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26. 14:30ㆍ들꽃다회
창덕궁 후원 뇌다회(雷茶會) - 넷(完)
29140516 금요일 오후
- 연경당 권역, 후원에서 돈화문으로 나오는 길섶 화계에서
: 때이른 초여름 날씨로 금년에는 윤달이 들었으나 5월 중순에
3주 가량 일찍 핀 작약, 찔레나무, 붓꽃 등
연경당(演慶堂) 중문행랑채, 바깥행랑채 모퉁이와 빗물 하수로
연경당에서 나오는 석조 수채구멍
연경당 정문인 장락문(長樂門) 동쪽의 화단에 있는 괴석과 받침돌
이 괴석받침돌(석함 石函)에 돋을새김한 석사자는 맏아들인가 보다.
사람이나 짐승에게도 맏이는 책임감이 강하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자신을 양보하는 희생정신이 강하여 무거운 책무를 지기 좋아한다.
이 석함의 사자도 무거운 괴석을 지고 있어도 즐거운지 아래에서 설명하는
용의 맏아들 비희 처럼 입가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명나라 때 호승지(胡承之)가 쓴 < 진주선(眞珠船)>이란 책에서 용(龍)은
아홉 아들을 낳았는 데, 첫째가 비희(贔屓) 일명‘패하(覇下)’라고도
하며, 거북이를 닮았고 무거운 것 지기를 즐겨 주춧돌 아래에서 집을
떠받치고 있거나 ,무거운 비석돌을 지고 있기를 좋아하여 이를 귀부(龜趺)라고
한다고 기술하였다.
연경당 정문 동쪽에 있는 작은 애련지(愛蓮池)와 수련(睡蓮)
- 마당 건너편 담장 안은 의두합 권역
연경당
민가의 양식을 빌려온 궁가
목차
서울 한폭판, 궁가의 아름다움
지루한 장마가 지나면 삼복더위가 시작된다. 에어컨 바람도 한두 시간이지 종일 맞고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던 일을 덜컥 놓을 수도 없다. 가족과 함께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수박이라도 먹으며 탁족(濯足)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눈먼 물고기 몇 마리가 계류 바위틈에 놓아둔 어항에 들어오면 어죽이라도 끓여 시원한 소주 한 모금에 여름을 날려버린다.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서울이 불볕더위로 달구어지고 도시가 서서히 여름의 한가운데로 치닫는다. 선풍기 바람을 쐬어가며 책이라도 뒤적여보지만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땐 소나기라도 한 줄기 내리고 매미라도 시원히 울어준다면 더위가 가실 텐데, 날은 덥기만 하다.
종로 3가 돈화문을 지나 창덕궁(昌德宮) 후원인 부용지(芙蓉池)의 아름다운 연못 언덕에 자리 잡은 규장각(奎章閣)에 오르니 더위가 한결 가신다. 바람이 시원하다. 짙푸른 여름을 배경으로 새소리, 매미 소리 오케스트라 공연이 한창이다.
하루 해가 넘도록 마음 놓고 즐기다 연경당 사랑채로 자리를 옮긴다. 단정한 문갑 위에 놓인 복숭아형 진사연적과 해태형 청화백자 필통의 정갈함에 눈길이 머물다 사방탁자 위 분원 금사리 백자 대접에 올린 노란 참외를 바라보는 그 즐거움을 상상으로 그려본다. 구중궁궐의 호사와 권위로 가득했던 사치스러운 기교와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절제된 풍모가 동시에 보이는 연경당(演慶堂)이야말로 조선 후기 건축의 정수이다.
민가 같은 맛
연경당은 순조 28년(1828년) 조선시대 5대 궁궐의 하나인 창덕궁 후원에 사대부가의 풍모로 지어진 120칸 궁중 건물이다. 연경당은 순조를 대신해 섭정의 자리에 있던 조대비가 왕세자의 명에 의해 건립하게 한 만큼, 당시 최고의 경지에 있던 도목수(都木手)와 동산바치(원예사)가 건축을 하고 뜰을 조성했다. 연경당이 완성되자 조대비는 연경당의 아름다움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건축을 담당한 도편수와 목수들에게 상을 내렸다. 19세기 후반에는 왕궁 건물을 민가 양식으로 짓는 게 유행이었다. 그 좋은 사례가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이다. 낙선재는 연경당과 마찬가지로 단청을 하지 않았지만 민가에서는 쓰지 못하는 장대석과 괴석 그리고 사고석 담장 같은 건축법으로 지었다.
연경당은 창덕궁 후원 골짜기의 안쪽에 넓은 터에 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면서 대문간 행랑채, 중문간 행랑채를 차례로 세우고, 그 안쪽에 사랑채인 연경당과 안채를 연속된 하나의 몸채로 세웠다. 다음 사랑채의 동쪽에 독서당인 선향재(善香齋)와 정자인 농수정(濃繡亭)을 짓고, 안채의 서쪽에는 아래채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동서로는 중문간 행랑채와 ㄱ자형으로 연이어 있다. 안채 뒤 북쪽 담에 문을 내어 부엌을 만들어 음식을 장만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는 허드렛일 공간인 반빗간(飯婢間)이 자리 잡고 있다. 연경당 건물 뒤편 숲으로 이어진 능선을 넘어가면 창덕궁 후원의 백미인 옥류천(玉流泉)으로 곧바로 연결된다.
