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4. 14:33ㆍ나의 이야기
Ⅴ. 새재와 문경의 유적 > 3. 기타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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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향교(聞慶鄕校)
문경읍 교촌리 322번지에 있으며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집으로 28평인데 1975. 2. 5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 건조물 69호로 지정됐다.[현재는 문화재자료로 지정:문화재자료 제132호,1985. 8. 5지정] 그 외에도 명륜당(明倫堂 28평), 동제(東齊 14평), 서재(西齊 14평), 제기고(祭器庫 6평), 삼문이 950평의 대지에 세워져 있다.
1392년(태조 원년)에 제도(諸道)의 안찰사(安察使)게게 명하여 학교의 홍패(紅牌)로서 지방관 고과(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육의 쇄신을 기하였으며, 여기에 있어 부목군현(府牧郡縣)에 한 개소씩 건립하였고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으며, 부목(府牧)에 90인, 도호부(都護府)에 70인, 군(郡)에 50인, 현(縣)에 30인의 유생(儒生)을 두고, 교수(敎授)와 훈도(訓導) 각 1인(小郡은 訓導)을 두었다.
여기서 수학(受學)한 후 1차 시험에 합격한 자는 생원(生員)의 칭호를 받고, 복시(覆試)에 합격한 자는 진사(進士)의 칭호를 받아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부여 했고, 하급관리로 등용되고 문과(文科)시에 응시하여 고급관위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중종 이후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으로 되고 서원(書院)의 발흥(勃興)으로 점차 쇠미하여 졌다.
고종 31년 과거제도 폐지와 함께 향교는 이름만 남아 문묘(文廟)을 향사하게 됐는데,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유현(十八儒賢 : 弘儒 侯薛聰, 文昌公, 崔致遠, 文成公, 安裕, 文忠公, 鄭夢周, 文敬公, 金宏弼, 文南公, 鄭汝昌, 文正公, 趙光祖, 文純公, 李 滉, 文成公, 李 珥, 文元公 李彦迪, 文正公, 金麟厚, 文簡公 成 渾, 文元公, 金長生, 文烈公, 趙 憲, 文敬公, 金 集, 文正公 宋時烈, 文正公 宋浚吉, 文純公 朴世采)을 배향하고, 춘추향제(春秋享祭)를 올리고 있다.
교안(校案), 교지(校誌)가 없어 유래를 알기 어려우며, 구향안(舊鄕案) 잔록(殘綠)에 의하면 선조 임란후 중수한 기록이 있고, 문경군 선생안에 의하면 숙종조 때인 1676~1679 사이에 명륜당을 짓고, 1689~1693년 사이에 동서재 중건이 있었으며, 헌종 때인 1838~1841년 사이에 대성전 보수가 있었고, 1921~1923년 사이에 향교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8년에 동서제(東西齊)가 보수되고 69년에 대성전 단층을 올리고(385천원), 종제를 개축(270천원)했으며, 70년 제기고(祭器庫) 및 담장보수(100천원), 71년 관리사 보수(100천원), 78년에 계단보수(1,000천원)를 했다.
경운루(慶雲樓)
문경읍의 옛날 객관(客館) 동남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이지강(李之剛)과 함부림(咸傅霖)의 시만이 전한다.
郡樓依疊장(군루의첩장) 고을의 누각이 겹겹이 싸인 봉우리에 의지하였으니
鳥道幾沿廻(조도기연회) 날아가는 새의 길이 몇 번을 따라서 돌았던고
鳴咽綠階水(명인녹계수) 뜰가에 돌아드는 시냇물은 흐느끼는 듯 하고
爛班滿院苔(난반만원태) 마당에 얼룩진 것 가득하게 낀 이끼로다
漁燈渡溪去(어등도계거) 고기잡이 등불이 시내를 건너가고
樵唱出雲來(초창출운래) 나무꾼의 노래소리 구름속에서 나오는구나
詩興迷多景(시흥미다경) 시흥이 많은 경치에 휘둘려
提毫不敢裁(제호불감재) 붓을 들고도 감히 쓰지 못한다. - 이지강 시 -
※ 이지강(李之剛) : 경주사람이고 1407년(태종 7)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시호(諡號)를 문숙(文肅)이라 함.
