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경상북도 문경군읍지(邑誌) / 집주 문경사

2014. 5. 14. 19:48나의 이야기






       

16. 경상북도 문경군읍지(邑誌)  집주 문경사 / 개인발간 향토자료 

2012/08/0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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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삼국사기지리지고려사지리지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부 록

  

 

 

 集註                         

  문     경     사  

 

 

16경상북도 문경군읍지(邑誌)

 

차        례

  해 설
  번 역
  건치 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관직(官職)
  성씨(姓氏)
  산천(山川)
  풍속
  방리(坊里)
  호구
  전부(田賦)
  군액(軍額)
  성지(城池)

  창고(倉庫)
  관방(關防)

  진보(鎭堡)

  봉수
(烽燧)
  학교
  단묘(壇墓)
  능묘(陵墓)
  불우(佛宇)
  궁실(宮室)
  누정(樓亭)
  도로
  교량(橋梁)
  도서(島嶼)
  제언(堤
堰)
  장시(場市)
  역원(驛院)
  목장(牧場)
  형승(形勝)

  고적(古跡)
  토산(土産)
  진공(進貢)

  봉름(俸廩)

  관적(官蹟)
  과거(科擧)
  인물(人物)
  제영(題詠)
  비판(碑板)


  [해 설]

  표지에 경상북도 문경군 읍지로 기록되고 내용 첫머리가 문경현지로 적힌 필사본 1책이 규장각 장서(10818)로 전한다. 전국적인 읍지 편찬은 1899년(광무 3년)에 있었는데 경상북도 문경군 읍지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이후기 때문에 각도의 명칭이 남북도로 표기되고 각 읍의 주,부,군,현의 체제도 변경되어 표제(表題)만으로도 시대의 짐작이 가능하다. 30일 이내에 작성해 올리라는 내부 훈령에 따라 기존의 읍지를 정서하는데 그치고 읍사례는 군별로 분책(分冊)되어 전한다.

  책머리에 4, 5폭의 매우 큰 채색지도가 첨부되고 내용은 건치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등 35개 편목이며 각 방리와 호수가 적혀 있어 당시의 동리 이름과 규모를 알 수 있다. 역대 현감은 이정규 현감(1784~1785년)까지 수록하고 있으나 전부(田賦), 조적(양곡의 출납) 등의 기록은 1845년(헌종 11년)이 기록의 하한이다.

 

  [번 역]

문  경  현  지(聞慶縣誌)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는 신라의 관문현(冠文縣)인데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라고도 하고 관현(冠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이 관산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에 소속시켰다. 고려 때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공민왕이 본 현에서 승첩보를 들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속현 가은현(加恩縣) : 현의 남쪽 41리에 있고 본래 신라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이 가선(嘉善)이라고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소속으로 하였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 문경현에 소속하게 되었다.
   호계현(虎溪縣) : 현의 동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호측현이었으며,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으며 조선조의 태종 때에 문경현에 소속되었다.

  [군명(郡名)]
   관문(冠文),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관현(冠縣), 관산(冠山), 문희(聞喜)

  [관직(官職)]
   
현감(縣監) : 음직(蔭職) 6품관이다. 고려 공양왕 때 감무(監務)를 설치하고 조선조 태종 때 현감으로 바꾸었다. 1752년(임신:영조 28년)에 조령진을 설치하고 현감이 수성장을 겸했다.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2인, 군관(軍官) 30인, 인리(人吏) 33인, 지인(知印) 18인, 사령(使令) 18명, 군뢰(軍牢) 30명, 관노(官奴) 23구, 관비(官婢) 3구
   
유곡찰방(幽谷察訪) 
: 문과(文科) 출신 6품관이다.
  역리(驛吏) 32인, 지인(知人) 12인, 사령(使令) 12명, 노(奴) 23구, 비(婢) 10구
   조령별장(鳥嶺別將) : 무과 출신 4품관이다.
  군관 2인, 군기감관(軍器監官) 1인, 수첩군관(守堞軍官) 300인, 진리(鎭吏) 4인, 지인(知人) 4인, 사령(使令) 7명, 노(奴) 8구이다.

  [성씨(姓氏)]
   
문경현 : 최(崔)씨, 박(朴)씨, 송(宋)씨, 전(錢)씨, 김(金)씨
   
가은
 : 전(全)씨, 윤(尹)씨, 연(延)씨
   
호계
 : 황(黃)씨, 김(金)씨, 방(方)씨
   
견천(絹川)
 : 방(方)씨, 황(黃)씨
   
벌천(伐川)
 : 심(沈)씨
   
신증 이(李)씨, 신(申)씨, 민(閔)씨, 채(蔡)씨, 남(南)씨, 원(元)씨, 정(鄭)씨, 권(權)씨, 홍(洪)씨, 안(安)씨, 유(柳)씨, 장(張)씨, 손(孫)씨, 조(曺)씨, 고(高)씨, 주(周)씨, 배(裵)씨, 임(林)씨, 전(田)씨, 엄(嚴)씨, 서(徐)씨, 허(許)씨

  [산천(山川)]
   
주흘산(主屹山) : 현의 북쪽 5리에 있고 계립령으로부터 뻗어 온 현아(縣衙:縣廳)의 주산(主山)이다.
   
관혜산(冠兮山)
 : 현의 남쪽 4리에 있고 주흘산으로부터 뻗어 왔다.
   계립령(鷄立嶺) : 현의 북쪽 28리에 있고 대미산에서 뻗어왔다. 155년(한 환제 영흥 3년)에 신라의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사신을 보내 길을 열었고 이곳 북쪽이 충주와 경계이다.
 
  조령(鳥嶺)
 : 현의 서쪽 27리에 있고, 연풍현의 경계로 세상에서는 새재〔草岾〕라 부르며 계립령에서 뻗어 왔다.
   
이화현(伊火峴)
 : 현의 서쪽 18리에 있고, 서쪽이연풍현 경계로 새재에서 뻗어왔다.
   
봉명산(鳳鳴山)
 : 현의 동쪽 8리에 있고 운달산에서 뻗어 왔다.
   
희양산(曦陽山)
 : 가은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옛성이 있어 3면이 모두 석벽인데 이화현에서 뻗어 왔다.
   
재목산(梓木山)
 : 가은현의 남쪽 20리에 있고 갈재(葛峙)에서 뻗어 왔다.
   
장산(獐山)
 : 호계현의 북쪽 1리에 있고 여산(廬山)에서 뻗어 왔다.
   
화산(華山)
 : 가은현의 서쪽 27리에 있고 대야산에서 뻗어왔다.
   
소둔산(所屯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고 이화현에서 뻗어 왔다.
   
토천(兎遷)
 : 본래는 관갑(串岬)인데 용연의 동쪽 벼랑이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이르니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곳으로 돌을 파서 돌을 겨우 이어 사다리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나 되어 토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북쪽에 고모성이 있다.
   
소야천(蘇野川)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계립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새재에서 나와 화봉원 앞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용연을 이루며 가은천과 합친다.
   
가은천(加恩川)
 : 가은현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속리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양산에서 나와 합쳐 동쪽으로 흘러서 용연에 이르고 소야천과 합친다.
   
용연(龍淵)
 : 현의 남쪽 22리에 있고, 소야천과 가은천의 두 내가 합치는 곳이다.
   
견탄(犬灘) 
: 호계현 서쪽 5리에 있는데 용연의 하류이다. 나루가 있으며 동쪽으로 흘러서 상주의 영강을 이룬다.
   
조천(潮泉)
 : 조천이 둘이 있다. 하나는 현의 남쪽 정곡리에 있는 것으로 흙구멍에서 매일 3번 뿜어 넘쳐 동구로 흘러 소야천으로 들어가고 하나는 현의 남쪽소둔산에 있는 것으로 물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매일 아침저녁으로 솟아 넘쳐 3리까지 가서 멎는 것이 마치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는 것과 같다. 
   
용추(龍湫) : 새재의 교귀정 서쪽 가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4면과 바닥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세상에서는 용이 있던 곳이라고 전해 온다.

   어변갑(魚變甲)의 시

용이 꿈틀거려 소용돌이 헤치가도
잠긴 하늘에는 밝은 달이 새롭다.
개인 날 우레치고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타 누가 그 신비를 알리.

