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 집주 문경사

2014. 5. 14. 20:00나의 이야기






       

14.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집주 문경사 / 개인발간 향토자료 

2012/08/0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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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삼국사기지리지고려사지리지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부 록

  

 

 

 集註                         

  문     경     사  

 

 

14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차        례

  해 설
  번 역
      문경현(聞慶縣)
  건치 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관직(官職)
  성씨(姓氏)
  산천(山川)
  풍속
  방리(坊里)
  호구
  전부(田賦)
  군액(軍額)
  성지(城池)
  임수(林藪)

  창고(倉庫)
  군기(軍器)
  관액(關阨)

  진보(鎭堡)

  봉수
(烽燧)
  학교
  단묘(壇墓)
  능묘(陵墓)
  사찰(寺刹)
  누정(樓亭)
  도로
  교량(橋梁)
  도서(島嶼)
  제언(堤
堰)
  장시(場市)
  역원(驛院)
  목장(牧場)
  형승(形勝)

  고적(古跡)
  토산(土産)
  진공(進貢)

  봉름(俸廩)

  환적(宦蹟)
  과거(科擧)
  인물(人物)
  제영(題詠)
  비판(碑板)
     상주목(尙州牧)
     예천군(醴泉郡)
     함창군
     용궁현


  [해 설]

  경상도읍지는 조선 후기 순조 때 편찬한 경상도의 지리지로 필사본이며, 편찬 시기는 1832년경(순조 32년경)으로 추정되고 경상도 관찰사의 명령에 따라 각 군 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경상 감영에서 책으로 만든 것이다. 71읍이 20책에 전부 수록되어 사료적 가치가 높고 문경은 17책에 수록되어 있다.

  수록 항목은 40개 항목으로 각 읍 모두 일관된 체계로 정리되어 있어 여지도서 보다 항목 구성이 체계적이다. 첫머리에 간략한 채색 지도가 첨부되어 있고 이어서 각 읍의 건치연혁, 군명, 인물, 제영(題詠), 비판(碑板) 등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풍속, 인물, 시문을 수록하고 있다.

  특히 군사면에서는 산성창의 조적(양곡의 출납), 군기(軍器)가 4회에 걸쳐 보충한 내역별로 기록되어 있다. 환적난의 역대 현감 100명의 기록을 남겼으며 향교의 소재만 기록되어 오다가 교생(校生), 유생(儒生), 동몽(童蒙) 등의 기록이 있는 등 내용이 광범위하고 풍부하며 상세한데다 사실적이라 19세기 초기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더욱 크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문경현 상주목 예천군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문경현, 상주목, 예천군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경상도

-

            문경현

-

   문경 마성 호계 점촌 가은 농암

 

 └ 

           상주목

-

   영순 산양 산북

 

           예천군

   동로

  1982년 아세아문화사에서 한국지리지 총서로 영인 발행했다.
  

  [번 역]

문  경  현  지(聞慶縣誌)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는 신라의 관문현(冠文縣)[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라고도 하고 관현(冠縣)이라고도 하였다]인데 경덕왕이 관산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에 소속시켰다. 고려 때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공민왕이 감무를 두고 조선조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속현 가은현(加恩縣) : 현의 남쪽 41리에 있고 본래 신라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이 가선(嘉善)이라고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소속으로 하였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 문경현에 소속하게 되었다.
   호계현(虎溪縣) : 현의 동남쪽 4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호측현이었으며,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하였으며 조선조의 태종 때에 문경현에 소속되었다.

  [군명(郡名)]
   관문(冠文),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관산(冠山), 문희(聞喜), 관현(冠縣)
   세상에 전하기를 관혜산이 현의 남쪽에 있어 고을 이름을 관현이라 했다. 고려 공민왕이 본 현에서 승첩보를 들어 고을 이름을 문경으로 했다.

  [관직(官職)]
   
현감(縣監) : 수성장을 겸했으며 음직(蔭職) 6품관이다.
   1752년(영조 28년:임신)에 조령진을 설치했다.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2인, 장교(將校) 6인, 아전(衙典) 31인, 지인(知印) 20인, 관노(官奴) 17명, 관비(官婢) 10명
   
유곡찰방(幽谷察訪) 
: 문과(文科) 출신 6품관이다.
  아전 34인, 지인 18인, 관노 20명, 관비 10명
   조령별장(鳥嶺別將) : 무과 출신 4품관이다.
  장교 4인, 진리(鎭吏) 5인, 지인(知人) 3인, 진노(鎭奴) 9명

  [성씨(姓氏)]
   최(崔)씨, 박(朴)씨, 송(宋)씨, 전(錢)씨, 김(金)씨, 전(全)씨, 윤(尹)씨, 연(延)씨, 황(黃)씨, 방(芳)씨, 심(沈)씨, 고(高)씨, 이(李)씨, 신(申)씨, 민(閔)씨, 채(蔡)씨, 남(南)씨, 원(元)씨, 정(鄭)씨, 주(周)씨, 권(權)씨, 홍(洪)씨, 배(裵)씨, 임(林)씨, 안(安)씨, 전(田)씨, 유(柳)씨, 엄(嚴)씨

  [산천(山川)]
   
주흘산(主屹山) : 현의 북쪽 5리에 있고 계립령에서 뻗어 온 문경현의 주산(主山)이다.
   
관혜산(冠兮山)
 : 현의 남쪽 4리에 있고 주흘산에서 뻗어 왔다.
   희양산(曦陽山) : 가은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옛 성이 있어 3면이 모두 석벽이고 옛 군창이 있고 소둔산에서 뻗어 왔다.
   
재목산(梓木山)
 : 가은현의 남쪽 2리에 있고 갈령에서 뻗어 왔다.
   
장산(獐山)
 : 호계현의 북쪽 2리에 있고 야운령에서 뻗어 왔다.
   봉명산(鳳鳴山) : 현의 동쪽 8리에 있고 운달산에서 뻗어 왔다.
   
소둔산(所屯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고 이화현에서 뻗어 왔다.
   화산(華山) : 가은현의 서쪽에 있고 본현에서 67리에 있으며 불일산에서 뻗어 왔다.
   
이화현(伊火峴)
 : 현의 서쪽 18리에 있고, 공충도(公忠道) 연풍현 경계로 공정산에서 뻗어왔다.
   계립령(鷄立嶺) : 속칭 지릅산[麻骨山]이 방언으로 비슷하다. 현의 북쪽 38리에 있고 신라시대 이래 옛길이고 대미산에서 뻗어왔다. 
   
조령(鳥嶺)
 : 현의 서쪽 27리, 연풍 경계에 있는데 세상에서는 새재〔草岾〕라 하며 계립령에서 뻗어 왔다.
   관갑
천(串岬遷)
 : 용연의 동쪽 벼랑으로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리 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 7리나 된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이르니 길이 없었다.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곳으로 길을 열게 되어 토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야천(蘇野川)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계립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새재에서 나와 화봉원 앞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관갑에 이르러 가은천과 합친다.
   
가은천(加恩川)
 : 가은현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속리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양산에서 나와 합쳐 동쪽으로 흘러서 소야천과 합친다.
   
용연(龍淵)
 : 현의 남쪽 22리에 있고 가은천과 소야천의 두 내가 합치는 곳이다.
   
견탄(犬灘) 
: 호계현 서쪽 5리에 있는데 용연의 하류이다. 나루가 있으며 남쪽으로 흘러서 함창으로 들어간다.
   
조천(潮泉)
 : 둘이 있다. 하나는 현의 남쪽 소둔산에 있는 것으로 물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줄같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솟아 넘쳐 3리까지 가서 멎는 것이 마치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는 것과 같다. 하나는 현의 남쪽 5리 정곡리(井谷里)에 있는 것으로 흙구멍에서 매일 3번 뿜어 넘쳐 동구로 흘러 소야천으로 들어가는데 물미리[水推]라 한다.
   
용추(龍湫) : 새재 아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폭포가 있는데 4면과 바닥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숨었던 곳이라고 전해 온다.

   어변갑(魚變甲)의 시

용이 꿈틀거려 소용돌이 헤치가도
잠긴 하늘에는 밝은 달이 새롭다.
개인 날 우레치고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타 누가 그 신비를 알리.

      
   
인천(寅川)
 : 호계현의 동북쪽, 본 현에서 32리에 있다. 평지에서 동서로 솟아나 갈래내[岐川]이라고도 한다.
   
대미산(黛眉山)
 : 현의 동북쪽 30리에 있고, 동쪽의 풍기 소백산에서 뻗어 와 본 현 여러 산의 시조가 된다.
   공정산(公正山) : 초곡의 서쪽 8리에 있고 조령에서 뻗어 왔다.
  주현(周峴) : 희양산 서쪽 연풍과 경계이다.
   
대야산(大耶山) 
: 가은현 서쪽 20리에 있으며 희양산에서 뻗어 왔고 기우제를 지내면 감응이 있다.
   
불일산(佛日山)
 : 가은현 서남 20리에 있고 대야산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단(祈雨壇)이 있다.
   
불한령(弗寒嶺)
 : 대야산 중허리를 통과하면 청주경계에 이른다.
   
고모령(高毛嶺)
 : 대야산 남쪽 2리에 있고 괴산 경계에 이른다.
   
갈령(葛嶺)
 : 가은현 남쪽 15리에 있고 속리산에서 뻗어 왔다.
   
호항령(狐項嶺)
 : 현의 동쪽 35리에 있고 대미산에서 뻗어 왔다.
   
황장봉산(黃腸封山)
 : 대미산 아래에 있고 둘레가 10리이다.
   
용뢰산(龍磊山)
 : 운달산(雲達山)이라고도 하며 현의 동쪽 20리에 있고 호항령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제를 지내면 감응이 있다.
   야운령(野雲嶺) : 현의 동쪽 20리에 있고 운달산에서 뻗어 왔다.
   
어류동(御留洞)
 : 조령성의 동쪽 깊은 계곡으로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머문 관계로 어류동이라 하며 궁실(宮室)터가 있다.
   
선유동(仙遊洞) : 대야산 동쪽 7리에 있다. 깊고 큰 골짜기 가득 흰 바위와 맑은 시내가 굽이치는 가운데 9곡(九曲)이라는 경치 좋은 곳이 있다. 옥석대(玉臺), 난생뢰(鸞笙瀨), 영귀암(詠歸巖), 탁청대(濯淸臺), 관란담(觀瀾潭), 세심대(洗心臺), 활청담(活淸潭), 영사석(靈
石), 옥하대(玉河臺) 모두 바위에 큰 글자로 새겨 있다.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된 신필정(申弼貞)이 쉬지 않고 학문을 닦은 곳이다.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시에

양쪽 선유동은 가까운 거리인데
지금은 그 사이에 구름이 한가롭고
어느 곳이 뛰어난지 평하기도 어렵도록
하늘의 장수가 있어 수석 고루 나눴네.

  
   용유동(龍遊洞) : 불일산 북쪽 5리에 있다. 흰 바위가 평탄하게 깔린 곳에 큰 시내가 흐르고 그 위에 여러 마리 용이 뒤엉켜 논 자국이 있어 용유동이라 한다. 그 아래 깊은 소〔深湫〕가 있으니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야유암(夜遊巖)
 : 봉암사 동쪽에 편편한 바위가 희고 맑으며 깨끗한데 밤에도 놀 수 있어 야유암이라 하고 세상에 전해 오기를 최고운(崔孤雲:致遠)이 놀던 곳이라 한다. 취적대(取適臺) 3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백운대(白雲臺) 
절의 서쪽 몇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백석폭포(白石瀑布)의 경치가 뛰어나다.
   용추(龍湫) : 선유동 상류에 있는데 바위가 솟아 폭포와 소를 이루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아래에 판서(判書) 이재(李縡)가 세운 정자가 있다.
  이재의 시에

늦게 이산의 좋은 경치 만나보니
벌써 전생의 인연이 있었나 보다
당귀가 밥맛을 다시 돋우는데
철쭉꽃은 어찌 그리 더디 피는가
비 그치며 천길 벼랑 씻어 내리고
우뢰 소리는 깊은 골을 울리는데
신령한 신선은 손을 머룰게 하여
나는 더욱 기이함을 자랑토다.

