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총론 ; 한국독립운동과 문경 /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연구

2014. 5. 14. 16:56나의 이야기






  문경의 의병과 독립운동사 연구

 

 

 제1장 총론 ; 한국독립운동과 문경

 

  

 

  한국독립운동사는 갑오의병甲午義兵이 일어난 1894년부터 해방되던 1945년까지 51년 동안 진행되었다. 그 내용을 주제별로 크게 분류해서 정리하자면, 의병항쟁‧계몽운동‧1910년대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국내외 의열투쟁‧3‧1운동‧1920년대 국외 독립군‧국내 사회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1930~40년대 사회운동과 학생운동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주제들이 모든 지역에서 전부 나타나지는 않았고, 강도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문경인들이 펼친 독립운동도 이들 주제 가운데 몇 가지에만 해당하고 참여인물이나 활동성향도 다양했다. 따라서 문경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어떠한 비중과 위상을 가지는지 추적해서 정리해야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국에는 문경인이 펼친 독립운동이 한국독립운동의 전반적인 흐름과 성격에서 가지는 차별성과 보편성을 찾아내는 데 연구의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향토사랑에 함몰되어 객관적인 이해에서 벗어나는 잘못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경은 지리적으로 조령鳥嶺에 가까운 지역으로 영남 인사들이 서울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요충지였으므로 문경 산양은 여러 차례 영남유림들의 대도회 장소가 되었다. 문경의병은 이러한 역사적‧지리적 요인과 깊은 관련 속에서 펼쳐졌다.

 

  1895~1896년 전기의병에서 이강년의 활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895년 음력 8월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와 음력 11월 단발령 공포 이후 안동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도 1896년 정월 11일 도태道胎장터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이강년은 단발령을 밀어붙이다가 쫓겨 달아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수행원인 순검 이호윤李浩允과 김인담金仁覃을 붙잡아 정월 13일 농암장터에서 처단하여 강한 척사의식을 드러냈다. 그리고 류인석의 제천의진과 연합의진을 구성하여 수안보전투를 치르는 등 조령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서상열이 안동‧예안‧봉화‧풍기 등 7읍 의병진과 연합의진을 결성하고 상주 함창의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자, 이강년 의병부대가 문경으로 이동하여 조령의 관문을 차단하고 일본군의 연락망을 잘라버린 것이다. 그 후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이 제천 의병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청풍 황강黃江으로 들어오자 이강년은 길목을 가로막는 등 줄기차게 항전하였다.

 

  중‧후기 의병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문경지역에서는 이강년‧이인영‧신태식 등이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고 활동하였다. 을미의병기 문경에서 창의하였던 이강년은 1907년 4월 재기하여 1908년 7월까지 문경‧단양‧영춘‧영월 등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의 3도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경기도 여주출신으로 문경에 살고 있던 이인영은 1907년 6월 관동창의대장에 취임하여 이강년과 합세하여 활동하던 중 1907년 11월 13도창의군의 총대장으로 서울진공작전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신태식은 1907년 8월 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한때 이강년부대와 합세하거나, 독자적인 전투를 펼쳤고,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투쟁하기도 하였다. 그 외 문경출신의 다수 인사들이 이강년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렇듯 문경인들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들 만큼 줄기차게 의병항쟁을 벌였으며, 주요 교통로를 활용하여 인근 의진과 연합작전을 벌였다는 특징을 가졌다.1900년대 후반에 들어와 문경에서도 계몽운동이 시작되었다. 1907년 근대식 학교인 사립 도천보통학교道川普通學校가 문을 열었으며, 문경 대승사大乘寺에서 경흥학교慶興學校가 세워졌다. 1908년 3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출신의 인사들이 친목도모와 계몽사상 보급을 목표로 교남교육회를 조직하자 문경출신의 재경인사 18명 정도가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후 1910년, 대승사에서는 원종학교圓宗學校를 설립하기도 하였다.그 외 문경군 가은면에서 야학교夜學校를 열기도 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방향은 국가를 잃은 새로운 조건 위에서 모색되고 있었다. 의병항쟁으로 말해지는 무력투쟁은 1910년을 전후하여 나라 밖에 기지를 만드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만주와 연해주가 그 중심지였다. 독립운동의 공간이 나라 밖으로 넓어지면서 1910년대 독립운동은 국제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경에서는 민단조합民團組合‧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라 불리는 비밀 조직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독립의군부가 호남과 충남 등 남서부지역의 복벽주의적 유림단체라면, 민단조합은 충북과 경북 등 남동부지역의 유림단체였다. 민단조합은 문경을 중심으로 소백산 남쪽 낙동강 연변의 의병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의병결사였다. 이들은 국내 의병세력과 연결하여 자금을 모아 의병항쟁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아예 의병항쟁을 다시 일으킬 목적을 갖고 있었다.