     
   
인천(寅川)
 : 호계현의 동북쪽 평지에 있는데 동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솟아나 쌍샘[雙泉]이라 한다.
   
신증 대미산(黛眉山)
 : 현의 동북쪽 30리에 있고, 소백산에서 뻗어 와 본 현 여러 산이 여기서 비롯된다.
   
대야산(大耶山) 
: 가은현 서쪽 20리에 있으며 희양산에서 뻗어 와 기우제를 지내면 감응이 있다.
   
불한령(弗寒嶺)
 : 대야산의 허리로 괴산 경계이다.
   
고모령(高毛嶺)
 : 대야산 남쪽 2리에 있고 통과하면 청주 경계이다.
   
불일산(佛日山)
 : 가은현 서남 20리에 있고 화산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단(祈雨壇)이 있다.
   
갈재(葛峙)
 : 가은현 남쪽 15리에 있고 속리산에서 뻗어 왔다.
   
호항령(狐項嶺)
 : 현의 동쪽 35리에 있고 대미산에서 뻗어 왔다.
   
황장봉산(黃腸封山)
 : 대미산 아래에 있고 둘레가 10리로 1680년(강희 경신:숙종 6년)에 봉산했다.
   
용뢰산(龍磊山)
 : 운달산(雲達山)이라고도 하며 현의 동쪽 20리에 있고 호항령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제를 지내면 감응이 있다.
   여산(廬山) : 호계현 북쪽 7리에 있고 운달산에서 뻗어 왔다.
   
어류동(御留洞)
 : 조령성의 동쪽 깊은 계곡 가운데 둘레가 30여리이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칠 때 이곳에 머물러 축성을 하여 어류동이라 하며 보제사(普濟寺)를 지었다. 뒤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 머문 궁실(宮室)터가 있다.
   
선유동(仙遊洞)
 : 대야산 동쪽 2리에 있다. 흰 바위와 맑은 시내가 굽이치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상류에 암석이 낭떠러지를 이루어 폭포와 소를 이룬 용추가 있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가 정자를 짓고 이곳에 물러나 한가롭게 지냈다.
  시에

늦게 이산의 좋은 경치 만나보니
벌써 전생의 인연이 있었나 보다
당귀가 밥맛을 다시 돋우는데
철쭉꽃은 어찌 그리 더디 피는가
비 그치며 천길 벼랑 씻어 내리고
우뢰 소리는 깊은 골을 울리는데
신령한 신선은 손을 머룰게 하여
나는 더욱 기이함을 자랑토다.

     
  그 하류에 9곡(九曲)이라는 경치 좋은 곳이 있으니 옥석대(玉
臺), 난생뢰(鸞笙瀨), 영귀암(詠歸巖), 탁청대(濯淸臺), 관란담(觀瀾潭), 세심대(洗心臺), 활청담(活淸潭), 영사석(靈石), 옥하대(玉河臺) 모두 바위에 큰 글자로 새겨 있다.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된 신필정(申弼貞)이 쉬지 않고 학문을 닦은 곳이다. 
  그 서쪽의 외선유동(外仙遊洞) 역시 수석이 뛰어나다.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시에

양쪽 선유동은 가까운 거리인데
지금은 그 사이에 구름이 한가롭고
어느 곳이 뛰어난지 평하기도 어렵도록
하늘의 장수가 있어 수석 고루 나눴네.

    
   
야유암(夜遊巖)
 : 봉암사 동쪽에 물과 바위가 희고 깨끗하며 경치도 명랑한데 세상에 전해 오기를 최고운(崔孤雲:致遠)이 밤에 놀던 곳이라 하며 야유암 3자가 새겨 있다.
   
백운대(白雲臺) : 
절의 서쪽 몇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백석폭포(白石瀑布)의 경치가 뛰어나다.
   
용유동(龍遊洞) : 불일산 북쪽 5리에 있다. 흰 바위가 평탄하게 깔린 곳에 시내가 흐르고 그 위에 여러 마리 용이 뒤엉켜 논 자국이 있어 용유동이라 한다. 그 아래 깊은 소〔深湫〕가 있으니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북쪽 언덕에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의 정자가 있고 은거하여 악기를 타며 즐기던 곳이다.

  [풍속]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힘쓴다.

  [방리(坊里)]
   
읍방(邑坊) : 주흘산 아래에 있다.

   신동면(身東面) 
  
정곡리(井谷里)
 : 관아에서 5리다.
  
금곡리(金谷里)
 : 관아에서 8리다.
  
어항리(於項里) 
: 관아에서 10리다.
  
기화곡리(其火谷里) 
: 관아에서 17리다.
  
신원리(新院里
) : 관아에서 20리다.
  봉생리(鳳笙里) : 관아에서 25리에 있다.

   초곡면(草谷面)
  
진안리(陣安里) : 관아에서 6리다.
  초곡리(草谷里) : 관아에서 28리다.
  각석동리(各石洞里) : 관아에서 10리다.
  요광원리(要光院里) : 관아에서 18리에 있다.

   신북면(身北面) 
  요성역촌리(
耳卯 
城驛村里) : 관아에서 4리이다. 요=耳+卯
  광수원리(廣水院里) : 관아에서 8리이다.
  
파팔리(巴八里)
 : 관아에서 12리다.
  
고요성리(古耳卯 城里)
 : 관아에서 12리다. 요=耳+卯
  
화지동리(花枝洞里)
 : 관아에서 13리다.
  
산문리(山門里)
 : 관아에서 15리다.
  
벌천리(伐川里) 
: 관아에서 20리다.
  
용연리(龍淵里)
 : 관아에서 25리다.
  
중평리(中坪里)
 : 관아에서 30리다.
  
관음원리(觀音院里) : 관아에서 35리다. 

   신남면(身南面) 
  마포원리(馬砲院里) : 관아에서 5리다.
  우어동리(牛於洞里) : 관아에서 8리다.
  
모곡리(茅谷里)
 : 관아에서 12리다.
  
정동리(鼎洞里)
 : 관아에서 15리다.
  구랑리(九郞里) : 관아에서 20리다.
  내서천리(乃西川里) : 관아에서 25리다.

   호서면(戶西面)
  
불정원리(佛井院里) : 관아에서 36리다.
 
 유곡역리리(幽谷驛吏里)
 : 관아에서 40리다.
  
진곡리(辰谷里) 
: 관아에서 45리다.
  
모전리(茅田里) : 관아에서 52리다.

   호남면(戶南面)
  
창리(戶倉里) : 관아에서 40리다.
  
송연리(宋淵里)
 : 관아에서 40리다.
  
우지동(牛池洞)
 : 관아에서 40리다.
  
흥덕동리(興德洞里) : 관아에서 47리다.

   호현내면(戶縣內面)
  
견탄리(犬灘里) : 관아에서 30리다.
  
주평리(舟坪里)
 : 관아에서 34리다.
  
굴암리(窟巖里)
 : 관아에서 35, 6리다.
  
호계리(戶界里)
 : 관아에서 40리다.
  
우노곡리(牛老谷里) : 관아에서 45리다.

   가동면(加東面)
  
왕릉리(王陵里) : 관아에서 30리다.
  
도탄리(都呑里)
 : 관아에서 30리다.
  갈전리(葛田里) : 관아에서 30리다.
  아개리(아介里) : 관아에서 35리다.
  
작천리(鵲泉里)
 : 관아에서 37리다.
  
관산리(觀山里)
 : 관아에서 40리다.
  
수염리(水染里)
 : 관아에서 42리다.
  
저음리(猪音里) : 관아에서 35리다.

   가현내면(加縣內面) 
  성저리(城底里) : 관아에서 40리다.
  
성유리(城踰里)
 : 관아에서 42리다.
  
신당리(神堂里)
 : 관아에서 40리다.
  
수예리(水曳里)
 : 관아에서 45리다.
  
광탄리(廣灘里)
 : 관아에서 45리다.
  
전곡리(前谷里)
 : 관아에서 45리다.
  
민지리(民池里) : 관아에서 50리다.

   가남면(加南面)
  
대현리(大峴里) : 관아에서 53리다.
  
지동리(池洞里)
 : 관아에서 55리다.
  