  
  [풍속]
   꾸밈이 적고 실질을 숭상함이 많아 순박하기가 성현의 도에 가깝다.

  [방리(坊里)]
   
읍방(邑坊) : 주흘산 아래에 있다. 동쪽으로 상주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함창 경계까지 54리, 서쪽으로 공충도 연풍 경계까지 18리, 북쪽으로 연풍현 경계까지 36리, 관아에서 서울까지는 377리이다.

   신동면(身東面) 
  
정곡리(井谷里)
 : 관아에서 5리다.
  
금곡리(金谷里)
 : 관아에서 8리다.
  
어항리(於項里) 
: 관아에서 10리다.
  
기화곡리(其火谷里) 
: 관아에서 17리다.
  봉생리(鳳笙里) : 관아에서 25리에 있다.
  
신원리(新院里) : 관아에서 20리다.

   초곡면(草谷面)
  
진안리(陣安里) : 관아에서 6리다.
  각석동리(各石洞里) : 관아에서 10리다.
  요광원리(要光院里) : 관아에서 20리에 있다.
  초곡리(草谷里) : 관아에서 28리다.

   신북면(身北面) 
  요성역리(요城驛里) : 관아에서 4리이다. 요=耳+卯
  광수원리(廣水院里) : 관아에서 8리이다.
  
파팔리(巴八里)
 : 관아에서 12리다.
  
고요성리(耳卯 里)
 : 관아에서 12리다. 요=耳+卯
  
화지동리(花枝洞里)
 : 관아에서 13리다.
  
시문리(矢門里)
 : 관아에서 15리다.
  
벌천리(伐川里) 
: 관아에서 20리다.
  
용연리(龍淵里)
 : 관아에서 25리다.
  
중평리(中坪里)
 : 관아에서 35리다.
  
관음원리(觀音院里) : 관아에서 30리다. 

   신남면(身南面) 
  마포원리(馬浦院里) : 관아에서 5리다.
  우어동리(牛於洞里) : 관아에서 8리다.
  
모곡리(茅谷里)
 : 관아에서 12리다.
  
정동리(鼎洞里)
 : 관아에서 15리다.
  구랑리(九郞里) : 관아에서 20리다.
  내서천리(乃西川里) : 관아에서 25리다.

   호서면(戶西面)
  
불정원리(佛井院里) : 관아에서 36리다.
 
 유곡역리(幽谷驛里)
 : 관아에서 40리다.
  
진곡리(辰谷里) 
: 관아에서 45리다.
  
모전리(茅田里) : 관아에서 52리다.

   호남면(戶南面)
  
창리(戶倉里) : 관아에서 40리다.
  
송연리(宋淵里)
 : 관아에서 40리다.
  
우지동리(牛池洞里)
 : 관아에서 44리다.
  
흥덕동리(興德洞里) : 관아에서 47리다.

   호현내면(戶縣內面)
  
견탄리(犬灘里) : 관아에서 30리다.
  
주평리(舟坪里)
 : 관아에서 34리다.
  
굴암리(屈巖里)
 : 관아에서 35리다.
  
호계리(戶界里)
 : 관아에서 37리다.
  
우노곡리(牛老谷里) : 관아에서 40리다.

   가동면(加東面)
  
왕릉리(王陵里) : 관아에서 30리다.
  
도탄리(都呑里)
 : 관아에서 30리다.
  갈전리(葛田里) : 관아에서 35리다.
  아질개리(阿叱介里) : 관아에서 30리다.
  
작천리(鵲泉里)
 : 관아에서 37리다.
  
관산리(觀山里)
 : 관아에서 40리다.
  
수염리(水染里)
 : 관아에서 42리다.
  
저음리(猪音里) : 관아에서 35리다.

   가현내면(加縣內面) 
  성저리(城底里) : 관아에서 40리다.
  
성유리(城踰里)
 : 관아에서 42리다.
  
신당리(神堂里)
 : 관아에서 40리다.
  
수예리(水曳里)
 : 관아에서 45리다.
  
광탄리(廣灘里)
 : 관아에서 45리다.
  
전곡리(前谷里)
 : 관아에서 45리다.
  
민지리(民池里) : 관아에서 40리다.

   가남면(加南面)
  
대현리(大峴里) : 관아에서 53리다.
  
지동리(池洞里)
 : 관아에서 55리다.
  
입암리(立巖里)
 : 관아에서 59리다.
  
말지리(池里) : 관아에서 60리다.

   가서면(加西面)
  
가서항리(加西項里) : 관아에서 50리다.
  
농암리(籠巖里) 
: 관아에서 53리다.
  
내서리(內西里)
 : 관아에서 57리다.
  
대정리(大井里) 
: 관아에서 55리다.
  
종곡리(鍾谷里)
 : 관아에서 55리다.
  
건천리(乾川里)
 : 관아에서 50리다.
  
마암리(馬巖里)
 : 관아에서 55리다.
  
고모현리(高毛峴里)
 : 관아에서 65리다.
  
송면리(松面里) : 관아에서 90리다.

   가북면(加北面)
  
고산리(孤山里) : 관아에서 30리다.
  
도태리(都台里)
 : 관아에서 40리다.
  
대문리(大門里)
 : 관아에서 40리다.
  
완장리(完章里) 
: 관아에서 45리다.
  
원북리(院北里)
 : 관아에서 45리다.
  
관청벌리(官廳伐里) : 관아에서 70리다.

  [호구]
   원호 3,524호, 남자 5,518구, 여자 5,186구

  [전부(田賦)]
   한전(旱田) : 원장부(元帳付) 1,836결(結) 87부(負) 8속(束)
    각 연도 경작지 외 관둔(官屯)을 더한 6결 61부 1속
    각종 폐단으로 면세된 620결 2부
    실제 밭은(實田) 1,233결 46부 9속
   수전(水田) : 원장부(元帳付) 965결 62부 7속
    각 연도 경작지 외 관둔(官屯)과 제방을 논으로 경작하는 5결 72부 5속을 더하고
   각종 폐단으로 면세된 220결 53부 9속
   실제 논 750결 81부 3속
   세태(稅太)  266섬 6말 4홉 7작 값을 돈으로 받아 666냥 2푼
   세미(稅米)  쌀 376섬 6말 4홉 7작 값을 돈으로 받아 1,880냥 5전
   대동미(大同米)  1,213섬 6말 1되 8작 내에 297섬 4말 6되 2홉 7작
   관수(官需)  유청지미(油 淸支米) 내의원(內醫院) 약재가(藥材價)로 제하고 916섬 1말을 납부한다. 참반목(參半木) 19동 31필 17자 5치 돈으로 1,963냥이다.
   약재(藥材) 봉과미(封과米) : 2섬 2되 6홉 6작 작목 4필 11자 3치
   위미(位米) : 6말 작목() 1필 14자
  위태(位太)  34섬 10말 가격을 돈으로 86냥 6전 7푼
  균청(均廳)  납세로 콩 42섬 11말 9홉 4작 가격은 돈으로 106냥 8전 6푼
  세미(稅米) 6섬 8말 7되 4홉 7작 가격은 돈으로 32냥 9전 2푼
  정전(情錢)은 3냥 5푼
  대동미 123섬 4말 9되 5홉 5작내 4섬 10말 6승 8홉 6작은 서울로 운반하는 비용을 제하고 실제 상납하는 쌀 118섬 9말 2되 7홉
  참반목 2동 27필 3자 2치는 돈으로 254냥 1전 9푼
  결전 1,061냥 6전 9푼
   요역 : 시탄(柴炭), 치계(稚鷄)는 민결(民結)로 사람마다 1냥 8전씩을 봄 가을로 받아 무역(貿易)하여 쓴다.

  [군액(軍額)]
  2,469명
   금정군(禁正軍) 43명, 자보(資保) 46명, 제번군(除番軍) 및 자보(資保) 24명, 상납보(上納保) 107명, 항작보(降作保) 23명
   어정군(御正軍) 24명, 자보(資保) 26명, 제번군(除番軍) 및 자보(資保) 14명, 상납보(上納保) 152명, 항작보(降作保) 19명, 포보(砲保) 120명
   공조(工曹) : 장보(匠保) 58명, 악공보(樂工保) 5명
   병조납(兵曹納) : 사번기(四番騎) 보병(步兵) 155명, 정군(正軍) 1명, 자보(資保) 3명, 오번기(五番騎) 보병(步兵) 237명, 유청군(有廳軍) 7명, 내취보(內吹保) 1명, 금보여정(禁保余丁) 17명, 보충대 1명
   균청납 선무(均廳納選武) 45명, 의승(義僧) 2명, 무녀(巫女) 3구, 요성 견탄 발군(撥軍) 90명
   선암 탄항 봉군(烽軍) 50명, 자보(資保) 150명
   수첩군관(守堞軍官) 55명
   속오군(束伍軍) 761명
   감영납(監營納) 무부 군뢰(巫夫軍牢) 3명, 성정군(城丁軍) 12명, 여사보(余射保) 59명
   병영납 량영보(兵營納良余保) 6명
   진상약보(進上藥保) 150명

  [성지(城池)]
   조령산성 : 조령에 있으며 산성을 쌓은 곳이 3곳이다. 하나는 영상의 영남과 호서의 경계에 있고 하나는 응암 북쪽에 신충원(申忠元)이 쌓은 구성(舊城)을 개축한 중성이고 하나는 초곡의 양쪽 산 사이에 걸쳐 있다. 3성이 모두 홍예문으로 큰 길이 통하는데 수구(水口)도 또한 홍예문 3칸을 설치하여 성내 여러 개울물이 이곳으로 흘러 나간다.
  영성문(嶺城門)은 조령관(鳥嶺關), 중성문(中城門)은 조동문(鳥東門), 초곡성(草谷城)은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1708년(숙종 34년, 무자)에 남북 18리 둘레 18,509보의 성을 쌓았다.

  [임수(林藪)] : 없다.