자연스러운 물 흐름
장락문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에 들어가려면 작은 실개천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실개천이 풍수에서 일컫는 명당수(明堂水)이다. 양택(陽宅)에서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서출동류(西出東流)를 길지로 삼았다. 연경당 서편 동산 언덕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서쪽 끝 행랑채 마당 아래에서 일부러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연경당 앞으로 돌린 것이다. 이러한 명당수 개념은 궁궐·사찰·서원·민가에 두루 적용되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앞에 금천(禁川)이 흐르고 여기에 영제교(永濟橋)가 서 있다. 창덕궁에는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에는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그뿐 아니라 안강 옥산서원(玉山書院) 외삼문 안에 작은 실개천을 계곡에서부터 끌어들여 서원을 출입하는 유생들이 반드시 건너게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물줄기는 연경당 솟을대문 앞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 애련지(愛蓮池)로 합수된다. 실개천의 호안(護岸)은 장대석을 쌓아 그 격을 높였는데 때로는 직선으로, 때로는 곡선으로 마감하여 자연스러운 물 흐름을 배려했다.
바깥행랑 마당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는 괴석을 심은 석함(石函)이 놓여 있다. 괴석은 일부러 돌을 기이하게 만들거나 구멍이 숭숭 뚫어지거나 바짝 마른 진기한 자연석을 말하는데, 이것을 조경의 한 요소로 삼은 것은 중국의 궁중 원림 조경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괴석은 모두 중국에서 가져온 일종의 사치 풍류로, 연경당·사랑채·안마당·샛담 아래 여럿 놓인 것 말고도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후원과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후원 그리고 덕수궁·창경궁 등의 후원과 정자 주변에 두루 놓여 있다.
괴석을 심은 석분 사면에는 꽃문양 장식을 하고 그 윗면 네 귀퉁이에 개구리 한 마리씩 돋을새김을 해놓았다. 이 중 세 마리는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한 마리는 밖으로 기어 나오게 하여 정적 공간을 동적 공간으로 생동감 있게 만든다.
동쪽 석함은 대석 위에 괴석을 얹어놓은 것으로 그 전체적인 모습이 현대의 추상 조각을 보는 듯하다. 그 옆의 8각 석주는 측우기의 밑면을 올려놓고 고정하는 대석이다. 이들 석물들이 있는 곳에도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겨울 오후 석물 그림자가 연경당 바깥행랑채의 나무 판장벽에 드리워져 처마의 그림자와 쓸쓸한 풍경을 자아낸다.
연경당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종2품 이상의 관료가 초헌(軺軒)이라 부르는 외바퀴 수레나 사인교(四人轎)를 탄 채 대문을 드나들기 위해 지붕을 주변의 행랑채보다 한층 높일 수밖에 없었고, 문지방 중앙에 홈을 파서 외바퀴가 지나가도록 했다. 이런 이유로 솟을대문은 지체 높은 양반집의 상징이었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있는 바깥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로 둘러싸인 행랑 마당은 장방형으로, 사랑마당과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조선시대는 남녀와 반상(班常)의 구분이 철저한 유교 신분 사회였다. 따라서 남자들은 솟을대문인 장양문(長陽門)을 통해 사랑채인 연경당으로 드나들었고, 여자들은 평대문인 수인문(脩仁門)으로 출입하였다.
사랑채, 사대부의 풍취
장양문을 들어서자 가운데 안채와 사랑채를 구획하는 샛담을 두고 선향재와 농수정을 배경으로 연경당 사랑채가 당당하면서도 화려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이름인데, 이 집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으로 쓰인다. 연경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 뒷면 2칸으로 ㄴ자 평면을 이루는 홑처마 팔작지붕의 굴도리 기와집이다.
정면 6칸 중 동쪽 1칸은 누마루로 구성하고 가운데 4칸 중 2칸은 사랑방 온돌이며 대청 서쪽 첫 칸은 누다락이다. 사랑방은 사대부가 집 주인의 일상 거처이다. 대궐에서 퇴궐하면 이 방에서 독서하거나 한가하게 쉬기도 하고, 손님이 찾아오면 맞이하여 정담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사랑방 가구는 사대부들의 학문과 식견에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서안이나 문갑·서탁·가께수리 등을 비롯한 연적·필통·벼루·붓걸이 등의 문방구류에 높은 심미안을 담아냈다. 이러한 사랑방 가구나 문구류의 특징은 장식이 배제된 절제미와 완벽에 가까운 비례미 그리고 작지만 단아한 맛 등이다.
사랑방 북쪽으로 2칸의 침방이 있어, 사대부가에서는 사랑채의 주인대감이 내당에서 부인과 합방(合房)할 때를 제외하고 평상시에 취침하는 곳이다. 이처럼 사랑채에 침방을 만들게 된 것은 조선시대 내외법(內外法)으로, 태종 때부터 ‘부부의 별침’을 명했기 때문이다. 연경당에서 이 침방은 안채와 한 칸의 마루를 사이에 두고 연이어져 있다. 연경당은 그야말로 사대부의 풍치를 한껏 보여주는 아름다운 주련과 창호 그리고 궁가의 품격인 장대석 기단과 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집이다.