입암리(立岩里)
 : 관아에서 59리다.
  
말지리(말紙里) : 관아에서 60리다. 말=禾+未

   가서면(加西面)
  본면 
가항리(加項里) : 관아에서 50리다.
  
농암리(籠岩里) 
: 관아에서 53리다.
  
내서리(內西里)
 : 관아에서 57리다.
  
대정리(大井里) 
: 관아에서 55리다.
  
종곡리(鍾谷里)
 : 관아에서 55리다.
  
건천리(乾川里)
 : 관아에서 50리다.
  
마암리(馬巖里)
 : 관아에서 55리다.
  
고모리(高毛里)
 : 관아에서 65리다.
  
송면리(松面里) : 관아에서 90리다.

   가북면(加北面)
  
고산리(孤山里) : 관아에서 30리다.
  
도태리(都台里)
 : 관아에서 40리다.
  
죽문리(竹門里)
 : 관아에서 40리다.
  
완장리(完章里) 
: 관아에서 45리다.
  
원대리(院垈里)
 : 관아에서 45리다.
  
관청벌리(官廳伐里) : 관아에서 70리다.

  [호구]
   1786년(병오:정조 10년) 원호 3,548호, 남자 5,289구, 여자 5,152구

  [전부(田賦)]
   한전(旱田) : 원장부(元帳付) 1,836결(結) 87부(負) 8속(束)
    각 연도 경작지 외 관둔(官屯) 합계 4결 31부 1속
    여러 가지 폐단으로 묵은 면세지 806결 15부 2속
    1845년(을사:헌종 11년) 경작지 1,035결 3부 7속이다.
   수전(水田) : 원장부(元帳付) 965결 62부 7속
    각 연도 못이 경작지로 바뀐 것 외 관둔(官屯)을 합한 3결 42부 5속
   여러 가지 폐단으로 묵은 면세지 376결 45부 3속
   1845년 경작지 592결 59부 9속이다.
   전세(田稅) : 쌀 337섬 12말 7되 3홉 4작은 정한데로 돈으로 받아 1,689냥 2전 5푼, 콩 266섬 4말 9되 9홉 8작을 돈으로 받아 665냥 8전
   대동(大同) : 작목(作目) 33동(同)을 돈과 베로 반반 나누어 베로 16동 25자, 돈으로 1,650냥이다.
   균청(均廳) : 전세(田稅)로 쌀 8섬 12말 4되 2홉 6작, 콩 42섬 11말 9홉 4작은 정한데로 돈으로 납부한다.
   상납 : 대동 무명(大同木) 5동(同) 4필(疋) 6자[尺] 4치[寸]는 돈과 베로 반씩 한다.
  결전[結錢] 1,110냥(兩) 4전(錢) 4푼[分]이다.
  저축미 99섬 6말 9되 1홉 모두 1845년 기준이다.
   요역 : 시탄(柴炭), 치계(稚鷄)는 봄, 가을로 양등분하여 돈으로 사람마다 3냥 6전을 받아 관무(官貿)에 쓴다.

  [군액(軍額)]
   훈련도감(訓鍊都監) : 포보(砲保) 120명
   어영청(御營廳) : 정군(正軍) 40명, 자보(資保) 46명, 상납(上納) 152명
   금위영(禁衛營) : 정군(正軍) 66명, 자보(資保) 70명, 상납보(上納保) 107명
   병조(兵曹) : 기병(騎兵) 108명, 보병 286명, 금군보(禁軍保) 5명, 복직(복直) 11명, 내취(內吹) 1명
   장악원(掌樂院) : 악공보(樂工保) 5명
   공조(工曹) : 장인보(匠人保) 58명
   방군(防軍) : 34명
   아병(牙兵) : 6명
   발군(撥軍) : 60명
   봉수군(烽燧軍) : 50명,  : 150명
   속오군(束伍軍) : 764명
   주진군(主鎭軍) : 3명
   선무군관(選武軍官) : 45인

  [성지(城池)]
   산성(山城) : 조령이 양쪽 산 사이에 걸쳐있다. 호서와 영남의 경계를 이루고 깎아지른 절벽에 돌길이 이리저리 났다. 1708년(숙종 34년, 무자)에 신충원(申忠元)이 쌓은 구성(舊城)을 개축하여 남북에 관문을 설치했다. 영성문(嶺城門)은 조령관(鳥嶺關), 중성문(中城門)은 조동문(鳥東門), 초점문(草岾門)은 주흘관(主屹關)이라 하고 남북 18리 주위 18,509보정도 성을 쌓았다. 상세한 것은 아래 관방난 참조

  [창고(倉庫)]
   사창(司倉)
   가은창(加恩倉) : 가현면에 있다.
   호계창(戶溪倉) : 호남면에 있다.
   동창(東倉) : 산성 안에 있다.
   
조적(양곡의 출납)
    원회(元會) : 쌀, 좁쌀[大小米] 66섬[石] 11말[斗] 2되[升] 4홉[合] 1작[舍]. 잡곡(雜穀) 154섬 6되 6홉 9작
    상진청(常賑廳) : 쌀, 좁쌀 9,115섬 12말 5말 7작. 잡곡 9,080섬 4말 8되 7홉 3작
    수성소(守城所) : 쌀 1,890섬 13말 4되 9홉 8작
    성역전작미(城役錢作米) 332섬 11말 5되 8홉 7작
    균청(均廳) 쌀 1,912섬 3말 9되 1홉 5작
    사진(私賑) 잡곡 24섬 2되 3홉 5작
    첨가곡(帖價穀) 7말 6되 3홉 5작
    별참(別站) 쌀, 좁쌀 2,135섬 8말 3되 1홉 5작. 잡곡 1,358섬 7말 6되 1홉 3작
    영진(營賑) 쌀, 좁쌀 29섬 4말 8되 2홉 6작. 잡곡 62섬 10말 1되 4홉 7작
    군작대미(軍作大米) 1,813섬 7말 2되 7작
    사목대미(射木代米) 12섬 10말 9되 2작
    남창전작미(南倉錢作米) 79섬 12말 2되 3홉
    별회(別會:특별회계) 쌀, 좁쌀 1,024섬 11말 6되 3홉 8작. 잡곡 469섬 1말 9되 7홉
    방채미(防債米) 569섬 14말 5되 8홉 2작
    조령산성 군향미(山城軍餉米) 547섬 1말 2홉 9작. 콩 191섬 7말 8되 8홉 8작
    모두 1845년(을사) 수요분으로 4창에 있다.

  [관방(關防)]
   조령(鳥嶺) : 조령은 계립령에서 뻗어오다 달항(達項)에서 둘로 나누어진다. 한 맥은 동쪽으로 주흘산이 되고 서쪽으로 새재가 되니 돌부리가 높아 산세가 굳세고 서로 맞닿은 곳에서부터 자연 성곽을 이루었다. 조령의 등성마루 북쪽에서부터 충주의 장항(獐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이 나선다. 남쪽은 본 현의 견탄에 이르러야 평원을 만날 수 있다. 그 사이 백여리는 산이 거듭되고 높고 돌 길로 험하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삼한(三韓)때 흥달(興達)이 이곳에 축성한 곳으로 예로부터 일러 온 고사갈이성이 이곳이다. 중문 밖 동쪽 기슭 깊은 계곡의 가운데 어류동은 안이 넓고 밖이 협착하여 수만명을 수용 가능한 하늘이 낸 험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이 제독(李提督:如松)은 이곳을 지나며 지은 시에

조령의 높고 험함이 백리나 이르니
분명하게 하늘은 이 나라를 보호하는구나

     
   한탄하기를 “이렇게 험한 곳을 지키지 않은 신총병(申摠兵:砬)은 무모하다”고 했다.

   계곡(溪谷) 장유(張維)의 부(賦)에

아아 이 고개는 대단히 높고 높아서
웅장하고 빼어나기로 나라에서 이름난 곳

    
   
고모성(姑母城) : 토천 서쪽 단봉 위에 있다. 도로가 마주치는 곳으로 양쪽 골짜기를 묶은 중반 같은데 큰 내가 흐른다. 임진왜란 때 왜적은 병사가 지키는 줄 알고 두려워 여러 차례 확인하고서야 지키는 병력이 없음을 알고 춤을 추고 지나갔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시에

가파르고 위험한 사다리 길을 오르니
측량할 수 없는 낭떠러지로 머리털이 쭈뼜하고
산허리 옛 보루가 있으니
어느 때 설치했는지 알지 못하나
그로부터 태평 세월 오래였으니
싸우던 성벽에는 개암나무와 가시나무 자라네.

