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새재와 문경의 유적 > 1. 불교관계 유적

2014. 5. 14. 14:29나의 이야기






        

  조  령  산  성  

 

 

Ⅴ. 새재와 문경의 유적 > 1. 불교관계 유적  

 

   사  찰

    혜국사(惠國寺)

  문경읍 상초리 여궁폭포를 지나서 주흘산 기슭에 있으며, 847년(신라 46대 문성왕 8년) 보조국사가 창건하여 법흥사(法興寺)라고 하였으며 청허(淸虛), 송은(松隱)대사가 고려조에 공이 많았고, 공민왕이 난을 피해 법흥사에 행재(幸在)하여 국은(國恩)을 많이 입었다고 해서 혜국사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1873년 송장, 지성 두 선사가 일부 중수하였고, 금강문(金剛門)은 1977년에 건립하였고, 대웅전(18평), 만덕전(萬德殿, 7평), 산왕전(山王殿) 등 6동의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 단청은 1973년에 실시 하였다. 1979년 신중탱화에서 전신사리(全身舍利)가 나와서 봉안하고 있다. 속암(屬庵)으로는 안적암, 응선암이 있으며 옛부터 혜국사를 오르던 길에는 자영당대사 성연출세탑, 혜월당여상지탑, 연곡당사진지출세탑의 부도가 있다.

    혜국사지(惠國寺址)

  조령산성 안에 있으며 일명 보제암(普齊庵)이라고도 하며 고려 태조가 창건 했으나 사지(寺址)도 전하지 않는다.

    금학사지(金鶴寺址) 
  문경읍 마원리 봉명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며, 문경서중학교의 석탑은 이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하고 사지에는 탑자리가 남아 있다.

 

   석  불

    문경 관음리 마애반가사유상

  고고미술(考古美術)에 ‘문경 관음리석불과 석탑’이란 제목으로 연구 발표한 진홍섭 교수의 글이 실려 있다. 전술(前述)한 문경 갈평리오층석탑의 원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200m 지점에 반가상이 있다. 암석은 높이 약 2.1m, 넓이 약 1.1m, 두께 43㎝의 화강석이며, 뒤는 편평(扁平)하다. 
  이 표면에 상고(像高) 1.9m, 두고(頭高) 48㎝, 견폭(肩幅) 67㎝, 슬폭(膝幅) 85㎝, 좌대고 73㎝의 상을 양각하고 두상(頭上)에 경(徑) 약 86㎝의 두광(頭光)이 있다. 전면에는 마멸이 심하나 대체의 형태는 알아 볼 수 있다. 머리에는 삼면화관(三面花冠)을 썻고, 양협은 살이 적고 세안(細眼) 후순(厚脣)인데, 고졸(古拙)한 미소가 확연하다.
  우수는 우슬 위에서 구부려서 외장(外掌)하여 턱을 받치고 좌수는 좌슬위에 얹힌 우족(右足)을 잡고 있다. 슬부(膝部) 이하는 군벽(裙벽)이 있기는 하나 마멸로 인해 명료하지 않고 따라서 대좌(臺座)도 확실하지 않다. 원형 두광에는 화불(化佛)이 있는 듯 하나 희미하다. 형태는 반가의 상을 하고 있으나 삼국기의 반가상에 비하면 조형이 둔하다. 상체나 두팔의 비대함과 지체(肢體)의 균형이 불안전함은 자연 시대의 하강을 의미한다.

    문경 관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1975. 2. 5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고 고고미술에 진홍섭 교수의 연구 발표문이 수록되어 있다. 관음리와 갈평리의 중간쯤 되는 지점(관음리 186번지)에 화강석으로 원각한 약사여래입상이 있다. 전체 높이 3.33m로 남향하고 있다. 머리 부분은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접속시켰고, 코끝을 역시 시멘트로 보수하고 안면은 마손(磨損)되었으며, 육계도 똑똑치 않다. 통견(通肩)한 법의(法衣)가 무릎위에서 굵은 벽선을 보이면서 좌우로 갈라졌고 그 밑에 군의가 처졌다. 
  우수(右手)는 우측에 내장(內掌)하여 느러뜨렸고 좌수(左手)로는 슬전(膝前)에서 보주를 받치고 있다. 배면(背面)에도 의문(衣紋)이 보이나 매우 희미하며 발밑은 시멘트로 보수하여 보이지 않는다. 이 상은 거대하기는 하나 정각(精刻)이라 할 수는 없다. 석질(石質)탓으로 마손이 심하고 본상의 외관을 극히 손상시켰다.
  그러나 결코 졸작은 아니며 부분적으로 웅건한 풍(風)이 깃들고 있다. 불상은 풍화작용으로 말미암아 마멸이 심하며 1978년 8월 현지 답사 때 주위에서 많은 기와 조각이 발견됐으며, 머리 높이 60㎝로 백호(白毫) 자욱이 있고 이장(耳長) 33㎝, 불상 폭 약 1m, 둘레 약 2.5m이다.

    문경 관음리 석조약사여래좌상

  관음1리 못미처 가서 도로변 왼쪽 밭에(관음리 403번지) 철근 콘크리트 창고 비슷한 건물이 있고 그 속에 화강석의 약사여래 좌상이 있다<지금은 콘크리트 건물은 없고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상대석(上臺石>으로 방형의 앙련좌(仰蓮座) 위에 있으나 불상의 현 위치가 본래의 위치인지는 알 수 없으며 가까이 삼층탑이 있는 것으로 봐서<삼층석탑은 지금은 도난당하고 없음> 부근이 사지(寺址)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대석이나 하대석의 행방도 알 수 없으며 대좌 앞에는 탑의 옥신석을 같다가 두었다. 전체 높이 109㎝로 두부(頭部)의 뒷면이 파괴되어 두광(頭光)의 광배를 달았다고 짐작된다. 상호(相好)는 마멸과 파괴로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이고 두부를 시멘트로 접착시켰으며 납의(衲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고 간소하게 선각(線刻)되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座)했다.
   오른손은 강마촉지(降魔觸地)이고 왼손은 무릎위에서 보주(寶珠)를 받치고 있다. 상이 규모가 작으나 균형이 잡힌 약사여래 상으로 연대는 조선조로 추정된다. 실측치는 앙련대좌 가로 106㎝, 세로 82㎝, 높이 27㎝, 좌상 전체높이 109㎝, 무릎폭 82㎝, 어깨폭 56㎝, 두고(頭高) 32㎝이다.

