是我地分汝若還竹嶺西北之地兵可出馬려왕위왈죽령본시아지분여약환죽령서북지지병가출마) 선덕 13년(淵蓋蘇文謂玄奬曰…)의 기록과 고구려 온달 장군이 계립령·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
는 등의 기록으로 고구려에서 이곳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석성유지(石城遺址)가 잔존(殘存)하니 한훤령(寒喧嶺) 북측(北側)에 길이 480m의 차단성(遮斷城) 형태의 성지, 계립령 서측(西側)에서 신선봉(神仙峰)· 조령관(鳥嶺關)· 깃대봉을 거치는 능선 북측 2~3m 아래 길이 2.7㎞의 성지(城址), 월악산 정상에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곳곳에 쌓인 성
, 조령산성 외에도 그 동쪽에 어류성(御留城)이 있어 성첩 5, 6백파를 고려 태조가 설치하였으며, 그 동쪽에 작성(鵲城)
(16)이 있고, 서쪽에 희양산성(曦陽山城)(17), 남쪽으로는 고모성(姑母城)(18)· 고부성(古父城)(19)이 있다.

 

<註①> 三國史記卷第二(삼국사기권제2) 新羅本記第二(신라본기제2) 阿達羅尼師三年條(아
           달라이사금3년조)[夏四月開鷄立嶺路하4월개계립령로]
<註②> 聞慶縣誌(문경현지) 山川鷄立嶺路條(산천계립령로조)[漢恒帝永興三年한항제영흥3
           년 新羅阿達羅王신라아달라왕 遣使開路견사개로]
<註③> 新增東國與地勝覽卷第二十九(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29) 聞慶縣山川鷄立嶺條(문경
           현산천계립령조)「俗號속호 麻骨山以方言相以也마골산이방언상이야」
<註④> 新增東國與地勝覽卷第十四(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14) 延豊縣山川鷄立嶺條(연풍현
           산천계립령조)「俗傳속전 麻骨岾…마골점…」
<註⑤> 新增東國與地勝覽卷第二十九(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29) 聞慶縣山川串岬遷條(문경
           현산천관갑천조)「…俗傳…속전 高麗太祖南征至此不得路有兎緣崖而走逐開路…고
           려태조남정지차부득로유토연애이주축개로…」
<註⑥> 勒里寺址發掘調査報告書 P10(미륵리사지발굴조사보고서P10)
<註⑦> 역翁稗說(역옹패설) P239
<註⑧> 
聞慶郡誌(문경군지) P66 殿座門(전좌문)과 蓋陰里(개음리)
<註⑨> 
勒里寺址發掘調査報告書 P12(미륵리사지발굴조사보고서P12)
<註⑩> 
考古美術(60·9 고고미술) P13~15
<註⑪> 
勒里寺址發掘調査報告書 P11(미륵리사지발굴조사보고서P11)
<註⑫> 
三國史記列傳第五 溫達條(삼국사기열전제5 온달조)「臨行誓曰鷄立峴임행서왈계립
           령 竹嶺己酉죽령기유 不歸於我불귀어아 則不返也칙불반야」, 新增東國與地勝覽卷
           第十四(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14) 延豊縣(연풍현) 山川鷄立嶺條(산천계립령조)「
           高句麗溫達所謂鷄立峴竹嶺以西不歸於我則不返也此其地
고구려온달소위계립현죽령
           이서불귀어아칙불반야차기지」
<註⑬> 
勒里寺址發掘調査報告書 P10(미륵리사지발굴조사보고서P10)
<註⑭>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 문경현 성지 어류성條「조령에 있으며 동쪽으로 옛터가
           있다. 그 가운데에 넓게 전개된 형세가 險固(험고)한데 동남쪽은 절벽이 천길이나
           되며 북쪽은 차츰 낮아져서 人力(인력)으로 통할 수 없는데 성가퀴(城堞)을 설치하
           였으며 5·6백把(파)에 불과하였다. 성중에는 우물과 샘이 많아 수만군사를 수용할
           수 있고…

<註⑮> 
 聞慶縣誌(문경현지) 山川御留洞條(산천어류동조)「在鳥嶺城東深谷中周回三十餘
            里高麗太祖伐甄萱時駐駕于此築城曰御留…
재조령성동심곡중주회30여리고려태조
            벌견훤시주가우차축성왈어류…」
<註
(16)新增東國與地勝覽卷第二十四(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24) 醴泉郡古跡鵲城條(예천
            군고적작성조)「周六百十尺今廢城西有石門高十一尺廣十二尺三面皆岩石주육백10
            척금폐성서유석문고11척광12척삼면개암석」
<註
(17)新增東國與地勝覽卷二十九(신증동국여지승람권29) 聞慶縣山川曦陽山條(문경현
            산천희양산조)「在加恩縣北十五里有古城三面皆古有軍倉재가은현북15리유고성삼
            면개고유군창」聞慶縣誌(문경현지) 山川曦陽山條(산천희양산조)「…有古城三面
            皆石城自伊火峴來
유고성삼면개석성자이화현래」
<註
(18)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 문경현 성지 고모성條「토천 서쪽의 斷峰(단봉) 위에 있
            으며, 두 골짜기가 中盤(중반)을 묶은 것 같아서 大川大路(대천대로)가 그 下城(하
            성)을 경유하는데 둘레가 9백90척이다. 모두 신라 때 방어하던 곳이다.」
聞慶縣誌
            (문경현지) 關防姑母城條(관방고모성조)「在兎遷西龍淵上據一道交會之處而兩峽
            如東中盤大川壬辰倭酋恐有守兵첨처再三竟知無備乃歌舞而過云
재토천서용연상거
            일도교회지처이양협여동중반대천임진왜추공유수병첨처재삼경지무비내가무이과
            운」
<註
(19)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 문경현 성지 고부성條「兎遷(토천) 남쪽 高山(고산) 위
            에 있는데 둘레가 6백20척이며 고모성(姑母城)과 서로 마주있다.

 

   2. 조령로(鳥嶺路)

  새재를 조령(鳥嶺)이라고 쓰고는 새도 날아넘기 어려운 험한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고 한다고는 하나, 억새풀이 많은 고개라는 뜻인 새(띠·억새같은 것의 총칭 : 억새 ; 草) 고개(岾)가 한자로 초점(草岾)으로 쓰고, 다시 변하여 조령(새草· 새鳥· 고개岾· 재嶺)으로 변천하여 왔다고 생각되며, 새재란 수목이 울창했던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由來)되었다고 본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誌)에서 문경의 험한 곳을 초점(草岾)· 이화현(伊火縣)· 관갑천(串岬遷)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조선조 초에 조령로가 중요시 됐음을 알 수 있고, 반묘당(半구堂 ; 錢昌起,문경 상리) 유고(遺稿)에 의하면 조선조 태종(太宗) 때 시개조령지로(始開鳥嶺之路)라는 기록이며, 전설 등으로 보아 조선조 초에 개척되었다고 볼 수 있고, 개척된 조령로는 지세 자체가 천험하였다.

    문경새재 산신령
  조선 태종 때 처음으로 조령의 길을 개척(開拓)할 때의 일이다. 문경현감이 긴급히 조정(朝廷)에 치계(馳啓)하여야 할 중대 안건이 있었다. 현감은 요성 역졸 중에 신체가 건장한 역졸을 골라서 조정에 상계(上啓)할 장계를 가지고 급히 다음역까지 체송(遞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감의 명령을 받은 역졸은 다음 역을 향해 문경새재를 넘어가는데 새재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호환(虎患)을 당하였다. 문경현감은 체송간 역졸이 호환 당할줄도 모르고 조정에 상계하였으니 그 비답만 내릴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차 조정에서는 문경현감에게 관계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 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문경현감은 깜짝 놀라 요성역으로 가서 체송한 역졸을 호출하였더니 그 역졸은 지금까지 귀임하지 않고 행방불명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안 현감은 즉시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호령하고 그 역졸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해 문경새재 일대를 수색한 결과 호랑이가 먹다 남은 시체 일부와 행장(行裝)이 발견되었다.
  현감은 또다시 지연된 사유와 아울러 조정에 사건의 경위를 상보(上報)했다. 이 장계를 받은 태종대왕은 대노(大怒)하여 즉시 봉명사(奉命使)를 차원(差員)하여 문경새재 산신령을 잡아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봉명사는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문경새재에 도착하여 산신령(山神靈)을 포착(捕捉)할려고 하나 산신령을 잡을 묘리(妙理)가 나지 않았다.
   궁여일책(窮餘一策)으로 새재 산신사(山神祠)에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한 후 제문(祭文)을 불사르고 혜국사에 머무르면서 하회(下廻)를 기다렸다. 그날 밤 만월(滿月)로 월광(月光)이 교교(皎皎)하여 잠도 못 이루고 전전반측(轉轉反側)하고 있는데 삼경(三更)쯤 되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호랑이 울부짖음이 일어나더니 잠잠해진다. 
  그 이튿날 새재 산신사 앞마당에 여산대호(如山大虎)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봉명사는 그 호랑이를 박피(剝皮)하여 태종대왕께 호피(虎皮)를 바치고 사실을 상주(上奏)했다. 그후부터 문경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전씨(錢氏)라는 이인(異人)이 혜국사에 유숙하여 있는데 그의 꿈에 새재 산신령이 현몽하기를 “나는 새재 산신령이요, 나라에 득죄(得罪)하여 아직 면죄를 못 받았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나라에 상소하여 억울한 죄명을 씻어 줄 수 없겠는가” 하고 간청했다.
  그는 쾌락(快諾)하고 즉시 새재 산신령에 관한 사죄상소를 올렸더니 태종대왕께서 친히 비답(批答)을 내리시어 새재 산신령의 죄를 사(赦)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1445년 25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1420~1488)은 이 새재길에서 팔영(八詠)시를 읊으며 한양을 오갔고, 성화년간(成化年間;1465~1487)에 조령로에 문경현감 신승명(愼承命)이 신구(新舊) 관찰사(觀察使)· 순찰사(巡察使)· 신군남영사(新軍南營使)가 바뀔 때마다 부신(符信)을 주고 받기 위한 교귀정(交龜亭)을 건립했다.
  점필제 김종직(점畢齊 金宗直:1431~1492)가 이 새재길로 한양을 오갔으며, 교귀정에는 시가 한 수 전한다. 1488년에는 벌써 죽령보다 더 많은 2/3이상이 관현(冠縣;聞慶)을 지나니 새재길은 영남 선비며, 지방관의 이체임(移遞任)행차며, 일본의 조공사신까지 줄처럼 이어 연락부절이었다. 신임 사또를 맞기에 부산했던 새재길에는 이런 전설도 있다.