  [창고(倉庫)]
   읍창(邑倉)
   가은창(加恩倉) : 가현면에 있다.
   호계창(戶界倉) : 호남면에 있다.
   산성창(山城倉) : 초곡성 안에 있다.
  조적(양곡의 출납)
  실총(實摠) 13,792섬[石] 8말[斗] 3되[升] 2홉[合] 4작[勺] 내
  원회(元會) 각곡(各穀) 946섬 4말 4되 6홉 8작
  군향(軍餉:군량) 각곡(各穀) 837섬 4말 6되 8홉 9작
  상진(常賑) 각곡(各穀) 404섬 11말 6되 1홉 6작
  사진(私賑) 각곡(各穀) 75섬 5말 2되 6홉 5작
  별회(別會:특별회계) 각곡(各穀) 6,896섬 13말 9되 1작
  영진(營賑) 각곡(各穀) 126섬 13말 4되 2홉
  군작(軍作) 각곡(各穀) 4,544섬 14말 9되 8홉 9작
  저치미(儲置米) 177섬

  [군기(軍器)]
   흑각궁(黑角弓) 70장(張), 교자궁(校子弓) 120장, 궁현(弓絃) 50개(箇), 장전(長箭) 333부(部), 편전(片箭) 200부, 대전(大箭) 1자루(柄), 각아(각兒) 175개, 장창(長槍) 103자루, 삼지창(三枝槍) 4자루, 동노구(銅爐口) 33좌(坐), 장막 17각(却), 북[鼓] 2좌, 쟁(錚) 대소 함께 2좌, 화약 넣어 두는 궤짝[入盛  子] 6좌, 장전 넣어 두는 궤짝[入盛 子] 7좌, 쇠등잔[鐵燈] 3거리(巨里), 화승(火繩) 280사리(沙里), 환도(環刀 27자루, 거마창(拒馬槍) 56개, 호적(號笛) 2쌍, 나팔 2쌍, 솔발 1자루, 바라 1쌍, 밥솥[食鼎] 5좌, 나무표주박[木瓢子] 10개, 두꺼운 기름종이를 네겹 붙인 오번 용 그림 큰북 1좌, 목면(木棉) 군막(軍幕) 1부, 말금(抹金) 6개, 환금(環金:2품의 벼슬아치가 붙이던 금관자(金貫子)) 6개, 남대단 순시 영기 각 1쌍, 청삼승(靑三升) 순시 영기 각 1쌍, 조총(鳥銃) 253자루, 이약통(耳藥桶) 183개, 남비개(南飛盖) 177개, 약승(藥升) 163개, 파통 순시 영기 각 1쌍, 화약 943근 3냥 5전 5푼, 연환(鉛丸:납으로 만든 탄환) 285, 813개 돌 유황 99근 4냥, 화철(火鐵)213개, 능철(菱鐵) 1,033개가 있다.

   1752년(임신:영조28년) 별도 비치한 것
  수성장 사명기(守城將司命旗) 1면, 순시기(巡視旗 16면, 영기(令旗) 18면, 별오방신기(別五方神旗) 5면, 별오방고초기(別五方高招旗) 5면, 좌마독기(座馬纛旗) 1면, 중군수기(中軍手旗) 1면, 좌우사파총기(左右司把摠旗) 각 1면, 언월도(偃月刀) 1쌍, 군막 1부, 환말금(環抹金) 6개, 초고(哨鼓) 2좌, 중간 북(中鼓) 2좌, 방패 7좌, 쟁(錚) 1면, 호총(號銃) 2자루, 관이영전(貫耳令箭) 1쌍, 나무 바라 1쌍, 문기창(門旗槍) 10자루, 천총남백신기 각 1면, 구폭승장기 각 1면, 대전말(大箭抹) 5개, 사관혁(射貫革) 4좌, 포관혁(砲貫革) 7좌, 숙정패(肅靜牌) 2좌, 대전기(大箭機) 5좌, 당보기(塘報旗) 창말(槍抹) 10개, 조련패(操鍊牌) 1좌

   1753년(계유:영조 29년)에 별도 비치한 것
  청도기(淸道旗) 1쌍, 금고기(金鼓旗) 1쌍, 홍문기(紅門旗) 1쌍, 남문기(藍門旗) 1쌍, 백문기(白門旗) 1쌍, 흑문기(黑門旗) 1쌍, 표미기(豹尾旗) 1면, 대오방기(大五方旗) 5면, 중오방기(中五方旗) 5면, 소오방기(小五方旗) 5면, 각기(角旗) 8면, 당보기(塘報旗) 15면, 장막(帳幕) 15부, 휘장(揮帳) 8부, 방차일(方遮日) 7부, 쟁(錚) 2면, 솔발 2자루, 나팔(喇叭) 2쌍, 호적(號笛) 1쌍, 화전철등(火箭鐵등) 2개, 소수노기(小手弩機) 10좌, 소수노궁(小手弩弓) 10장, 소수전(小手箭) 100개

   본 진에 있는 것
  조총 700자루, 교자궁(校子弓) 200장, 남비개 300개, 화약 통죽(桶竹) 9,000개, 이약통(耳藥桶) 300개, 화철(火鐵) 300개, 촉롱(燭籠) 100개, 의유지(依油紙) 100개, 환도(環刀) 200자루, 화승(火繩) 300사리, 나팔 1쌍, 날라리 1쌍, 소라 1좌, 장전(長箭) 2부, 동로구(銅爐口) 80좌, 석유황(石硫黃) 7,443근, 화약 4,442근 10냥 5전, 황밀(黃蜜) 700근, 연철(鉛鐵) 60근, 화로(火爐) 1좌, 연환(鉛丸) 11만개, 수장(銖掌) 1개, 화약승(火藥升) 300개, 북 1좌, 백근을 달 수 있는 저울과 추 1개

  1808년(무진:순조 28년) 현감이 별도 비치한 것
  교자궁 50장, 장전 17부, 편전 68부, 통아(桶兒) 33개, 노기(弩旗) 10좌, 창 20자루, 교자대궁(校子大弓) 10장, 교자중궁 5장, 수노(手弩:물여우) 5좌, 조총 소금 700대, 대쟁(大錚) 1면, 화승(火繩) 400사리, 화약넣는 궤 23좌, 목면 포대(木棉布대) 45건, 연환(鉛丸) 1만개, 오방대기치, 본 현에 있는 장창 50자루

   1823년(계미:순조 23년) 별장이 별도 비치한 것
  교자궁 5장, 장전 3부, 편전 2부, 통아 17개는 산성에 있다.
  연대(烟臺) 각 5연굴(烟屈) 각 5망덕(望德) 각 1, 조총 각 1자루, 화전 각 9개, 장전 각 1부, 편전 각 1부, 화덕(火德) 각 1, 궁자(弓子) 각 1장, 통아 각 1개, 초석(草席:자리) 각 2입(立), 유기(柳器) 각 1, 표주박[瓢子] 각 5, 물장군 각 5좌, 반(盤) 각 5입, 숟가락 각 5개, 당화전 각 9, 접시 각 1죽, 사발 각 5립, 환도 각 1병, 대백기 각 1면, 수조 각 6, 멸화자 각 5, 홍기 각 1면, 공석 각 5립, 가마솥 각 1현, 표주박 각 5, 나무 말목을 무수히 창 같이 박아 놓은 해자 각 1, 동거(東炬) 각 3자루, 쌓아 둔 땔감 각 5눌, 토목 각 5눌, 연초 각 5눌, 배대목 각 6종, 화분 각 1수, 부자 각 2, 승자통 각 1자루, 송거(松炬) 각 50자루, 뉴거(杻炬) 각 50자루, 동화주을 각 3, 무능석 각 5눌, 전제 각 1, 법수목 각 5, 고월내(古月乃) 각 15, 능장(稜杖) 각 25, 조소(條所) 각 3거리, 겸자 각 3자루, 화철통 각 5, 교자주을 각 1거리, 탄 5섬, 회 5섬, 고운 모래 각 5섬, 조강 각 5섬, 초연 각 5눌, 쑥 각 5눌, 말똥 각 5섬, 소똥 각 5섬, 가가 각 2칸, 초가 각 2칸, 대변 양미 각 1섬, 밥솥 각 1좌, 노구 각 1좌, 화철 각 2대, 연환 각 30통, 방패 각 6, 나무주걱 각 20개, 전각 각 1, 화승 각 1사리, 화약 각 5냥

   1784년(갑진:정조 8년)에 새로 비치한 것
  장전 각 4부, 편전 각 4부, 궁자 각 4장, 통아 각 4개, 환도 각 4자루, 창 각 4자루, 양참(兩站)과 봉수(烽燧)에 나누어 두었다.

  [관액]
   조령(鳥嶺) : 조령은 계립령에서 뻗어오다 달항(達項)에서 둘로 나누어진다. 한 맥은 주흘산의 여러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가 되고 하나는 새재로 이어나가 공정산을 이루며 산이 높고 험한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주흘산 서쪽의 기슭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자연 성곽을 이루었다. 조령의 등성마루 북쪽에서부터 충주의 달천(達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이 나선다. 남쪽은 본 현의 견탄에 이르러야 평원을 만날 수 있어 그 사이 1백여리는 산이 거듭되며 개 이빨같이 서로 견제하고 돌길 벼랑 사다리 길로 여행자가 조심해야 하여 진정 남북의 요충지대로 하늘이 낸 험한 곳이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삼한(三韓)때 흥달(興達)이 이곳에 축성한 곳으로 고사갈이성이 이곳이다. 고모성, 고부성 두 성과 요성, 희양 석성이 서로 도움을 주는 형세로 그 터가 지금까지 완연하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제독(李提督:如松)은 이곳을 지나며 한탄하기를 “이렇게 험한 곳을 지키지 않은 신총병(申摠兵:砬)은 무모하다”고 했다.

   계곡(溪谷) 장유(張維)의 부(賦)에

아아 이 고개는 높고 높아서
웅장하고 빼어나기로 나라에서 이름난 곳
기세가 어우러져 가로질러 놓으니
퐁도와 기상마저 남북으로 갈랐네
여러 산 끌어와서 둘러 앉히고
그윽한 골짜기 나눠 언덕 이루니
오솔길에 사람 자취 이어지는데
위험한 사다리 길이 산등성에 걸렸다.
하늘이 낸 험한 곳에 적이 없음을 믿고
어찌 많다고 만족하여 자랑할건가.

  
   고모성(姑母城) : 토천 서쪽 단봉 위에 있다. 양쪽 골짜기를 묶은 중반 같은데 그 아래 큰 내가 흐르고 좌우 도로가 마주치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은 병사가 지키는 줄 알고 두려워 여러 차례 확인하고서야 지키는 병력이 없음을 알고 춤을 추고 지나갔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시에

가파르고 위험한 사다리 길을 오르니
측량할 수 없는 낭떠러지로 머리털이 쭈뼜하고
산허리 옛 보루가 있으니
어느 때 설치했는지 알지 못하나
그로부터 태평 세월 오래였으니
싸우던 성벽에는 개암나무와 가시나무 자라네.

  
  [진보(鎭堡)]
  
 조령진(鳥嶺鎭) : 별장 1인, 수첩 군관 550명을 5개 고을에 나누어 두고 또한 군향창이 있다.

  [봉수(烽燧)]
   
선암산(禪巖山)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남쪽으로 함창 성산에 연락하고 북쪽으로 탄항산에 연락하는데 50리이다.
   탄항산(炭項山) : 현의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선암산에 연락하고 서쪽으로 공충도(公忠道) 연풍현의 지릅산[麻骨山]에 연락하는데 20리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교생(校生) 15명, 유생(儒生) 15인, 동몽(童蒙) 5인

  [단묘(壇廟)]
   사직단(社稷壇)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주흘산사(主屹山祠) : 봄·가을에 향과 축문을 하사하여 제사를 지낸다. 봄에 2회 가을에 1회 돌본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壇)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한천 향현사(寒泉鄕賢祠) : 가실목[加西項]에 있고 1697년(숙종 23년, 정축)에 창건했다.
  
 소양 향현사(瀟陽鄕賢祠) : 소양동에 있고 1712년(숙종 38년, 임진)에 창건했다.

  [능묘(陵墓)] : 없다.

  [사찰(寺刹)]
  
 봉암사(鳳巖寺) : 희양산에 있고 양산사(陽山寺)라고도 한다. 876년(당 희종 건부 3년, 신라 헌강왕 2년) 국사(國師), 정진(淨眞), 지증(智證), 원오(圓晤), 보조(普照)가 건립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중 지징(智澄) 비와 고려 때 이몽유(李夢游)가 지은 중 정진원오(靜眞圓晤) 비와 조선조 판서(判書)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중 상봉(霜峯)의 비가 있다. 절의 북쪽에 있는 2층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건립하고 조선조 세조 대왕의 어필을 보관했다.
  
