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지도서(輿地圖書) / 집주 문경사

2014. 5. 14. 20:09나의 이야기






       

10. 여지도서(輿地圖書)  집주 문경사 / 개인발간 향토자료 

2012/08/08 09:51

복사http://blog.naver.com/lys0002/70144076430

전용뷰어 보기

목 차삼국사기지리지고려사지리지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부 록

  

 

 

 集註                         

  문     경     사  

 

 

10여지도서(輿地圖書)

 

차        례

  해 설
  번 역
  방리(坊里)
  원호(元戶)
  인구
  도로
  건치 연혁(建置沿革)
  군명(郡名)
  형승(形勝)
  성지(城池)
  관직(官職)
  산천(山川)
  성씨(姓氏)
  풍속
  학교
  단묘(壇廟)
  공해(公
廨)
  제언(堤堰)
  창고(倉庫)
  물산(物産)
  교량(橋樑)
  역원(驛院)
  목장(牧場)
  관액(關阨)
  봉수
(烽燧)
  누정(樓亭)
  사찰(寺刹)
  고적(古跡)
  진보(鎭堡)
  명환(名宦)
  인물(人物)
  제영(題詠)
  한전(旱田)
  수전(水田)
  진공(進貢)
  조적(
糶糴)
  전세(田稅)
  대동(大同)
  균세(均稅)
  봉름(俸廩)
  군병(軍兵)


  [해 설]

  1757년(영조33년)에 홍양한(洪良漢)이 임금께 아뢰어 편찬한 것이 여지도서이다. 홍문관1)(弘文館)에서 감사2)(監司)에게 명을 내려 여러 읍지(邑誌)를 일괄하여 모으고 고열(考閱)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팔도(八道)의 읍지 대부분이 호구 조사 기준연도가 1759년인 기묘(己卯) 장적(帳籍:호적)인 점으로 보아 1765년(영조41년)경에 편찬한 읍지를 모아 만든 전국 읍지로 55책 필사본이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전한다.

  전체 334관읍(官邑) 가운데 295관읍이 수록되고 39관읍의 읍지가 누락되었는데 경상도는 영천군, 흥해군 등 11개 읍지가 누락되어 홍문관 보관분은 아닐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95개 읍지와 6개 감영지(監營誌), 7개 병영지(兵營誌), 3개 수영지(水營誌), 1개 통영지(統營誌) 등 17개의 영지(營誌)에다 1개 진지(鎭誌)를수록한 모두 313개의지지(地誌)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는 각 도의 전도(全圖), 감영도(監營圖), 병영도(兵營圖), 수영도(水營圖), 통영도(統營圖), 각 관읍도(官邑圖)가 있고, 여지도(輿地圖)와 서(書)를 합한 책이름에서부터 지도를 중시했고, 당시 사람들의 지리 인식에 새로운 변화가 왔다.

  편찬 목적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개수(改修)와 속성(續成)을 위하여 여지승람을 기본으로 하면서 승람이 미치지 못한 부분을 포함했다. 읍지의 내용은 강역3)(彊域), 방리4)(坊里), 형승5)(形勝), 성지6)(城池), 공해7)(公), 제언(堤堰:댐), 물산8)(物産), 총묘(塚墓:무덤), 진보(鎭堡:鎭), 명환9)(名宦), 한전(旱田:밭), 수전(水田:논), 봉름10)(俸), 군병(軍兵:군사) 등 38개 편목으로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초하였으나 방리(坊里), 제언(堤堰), 전결(田結:전지의 장부), 부세11)(賦稅) 등의 항목을 첨가하여 사회, 경제적 내용이 강화되었다. 또한 읍지의 첫머리에 방리, 도로, 호수, 인구를 위치시켜 18세기에 상업의 발달, 도로의 중요성, 지역간의 교류를 위한 유통망을 표시했다. 조세 수취와 관련하여 진공, 조적, 전세, 대동, 균세, 봉름 등으로 세분화 한 것은 조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중앙의 재정확충과 지방의 통치를 더욱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문경지역은 문경현과 함께 상주목, 예천군에 단편적인 기록이 있다.

경상도

-

            문경현

-

   문경 마성 호계 점촌 가은 농암

 

 └ 

           상주목

-

   영순 산양 산북

 

           예천군

   동로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서 영인 간행했다.
 

  [번 역]

조령진 문경현(鳥嶺鎭聞慶縣)
 

  동쪽은 상주의 경계까지 20리, 남쪽은 함창현의 경계까지 54리, 서쪽은 충청도 연풍현 경계까지 18리, 북쪽은 연풍현의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77리로 4일반의 노정(路程)이다.

  남쪽의 감영12)(監營)까지 270리로 3일, 남쪽의 병영13)(兵營)까지 489리로 5일 반, 남쪽의 통영14)(統營)까지 605리로 7일 노정이다.

  [방리(坊里)]
  
 읍방(邑坊) : 관아에서 5리
   신동방(身東坊) : 관아에서 20리
   초곡방(草谷坊) : 관아에서 25리
   신북방(身北坊) : 관아에서 35리
   신남방(身南坊) : 관아에서 30리
   호서방(戶西坊) : 관아에서 52리
   호남방(戶南坊) : 관아에서 47리
   호현방(戶縣坊) : 관아에서 40리
   가동방(加東坊) : 관아에서 42리
   가현방(加縣坊) : 관아에서 60리
   가남방(加南坊) : 관아에서 60리
   가서방(加西坊) : 관아에서 90리
   가북방(加北坊) : 관아에서 70리

  [원호(元戶)] : 1759년(己卯式)
   
인구 : 10,244구(口15)), 남자 5,212구, 여자 5,032

  [도로]
   관아에서 동쪽으로 요성역까지 4리, 요성역에서 예천경계까지 26리다.
   동남쪽으로 견탄까지 30리, 견탄에서 상주경계까지 15리이다.
   남쪽으로 유곡역이 40리, 유곡역에서 함창경계까지 14리이다.
   북쪽으로 초곡까지 10리, 초곡에서 충청도 연풍경계까지 26리이다.
   북쪽으로 초곡방까지 10리, 초곡방에서 연풍경계까지 8리이다.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는 신라의 관문현(冠文縣)인데〔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라고도 하고 관현(冠縣)이라고도 하였다〕경덕왕이 관산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현재 함창)에 소속시켰다.

   고려 때에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치고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공양왕 때에 감무(監務)를 두고 조선조 태종 때 현감을 두었다.

  [속현(屬縣)]
   가은현(加恩縣) : 현의 남쪽 41리에 있고, 본래 신라의 가해현(加害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가선(嘉善)이라고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소속으로 하였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현종이 상주에 소속시켰다가 공양왕 때에 문경현에 소속하게 되었다.

  [군명(郡名)]
   관문(冠文),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 관산(冠山), 문희(聞喜), 관현(冠縣)

  [형승(形勝)]
   
연애잔도(緣崖棧道) : 권근(權近)의 기문에
  “관갑(串岬)이 가장 험하여 벼랑에 의지하여 사다리 길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함관촉도(函關蜀道)
 : 어변갑(魚變甲)의 시에
  방비의 시설이 “함곡관(函谷關) 같이 장하고 촉나라 길처럼 험해”가기 힘들다고 하였다.
   
신증 응암(鷹巖) : 조령의 중성 아래에 있다.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서쪽은 큰 구렁이 있는 사이에 길이 있는데 돌이 깔린 50여보는 위태롭고 좁아 말을 돌리지 못한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매와 같아 속칭 매바위〔鷹巖〕이라 한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시에

하늘을 찌를 듯한 조령을 보노라면
돌 벼랑 샐 깎아 세운 것 같다.
겨우 낸 바위 길이 백번 휘돌고
계곡의 물소리로 골짜기 요란하다.