    달성판관의 명판결(達城判官의 名判決)
  옛날에는 신임 사또가 임명되면 육방관속이 그 본가까지 가서 모시고 왔었다. 어느 시대 서울에 사는 가난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했고 얼마후 달성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신임 사또가 임명된지라 달성의 육방 관속은 관례대로 사또를 모시러 갔다.
  신임 사또가 인물이 어떠하며 성격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 마음에 급히 사또집을 물어 찾아가 보니 기대와는 딴판으로 사또의 키는 5척되 못되는 단구요, 거기다 얼굴까지 빡빡 얽었고 나이도 겨우 스물이 넘을락 말락하는 애숭이로 도무지 볼품 없었다.
  육방관속들은 별 것 아니구나 속으로 만만히 보며 함께 내려오는데 문경새재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그 때 찢어진 갓을 쓰고 남루한 옷차림의 어린 상주가 사또에게 울면서 딱한 사연을 하소연 하였다. 내용인즉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비용을 마련키 위해 상주의 몸인데도 닭 다섯 마리를 팔러 장에 나왔다. 
  평생 물건을 팔러 시장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파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한 닭장수가 가까이 와 자기가 맡아 있다가 팔아 주겠다면서 상주의 닭 다섯 마리를 자기 닭장 속에 집어 넣었다. 한나절을 지나 그 닭장수에게 맡긴 닭을 달라니 맡은 일조차 없다고 잡아떼 본관 사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닭을 찾아달라 했더니 “이놈 네 닭을 내가 어찌 안단 말이냐” 고 호통만 칠뿐 찾아줄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얘기를 다 듣고난 달성판관은 곧 사령을 보내 닭장수를 잡아오게 했다. 상주에게 자기 닭을 찾으라 하니 여러 마리 중에서 하나 하나 골라낸다. 사또가 먼저 닭장수에게 물었다. “네 이놈 저 닭이 정녕 네놈 것이라면 저 닭에게 아침에 뭘 먹였느냐” 닭장수는 쌀, 보리 등 온갖 것을 주어 섬기며 횡설수설 한다.
  상주에게 다시 물으니 아무것도 먹일 만한 것이 없어 집에있는 수수 한 줌을 먹였다는 대답이다.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를 잡으니 과연 수수가 나왔다. 닭장수는 꼼짝 못하고 백배 사죄한 후 그를 얼려 닭값을 열배나 물게하고 문경 본관 사또에게 5백량을 빌어 상주에게 장례비용으로 쓰도록 마련해 주었다. 교묘히 사건의 곡직을 가려내는 판관의 기질을 본 육박관속들은 혀를 내둘렀고 경멸히 어겼던 것을 뉘우쳤다.
  달성판관이 부임한 후 여러달이 지나도 문경 사또에게 빌린 돈 5백량을 갚지 않자 문경 사또가 사람을 보내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달성 판관은 심부름 온 사람을 불러 “네 돈을 벌써 갚았는데 네 고을 사또가 그렇게 정신이 없느냐” 고 되려 나무란다. 심부름꾼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자 사또에게 돌아가 대전통편(大典通編) 몇 장 몇 조를 보면 알 것이라 이르도록 했다. 
  대전통편 그 장은 본래 자기 고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관 사또가 처리 못했을 때는 사또가 벌금을 5백냥 물도록 규정한 것이다. 달성 판관은 그것을 이용, 5백냥을 빌린다고 받아 불쌍한 상주에게 도움을 베풀고 똑똑치 못한 사또를 그 나름대로 징벌한 것이다.

  1589년(선조 22년)에 중봉 조헌(重峰 趙憲:1544~1592)은 도끼를 들고 대궐에 나가 상소할 때 왜적의 방어책으로 영남지방의 방비를 강화하고, 왜적은 조령을 넘을 것이므로 자리를 이용하여 적을 방어토록 전략을 진언하나 조정에서는 묵살되고, 1592년(선조 25) 풍신수길(豊臣秀吉)은 15만 대군으로 현해탄을 건너게 됐으니, 4월 14일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여 부산성이 함락되고 동래성에서 송상현(宋象賢) 부사가 순국하고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장군은 상주에서 패하고 문경현에서는 신길원(申吉元)현감이 순국했으며,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장군은 조령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鎭)을 치니 밀양·대구·상주·문경새재를 넘은 소서행장(小西行長)군 1만8천7백명과 울산·영천을 거쳐 북상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2만2천8백명에게 4월26일 패하여 전사(戰死)하였다.

  새재가 아무리 자연적인 천험이지만 율곡(栗谷)의 10만 양병설(十萬養兵說), 중봉(重峰)의 만언소(萬言疏)는 배척되고 조련된 정병(精兵)에 조총(鳥銃)을 가진 왜적에 비해 훈련도 없고 변변치 못한 무기에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대적(對賊)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모한 임란이었다. 당시 상주·문경·충주의 참담한 사항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⑬.