雪盡泉聲細(설진천성세) 눈 없어지니 흐르는 시냇물 소리 가늘고
烟消樹影回(연소수영회) 연기 사라지니 나무 그림자 돌아온다
樓高위起栗(누고위기율) 누각은 높아서 살에 소름이 돋고
屋古瓦封苔(옥고와봉태) 집은 낡아서 기와에 이끼가 끼었네
白日依山靜(백일의산정) 밝은 해는 산에 의지하여 고즈넉하고
淸風動地來(청풍동지래) 맑은 바람은 땅을 흔들어 불어 온다
□欄千萬意(□란천만의) 난간에 의지하여 천만가지 생각에 잠겼으니
臨事不知栽(임사부지재) 일에 임하여 가질 바를 모르네
교귀정(交龜亭)
문경읍 상초리 조곡관(鳥谷關)과 주흘관(主屹關)의 중간지점인 용연(龍淵,龍湫) 위에 있다. 체임(遞任)하는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의 교인처(交印處)로 성종조(成宗朝) 신승명(愼承命 : 거창인,성종 갑술-1484 문경현감)이 건립했으며, 없어진 것을 1999년 6월에 복원했다. 김종직(金宗直)의 시가 전한다.
交龜亭上방乾坤(교귀정상방건곤) 교귀정 위에서 하늘 땅을 업신여겼더니
斗覺霜華點발根(두각상화점발근) 서리빛 구랫나루 흰빛이 점쳐 옴을 깨달았다.
一水宮商風自激(일수궁상풍자격) 한 물줄기 음악소리나게 바람이 스스로 몰아치고
千巖圖畵日將昏(천암도화일장혼) 많은 바위 그림 같은데 해가 곧 지겠구나.
詩因瀉景窮飛鳥(시인사경궁비조) 시에는 경치만 쓰므로 인해 날아가는 새에 궁하였고,
淚爲傷懷讓斷猿(누위상회양단원) 눈물은 쓰라린 회포되니 원숭이도 사양하고 끊는구나.
南路己소雙斥후(남로기소쌍척후) 남쪽길 이미 어두워 쌍척후도 사라졌으니
月明今夜宿何村(월명금야숙하촌) 달 밝은 오늘밤사 어느 마을에서 머물꼬
사군정(思君亭)
퇴계의 옛 유람지인 문경읍 갈평리에 정자를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없어지고 퇴계의 시만이 전한다.
主屹山頭雲漠漠(주흘산두운막막) 주흘산 머리에는 구름이 넓고도 아득한데
觀音院裡雨浪浪(관음원리우낭낭) 관음원 안에는 비가 내리는구나
却憐關嶺雖重閉(각련관령수중폐) 어여쁘다 관과 영이 비록 무겁게 닫겼으나
不隔思君一寸腸(불격사군일촌장) 임군을 생각하는 한치 창자는 막지 못하리
비홍정(飛鴻亭)
문경읍 마원리 정곡 수석(水石) 절승지에 병옹(病翁) 신필정(申弼貞)과 여봉(여峰) 신필성(申弼成)이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한 곳이나 지금은 유지만 남아 있다.
昔人已逐飛鴻去(석인이축비홍거) 옛 사람들 이미 나는 기러기 쫓아보네
遺跡空餘溪上亭(유적공여계상정) 남긴 자취는 공연히 시내위 정자에 남았네
古木寒天風折折(고목한천풍절절) 옛나무 차가운 하늘엔 바람도 절절하고
荒原落日煙冥冥(황원낙일연명명) 거친 언덕 지는 해에 연기만 어둡고나
層岩壁立臨明鏡(층암벽립임명경) 층암절벽이 밝은 거울에 임해섰고
碧水寒流擁翠屛(벽수한류옹취병) 푸른 물 차갑게 흐르니 푸른 병풍 둘렀네
倚石沈吟林色暮(의석침음임색모) 돌에 의지하여 조용히 읊는데 숲의 빛이 저물고
遙看孤鶴下沙洲(요간고학하사주) 멀리 바라보니 외로운 학이 물가에 나리네
※ 병옹 신필정(病翁 申弼貞) : 1656. 3. 17~1759. 2. 13. 자는 원백(元伯), 호는 홍정(鴻亭) 또는 병옹(病翁)이라 하며, 좌승지(左承旨) 상철(尙哲)의 증손으로 형 여봉과 같이 학문을 닦았다. 노소남북의 사색당에서 추앙하는 인품과 유사(儒士)로 추천 했으나 일체 나가지 않고 이인좌의 난을 방어하기 위해 고모성에서 아들 사일(思日)과 창의하였고, 훈몽역의(訓蒙易義) 10권을 저술했으며 죽은 후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 증직되었다.