 오정사(烏井寺) 
: 선암산 있고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혜국사(惠國寺)
 : 조령성 안에 있다.
  
 운암사(雲菴寺)
 : 유곡 서쪽 5리에 있다.
  
 추심사(推尋寺) : 화산에 있다.

  [누정(樓亭)]
  
 
교구정(交龜亭) : 조령의 용추 위에 있다. 관찰사 교인처(交印處)로 성화 연간(成化年間, 1465~1487년)에 현감 신승명(愼承命)이 건립했다.
  문간공 김종직의 시 : 제영(題詠)난을 볼 것
   
천교정(遷喬亭) : 유곡(幽谷)에 있다.

  문광공(文匡公) 홍귀달(洪貴達)의 역관(驛館) 중수기문(重修記文)에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목구멍에 병이 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이것이 우후(禹侯:유곡도 찰방)가 급히 전해 오던 집을 수리하되 유곡을 먼저 한 까닭이리라. 유곡에 관사가 있기는 오래 전부터이다. 처음 건립이 언제인지 모르나 겸선(兼善:홍귀달의 字)이 처음으로 서울에 왕래하면서부터 지금까지 40여년이다. 처음 볼 때에 낡은 건물이었는데 지금까지 고쳐 지은 일이 없으니 그 얼마나 기울었는지 알 만하다.

  큰 손님이 올 때마다 그 누추한 것을 탓하고 길손들은 이전부터 그 좁은 것을 걱정했으며, 나도 지날 때마다 늘 그것을 한탄했었다. 1489년(弘治2년:성종20년)에 우웅(禹雄) 공이 나와서 이 역로의 찰방이 되어 그 파괴되고 쇠잔한 것을 소복시키는데 빠진 계획이 없어 걷는 데는 빨리 걸을 수 있고 타는 데는 말이 잘 달릴 수 있다.

  역로가 완전하게 되자 여럿에게 의논하기를“아무 역의 관사가 퇴락하고 무너졌으니 이것은 사신을 엄숙하게 대하고 길손을 편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우리보다 앞의 사람이 이미 할 수 없었고 우리 뒷사람도 기대할 수 없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우리가 그것을 중수하여야 할 것이다. 유곡은 우리의 본 역이요, 큰 손님이 이르는 곳이며, 또 남북으로 내왕하는 요충인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을 먼저 하려 한다”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재목은 가까운 산의 나무를 베어 오고 힘은 이웃 역졸에게서 얻고 잘하는 목수를 골라서 당(堂)은 옛 터에 새로 세우고 대청(大廳), 동헌(東軒), 서헌(西軒)이며 나머지 그 밖의 것도 모두 옛것을 수리하였다. 백년 동안이나 허물어져 있던 것을 한달 안에 환하게 일신시켰으니 어떻게 그리도 빨리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졌을까?

  당시 겸선은 아버지의 상(喪)을 만나 함창에 있었는데 일찍이 일이 없어 여기를 지나면서 이른바 아른바 새로 지은 동서헌에 잠깐 쉬었다. 대마루를 쳐다보고 창에 의지하여 내다보면 마음과 눈이 탁트이는 것이 옛날과는 아주 다르다. 오래도록 배회하면서 매우 흐뭇해하였다. 우공이 마음쓰기를 
  시(詩)에서

역리에 방결이있어
나는 일찍 지은 시 한편을
지금 사람이 볼 수 있어 다행이네
이런 일 예로부터 듣기도 어렵고
그 명성이 어찌 성하고 쇠함에 따라 변할까
심성의 귀천을 나눌 수는 없으나
뒤섞여 언어 행동이 천박한 사람이야
어찌 만물이 떠가는 구름 같으랴.

  
  문광공은 대제학(大提學) 홍귀달인데 호는 함허(涵虛)이다. 본래 함창 사람으로 조정에 오갈 때 반드시 결(潔)에게 편(鞭)을 잡도록 했다. 내가 일찍이 많은 시를 읽어볼 수 있으니 결의 의리가 오램이다. 1609년(기유:광해 1년) 가을 래산(來山)에서 파직되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역에 들려 결에 대해 물으니 후손 윤남(胤男)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윤남과 함께 길을 간 일이 있었다. 지금 와 보니 윤남은 1611년(신해:광해 3년) 여름에 죽고 또 결의 후손을 수소문하여 간신히 철동(鐵同)을 찾았다. 모두 결의 아들이다. 첫째 아들이 일(一)이고 일의 아들이 평(平)이고 평의 아들이 넷인데 육(六), 칠(七), 팔(八), 구(九)이다. 칠과 팔은 아들이 없고 구의 아들이 하나인데 윤남이고 윤남은 아들이 없다. 육의 아들이 계령(繼齡)이고, 계령은 아들 셋을 두니 풍적(豊積), 부적(富積), 선적(善積)인데 부적과 선적은 아들이 없다. 풍적의 아들이 하나인데 철동이며 철동은 결의 6세손이다.

  1504년(연산 갑자)으로부터 지금 1614년(갑인:광해 6년)까지 110년간 결의 후손이 전해와 6세에 이르러 철동이 유일하게 남았다. 여러 가지 일을 철동에게 물으도 결에 관한 사실을 알지 못하니 내 증조가 결을 읊은 노래를 어찌 알겠는가. 결이 결같이 하거나 결 처럼 이어 온다면 그것은 결 때문이다. 철동은 후손으로 그 상황을 알지 못하고 철동에 이르렀다. 철동이 그 상황을 모르는 잘못이 철동에 있지 않다. 내가 조금은 염려되어 이에 이르기까지 옛일이 역리들도 분명치 않아 장차 결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 염려된다. 결이 살아 있을 때 일들이 막연하고 또한 없었다. 옛 일을 고찰함에 무릇 역에 도착하면 꼭 결에 관한 것을 찾아 본 후 그가 속한 계보와 여러 형태의 글을 찾아 후손을 앞서와 같이 밝혔다. 또 증조와 후손인 내가 길을 지나가며 머문 한 역의 옛 이야기다.
  시에서

방역리 만난 뒤로 늘 생각하고
서로 만나 손자로서 위해주니
처음 만나도 이미 알아 보았고
그 일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였네
의로운 기상은 오랑캐의 위험을 막고
세상의 인정은 많이 바꾸어 가지만
세월이 오래가도 유곡이란 역에는
두곳에 현판으로 아직 있다네.

  
  또 시에서

폐조에도 함허당 현판을 홀로 보호하여
나의 할아버지 이미 방결편을 짓고
후손 만나 옛 땅에서 토론에 착수한 후
6년만에 돌아오니 무덤에 풀이 뒤덮였네.

  
   비홍정(飛鴻亭) : 지금은 없으나 현의 동쪽 5리 수석이 뛰어난 곳에 있었다.
  봉생정(鳳笙亭) : 현의 남쪽 20리 두 내 사이에 있다.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세웠다. 그 남쪽에 조찬한(趙纘韓)의 정자가 또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다.
  
 열무정(閱武亭) : 소야천가에 있다. 본 진의 군병을 조련한 곳이다. 

  [도로]
   관아에서 동쪽으로 상주의 경계까지 20리, 남쪽으로 함창현의 경계까지 54리, 서쪽으로 충청도 연풍현 경계까지 18리, 북쪽으로 연풍현의 경계까지 36리다. 남쪽으로 유곡역이 40리, 서쪽으로 가은창이  40리, 가은창으로부터 갈재까지 15리이고 동남쪽의 호계창까지 40리, 동북쪽 계립령까지 40리, 서쪽 양산사까지 50리, 양산에서 송면의 청주 경계까지 35리다.
  
 서울까지 377리, 남쪽의 감영(監營)까지 270리, 병영(兵營)까지 480리, 통영(統營)까지 605리다.

  [교량(橋梁)]
   
마포원교(馬砲院橋) : 화봉원 앞내에 있다.
   
소야교(蘇野橋)
 : 소야천에 있다.
   
회연교(回淵橋)
 : 용연 하류에 있다.
   견탄교(犬灘橋) : 견탄천에 있다.
   
양산교(陽山橋) : 양산사(陽山寺) 앞내에 있는 홍교(虹橋)다.

  [도서(島嶼)] : 없다.

  [제언(堤堰)]
   만세제(萬歲堤) : 현의 동남쪽 35리에 있고 둘레가 908자[尺]이고 물깉이가 4자이다.
   기제(機堤) : 현의 남쪽 30리에 있고 둘레가 690자로 물깊이가 4자이다.
   비계제(比溪堤) : 현의 남쪽 30리에 있었다. 둘레가 504자였는데 1784년(갑진:정조8년)에 못을 없애고 경작했다.

  [장시(場市)]
   읍내장(邑內場) : 내외 2장이 있는데 매월 2, 7, 4, 9일에 장이 선다. 유곡장(幽谷場) : 2, 7일가은장(加恩場) : 3, 8일 농암장(籠巖場) : 5, 10일 송면장(松面場) : 4, 9일

  [역원(驛院)]
   
유곡역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유곡에 18개 역이 속해 있는데 요성(耳卯 ), 덕통(德通), 수산(守山), 낙양(洛陽), 낙동(洛東), 구며(九며), 쌍계(雙溪), 안계(安溪), 대은(大隱), 지보(知保), 소계(召溪), 연향(延香), 낙원(洛源), 상림(上林), 낙서(洛西), 장림(長林), 낙평(洛平), 안곡(安谷)이다.
   요성역(
耳卯 
城驛) :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조령원(鳥嶺院) : 새재의 등마루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못쓴다.
   화봉원(華封院) : 속칭 초곡원(草谷院)으로 현의 남쪽 4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고려 때 유희(劉曦)의 시

벼슬에서 좌천되어 남녘으로 16역 지나
오늘 아침 비로소 경상도에 들었다.
요성 근처 두어 마장 떨어진 곳에
궁벽한 군 하나 문경이라 부른다.
변두리 새 원집은 형세가 엄숙하고
찬란한 금빛과 푸른빛이 뒤섞여서
동쪽의 작은 누각 뛰어난 경치에다
훌륭한 글들은 옛 팔영(八詠)을 압도한다.
아름답구나 이 집을 누가 지었는고
이름은 광문(光文)이요 성씨는 민(閔)씨로다.
나 또한 그 민공의 문하에 사람이라
이 건물 창건 보고 더욱 더 공경하네
아 이 사람이 세상에 머물면서
천하를 경영하면 별 탈이 없었을 걸
어쩌랴 하늘 위에 옥루(玉樓)를 이룩하니
기러기가 하늘 지나 듯 그림자도 머물쟎아
티끌 세상과는 떨어져 아득하이
다만 이 한몸이 오램을 탄식한다.

     
   이규보의 시

만가지 인연이 재처럼 찬 노 거사도
붉은 마음 있어 성인 임금 받든다.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축원하려는데
어찌하여 화봉의 이름 혼자 차지했는고

      
  [목장(牧場)] : 없다.

  [형승(形勝)]
   
연애잔도(緣崖棧道) : 권근(權近)의 기문에 “관갑(串岬)이 험하여 벼랑에 의지하여 사다리 길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함관촉도(函關蜀道)
 : 어변갑(魚變甲)의 시에 방비의 시설이 “함곡관(函谷關) 같이 장하고 촉나라 길처럼 험해”가기 힘들다고 하였다.
   