    적신(赤身)장군 이일(李鎰)
  임진년 4월 14일 왜적은 10여만명 대군을 인솔하고 우선 부산진을 향하여 쳐들어 왔다. 부산을 지키고 있던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앞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도 모르고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絶影島)로 놀러 나갔다. 
  조정의 대관이 그렇고 일반인이 노는데만 열중하였으니 지방관인들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정발은 지난 밤에도 술을 마시어 미성(未醒)한 중에 바다 바람을 쐬며 놀고 있다가 별안간 앞바다에 왜적의 선박이 수백척 까맣게 몰려왔다. 처음에는 혹시 무역하러 오는 선박인줄 알고 그대로 있었으나 점차 가까이 오자 수상하여 놀던 것도 치우고 즉시 부산진 성으로 들어왔다.
  미구에 적병은 함성을 울리며 부산진 성으로 몰려 들어왔다. 정발은 술 때문에 머리가 혼미한 중에도 성을 둘러보며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적장은 정발에게 서신을 보내 가도(假道)를 요구하였다. 일개 지방의 변장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발은 성문을 굳게 닫고 부하 장병들에게 적과 끝까지 싸우라고 하였다. 
  담판이 결렬되자 적진에서는 조총을 쏘기 시작했다. 아직 부산진에서는 조총을 본 일이 없었다. 까만 부지갱이 같은 것을 쑥 내밀고 탕 소리를 내면 연기와 동시에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이었다. 새로운 무기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장사들은 활과 칼로써 대항코자 성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적희 탄환에 쓰러지는 것을 보자 처음 보는 무기에 혼이 나서 벌써 사기는 죽어가기 시작했다. 정발은 그날밤 밤새도록 성을 순시하며 적과 대전하였으나 새벽녘에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것을 본 그의 애첩도 자살하고 말았다. 수성장군을 잃은 잔졸은 더 대항치 못하고 그만 성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정발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던 길을 다시 돌아 좌수영을 버리고 도망쳐 달아났고,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尹任의 子)은 적과 싸우다가 전사 하였다.
  이와 같이 적이 쳐들어 오는 날로 연전연승하니 가장 가까운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미구에 동래까지 돌어올 것을 짐작하고 부하들을 단속하며 싸울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은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래까지 와서 응원 할려고 하다가 적병의 세력이 강하다는 소문을 듣자 벌써 안정할 수 없이 당황했다.
  적병의 일지대가 동래성 근처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 이각은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적세가 위급하오, 대장은 밖에서 형세를 보아 응원군을 더 데리고 와야겠소” 하고 눈치를 보았다. 송상현은 “일국의 대장이 위험한 성을 보고 다른 곳으로 가신다니 말이 되오. 나하고 이 성을 지켜야 하오” “아니오 나는 전세를 살펴야 하겠오” 한마디 하고 자기의 부하 별장 한 사람을 데리고 성문을 열고 빠져 나갔다. 송상현은 이 꼴을 보자 분하여 즉시 남문에 올라가 자기의 부하 군사에게 “좌병사는 달아났다. 우리의 성은 우리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 승리해야 한다.” 
  매우 비장한 말로 부하 군사들을 격려했다. 벌써 적병은 남문밖 연병장까지 쳐들어 왔다. 이것을 본 군사들은 손에 활을 쥐고 모두 성 위로 올라섰다. 적병은 큰 나무판에 글씨를 써 성문앞 가까이까지 와서 “싸울자는 나오라,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라” 하는 글을 보여주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송상현도 이에 지지 않으며 “죽기는 쉬운 일이나 길을 빌려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하는글을 써서 적진중으로 던졌다. 이제부터 싸울 각오를 하고 일어선 것이다. 적은 수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성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를 했다. 그래도 송상현은 장병들을 독려하며 적과 싸워 일진 일퇴하였다.
  그날밤 밤세도록 싸우고 15일 새벽에 적은 성 뒷산으로 돌아 먼저 짚으로 만든 사람에게 갑옷을 입혀 군사와 같이 복색을 시켜 성안으로 던졌다. 적병을 처음 보는 군사들은 적병인줄 알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사이에 적병은 큰 칼을 휘두르며 성문을 파괴하고 뛰어들어 왔다. 처음에는 대항하여 싸웠으나 적병의 수가 점차로 많아지자 이쪽에서 몰리기 사작했다. 
  이 싸움에 조방장 홍윤관(洪允寬)을 비롯하여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 대장(代將) 송봉수(宋鳳壽), 교수 노개방(盧蓋邦) 등이 전사했다. 이것은 동래성의 중요한 사람이 모두 전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송상현은 형세 불리한 것을 보자 더 이상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즉시 조복을 가져다가 갑옷 위에 입고 최후의 시각을 기다렸다. 
  적병은 사태난 것 같이 쳐들어 왔다. 적병중에 평조익(平調益)이란 자는 동래에 수차 왕래한 자로 전에 송상현의 극진한 대우를 받은 자이다. 송부사를 보자 “여보 부사 큰일났오, 성틈으로 비키시오” 했다. 그래도 부사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평조익은 답답하다는 듯이 송부사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피하라고 했다.
  그래도 송부사는 움직이지 않고 남문루에 올라앉아 북향재배하고 최후로 자기 아버지께 임종을 시(詩)로 썼다. 「외로운 성에 달이 구름 가운데 싸이었는데 여러 진에서는 아무런 응전도 없도다. 군신의 의가 중요하고 부자의 은혜는 경하오이다.(孤城月 列鎭高枕 居臣義重 父子恩輕)」
  이러한 뜻의 글을 다 쓰자 적장은 남문루로 올라와 송부사에게 “얼른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하는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 나타났다. 송부사는 정신을 가다듬고 “이웃 나라의 의리상 이럴 수가 있느냐. 우리는 당신네들에게 아무런 싸움도 건일이 없는데 별안간 쳐들어 오니 어찌된 셈이냐” 하며 적장을 꾸짖었다. 적장은 “무슨 쓸데없는 수작이냐, 길을 빌리면 되는 것이 아니냐.” “당치도 않을 소리” 할 때 벌써 적장의 칼은 번득 부사의 허리를 쳤다. 옆에서 보고 있던 기첩(妓妾) 금두껍이(金蟾)는 깜짝 놀라며 “사또 어이된 일이오니까” 하며 부사의 허리를 얼싸 안았다. 적장은 ”이 계집은 웬 것이냐, 사로잡아라” 소리를 질렀다. 
  송부사는 벌써 칼에 맞아 넘어졌고 아름다운 금두껍이를 잡아 얽어맸다. 그녀는 함흥 기생으로 인물이 출중했다. 색에 주린 이리떼 같은 적병은 마구 어루만져 주었다. 그럴수록 금두껍이는 “이놈들 우리 사또를 죽이고 감히 내몸에 손을 대느냐, 금수와 같은 놈들” 하고 노기를 띄우며 반항했다. 그러나 적진중에 잡힌 몸이 홀로 항거한들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얼마후 남편 송부사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갔다. 그날 낮에 적의 대장이 동래성으로 들어서며 위국효충(爲國孝忠)한 송부사를 칭찬하였다. 그래도 가신 성주는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부터 적은 파죽지세로 쳐들어와 울산군수 이언함을 사로잡고, 양산·울산·언양·밀양 등으로 향하였다. 한 번 실수한 우리 군사는 대항해 보지 못하고 바람소리만 들어도 적병인줄 알고 황겁지겁 도망갔다. 
  오직 밀양부사 박진(朴晋)이 밀양 앞 강에 적과 대치하다가 달아났다. 3일 후에야 부산·밀양·동래가 함락했다는 소식이 서울에 들어왔다. 평화에 잠기었던 조신들은 놀래며 급히 인심은 흉흉해졌다. 우선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정하여 급히 내려가게 하고,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정하여 급속히 내려보내도록 했다. 
  이일은 전에 북쪽에서 야인을 물리쳐 혁혁한 무훈을 세운 사람이다. 크게 장담하고 내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모집하여도 군인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이일은 홀로 내려갔다. 뒤로 군사라는 것을 내려 보내기는 했으나 군사가 아니고 시정에 있는 서리·유생·무뢰한들 뿐이었다. 
  이러한 자를 응급히 모집하여 내려 보냈다. 이일은 이런 자를 보자 기가 막혀 “네까짓 놈들이 무슨 싸움을 하느냐 물러가라” 크게 호령했다. 그 중 한 자가 나서며 “저희들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과거를 본다 하옵기에 붓과 종이를 갖고 왔을 뿐입니다” 이러한 형편이니 싸움은 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이다.
  그동안 양성한 군사는 어디 갔는지 하나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일은 먼저 문경에 들려 정세를 살핀 후 “오늘의 적병은 신병(神兵)과 같아 아무도 당해 낼 자가 없오. 신은 오직 죽음으로써 보답할 따름이오” 하는 비장한 장계를 써서 올렸다. 자기는 야인을 전멸시켰다는 전력을 가졌으므로 언제나 적병을 경멸히 보았다. 
  이일은 문경에서 다시 상주로 내려가 보니 상주목사 김해(金해)는 벌써 산속으로 도망가고 판관 권정길만이 홀로 남았다. 이일은 판관에게 “너의 고을에 군사가 얼마나 되느냐” “약 5백명 있었으나 부산진이 함락 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병정이 도망을 가다니 될 말이냐. 그것은 너의 책임이다. 너는 군령으로 처참하겠다” 이 말을 들은 판관 권정길은 겁이 나서 “그러면 내가 군사를 모아 오겠습니다” “만일 인원수가 부족되는 경우에는 군법을 시행하겠다” 판관은 잘못 하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죽을 지경이었다.
  즉시 밖으로 나가 군대를 모집해 왔다. 그러나 그 수는 얼마되지 않으므로 이일은 창고를 열어 기민을 구제한다고 하여 사람이 모이도록 수단을 썼다. 그저 준다는 바람에 모여들어 겨우 병정 백여명을 모집할 뿐이다. 급속히 병정들의 편대를 만들고 훈련했다. 원래 병정이 아니라 어려워 달아나지도 못했던 농민인 까닭에 훈련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날 저녁에 개령(開寧)서 도망온 농민이 들어오며 “벌써 왜병이 상주로 쳐들어 오고 있오”하고 도망갈 준비를 했다. 이일은 노하여 “이놈 너는 민심을 소란시키는 자이다. 즉시 군법대로 시행하겠다” 한 후 가두었다.
  피난민은 또 “사또 내일 아침까지 적병이 안오면 사형 당해도 억울치 않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애원하였으나 아무 소용없이 군법대로 민심을 소동 시킨다는 죄목으로 죽였다. 다음날 아침 적병은 벌써 상주 남쪽 장천리에 나타났다. 이 적병은 척후대로서 2, 3명씩 한군데 모여 그 부근 지리와 정세를 탐지하고 있었다. 군중은 적병을 보았으나 목숨이 달아날까 무서워 감히 말도 못하고 형세만 살피고 있었다.
  이일은 수백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앞냇가에 나가 병정들을 조련시켰다. 처음에는 아무일 없었으나 얼마후에 과연 적의 척후병 몇 명은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우리편 군관을 쏘아 넘어뜨린 후 목을 잘라 가지고 달아났다. 이때야 비로소 이일은 적병이 온 줄을 알고 즉시 수백명밖에 되지 않는 군사를 총 출동시켜 적과 싸우게 했다.
  이쪽의 무기는 활밖에 없으므로 적이 포위해 들어오자 활로서 대항했다. 활은 불과 80보밖에 가지 못하지만 조총은 그 위력이 강하여 탕 소리나는 동시에 이편 군사들이 자꾸 넘어졌다. 이 싸움에 의용장으로 자진해 나간 윤섬, 박호 등이 전사하여 서울서 내려온 사람은 이일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일이 장군의 복색을 하고 진두에 나서서 적을 쏘라고 지휘하였으나 이쪽의 형세가 불리해지면서 군사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고 이일도 차차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순변사의 중책을 버릴 수 없어 마상에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자기편 군사가 그의 도망가고 얼마남지 않았다.
  그럴수록 적병은 대장인 이일을 목표로 포위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사로잡힐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이일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뒤에서는 고함을 치며 이일을 향해 집중사격이다. 그대로 있다가는 죽을 지경이다. 처음에는 허세를 부렸으나 할 수 없이 달아났다. 그럴수록 적의 목표는 순변사에게 있는 듯이 보였다. 
  더 그대로 있다가는 언제 죽을지 몰라 타고 다니던 말을 버리고 보행으로 달아났다. 그래도 뒤에서는 큰 소리가 나며 점차로 접근해 왔다. 이일은 언제 피살될 지 몰라 달아나면서 갑옷을 벗어 버렸다. 그래도 부족하여 아주 아래옷까지 마져 벗어 알몸뚱이가 되고 말았다. 알몸이 된 이상에는 적병이 누가 대장인지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단숨에 문경까지 뛰어갔다. 알몸이 되어 도망가는 순변사는 사실상 누가 누구인지 몰라보게 되었다. 다행히 탈출하는데 성공한 이일은 겨우 농민의 헌옷을 입고 충주까지 뛰어 갔다. 충주에 있는 신립이 농민의 옷을 입고 뛰어 오는 이일을 보자 “이게 무슨 꼴인가. 전쟁을 수차 경험한 사람이 거지가 되어 도망오다니 너는 군법대로 시행하겠다.” 이일은 겁이나서 더 얘기도 못하고 한 곳에 앉아 우선 앞을 가리느라고 아무것이나 농민의 옷을 주어 입었다. 
  그래도 순변사이므로 신립의 막하로 들어가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은 이일에게 적의 형세를 물었다. “그래 왜병과 싸웠다 하니 적의 형편은 어떠한가” “이번에 오는 왜적은 전에 도적의 떼와는 비교도 되지 않소이다” “좋은 계략이 있는가?” “소장의 생각에는 넓은 들에서 싸우면 승산이 없을줄로 아오. 충주에서 싸우지 말고 서울까지 후퇴하여 그곳을 지키는 것이 적당할 줄 아오”
   “무엇이 서울로 후퇴하자고. 너는 패군지장인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 군법을 모르느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잘못하다가는 군법에 의하여 처형될 형편이었다. 이일은 어물 어물하며 혼자말로 “서울은 지킬 듯 한 줄 아오” “이놈 그게 무슨 소리냐. 이번에 여기서 적을 격멸치 못하면 너는 군법을 맛보아야 한다” 이러한 말로 다짐한 후 충주 달래강을 건너 적과 대치하고자 진을 쳤다. 김여물이 이 광경을 보고 “장군 적세가 심한 듯 한데 그래도 험준한 조령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닐세, 적병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일세. 넓은 들에서 좌우로 치빙하며 싸워야 승리할 수 있네. 두고 보게” “그렇지만 자고로 험준한 곳을 지켜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야, 우리 군사는 달아나길 잘하니 배수진을 쳐야하네”
  김여물도 신립이 상관이므로 상관의 말을 어길 수 없어 하자는 대로 강을 건너가 진을 쳤다. 적은 어느새 조령을 넘어 충주로 몰려왔다. 마치 급한 풍우처럼 적의 떼는 무서운 형세로 닥쳐왔다. 신립의 군대는 정돈할 사이도 없이 적과 마주쳐 싸우게 되었다. 군사들은 뒤에 큰 강이 있어 달아날 수 없어 사력을 다하여 용전분투 했다. 그러나 적병은 새로운 무기 조총을 마음대로 발사하므로 우리편의 형세는 점차로 불리하여 강가로 몰려왔다. 
  나중에는 할 수 없어 달래강 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적은 큰 칼을 휘두르며 물속까지 쫓아와서 싸웠다. 강물은 붉게 물들고 시체는 강이 차도록 떠내려갔다. 참경을 본 신립은 사세 불리한 것을 보자 옆에 있는 김여물을  돌아보았다. “나는 죽을 몸이니 어서 자네나 피해 달아나게” “갈데가 어디오니까. 소장은 이미 각오한 몸이외다.” “그럴 것 없네. 자네는 어서 달아나 훗일을 기약하게.” “대장을 두고 달아난다는 것은 안될 말씀이오. 소장도 장군과 같이 전사할 것이외다” 
  두 사람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탄금대 아래로 내려와 뒤에서 쫓아오는 적병 수십명을 상대로 백병전을 전개하다가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전사하였다. 그 통에 이일은 강을 건너가 싸우는 척 하다가 산속으로 달아나 충주강 얕은 곳을 건너 단숨에 서울까지 올라왔다. 즉시 궁중으로 들어가 충주에서 패전한 것을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신립만을 믿고 넉넉히 적을 꺾을 줄 알았더니 뜻밖에 패했다는 소리를 듣자 벌의 집을 건드린 것 같이 소란했다.