     
  [진보(鎭堡)]

  
 조령진(鳥嶺鎭) : 별장 1인, 5읍의 군향창(軍餉倉), 군기고(軍器庫) 등 창고가 있다.

  [봉수(烽燧)]
   
선암(禪巖)봉수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남쪽으로 함창 성산에 응답하고 북쪽으로 탄항산에 응답하는데 50리이다.
   탄항(炭項)봉수 : 현의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선암산에 응답하고 서쪽으로 연풍의 지릅산[麻骨山]에 응답하는데 20리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단묘(壇廟)]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주흘산사(主屹山祠) : 사전(祠典)에 실려 있기를 “봄·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소사(小祠)를 지낸다”고 하였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壇)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희양산사(曦陽山祠) : 지금은 못쓰게 됐다.
  
 재목산사(梓木山祠)
 : 지금은 못쓰게 됐다.
  
 장산사(獐山祠)
 : 지금은 못쓰게 됐다.
  
 관혜산사(冠兮山祠) : 주흘산에서 부제(
祭)한다. 
  
 신증 한천 향현사(寒泉鄕賢祠) : 소양동에 있고 1712년(숙종 38년, 임진)에 창건했다.

  [능묘(陵墓)] : 없다.

  [불우(佛宇)]
  
 봉암사(鳳巖寺) : 양산사(陽山寺)라고도 하는데 희양산에 있다. 876년(당 희종 건부 3년)인 신라 헌강왕 때 국사(國師) 정진(淨眞), 지증(智證), 원오(圓晤), 보조(普照)가 건립했다.
  
 금학사(金鶴寺) 
: 봉명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오정사(烏井寺) 
: 여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신증 혜국사(惠國寺)
 : 조령성 안에 있고 고려 태조가 창건한 보제암(普濟庵)이 있다.
  
 추심사(推尋寺) 
: 화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운암사(雲菴寺) : 재목산에 있다.

  [궁실(宮室)]
  
 행궁(行宮) : 고려 때 창건했으며 옛 어류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누정(樓亭)]
  
 경운루(慶雲樓) : 객관 동남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이지강(李之剛)의 시

뜰 가로 돌아드는 시냇물이 흐느끼듯
마당에 얼룩지며 가득하게 낀 이끼로다
고기잡이 등불이 시내를 건너가고
나무꾼의 노래소리 구름 속 나오는데

     
   함부림(咸傅霖)의 시

눈이 다 녹아 시내 소리 가늘고
연기 사라지니 나무 그림자인가
누각은 높아서 살갗에 소름 돋고

     
   
신증 연정(蓮亭)
 : 객사(客舍) 남쪽에 있다.
   
교구정(交龜亭)
 : 조령의 용추 위에 있다. 관찰사 교인처(交印處)로 성화 연간(成化年間, 1465~1487년)에 현감 신승명(愼承命)이 건립했다.
   
천교정(遷喬亭)
 : 유곡우역(幽谷郵驛)에 있다.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의 기문에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목구멍에 병이 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이것이 우후(禹侯:유곡도 찰방)가 급히 전해 오던 집을 수리하되 유곡을 먼저 한 까닭이리라. 유곡에 관사가 있기는 오래 전부터이다. 처음 건립이 언제인지 모르나 겸선(兼善:홍귀달의 字)이 처음으로 서울에 왕래하면서부터 지금까지 40여년이다. 처음 볼 때에 낡은 건물이었는데 지금까지 고쳐 지은 일이 없으니 그 얼마나 기울었는지 알 만하다.

  큰 손님이 올 때마다 그 누추한 것을 탓하고 길손들은 이전부터 그 좁은 것을 걱정했으며, 나도 지날 때마다 늘 그것을 한탄했었다. 1489년(弘治2년:성종20년)에 우웅(禹雄) 공이 나와서 이 역로의 찰방이 되어 그 파괴되고 쇠잔한 것을 소복시키는데 빠진 계획이 없어 걷는 데는 빨리 걸을 수 있고 타는 데는 말이 잘 달릴 수 있다.

  역로가 완전하게 되자 여럿에게 의논하기를“아무 역의 관사가 퇴락하고 무너졌으니 이것은 사신을 엄숙하게 대하고 길손을 편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우리보다 앞의 사람이 이미 할 수 없었고 우리 뒷사람도 기대할 수 없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우리가 그것을 중수하여야 할 것이다. 유곡은 우리의 본 역이요, 큰 손님이 이르는 곳이며, 또 남북으로 내왕하는 요충인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을 먼저 하려 한다”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재목은 가까운 산의 나무를 베어 오고 힘은 이웃 역졸에게서 얻고 잘하는 목수를 골라서 당(堂)은 옛 터에 새로 세우고 대청(大廳), 동헌(東軒), 서헌(西軒)이며 나머지 그 밖의 것도 모두 옛것을 수리하였다. 백년 동안이나 허물어져 있던 것을 한달 안에 환하게 일신시켰으니 어떻게 그리도 빨리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졌을까?

  당시 겸선은 아버지의 상(喪)을 만나 함창에 있었는데 일찍이 일이 없어 여기를 지나면서 이른바 아른바 새로 지은 동서헌에 잠깐 쉬었다. 대마루를 쳐다보고 창에 의지하여 내다보면 마음과 눈이 탁트이는 것이 옛날과는 아주 다르다. 오래도록 배회하면서 매우 흐뭇해하였다. 우공이 마음쓰기를 
  시에서

역리에 방결이 있어
나는 일찍 지은 시 햔편을
지금 사람이 볼 수 있어 다행이네
이런 일 예로부터 듣기 어렵고
그 명성이 어찌 성하고 쇠함을 따라 변할까
심성에 귀천을 나눌 수 없으나
뒤섞여 언어와 행동이 천박한 사람이여
어찌 만물이 떠가는 구름 같으랴.

  
  문광공은 대제학(大提學) 홍귀달인데 호는 함허(涵虛)이다. 본래 함창 사람으로 조정에 오갈 때 반드시 결(潔)에게 편(鞭)을 잡도록 했다. 내가 일찍이 많은 시를 읽어볼 수 있으니 결의 의리가 오램이다. 1609년(기유:광해 1년) 가을 래산(來山)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역에 들려 결에 대해 물으니 후손 윤남(胤男)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윤남과 함께 길을 간 일이 있었다. 지금 와 보니 윤남은 1611년(신해:광해 3년) 여름에 죽고 또 결의 후손을 수소문하여 간신히 철동(鐵同)을 찾았다. 모두 결의 아들이다. 첫째 아들이 일(一)이고 일의 아들이 평(平)이고 평의 아들이 넷인데 육(六), 칠(七), 팔(八), 구(九)이다. 칠과 팔은 아들이 없고 구의 아들이 하나인데 윤남이고 윤남은 아들이 없다. 육의 아들이 계령(繼齡)이고, 계령은 아들 셋을 두니 풍적(豊積), 부적(富積), 선적(善積)인데 부적과 선적은 아들이 없다. 풍적의 아들이 하나인데 철동이며 철동은 결의 6세손이다.

  1504년(연산 갑자)으로부터 지금 1614년(갑인:광해 6년)까지 110년간 결의 후손이 전해와 6세에 이르러 철동이 유일하게 남았다. 여러 가지 일을 철동에게 물으도 결에 관한 사실을 알지 못하니 내 증조가 결을 읊은 노래를 어찌 알겠는가. 결이 결같이 하거나 결 처럼 이어 온다면 그것은 결 때문이다. 철동은 후손으로 그 상황을 알지 못하고 철동에 이르렀다. 철동이 그 상황을 모르는 잘못이 철동에 있지 않다. 내가 조금은 염려되어 이에 이르기까지 옛일이 역리들도 분명치 않아 장차 결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 염려된다. 결이 살아 있을 때 일들이 막연하고 또한 없었다. 옛 일을 고찰함에 무릇 역에 도착하면 꼭 결에 관한 것을 찾아 본 후 그가 속한 계보와 여러 형태의 글을 찾아 후손을 앞서와 같이 밝혔다. 또 증조와 후손인 내가 길을 지나가며 머문 한 역의 옛 이야기다.
  