※ 허 적(許 적) : 1610년~1680년. 자는 여거(汝車), 호는 묵제(默齊), 본관은 양천(陽川), 조선중기의 정치가, 남인중의 탁남(濁南)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내고 아들 견(堅)의 역모사건으로 처형되었다.
조개정(조개亭)
문경읍 마원리 정곡(井谷)에 효자 조형(趙형)이 지었으나 지금은 훼손되고 없다.
경송정(景松亭)
문경읍 갈평리에 있으며, 진성이씨 송안군(松安君) 자수(子修)의 유적지에 후손과 유림에서 1958년 2월에 정자를 건립했다.
갈은정(葛隱亭)
문경읍 갈평리에 있으니 진성인 이대호(李大鎬)의 과축지(과軸地)로 아들 낙철(洛철)이 1960년에 건립하였다.
先君當日点玆山(선군당일점자산) 선군께서 당일에 이 산을 점쳐
寓慕果深夙夜間(우모과심숙야간) 부처 생각함이 더욱 일찍이 밤사이 깊으다.
地□蓍龜功不억(지□시구공불억) 땅은 시초와 거북에 맞으니 공에 구애 없으며
身操呑□事無閑(신조탄□사무한) 몸이 삽가래 가지니 일 한가함이 없어라.
方塘水暖金鱗泳(방당수난금린영) 방당에 물 따시니 금비늘 놀고
叢竹烟沈宿鳥還(총죽연심숙조환) 떨기 대에 연기 잠기니 자는 새 돌아오다.
敢曰微誠遺訓遂(감왈미성유훈수) 감히 가로되 적은 정성 끼친 훈계 이루웠다할까
潛光隱德揭미顔(잠광은덕게미안) 잠긴 빛 숨은 덕을 미안에 걸었노라.
요성역(요城驛)
문경현의 동쪽 4리(지금의 요성리)에 있었으며, 유곡역과는 40리로, 유곡로에 속한 18역(요성, 덕통, 수산, 낙양, 낙동, 구미, 쌍계, 안계, 대은, 지보, 소계, 연향, 낙원, 상림, 낙서, 장림, 낙평, 안곡) 중의 하나이다. 고려 때는 22개도에 521개 역으로 이루어졌으며, 문경은 상주도(尙州道)에 속했고 상주도에 21개 역이 있었다. 조선조에는 경기도에 연서도(延曙道) 등 5개도에 3등마 352필, 이졸(吏卒) 3,570명을 배치하고 충청좌도 연원도(連原道) 등 3개도에 3등마 478필, 이졸 8,704명을 배치, 충청우도는 금정도(金井道) 등 2개도에 3등마 374필, 이졸 10,466명 배치, 전라좌도는 벽사도(碧沙道) 등 4개도에 3등마 274필, 이졸 10,797명 배치, 전라우도는 청암도(靑岩道) 등 2개도에 3등마 272필, 이졸 6,349명 배치, 경상좌도는 황산도(黃山道) 등 6개소에 3등마 787필, 이졸 18,783명, 경상우도는 자여도(自如道)에 14개역, 소촌도(召村道)에 15개역, 유곡도(幽谷道)에 18개역, 사근도(沙近道)에 14개역, 김천도(金泉道)에 19개역 모두 3등마 900필, 이졸 21,483명을 배치했다.
강원도는 은계도(銀溪道) 등 4개도에 3등마 500필, 이졸 9,214명, 황해도는 금교도(金郊道) 등 3개도에 221필, 이졸 5,316명, 평안도는 대동도(大同道) 등 2개도에 301필, 이졸 4,351명, 함경도는 고산도(高山道) 등 3개도에 925필, 이졸 32,391명을 두어 전국에 말 5,287필, 이졸 131,290명이 뛰고, 이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역전(驛田)을 해먹었으며, 숙종 때 역마가 퇴폐해져 영조 때는 각 역에 말이 없다시피 되었다.