  신립장군은 1546년(명종 1년)에 태어나 자(字)는 입지(立之)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생원(生員) 화국(華國)의 아들로 22세에 무과급제(武科及第) 선전관(宣傳官), 도총(都摠), 도사(都事), 경력(經歷), 진주판관(判官)을 거쳐 은성부사(은城府使)가 됐다. 육진(六鎭)을 괴롭힌 니탕개(尼湯介)의 두만강 건너 소굴까지 소탕하고 함경북병사(咸鏡北兵使)로 승진했으며, 니탕개를 잡아 죽이는 등 전공이 혁혁하여 평안병사(平安兵使)를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임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선조가 친히 칼을 하사하며 격려한 백전노장은 김여물 부장(副將)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으나 적이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부딪치면 위험하고 우리 병정은 아무 훈련없는 장정들이라 사지(死地)에 갖다놓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않을 것으로 알고 달천(達川)에 배수진을 쳐서 장렬한 전사를 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신립(申砬)장군과 배수진(背水陣)
  임란(壬亂)을 당하여 영남의 패보(敗報)가 서울에 도달(到達)하자 조정(朝廷)에서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신립장군으로 하여금 모병대적(募兵對敵)하게 하고, 일방 순변사(巡邊使) 이일장군을 상주에 급파(急派)하여 방어케 하였다. 
  대치중(對峙中)인 왜장 소서행장은 임진 4월 24일 상주를 포위 공격하자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이장군은 대패하여 문경 조령으로 진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중도인 당교(唐橋)에서 남하하는 신장군과 만나 대패한 사실을 전하고 신장군과 함께 문경으로 회군(回軍)하여 방어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제장(諸將)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의를 주재하는 신장군 앞에 한 도승이 나타나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 포진반격(布陣反擊)을 가하면 왜적을 격퇴(擊退)할 수 있다고 간곡히 진언(進言)하였다. 그러나 신장군이 인솔한 병사는 충청도 태생으로 산악전(山岳戰)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사기가 저하되어 평야인 충청도 지대에서 적을 격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 많으므로 신장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유예미결(猶預未決)하고 있었다.
  그때에 신장군의 소시(少時)에 장군을 사모하다가 함원자결(含寃自決)한 처녀원귀(處女寃鬼)가 장군 앞에 나타나 신장군은 대명(大命)을 받아 왜적을 격멸하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충청도 달천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크게 대승하리다. 말하니 새재에서 싸울 마음이 없던 충청도 출신 장병들이 떠들고 일어나는지라 신장군은 요사스런 원귀의 말을 믿고 부장 김여물 등은 회군의 불가함을 극간(極諫)하고 조령방어책을 주장하였으나 신장군은 그 계략을 묵살하고 충주 탄금대에 포진하였다. 왜적과 대진한 신장군과 전장병은 순사대패(殉死大敗)하고 말았으니 조령을 사수하였던들 임란의 양상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1613년(광해군 5) 4월 새재의 적(賊)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등이 잡혀 역모(逆謨)로 진술(陳述)되어 5월에는 영창대군(永昌大軍)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가 1614년 2월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영창대군이 죽게 된 사건도 새재에서 발단되었으니 적서(嫡庶)의 차별과 당쟁으로 인한 애사(哀史)로 남고 있다.