안채와 서재
사랑채 침방과 연이어진 안채는 모두 10칸 홑처마 팔작집으로, 도리는 사랑채의 굴도리와는 다르게 격을 한단 낮춘 납도리집이다. ㄱ자 평면의 돌출된 1칸의 상부는 누다락이고, 그 북쪽으로 2칸의 안방이 있다. 안방의 동쪽으로 2칸 대청이 자리 잡고, 그 건너 2칸의 건넌방과 1칸의 마루방이 사랑채의 침방과 연이어져 있다. 그리고 대청과 건넌방의 전면인 남측에 개방된 툇마루가 붙어 있고 북쪽 면에도 반 칸 폭이 안 되는 좁은 툇마루가 붙어 있다. 안방은 안주인의 거처이고 누다락은 안주인의 여름철 거처이다.
누다락 아래는 안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는 함실아궁이다. 일반 사대부 집에서는 이곳이 보통 부엌인데, 연경당 같은 궁가에서는 부엌을 반빗간으로 따로 지어 분리했다. 안채 기둥에도 멋진 주련이 정갈하게 걸려 있고, 안마당 담장 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회화나무인 정심수(淨心樹)를 심었다. 그 나무 밑둥치에는 흔히 ‘나무시집보내기’라고 하는 우람한 괴석을 박아놓았다. 그 곁에는 화초분과 해시계를 받쳐놓는 석물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동쪽의 선향재는 책을 보관하고 독서하는 서재이다. 중앙에 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서향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가리려고 맞배지붕을 덮어 차양을 만들었다. 선향재 뒤쪽 언덕에 화초를 심은 화계(花階)가 있고 동산에 농수정 정자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선향재에서 독서를 하다가 뒷문을 통하거나 정자 앞 계단을 올라 농수정에 앉으면 연경당 일곽이 시원히 바라보이고 멀리 후원의 풍경에 마음이 사뭇 고요해진다.
여름이 한창이다. 창덕궁 후원 애련지에 핀 수련을 하염없이 바라보니, 이 골짝 저 수풀 사이로 날아다니는 꾀꼬리 한 쌍이 부지런히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 산새들이 화답하고 연못 아래 잉어들이 여유롭다. 조선 역대 임금들이 정사의 고단함을 이곳 후원에서 자연과 함께 풀어내고 우주의 섭리를 궁구했으니, 창덕궁은 하나의 작은 우주이다.
연경당에 머무르던 순조의 왕세자인 익종(翼宗)은 순조 9년에 태어나 순조 27년에 왕명으로 대리 청정하다가 연경당을 완성하고 겨우 2년을 더 살다가 순조 30년(1830년) 스물두 해의 생을 마감했다. 익종이 연경당에 머무르다 간 세상은 겨우 2년. 짧은 생애의 어둡고 무거운 마음을 후원에 나가 산보와 소요로 달랬으리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궁가나 민가나,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사 고민 없는 사람 없고 어려움 없는 삶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모든 어려움을 뒤로하고 역사는 이어가고 삶은 대를 이어오며, 내일은 또 그렇게 다가올 것이다. 지난날의 역사를 거울 삼아 오늘을 열심히 살 뿐이다. 추사의 편액 글씨 경서(經書)로 날줄로 삼고 역사를 씨줄로 삼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라는 ‘경경위사(經經緯史)’의 깊은 뜻을 새삼 새겨본다. 매미 소리에 또 긴 여름해가 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경당
- 민가의 양식을 빌려온 궁가 (한국의 미 산책, 2007.11.30, 해냄)
솟을대문의 높이를 낮으막하게 하여 성리학의 절제미를
나타내고 있는 연경당 정문인 장락문과 바깥 행랑채....
장락문 앞 서쪽 화단에 있는 괴석받침돌....
모란꽃과 잎을 깊게 돋을새김하였다.
- 모란꽃잎에 회돌이무늬를 새겨 단전호흡에 의한 기(氣)의 운행을
나타내 줌으로서 드나드는 사람 모두 항상 명상성찰과 자기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경계(警戒)를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회돌이 기운행(氣運行) 문양은 집안과 평양에 있는
고구려고분 벽화 중 선왕이나 묘주인의 봉분을 그린 산모양의
그림에도 여러 종류의 기운행에 대한 정제(精製)된 그림이 그려져 있어
후인(後人)들이 누구나 이를 따라하여 명상에 들면서 단전호흡을
통하여 기운행을 익혀서 건강과 기력(氣力)의 증진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렇게 벽화그림이나 석물에 새긴 무늬들을 예술적인 표현한
가운데 우연이나 장식성을 가장하여 우리 고유의 민중수련법인
선도(仙道)의 정수(精粹)와 선무도(仙武道)의 초식들을 숨겨 놓고서
나중에 누구인지도 모르는 눈밝은 후대인들이 배우고 익히게 하려는
것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오랜 전통으로 지금에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연경당의 여자들이 드나드는 문인 수인문과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의
바로 서쪽에 위치한 괴석받침돌의 모란잎에 돋을새김한 회돌이 무늬는
남녀노소 누구나 따라하면 체력과 기력(氣力)을 돋을 수 있는 아주
초보적인 단전호흡법으로 기의 운용방법에 대한 모식도이지만,
그러나 고분벽화나 이러한 석물들이 적성국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에 대한 대비로 복잡한 회돌이 무늬들은 이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익히지 않으면 기병(氣病)을 일으키거나 기감(氣減)이 있어 결국에는 폐인이
될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이에 숙련되고 뛰어난 스승을 통하여 익혀야 이러한
것을 방지하고 자기수련과 공력증진을 위한 어느 한 방편으로 삼을 수 있다.