응암(鷹巖)
 : 조령의 중성 아래에 있다.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아래는 깊은 골짜기로 그 사이로 돌길 수십 보는 위태롭고 좁아 말을 돌릴 수 없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떨면서 지나는 곳으로 조령의 가장 험한 곳이다.
  장유(張維)의 부(賦)에
  ”이른바 출정하는 군사가 이 고개에 이르면 근심이 일고 장사를 가는 사람은 위태로운 이 길을 울고 넘었다.”고 했다.

  [고적(古跡)]
   
호계폐현(虎溪廢縣), 가은폐현.
   
벌천부곡(伐川部谷)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곡(高谷)부곡, 견천(絹川)부곡, 소산천(小山川)부곡, 마량(馬良)부곡
 : 호계에 있다.
   
잉을항소(仍乙項所)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모성(姑母城)
 : 현의 남쪽 20리에 돌로 쌓아 둘레 990자다. 
   
고부성(姑夫城)
 : 토천의 남쪽 높은 산 위에 있는데 고모성과 마주보며 지금은 퇴락하여 못쓰게 됐다.
   요성(
耳卯 
城) : 현의 동남쪽 4리의 산 위에 돌로 쌓아 둘레 550자다. 지금은 퇴락하여 못쓰게 됐고 터도 없다.
   
견훤산성(甄萱山城)
 : 가은현 서남쪽 5리 산 위에 돌로 쌓아 주위 565자이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희양산석성(曦陽山石城) : 현의 서쪽 50리에 있다.

  [토산(土産)]
   벌꿀(蜂蜜), 석이버섯(石
), 송이버섯(松), 인삼, 복령(茯笭)

  [진공(進貢)]
   인삼, 복신(茯神), 자초용(紫草茸), 백작약, 백복령(白茯笭), 감국(甘菊), 시호(紫胡), 고루인(苽蔞仁)

  [봉름(俸)]
   아록위(衙祿位) : 40결
   공수위(公須位) : 15결, 쌀 12섬 10말 9되 9홉, 콩 16섬 6되 5홉
   관수미 : 쌀 296섬 10말

  [환적(宦蹟)]
   고려 흥달(興達) : 927년(태조 10년)에 강주(康州)를 순행하려고 사갈이성(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먼저 그 아들을 보내 귀순하였으므로 태조가 가상히 여겨 청주록(靑州祿)을 하사하였고, 맏아들 준달(俊達)은 진주록(珍州祿)을, 둘째 아들 웅달(雄達)은 한수록(寒水祿)을, 셋째 아들 옥달(玉達)은 장천록(長淺祿)을 하사하였다.
   조선 허종항(許從恒) [ 문과 급제] 조추(趙秋)[ 문과 급제] 세종 때에 모두 현감이 되었는데 다스린 업적이 있었다. 신단(申湍) [선정비가 있다] 신길원(申吉元) [임진왜란에 순절했다] 윤호연(尹浩然), 김지회(金之誨), 정사온(鄭思溫), 이화(李화), 유계룡(柳季龍), 조직(趙稷), 홍이일(洪履一), 심종직(沈宗直)[선정비가 있다], 김인룡(金仁龍), 김해(金해), 남진(南鎭), 조홍서(趙弘瑞), 최무(崔茂), 이경절(李景節), 허섬(許섬), 이호(李灝), 구숙(具숙), 김형(金珩), 한의(韓의), 홍처준(洪處濬)[선정비가 있다], 이동빈(李東彬), 윤창수(尹昌壽), 허윤(許崙), 김구(金垢), 권연(權衍), 박황(朴愰), 김흥지(金興祉), 조변(趙변), 김빈(金빈)[문과급제], 곽문용(郭文溶), 권선(權선)[문과급제], 김남갑(金南甲], 이행경(李行敬), 홍정(洪淨), 이중번(李重蕃), 박번(朴蕃), 송세정(宋世鼎), 원덕하(元德夏)[무과급제], 최두명(崔斗明)[무과급제], 이덕령(李德齡) [1695년(숙종 21년, 을해)의 대기근시 구제에 힘써 관내의 모든 백성의 생활을 돌봐 각방에 비가 있다], 이성조(李聖肇)[문과급제], 이선함(李善咸), 홍세걸(洪世傑)[무과급제], 이세항(李世恒), 이중창(李重昌)[무과급제], 송정번(宋廷蕃)[무과급제], 조영기(趙永期), 김희로(金希魯)[선정비가 있다] 홍우행(洪禹行)[문과급제], 유선(柳선), 황태하(黃泰河), 이명직(李命稷), 구명규(具命奎)[문과급제], 정석범(鄭錫範), 윤휘정(尹彙貞)[문과급제], 원필규(元弼揆)[무과급제], 정즙(鄭즙)[무과급제], 김윤(金潤), 서종벽(徐宗璧) [선정비가 있다] , 윤재중(尹在重), 윤면교(尹勉敎), 이의익(李宜益), 이완(李완), 홍응린(洪應麟), 조계(趙棨), 윤상임(尹尙任)[문과급제], 홍역(洪역), 심빈(沈빈), 임정(林정), 이보중(李普中), 송준명(宋準明), 김재악(金載岳), 한태유(韓泰裕), 박인영(朴仁榮), 최경(崔炅), 서중수(徐重修), 김동진(金東鎭), 이정규(李正圭), 김이호(金履鎬), 김재명(金在明), 박이원(朴彛源), 이영원(李永瑗), 송윤재(宋倫載), 서흥보(徐興輔), 이철조(李喆祚), 엄사면(嚴思勉), 박철원(朴喆源), 권익(權익), 김재범(金在範), 최두현(崔斗顯)[선정비가 있다], 김이진(金履鎭), 이강재(李綱在), 홍노영(洪魯榮)[선정비가 있다], 이상재(李常在), 심의만(沈宜晩), 김병선(金炳先)

  [과거(科擧)]
   민조영(閔祖榮) : 급제

  [인물(人物)]
   신라 아자개(阿慈介) : 가은현 사람인데 농업으로 집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네 아들이 있었는데 견훤(甄萱)은 곧 그 중의 한 아들이다. 처음 견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수풀에 눕혀 두고 점심을 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듣고 이상히 여겼다.

  고기(古記)에“견훤의 어머니가 미혼일 때 그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매일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나이가 와서 잠자리를 같이 하고 간다’하므로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옷에 찔러 놓아라’하여 그대로 하였다. 날이 밝자 그 실을 찾으니 북쪽 담 밑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찔려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어 견훤을 낳았다.” 고 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실을 따라가 보니 “절 집의 기와를 쌓아 둔 훤초(萱草) 가운데 있어 견훤이라고 했고 그 절이 추사(推寺)”라고 한다.
   조선 조형(趙珩) :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재부정(司宰副正)에 이르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피눈물을 흘리며 여묘를 3년동안 하였으며,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세종 때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특별히 1품을 가자(加資) 하고 정여를 세웠다. 
   안귀손(安貴孫) : 덕행이 순수하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한천 향현사에 향사하게 되었다.
   
열녀 최씨(崔氏) : 사직(司直) 안귀손(安貴孫)의 아내이다. 가은현에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치운(致雲)이 시와 글씨를 가르쳤다. 남편이 죽으니 제문(祭文)에

봉황이 함께 날 때 즐겨 노래 불렀는데
봉(鳳)이 돌아오쟎아 황(凰)이 홀로 운다.
하늘에도 물어 봐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
하늘같고 바다같이 넓은 한(恨)이 끝이 없다.

  
  그 일이 알려져 정려를 세웠다.

   신숙빈(申叔彬) : 문희공(文僖公) 개()의 손자로 지조와 행실이 고결했고 은거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김낙춘(金樂春)
 :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은거하여 도를 구하고 실천하는데 독실했으며, 부친상에 3년간 여묘하였다. 호는 인백당(忍百堂)이고 소양 향현사에 향사하게 되었다.
   
신필정(申弼貞)
 : 은거하여 성리학을 가르쳤는데 예학(禮學)이 더욱 정밀하고 밝았다. 수의대신(繡衣大臣)이 여러 차례 추천하여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고 관찰사가 학문이 독실한 점을 포상해야 한다는 장계에 의하여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되었다. 저서로 훈몽역의(訓蒙易義) 10권이 있고 스스로 호를 병옹(病翁)이라 했다.
   
김시진(金始振)
 :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멀건 죽으로 연명하였다.1720년(경자: 숙종46년)에 국상에도 나이가 80이 지난 몸으로 고기를 먹지 않고 멀건 죽과 채소로 연명하다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후에 관찰사의 장계로 판서(判書)에 증직 되었다.
   
주득천(周得天)
 : 신북의 양인(良人)으로 어머니가 눈이 멀어 수십 년을 밤낮 옆에 있으면서 수발과 음식을 먹여 드렸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어하나 여름이라 사방으로 울면서 꿩을 찾아다니는데 매가 날아가며 꿩을 득천의 앞에다 떨어뜨렸다. 모두 효성에 감동한 때문이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살이를 했다. 그 일이 위에 알려져 부역(負役)을 면제했다.
   
윤소사(尹召史)
 : 정병(正兵) 조막룡(趙莫龍)의 아내이다. 초곡에 살았는데 남편이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죽자 6년간 소복을 하며 완전히 절개를 지키고자 하니 그 아버지가 가엽게 여겨 뜻을 꺾으려 재혼을 권하니 따르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인조 때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세웠다.
   신증 신식(申湜) : 어머니 병에 얼음 가운데서 고기를 구해 봉양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었으며, 상중에 있을 때는 너무 슬퍼 몸이 파리해졌다. 1818년(무인:순조 18년)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세웠다.

  [제영(題詠)]
  최수(崔脩)의 시에

북쪽을 바라보니 산천이 막혀 있고
남쪽으로 와서는 세월만 흘러간다.
달리는 여울은 골짜기를 늘 울리고
눈 쌓인 벼랑아래 그늘이 뒤덮었다.

      
  고려 정포(鄭包)의 시에

동구는 그윽하여 구름 가운데 맑고
높은 누각에 달이 비치니 더욱 좋다.

      
   김구경(金久
)의 시에

산속 아지랑이 안개같이 아득하고
시냇물은 이끼처럼 푸르구나

     
  팔영(八詠) 서거정(徐居正)의 시

 

        주흘(主屹)의 영사(靈祠)
        험한 산은 하늘 끝에 닿았고
        깎아지른 벼랑은 구름속에 들어있다.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비록 그 자취 없으나
        구름을 일으킴에는 스스로 공이 있다.

        관갑(串岬)의 사다리길(棧道)
  
      구불기는 양의 창자 같은 길이
        구불구불 새 나는 것 같이 기이하도다.
        봉우리 하나하나 모두 빼어났으니
        그런데도 말 가기가 더디구나.

        창밖의 오동나무(窓外 梧桐)
   
     솔솔 부는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데
        이지러진 달이 성긴 가지에 걸렸구나.
        갑자기 내리는 한밤중 비에
        고향 생각을 어이하리.

        뜰 앞의 버드나무(庭前 楊柳)
   
     영남의 그 많은 나그네들
        꺾어 주어 이제는 남은 것이 없으련만
        의연히 봄바람에 떨치니
        긴 가지는 짐짓 여전하구나.

        푸른 절벽의 단풍(蒼壁 楓丹)
   
     붉은 잎이 푸른 절벽을 장식하니
        강산이 아주 딴판이로구나.
        내가 온 때가 마침 늦가을
        이렇듯 좋은 경치 일찍이 본적이 없네.

        그늘진 벼랑에 흰눈(陰崖 白雪)
   
     겨울이 깊어서 얼음이 골짜기에 가득해도
        봄이 오면 물이 시내를 이룬다.
        자연의 모습은 때를 따라 달라지는데
        인정은 늙어 가며 어지러워지련다.