  
  [성지(城池)]
   조령산성(鳥嶺山城) : 조령은 계립령에서 뻗어 오다 달항(達項)에서 둘로 나누어진다. 한 맥은 주흘산의 여러 깎아 세운 바위 봉우리를 이루고, 또 한 맥이 조령을  돌아 공정산을 이룬다. 산이 높고 험한 기세가 하나로 어우러져 높이 솟은 모양이 하늘을 찌른다. 주흘산 서쪽 기슭의 맞닿은 곳에서부터 자연성곽을 이루었다. 조령의 등성마루 북쪽에서부터 충주의 달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이 나선다. 남쪽 길은 본 현의 견탄에 이르러야 비로소 평원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사이 1백여리는 산이 거듭되고 첩첩이 산봉우리가 싸여 개의 이빨같이 서로 제압하는 데다 돌 벼랑길 사다리 길로 여행자는 통행에 조심해야 한다. 이 남쪽과 북쪽의 요충은 무릇 하늘이 만든 험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은 이곳을 지나며 한탄하기를“이렇게 험한 곳을 지키지 않은 신총병(申摠兵:砬)은 무모하다”고 했다.

  1708년(숙종34년, 무자)에 남북 18리, 둘레 18,509보(步)의 성을 쌓았다.

  성이 세 곳 있는데 한 곳은 영의 마루인 영호(嶺湖:영남과 호서)의 경계에 있고, 한곳은 응암의 북쪽1리를 돌아들면 신충원(申忠元)이 쌓은 구성(舊城)을 개축한 소위 중성(中城)이고, 한 곳은 초곡에 있는데 현으로부터 12리로 군향(軍餉)창고가 있다. 3성 모두 홍예문이 있어 큰 길이 통하는데, 영성(嶺城)은 조령관(鳥嶺關), 중성(中城)은 조동문(鳥東門), 초곡성(草谷城)은 주흘관(主屹關)이라 하고, 수구(水口)에도 홍예 3칸을 설치하여 성안의 여러 개울물을 모두 이곳으로 흘러 나간다.

  [관직(官職)]
   
현감(縣監) : 음직(蔭職) 6품관이다.
  좌수
16)(座首) 1인, 별감17)(別監) 2인, 군관18)(軍官) 27인, 인리19)(人吏) 32인, 지인20)(知印) 14인, 사령21)(使令) 15명, 군뢰22)(軍牢) 30명, 관노23)(官奴) 19명, 비24)
(婢) 18구
   
유곡찰방(幽谷察訪) 
: 문과(文科) 출신 6품관이다.
  역리(驛吏) 32인, 지인 14인, 사령 10명, 노(奴) 16명, 비 6구

  [산천(山川)]
   
주흘산(主屹山) : 현의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25)으로 본 현 계립령으로부터 뻗어 온 관아(官衙)의 주산(主山)이다.
   
관혜산(冠兮山)
 : 현의 남쪽 4리에 있고 주흘산으로부터 뻗어 왔다.
   
희양산(曦陽山)
 : 가은현의 북쪽 15리에 있고, 옛성이 있어 3면이 모두 석벽인데 옛날 군창(軍倉)이 있다. 소둔산에서 뻗어 왔다.
   
재목산(梓木山)
 : 가은현의 남쪽 2리에 있고 갈령에서 뻗어 왔다.
   
장산(獐山)
 : 호계현의 북쪽 1리에 있고 야운령에서 뻗어 왔다.
   
봉명산(鳳鳴山)
 : 현의 동쪽 8리에 있고 야운령에서 뻗어 왔다.
   
소둔산(所屯山) 
: 현의 남쪽 15리에 있고 이화현에서 뻗어 왔다.
   
화산(華山)
 : 가은현의 서쪽, 본 현에서 67리 떨어진 곳에 있고 불일산에서 뻗어 와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 주맥이 된다.
   
이화현(伊火峴)
 : 현의 서쪽 18리, 충청도 연풍현 경계에 있고 공정산에서 뻗어왔다.
  계립령(鷄立嶺) : 속칭 지릅산〔麻骨山〕이라고 하는데 방언으로 서로 비슷하다. 현의 북쪽 28리에 있는데 신라 때의 옛길이고 대미산에서 뻗어 왔다.
   
조령(鳥嶺)
 :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는데 속칭 새재〔草岾〕라고 부르고 계립령에서 뻗어 왔다.
   
관갑천(串岬遷)
 : 곧 용연의 동쪽 벼랑인데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리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나 된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이르니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곳으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음으로 토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북쪽의 단봉에 돌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지키던 곳이다.
   
소야천(所耶川) 
: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계립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새재에서 나와 화봉원 앞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관갑에 이르러 가은천과 합친다.
   
가은천(加恩川)
 : 가은현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속리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희양산에서 나와 합쳐 동쪽으로 흘러서 소야천과 합친다.
   
용연(龍淵)
 : 현의 남쪽 22리에 있고, 가은천과 소야천의 두 내가 합치는 곳이다.
   
견탄(犬灘) 
: 호계현 서쪽 5리에 있는데 용연의 하류이다. 나루가 있으며 남쪽으로 흘러서 함창현 경계로 들어간다.
   
조천(潮泉)
 : 조천이 둘이 있다. 하나는 현의 남쪽 소둔산에 있는 것으로 물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근원이 줄 같으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솟아 넘치어 3리까지 번져가서 멎는 것이 마치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현의 남쪽 5리 정곡리(井谷里에 있는 것으로 흙 구멍에서 매일 세 번 뿜어 넘쳐 동구로 흘러 소야천으로 들어 가는데 사람들이 물미리〔水推〕라고 부른다.
   
용추(龍湫) : 새재 아래 동화원(桐華院)의 서북쪽 1리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바닥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해 온다.

    어변갑(魚變甲)의 시

용이 꿈틀거려 소용돌이 헤치가도
잠긴 하늘에는 밝은 달이 새롭다.
개인 날 우레치고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타 누가 그 신비를 알리.

  
   인천(寅川) : 호계현의 동북쪽에 있는데 현에서 거리가 32리이다.
   
신증 대미산(黛眉山) : 현의 동북쪽 30리에 있고, 동쪽의 풍기 소백산에서 뻗어 와 본현 여러 산의 주맥(主
)이 된다.
   
공정산(公定山)
 : 초곡 서쪽 8리에 있고 조령에서 뻗어 왔다.
   
주현(周峴)
 : 희양산 서쪽 연풍과 경계에 있다.
   
대야산(大耶山) 
: 가은현 서쪽 20리에 있으며 희양산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재를 지내면 감응이 있다.
   
불일산(佛日山)
 : 가은현 서남 20리에 있고 대야산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단(祈雨壇)이 있다.
   
불한령(弗寒嶺)
 : 대야산의 허리로 괴산 경계에 이른다.
   
고모령(高毛嶺)
 : 대야산 남쪽 2리에 있고 청주 경계에 이른다.
   
갈령(葛嶺)
 : 가은현 남쪽 15리에 있고 속리산에서 뻗어 왔다.
   
호항령(狐項嶺)
 : 현의 동쪽 35리에 있고 대미산에서 뻗어 왔다.
   
황장봉산(黃腸封山)
 : 대미산 아래에 있고 둘레가 10리이다.
   
용뢰산(龍磊山)
 : 운달산(雲達山)이라고도 하며 현의 동쪽 20리에 있고 호항령에서 뻗어 왔으며 기우제를 지내면 감응이 있다.
   
야운령(野雲嶺)
 : 현의 동쪽 20리에 있고 운달산에서 뻗어 왔다.
   
어류동(御留洞)
 : 곧 조령성의 동쪽 깊은 계곡으로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와 머문 관계로 어류동이라 하고 궁실(宮室)터가 있다.
   
선유동(仙遊洞) : 대야산 동쪽 6~7리에 있다. 깊은 골짜기 모두가 흰 바위와 맑은 시내 가운데 9곡(九谷)이라는 경치 좋은 곳이 있다. 옥석대(玉臺), 난생뢰(鸞笙瀨), 영귀암(詠歸巖), 탁청대(濯淸臺), 관란담(觀瀾潭), 세심대(洗心臺), 활청담(活淸潭), 영사석(靈石), 옥하대(玉河臺) 모두 바위에 큰 글자로 새겨 있다.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된 신필정(申弼貞)이 쉬지 않고 학문을 닦은 곳이다.