장락문 서쪽 지나다는 길 바로 옆의 괴석받힘돌인 석함(石函)에 있는
모란잎의 돋을새김한 회돌이무늬는 오가는 누구나 - 왕손이던지 시위군사나
상궁이던지 궁내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나 연(輦)을 끄는 가마꾼까지도
이를 늘 지나다니며 보고 익혀서 자기 건강을 돌보라고 하는 한솥밥 먹는
같은 식구들에 대한 크고 말없는 배려이자 베품(보시 布施)이라고 보인다.
이를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성리학적인 표현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나,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태양신을 모시는 우리 고유의 신앙인
선도(仙道) 혹은 풍류도(風流道)에서 나온 것으로 나 보다는 우리 엄마,
우리 마을, 우리 학교, 우리나라 등등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우리 배달민족(倍達民族, 밝다의 이두식 표현인 박달 朴達, 박달나무 단檀,
환하다의 환桓, 환단桓檀, 불의 이두식 표현인 부여扶餘,夫餘, 비류沸流, 번개불의
이두식 표현인 진단震檀 등)은 그 구성원 모두가 한솥밥을 먹는 한 식구라는
민족공동체의식이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전통적인 토대 위에서 삼국통일
후에 찢어진 겨레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려고 만드신 원효대사의 무애차(無碍茶)가
크게 유행하고, 지금도 일본의 다도종가의 대부분은 이 무애차에서 나온 진한 가루차인
농차법(濃茶法)을 주종으로 삼고 있다.
이 풍류도의 고수들은 과거에 하층민이였던 사당패,풍물패, 떠돌이 악사,판소리꾼,
떠돌이 재담꾼이나 요지음 구연동화와 같은 송서(誦書)꾼, 장돌뱅이 등으로 위장하여
전국을 돌면서 그 사람됨과 근기를 보고 후계자들을 물색하여 왔다.
상림원의 태극정의 영조(營造) 의미 처럼 항상 극과 극은 서로 통하고,
태극은 곧 무극(無極)이 되어 서로 회돌이무늬 처럼 휘돈다.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나중에 연 소치 허유(小痴 許維) 처럼 헌종을 알현하기
위하여 급조된 관직을 제수하는 일도 없이, 그냥 천민신분 그대로 국왕을 알현할 수
있고, 또한 지엄한 어전공연에서 국왕이나 권문세가를 풍자하는 재담이나 몸짓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된 특수한 집단이 소위 말하는 예인(藝人) 또는 재인(才人) 등으로
불리어지던 이 풍류(風流) 집단이다.
*******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
이 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이 무주상보시는 ≪금강경≫에 의해서 천명된 것으로서, 원래의 뜻은 법(法)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로 표현되었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금강경≫을 중요시한 뒤부터 이 무주상보시가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보시라고 보았다.
참고문헌
- 『선가귀감(禪家龜鑑)』(휴정)
- 『금강경』(이기영 역해, 한국불교연구원, 1978)
[네이버 지식백과]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소치 허유 ( 小癡 許維 )
소치 허유 : 본관 양천(陽川). 자 마힐(摩詰), 호 소치(小癡) ·노치(老癡). 전남 진도(珍島) 출생. 초명이 연(鍊)으로, 후에 중국 남종화의 대가인 왕유(王維)의 이름에서 따와 유(維)로 개명하였으며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서화를 김정희(金正喜)에게 사사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 ·그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택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산수도》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
소치(小癡) 허유(1809-1892)는 스승인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인 진도로 돌아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작품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산수화 외에도 모란, 사군자, 연꽃, 괴석, 노송, 파초 등 다양한 소재를 능숙한 필치로 구사하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建),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호남 화단의 중요한 맥을 이루고 있다.
선면산수도는 허유가 만 57세 때인 1866년 여름에 그린 것으로, 만년에 살던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소재로 한 것이다.
방석도산수도는 허유가 그리고 김정희가 발문(跋文)을 썼다. 깔끔한 느낌을 주는 마른 붓질의 수묵에서 문인화다운 품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묵모란은 바위의 강한 표현과 모란의 부드러운 표현이 조화를 이룬다.
남화(南畵)의 대가(大家) 소치(小痴) 허유(許維)
1809년(순조 8년) 진도에서 태어난 소치는 허각(許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본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이름은 연(鍊)이라 불렀는데 뒤에 유(維)로 바꿨다. 소치는 동학란이 일어나기 이태전인 1893년(고종 30) 여든여덟의 나이로 장서(長逝)하기까지 임금이 쓰는 벼루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렸고, 이하응(흥선대원군), 권돈인,민 영익, 정학연(다산 정약용의 子) 등을 비롯한 숱한 권문세가 및 그의 스승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 초의대사(草衣大師) 등과 어울리면서 주유천하(周遊天下)했던 이조 말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대가이다. 흔히 소치를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이라 부르거니와 일찍이 추사는 소치를 일러『압수이동(押水以東)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말했다.