 

   석  탑

    문경 갈평리 오층석탑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관음사와 같이 축조 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75. 2. 5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고 고고미술(考古美術)에 진홍섭 교수가 연구 발표한 글이 실려 있다.
 「문경군 문경면 갈평리 문경경찰서 갈평지서(현 문경읍 갈평출장소 갈평리 560번지) 구내에 아담한 5층석탑이 있다. 전고(全高)2.9m이며, 지대석폭 1.5m로 복발(覆鉢)까지 남아 있다. 하대(下臺)는 중석(中石)을 탱주(撑柱)가 2구(二區)로 구분하고 2매(二枚)의 갑석(甲石)을 덮었으며 상대와 각층 옥신(屋身),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석이다.
  상대 중석과 초층(初層) 옥신의 각면은 2구로 구분되었고 2층부터는 우주형(隅柱形)만 있다. 기단(基壇) 중석(中石)과 각층 옥신은 상촉하관(上促下寬)으로 초층 옥신의 폭은 상단에서 50.5㎝이며, 하단에서 52.3㎝이다. 옥개석 받침은 각층 4단이며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아름답다. 상륜(相輪)은 1석으로 된 노반(露盤)과 복발이 남아 있고, 경(徑) 2.5㎝의 찰주공(擦柱孔)이 있다. 
  거작(巨作)은 아닐지라도 우려(優麗)한 작품의 하나다. 약간의 손상이 있기는 하나 완미(完美)한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지금 있는 자리가 원위치가 아니고 약 5리 떨어진 산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  원위치는 동면(同面) 관음리(觀音里) 불당(佛堂)골이라 부른다. 1936년경 관음 이장(李光鎬)이 매각하여 일부는 벌써 서울로 이동된 것을 갈평동민이 찾아와 가장 안전하고 다시 도난당할 우려가 없다고 생각한 현 위치인 주제소(駐在所) 구내에 복원하였던 것이라 한다. 원 위치는 일면전이 되었으나 흙밑에 83㎝, 평방(平方)의 지대석이 남아 있으며 그 후면에는 금당지(金堂址)가 역연(歷然)하다.

    문경 상리 삼층석탑(聞慶 上里 三層石塔)

  문경 상리 351번지 문경서중학교 내에 있으며<지금은 문경새재박물관 내에 있음> 화강석 탑으로 금학사지(金鶴寺址)에서 옮겼다고 전하며 문경군청 청사로 사용된 관산지관(冠山之館) 앞에 있다<지금은 문경새재박물관 내에 있음>. 상대중석(上臺中石) 및 1층옥신(屋身)은 완전하나 나머지 탑제는 훼손되고 2, 3층 옥신과 상륜(相輪)이 없다. 1층 옥석(屋石) 받침이 4단이고 2,3,4층은 옥석 받침이 3단이라 1층 옥석이 타탑제(他塔材)로 추정되어 3층탑이며 하대갑석(下臺甲石)은 폭 96㎝, 높이 10㎝이고, 상대중석(上臺中石)은 폭 60㎝, 높이 33㎝로 하대중석, 상대중석에 우석(隅石)과 탱석(撑石)이 있고, 1층 탑신(塔身)은 폭 28㎝, 높이 30㎝의 고려 때의 탑으로 추정된다.

    문경 관음리 삼층석탑(聞慶 觀音里 三層石塔)

  문경 관음리 동구 밭에 석불좌상과 함께 있으며 상대중석과 갑석 및 옥개부분이 일부 훼손되고 3층 옥신이 없다. 옥개의 받침이 4단이고 옥신에는 우주(隅柱)가 양각되고 기단(基壇)이 이형(異型)인 것이 내화리 3층석탑(內化里三層石塔)과 비슷한 형태인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3층 옥신은 시멘트로 만들어 넣었으며 석불좌상 대좌(臺座) 앞에 옥신석이 있으나 이 탑의 탑제인지 알 수 없다.<현재 이 탑은 도난당해 없어졌다.>

    개운사 사층석탑(開雲寺 四層塔)

  문경읍 상리에 있는 개운사는 문경현 객사(客舍)라고 전하는 건물을 개수(改修)하여 대웅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건물을 71. 4. 8 뒷편 연목 일부와 번와 등의 보수한 바 있고 그 앞에 4층탑이 있다. 높이가 220㎝이고 일견해서 문경 상리 삼층탑과 같음을 알 수 있고 어느 신도가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지대석(地臺石)은 없고 중대석(中臺石)이 폭 65㎝, 높이 32㎝이고, 상대갑석(上臺甲石)은 한돌로 됐으며, 1층 옥신은 폭 47㎝, 높이 40㎝이고, 옥개석은 3단으로 고려말 이후의 조성으로 추정되며 탑제가 부분적으로 훼손되고 1층, 2층 옥신만 완전하며 3층 옥신은 없다. 중대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석(撑石)이 조각되고 탑신에는 우주만 조각되어 있다.





                - 네이버 블로그 <문경 향토 역사관 > 산벗 박창희 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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