  서쪽의 외선유동(外仙遊洞) 역시 수석이 뛰어나다.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시에

양쪽 선유동은 가까운 거리인데
지금은 그 사이에 구름이 한가롭고
어느 곳이 뛰어난지 평하기도 어렵도록
하늘의 장수가 있어 수석 고루 나눴네.

  
   용유동(龍遊洞) : 불일산 북쪽 5리에 있다. 흰 바위가 평탄하게 깔린 곳에 큰 시내가 흐르고 그 위에 여러 마리 용이 뒤엉켜 논 자국이 있어 용유동이라 한다. 그 아래 깊은 소〔深湫〕가 있으니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자의(諮議) 송명흠(宋明欽)의 정자가 그 위에 있다.
   
야유암(夜遊巖)
 : 봉암사 동구에 있고 평평한 바위가 희고 맑으며 깨끗하여 밤에도 놀 수 있어 야유암이라고 한다. 전해 오기를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라 하며 취적대(取適臺) 3자의 석각이 있다.
   
백운대(白雲臺)
는 절의 서쪽 몇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백석폭포(白石瀑布)의 경치가 뛰어나다.
   
용추(龍湫) : 선유동 상류에 있고 좌우 암석이 깎아질러 폭포를 이루어 상, 중, 하 3곳에 소가 파였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 아래 판서(判書) 이재(李縡)의 정자가 있다.

  이재의 시에

늦게 이산의 좋은 경치 만나노니
벌써 전생의 인연이 있었나 보다.
당귀가 밥맛을 다시 돋우는데
철쭉꽃은 어찌 그리 더디 피는가.
비 그치며 천길 벼랑 씻어 내리고
우뢰 소리는 깊은 골을 울리는데
신령한 신선은 손을 머물게 하여
나는 더욱 기이함을 자랑토다.

  
  [성씨(姓氏)]
   
본현 : 최(崔)씨, 장(莊)씨, 박(朴)씨, 송(宋)씨, 전(錢)씨, 김(金)씨〔선산〕, 박(朴)씨〔殷豊〕
   
가은
 : 전(全)씨, 윤(尹)씨, 변(邊)씨, 연(延)씨, 길(吉)씨
   
호계
 : 백(白)씨, 황(黃)씨, 김(金)씨, 나(羅)씨, 방(芳)씨
   
병곡(柄谷)
 : 방(方)씨, 신(辛)씨〔다른 데서 왔다〕
   
견천(絹川)
 : 방(方)씨〔고곡(高谷), 적촌(赤村), 소산촌(小山村), 마량(馬良)도 같다〕, 황(黃)씨〔다른 데서 왔다〕
   
벌천(伐川)
 : 심(沈)씨
   
잉을항(仍乙項)
 : 고(高)씨
   
신증 신(申)씨, 민(閔)씨, 채(蔡)씨, 남(南)씨, 원(元)씨, 정(鄭)씨, 주(周)씨, 권(權)씨, 홍(洪)씨, 배(裵)씨, 임(林)씨, 안(安)씨, 전(田)씨, 유(柳)씨, 엄(嚴)씨

  [풍속]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쓴다.

  [학교]
   
향교(鄕校) :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단묘(壇廟)]
   
사직단(社稷壇)26) :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주흘산사(主屹山祠)
 : 사전(祠典)에 실려 있기를“봄, 가을에 향과 축문을 하사하여 소사(小祠)를 지낸다”고 하였다.
   
성황사(城隍祠)
 : 현의 북쪽 2리에 있다.
   
여단(壇)27)
 :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희양산사(曦陽山祠), 재목산사(梓木山祠), 장산사(獐山祠) 
: 모두 그곳에 있는 관원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관혜산사(冠兮山祠) : 주흘산사에서 부제(
祭)한다.
   
신증 한천향현사(寒泉鄕賢祠)
 : 가실목〔加西項〕에 있고 1697년(숙종23년, 정축)에 창건했다.
   
소양향현사(瀟陽鄕賢祠) : 소양동에 있고, 1712년(숙종38년, 임진)에 창건했다.

  [공해(公)]
   객관(客館), 징원당(澄源堂), 향사당(鄕射堂)
28), 무학당(武學堂), 군관청(軍官廳), 인리청(人吏廳), 이화당(利和堂)〔초곡성 안에 있다〕

  [제언(堤堰)]
   
만세제(萬世堤) : 현의 동남쪽 35리에 있고 주위가 908자〔尺〕이고 물깊이가 4자이다.
   
기제(機堤)
 : 현의 남쪽 30리에 있고 주위가 690자, 물 깊이가 4자이다.
 
  비계제(比溪堤) : 현의 남쪽 30리에 있고, 주위가 504자이고 물 깊이가 2자이다.

  [창고(倉庫)]
   군기고(軍器庫), 대동고(大同庫), 사창(司倉), 가창(加倉)〔현 남쪽 40리에 있다〕,호창(戶倉)〔현 동남쪽 40리에 있다〕, 산성창(山城倉)〔현의 서북 10리에 있다〕

  [물산(物産)]
   은어, 벌꿀(蜂蜜), 석이버섯(石
), 송이버섯(松), 백화사(白花蛇)〔지금은 없다〕, 잣(海松子), 웅담(熊膽), 신증 인삼, 복령(茯笭)

  [교량(橋梁)]
   
마포원교(馬砲院橋) : 화봉원 앞내에 있다.
   
소야교(所耶橋)
 : 소야천 나루에 있다.
   
회연교(回淵橋)
 : 견탄천에 있다.
   
견탄교(犬灘橋)
 : 견탄천에 있다.
   
양산교(陽山橋) : 희양사29)(曦陽寺) 앞에 있고, 다듬은 돌로 만든 무지개다리다.

  [역원(驛院)]
   
유곡역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찰방을 두었다. 유곡도에 속한 역이 18인데 요성(耳卯 城), 덕통(德通), 수산(守山), 낙양(洛陽), 낙동(洛東), 구며(구며), 쌍계(雙溪), 안계(安溪), 대은(大隱), 지보(知保), 소계(召溪), 연향(延香), 낙원(洛源), 상림(上林), 낙서(洛西), 장림(長林), 낙평(洛平), 안곡(安谷)이다.
   
찰방 : 1인

  구증(舊增)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

  영의 남쪽 60여 주는 지역이 넓고 인구와 물산이 많은데 그 수레와 말들이 모두 유곡의 길로 모여 들어서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로부터 남쪽으로 가는 사람도 이곳을 지나야 그 갈곳으로 갈라져 가게 된다.

  이 역을 사람에게 비긴다면 곧 영남의 목구멍이라 하겠다. 목구멍에 병이 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아 이것이 우후(禹侯:유곡도 찰방)가 급히 전해 오던 집을 수리하되 유곡을 먼저 한 까닭이리라. 유곡에 관사가 있기는 오래 전부터이다. 처음 건립이 언제인지 모르나 겸선(兼善:홍귀달의 字)이 처음으로 서울에 왕래하면서부터 지금까지 40여년이다. 처음 볼 때에 낡은 건물이었는데 지금까지 고쳐 지은 일이 없으니 그 얼마나 기울었는지 알 만하다.

  큰 손님이 올 때마다 그 누추한 것을 탓하고 길손들은 이전부터 그 좁은 것을 걱정했으며, 나도 지날 때마다 늘 그것을 한탄했었다. 1489년(弘治30)2년:성종20년)에 우웅(禹雄) 공이 나와서 이 역로의 찰방이 되어 그 파괴되고 쇠잔한 것을 소복시키는데 빠진 계획이 없어 걷는 데는 빨리 걸을 수 있고 타는 데는 말이 잘 달릴 수 있다.

  역로가 완전하게 되자 여럿에게 의논하기를“아무 역의 관사가 퇴락하고 무너졌으니 이것은 사신을 엄숙하게 대하고 길손을 편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우리보다 앞의 사람이 이미 할 수 없었고 우리 뒷사람도 기대할 수 없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우리가 그것을 중수하여야 할 것이다. 유곡은 우리의 본 역이요, 큰 손님이 이르는 곳이며, 또 남북으로 내왕하는 요충인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을 먼저 하려 한다”하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재목은 가까운 산의 나무를 베어 오고 힘은 이웃 역졸에게서 얻고 잘하는 목수를 골라서 당(堂)은 옛 터에 새로 세우고 대청(大廳), 동헌31)(東軒), 서헌(西軒)이며 나머지 그 밖의 것도 모두 옛것을 수리하였다. 백년 동안이나 허물어져 있던 것을 한달 안에 환하게 일신시켰으니 어떻게 그리도 빨리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졌을까?