괴석과 석함(石函)
연경당(演慶堂) 권역의 이름이 된 사랑채 연경당과
서재 겸 접견실로 사용되던 선향재(善香齋)
사랑채인 연경당(演慶堂)
- 연경당에서는 전통문화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선향재의 청나라식 벽돌로 쌓은 맞배지붕의
조적벽에 있는 꽃담무늬
< 효명세자의 茶詩>
산중별인 山中別人
문조효명익황제 文祖孝明翼皇帝
한거무사중 閑居無事中 하고 한가하게 살고 있어 아무 일이 없고
종일차첨구 終日茶沾口 하도다. 종일토록 차마셔 입에서 떼지 않도다.
청산백운귀 靑山白雲歸 하나니 청산도 흰구름도 모두 돌아 오는 데
이인장래부 伊人倘來否 하는가? 그대는 어딜 헤매이는지 아직 오지 않는가??
선향재 동쪽 후원 화계 위에 돌난간을 두르고 서 있는 농수정(濃繡亭)
연경당 안채 건너방 창문을 통하여 내다본 중문행랑채
연경당 안채 북쪽에 담을 쌓아 별도로 마련한 반빗간
- 음식 장만과 빨래, 바느질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공간.
사랑채인 연경당과 합벽으로 서로 연결되는 안채 건너방
-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를 은밀히 드나들 수 있게 만든 내외 샛문
안채 안방과 반층 높이를 더한 누다락
- 누다락 아래엔 안방에 불을 때는 함실(函室)아궁이가 설치됨.
연경당 정문인 나즈막한 솟을대문인 장락문(長樂門)
창덕궁연경당
[ 昌德宮演慶堂 ]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비원(秘苑)에 있는 조선 후기 상류주택.
개설
궁궐의 후원(後苑) 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사랑채·안채·안행랑채·바깥행랑채·반빗간·서재·후원·정자 및 연못을 완벽하게 갖춘 주택건축이다. 이른바 99칸집이라 불리고 있으나 현재 건물의 실제규모는 109칸 반이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자 집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동궐도(東闕圖)」에는 반빗간(반찬을 만드는 곳. 일명 찬간) 구역에 5칸 규모의 창고와 5칸 규모의 행각(行閣)이 있고, 측간 1칸, 헛간 3칸이 그려져 있어서 원래의 총 규모는 123칸 반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궁궐지(宮闕誌)』에는 120칸으로 적고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내용
연경당은 후원의 첫째구역인 주합루(宙合樓)·영화당(暎花堂) 일곽을 지나 애련정(愛蓮亭)과 애련지(愛蓮池) 및 의두합(倚斗閤 : 같은 건물의 동쪽 누는 영춘루, 남쪽 마루는 기오헌이다)·운경거(韻磬居) 등이 조성되어 있는 곳 안쪽 아늑한 골짜기에 있다. 삼면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 만이 트여 있는데 이곳에 애련정과 애련지가 배치되어 있다.
아름다운 산, 풍요로운 숲, 그리고 연못과 정자가 이루어내는 이상적인 환경 속에 자리 잡은 이 집은 건축적으로도 뛰어난 짜임새와 만듦새를 보여 주고 있다.
건축의 향은 정남향으로 하고, 북·동·서 삼면이 산으로 둘러막힌 곳에 북서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남쪽, 즉 집앞을 거쳐 동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물길을 내어 풍수적으로 명당을 형성한 다음, 방위에 맞추어 직각으로 건물군을 배치하였다.
배치형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예에 따라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 겹으로 두르고, 중문(中門)이 있는 행랑채에 각각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출입문을 좌우로 벌려 냈다.
유교의 내외법(內外法)에 따르면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담으로 막고 출입문을 설치하는데, 연경당에서는 사랑채와 안채의 앞마당은 사잇담을 설치하여 구분하고 있지만, 건물은 붙여 지어 사랑채 내부에서 안채 내부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 안 동쪽에는 누마루를 두었고, 그 동쪽 마당에 선향재(善香齋)라는 서실(書室)을 배치하였으며, 선향재 후원에 높다란 화계(花階)를 쌓아 정원을 만들고 그 위쪽 언덕에 정자를 지어 휴식처를 마련하였다.
안채의 뒤쪽으로는 담을 쌓아 독립된 구역을 만드는 한편 바깥 행랑채 동쪽 부분에는 마구간과 가마 두는 곳도 마련하였으며, 이곳의 바깥벽은 나무판자로 막아 집의 전경에 변화를 주는 의장적 요소로 삼았다.
특징
궁궐 안의 다른 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한껏 갖추고 있는 데 비하여, 이 집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농수정(濃繡亭)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그러나 문·창문·담장쌓기·문양전(文樣塼)의 벽이나 기단·주춧돌·기둥·보·서까래 등에서 보이는 다양하면서도 세련되고 섬세한 기법은 일반 사대부주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모습이다.
더구나, 농수정 주변의 연잎동자기둥을 갖춘 돌난간, 사랑 마당에 단정하게 배열된 괴석(怪石), 사랑채 출입문인 장양문(長陽門) 앞 양쪽에 놓인 궁정양식의 정료대(庭燎臺) 등은 여염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이 집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 준다.