    강변(江邊)의 칠우(七友)라는 부랑배들
  광해군이 서자로 임금이 되었다 하여 양반집의 서자들도 이 통에 자기들도 양반과 같이 대우해 달라고 일어났다. 서인의 거두 박순(朴淳)의 첩의 자식 박응서는 당시 당당한 양반의 서자인 서양갑, 이경준, 박치인 등과 연결하여 상소 하였다. 그 내용은 「우리들의 아버지는 모두가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고관대작이 되었고, 또 나라일을 많이 하였소. 그런대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서자라하여 벼슬을 주지 않으니 이는 너무나 모순된 일이요, 새로운 광명이 비치는 이때 전하의 너그러운 성려(聖慮)로서 우리에게 사관(仕官)의 길을 열어주오.」 이러한 상소문을 냈다.
  임금도 처음에는 자기의 출신이 서자이었으므로 서자 대우를 완화하려고 하였으나 완고한 신하들 때문에 하지 못하였다. 그럴수록 서자들은 울분해 하며 서로 모여 술마시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중 박응서는 불평분자를 모아 가지고 춘천 소양강 근처에다 무륜(無倫)이라는 당호의 집을 짓고 매일 시와 술로서 세월을 보냈다.
  마침 사람 수가 7명이었으므로 강변의 7우라 하다가 나중에는 진나라 죽림 7현을 본받아 명칭을 죽림7현이라고 고치고 평생을 술과 풍자로서 지낸다고 하였다. 겉으로는 그럴 듯 하여 매우 풍치있는 이름을 붙였으나 사실은 도적의 패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박응서는 대북의 허균(許筠)과 소년시절부터 친교가 있어 자주 왕래하며 선조 말년에 대북과 소북이 싸울 때 허균은 은근히 박응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즉 박응서는 서인의 거두 박순의 서자로서 당시 너무나 적서(嫡庶)의 차별이 심하여 서인을 반대하고 대북편의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한번 허균과 사귄후 박응서는 자기와 처지가 같은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 심현(沈鉉)의 아들 심우영(沈友英), 이제신의 아들 이경준, 박충간의 아들 박치인, 박치의, 사계의 아우 김경손, 김평손, 허홍인 등을 모아놓고 서얼로서 공동투쟁을 결의 하였으나 일이 뜻한 바와 같이 되지 않으므로 세상을 저주하고 각지로 돌아 다니며 강도 노릇을 하였다.
  그자들은 여주와 춘천 근처에 굴을 파놓고 그 근처로 지나가는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아다가 질탕하게 놀았다. 그 뿐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돈만 생기면 여주강 경치좋은 곳을 찾아 다니며 술을 마시고 계집을 데리고 놀았다. 언제나 박응서는 친구들에게 “여러분 우리는 모두 훌륭한 양반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첩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히어 출세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양반놈들을 없애고 한번 정권을 잡아볼까.” 하고 선동했다.
  “야, 그 따위 소리는 그만 두어라, 정권은 잡아 무엇하나. 우리 이런 곳에서 배불리 먹으면 좋지 않느냐.” “아니다, 단결하여 기회를 노리자.” “그만 둬” “그렇지 않다. 우선 우리들은 단결하기 위하여 돈을 모아야 하겠다.” 이 말에는 모두 찬성했다. 여기서부터 단결되어 낮에는 여주 강에서 놀고, 밤이면 도둑질을 하였다. 그 근처를 틀어 보아도 큰 돈이 되지 않아 점차로 그들의 활동범위는 넓어졌다.
  계축년(癸丑年 ; 광해 5년)에 이들은 새재(鳥嶺)로 원정갔다. 새재는 경상도 사람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장사치들이 많이 왕래했다.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등은 힘꼴이나 쓰는 장사였다. 아직도 이른 봄이 되어 쌀쌀한 봄바람은 소매속으로 숨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추웠다.
  “아무 놈도 없나. 몸을 좀 놀려야 훈훈해지겠다.”  박응서가 서양갑을 향해 하는 수작이다. “쉬-잇” “쉬가 무슨 쉬냐. 임금이 지나 가느냐.” “임금보다 더한게 지나간다. 저 아래 좀 보아라.” 서양갑이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새재 중턱에서 조랑말에 무엇인가 무겁게 싣고 올라오는 자가 있었다. 한사람 뿐 아니라 세사람이 뒤에서 따르고 있었다. 심우영이 작은 목소리로 “사람이 많아 일이 안되겠다.” 할 때 박응서는 “그끼짓 놈들 수백명이면 상관있나. 내 칼만 보면 그만이다.” 
  어딘지 모르게 큰 소리 하는 것같이 들렸다. 사람의 발자취가 가깝게 들려 우선 모두 산 중턱에 숨었다. 얼마 후 행상인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박응서가 먼저 나서며 큰 기침을 했다. “여보 길손, 어디로 가시오.” “예, 서울 가는 길이오.” “말에 실은 것이 무엇이오.” “필목이오.” “그것 삽시다.” “서울 가서 팔 것이오. 여기서는 안파오.” 박응서는 나서며 말고삐를 붙잡고 쓸데없는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다른 자들도 쑥 나서며 “여보, 아무데서나 팔면 되지 않아.” “이 양반들이 누구와 시비하자는 것인가. 팔고 안파는 것은 내 마음대로 아니오.” 
  장사치도 일행이 세명이나 있으니 호락호락하게 지지 않았다. 바로 이때 심우영이 나서며 “이놈들 잔소리 말고 사람 상하기 전에 어서 짐을 풀고 가거라.” 이제는 도적의 자태를 그대로 내놓았다. 그래도 장사치는 물건이 아까워 대항해 보려고 맞섰다. 박응서는 큰 칼을 뽑으며, “이놈, 나는 서울서 온 포교이다. 너희 놈들이 물건을 나라에 바치지 않고 몰래 팔아먹는 수작이지” 한마디 하고 큰 칼로 앞에 섰는 주인같은 사람을 쳤다. 주인은 “아이쿠”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음에는 뒤에 있는 사람과 또 싸웠다. 그러나 이쪽 편이 많으므로 그 자도 대항했으나 마져 죽고 말았다. 싸움통에 말고삐 잡은 구종은 말을 그대로 두고 달아났다. 여러 놈들은 말에 실은 것을 내려놓고 속을 보니 은전이 잔뜩 실려 있었다. 박응서는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야! 이제는 살았다. 이것이 모두 은이구나.”
  어찌나 좋은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말채 그대로 가지고 여주로 들어갔다. 소굴에 돌아와 세어보니 은전이 6백냥이나 되었다. 그만하면 1년치 이상을 번 셈이다. 말까지 내 버리고 다음날부터 호화스럽게 놀았다. 말구종은 경상도로 가지 않고 멀리서 도둑놈들이 어디로 가나 하고 망을 보며 다를 따라 섰다. 박응서 일당은 너무 좋아서 뒤 따르는 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은신처로 가서 숨겨두고 쓰는 것이다.
  구종은 즉시 서울로 올라와 포도청에 고발하였다. 포도대장 한희길은 포교와 포리 10명을 데리고 여주로 내려가 무난히 잡아 서울로 끌고와 포도청에 가두었다. 우선 문초할 떄 박응서는 자기들은 세상에서 천대 하므로 나라를 뒤집으려고 한 짓이라고 했다. 소문은 퍼져 이이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첨은 속으로 큰 일을 꾸밀 것을 생각하며 포도대장 한희길의 집을 찾았다. 
  당시 이이첨은 부제학으로 쩡쩡한 문관이었다. 주인에게 허리를 굽히면서 들어서 방에 들어가 넙죽 절을 했다. 한희길이 깜짝 놀라 마주 절하며 “대감이 천한 무관에게 절을 하시니 웬 일이오니까. 너무 황송하오이다.”하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장군의 면상을 살피니 복스러운 상이 되어서 그러는 것이오. 미구에 국가에 큰 공을 세우리다.” “그렇게 되는 것이 모두 대감의 덕택인 줄 압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날밤 한희길의 집에는 이이첨의 부하 심복지인이 나타나 수근대며 즉시 포도청으로 박응서를 찾아갔다. 박응서는 장차 자기가 죽을 것을 짐작하고 어찌하면 살아날까 하는 궁리를 할 때 포도대장이 은근히 불러냈다. 무슨 일인가, 겁을 집어 먹으며 따라 나섰다. 한희길과 이이첨의 부하 이의숭은 은밀한 곳으로 박응서를 데리고 가서 우선 먹을 것을 내놓으며 여러 가지 말로 위로했다. 박응서는 잡힌 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다. 한희길은 “네 죄는 죽어 마땅한 줄 아느냐?” “소인의 죄는 죽을 죄인줄 압니다.” “사람이 그렇게 쉽사리 죽어서야 되겠느냐, 죽음에서 살아나갈 도리를 찾아야지.”
  박응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 구멍이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서 살아야만 했다. 이때 옆에서 이의숭이 나서며 “너희 죄는 죽을 것이로되 내 말대로만 하면 살아날 뿐 아니라, 국가의 훈신이 될 수 있다.” 한 후 귓속에 대고 무어라 중얼댔다. 박응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음날 의금부에서 문초할 때 박응서는 “소인은 강도가 아니오 대사를 하기 위하여 우선 첫 수단으로 양식과 칼 등을 살 돈을 구한 것이오.” “대사라니 무슨 대사이냐?” “소인은 국구 김제남과 벌써부터 나라를 뒤집을 계획을 세웠소.” “그러면 누구를 내세울 심산이냐?” “영창대군을 내세울 작정이오. 지금 임금은 선왕의 서자이오. 벌써 선왕께서 전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소. 그것을 김제남이 소인에게 말하여 소인은 동지들과 역모한 것이오.” 
  일이 중대해졌다. 큰 역모 사건이 틀림없다. 광해군은 친국 하기로 결정하고,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판의금 박승종 등 여러 관리가 시립한 가운데 나가 우선 주범되는 박응서를 국문했다. 범인은 조금도 서슴치 않고 대답한다. “신이 서양갑, 박치의를 모수(謀首)로 정하고 정협, 박종인 등 호걸들과 모의한 후 벌써 4년이 넘었소. 우리들은 그때부터 여주에서 모의하고 우선 준비로 은상을 털어 돈을 만든 후 무사 3백명을 선발하여 대궐 안으로 들어가 대비께 수렴청정케 하고 영창대군을 내세울 작정이었소.” 어디까지나 잘한 것 같이 의기 양양해 있었다. 계속하여 관련자들을 문초 하였으나 서로 대답이 맞지 않았다. 사건이 한 번 일어나자 이이첨의 부하들은 좋은 기회라고 김제남을 비롯하여 영창대군까지 끌어 넣었다. 
  그 중 서양갑의 공초 중에서 김제남이 관련되었다는 말이 나왔다. 계획한 대로 김제남의 관직을 삭탈하고, 궁중 출입을 금지 하였다. 무서운 고문이 시작되자 정협은 서인 10여명을 끌고 들어갔다. 여기에 관련된 사람은 판서를 지낸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여기서 빠져 나가려고 김제남의 단점만 얘기하고 발뺌만 했다. 
  얼토당토 않은 일이 이외의 방면으로 벌어져 불과 수일 후에 영창대군은 폐서인 되고 김제남은 억울하게 사사되었다. 불과 여덟살밖에 되지 않은 영창대군을 폐서인 한 후에는 역적의 입에서 나왔으니 죽이라고 들었다. 임금은 의금부를 시켜 명령을 내렸다. “서인 의(영창대군)는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옹립한다는 설이 자꾸 입에 오른 이상 국가와 종사를 위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끊고 궁중에서 내보내 여염집에 두도록 하라.”
  아무것도 모르는 영창대군에게 벽력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어머니 되는 대비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내놓지 않았다. 어명을 받은 궁내의 내인들은 대비의 품에서 영창대군을 빼앗아 가지고 궁문 밖으로 나갔다. 대비는 어찌할 수 없이 그대로 땅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그래도 무지한 포교들은 억지로 우는 대군을 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파당싸움으로 임금의 총명까지 가리고 천륜이나 인륜 등도 돌보지 않으며 무참한 짓을 하는 것이다. 대북의 일파 그 중에도 이이첨의 부하들은 대군의 일파를 엄하게 벌주고 대군까지도 벌주게 하며 대비는 모자의 의리가 끝났으니 내 보내라고 했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쫓겨 나서는 울타리가 튼튼한 집안에 갇히우고 밖에는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대군은 그 속에서 “어머니! 어머니!” 하고 울면서 지냈다. 그래도 때가 되면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에는 좀 먹었으나 나중에는 곡기를 끊고 병석에 누웠다. 강화부사 정향은 죄인의 처소에 불을 많이 때라고 명령했다. 방은 펄펄 끓으며 달아 올랐다. 어린 영창은 “아이 뜨거워, 어머니!” 소리를 몇 번 하다가 나중에는 문틈으로 기어 올라와 밤과 낮으로 어머니를 찾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나니 악착같은 붕당 싸움의 희생이다.