  당시 겸선은 아버지의 상(喪)을 만나 함창에 있었는데 일찍이 일이 없어 여기를 지나면서 이른바 아른바 새로 지은 동서헌에 잠깐 쉬었다. 대마루를 쳐다보고 창에 의지하여 내다보면 마음과 눈이 탁트이는 것이 옛날과는 아주 다르다. 오래도록 배회하면서 매우 흐뭇해하였다. 우공이 마음쓰기를 부지런히 하고 일 처리에 능숙한 것을 가만히 생각하며 마음속에 두지 아니하였었다.

  하루는 공이 글월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이 우정(郵亭)이 있은 뒤부터 이곳에 찰방과 승(丞)이 있어서 무릇 몇 해 동안에 몇몇 사람이 갈리었는데도 능히 새로 짓지 못하였다. 그것을 새로 짓지 못했을 뿐아니라, 그 아전과 백성에게 해독이 되게 하여 역이 오래되어 쇠잔하였으되 일찍이 그것을 일으킬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은 참으로 우공에 대하여 죄인이다.

  우공은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관리가 되었는데, 성품이 민첩하고 게다가 부지런하니 선비이면서 관리이다. 그러므로 정치가 가혹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즐거이 일하는 곳에 나갔으며 민첩하고 부지런했으므로 힘을 허비하지 않고 쉽게 일을 성취하였으니 참으로 기록할 만하다. 그러나 감사의 어둡고 밝은 것을 하등〔殿〕과 우등〔最〕매기는데 있어 이부(吏部)가 인물을 저울질한다면 우공의 현명함이 능히 이에 해당할 것이다.

  여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랴 마는 여기 한 말을 한다면 세상일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이루어 놓고서 쉬 파괴되거나 파괴되고도 수리하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다. 옛날부터 어질고 슬기로운 선비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침체한 것을 진흥시키고 황폐한 것을 보수할 때에 처음부터 오래 보존하려 하지 않아 그것을 계승하는 자가 항상 잘 지키지 못하여 황폐되어 수리하지 못하는데 이른 것이니 매우 한탄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처음 만든 사람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면 세상에 어찌 헐고 무너지는 일이 있겠는가. 이에 불가불 써서 그것을 우공의 뒤를 잇는 사람에게 남기어 경계가 되게 하노라”하였다.

   남쪽의 함창 덕통역과 20리 북쪽의 요성역과 40리
   큰말 2필, 중간말 5필, 짐 싣는 말 7필
   역리(驛吏) 469인, 노(奴) 74구, 비(婢) 9구
   
요성역(耳卯 城驛) :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이규보(李奎報)의 시

유곡의 하루 밤을 술 취해 자고나서
요성길 한나절에 말 멍에 풀어 쉰다.
돌아온 완적(阮籍)
32)
은 휘파람만 오래 불고
쓸쓸한 상여(相如)는 벼슬에 실증 났네.
역 아전들 송영(送迎)은 언제쯤 끝이나고
사신들의 내왕은 어느 때 멎으려나
나 같이 한가로운 길손은 다행이다.
와도 번거롭히잖고 가는 것도 마음대로니.

  
    김군수(金君綏)의 시

지난해 단풍 물들 무렵
초헌 타고 남쪽으로 갔더니
올해는 버들 누를 무렵
깃발 돌이어 북극(北極:임금)에 조회 드린다.
만물의 변화는 덧없고
계절은 쉬지 않고 변해도
시냇물이 내 마음 같이
맑고 맑아 한 빛이다.

   
   남쪽으로 유곡역이 40리이다.
   큰말 2필, 중간 말 2필, 짐 싣는 말 6필
   역리(驛吏) 130인, 노(奴) 10구, 비(婢) 3구
   
조령원(鳥嶺院)
 : 새재의 등마루 동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요광원(要光院)
 : 현의 서쪽 1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관음원(觀音院)
 : 겨릅재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관갑원(串岬院)
 : 관갑의 북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회연원(回淵院)
 : 용연의 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개경원(開慶院)
 : 호계현의 서쪽 3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불정원(佛井院)
 : 호계현의 서쪽 8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보통원(普通院)
 : 호계현의 남쪽 본 현에서 4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동화원(桐華院)
 : 현의 서북쪽 1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견탄원(犬灘院) : 견탄의 북쪽 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됐다.

  권근(權近)의 기문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100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길을 열어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는 험한 절벽이 둘러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내를 건너는데 그 내가 견탄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 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울 위에는 전에 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한 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화엄대사(華嚴大師) 진공(眞公)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다가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거처할 집을 세웠다. 또 길손을 접대해 가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서 나무를 베어오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다니는 길손이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 또 그 남쪽에 누각 몇 칸을 지어서 길가는 이는 거기서 쉬어 가고 구경하는 이는 올라가 보며 지친 사람은 거기서 쉬고 더운 사람은 시원하게 하려고 몇 해 안되어 준공을 하였다.

  또 그의 제자들과 함께 모진 돌을 깎아서 치우고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관갑의 길을 보수하였으므로 좁은 길 위험한 사다릿길이 모두 평탄해졌다. 그리하여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밝는 것과 같아서 걸어가도 몸을 구부릴 필요가 없고 타고 가도 마음이 떨리지 않아 다시는 떨어질 위험이 없게 되었으니 대사의 마음씀이 부지런하다 할 것이며 사람에게 이롭게 함이 크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 형님 반룡대사(盤龍大師)가 서울 오는 것을 기인하여 나에게 누각의 기문을 써 달라고 하는데 화엄대사와 반룡대사는 같이 뽑힌 이들이다.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겠음으로 삼가 주례(周禮)를 살피건대 무릇 나라의 들에는 10리 길에 초막〔廬〕이 있고, 30리에 여관〔宿〕이 있었으며, 또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 하나, 5리에 단정(短亭)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역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사(公私)의 구별, 상하(上下)의 구별이 분명 하였다. 그러므로 역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어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평원의 기름진 땅이 있어도 주관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 가끔 있었으니 하물며 깊은 산골의 험하고 메마른 곳임에랴 들에 있어서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원집이 없어도 잘 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골짜기 외진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에서 더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사가 이 원을 일으켜 위험하고 호젓한 길에 사람을 들게 한 것은 그 공이 다른 원을 지은 데 비하여 천백 배나 더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벗이 일찍이 불법(佛法)에서는 모든 유익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길과 다리를 보수하고 원집을 짓는 것도 그 중의 한가지 일이니 그 공덕보은지설(功德報恩之說)을 나는 배우지 않아 잘 모르지마는 대사는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고려 때 유희(劉曦)의 시

벼슬에서 좌천되어 남녘으로 16역 지나
오늘 아침 비로소 경상도에 들었다.
요성 근처 두어 마장 떨어진 곳에
궁벽한 군 하나 문경이라 부른다.
변두리 새 원집은 형세가 엄숙하고
찬란한 금빛과 푸른빛이 뒤섞여서
동쪽의 작은 누각 뛰어난 경치에다
훌륭한 글들은 옛 팔영(八詠)을 압도한다.
아름답구나 이 집을 누가 지었는고
이름은 광문(光文)이요 성씨는 민(閔)씨로다.
나 또한 그 민공의 문하에 사람이라
이 건물 창건 보고 더욱 더 공경하네
아 이 사람이 세상에 머물면서
천하를 경영하면 별 탈이 없었을 걸
어쩌랴 하늘 위에 옥루(玉樓)를 이룩하니
33)

기러기가 하늘 지나 듯 그림자도 머물쟎아
티끌 세상과는 떨어져 아득하이
다만 이 한몸이 오램을 탄식한다.