시에서

방역리 만난 뒤로 늘 생각하고
서로 만나 손자로서 위해주니
처음 만나도 이미 알아 보았고
그 일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였네
의로운 기상은 오랑캐의 위험을 막고
세상의 인정은 많이 바꾸어 가지만
세월이 오래가도 유곡이란 역에는
두곳에 현판으로 아직 있다네.

    
  
또 시에서

폐조에도 함허당 현판을 홀로 보호하여
나의 할아버지 이미 방결편을 짓고
후손 만나 옛 땅에서 토론에 착수한 후
6년만에 돌아오니 무덤에 풀이 뒤덮였네.

     
  
 비홍정(飛鴻亭)
 : 지금은 없으나 현의 동쪽 5리의 수석이 뛰어난 곳에 있다.
  
 봉생정(鳳笙亭)
 : 현의 남쪽 20리 두 내 사이에 있다.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세웠다. 그 남쪽에 조찬한(趙纘韓)의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다.
  
 열무정(閱武亭) : 소야천가에 있다. 1753년(영조 29년, 계유) 따로 진을 설치하여 본 진의 군병을 조련한 곳이다.

  [도로]
   관아에서 동쪽으로 상주의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함창현의 경계까지 54리, 서쪽으로 충청도 연풍현 경계까지 18리, 북쪽의 연풍현의 경계까지 36리다. 남쪽으로 유곡역이 40리, 서쪽으로 가은창이 40리, 가은창으로부터 갈재까지 15리이고 동남쪽의 호계창까지 40리, 동북쪽 계립령까지 40리, 서쪽 양산사까지 50리, 양산에서 송면의 청주 경계까지 35리이다. 서울까지 377리, 남쪽의 감영(監營)까지 270리, 병영(兵營)까지 480리, 통영(統營)까지 605리다.

  [교량(橋梁)]
   
마포원교(馬砲院橋) : 화봉원 앞내에 있다.
   
소야교(蘇野橋)
 : 소야천에 있다.
   
회연교(回淵橋)
 : 용연 하류에 있다.
   
견탄교(犬灘橋)
 : 견탄천에 있다.
   
양산교(陽山橋) : 양산사(陽山寺) 앞내에 있는 무지개 다리다.

  [도서(島嶼)] : 없다.

  [제언(堤堰)]
   만세제(萬世堤) : 현의 동남쪽 35리에 있고 둘레가 908자[尺]이고 물깉이가 4자이다.
   기제(機堤) : 현의 남쪽 30리에 있고 둘레가 690자, 물깊이가 4자이다.
   비계제(比溪堤) : 현의 남쪽 30리에 있었다. 못 아래 전부(田夫:농부) 등의 상소를 받아들여 1784년(갑진:정조 8년)에 못을 없애고 경작하게 됐다.

  [장시(場市)]
   읍내장(邑內場) : 내외 2장이 있는데 늘 2, 7, 4, 9일에 장이 선다. 진남장(鎭南場) : 1, 6일 호남장(戶南場) : 3, 8일 유곡장(幽谷場) : 2, 7일 가은장(加恩場) : 3, 8일 농암장(籠巖場) : 5, 10일송면장(松面場) : 4, 9일. 고기와 소금은 본 읍에서 나지 않는다.

  [역원(驛院)]
   
유곡역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찰방을 두었다. 유곡도에 속한 역이 18인데 요성(요城 *요=耳+卯), 덕통(德通), 낙원(洛源), 낙동(洛東), 낙양(洛陽), 낙서(洛西), 장림(長林), 낙평(洛平), 안곡(安谷), 구미(구미), 연향(延香), 상림(上林), 대은(大隱), 수산(守山), 지보(知保), 안계(安溪), 쌍계(雙溪), 소계(召溪)이다.
  남쪽으로 함창의 덕통역까지 20리, 북쪽으로 요성역까지 40리이다.
  큰 말 2필, 중간 말 5필, 짐 싣는 말 7필
  역리(驛吏) 1,238인, 일수(日守) 27명, 노(奴) 315구, 비(婢) 53구이다.
  발참(撥站)이 남쪽으로 덕통역에 전하고 북쪽으로 요성역에 전한다. 발장(撥將) 1인, 발군(撥軍) 30명이 있다.
   요성역(
耳卯 
城驛) :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남쪽으로 유곡역까지 40리다.
  큰 말 2필, 중간 말 2필, 짐 싣는 말 6필
  역리(驛吏) 138인, 노(奴) 18구, 비(婢) 7구다.
  발참은 남쪽으로 유곡역에 전하고 북쪽은 충청도 연풍 안보역(安保驛)에 전한다. 발장 1인, 발군 30명이 있다.
   원(院) : 옛날에 조령원(鳥嶺院), 요광원(要光院), 관갑원(串岬院), 회연원(回淵院), 개경원(開慶院), 불정원(佛井院), 보통원(普通院), 동화원(桐華院), 견탄원(犬灘院), 화봉원(華封院) 등 10개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목장(牧場)] : 없다.

  [형승(形勝)]
   
연애잔도(緣崖棧道) : 권근(權近)의 기문에 “관갑(串岬)이 험하여 벼랑에 의지하여 사다리 길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함관촉도(函關蜀道)
 : 어변갑(魚變甲)의 시에 방비의 시설이 “함곡관(函谷關) 같이 장하고 촉나라 길처럼 험해”가기 힘들다고 하였다.
   
응암(鷹巖)
 : 조령의 중성 아래에 있다.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아래는 깊은 구렁인데 돌길은 기울어져 위태롭고 좁아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몹시 두려워 숨을 죽이고 지나가는 조령의 가장 험한 곳이다.
  장유(張維)의 부(賦)에
  ”이른바 출정하는 군사가 이 고개에 이르면 근심이 일고 장사를 가는 사람은 위태로운 이 길을 울고 넘었다.”고 했다.

  [고적(古跡)]
   
호계폐현(虎溪廢縣), 가은폐현.
   
벌천부곡(伐川部谷)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곡(高谷)부곡, 견천(絹川)부곡, 소산천(小山川)부곡, 마량(馬良)부곡
 : 호계에 있다.
   
잉을항소(仍乙項所)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증 고모성(姑母城)
 : 현의 남쪽 20리에 돌로 쌓은 주위 990자 남짓하다. 상세한 것은 관방난 참조
   
고부성(姑夫城)
 : 토천 남쪽 높은 산 위에 있는데 고모성과 마주보며 지금은 퇴락하여 못쓰게 됐다.
   
견훤산성(甄萱山城)
 : 가은현 서남쪽 5리 산 위에 돌로 쌓아 주위 565자이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희양산석성(曦陽山石城) : 현의 서쪽 50리에 있다.