        오정사 종루(烏井鐘樓)
   
     나그네길 시름으로 잠 못 이루는데
        외로운 베갯머리엔 달빛만 비쳐 온다.
        어디가 한산사
57)
이냐
        드문드문 울리는 종소리 한밤중에 들려 온다.

        용담폭포(龍潭瀑布)
   
     옥같은 무지개 높다랗게 드리웠는데
        흰 눈은 산뜻한 맑음을 뿌려 준다.
        날고 자맥질하는 술법을 묻지 말고
        변화의 신통을 알아야 하리.

 

  
  요성역관(耳卯 城驛館) : 이규보(李奎報)의 시

유곡의 하루 밤을 술 취해 자고나니
요성길 한나절에 말 멍에 풀어 쉰다
돌아온 완적은 휘파람만 오래 불고
쓸쓸한 상여(相如)는 벼슬에 실증 났네
역 아전들 송영(送迎)은 언제쯤 끝이나고
사신들의 내왕은 어느 때 멎으려나
나 같이 한가로운 길손은 다행이다
와도 번거롭히잖고 가는 것도 마음대로니

      
   김군수(金君綏)의 시

지난해 단풍 물들 무렵
초헌 타고 남쪽으로 갔더니
올해는 버들 누를 무렵
깃발 돌이어 북극(北極:임금)에 조회 드린다.
만물의 변화는 덧없고
계절은 쉬지 않고 변해도
시냇물이 내 마음 같이
맑고 맑아 한 빛이다.

      
   교구정(交龜亭) :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시

교구정 오르니 천지가 오만해도
서릿빛 구렛나루서 큰 것을 깨달았다.
물소리는 음악같이 스스로 격려하며
수천 바위는 노을 들어 그림이구나
시로서 읊기 전에 새 먼저 날아갔고
눈물 쓰린 이 회포는 원숭이 애끓음 같아
남쪽 길 이미 막히어 쌍척후를 보내고
달 밝은 오늘밤을 어느 마을서 자야할까.

      
   유곡역관(幽谷驛館) 우암(尤庵) 홍언충(洪彦忠)시

역관에 베개 배고 누웠으니 맑은 바람마저 외롭고
오랜 느티나무 가에서 석잔 술을 기울인다
이번 가는 길 살아서 돌아올 날 알지 못하나
마음은 여유로와 모든 일을 하늘에 맡긴다.

      
   비홍정(飛鴻亭) : 허적(許
示啇 )의 시

옛사람 이미 날아간 기러기 같아
남은 자취 없고 시내 위에 정자만 있다.
고목은 겨울 바람에 절절히 휘둘리고
거친 언덕 지는 해는 연기로 어둡구나
층암 절벽이 거울처럼 비처오며
푸른 물 찬 흐름은 병풍을 두른 것 같다
돌에 기대 시 읊는 사이 숲에 어둠 내려도
멀리는 외로운 학이 물가를 바장이는구나.

      
   과조령(過鳥嶺) : 오숙(吳숙)의 시

사물의 중요함을 잠시봐도 조화롭고
북쪽서 뻗은 고개 여기서 웅장하다.
불이 떨어지니 폭포로 장엄하고
원래 상주진이 새재길로 통했는데
화각(畵角) 부는 공중에 새벽 안개 걷히고
대장 깃발 땅을 떨쳐 바람에 휘날린다.
이번 길에 선비의 초라함을 씻으니
만리 밖 해뜨는 곳이 눈에 있구나.

      
   조령 허적(許示啇 )의 시

벼랑 끼고 돌던 길 논두렁을 만나도
높은 산 험한 고개 다시 솟았다.
남북으로 나눈 땅에 관문을 거듭하고
세력은 천지간에 한 기세로 웅장하다.
구릉의 신비한 폭포 산림 속을 푹 적시고
옥대의 아름다운 집 속 조용히 앉아있다.
세인들이 위험한 곳에 오름을 보니
애써고 부지런히 일을 한 조화이리라.

      

  [비판(碑板)]
  
 현감 신길원(申吉元) 충렬비(忠烈碑) : 채팽윤(蔡彭胤)이 지은 서문(序文)에

  우리 조선조의 선조대왕께서 효자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했다. 말씀하시되“신후(候:현감)길원은 중흥한 뒤에 알아보니 임지를 지켜서 충성으로 죽은 사람을 정려 할 때 빠진 이가 오직 신길원 현감이다”하니 덕망과 학식있는 이들도 “그렇다”고 하며,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구해야 한다”고 했다. 선왕(先王)께서 백성의 효도하는 사람을 중하게 하는바는 그 충성을 권함이라. 무릇 신 현감의 죽음이 백십여년이 넘어도 고을의 사람들이 잊지 않고 말하기를“이곳은 신 현감께서 만대의 강상(綱常)을 심은 땅이라”하며, 저 옛날의 의로움을 느끼고 생각함이 심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하고 눈물을 수없이 흘리며 의논하되“처음 왜놈이 난리를 일으켜 송동래(東來府使) 상현(象賢)이 먼저 죽고 우리 현감이 뒤에 죽었으나 지금 동래 사람들은 송공을 향사 지내어 그 충렬을 나타내지만 우리 고을에는 유독 신 현감의 충렬이 묻혔다. 지금 보니 민간 풍속이 박하고 문헌이 부족함이라”하며 이에 즉시 고을의 남쪽에 비석을 세워 오래 간직하기로 했다.

  신 현감께서 부임한 지 두 해 지난 임진년에 왜놈이 부산 동래를 짓밟고 아침 저녁에 곧 닥칠 것 같은 상황이라 대부인(大夫人:모친)을 집으로 보내고 현감은 대구로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부성(府城:대구)이 함락됨을 듣고 곳 주장(主將)을 찾아갔다. 상주 주장 권후(權候:權 牧使)는 돌아가서 군량을 거두라 하여 문경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적병이 문경에 다가오자 아전과 군사들 모두가“도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곧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피할 것을 권했다. 현감은 큰 소리로 격려하기를 “내가 고을을 맡은 신하로서 이 땅을 지키며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요”하고 적은 군사를 독려했으나 문간에 적병이 이르자 달아나지 않는 이가 없고 현감과 종 하나만 남았다.

  현감이 관복(官服)을 입고 관인(官印)을 차고 앉았는데 적장이 칼을 들이대고 묻기를 “왜 말을 타고 달아나지 않았는가”고 하자 현감이 “나는 선비다. 어찌 말을 타고 달아날 것이냐”하니 곧 항복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협박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한양 가는 길을 물어도 가리켜 주지 않으며 손을 들어 목을 가리키며 꾸짖기를“내가 너 같은 놈을 만 토막을 내어 죽이지 못함이 한이 된다. 속히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하니 적장이 성을 내며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은 채 꾸짖기를 계속하자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니 4월 27일이다.

  임금께서 들으시고 좌승지(左承旨)를 증직하셨다.

  슬프다. 벼슬하는 것이 평소에는 누구나 스스로 즐겁지 않을까마는 조그마한 이해가 있어도 지킬 바를 바꾸지 않는 이가 드문데 하물며 시퍼런 칼날 밑에서이랴. 또 강병이 큰 진영으로 막아도 달아나는 이를 볼 수 있으니 공은 참으로 충렬의 선비이다. 공의 자(字)는 경초(慶初)이니 평산 신씨라.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三司의 하나)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벼슬)으로 있는 국량(國樑)이며, 나이는 45세였다. 태학(太學:성균관)의 추천으로 벼슬에 나가 문경현감이 되어 백성을 정성으로 다스리고 항상 성리학의 책을 읽어 규범으로 삼았으며, 어버이를 돈독히 섬기되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순절하던 날에도 동생을 보내서 어머니에게 영결을 고하고 또 부인에게 부탁하기를“노모를 잘 봉양하며 내가 죽었다고 하여 조금도 소홀하지 말라”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시조(始祖)에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이 있어 고려 태조를 도왔으니 한나라 고조 때 기신(紀信) 같은 사람이니 그 충절이 전해 온 바가 먼 곳에서 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팽윤(彭胤)이 일찍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후편을 읽고 이런 일이 알려지지 않음을 개탄하며 공의 사람됨을 알았다. 또 여러 고을 사람들의 의리를 위해서 비명(碑銘)을 지으니

죽을 줄 알면서도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공의 깨끗한 마음이며
그 영결을 어머니에게 고할 제
어머니 계시고 자식이 죽음을 불효라 하는
이 말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기왕에는 충성과 효도 두 가지를 같이 할 수 없으나
공은 두 가지 만남을 따라서 온전히 이루었네.

   
   김낙춘(金樂春) 묘갈(墓碣) :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서문에

  옛날 우리나라 퇴계 이 선생께서 도산에 강도(講道)할 때 한 시대의 제현(諸賢)이 문하에 왕래하였는데 인백당 김공이 그 중 하나다. 공의 이름은 낙춘(樂春) 자는 태화(泰和)인데 그의 조상은 순천인이다. 6대조 승주(承주)는 좌명공신(佐命功臣) 좌의정으로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시호는 양경공(襄景公)이다. 증조는 약평(若枰), 목천 현감으로 호조 참판에 증직 됐으며, 할아버지는 희윤(希尹),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였다. 아버지는 우(雨)로 용궁 현감으로 광산 김씨인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된 효노(孝盧)의 딸에게 장가들어 1526년 12월 19일에 공을 낳았었다.

  공은 풍도가 아주 깨끗하고 성격도 매우 침착했으며 학문에 힘쓰기를 독실히 하여 문예가 일찍 이루어졌다. 나이 21세 때 진사시험에 합격했는데 국가에서 무슨일로 인해 파방(罷榜)시켰다. 다시는 거업(擧業)에 힘쓰지 않고 성현(聖賢)의 경전(經殿)에만 마음을 붙였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모든 경전(經典)중에 오직 춘추(春秋)만이 성인(聖人)의 수필(手筆)이다”라고 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익숙하게 읽었는데 모경(暮境)에 이르도록 걷어치우지 않았었다.

  파청정(把淸亭) 김부의(金富儀)와는 내외종(內外從)이 되었는데 늘 한 방안에 모여서 경의(經義)를 강구(講究)하였다. 같은 문하에 다니는 어떤 사람이 일찍이 횡액에 걸려들어 화를 헤아릴 수 없게 되자 선생께서는 매우 걱정하였다. 공이 그에게 찾아가 무사하도록 만들고 그와 함께 도산으로 와서 선생을 뵙게 되었다. 선생께서 매우 기쁘게 여기고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대의 높은 풍의(風義) 하늘까지 당하겠구나
우물 속에 빠진 사람 재빨리 건져내어
잘 구호하여 나에게 찾아와 부탁한 다음
은혜로운 그 마음 자랑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리네

     
  라고 하였는데 이 시는 도산집 속에 실려져 있다.
  공은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였다. 친상을 당하였을 때 수질과 요대를 늘 벗지 않고 묘 아래에 여막을 지어 묘를 지키면서 아침 저녁으로 참배하였다. 부인 신씨가 일찍이 병이 위독하여 공을 한번 만나자고 간청하였으나 공은 “상제로서 내실을 멀리한다”는 이유로 끝내 만나주지 않았었다. 일평생 몸가짐에 대해서는 검소한 생활로 옷은 반드시 베옷을 입고 음식도 여러 가지 반찬으로 하지 않았다. 모년에는 문경 산수를 사랑하여 안동 풍산 가곡을 떠나 가은 소양동으로 이거하였다. 독서하는 시간외는 낚시질도 하고 갈매기를 친구로 삼으면서 낙을 붙였었다.