  
   이규보의 시

만가지 인연이 재처럼 찬 노 거사도
붉은 마음 있어 성인 임금 받든다.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축원하려는데
어찌하여 화봉의 이름 혼자 차지했는고
34)

  
   유곡발참(幽谷撥站)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발장(撥將) 1인, 발군(撥軍) 30명
   
요성발참(耳卯 城撥站) :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발장 1인, 발군 30명

  [목장]
  없다. 분양마(分養馬) 1필을 매년 8월에 받아 오고, 다음해 4월에 본시(本寺:司僕寺
35))에 올려 보낸다.

  [관애]
  
고모성(姑母城) : 토천 서쪽 단봉 위에 있다. 양쪽 골짜기를 묶은 중반 같다. 큰 하천과 길이 성 아래를 지나며 좌우의 길이 서로 만나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지키는 줄 알고 두려워 여러 차례 확인하고서야 지키는 병력이 없음을 알고 춤을 추고 지나갔다.

   이언적(李彦迪)의 시에

가파르고 위험한 사다리 길을 오르니
측량할 수 없는 낭떠러지로 머리털이 쭈뼜하고
산허리 옛 보루가 있으니
어느 때 설치했는지 알지 못하나
그로부터 태평 세월 오래였으니
싸우던 성벽에는 개암나무와 가시나무 자라네.

  
   [봉수(烽燧)]
   
선암산(禪巖山)봉수 :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남쪽으로 함창 성산에 연락하고 북쪽으로 50리 떨어진 탄항산에 연락한다.

  [누정(樓亭)]
   
경운루(慶雲樓) : 객관 동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됐다.

    이지강(李之剛)의 시

고을의 누각이 겹겹으로 산에 쌓여
조령 길 몇 번을 따라서 돌았던고
뜰 가로 돌아드는 시냇물이 흐느끼듯
마당에 얼룩지며 가득하게 낀 이끼로다
고기잡이 등불이 시내를 건너가고
나무꾼의 노래소리 구름 속 나오는데
많은 시흥들이 경치에 흘렸는지
붓을 들고도 감히 쓰지 못한다.

  
   함부림(咸傅霖)의 시

눈이 다 녹아 시내 소리 가늘고
연기 사라지니 나무 그림자인가
누각은 높아서 살갗에 소름 돋고
집은 오래서 기와 위 이끼로다.
밝은 햇살은 산에 기대 조용하고
맑은 바람은 땅 흔들며 불어온다.
난간에 의지하여 상념에 잠겼으니
일에 당하여 헤아릴 바 모르네.

  
   신증 연정(蓮亭) : 객관 남쪽에 있고 앞에 적은 연못이 있다.
   
교구정(交龜亭) : 조령의 용추 위에 있다. 관찰사 교인처(交印處)로 성화 연간36)(成化年間, 1465~1487년)에 현감 신승명37)(愼承命)이 건립했다.

   문간공(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의 시

교구정에 오르니 천지가 오만해도
서릿빛 구렛나루서 큰 것을 깨달았다.
물소리는 음악 같이 스스로 격려하며
수천 바위는 노을 들어 그림이구나.
시로써 읊기 전에 새 먼저 날아갔고
눈물 쓰린 이 회포는 원숭이 애끓음 같아
남쪽 길 이미 막히어 쌍척후를 보내고
달 밝은 오늘밤을 어느 마을서 자야 할까.

  
   천교정(遷喬亭) : 유곡에 있다.
   
열무정(閱武亭) : 소야천가의 진장(陣場)에 있다.

  [사찰(寺刹)]
   
봉암사(鳳巖寺) : 양산사(陽山寺)라고도 하는데 희양산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중〔僧〕 지증(智證)의 비와 이몽유(李夢遊)가 지은 중〔僧〕 진정(眞靜38))의 비가 있다.
   
신증 876년(당 희종 건부39)
 3년, 신라 헌강왕 2년) 국사(國師) 진정(眞靜), 지증(智證), 원오(圓晤), 보조(普照)가 건립했다.
  동쪽에 신라 경순왕이 건립한 극락전은 세조대왕의 어필을 보관하고 있다.
   
금학사(金鶴寺)
 : 봉명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가 됐다.
   
오정사(烏井寺)
 : 선암산에 있다.
   
신증 혜국사(惠國寺)
 : 산성 안에 있고 딸린 암자가 셋인데, 안적(安寂), 은선(隱仙), 용화(龍華)이다.
   
추심사(推尋寺) : 화산에 있다.

  [고적(古跡)]
   
호계폐현(虎溪廢縣) : 현의 동남쪽 40리에 있다. 신라의 호측현이었으며,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고령군(古寧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하였으며, 조선조 태종 때에 본 현에 소속되었다.
   
벌천부곡(伐川部谷)
 :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곡(高谷)부곡, 견천(絹川)부곡, 소산천(小山川)부곡, 마량(馬良)부곡
 : 호계에 있다.
   
잉을항소(仍乙項所)
 :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증 고모성(姑母城)
 :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990자 남짓하다. 상세한 것은 관액난 참조
   
고부성(姑夫城)
 : 토천 남쪽 높은 산 위에 있다. 고모성과 마주보며 지금도 있고 돌로 쌓았다.
   
요성(耳卯 城)
 : 현의 동남쪽 4리의 산 위에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 556자이고 지금은 퇴락하여 못쓰게 됐다.
   
견훤산성(甄萱山城)
 : 가은현 서남쪽 5리의 산 위에 있다.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 565자로 지금은 못쓰게 됐고 성안에 샘이 하나 있다.
   
충렬비(忠烈碑) : 신길원(申吉元)현감의 순절(殉節)사실을 기록한 비로 참판(參判) 채팽윤(蔡彭胤)이 비명(碑銘)과 서문(序文)을 지었다.

  비문에 우리 조선조의 선조대왕께서 효자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했다. 말씀하시되“신후(候:현감)길원은 중흥한 뒤에 알아보니 임지를 지켜서 충성으로 죽은 사람을 정려 할 때 빠진 이가 오직 신길원 현감이다”하니 덕망과 학식있는 이들도 “그렇다”고 하며,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안에서 구해야 한다”고 했다. 선왕(先王)께서 백성의 효도하는 사람을 중하게 하는바는 그 충성을 권함이라. 무릇 신 현감의 죽음이 백십여년이 넘어도 고을의 사람들이 잊지 않고 말하기를“이곳은 신 현감께서 만대의 강상(綱常)을 심은 땅이라”하며, 저 옛날의 의로움을 느끼고 생각함이 심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하고 눈물을 수없이 흘리며 의논하되“처음 왜놈이 난리를 일으켜 송동래(東來府使) 상현(象賢)이 먼저 죽고 우리 현감이 뒤에 죽었으나 지금 동래 사람들은 송공을 향사 지내어 그 충렬을 나타내지만 우리 고을에는 유독 신 현감의 충렬이 묻혔다. 지금 보니 민간 풍속이 박하고 문헌이 부족함이라”하며 이에 즉시 고을의 남쪽에 비석을 세워 오래 간직하기로 했다.

  신 현감께서 부임한 지 두 해 지난 임진년에 왜놈이 부산 동래를 짓밟고 아침 저녁에 곧 닥칠 것 같은 상황이라 대부인(大夫人:모친)을 집으로 보내고 현감은 대구로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부성(府城:대구)이 함락됨을 듣고 곳 주장(主將)을 찾아갔다. 상주 주장 권후(權候:權 牧使)는 돌아가서 군량을 거두라 하여 문경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에 적병이 문경에 다가오자 아전과 군사들 모두가“도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곧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피할 것을 권했다. 현감은 큰 소리로 격려하기를 “내가 고을을 맡은 신하로서 이 땅을 지키며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요”하고 적은 군사를 독려했으나 문간에 적병이 이르자 달아나지 않는 이가 없고 현감과 종 하나만 남았다.