  임진왜란의 그 쓰림을 당하고도 100여년간 관방(關防)의 중요성만 거론하다가 1709년(숙종 35년)에서야 관문과 조령산성을 쌓았다. 1728년(영조 戊申)에는 소론일파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이곳을 지키게 되었다. 이인좌는 영의정 준경(浚慶)의 후손이고, 감사(監司), 운징(雲徵)의 손자로 대대로 청주에 살았다.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2) 이후 실각당한 노론(老論)이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노론 4대신을 무고(誣告)했던 김일경(金一慶), 목호룡(睦虎龍)이 죽음을 당하자 3월에 이인좌, 김영해(金寧海 ; 金一鏡의 子), 정희량(鄭希良)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습격하여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 ; 李舞臣의 손자)을 죽이고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격문을 사방으로 돌리니 경종이 억울하게 죽고, 숙종은 왕자가 아니라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충군으로 왕통을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평안병사(平案兵使) 이사성(李思晟), 총융사(總戎使) 김중기(金重器), 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 등과 내외상응(內外相應) 하려하니 용인(龍仁)의 최규서(崔奎瑞)가 고변(告變)하였다. 이때 영남 좌우도에서 의병이 일어나니 문경현에서도 3월 17일 이 사실을 알고
(16) 3월 22일에는 조령성을 지킬 것을 순영에 알리고(17) 3월 27일에는 관군(官軍)은 수성에 당하게 되고(18) 용궁(龍宮), 예천(醴泉)에서도 조령성을 지키기 위해 왔으며(19) 한편에서는 신사일(申思日) 의병장이 무사(武士), 승군(僧軍), 포수(砲手) 등 217명이 4월 5일에 고모성(姑母城)에서 조련과 파수에 임하게 됐다(20)
.
  이인좌 등 반군은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됐지만 여기서 조령산성 및 고모성의 전략상의 위치를 새삼 확일 할 수 있다. 조령산성 축성후 40여년이 지난 1752년(壬申 영조 28)에 조령진(鳥嶺鎭)을 두어
(21) 현감 겸 수성장(兼 守城將)을 두었으며, 조령일대는 수목의 벌목을 금하고 남행북행(南行北行)하는 행인들의 통행을 억제하였지만 100여년이 못가서 조령진에는 수직군사가 없었던지 1871년(고종 8) 8월에는 진주민란(晋州民亂)의 주모자 이필제(李弼濟)가 조령에서 반란을 꾀하다 잡히게 되었다(22).