요성역에는 대마(大馬) 2필,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6필, 역리(驛吏) 138인, 노(奴) 18구(口), 비(婢) 7구(口)를 두었으며① 본역인 유곡역에는 대마 2필, 중마 5필, 복마 7필, 역리 1,238인, 일수(日守) 27명, 노(奴) 315구(口), 비(婢) 53구(口)를 두었다.②
파발(把撥 - 撥站)은 선조 때 임란 당시 역마가 거의 없어져서 변방에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 갑자기 만든 것으로 25리마다 한참(站)을 두고 매참에 발장(撥將) 1명, 군사 5명, 말 5필을 두었고, 또 보발(步撥)이라 하여 20리에 한참씩 두었다. 요성역 발참(撥站)에는 장(將) 1인, 군 30명을 두어 북쪽으로는 충북 연풍의 안보역(安保驛)에 전하고 남쪽으로는 유곡에 전하도록 했으며, 유곡역 발참도 장 1인, 군 30명으로 남쪽으로 덕통역에 전하도록 되어 있었다.③
서발(西撥)은 기발(騎撥)로 의주(義州)까지이고, 북발(北撥)은 보발로 경흥(慶興) 아오지까지이고, 남발(南撥)은 보발로 광주(光州)의 신천참(新川站)에서 동래까지 34참으로 되어 있다. 보발이 경비가 적게 들고 간편하였으며, 고종 32년 파발참에 없애고 우체사를 두어 농상공부가 관할할 때까지 계속되었다.④ 지금은 터도 남지 않았지만 이규보(李奎報)와 김군수(金君수)의 시가 전해온다.
<이규보의 시>
幽谷一□中酒宿(유곡일□중주숙) 유곡의 한밤을 술에 취하여 자고
요城半日解참留(요성반일해참유) 요성에서 한나절 멍에멘 말을 풀고 머문다.
歸來阮籍空長□(귀래완적공장□) 돌아온 완적 하염없이 긴 휘파람만 불고
寂莫相如故倦遊(적막상여고권유) 쓸쓸한 상여는 짐짓 벼슬에 싫증났네.
郵使送迎何曰子(우사송영하왈자) 우정의 아전들 보내고 맞이 하는 것 언제나 끝날 것이며
使華來往幾時休(사화래왕기시휴) 사신들의 내왕이 어느 때나 멎으려는가.
惟餘幸是閑行者(유여행시한행자) 오직 나같이 한가로이 다니는 이만이 다행이구나
來不煩人去自由(내불번인거자유) 와도 사람을 번거롭히지 않고 가기도 마음대로일세.
<김군수의 시>
去歲楓欲丹乘초赴南國(거세풍욕단승초부남국) 지난해 단풍이 붉으려 할 때 초헌타고 남국으로
갔더니
今年柳初黃返패朝北極(금년유초황반패조북극) 올해는 버들이 누르니 시작할 무렵에 깃발을 돌리어
북극(임금)에 조회 드린다.
萬物化無常四時行不息(만물화무상사시행불식) 만물은 변화하여 덧없고 사시는 가고가서 쉬지 안
는다.
溪流似我心澄淨唯一色(계류사아심징정유일색) 시냇물이 내마음 같아 맑고 맑아서 한빛이로구나.
원 지(院址)
원(院)이란 지금의 여관과 같았으며 화봉원에서 고려의 유희(兪曦)가 시를 읊은 것을 보아 고려 때부터 원이 있었고,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나라의 들에는 10리 길에 여(廬:초막)가 있고, 30리에 숙(宿:여관)이 있었으며,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쉬는 집), 5리에 단정(短亭:쉬는 작은 정자)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고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파발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케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원이나 기름진 땅 안에 있어서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은 가끔 있었으나,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이라야 들에 있어서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원집이 없이도 잘 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골짜기 외진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에 더할 것이 없을 것이다.①” 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조령산성 안에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고, 현의 서록 15리인 이화령 아래 요광원(要光院)이 있었으며, 겨릅재 밑에 관음원(觀音院)이 있고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으니 속칭 초곡원(草谷院)이다.