  현감이 관복(官服)을 입고 관인(官印)을 차고 앉았는데 적장이 칼을 들이대고 묻기를 “왜 말을 타고 달아나지 않았는가”고 하자 현감이 “나는 선비다. 어찌 말을 타고 달아날 것이냐”하니 곧 항복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협박했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한양 가는 길을 물어도 가리켜 주지 않으며 손을 들어 목을 가리키며 꾸짖기를“내가 너 같은 놈을 만 토막을 내어 죽이지 못함이 한이 된다. 속히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하니 적장이 성을 내며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하였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은 채 꾸짖기를 계속하자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니 4월 27일이다.

  임금께서 들으시고 좌승지40)(左承旨)를 증직하셨다.

  슬프다. 벼슬하는 것이 평소에는 누구나 스스로 즐겁지 않을까마는 조그마한 이해가 있어도 지킬 바를 바꾸지 않는 이가 드문데 하물며 시퍼런 칼날 밑에서이랴. 또 강병이 큰 진영으로 막아도 달아나는 이를 볼 수 있으니 공은 참으로 충렬의 선비이다. 공의 자(字)는 경초(慶初)이니 평산 신씨라.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三司의 하나)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벼슬)으로 있는 국량(國樑)이며, 나이는 45세였다. 태학(太學:성균관)의 추천으로 벼슬에 나가 문경현감이 되어 백성을 정성으로 다스리고 항상 성리학의 책을 읽어 규범으로 삼았으며, 어버이를 돈독히 섬기되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순절하던 날에도 동생을 보내서 어머니에게 영결을 고하고 또 부인에게 부탁하기를“노모를 잘 봉양하며 내가 죽었다고 하여 조금도 소홀하지 말라”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시조(始祖)에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이 있어 고려 태조를 도왔으니 한나라 고조 때 기신(紀信) 같은 사람이니 그 충절이 전해 온 바가 먼 곳에서 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팽윤(彭胤)이 일찍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후편을 읽고 이런 일이 알려지지 않음을 개탄하며 공의 사람됨을 알았다. 또 여러 고을 사람들의 의리를 위해서 비명(碑銘)을 지으니

죽을 줄 알면서도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공의 깨끗한 마음이며
그 영결을 어머니에게 고할 제
어머니 계시고 자식이 죽음을 불효라 하는
이 말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기왕에는 충성과 효도 두 가지를 같이 할 수 없으나
공은 두 가지 다 만남 따라 온전히 이루었네.

  
   [진보(鎭堡)]
   조령진(鳥嶺鎭) 별장(別將) : 무과 출신 4품이다.
   군관(軍官) 300인, 진리(鎭吏) 9인, 지인(知人) 5인, 사령(使令) 21명, 노(奴) 1구

  [명환(名宦)]
   
고려 흥달(興達) : 927년(태조10년)에 강주(康州)를 순행하려고 사갈이성(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먼저 그 아들을 보내 귀순하였으므로 임금이 가상히 여겨 청주록(靑州祿)을 하사하였고, 맏아들 준달(俊達)은 진주록(珍州祿)을, 둘째 웅달(雄達)은 한수록(寒水祿)을, 셋째 아들 옥달(玉達)은 장천록(長淺祿)을 하사하였다.
   
조선 허종항(許從恒), 조추(趙秋)
 : 세종 때에 모두 현감으로 다스린 업적이 있었다.
   
신증 신단(申湍)
 : 명종 때 현감으로 다스린 업적이 있다.
   
신길원(申吉元)
 : 선조 때 현감으로 임진왜란에 순절했다.
   
이덕령(李德齡) : 1695년(숙종21년, 을해)에 현감을 맡아 한결같이 가난한 사람에게 물자를 나누어 주어 구제하여 관내의 모든 백성이 다시 살아 선정비가 각방(各坊)에 있다.

  [인물(人物)]
   
신라 아자개(阿慈介) : 가은현 사람인데 농사로 자활하다가 뒤에 집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아들이 넷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견훤(甄萱)은 곧 그 중의 한 아들이다. 처음 견훤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수풀에 눕혀 두고 점심을 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듣고 이상히 여겼다.

  고기(古記)에“옛날에 한 부자가 무진주(武珍州:현재 광주) 북촌(北村)에 살았다. 한 딸이 있었는데 몸매와 용모가 단정하였다. 그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네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옷에 찔러 놓아라’하여 그대로 하였다. 날이 밝자 그 실을 찾으니 북쪽 담 밑 큰 지렁이 허리에 바늘이 찔려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어 견훤을 낳았다. 이것은 본전(本傳)과 다르니 아마 믿을 만 한 것이 못될 것이다”하였다.

  [효자(孝子)]
   
조선 조형(趙珩) : 벼슬이 사재부정(司宰副正)에 이르렀다. 어머니를 위하여 시묘하면서 피눈물을 흘려 슬피 울기를 3년 동안 하였으며,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세종 때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특별히 1품을 가자(加資)41)하고 정여를 세웠다.

  [열녀(烈女)]
   
조선 최씨(崔氏) : 사직42)(司直) 안귀손(安貴孫)의 아내이다. 가은현에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 치운(致雲)이 시와 글씨를 가르쳤다. 남편이 죽으니 제문(祭文)에

봉황이 함께 날 때 즐겨 노래 불렀는데
봉(鳳)이 돌아오쟎아 황(凰)이 홀로 운다.
하늘에도 물어 봐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
하늘같고 바다같이 넓은 한(恨)이 끝이 없다.

  
   신증 안귀손(安貴孫) : 덕행을 온전히 갖추고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한천향현사에서 향사하게 되었다.
   
신숙빈(申叔彬) : 문희공(文僖公) 개(
)의 손자로 지조와 행실이 고결하고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한천향현사에서 향사하게 되었다.
   
김낙춘(金樂春)
 :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은거하여 도를 구하고 실천하는데 독실했으며,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호는 인백당(忍百堂)으로 소양 향현사에서 향사하게 되었다.
   
신후명(申厚命) : 정랑43)(正郞) 상철(尙哲)의 손자로 1666년(현종7년, 병오)에 문과44)(文科)에 올라 벼슬이 참판45)
(參判)에 이르렀다.
   
신필정(申弼貞) : 은거하여 도리를 가르쳤는데 경학(經學:儒學)이 더욱 정밀하고 밝았다. 수의대신(繡衣大臣)이 추천하는 등 숙종 때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 찰방까지 제수되고 1728년(영조4년, 무신)에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745년(을축:영조21년)에 관찰사의 장계에 의하여 학문이 독실함을 포상하여 집의46)(執義)에 증직47)(贈職)되었다. 저서(著書)로 훈몽역의(訓蒙易義) 10권이 있고 스스로 호를 병옹(病翁)이라 했다.

  [효자]
   
김시진(金始振) :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3년간 멀건 죽으로 연명하였다. 1720년(경자: 숙종46년)에 국상48)(國喪:國恤)을 당하였을 때도 나이가 80이 지난 몸으로 고기를 먹지 않고 멀건 죽으로 연명하다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전에 수직49)(壽職)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오르고 1732년(임자:영조8년)에 그 사실이 위에 알려져 판서50)(判書)에 증직되었다.
   
주득천(周得天) : 신북방의 양인51)(良人)으로 어머니가 눈이 멀어 수십 년을 득천이 밤낮으로 옆에 있으면서 수발과 음식을 먹여 드렸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그 때가 여름이라 꿩고기를 구하기 어렵자 울면서 꿩을 찾아다니는데 매가 날아가며 꿩을 앞에다 떨어뜨려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하여 꿩을 얻게 됐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52)살이를 했다. 1708년(숙종34년, 무자)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부역53)(負役)을 면제했다.

  [열녀]
 
  윤소사(尹召史) : 정병54)(正兵) 조막룡(趙莫龍)의 아내이다. 남편이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죽자 6년간 소복을 하며 마음을 잡아 완전히 절개를 지키고자 하니 그 아버지가 가엽게 여겨 재혼을 권하니 따르지 않고 스스로 목을 메어 자결했다. 1650년(효종1년, 경인)에 그 일이 위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세웠다.

  [제영(題詠)55)]
  
분단명협리(奔湍鳴峽裏) 최수(崔脩)의 시에

북쪽을 바라보니 산천이 막혀 있고
남쪽으로 와서는 세월만 흘러간다.
달리는 여울은 골짜기를 늘 울리고
눈 쌓인 벼랑아래 그늘이 뒤덮었다.
충성된 절조만은 마음에 가득하나
화사한 얼굴엔 백발만 늘어난다.
이름 얻는 길에서 무엇을 이뤘던고
부질없이 벼슬 싫탄 노래만 읊었노라.