  [토산(土産)]
   은어, 벌꿀(蜂蜜), 석이버섯(石
), 송이버섯(松), 백화사(白花蛇)[지금은 없다], 잣(海松子), 웅담(熊膽), 신증 인삼, 복령(茯笭)

  [진공(進貢)]
   인삼, 적복령(赤茯
), 백복령(白茯), 복신(茯神), 백작약, 자초용(紫草茸), 고루인(苽蔞仁), 감국(甘菊), 자호(紫胡), 연교(連翹), 태수(胎水)

  [봉름(俸름)]
   아록위(衙祿位) : 40결, 쌀 10섬 9말 5되 1홉 2작. 콩 3섬 3말 4되 8홉 8작
   공수위(公須位) : 15결, 쌀 3섬 1말 8되 7홉 2작, 콩 2섬 1말 1되 2홉 8작
   관수(官需) : 쌀 296섬 10말

  [명환(名宦)]
   고려 흥달(興達) : 927년(태조 10년)에 강주(康州)를 순행하려고 사갈이성(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먼저 그 아들을 보내 귀순하였으므로 태조가 가상히 여겨 청주록(靑州祿)을 하사하였고, 맏아들 준달(俊達)은 진주록(珍州祿)을, 둘째 아들 웅달(雄達)은 한수록(寒水祿)을, 셋째 아들 옥달(玉達)은 장천록(長淺祿)을 하사하였다.
   조선 허종항(許從恒) : 문과 급제, 조추(趙秋) : 문과 급제, 세종 때에 모두 현감이 되었는데 다스린 업적이 있었다.
   신증 신단(申湍) [선정비가 있다], 신길원(申吉元) [임진왜란에 순절했다], 윤호연(尹浩然), 김지회(金之誨), 정사온(鄭思溫), 이화(李화), 유계룡(柳季龍), 조직(趙稷), 홍이일(洪履一), 심종직(沈宗直)[선정비가 있다]김인룡(金仁龍), 김해(金해), 남진(南鎭), 조홍서(趙弘瑞), 최무(崔茂), 이경절(李景節), 허섬(許暹), 이호(李灝), 구숙(具숙), 김형(金珩), 한의(韓의), 홍처준(洪處濬)[선정비가 있다], 이동빈(李東彬), 윤창수(尹昌壽), 허윤(許崙), 김구(金垢), 권연(權衍), 박황(朴恍), 김흥지(金興祉), 조변(趙변), 김빈(金빈)[문과], 곽문용(郭文溶), 권선(權선)[문과], 김남갑(金南甲), 이행경(李行敬), 홍정(洪淨), 이중번(李重蕃), 박번(朴蕃), 송세정(宋世井), 원덕하(元德夏)[무과], 최두명(崔斗明)[무과], 이덕령(李德齡)[1695년(숙종 21년, 을해)의 대기근(大饑饉)에 백성을 구휼하여 관내의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어 비가 각방(各坊)에 있다], 이성조(李聖肇)[문과], 이선함(李善咸), 홍시걸(洪時傑)[무과], 이세항(李世恒), 이중창(李重昌)[무과], 송정번(宋廷蕃)[무과], 조영기(趙永期), 김희로(金希魯)[선정비가 있다], 홍우행(洪禹行)[문과], 유선(柳선), 황태하(黃泰河), 이명직(李命稷), 구명규(具命奎)[문과], 정석범(鄭錫範)[선정비가 있다]윤휘정(尹彙貞)[문과], 원필규(元弼揆)[무과], 정즙(鄭즙)[무과], 서종벽(徐宗璧)[1731년(신해:영조 7년) 대기근에 봉록을 풀어 구휼하고 전부(田賦) 1년치를 감하여 동비(銅碑)가 있다], 윤재중(尹在重), 윤면교(尹勉敎), 이의익(李宜益), 이완(李완), 홍응린(洪應麟), 조계(趙계), 윤상임(尹尙任)[문과], 홍역(洪역), 심빈(沈빈), 임정(任정). 이보중(李普中),송준명(宋準明), 김재악(金載岳), 한태유(韓泰裕), 박인영(朴仁榮), 최경(崔炅), 서중수(徐重修), 김동진(金東鎭), 이정규(李正圭)

  [과거(科擧)]
   민척(閔滌) : 선조 때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定郞)에 이르렀다.
   신후명(申厚命) :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강우량(康友諒) : 숙종 때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대동 찰방으로서 마음이 청렴하고 강직했으며 옥패(玉牌)가 하사됐다.
   신이형(申以衡) :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정동윤(鄭東潤) :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에 이르렀다.

  [인물(人物)]
   신라 아자개(阿慈介) : 가은현 사람인데 농부로 집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네 아들이 있었는데 견훤(甄萱)은 곧 그 중의 한 아들이다. 처음 견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수풀에 눕혀 두고 점심을 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듣고 이상히 여겼다.

  고기(古記)에“무진(武珍:현재 광주) 북촌(北村)에 한 딸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나이가 와서 잠자리를 같이 하고 간다’하므로 그 아버지가 시키기를 ‘네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옷에 찔러 놓아라’하여 그대로 하였다. 날이 밝자 그 실을 찾으니 북쪽 담 밑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찔려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어 견훤을 낳았다.” 고 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실을 따라가 보니 추심사의 기와를 쌓아 둔 훤초(萱草) 가운데 있어 견훤이라고 했다”하나 알 수 없다.
   조선 효자(孝子) 조형(趙珩) :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재부정(司宰副正)에 이르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를 3년동안 하였으며,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세종 때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가자(加資) 하고 정여를 세웠다. 
   
열녀(烈女) 최씨(崔氏) : 사직(司直) 안귀손(安貴孫)의 아내이다. 가은현에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치운(致雲)이 시와 글씨를 가르쳤다. 남편이 죽으니 제문(祭文)에

봉황이 함께 날 때 즐겨 노래 불렀는데
봉(鳳)이 돌아오쟎아 황(凰)이 홀로 운다.
하늘에도 물어 봐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
하늘같고 바다같이 넓은 한(恨)이 끝이 없다.

    
  
그 일이 알려져 정려를 세웠다.

   신증 안귀손(安貴孫) : 사간(司諫) 질의 아들이다. 덕행이 순수하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한천 향현사에 향사하게 되었다.
   
신숙빈(申叔彬) : 문희공(文僖公) 개(
)의 손자로 지조와 행실이 고결하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바로 세우고 숙양동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한천 향현사에 향사하게 되었다.
   
김낙춘(金樂春)
 :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은거하여 도를 구하고 실천하는데 독실했으며,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호는 인백당(忍百堂)이고 소양 향현사에 향사하게 되었다.
   정언신(鄭彦信) :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고 가은에 살았다. 호는 나암(懶庵)으로 소양 향현사에 향사하게 되었다.
   심대부(沈大孚) :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고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죽으로 연명했다. 가은에 살았고 호는 범재(泛齊)이며 소양 향현사에 향사하게 되었다.
   이심(李심) : 병자년 이후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은둔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묘를 지켰다. 호는 가은(稼隱)이고 인조 때 사전(師傳)에 제수되고 소양 향현사에 향사하게 했다.
   남영(南嶸) :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물고기를 먹고 싶어하나 강물이 불어 넘쳐 고기를 잡을 수 없어 울면서 빌었더니 문득 잉어가 뜰에 뛰어 들었다. 사람들은 “효성에 감동한 때문이라”고 했다. 호는 고산(孤山)이고 숙양 향현사에 향사하게 했다.
   
신필정(申弼貞) : 은거하여 성리학을 가르쳤는데 예학(禮學)이 더욱 정밀하고 밝았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주부(主簿)에 이르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으며 뒤에 관찰사의 장계에 의하여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되었다.

  [효자]
   
김시진(金始振) :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멀건 죽으로 연명하였다.1720년(경자: 숙종46년)에 국상에 나이가 80이 지난 몸으로 멀건 죽과 채소로 연명하다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1732년(임자:영조8년)에 그 사실이 위에 알려져 판서(判書)에 증직되었다.
   최억수(崔億守) : 호계의 양인으로 어머니가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자 억수가 지성으로 모셨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더러운 물건을 잘못 먹었으나 억수가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부인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옥황상제에게 어머니의 눈을 뜨게 청원하리라”고 했다. 그 후 꿈에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옥황상제에게 청한 것이 있으니 어머니 눈이 반드시 밝을 것입니다”고 했다. 이른아침에 집사람들이 눈을 씻어주니 과연 눈이 밝은지라 “효성에 감동한 때문이라”고 했다.
   
주득천(周得天) : 신북의 양인(良人)으로 어머니가 눈이 멀어 수십 년을 밤낮 옆에 있으면서 수발과 음식을 먹여 드렸다. 여름에 어머니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사방으로 꿩을 찾아다니다가 구하지 못하고 울면서 돌아오는 도중에 매가 날아가며 꿩을 득천의 앞에다 떨어뜨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살이를 했다. 그 일이 위에 알려져 부역(負役)을 면제했다.

  [열녀]
 
  윤소사(尹召史) : 정병(正兵) 조막룡(趙莫龍)의 아내이다. 남편이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죽자 소복을 하며 완전히 절개를 지키고자 하니 그 아버지가 가엽게 여겨 뜻을 꺾으려 재혼을 권하자 따르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인조 때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세웠다.