조령원과 동화원
지금 조령원으로 전하는 제1관문에서 1㎞정도 떨어진 원터가 동화원이며 새재 아래 동화원이라는 마을에는 조령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문을 원터를 발굴한 신영훈(申榮勳) 전문위원이 제기한 바 있다.②
1530년(중종 25) 이행(李荇) 등이 증보 개정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조령원은 새재의 고개 동쪽에 있다고 해서 지금의 동화원 동리를 지칭하고, 동화원은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다고 하여 지금 조령원 터의 위치를 가르키고 있다. 문경현지에서는 위치의 기록이 없고 열 개의 원(十院)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今無)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16세기로 추정되는 필사본 지리지(地理誌)에는 조령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와 같이 서북쪽 15리에 있다는 기록과 함께 석담을 쌓았으나 지금은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③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에 조령원·불정원·화봉원은 사용되고 있었고, 관음원·회연원(回淵院:在龍淵上)·동화원·견탄원(犬灘院:在犬灘北岸)은 폐지됐다는 기록을 남긴 점으로 보아 일부 원만이 사용됐으며, 제1관문 안에 조령진(鳥嶺鎭)이며 산성창(山城倉)을 두므로 해서 원의 기능이 불필요하게 되어 동화원(전 조령원)이 먼저 폐지되고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이 조령원(현 동화원마을)으로 옮겨 살며 옛그대로의 원 이름을 사용하므로 해서 혼돈이 오지 않았나 추측되나 와전된 원의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는지 1927년에 제작된 조령편람(鳥嶺便覽)의 현판에는 조령원에 담장이 상존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④ 지금까지 조령원으로 전하나 이는 잘못으로 생각된다. 원터를 1977년 8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300만원의 사업비로 발굴하게 되었는데 신영훈(申榮勳), 홍사준(洪思俊) 전문위원의 발굴로 고려시대 온돌(溫돌) 유지(遺址)가 나타나 북방에서 시작된 온돌이 남점(南漸)하는 자료로 건축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평가되며 그 외에도 와편(瓦片), 토기편(土器片), 자기편(磁器片), 어망추(漁網錘), 사금파리어음, 숫돌, 수정편(水晶片), 철재화살촉, 청동수저, 청동머리꽂이, 철재가위, 담뱃대, 부시, 손칼, 엽전, 마령(馬鈴), 말발굽쇠, 징, 자갈, 마제도구(馬蹄道具), 화금(靴金), 문고리 등의 출토가 있었으며, 78년에는 신영훈 전문위원 집필로 발굴조사보고서를 문경군에서 발간하였다.
원터의 석문(石門)과 석담(石垣) 축성방식이 동로면 명전리의 작성(鵲城)⑤과 꼭 같으니 석문의 방형석주(方形石柱)며 지방(地枋)과 인방(引枋), 천장석(天障石), 상하의 문지도리 홈의 규모가 같고 석담의 거랭이질하여 엇물리게 쌓는 방법이 또한 그러하다. 작성(鵲城)은 동로면 명전리 황장산(黃腸山)에 계곡을 막아 축성하여 공민왕이 대지(大智)국사의 안내로 난을 피해 황장산 부근에 체류(滯留)할 때 작장군(鵲將軍)이 쌓았다 하여 작성이라고 전하는 고려시대 석성으로 높이 3m, 폭 5m, 길이좌측이 300m, 우측이 200m이고 성문은 높이 2.2m, 폭 2.5m, 석주(石柱)는 가로 세로 45㎝이며 원터 석문 복원시 작성의 석문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화봉원(華封院)
문경의 북쪽 4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유희와 이규보의 시가 전한다.
<고려 유희(兪曦)의 시>
謫臣南行十六驛(적신남행십육역) 벼슬에서 좌천되어 남녘으로 16역을 지나
今朝始踐尙原境(금조시천상원경) 오늘 아침 비로소 경상도 들의 경계를 밟았다.
요城側畔數里餘(요성측반수리여) 요성 근처 두어 마장 되는 곳에
有一僻郡號聞慶(유일벽군호문경) 궁벽한 군 하나 있으니 문경이라 부른다.
郡近新院勢甚嚴(군근신원세심엄) 군 변두리에 새 원집 형세 매우 엄숙하여
爛然金碧交相暎(난연금벽교상영) 찬란하게 금빛과 푸른빛이 뒤섞이어 비치는데
東偏小樓允奇絶(동편소루윤기절) 동쪽의 작은 누각이 더욱 가관이라.
厭倒休文舊八詠(염도휴문구팔영) 훌륭한 글 옛 팔영을 압도한다
美哉比屋是誰營(미재비옥시수영) 아름답구나 이 집 누가 지었는고
光文其名閔其姓(광문기명민기성) 그 이름은 광문이요, 성씨는 민씨로다.
我是閔公門下人(아시민공문하인) 내가 민공 문하의 사람이었는데
今見創構益自敬(금견창구익자경) 이 건물 창건한 것을 보고 더욱 공경하네.