    날뛰는 정감록(鄭鑑錄)
  정덕기라는 자는 평안도 삭령(朔嶺) 사람으로 지술(地術 : 地師)하는 박윤수(朴允垂)를 선생으로 모시고 다니며 그의 말을 믿고 있었다. 때마침 병인양요가 일어나 민심이 소란하자 박윤수는 이러한 기회에 한몫 단단히 볼 셈을 대고 각지로 다니면서 “새세상이 가까워졌다. 병인년에는 큰 병이 돌아다니고 무진년에는 무진(無盡) 애를 쓰다가 기사년(己巳年)에는 모두 기사(飢死)한다. 죽기 전에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러한 수작을 하며 사람을 속이었다.
  그의 신임자(信任者) 정덕기는 자기가 정가였으므로 은연중 큰 기대를 가지고 박윤수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야 어렵지 않소. 장차 심산(深山)이나 광야에서 살아야 끝날을 보는 것이요.” “끝날만 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 끝날 때가 바로 새나라가 되는거요.” “그럼 누가 새나라의 주인이 됩니까?” “그야 정씨지요” 정씨라는 바람에 정덕기는 마음이 흐뭇하여 “선생님 그러면 이몸도 거기 한 몫 낄 수가 없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지요. 내 늘 그대의 상을 살펴본 즉 훗일 대성(大成)할 기상이 나타나 있오. 우리 같이 세상을 구제 합시다.” “정말이오니까?” “물론이외다. 어찌 거짓이 있겠오.” “그러면 언제쯤이나 왕위에 오르겠오.” “우선 급한 것이 돈이요. 이것이 생긴 후에 비로소 성취될 것입니다.” “역시 돈이 필요하군요.” 
  이때부터 지사(地師) 박윤수와 정덕기는 호남·호서지방으로 돌아 다니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많은 돈을 모아 들였다. 그중에도 호남의 부자들은 자진하여 돈을 가지고 오는자까지 생기었다. 말하자면 새나라의 벼슬을 미리 팔아먹는 셈이다. 이런 기맥을 알아차린 전주 사람 윤내형(尹乃亨)은 박윤수의 심복이 되어 불량배를 모아 도당을 만들었다. 
  무진년 8월이 되자 경복궁 건축 때문에 거의 강제로 돈을 거두어 들였다. 이 때문에 민심이 소란할 때 박윤수, 윤내형 등은 “얼마후 남쪽에서 정씨가 나와 나라를 바로 잡는다.” “그때가 되면 모두 살기 좋다. 잠시 참고 기다려라.” 하며 민심을 더욱 부채질 하였다. 대원군은 자기의 심복 천가, 하가, 장가, 안가 네 명을 놓아 그 유언의 출처를 밝히게 하였다.
  이런 것도 모르고 정덕기는 술집에서 정가가 나와야 새세상이 된다고 흰소리 하다가 잡혔다. 사건은 점차로 알려지게 되어 정덕기의 도당들은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정씨 출현의 정감록 광신자는 여기서 제일차로 희생 되었다. 정감록을 믿고 그것을 한번 써먹어 볼 생각을 가진 사람은 유식자(有識者)층이다. 그중에도 유생들이 자기들의 불평을 토론하던 서원이 없어진 후부터는 어떻게 하든지 대원군은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무서운 탄압을 가하였으므로 유생들은 그들의 불평을 농민들에게 돌려 폭동을 선동하였다.
  기사년(己巳年 ; 고종 6년) 전라도 광양현(光陽縣)에서 유생 민회행(閔晦行), 전체문(田替文), 한경삼(韓敬三) 등은 농민을 불러 놓고 역시 선동하고 있었다. “나라에는 가짜 왕인 대원군이 마음대로 분부를 내려 백성을 긁어 먹고 있다. 그 앞잡이 노릇을 하는 지방의 수령들부터 없애야 한다” 멋도 모르고 농민들은 무슨 수작인지 몰라 어리둥절 할 때 “전에는 환곡(還穀)이라 하여 백성들을 긁었지만 지금은 사창(社倉)을 만들어 전과 같이 농민을 괴롭힌다.” 그래도 농민들은 곧이 듣지 않고 “사창은 우리끼리 만들어 경영하는데 수령이 무슨 상관이 있오.” “그렇지만 속으로 긁어 먹는다.” “모르겠는데요”
  사실 사창은 농민들을 긁어 먹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유생들은 할 수 없이 자기들 만의 도당을 만들어 가지고 70명밖에 안되는 인수를 선동하여 광양읍을 쳐들어 갔다. 동헌에서 집무하던 현감 윤영신(尹榮信)은 불시의 침입으로 얼떨결에 도망갔다. 그틈에 도당들은 인부(印符)를 훔치고 군기고를 부시어 장총을 가지고 아전을 위협하여 사창을 파괴한 후 어린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도 농민들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며 반환하고 말았다. 윤영신은 이 소식을 듣고 다음날 아전과 포교를 대동한 후 현청사를 쳐들어가 폭도를 전부 잡았다. 백성들이 움직이지 않는 폭동은 즉시 중지되고 말았다. 기사년(己巳年 : 고종 6년) 10월에 경상도 고령읍 근처 강변 박만원(朴晩源)의 정자에는 주성칠(朱成七), 성하첨(成夏瞻), 정만식(鄭晩植)이 모여 세상돌아가는 형편을 얘기하고 있었다. 
  먼저 주인 박만원이 여러 사람을 돌아보며 “근자 대원군이 천주학 교도들을 탄압한다는데 세상의 인심이 어떠하오.” “그야 언제는 탄압하지 않습니까? 천주학장이 뿐인가요. 아무나 탄압하지요.”  주성칠이 못마땅한 듯이 대답하였다. “그야 자기를 반대한다고 하는 것이겠지. 대원군을 추어주면 말을 잘 듣겠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추어 줍니까?” “덮어 놓고 잘한다면 되지 않은가.” “아 천하의 유생을 없애고 백성을 못살게 하는 자를 추어 주어요.” 이때 좌중에 앉았던 정만식이 나서며 “여보, 아무리 보아도 이씨의 왕조는 끝날 때가 되지 않았소.” “그렀습니다.” 이 말에는 모두 찬성한다. 
  주성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송도 왕씨는 500년이 조금 못되어 망했고, 이씨는 500년이 차야지 되는 모양이야.” “아니지 이제 말할 때가 되었지. 송도 말년에 불가살이(不可殺爾)가 나와 망쳤고, 이씨 말년은 정진인(鄭眞人)이 나와 망친다고 하지 않았오” 정만식이 무슨 예언이나 하듯 좌중을 두루 살피며 다시 자기의 두 손을 거두어 여러 사람 앞에 내보인다. 양쪽 팔에는 검은 점이 일곱 개 뚜렷하게 나타나 북두칠성을 그리고 있다. 
  이번에는 성하첨이 나서며 “옛날 한나라 유방(유邦)도 몸에 일곱별이 있어 천하를 통일 하였다 하오. 지금 정만식의 팔에 나온 그 점은 장차 우리나라를  통치할 징조요.” “그렇소이다.” 모두 찬성하였다. 정만식은 빙그레 웃고 “모든 것은 여러분이 만들어 낼 탓이요. 어찌 나 홀로 천하를 만들겠오” “그렇고 말고요.” 주인되는 박만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정진인을 얻었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주는 증거요. 오늘부터 정진인을 선춘군(宣春君)이라고 합시다.” “좋은 말씀이요. 모두 선춘군의 장래를 위하여 큰 절을 올립시다.” 주성칠의 선동으로 모두 일어나 큰 절을 올리었다. 정만식은 벌써 무엇이 된 듯이 기뻐하며  “여러분이 미미한 사람을 천거해 주시니 감사하오이다. 다같이 새나라를 위하여 힘쓰도록 합시다.”
  마치 무슨 결사나 하듯 서로 나이까지 따져가며 형제의 의를 맺었다. 정감록에 대한 매력은 이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당시 글자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금과옥조 같이 여기었다. 얼마후 주인 박만원이 술상을 가지고 들어와  “오늘 우리들이 결의 형제하여 진인을 모시고 큰일을 계획하였으니 그대로 있을 수 있오. 모두 축배를 듭시다.”  술상에는 어느새 차렸는지 진수성찬이 즐비하게 놓였다. 주인이 먼저 선춘군에게 술을 부어 올리며 “진인이 현세에 나타났으니 도탄에 든 백성을 구하시오.” “감사하오.” 하며 큰 잔의 술을 받아 한숨에 마시었다. 
  계속하여 여러 사람들도 돌아가며 큰잔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시었다. 술에 약한 사람들은 벌써 취하여 떠들어 댄다. 그중에 간사격인 주성칠이 여러 사람에게  “우리들이 선춘군을 중심으로 모였으니 대의명분의 깃발을 선명히 하여 서로 최후까지 협력하겠다는 맹세를 합시다.” 하자 모두 찬성하였다. 주성칠은 즉시 준비했던 지필묵을 꺼내 맹세문을 쓴다. “기사년 8월 우리들은 선춘군 정만식을 추대하여 새나라를 만들 때까지 서로 사생을 같이할 것을 맹세한다.”
  간단한 말을 쓰자 각각 자기의 이름을 쓰고 서명하였다. 계속하여 사방의 뜻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격문을 쓴다.  “나라는 가와(가王)이 정권을 잡은후 백성들은 날로 도탄에 들어 민생이 곤란하여 각지에 개걸(皆乞)하고 돌아 다닌다. 이것을 구할 사람은 진인(眞人)이라야 된다. 전부터 진인이 해도출(海道出)이라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는 진인을 모시고 제도중생코자 기치를 높이 들었다. 천하의 유지들은 이 뜻을 받들어 새로운 정씨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자. 연 월 일”
  이러한 격문을 쓴 후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다. 모두 잘 되었다고 찬성한다. 다시 주석은 어울려 들어가 제각기 취흥에 못이기듯 노래를 부르며 질탕하게 놀았다. 이때부터 주성칠은 선춘군을 모시고 각지를 돌아 다니며 자기들의 동료를 모집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진인이 해도에서 나오셨다. 미구에 새나라가 생긴다.” “새나라에서는 백성들을 살기 좋게 해준다.” “새나라는 양반 상놈의 차별이 없다. 모두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한다.” “부역도 없고 높은 세금도 내지 않는다.”
  허무맹랑한 수작을 하며 다니었다. 때마침 광양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소문을 듣고 주성칠은 덕산으로 내려가 정홍철의 집을 찾았다. 이 자는 전부터 주성칠의 친구이다. 뜻밖에 주성칠이 찾아들자 정홍철은 반가이 마중나와  “오래간만일세. 그동안 무엇했나. 어서 들어가세.” 앞장 서 자기방으로 안내 하였다. 원래 주성칠은 동학도로서 본명은 이필제이다. 그는 동학의 탄압이 심해지자 철종때 각지에서 일어나는 백성들의 폭동을 조종하고 기회를 잘보아 요리 조리 빠져 나갔으므로 아직까지도 남아 또 다시 농민 폭동을 계획코자 하던 중이다.
  정홍철도 그전 동지로서 이번에 영남 일대가 소란하자 전에 불평을 품은 유생들을 조종하여 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리게 하고 정치를 비평하도록 하였다. 이필제는 정홍철의 아늑한 방으로 들어가 같이 다니는 정만식을 소개한다.  “이분이 선춘군이시어 미구에 우리나라 창생을 구하실 분이어. 인사드리게.” “네 그러시오.” 정홍철은 이필제가 시키는 대로 일어나 절하였다. 선춘군은 그대로 앉아 절을 받았다. 이필제는 정홍철에게 그동안 고령서 서로 사생을 맺은 얘기를 하고 정만식이 팔에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어 금세의 진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아 그러십니까? 선춘군은 그럼 어디 그 점을 보여 주십시요.” 그 말을 따라 선춘군은 양쪽 팔을 내보였다. 점은 그동안 없어져 7성이 5성으로 되었다.  “북두칠성이 5성으로 변했군요.” “5성이 더욱 좋은 것입니다.” 정만식은 억지로 변명하였다. 이필제는 조금도 어색케 생각치 않고  “그까짓 5성이나 7성이나 상관있오. 누구던지 내세우면 되는 것이 아니오.”  “그렇소이다.” 여기서 세 사람은 다시 전번 광양에서 일어난 폭동사건을 생각하며 백성들이 전과 같이 봉기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야만 일어나게 할까 궁리에 몰두하였다.
   “대체 유생들은 입으로는 큰 소리를 하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큰 탈이오” 정홍철이 그 부근 유생들의 움직임을 말하였다.  “그게 걱정이지 다른 것이 있나. 역시 백성을 움직여야 해.” 이필제는 혼자말 같이 중얼거렸다. “그럼 선춘군을 선전관으로 만들고 자네가 순무어사(巡撫御史)가 되어 지방으로 다녀보게.” “그렇게 해볼까” “큰 효과가 있을 것일세” 다음날 정만식은 선전관이라 자칭하고 이필제는 순무어사로 가칭하여 먼저 남해현에 나타났다.
  현감은 정말 선전관이나 어사가 나온줄 알고 쩔쩔매면서 대접을 융숭하게 하였다. 여기서 이필제는 남해사람 정재영을 시켜 병정을 모집하여 우선 현감을 위협하여 금전을 모아 들였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현감은 즉시 경상도 관찰사에게 통보하였다. 이것도 모르고 정만식과 이필제는 진주로 모여 다시 진주폭동을 일으킬 공작을 하다가 병영에 잡히었다. 
  선춘군이라고 자칭하던 정만식은 여기서 명이 진(盡)했고, 꾀많은 이필제는 몰래 탈옥하여 달아났다. 그래도 뒤에서 똧아오는 듯 하여 영해부로 들어가 난민 수백명을 선동하여 보기좋게 부사 이정(李政)을 죽이고 단양으로 달아났다. 때마침 신미양요가 일어나 민심이 더욱 소란 하였다. 이필제로 보면 활동하기 가장 좋은 때이다. 단양에는 정기현이라는 정감록 신자가 있어 일찍이 월정사의 중 초운에게 관상까지 보았다. 그때 초운은  “난리에 진인은 단양에서 나올 것이요. 전진사(鄭進士 ; 지현)야말로 계룡산 주인이시오. 삼백일만 기도하면 이땅의 주인이 되실 분이오”
  집에 돌아가 후원에 기도소를 만들어 놓고 밤중이면 몰래 기도를 드렸다. 이럭저럭 삼백일이 되자 어느듯 이필제가 찾아왔다. 초인사를 마친후  “나는 영해의 패군지장이요. 귀하는 계룡산 주인이라 하는데 좋은 도리가 없겠오.” 정기현이 잠시 주저하며  “이씨 말년에 정씨가 계룡산에서 나온다는 말은 세상이 다 알지 않소. 바로 내가 계룡산에서 나온 사람이오” “그러시면 지금 세상을 건질 때가 된게 아니겠오.” “그러하오. 나를 추대하여 세상을 구제하도록 하시오.” “나야 벼 백석이나 하오.” “돈은 얼마나 됩니까?” “몇백냥 되지요.”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새재(鳥嶺) 초곡(草谷)에서 거사합시다.”
  정기현은 이필제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돈을 내주었다.  “감사하오. 우리들은 우선 영남의 불평 유생을 모아 군사를 얻은 후 중원까지 쳐들어 가야 하오.” 뜻은 매우 커 과대망상 증세에 걸려 한번에 중원천지까지 쳐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8월이 되자 이필제의 무리들은 새재로 모여 들었다. 처음에는 수천명의 군중을 얻은 듯 하였으나 막상 모여든 군중은 불과 50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래 가지고는 큰일을 할 것 같지 않아 이필제는 더 군중을 모으려고 할 때 상주와 안동의 군졸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일당을 일망타진 하였다. 정감록을 광신하는 바람에 도처에서 정가들이 수난을 당한 셈이다. 대원군의 철저한 정치는 이런곳에서도 넉넉히 그의 괴완(怪腕)을 발휘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같은 내용이 천도교 창건사를 인용한 다른 기록(23)에서는 이필(李弼)이 순도(殉道)한 대신사의 명예를 찾기 위해 1871년 4월 29일 문경부중을 공격하여 부사(府使)를 잡아 처형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당시 문경은 조재순(趙在淳)현감이었고, 그해 6월 금구(金溝)현령으로 이배(移拜)되고(24) 공조정랑(工曹正郞)에서 7월에 도임(到任)한 김영식(金英植)현감이 8월에 파출(罷黜)되었을 뿐(25) 처형된 현감은 없다. 주모자 이필제가 이필로 성명이 다르나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실패로 끝난 1871년의 의거(義擧)
  괴로움을 받던 동학교도간에는 그들의 고난을 덜어주고 반역자라고 처형된 대신사의 오명을 씻기 위하여 강력한 행동을 취하는 기운이 높아갔다. 그러나 신사 최시형은 대체로 왕에 대한 충성과 공공연한 정치활동에 불개입하므로 창도자의 기본원칙에 따라 교를 잡고 나아가는데 성공했다. 
  1894년의 동학혁명의 발발에로 사태가 급속히 진전되던 1892년 이전인 1871년 이필(李弼)이란 젊은 동학도가 신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지방에서 거사를 했다가 실패로 돌아간 주목할 만한 예외적 사실이 되었다.
  이필은 최시형과 최재우가 모두 살았던 당시 대신사가 동학을 세운 지역인 경상도의 한고을 문경태생이었다. 1863년 대신사 자신이 이필을 동학에 입도시켰고 그 포교에 종사케 한 바 있었다. 한반도 서남부의 지리산 지방에 도피해 있으면서 그는 대신사의 처형을 알게 되었고 설욕하기로 맹세했다. 그는 당국을 피해 있어야 했고 또한 피해있던 신사 최시형의 거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약 6년이나 그 맹세를 실천하지 못했다. 
  1870년 이필은 신사의 거처를 탐지하고 동학도로서의 그 자신의 경력을 자세히 알리고 순도(殉道)한 대신사의 명예를 되찾으려는 봉기에 관한 계획과 실천에 대해서 신사에게 조언과 지도를 하여 주기 바라는 글을 보낸 일이 있었다. 신사는 그를 기억할 수 없었고 또 배반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여 그 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1871년 이른봄에 이필은 새로이 신사와 접촉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그의 연락원은 5회나 면회가 거절됐다. 마침내 신사 자신이 이필이 기거하던 영월에 연락원과 같이 갔다. 그는 신사를 황공히 맞아 들였고, 대신사의 억울한 오명을 씻기 위한 계획을 지지해 달라고 했다. 
  무장의거에 대한 신사의 태도는 그가 이필에게 준 다음과 같은 답변에 간곡하게 표현되어 있다. “선사를 위하여 설욕코자 함은 정의로서 당연한 일이다. 동문 제자인 우리들은 한가지로 느끼는 바이다. 그러나 대사에는 적당한 때가 있고 운이 있으니 나는 아직 그 시기가 아닌줄 생각한다. 그 이유인즉 선사께서 처형된 후 일반 도인의 도심이 뿌리를 아직 얻지 못하였고, 세상 인심이 또한 우리도에 대하여 이해를 갖지 못한 이때에 있어 경솔히 행동을 취하면 이는 때 아닌 때에 종자를 심는 것 같으니 반드시 실패를 볼 것이요. 만일 오늘날에 있어 다시 실패를 거듭한다면 대도의 기초를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것을 잘 명심하여 훗일을 기다림이 어떠하오.”
  이필은 신사의 충고를 듣지 아니하고 그의 출생지인 문경으로 급히 떠났으며 순도한 창도자의 제7주년 기일인 1871년 4월 29일 그곳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그는 500명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문경부중을 공격했다. 그들은 부사를 잡아 심문하고 참형에 처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무기를 탈취했다. 그리고서 이필은 그의 군대를 재조직하여 인근의 상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인근 지역의 지방관리들로 된 혼성군에게 패배했다. 이필 군대의 100여명이 체포되었으나 그 자신은 도주했다. 1871년 초가을에 이필은 정기현 등의 협력을 얻어 다시 봉기하여 문경을 공격했다. 이 작전에서 그는 체포되어 참형을 당했고 그 거사는 신사가 예언한 대로 완전히 분쇄되었다.