  1586년(선조 1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63세고, 묘소는 숙양동 오향(午向)에 있다. 1713년(숙종 39년, 계사)에는 공이 살던 유지에다 사당을 세워 제향을 올린다.
  비명(碑銘)에

행실은 몸소 닦았는데 학문은 스승에게 받았었다.
춘추를 애써 읽은 것은 의리가 깊기 때문이었다.
소상강 물 한 굽이 깨끗한데 낚시질도 목욕도 다할 만하다.
모경에 여기다가 터를 잡고 아무 걱정 없이 낙을 붙였네.
위에는 우뚝한 무덤 있는데 석인(碩人)을 옛날에 장사 지냈다오
정협(精夾)이 여기에 머물러 있어 소나무와 계수나무가 울창하다.

  
  참판에 증직된 신상철(申尙哲) 묘갈 :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비명과 서문에 신군(申君) 상철은 자(字)가 명숙(明淑)으로 나와 어려서부터 뜻이 같아 서로 친하였으며 지난 1609년(선조 39년)에 진사 과거를 함께 보았다. 또 서로 좋아했던 것은 나의 외고(外姑) 정씨(鄭氏)는 바로 신군의 이모(姨母)가 되는지라 매양 나의 처가에 머무르면서 함께 술을 마시며 서로 즐겼다.

  신군은 대대로 서울에 살았는데 1618년(만력 무오:광해 10년)에 온 식구를 거느리고 영남 상주의 영순리로 이거하였다. 내가 일찍 공무로 그 살던 곳을 지났는데 신군이 많은 술을 장만하여 큰 여울 위에 앉아 서로 반가워 평생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 저녁인 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1624년에 내가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었는데 신군은 앞서 1년 전에 태학(太學:성균관)의 천거로 벼슬길에 들어가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 한성부 참군(參軍) 광흥창(廣興倉) 주부(主簿) 형조 좌랑(佐郞)을 두루 역임하던 중이어서 다시는 냇가에서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없는 지라 마음이 괜히 서운하였다.

  그후 조정에 돌아와서는 각기 직무에 매달려 출입을 전과 같이 자주 갖지는 못하지만 가끔 만나서 서로 함께 줄거움을 나누었다. 신군은 관리로서 매사에 정밀하고 민첩하여 간사함을 더욱 미워하였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조금도 넘보거나 속이지 못하였다.

  1627년(인조 5년)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강도(江都:강화도)로 행차할 때 신군이 호조의 낭관(郎官)으로 홀로 머물러 창고의 자물쇠를 맡고 있었는데 밤에 도둑이 사닥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 들어왔다 달아나는지라. 신군이 순찰 책임자를 불러 이르기를 “만약 도둑이 창고 가까이 어른거리면 너의 목을 먼저 베리라”하고 평상시와 같이 코를 골며 자고 있어도 도적들이 흩어지고 이속(吏屬)들이 잘 지키어 많은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운반하여 배에 모두 실었다. 이에 호조판서가 그 재주를 천거하여 밤낮으로 행궁의 문을 지키게 하고 당시 모든 크고 작은 사건을 신군에게 의지하여 결정하였다.

  조정에서 오로지 대단함을 시험하고자 전주 판관(判官)에 제수하자 그곳에 부임하여 청렴과 근엄으로 처세하여 조례를 분명히 하고, 기회를 준절(峻切)히 하여 간사한 행위를 근절하는데 주력하였다. 그 해 봄에 해창(海倉)과 전세(田稅)를 감독했는데 교활한 토호(土豪)가 세력가의 힘을 믿고 백성들을 괴롭히어 간사한 이익을 취함으로서 신군이 법에 의하여 가차없이 처벌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비방하는 말을 근거없이 꾸며 신군을 헐뜯었다. 이로서 관찰사가 사람을 시켜 조사하였으나 그런 사실이 없는지라 마침내 신군이 허물을 면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신군에게 말하기를 “과히 근심이 되지 않았는가”하니 신군이 대답하기를 “근심하지 아니한다 간악한 아전들이 법을 희롱하는데 어찌 놔두겠는가”하였다.

  1630년(인조 8년)에 호조 정랑에 올라서 여러 차례 주상에게 직접 인대(引對)되어 사리를 분별하여 이해를 말함에 심히 밝으니 주상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고 받아들였다. 얼마 후에 외직으로 의흥 고을에 전보되어 정사를 잘하니 이 고을 백성들이 오랫동안 있어 줄 것을 바랐다. 1632년(임신:인조 10년)에 안동 판관으로 옮겨 고을을 다스리는데 전과 같이 선정을 베풀다가 얼마 안되어서 질병으로 사직하였다. 집에 돌아와 머리를 빗고 얼굴빛을 가다듬어 모친을 배알하고 능히 임종때까지 모시지 못함을 큰 불효라 말하고 아들 승구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할머님을 잘 모셔라”하고 드디어 돌아가시니 나이 48세였다. 문경 고을 오리동에 장례를 치렀으며 후에 정사원종훈(靖社原從勳)으로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의 증직을 받았다.

  신군은 행실을 갖추어 뜻이 고결하고 배움이 넉넉하였으나 운명이 박하였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이 있어 아홉 살 때 난리를 피하여 예천 산중으로 들어가 여러 아이들을 따라 도토리를 주워 먹지 않고 말하기를 “할머니는 굶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먼저 먹겠는가”하고 가지고 집에 돌아가 할머니에게 드렸다. 대사간 홍호(洪鎬)가 이때에 또한 어렸었는데 이것을 보고 황송하여 옹송그렸다 하니 신공의 효성은 참으로 하늘에서 타고났나 보다. 열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섬김에 지성을 다하고 또 홀로 계신 고모를 봉양하기를 어머니 모시듯 종신토록 한결같이 하였으니 군자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신군은 자품이 바르고 곧아 옳지 않은 것은 뜻에 두지 않고 또한 버리어 돌보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 10년 동안 소임에 전력하여 조금이라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며, 매사에 한 뜻으로 전념하여 행함에 돌이키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처음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스스로 학문을 힘써 닦고 소학, 논어를 손수 써서 일상생활의 바탕을 삼았으며, 때로는 여러 벗들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어버이에게 영광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난 생전에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고 죽음 또한 빨랐으니 그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남겨 두고 한을 품고 천양에 돌아가 어찌 눈을 감았겠는가.
  비명(碑銘)에

하늘은 오직
재주와 어짐을 경히하고
오랜 삶을 중히 여겨
사람 또한
통달하기를 쉽게하고
성취하기를 어렵게 하는가
어찌 신군은
경하고 쉬운 것만 얻고
중하고 어려운 것은 잃었으니
이제 어찌하나 신군이여.

  
 

상  주  목(尙州牧)

  [건치연혁(建置沿革)]
   상주는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사불(沙弗)이라고도 한다〕신라 첨해왕 때 백제와 가깝게 지내자 석우노(昔于老) 장군을 보내 토멸하여 상주(上州)를 삼고 군주를 두었다. 진흥왕이 상락군(上洛郡)을 삼았고, 687년(신문왕 7년, 당 수공 3년)에 둘레 1,109보의 성을 쌓고 다시 주를 설치했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혜공왕이 다시 사벌주를 삼았다.

   고려 초에 다시 상주로 고쳤고, 뒤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쳤다. 983년(성종2년)에 상주목으로 고치고 뒤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귀덕군(歸德軍)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이 절도사를 폐지하고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했다. 뒤에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치고 1018년(현종9년)에 상주목이 되니 8목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조는 그대로 따르고 세종 때 관찰사(觀察使)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없애고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목사로 우도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없애고 진으로 만들었다.
   고찰해 보면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그 땅에 9주를 설치할 때 본국 경내에 3주를 설치하니 상주로(尙州路)는 그중 하나로 상주라는 이름이 보이는 것이 그때이다. 고려 현종 때 선산, 개령, 함창, 문경을 모두 상주에 소속시키고 3고을은 인종, 명종 때 고쳐 현령과 감무를 설치하고 문경은 공양왕 때 감무를 설치했다.

  [속현(屬縣)]
   산양 : 본래 신라 금품현(近品縣)[달리 근암(近巖)이라고도 하였다]인데 경덕왕이 가유(嘉猷)로 고치고 예천군 소속이 되었다. 고려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 때에 상주목에 예속하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명종이 없애고 전대로 소속히켰으며 주 북쪽 65리에 있다.
   영순 : 주의 북면 임하촌인데 고려 때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도적을 잡은 공로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상주에 속했으며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성씨(姓氏)]
   산양 : 유(庾)씨, 신(申)씨, 채(蔡)씨, 방(方)씨
   영순 : 태(太)씨
   무림(茂林) : 손(孫)씨, 김(金)씨, 심(沈)씨
   산양 : 황(黃)씨, 권(權)씨, 고(高)씨, 이(李)씨, 홍(洪)씨, 김(金)씨
   영순 : 고(高)씨, 신(申)씨, 채(蔡)씨, 강(姜)씨, 홍(洪)씨

  [산천]
   
사불산(四佛山)
 : 산양현 북쪽에 있는데 주(州)와의 거리가 99리이다.
   낙동강(洛東江) : 태백산 황지로부터 흘러 안동에 나오는데 수백리를 동쪽으로 흘러 주의 경계인 낙동진에 이른다. 주(州)에서 35리에 있고 나루 위에 관수루(觀水樓)가 있다.
   영수(
ミ潁 水) : 주의 북쪽 45리에 있고, 문경 용연에서 발원하여 삼탄에 흘러든다.

  [방리(坊里)]
   영순면(永順面) : 관아에서 거리가 50리다.
   산남면(山南面) : 관아에서 거리가 60리다.
   산서면(山西面) : 관아에서 거리가 70리다.
   산동면(山東面) : 관아에서 거리가 70리다.
   산북면(山北面) : 관아에서 거리가 99리다.

  [창고(倉庫)]
   산양창 : 주의 북쪽 63리에 있다.

  [봉수(烽燧)]
  
 산양현 소산(所山)봉수 : 산양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문경 호계현 선암산(禪岩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궁현 용비산에 응하나 지금은 없다.

  [학교]
   근암서원(近巖書院) : 주의 북쪽 60리에 있다. 1664년(현종 갑진)에 창건하고 교리(校理) 홍언충(洪彦忠),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 전한(典翰), 김홍민(金弘敏), 사간(司諫) 홍여하(洪汝河), 처사(處士) 이구(李
), 별제(別提) 이만부(李萬敷), 부제학(副提學) 희정공(僖靖公) 권상일(權相一)을 제향한다.

  [능묘(陵墓)]
   홍언충 묘 : 영순 도연촌 뒤에 있다.

  [불우(佛宇)]
   미륵암(彌勒庵) : 사불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권근(權近)의 기문이 있다.
   대승사(大乘寺) : 주의 북쪽 100리 사불산에 있다.
   김룡사(金龍寺) : 주의 북쪽 100리 운달산에 있다.

  [누정(樓亭)]
   정우정(淨友亭) : 주의 북쪽 도촌에 있다. 군수 황정간(黃廷幹)이 건립했으며 익성공(翼成公) 희(喜)의 유물인 산호영(珊湖영), 옥서진(玉書鎭)과 임금의 하사품인 옥연(玉硯)의 3보三寶)를 간수하고 있다.
   병천정(甁泉亭) : 주의 서쪽 용유동에 문헌공(文憲公) 송명흠(宋明欽)이 학문을 닦던 곳이다.
   백암(白巖) : 산양 선암에 있다. 김덕배(金德培)가 운명한 곳이다.
   효자비(孝子碑) : 영순 무림의 대동평에 있다. 비면에 “효자 주한경(周漢卿) 정통 11년(1446년:세종 28년) 10월 일 세웠다”고 글씨가 써 있다.