 

  민단조합에는 이강년의 조카 이식재李湜宰, 군자장軍資長을 지낸 최욱영崔旭永, 그리고 이은영李殷榮‧김낙문金洛文‧이세영李世永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강년의진에서 활약하던 옛 동지였다. 또한 민단조합은 1910년대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모여 조직한 광복단(풍기)이나 대한독립의군부(호남지역)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민단조합의 활동과 방략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독립운동을 펼치기 힘든 국내에서 의병세력을 모아 무력투쟁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이 꿈꾸는 정치체제는 봉건왕조의 전제군주제를 회복하려는 복벽적인 것이었다. 역사는 새로운 공화주의의 물결로 나아가고 있었고, 복벽운동은 대중적 기반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단조합은 척사유림의 의병항쟁 노선을 계승한 마지막 단체가 되었다.이외 1910년대 문경인의 활동으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과 연계된 박노창朴魯昌‧정인옥鄭寅玉‧김병태金秉泰의 군자금 모집활동이 주목된다. 또 의용단 단장 신태식申泰植, 군무총장 장세명張世明, 단원 서상업徐相業‧한양이韓良履‧장진우張進瑀 등이 펼친 군자금 모집활동이 두드러진다.

 

  3·1운동에서 문경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문경에서 3‧1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은 문경‧산양‧산북‧신북 네 곳이며, 만세운동을 펼쳤던 기간도 3월 20일부터 4월 15일까지로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또한 시위의 규모나 강도가 그다지 크지도 세지도 않았고, 다른 지역과의 연계성도 보이지 않는다. 평화적인 시위 형태를 띠었으며, 사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의병활동에 가담했던 향반鄕班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특징이 있다.

 

  1920년대가 되면 전국적으로 청년운동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문경지역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문경청년회‧가은청년회‧우리청년회‧산일청년동맹山一靑年同盟‧조선불교청년회 김룡지회金龍支會‧상산노동회商山勞働會‧흘령단屹嶺團‧산오소년회山五少年會 등이 활동하였다. 또 노동야학이 세워져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경지역 청년회는 민족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냈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면서 사회운동은 점차 사상적인 분화와 발전을 보였다. 문경지역의 사회주의 사상단체로는 1926년에 결성된 서울계 계열의 좌우회左右會가 있다. 1927년에 들어와 좌우익의 통합을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문경지역에서도 문경청년동맹이 결성되어 청년단체의 통합을 도모하였다. 특히 서울에서 신간회가 조직되고 지방에서도 안동지회처럼 곳곳에 지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신간회 문경지회를 설립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끝내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1920년대 전국적으로 일어난 대규모의 소작투쟁이나 농민투쟁이 문경지방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드러나는 단체로는 1926년 윤청길‧이현구‧양원경 등이 만든 문경노동조합, 1927년 조직된 문경노동친목회가 있을 정도이고, 문경탄갱파업 일부가 확인될 따름이다. 그리고 1928년 6월에 가서 문경농민조합이 만들어졌지만, 구체적인 활동은 알 수 없다. 이렇듯 1920년대 문경지역의 대중운동이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하지 못한 이유는 문경지역의 운동을 주도할 만한 새 시대의 새로운 역량이 배출되지 않은 탓이다. 반면에 의병에 매달리던 유림들의 운동역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던 것이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와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문경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로는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했던 정재철이 있다. 그리고 1941년 대구의 다혁당에 가입하여 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한 서진구가 눈에 띈다.

 

  한편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나라 밖으로 망명하였다. 이 가운데 일본에서 활약한 아나키스트 박열, 미주지역에서 활약한 천세연은 문경출신의 인물로 두드러진다. 그 외에도 문경인들은 중국 만주지역과 중국 관내지역에서 독립군‧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 등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목차  역사적배경 한말국권회복 1910년대1920년대1930.40년대국외운동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