  
   동밀청운합(洞密晴雲合) : 고려 정포(鄭包)의 시에

동구는 그윽하여 구름 가운데 맑고
높은 누각에 달이 비치니 더욱 좋다.

  
   산기혼여무(山氣昏如霧) : 김구경(金久)의 시에

산속 아지랑이 안개같이 아득하고
시냇물은 이끼처럼 푸르구나

  
   팔영(八詠) 서거정(徐居正)의 시

 

        주흘(主屹)의 영사56)(靈祠)
        험한 산은 하늘 끝에 닿았고
        깎아지른 벼랑은 구름속에 들어있다.
        만물을 윤택하게 함에는 비록 그 자취 없으나
        구름을 일으킴에는 스스로 공이 있다.

        관갑(串岬)의 사다리길(棧道)
  
      구불기는 양의 창자 같은 길이
        구불구불 새 나는 것 같이 기이하도다.
        봉우리 하나하나 모두 빼어났으니
        그런데도 말 가기가 더디구나.

        창밖의 오동나무(窓外 梧桐)
   
     솔솔 부는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데
        이지러진 달이 성긴 가지에 걸렸구나.
        갑자기 내리는 한밤중 비에
        고향 생각을 어이하리.

        뜰 앞의 버드나무(庭前 楊柳)
   
     영남의 그 많은 나그네들
        꺾어 주어 이제는 남은 것이 없으련만
        의연히 봄바람에 떨치니
        긴 가지는 짐짓 여전하구나.

        푸른 절벽의 단풍(蒼壁 楓丹)
   
     붉은 잎이 푸른 절벽을 장식하니
        강산이 아주 딴판이로구나.
        내가 온 때가 마침 늦가을
        이렇듯 좋은 경치 일찍이 본적이 없네.

        그늘진 벼랑에 흰눈(陰崖 白雪)
   
     겨울이 깊어서 얼음이 골짜기에 가득해도
        봄이 오면 물이 시내를 이룬다.
        자연의 모습은 때를 따라 달라지는데
        인정은 늙어 가며 어지러워지련다.

        오정사 종루(烏井鐘樓)
   
     나그네길 시름으로 잠 못 이루는데
        외로운 베갯머리엔 달빛만 비쳐 온다.
        어디가 한산사
57)
이냐
        드문드문 울리는 종소리 한밤중에 들려 온다.

        용담폭포(龍潭瀑布)
   
     옥같은 무지개 높다랗게 드리웠는데
        흰 눈은 산뜻한 맑음을 뿌려 준다.
        날고 자맥질하는 술법을 묻지 말고
        변화의 신통을 알아야 하리.

 

 
    신증  관건수간조화공(關鍵須看造化功) : 오숙(吳숙)의 시

사물의 중요함을 잠시봐도 조화롭고
북쪽서 뻗은 고개 여기서 웅장하다.
불이 떨어지니 폭포로 장엄하고
원래 상주진이 새재길로 통했는데
화각
58)
(畵角) 부는 공중에 새벽 안개 걷히고
대장 깃발 땅을 떨쳐 바람에 휘날린다.
이번 길에 선비의 초라함을 씻으니
만리 밖 해뜨는 곳이 눈에 있구나.

  
   [한전(旱田:밭)]
   원장부(元帳簿) 1,836목〔結〕
59) 87짐〔負〕60) 8뭇〔束〕61)
   각 연도 경작지 2결 25부를 더하고 그 안에서
   각종 면세전과 진잡탈(陳,雜,
) 전 합계 506결 89부 6속을 감하면
   1759년(기묘:영조35년) 경작지 1,332결 23부 2속이다.

  [수전(水田:논)]
   원장부 965결 62부 7속
   각 연도 경작지 1결 12부를 더하고 그 안에서
   각종 면세전과 진잡탈(陳,雜,
) 전을 합한
   115결 44부 4속을 감하면
   1759년 경작지 851결 30부 3속이다.

  [진공(進貢)62)]
   인삼, 적복령(赤茯
), 백복령(白茯), 복신63)(茯神), 백작약64), 자초용65)(紫草茸), 고루인(苽蔞仁), 감국66)(甘菊), 자호(紫胡), 연교67)(連翹), 태수(胎水)

  [조적(糶糴)68)]
   
원회(元會) 쌀, 좁쌀〔大小米〕3,487섬〔石〕4말〔斗〕2되〔升〕8작〔舍〕
  잡곡 1,643섬 1말 5되 9홉〔合〕9작
   
진색(賑色)
 쌀, 좁쌀 5,273섬 7말 9되 2홉 5작
  잡곡 9,153섬 12말 9되 9홉 3작
   
상평창69)(常平倉)
 쌀, 좁쌀 507섬 4말 8되 4홉 8작
  잡곡 1,633섬 14말 7되 4홉 9작
   
별회70)(別會)
 : 쌀, 좁쌀 921섬 14말 3되 5홉 5작
  잡곡 238섬 10말 9되 2홉 1작
   
사진(私賑) 잡곡 203섬 3말 1되 4홉 5작, 1759년(기묘)을 기준했다.

  [전세(田稅)71)]
   쌀 381섬 9말 3되 3홉
   콩 271섬 14말 8되 1홉 6작, 3월에 작전
72)(作錢)하여 받아들이고 4월에 육로로 5일 걸려서 서울의 호조73)(戶曹)에 납부했다. 1759년(기묘년)기준이다.

  [대동(大同)]
   작목
74)(作木) 39동75)(同)은 돈과 무명 절반을 전세로 선혜청76)(宣惠廳)에 일시에 납부한다.
   혜청(惠廳)쌀 600섬 8말 2되는 본 현에 저축하여 두는데 선혜청의 구분과 계획에 따라 많고 적음이 늘 같지 않고 1759년 기준이다.

  [균세(均稅)]
   전세 대신 쌀〔大同條米〕21섬 8말 6되 9홉 5작
   콩 42섬 11말 9홉 5작은 정례화 된 작전(作錢)이고,
   대동조 무명(大同條木) 5동(同) 4필
77)(疋) 6자〔尺〕4치〔寸〕는 돈과 무명을 반반으로 거두는데 결세 돈(結錢) 1,086냥(兩) 7전(錢) 9푼〔分〕과 전세는 일시에 수납하여 보낸다.
   선무목(選武木)
78) 45필은 10월에 수납하여 육로로 5일 걸려 서울의 균역청79)(均役廳)에 납부하는데 1759년 기준이다.

  [봉름(俸)80)]
   아록위
81)(衙祿位) 40결이고, 쌀 10섬 9말 5되 1홉 2작, 콩 3섬 3말 4되 8홉 8작이다.
   공수위
82)
(公須位) 15결이고, 쌀 3섬 1말 8되 7홉 2작, 콩 2섬 1말 1되 2홉 8작이다.
   관수(官需:관청의 소용) 쌀 296섬 10말은 민결(民結)로 내는데 닭, 꿩, 시탄(柴炭), 볏짚〔藁草〕은 사람당 돈으로 3냥 6전씩 수납하여 관에서 무역에 사용한다.