건립동기 및 연대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는 창덕궁 연경당은 1828년(순조 28)에 창건되었으며,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하여 세자(1830년에 죽은 뒤 익종으로 높임)가 왕께 요청한 것이 건립동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국여지비고』·『궁궐지』·『순조무자진작의궤부편(純祖戊子進爵儀軌附編)』·『순조실록』·「동궐도」 등을 종합하여 해석하여 보면, 연경당은 1827년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되었으며, 짓게 된 동기는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의식을 맞아서 이를 거행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함이며, ‘연경(演慶)’이라는 이름도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한편, 「동궐도」의 창덕궁 연경당 모습과 『순조무자진작의궤부편』 도설(圖說)에 실린 연경당도는 일치하지만, 현존하는 연경당의 모습과는 다르다. 따라서 현존하는 주택형식의 연경당이 1828년에 세자의 청으로 지어졌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헌종 때에 『궁궐지』를 간행하던 당시에는 연경당에 익종의 초상화를 모셔놓았다고 하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의 주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비변사등록』·『일성록』·『승정원일기』 등에는 헌종12년(1846) 초에 연경당이 신건(新建) 되었다는 기록과 고종2년(1865)에 수리공사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현재와 같은 주택으로 완성된 시기는 고종연간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현존하는 연경당에 대한 사료로는 1890년대 이후에 제작된 『궁궐지』와 「동궐도형(東闕圖型)」및 건물의 기둥에 걸어놓은 주련(柱聯) 등이 남아 있어서, 원래의 연경당이 언제, 왜 주택건축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데 기초자료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집은 궁궐 내에 지어진 유일한 상류주택으로서 가치가 있다. 현재와 같은 주택으로 지어진 연대(年代)와 동기(動機) 등은 불분명하지만 조선후기 동안 이룩된 주택 및 궁궐건축의 의장(意匠)과 재료사용 및 공간의 변화 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관련이미지 (2)
연경당 앞마당에 있는 작은 애련지(愛蓮池) 호안(護岸)에 핀 함박꽃
<효명세자의 다시 茶詩>
효명세자 : 문조(文祖) 또는 익종(翼宗, 1809년 9월 18일 (순조 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6월 25일 (순조 30년 음력 5월 6일))은 헌종의 아버지로서 조선의 추존왕이고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자(字)는 덕인(德寅)이며 성은 이(李), 휘(諱)는 영(旲),
1819년(순조 19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827년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4년만인 1830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후에 아들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고종이 그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뒤에는 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식 시호는 문조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
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
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
효명익황제(文祖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
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
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
孝明翼皇帝)로 재위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조선 국왕중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세자 시절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흔히 효명세자(孝明世子)로도 불린다.
- 위키백과에서
효명세자(후에 아들인 헌종 때에 익종으로, 양자인 고종 때에
문조익황제로 추증됨)는 순조 27년부터 아버지인 순조(純祖)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할아버지인 정조의 개혁정치를 본받아 왕권강화에 힘썼고
특히 세자빈인 풍양 조씨와 결혼하여 안동 金門의 세도정치 타파에 전력하다가
대리청정 3년만인 22세에 요절하므로서 개혁정치의 완성을 보지 못하여
조선조 후기의 역사의 소용돌이가 계속되었다는 면에서 아쉬움이 크다.
외척들과 권신(權臣)들의 세도정치와 왕권강화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와중에 정적들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대동야승> 등의
야사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효명세자의 서거가 그와 관련이
없음을 전혀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된 견해이다.
효명세자는 역사에 통달하여 중국 이십육사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조 왕실의 왕권강화책에 대한 소신이 뚜렷하며,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인 정재(呈才)의 공연 등의 예악(禮樂)행사를
통하여 대신들을 궐내에 자주 불려들여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삼았다.
순조 27년 부왕인 순조로부터 대리청정을 명받기 직전인 그해 정월에
쓴 <하춘계방서 下春桂坊書>에서 "19년동안 공부를 게을리하고 놀기만
하다가 학문의 중요함을 깨닫지 못하고 세월만 보낸 것을 후회한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각오로 학문에 매진하게 된다.
또한 "일일만기 一日萬機" 라고 하여 "하루 하루에 충실하지 못하면
평생을 그르치게 되고, 하루에도 여러번의 기회가 온다."하는 글귀를
좌우명으로 삼아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를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조 30년(1830년)에 지은 < 학어초문 學語初門>의 서문에서,
" 배움이 제왕과 서민이 다르지 않으니, 인생의 첫걸음은 학문에
달려 있다."라고 설파하였다.
송단팽다 松檀烹茶
창덕궁안 소나무와 향나무 등이 어우러진
만향헌 다실 晩香軒 茶室에서 차를 달이며 짓다.
습지배석조 拾枝焙石竈 하고 나무가지 주워 차부뚜막에 불피우고
송향잡팽다 松響雜烹茶 하노라. 솔가지 타며 내는 소리들으며 차를 달이노라.
방낭표황예 芳囊漂黃蘂 하고 주머니 속의 노오란 꽃술차에서 방향이 피어오르고
향표연록아 香飄碾綠芽 하도다. 찻맷돌에 푸른 찻잎을 가니 찻내가 진동하도다.
작진함이필 雀唇含貳苾 하고 작설차는 두가지 향기로움을 지녀 더욱 놀라웁고
어안기섬화 魚眼起纖花 하도다. 차솥에 끓어오르는 물방울이 작은 꽃송이 같도다.