  1925년 이화령에 신작로(新作路)를 개척하여 차로(車路)가 된 후 조령로는 소로(小路)로 변하여 등산객이나 찾는 정도이던 것을 1975년부터 당시 문경군에서 폭 5m로 조령의 정상부인 충북 경계까지 11㎞를 확장하고 주변을 조경하였으며, 충북 괴산군에서도 같은 기간동안 원풍리에서 정상까지 확장 개설을 하였다.
  ※ 도로개설 및 조경공사 내역 : 기재생략

 

<註①> 聞慶縣誌(문경현지) 古蹟(고적) 및 鄕土史話(향토사화) 鳥嶺條(조령조)
<註②> 聞慶縣誌(문경현지) 古蹟(고적) 및 鄕土史話(향토사화) 鳥嶺(조령)에 관련된 史話
          (사화) 第三話條(제3화조)
<註③> 聞慶縣誌(문경현지) 關防鳥嶺條(관방조령조)「
鳥嶺祖於鷄立嶺而至達項分爲二枝東
           峙爲主屹山西이爲鳥嶺石角참巖氣勢磅박相對控扼自作城郭且自嶺背北抵忠州之獐項
           始出렬
南至本縣之犬灘始得平原其間百餘里疊장줄율 石路崎嶇…
조령조어계립령
           이지달항분위이지동치위주흘산서이위조령석각참암기세방박상대공액자작성곽차자
           령배북저충주지장항시출렬미남지본현지견탄시득평원기간백여리첩장줄율 석로기
           구…」

<註④> 新增東國與地勝覽卷第二十九 聞慶縣題詠條(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29 문경현제영
           조) 主屹靈祠(주흘영사)/串岬棧道(관갑잔도)/窓外梧桐(창외오동)/庭前楊柳(정전양
           류)/蒼壁丹楓(창벽단풍)/陰崖白雪(음애백설)/烏井鐘樓(오정종루)/龍潭瀑布(용담폭
           포)
<註⑤> 聞慶縣誌(문경현지) 樓亭(누정) 交龜亭條(교귀정조)「
在鳥嶺龍湫上觀察使交印處成
          化年間縣監愼承命所建
재조령용추상관찰사교인처성화년간현감신승명소건」
국역 신
          증동국여지승람Ⅳ 문경현 누정 교귀정 「
서쪽으로 27리 조령 용추 위에 있는데 신구
          감사가 印을 교환하던 곳이다
.」
<註⑥> 聞慶縣誌題(문경현지題) 交龜亭條(교귀정조)
<註⑦⑧> 新增東國與地勝覽卷第二十九 尙州牧樓亭(신증동국여지승람권제29 문경현제영
           조)
<註⑨> 達句伐(달구벌) 傳說(전설) 達城判官(달성판관)의 名判決條(명판결조)
<註⑩> 의병장 중봉 조헌 P119
<註⑪> 
1706년에 세운 충렬비(忠烈碑)는 몇차례 이건(移建)으로 주흘관(主屹關) 뒤에 있
           다.

<註⑫> 의병장 중봉 조헌 P182~183
<註⑬> 
說話(설화) 韓國의 歷史 卷4(한국의 역사 권4) 임진왜란 赤身將軍 李鎰條(적신장군
           이일조)

<註⑭> 聞慶郡誌(문경군지) 고적 및 향토사화 조령에 관련된 사화條
<註⑮> 
說話(설화) 韓國의 歷史 卷4(한국의 역사 권4) 大北과 小北의 싸움(江邊의 七友라는
           부랑배들)條

<註
(16)>倡義錄 卷四(창의록 권4) 聞慶義兵軍門坐目(문경의병군문좌목) 軍門日記(군문일
            기)「
戊申三月十七日聞淸州賊變
무신삼월십칠일문청주적변」 
<
(17)>上書「二十二日本官□軍以 本縣 兵留守嶺城之意報巡營이십이일본관0군이 본현 병
           유수령성지의보순영」

<註
(18)>




          - 네이버 블로그 <문경 향토 역사관> 산벗 박창희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