  [군병(軍兵)]
   훈련도감
83)(訓鍊都監) 포보84)(砲保) 120명
   어영청
85)(御營廳) 정군86)
(正軍) 66명, 자보(資保) 70명, 상납보(上納保) 107명
   금위영
87)
(禁衛營) 정군(正軍) 66명, 자보(資保) 70명, 상납보(上納保) 107명
   병조
88)(兵曹) 기병89)(騎兵) 108명, 보병 286명, 금군보90)(禁軍保) 5명, 복직(直) 11명, 내취보91)
(內吹保) 1명
   장악원
92)(掌樂院) 악공보93)
(樂工保) 5명
   공조
94)
(工曹) 장인보(匠人保) 58명
   방군(防軍) 33명
   아병
95)
(牙兵) 6명
   발군
96)
(撥軍) 60명
   봉수군(烽燧軍) 50명, 보 150명
   속오군
97)(束伍軍) 773명

 

1) 조선 때 삼사(三司)의 하나로 궁중의 경서, 사적, 문서를 관리하고 왕을 자문하는 관청.
2) 조선 때 8도의 관찰사를 달리 이르는 말로 지금의 도지사 격임.
3) 나라에 붙은 땅. 국경.
4) 조선조 때 행정구역으로 오늘날의 면과 리에 해당.
5) 지세와 경치가 뛰어남.
6)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성 둘레에 깊이 파 놓은 해자.
7) 관가 소유의 건물.
8) 그 지방에서 나는 산물.
9) 높고 좋은 자리에 있는 벼술.
10) 관리에 봉급으로 주는 쌀.
11) 세금을 정하여 부과함.
12) 조선조 때 8도의 감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
13) 조선조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있던 영문(營門).
14) 조선조 때 3도통제사(三道統制使)가 있던 군영으로 지금의 충무시에 있었음.
15) 사람의 단위를 원(員:관원), 인(人:사람,국민,잘난 사람), 명(名:사람), 구(口:입)로 세분했다.
16) 조선조 때 주, 부, 군, 현에 두었던 향청(鄕廳)의 우두머리.
17) 좌수 다음 가는 향청의 벼슬.
18) 무관(武官). 장교의 통칭.
19) 관원 밑에 두는 구실아치. 아전(衙前), 이서(吏胥), 이속(吏屬), 서리(胥吏), 소리(小吏)라고도 함.
20) 지방관의 관인을 보관 날인하는 일을 맡아보던 향리. 통인(通引).
21) 각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람.
22) 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던 병졸. 현재의 헌병.
23) 관가에 속하여 부역이나 생산에 종사하던 남자 종.
24) 여자 종.
25) 도성이나 각 고을을 진호하는 주산.
26) 사직(社稷)은 토지 신과 곡식의 신. 즉 국가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
27) 각 고을의 북쪽에 단을 쌓아 후사(後嗣)가 끊어진 혼령을 제사 지냈다.
28) 시골의 한량이 모여 편을 갈라 활을 쏘는 곳.
29) 봉암사를 말함.
30) 명나라 효종(孝宗)때 연호.
31) 지방 관아에서 수령들이 공무를 보던 대청.
32) 진나라 사람으로 휘파람을 잘 불어 유명하다.
33) 하늘나라 서울인 백옥경(白玉京)에 옥으로 건축한 정자의 상량문을 지으려고 옥황상제가 불러 갔다는 뜻.
34) 화(華)라는 땅의 지방 장관을 봉인(封人)이라고 했는데 화봉인(華封人)이 요(堯) 임금에게 수(壽), 부(富), 다남(多男)을 축수하듯 모든 백성들이 우리 임금에게 화봉인 같이 축수하는데 어째서 이원만 그 이름을 혼자 차지했는가.
35) 사복시는 궁중의 탈 것[乘輿], 마칠(馬匹), 목장을 맡아보는 관청.
36) 성화는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로 23년간 사용하여 조선 세조 11년부터 성종 18년에 해당됨.
37) 명환(名奐), 선생안(先生案)에는 현감 재직 사항이 누락되었음.
38) 정진(靜眞)의 잘못된 기록임.
39) 건부(乾符)는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로 874~879년임.
40) 조선 때 승정원에 속하였던 정 3품 벼슬.
41) 정 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品階)를 올리는 것.
42) 조선 때 5위(衛)에 속하던 정 5품 벼슬.
43) 조선 때 6조(曹)에 속하는 정 5품 벼슬.
44) 문관을 뽑던 과거시험의 하나로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구별이 있었다.
45) 조선 때 6조의 종 2품 벼슬로 정원은 1명이며 판서 다음 벼슬.
46) 조선 때 사헌부에 속한 종 3품 벼슬.
47) 공신, 충신, 효자 및 학덕이 높은 사람에게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줌.
48) 왕족의 상사(喪事).
49)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나라에서 혜택으로 주던 벼슬.
50) 조선 때 6조(曹)의 장관으로 정 2품 벼슬임.
51) 양반과 천민의 중간 계급으로 천역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 백성.
52) 상주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던 일.
53) 국민이 부담하는 공역(公役).
54) 조선 때 실제로 군무(軍務) 만을 맡아보던 정규군.
55) 시를 짓고 읊음.
56) 신성한 사당.
57) 당나라 張繼의 시에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즉 고서성 밖의 한산사에서 밤중에 치는 종소리가 나그네가 탄 배에까지 들린다고 읊었는데 고소성고 한산사도 아닌데 어디서 그런 종소리가 들리는가 하는 뜻.
58) 관악기의 한가지로 쇠뿔 등으로 만들고 겉에 그림을 그렸다.
59) 조세를 계산하기 위한 토지면적 단위로 백짐. 1만파(把).
60) 토지면적 단위로 열뭇. 백줌.
61) 토지면적 단위로 열묶음이 한뭇.
62) 세금으로 특산물을 가져다 바침.
63) 소나무 뿌리에 생긴 복령.
64) 작약과에 속하는 50㎝ 가량의 다년생 풀.
65) 지치의 싹.
66) 엉거시과에 속하는 30~60㎝의 다년생 풀.
67) 개나리. 개나리 열매로 내복약에 쓰임.
68) 환곡을 꾸어주고 받아들이는 일.
69) 물가 조절을 위한 기관.
70) 특별 회계.
71) 논밭의 조세.
72) 전세(田稅)를 받을 때 쌀, 콩, 무명 대신 값을 쳐서 돈으로 받게 하는 일.
73) 6조(曹)의 하나로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量), 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청.
74) 쌀이나 콩 대신 무명으로 전세(田稅)를 받아들이던 일.
75) 묶음을 세는 단위로 묶은 물건에 따라 다르며 피륙은 50필을 1동으로 함.
76) 조선 때 대동미(大同米), 포(布), 전(錢)의 출납을 맡았던 관아.
77) 일정한 길이로 짠 피륙을 하나로 셀 때 쓰는 단위.
78) 선무청(選武廳)의 군관포(軍官布).
79) 조선 때 균역법의 실시에 따른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80) 관리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
81) 지방 수령의 식구들에게 주는 녹을 위하여 준 토지.
82) 각 관아의 가옥 수선과 중앙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관리의 숙박, 접대 등에 드는 경비를 위해 나누어 준 토지.
83) 1594년(선조 27년)에 실시한 5군영(軍營)의 하나. 임란 후 5위의 군제가 무너지며 생겨 서울 수비 책임을 맡아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의 3수군(手軍)을 양성했음.
84) 군보(軍保)의 하나로 포군 네사람 중 한사람은 역(役)에 복무하고 세사람은 그 보(保)로 쌀이나 베를 바침.
85) 조선 때 군영으로 3군문(軍門)의 하나인데 1652년(효종 3년)에 설치.
86) 장정으로 군역(軍役)에 복무하는 사람.
87) 조선 때 5영의 하나로 서울을 호위하여 지키던 군영.
88) 조선 때 6조(曹)의 하나로 무선(武選), 군무(軍武), 의위(儀衛), 우역(郵驛), 병갑(兵甲), 기장(器杖), 문호관약(門戶管약) 등의 일을 맡음.
89) 조선 때 용호영(龍虎營),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을 지키던 군사.
90) 조선 때 금군청이나 용호영에 속하여 궁중을 지키고 임금이 거동할 때 호위와 경비를 맡아 하던 말탄 군사의 요포(料布).
91) 조선 때 궁중에서 군악을 아뢰던 악대의 요포(料布).
92) 조선 때 궁중에서 행하는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93) 백성으로부터 받아들이던 악공의 요포(料布).
94) 조선 때 6조(曹)의 하나로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선(營繕), 도야(陶冶)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95) 대장의 휘하에 있는 병정.
96) 역마를 빨리 몰아 중요 공문서를 변방에 체송하던 군졸.
97) 1594년(선조 27년)에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역(役)을지지 않은 양인과 천민 중에서 조련을 감당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편성한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