  [제언(堤堰)]
   진목제(眞木堤) : 영순에 있고 둘레가 1,288자이고 깊이가 3자다.
   직곡제(直谷堤) : 산남에 있고 둘레가 748자이고 깊이가 3자 7치다.
   진정제(辰井堤) : 산남에 있고 둘레가 170자이고 깊이가 2자다.
   고윤석제(高允石堤) : 산남에 있고 둘레가 133자이고 깊이가 2자다.
   연화제(蓮花堤) : 산동에 있고 둘레가 1,269자이고 깊이가 5자이다.
   이촌제(梨村堤) : 산동에 있고 둘레가 1,251자이고 깊이가 3자다.
   대사제(大寺堤) : 산동에 있고 둘레가 200자이고 깊이가 2자다.

  [장시(場市)]
   산양장 : 산남에 있고 관아에서 60리다.

  [역원(驛院)]
   반암원(班巖院) : 주의 북쪽 57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 문경군으로 통합된 뒤에 발간된 교남지와 조선환여승람의 문경 인물을 참고하여 상주목의 인물 가운데서 발췌했다.

  [과거(科擧)]
  
 강제(姜霽) : 문과에 급제하여 현령을 지냈다.
  
 강우(姜우)
 : 설(雪)의 동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물과 같이 맑은 성격에 효성이 지극하여 여묘살 때 울기를 비바람 속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고상안(高尙顔)
 : 본관이 개성으로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키고 여러 고을에 치적이 있었다. 농가월령(農家月令)과 효빈잡기(效嚬雜記)를 지었다.
  
 신후재(申厚載)
 : 항구(恒耉)의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청환(淸宦) 현직(顯職:고귀한 벼슬)을 거쳐 판윤(判尹)을 지냈다.
  
 신후명(申厚命)
 : 상철(尙哲)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3도의 안찰사, 절도사를 거쳐 참판에 이르렀으며 문장이 맑고 절조가 있엇다.
  
 고유(高裕) : 인계(仁繼)의 후손으로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경륜과 재주를 조정과 초야에서 소중히 여겼다. 여러 고을에 치적이 많았고 추담유집(秋潭遺集)이 있다.

  [인물(人物)]
  
 홍귀달(洪貴達) : 본관이 부림이고 판서 겸 대제학을 지냈다. 도덕과 문장이 한평생 우뚝했고 연산조에 해를 입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고 호는 허백정(虛白亭)이다. 함창 임호서원(臨湖書院), 의흥 양산서원에 제향되고 문집이 있다.
  
 홍언충(洪彦忠) : 언방(彦邦)의 동생으로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정자(弘文正字)를 지내고 호당(湖堂)에 들었으며 교리를 지냈다. 연산 때 갑자사화에 진안으로 유배되어 반드시 죽을 것이라며 스스로 지은 만시(挽詩)에

해가 먼저 비춘 나라 이 밝은 세상에 태어나니
성은 홍(洪)이요 이름은 언충(彦忠)이며 자는 직경(直卿)이라.
반평생 우활하고 옹졸함은 모두 문자의 공박(攻駁)이라
서른 두해 살고 세상을 마치니 명은 그리 짧고 뜻은 어찌 그리 긴고
옛 고을 무림에 무덤을 정하니 푸른 산은 위에 있고 물굽이는 아래라
오랜 세월 뒤에도 지나는 선비는
이곳을 가르키고 배회하며 필시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지어다.

  
  1626년(병인) 정국(靖國)에 직강(直講)이 제수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문장에 기개와 절조가 있어 세상에서 소중히 여겼다. 문집이 있으며 근암서원에 배향되고 호는 우암(寓庵)이다.
  
 고인계(高仁繼) : 본관이 개성이고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이이첨(李爾瞻)이 배척하는 바 되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학문을 하니 문장을 세상에서 소중히 여겼다. 호는 월봉(月峯)이고 효곡서원(孝谷書院)에 입향됐다.
  
 홍여하(洪如河)
 : 호(鎬)의 아들로 진사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司諫)을 지냈다. 학문과 문장이 세상에서 소중히 추앙했다. 숙종이 경학에 밝아 칭찬하며 상을 주었다. 또 역사에도 해박하고 상세하여 동사제강(東史提綱), 휘찬여사(彙纂麗史) 수십권을 지었다. 호는 목재(木齋)이고 문집이 있으며 근암서원에 입향됐다.
  
 황시간(黃時幹) 
: 윤(贇)의 아들이며 진사에 합격하고 정랑을 지냈다. 효성과 우애를 근본적으로 타고났으며 학문이 순수했다. 호는 칠봉(七峯)이고 도천사에 입향됐다.
  
 이심(李
) : 본관은 연안이며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지냈고, 제행(制行) 방엄규(方嚴閨) 문인이다. 조정에서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만석꾼의 가법(家法)과 같다고 했다. 1636년(병자) 이후 은거하여 농사를 지었다. 호는 가은(稼隱)이고 문경 소양서원에 제향했다.
  
 효행 고응두(高應斗) 
: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이 많은 아버지를 업고 급히 달아나 숨어서 군역(軍役)을 대신하여 받은 돈으로 봉양하는 등 비록 떠돌아다니고 있을 망정 부친은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게 했다. 난이 평정되어 고향에 돌아와 몸소 곡식을 심어 맛이 좋은 음식을 공양했다. 상례에도 예의에 지나칠 정도로 애통해 하며 여묘를 3년하고 국상에도 소식(素食)을 3년간 하니 복호(復戶)를 명했다.
  
 김씨
 : 일(鎰)의 딸로 17세에 임진왜란으로 아버지가 전사하자 노비들을 데리고 밤에 전쟁한 곳에 이르러 쌓여 있는 시체 가운데 3일 밤낮동안 시신을 찾았다.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고 백비(白碑)를 묘 앞에 세웠으며 정려가 있다.
  
 열행 황씨
 : 박사 강설(姜雪)의 부인으로 남편이 죽자 애통해 하기 3일만에 기절했다. 아버지와 형제들이 음식을 권하자 겨우 한번을 들고는 도로 토해 내며 장례 후에 야위어 죽어 정려를 세우게 했다.
 

예  천  군(醴泉郡)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했다. 고려 초에 보주(甫州)로 고쳤고 현종 때에 안동부에 예속시켰으며 명종 때 황태자의 태(胎)를 이 고을에 장치(藏置)하고 기양(基陽)으로 고쳐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 신종 때 남도초토사(南道招討使) 최광의(崔光義)가 동경의 적을 맞아 이 고을에서 싸워서 크게 이겨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했다.
   조선조 때는 1413년(태종 13년) 보주군(甫州郡)으로 고쳤고 1416년(태종 16년)에는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했다.

  [속현(屬縣)]
   산양현 : 본래 가유현(嘉猷縣)인데 고려 명종 때 상주목에 예속하였다.

  [성씨(姓氏)]
   화장(花庄) : 김(金) : 예안, 박(朴) : 반남, 허(許) : 양천
   소야(蘇野) : 장(張) : 예안

  [산천]
   
작성산(鵲城山)
 : 북쪽 75리에 있다. 황장목을 베지 못하도록 둘레 40리를 나라에서 금했다.
   천주산(天柱山) : 군의 북쪽 50리에 기둥 같이 똑 바로 솟아 있어 천주산이라 한다.

  [방리(坊里)]
   화장면(花庄面) : 서쪽으로 70리다.
   동로소면(冬老所面) : 북쪽으로 90리다.

  [창고(倉庫)]
   조령창 : 쌀 374섬 9말 6되 6작

  [관애(關隘)]
   호항령(狐項嶺) : 군의 북쪽 70리에 있다. 조령과 죽령 사이에 있는 고개로 서쪽은 문경과 통하고 북쪽으로는 충주에 다다라 남쪽 길의 목구멍과 같아 방비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불우(佛宇)]
   천주사(天柱寺) : 천주산에 있고 군에서 거리가 50리다.

  [도로]
   갈평천(葛坪川) : 군의 북쪽 60리다.
   작성현(鵲城峴) : 군의 북쪽 80리로 충청도 단양군 경계다.

  [장시(場市)]
   소야장(蘇野場) : 3일, 8일

  ※ 문경군으로 통합된 뒤에 발간된 교남지와 조선환여승람의 문경 인물을 참고하여 예천군 인물 가운데서 발췌했다.

  [과거(科擧)]
   김태일(金兌一) : 첨추(僉樞) 곤(곤)의 사자(嗣子)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지냈다. 소박한 생활에 옛사람의 기풍과 절조가 있었다. 실제 쓰이는 문장과 명민함으로 모두 우러러 보고 학자들이 노주(蘆洲)선생이라 불렀다.


 

함   창   군

  [산천]
   관천(串川) : 현의 동쪽 7리에 있고 문경 견탄의 하류로 남쪽으로 흘러 본 현의 봉황대 아래에 이르러 저곡천과 합류하여 용궁의 하풍진으로 들어간다.

  [능묘(陵墓)]
   홍귀달(洪貴達) 묘 : 현의 동쪽 전촌에 있다. 신도비문은 남곤이 지었다.

  [인물]
   남영(南嶸) : 본관은 의령이고 군수 숙지(숙之)의 손자다. 효성과 우애가 타고나 18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여묘를 살 때 소금과 과일을 먹지 않고 애통해 하다 병을 얻어 두 눈을 실명했다. 어머니의 병에 강의 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그때 큰물이 지면서 홀연히 부엌에 잉어가 들어와 듣는 사람은 신기한 일로 여겼다. 벼슬에 나가 통정으로 군수를 지냈으며 호는 고산이고 청암사(淸巖祠)에 입향됐다.


 

용   궁   현

  [방리(坊里)]
   서면(西面)
   왕태리(旺泰里) : 현의 서쪽 10리
   오룡리(五龍里) : 현의 서쪽 10리
   말응리(末應里) : 현의 서쪽 20리다.

  [단묘(壇墓)]
   용곡향사(龍谷鄕社) :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1685년(강희 을축:숙종 11년)에 창건하여 인의(引儀) 강응청(姜應淸), 이조정랑(吏曹正郞) 강제(姜霽), 현감 강우(姜우)를 입향했다.

  [인물(人物)]
   강응청(姜應淸) : 정당문학(政堂文學) 회백(淮伯)의 5세 손으로 유복자로 태어나 7세에 추복(追服)을 3년하고 종신토록 여묘를 살았다. 음직으로 인의(引儀)를 지내고 용곡향사에 입향했다. 아들 9명을 낳으니 진(震), 림(霖), 주(주), 제(霽), 담(담), 영(霙), 입(입), 설(雪), 우(우)다. 모두 문장과 학행이 있고 세상에서는 용성 9강(龍城九姜)이라고 했으며 장자 진(震)이 백의종사(白衣從事)하여 중국에 갈 때 송시(送詩)에

중국사람이 만약 내집 일을 묻거든
부모 계시는 앞에 동생 여덟 있다 하라

    
   강여성(姜汝腥) : 우의 조카로 임진왜란에 양모 박씨와 두 아들을 데리고 밤에 급히 달아나 숨었는데 박씨가 적에게 잡히게 되자 여황이 구하려 적 가운데로 뛰어들자 둘째 아들 찬선(纘先)이 15세로 아버지와 할머니가 모두 화를 입는 것을 구하려다 어머니, 아들, 손자 3대가 일시에 해를 당한 사실이 삼강행록(三綱行錄)에 실려 있다. 선조 때 참의(參議)에 증직되고 정려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