수월소계선 隨月掃階蘚 하며 섬돌에 낀 이끼를 쓸며 달을 쫒아가서
화연급정화 和煙汲井華 하노라. 연기를 헤치고 정화수를 깃노라.
당변성절역 钂邊聲浙瀝 하고 차솥에 물끓는 소리 큰강물이 흐르는 소리 같고
노상영차아 爐上影杈枒 하니라. 화로 위에 파초잎 그림자 드리웠다.
일완청기골 一碗淸飢骨 하니 한사발의 차는 뼈속(骨髓) 까지 맑게 하니
하수철구하 何須啜九霞 하느냐. 어찌 구하산의 술만 마시겠느냐!!
******* 석조(石竈) : 석지조(石池竈)와 석다조(石茶竈) 두 종류가 있다.
석지조는 물을 담아 설거지를 할 수 있게 움푹하게
파진 개숫물통이 있는 요지음의 씽크대와 비슷한
돌로 만든 차도구이고, 석다조는 야외 찻상과
찻설거지를 겸한 용도로 쓰이는 넙적한 자연석이나
네모나게 가공한 차부뚜막을 의미한다.
강릉 한송사지에 신라 영랑 등의 사선(四仙)들이 쓰던
석다조가 전해오고 있었다고 고려말 이곡이 쓴 <동유기 東遊記>
등의 시문 詩文에 나타나나 현재는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이필(貳苾) : 작설차를 차맷돌에 가는 것이 시구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효명세자가 이 시를 쓸 때 마셨던 차는 발효차로 덩이차(단차 團茶)
인 돈차, 청태전(靑苔錢) 등의 떡차임을 알수 있다.
따라서 두가지 향기를 뜻하는 이필(貳苾)은 작설차 고유의
차잎향기와 발효시 나타나는 훈향(薰香) 등 두가지 향을 의미한다.
다연(茶碾) : 찻맷돌에는 다연(茶碾)과 다마(茶礳) 등의 두 종류가 있다.
다연(茶碾)은 약연(藥碾)과 같은 것으로 홈이 파진 길쭉한
직육면체에 손잡이가 달린 차륜형(車輪形) 갈개맷돌이 있는 것이다.
중국 이시진이 쓴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이나 대일항쟁기에
까지도 전남 남해안 지방에서는 차약(茶藥)이라고 하여 차를
배탈이나 감기 등에 대한 민간약으로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다연은 금속제, 도제(陶製). 돌배나무, 대추나무나 박달나무 등
목제(木製). 석제(石製) 등 여러가지 재료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다마(茶礳)는 곡식을 가는 용도로 쓰이는 맷돌과 같이 아래위
두개의 납작한 둥근돌로 이루어졌고, 남해안 해안가에서 발견되는
우무가사리 등의 해조류를 가는 풀맷돌과 같은 것이다.
다연은 가루차를 만들 때 많이 사용하였고, 다마는 연고차를
만들 때 많이 사용하였다.
차아(杈枒) : 야자나무 가지를 가르키는 말이나. 조선조 중기의 화훼서적 등을
참고하여 볼 때, 당시 애배(愛培)하였던 바나나나무인 파초(琶草)의
큰잎을 지칭하는 듯 하다.
******* 효명세자가 이 시詩를 쓰던 조선조 중후기에 이르기 까지 단차(團茶)를 집게로
집어 화롯불에 구운 다음, 다연에 넣어 곱게 가루내어 차솥이나 차주전자에 넣어
마시는 당나라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있는 다법(茶法)이 궁중에서 통용되고
있었음을 위의 한시에서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고조 주원장의 황명(皇命)에 의하여 차농들의 노고를 덜기
위하여 송나라 때 화려함을 더하여 가던 용단승설(龍團勝雪) 등의 단차의 제조를
금지시켰으나 빈농 출신의 황제이고 중원대륙의 강토가 넓어 황명은 그리 쉽게
전파. 적용되지 않아서 차의 주산지인 양자강 유역의 복건성, 절강성 등지와
남해안 해상 실크로드의 무역중심지였던 광동성 등지에서는 약 200여년 후에
까지도 송대의 단차 제조법이 유행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茶山 鄭若鏞)의 <아언각비>와 귀양지인 강진 귤동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글 등에서 보면 곡우전에 딴 어린 찻잎으로는 소량의 작설차를 만들어
우려내어 마시는 충포법용(沖泡法用) 산차(散茶. 엽차 葉茶)로 차를 만들었고,
대부분은 충분하게 찻잎이 자란 다음에 채취하여 덩이차인 돈차, 청태전 등의
단차로 만들어서 오래 달여 두고 마음내키는 대로 마시는 전다법용(煎茶法用)
으로 만들었음이 나타난다. 전남 보성군의 보림사 등지에서는 겨울철에 딴
납차(臘茶)로 단차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대일항쟁기 때에 일본에서 들어온 왜다법의 영향으로 잎차를 전차(煎茶)라고
부르고 있어서 전다법(煎茶法)을 우려내어 마시는 충법(沖法)이나 거품내어 마시는
포법(泡法)과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 선조다인들의 각종 시문 詩文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찻그릇 하나를 표현하여도 나무로 만든 다준(茶樽), 도자기로 만든
다완(茶碗), 옥으로 만든 다완(茶琬). 금속으로 만든 다종(茶鍾) 등 한자의 변이나 부수
하나의 선택에도 엄격한 구분을 두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의 시문에 나타나는 전다(煎茶)는 마치 한약을 달일 때와 같이
차화로에 오래 달여 마시는 다법(茶法)임을 혼동하지 말아야 제대로 의미가 전달된다.