蹉乎此人留此世(차호차인유차세) 아 이사람들을 세상에 머물게 하여
經營天下不爲病(경영천하불위병) 천하를 경영케 하였으면 탈없었을 것을 어찌하랴.
奈何天上玉樓成(내하천상옥루성) 하늘 위에 옥루를 이룩했으므로
雁過長空不留影(안과장공불유영) 기러기가 넓은 하늘을 지나간 듯 그림자도 머물지 않는다.
塵凡已隔査難尋(진범이격사난심) 진세와는 이미 떨어져 아득하여 찾기 어려우니
尺自興難玆之永(척자흥난자지영) 다만 스스로 이에 영원함을 탄식하노라.
<이규보(李奎報)의 시>
萬緣灰今居士(만연회금거사) 만가지 인연이 재처럼 찬 노거사도
尙有丹心奉聖明(상유단심봉성명) 아직도 붉은 마음 있어 성인 임금을 받든다.
天下蒼生皆請祝(천하창생개청축)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축원하려는데
如何獨点華封名(여하독점화봉명) 어찌하여 화봉의 이름은 혼자 차지했는고.
탄항산 봉수(炭項山 烽燧)
봉화불로 급한 일을 연락하도록 하는데 고려 때부터 시작하여 조선조에 발달되었다. 평시에 한 개, 적이 나타나면 두 개, 경계 가까이 나타나면 세 개, 경계로 들어오면 네 개, 싸움이 시작되면 다섯 개를 올리도록 되어 있고, 연일 접전하면 나무를 쌓아 놓고 이리(狼)의 똥을 피운다. 밤에는 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올렸다. 봉화는 가장 신속한 것으로 좋은 제도이나 주야로 산에서 살아야 하니 사실상 어려웠다.
서울의 제1봉화는 아차산에서 함경도로, 제2봉화는 광주 천임산(天臨山)에서 부산으로 내려가고, 제3봉화는 모악동봉에서 의주로 통하고, 제4봉화는 모악서봉에서 의주로, 제5봉화는 양천 대화산에서 순천으로 통한다. 그 사이에 간봉(間烽)이 있어 지선(支線)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봉화를 맡은 군졸은 다섯교대로 7명씩 서도록 되었다.
고종 31년에 각지의 봉화를 완전 철폐하였다.① 탄항산 봉수는 현의 북쪽 31리에 있고, 남쪽으로는 현에서 40리에 있는 선암산(禪岩山)에 응하고 선암산에서는 다시 남쪽으로 함창 성산(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산양 소산(所山)에 응했다. 탄항산에서는 서쪽으로 충청도 연풍현 겨릅재(麻骨帖)에 응하고② 마골첨에서는 서쪽으로 주정산(周井山)에 응했다.③
마고산성(麻姑山城 : 요城 : 井谷城)
문경읍 마원리에 있는 산성이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동남쪽 4리에 둘레 5백56척인 요성(요城)과 현 남쪽으로 5리인 정곡리의 정곡성이 실여 있으나④ 이 부근에 두 개의 다른 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둘 다 지금의 마고산성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되며, 마고노구(麻姑老구)가 마고산성을, 고모노구(姑母老구)가 고모산성을 먼저 쌓기로 경쟁을 하며 치마폭에 돌을 담아 구름을 타고 다니며 축성하였다고 전하는 삼국시대 산성으로 자연석 소편을 동서남쪽에 쌓았다.
북쪽은 절벽이라 축성치 않았으며, 현재는 산성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길이 750m이며 완전한 곳의 성의 높이는 2~4m 폭은 3~5m이다. 또한 성내의 밭에서는 많은 기와와 토기파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소규모 성이나 장기간 수직(守直)군사나 난민(亂民)의 거주 사실이 추정되고 정곡리 거주 김수국(金壽局 73세)옹은 고구려 성으로 전한다고 하여 주목된다.