  [제영(題詠)]
   
분단명협리(奔湍鳴峽裏) 최수(崔脩)의 시에

북쪽을 바라보니 산천이 막혀 있고
남쪽으로 와서는 세월만 흘러간다.
달리는 여울은 골짜기를 늘 울리고
눈 쌓인 벼랑아래 그늘이 뒤덮었다.

    
   
동밀청운합(洞密晴雲合) : 고려 정포(鄭包)의 시에

동구는 그윽하여 구름 가운데 맑고
높은 누각에 달이 비치니 더욱 좋다.
 

     
    
산기혼여무(山氣昏如霧) : 김구경(金久)의 시에

산속 아지랑이 안개같이 아득하고
시냇물은 이끼처럼 푸르구나

     
   팔영(八詠) 서거정(徐居正)의 시

 

        주흘(主屹)의 영사(靈祠)
        험한 산은 하늘 끝에 닿았고
        깎아지른 벼랑은 구름속에 들어있다.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비록 그 자취 없으나
        구름을 일으킴에는 스스로 공이 있다.

        관갑(串岬)의 사다리길(棧道)
  
      구불기는 양의 창자 같은 길이
        구불구불 새 나는 것 같이 기이하도다.
        봉우리 하나하나 모두 빼어났으니
        그런데도 말 가기가 더디구나.

        창밖의 오동나무(窓外 梧桐)
   
     솔솔 부는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데
        이지러진 달이 성긴 가지에 걸렸구나.
        갑자기 내리는 한밤중 비에
        고향 생각을 어이하리.

        뜰 앞의 버드나무(庭前 楊柳)
   
     영남의 그 많은 나그네들
        꺾어 주어 이제는 남은 것이 없으련만
        의연히 봄바람에 떨치니
        긴 가지는 짐짓 여전하구나.

        푸른 절벽의 단풍(蒼壁 楓丹)
   
     붉은 잎이 푸른 절벽을 장식하니
        강산이 아주 딴판이로구나.
        내가 온 때가 마침 늦가을
        이렇듯 좋은 경치 일찍이 본적이 없네.

        그늘진 벼랑에 흰눈(陰崖 白雪)
   
     겨울이 깊어서 얼음이 골짜기에 가득해도
        봄이 오면 물이 시내를 이룬다.
        자연의 모습은 때를 따라 달라지는데
        인정은 늙어 가며 어지러워지련다.

        오정사 종루(烏井鐘樓)
   
     나그네길 시름으로 잠 못 이루는데
        외로운 베갯머리엔 달빛만 비쳐 온다.
        어디가 한산사
57)
이냐
        드문드문 울리는 종소리 한밤중에 들려 온다.

        용담폭포(龍潭瀑布)
   
     옥같은 무지개 높다랗게 드리웠는데
        흰 눈은 산뜻한 맑음을 뿌려 준다.
        날고 자맥질하는 술법을 묻지 말고
        변화의 신통을 알아야 하리.

 

 
   신증  요성역관(耳卯 城驛館) : 이규보(李奎報)의 시

유곡의 하루 밤을 술 취해 자고나니
요성길 한나절에 말 멍에 풀어 쉰다
돌아온 완적은 휘파람만 오래 불고
쓸쓸한 상여(相如)는 벼슬에 실증 났네
역 아전들 송영(送迎)은 언제쯤 끝이나고
사신들의 내왕은 어느 때 멎으려나
나 같이 한가로운 길손은 다행이다
와도 번거롭히잖고 가는 것도 마음대로니

     
    교구정(交龜亭) :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시

교구정 오르니 천지가 오만해도
서릿빛 구렛나루서 큰 것을 깨달았다.
물소리는 음악같이 스스로 격려하며
수천 바위는 노을 들어 그림이구나
시로서 읊기 전에 새 먼저 날아갔고
눈물 쓰린 이 회포는 원숭이 애끓음 같아
남쪽 길 이미 막히어 쌍척후를 보내고
달 밝은 오늘밤을 어느 마을서 자야할까.

     
   유곡역관(幽谷驛館) 우암(尤庵) 홍언충(洪彦忠)시

역관에 베개 배고 누웠으니 맑은 바람마저 외롭고
오랜 느티나무 가에서 석잔 술을 기울인다
이번 가는 길 살아서 돌아올 날 알지 못하나
마음은 여유로와 모든 일을 하늘에 맡긴다.

   
    조령을 넘으며(過鳥嶺) : 오숙(吳숙)의 시

사물의 중요함을 잠시봐도 조화롭고
북쪽서 뻗은 고개 여기서 웅장하다.
불이 떨어지니 폭포로 장엄하고
원래 상주진이 새재길로 통했는데
화각(畵角) 부는 공중에 새벽 안개 걷히고
대장 깃발 땅을 떨쳐 바람에 휘날린다.
이번 길에 선비의 초라함을 씻으니
만리 밖 해뜨는 곳이 눈에 있구나.

 
  [비판(碑板)]
  
 현감 신길원(申吉元) 충렬비(忠烈碑) : 채팽윤(蔡彭胤)이 지은 서문(序文)에

  신 현감께서 부임한 지 두 해 지난 임진년에 왜놈이 부산 동래를 짓밟고 아침 저녁에 곧 닥칠 것 같은 상황이라 대부인(大夫人:모친)을 집으로 보내고 현감은 대구로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부성(府城:대구)이 함락됨을 듣고 곳 주장(主將)을 찾아갔다. 상주 주장 권후(權候:權 尙州牧使)는 돌아가서 군량을 거두라 하여 문경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적병이 문경에 다가오자 아전과 군사들 모두가“도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곧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피할 것을 권했다. 현감은 큰 소리로 격려하기를 “내가 고을을 맡은 신하로서 이 땅을 지키며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요”하고 적은 군사를 독려했으나 문간에 적병이 이르자 달아나지 않는 이가 없고 현감과 종 하나만 남았다.

  현감이 관복(官服)을 입고 관인(官印)을 차고 앉았는데 적장이 칼을 들이대고 묻기를 “왜 말을 타고 달아나지 않았는가”고 하자 현감이 “나는 선비다. 어찌 말을 타고 달아날 것이냐”하니 곧 항복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협박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한양 가는 길을 물어도 가리켜 주지 않으며 손을 들어 목을 가리키며 꾸짖기를“내가 너 같은 놈을 만 토막을 내어 죽이지 못함이 한이 된다. 속히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하니 적장이 성을 내며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은 채 꾸짖기를 계속하자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니 4월 27일이다.

  임금께서 들으시고 좌승지(左承旨)를 증직하셨다.슬프다. 벼슬하는 것이 평소에는 누구나 스스로 즐겁지 않을까마는 조그마한 이해가 있어도 지킬 바를 바꾸지 않는 이가 드문데 하물며 시퍼런 칼날 밑에서이랴. 또 강병이 큰 진영으로 막아도 달아나는 이를 볼 수 있으니 공은 참으로 충렬의 선비이다. 비명(碑銘)을 지으니

죽을 줄 알면서도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공의 깨끗한 마음이며
그 영결을 어머니에게 고할 제
어머니 계시고 자식이 죽음을 불효라 하는
이 말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기왕에는 충성과 효도 두 가지를 같이 할 수 없으나
공은 두 가지 다 만남 따라 온전히 이루었네.

     
   김낙춘(金樂春) 묘갈(墓碣) :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서문에

  옛날 우리나라 퇴계 이 선생께서 도산에 강도(講道)할 때 한 시대의 제현(諸賢)이 문하에 왕래하였는데 인백당 김공이 그 중 하나였다. 공의 이름은 낙춘(樂春) 자는 태화(泰和)인데 그의 조상은 순천인이다.

  공은 풍도가 아주 깨끗하고 성격도 매우 침착했으며 학문에 힘쓰기를 독실히 하여 문예가 일찍 이루어졌다. 나이 21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했는데 국가에서 무슨일로 인해 파방(罷榜)시켰다. 다시는 거업(擧業)에 힘쓰지 않고 성현(聖賢)의 경전(經殿)에만 마음을 붙였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모든 경전(經典)중에 오직 춘추(春秋)만이 성인(聖人)의 수필(手筆)이다”라고 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익숙하게 읽었는데 모경(暮境)에 이르도록 걷어치우지 않았었다.