성황사(城隍祠)
문경읍 상초리 초곡성 성벽에 연하여 있는 성황사에는 여신(女神)을 모셨는데 1975년 12월 중수로 인한 해체작업에서 나타난 상량문에 의하면 1700년경에 세우고, 1844년(道光 24 헌종 10)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진장(鎭將)은 황치종(黃致鍾)이고, 5명의 목수(都片手 金尙寬, 副片手 朴富初, 李完得, 釋 慶仙, 李公明)가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蓋夫縣之北有主屹山山之下有城隍祠祠宇之設百有餘年而其爲靈昭昭降之福也洋洋矣竟以歲月之浸久乃至棟樑之□敗今玆重葺衆工탄誠而立柱松良辰上樑於吉日惟願上樑之後百□寧安六畜繁殖鳥如斯翼尾夢錯落而成章□飛賀新棟樑위而耀日宜綠廟宇重建可見福綠具新神所攸止鎭南土七十州之民有堂翼然乃東國億萬年之休朝夕苾芬自有來人去容之□誠朔望香火每以村老里婦之禱祝軒迎十里之長風門曜五□之明月上棟下宇取諸大壯之吉如京如抵惟望委豊之慶□□在上屋有其極神之降止民受其福是日也卽歲甲辰春二月也道光二十四年二月初十日立柱同月二十日未時上樑 鎭將淳字黃致鍾丙辰生 木 手 |
성황사 여신이 인조조 최명길(崔鳴吉) 영상의 장래를 예언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최명길(崔鳴吉)과 성황신(城隍神)
최명길은 조선조 인조 때 강화파(講和派)의 대표적인 정객(政客)으로 자(字)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이고, 전주인(全州人)이다. 좌우의정(左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으로 정사원훈1등공신(精社元勳一等功臣)에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최명길이 소시(小時)에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의 문후차 안동으로 갈 때 조령을 통과 하였다. 그때 용모가 단정하고 자색이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뒤를 따라 오면서 “험한 산길이라 여자 혼자 무서워 갈 수 없으니 동행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을 건냈다. 최명길은 성격이 호방한데다가 젊은 여인이 동행을 원하는지라 쾌히 승낙하고 같이 동행하면서 그 여인의 정체가 궁금하여 마음속으로 살피고 있었다. 앞서가던 여자도 그 눈치를 차렸는지 뒤를 돌아보고 방긋이 웃으며 “공(公)이 저를 의심하는 모양이니 내 정체를 말씀하리다. 저는 사람이 아니고 새재 성황신인데 안동에 사는 좌수(左首) 모(某)가 서울갔다 오는 길에 성황당 앞을 지나면서 성황당에 걸려있는 치마를 보고 욕심을 내어 치마를 훔쳐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좌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인데 우연히 공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 고 말을 하면서 최명길의 눈치를 살핀다.
최명길은 태연자약하게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인데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소” 하면서 용서할 수 없느냐고 말했다. 그 여자는 한참 대답이 없더니 “공은 미구(未久)에 정사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를 몸이요, 병자호란이 일어나는데 공은 큰 공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는 흥할 것이니 부디 청과 화친하여 이 나라 사직을 보전하셔야 합니다. 오늘 좌수의 딸을 죽일 것이되 공의 체면을 봐서 징벌을 할 것이니 공은 이렇게 이렇게 하여 제 체면을 세워주시오” 하고는 간 곳이 없었다.
최명길은 이상히 여기고 급히 서둘러 안동 모 좌수집을 찾으니 좌수 딸이 급사(急死)하여 집안이 발끈 뒤집혀 경황이 없었다. 최명길은 주인을 찾아 인사를 나눈 후 “딸을 내가 회생(回生)시킬 수가 있으니 딸 있는 방으로 안내하시오” 라고 말했다. 주인은 죽은 딸을 살리겠다니 감사히 여겨 최명길을 딸방으로 인도하였다. 새재서 본 성황신이 좌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일어나면서 “이제야 오십니까” 하고 인사를 한다.
성황신과 최명길의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나 성황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문경새재 성황당에서 가져온 치마를 빨리 불사르고 깨끗한 음식을 장만하여 치제(致祭)하면 딸이 회생할 것이니 염려 마시오” 라고 말하자 좌수는 백배사례하고 최명길의 말대로 치성하니 딸이 다시 살아났다. 그후 과연 최명길은 벼슬이 차츰 올라 영상이 되고 병자호란 때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당시 정세를 잘 파악하여 치욕을 참고 화청정책(和淸政策)을 채택하여 국난을 수습한 사실은 새재 성황신과 관련된 인연이었다는 사화(史話)가 구전(口傳)되고 있다. 1975년 12월 제2관문 문루중건 공사와 함께한 보수공사 시방과 내역은 다음과 같다.<내용생략>
[출처] Ⅴ. 새재와 문경의 유적 > 3. 기타유적|작성자 산벗박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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