  파청정(把淸亭) 김부의(金富儀)와는 내외종(內外從)이 되었는데 늘 한 방안에 모여서 경의(經義)를 강구(講究)하였다. 같은 문하에 다니는 어떤 사람이 일찍이 횡액에 걸려들어 화를 헤아릴 수 없게 되자 선생께서는 매우 걱정하였다. 공이 그에게 찾아가 무사하도록 만들고 그와 함께 도산으로 와서 선생을 뵙게 되었다. 선생께서 매우 기쁘게 여기고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대의 높은 풍의(風義) 하늘까지 당하겠구나
우물 속에 빠진 사람 재빨리 건져내어
잘 구호하여 나에게 찾아와 부탁한 다음
은혜로운 그 마음 자랑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리네

     
  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도산집 속에 실려져 있다.
  공은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였다. 친상을 당하였을 때 수질과 요대를 늘 벗지 않고 묘 아래에 여막을 지어 묘를 지키면서 아침 저녁으로 참배하였다. 부인 신씨가 일찍이 병이 위독하여 공을 한번 만나자고 간청하였으나 공은 “상제로서 내실을 멀리한다”는 이유로 끝내 만나주지 않았었다. 일평생 몸가짐에 대해서는 검소한 생활로 옷은 반드시 베옷을 입고 음식도 여러 가지 반찬으로 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문경 산수를 사랑하여 안동 풍산 가곡을 떠나 가은 소양동으로 이거하였다. 독서하는 시간외는 낚시질도 하고 갈매기를 친구로 삼으면서 낙을 붙였었다.

  1586년(선조 1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63세고, 묘소는 숙양동 오향(午向)에 있다. 1713년(숙종 39년, 계사)에는 공이 살던 유지에다 사당을 세워 제향을 올린다.
  
비명(碑銘)에

행실은 몸소 닦았는데 학문은 스승에게 받았었다.
춘추를 애써 읽은 것은 의리가 깊기 때문이었다.
소상강 물 한 굽이 깨끗한데 낚시질도 목욕도 다할 만하다.
모경에 여기다가 터를 잡고 아무 걱정 없이 낙을 붙였네.
위에는 우뚝한 무덤 있는데 석인(碩人)을 옛날에 장사 지냈다오
정협(精夾)이 여기에 머물러 있어 소나무와 계수나무가 울창하다.

     
  
 참판에 증직된 신상철(申尙哲) 묘갈 :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비명과 서문에 신군(申君) 상철은 자(字)가 명숙(明淑)으로 나와 어려서부터 뜻이 같아 서로 친하였으며 지난 1609년(선조 39년)에 진사 과거를 함께 보았다. 또 서로 좋아했던 것은 나의 외고(外姑) 정씨(鄭氏)는 바로 신군의 이모(姨母)가 되는지라 매양 나의 처가에 머무르면서 함께 술을 마시며 서로 즐겼다.

  신군은 대대로 서울에 살았는데 1618년(만력 무오:광해 10년)에 온 식구를 거느리고 영남 상주의 영순리로 이거하였다. 내가 일찍 공무로 그 살던 곳을 지났는데 신군이 많은 술을 장만하여 큰 여울 위에 앉아 서로 반가워 평생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 저녁인 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1624년에 내가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었는데 신군은 앞서 1년 전에 태학(太學:성균관)의 천거로 벼슬길에 들어가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 한성부 참군(參軍) 광흥창(廣興倉) 주부(主簿) 형조 좌랑(佐郞)을 두루 역임하던 중이어서 다시는 냇가에서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없는 지라 마음이 괜히 서운하였다.

  그후 조정에 돌아와서는 각기 직무에 매달려 출입을 전과 같이 자주 갖지는 못하지만 가끔 만나서 서로 함께 줄거움을 나누었다. 신군은 관리로서 매사에 정밀하고 민첩하여 간사함을 더욱 미워하였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조금도 넘보거나 속이지 못하였다.

  1627년(인조 5년)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강도(江都:강화도)로 행차할 때 신군이 호조의 낭관(郎官)으로 홀로 머물러 창고의 자물쇠를 맡고 있었는데 밤에 도둑이 사닥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 들어왔다 달아나는지라. 신군이 순찰 책임자를 불러 이르기를 “만약 도둑이 창고 가까이 어른거리면 너의 목을 먼저 베리라”하고 평상시와 같이 코를 골며 자고 있어도 도적들이 흩어지고 이속(吏屬)들이 잘 지키어 많은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운반하여 배에 모두 실었다. 이에 호조판서가 그 재주를 천거하여 밤낮으로 행궁의 문을 지키게 하고 당시 모든 크고 작은 사건을 신군에게 의지하여 결정하였다.

  조정에서 오로지 대단함을 시험하고자 전주 판관(判官)에 제수하자 그곳에 부임하여 청렴과 근엄으로 처세하여 조례를 분명히 하고, 기회를 준절(峻切)히 하여 간사한 행위를 근절하는데 주력하였다. 그 해 봄에 해창(海倉)과 전세(田稅)를 감독했는데 교활한 토호(土豪)가 세력가의 힘을 믿고 백성들을 괴롭히어 간사한 이익을 취함으로서 신군이 법에 의하여 가차없이 처벌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비방하는 말을 근거없이 꾸며 신군을 헐뜯었다. 이로서 관찰사가 사람을 시켜 조사하였으나 그런 사실이 없는지라 마침내 신군이 허물을 면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신군에게 말하기를 “과히 근심이 되지 않았는가”하니 신군이 대답하기를 “근심하지 아니한다 간악한 아전들이 법을 희롱하는데 어찌 놔두겠는가”하였다.

  1630년(인조 8년)에 호조 정랑에 올라서 여러 차례 주상에게 직접 인대(引對)되어 사리를 분별하여 이해를 말함에 심히 밝으니 주상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고 받아들였다. 얼마 후에 외직으로 의흥 고을에 전보되어 정사를 잘하니 이 고을 백성들이 오랫동안 있어 줄 것을 바랐다. 1632년(임신:인조 10년)에 안동 판관으로 옮겨 고을을 다스리는데 전과 같이 선정을 베풀다가 얼마 안되어서 질병으로 사직하였다. 집에 돌아와 머리를 빗고 얼굴빛을 가다듬어 모친을 배알하고 능히 임종때까지 모시지 못함을 큰 불효라 말하고 아들 승구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할머님을 잘 모셔라”하고 드디어 돌아가시니 나이 48세였다. 문경 고을 오리동에 장례를 치렀으며 후에 정사원종훈(靖社原從勳)으로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의 증직을 받았다.

  신군은 행실을 갖추어 뜻이 고결하고 배움이 넉넉하였으나 운명이 박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이 있어 아홉 살 때 난리를 피하여 예천 산중으로 들어가 여러 아이들을 따라 도토리를 주워 먹지 않고 말하기를 “할머니는 굶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먼저 먹겠는가”하고 가지고 집에 돌아가 할머니에게 드렸다. 대사간 홍호(洪鎬)가 이때에 또한 어렸었는데 이것을 보고 황송하여 옹송그렸다 하니 신공의 효성은 참으로 하늘에서 타고났나 보다. 열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섬김에 지성을 다하고 또 홀로 계신 고모를 봉양하기를 어머니 모시듯 종신토록 한결같이 하였으니 군자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신군은 자품이 바르고 곧아 옳지 않은 것은 뜻에 두지 않고 또한 버리어 돌보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 10년 동안 소임에 전력하여 조금이라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며, 매사에 한 뜻으로 전념하여 행함에 돌이키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처음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스스로 학문을 힘써 닦고 소학, 논어를 손수 써서 일상생활의 바탕을 삼았으며, 때로는 여러 벗들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어버이에게 영광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난 생전에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고 죽음 또한 빨랐으니 그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남겨 두고 한을 품고 천양에 돌아가 어찌 눈을 감았겠는가.
  
비명(碑銘)에

하늘은 오직
재주와 어짐을 경히하고
오랜 삶을 중히 여겨
사람 또한
통달하기를 쉽게하고
성취하기를 어렵게 하는가
어찌 신군은
경하고 쉬운 것만 얻고 
중하고 어려운 것은 잃었으니
이제 어찌하나 신군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