궐내각사 권역으로 가는 작은 동산에 있는 느티나무 고목
< 효명세자와 제신 諸臣들의 운연구다시 韻聯句茶詩 >
賞花太液池與賓僚拈韻聯句
상화태액지여빈요념운연구
- 창덕궁 금원(禁苑)의 상림(上林)에 있는 큰 연못인 태액지 옆의
원림(園林)내에 찻자리를 마련하여 놓고 여러 신료(臣僚)들과
꽃구경을 즐기면서 차를 마셔가며 시다회(詩茶會)를 하며, 서로
운연구(韻聯句)를 주고받은 것을 두루마리 시권(詩捲)으로 남겼다.
여기 대구(對句)를 한 신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박종훈 朴宗勳, 조만영 趙萬永, 김교근 金敎根, 김 노 金 鏴
서준보 徐俊輔, 서희순 徐熹淳, 박기수 朴崎壽, 정지용 鄭知容
서영순 徐英淳, 김정집 金鼎集, 홍종응 洪鐘應, 김병소 金炳韶
조병헌 趙秉憲, 서재순 徐載淳, 이겸수 李謙秀, 정성우 鄭性愚
조제만 趙濟晩, 홍의석 洪義錫, 이규헌 李奎憲, 홍기주 洪耆周
/ 문조효명익황제 文祖孝明翼皇帝
상림서욱양경하 上林瑞旭瀁輕霞 하고 상림 구중심처에 상서러운 햇볕과 엷은 노을 지고
요아빈요공상화 邀我賓僚共賞花 하도다. 나의 신료- 빈객이자 벗들을 불러 꽃구경을 하도다.
/ 박종훈 朴宗勳
지근도서존이아 地近圖書存爾雅 하고 가까이 세자님의 서재 있어 아담하기 그지없고,
정잉수택현형가 亭仍水澤見亨嘉 하구나. 애련지 옆에 한 정자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보는구나.
/ 조만영 趙萬永
난상소고주난외 鸞翔蕭皷朱欄外 하고 난간 밖의 젓대소리 북소리에 학이 날아 오르고
익범연노벽소애 鹢泛煙爐碧沼涯 하도다. 뜸부기 물안개 핀 푸른 물가에 노닐도다.
/ 김교근 金敎根
담애청연서화일 淡靄晴煙舒化日 하니 연한 이내 걷히자 햇살은 더욱 눈부셔 지고
고오수죽호선가 高梧修竹護仙家 하네. 키 큰 오동나무 대나무가 선가를 보위하네.
/ 김 노 金 鏴
방제일남순균녹 芳堤日暖馴麇鹿 하고 아름다운 동산 따사로운 햇볕에 노루사슴 길들고
수유풍미계박하 垂柳風微繫駁騢 하네. 가는 바람에 드리운 버드나무에 얼룩박이붉은말 매어있네.
( - 아래에 계속...... )
******* 태액지 : 영화당과 부용정이 있는 부용지를 처음에 태액지라고 불렸으나,
이 시에서 태액지는 의두합 권역 앞에 있는 애련지(愛蓮池)를 의미한다.
원래 중국에서 태액지는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에 있는 삼신산 - 방장산, 봉래산,
영주산 등이 있는 연못을 지칭하는 것이다.
생을 마감한 느티나무 고목.....
궐내각사 권역 서쪽에 있는 주목
( - 윗 詩에 연결된 운연구 韻聯句....)
/ 서준보 徐俊輔
누대중방임수창 樓帶衆芳臨水敞 하고 물가에 세운 누각은 뭇꽃들을 거느리고 있는 듯 하고
임개일경연계사 林開一逕緛谿賖 하네. 숲속에 한줄기 작은 길 열리고 시내물은 말라붙었네.
/ 서희순 徐熹淳
연운전석선진탁 需雲前席宣珍卓 하고 연한 구름 앞에 자리한 탁자 위엔 진귀한 음식 가득하고
여일중류황화가 麗日中流況畵茄 로다. 밝은 햇살 속에 비치는 연 줄기는 한 폭의 그림이로다.
/ 박기수 朴崎壽
누각농연준몽곡 樓閣籠煙皴霿穀 하고 누각에는 이내가 심해 짙은 안개틀 속에 갇혀있는 듯하고
지당용초연주사 池塘茸草碾朱砂 하네 연못에 무리진 풀들은 붉은모래를 맷돌에 간 듯 하네.
/ 정지용 鄭知容
세짐향온훈영귤 細斟香醖薰瀛橘 이고 조용히 술 따르니 빚은 술향기가 제주의 귤향기 같고
요급신천시건차 遼汲新泉試建茶 하도다. 멀리 새로운 샘에서 물길어 와 건안차를 시음하도다.
( - 아래에 계속...... )
원서동 쪽 담장 화계에 핀 노랑꽃창포
금천 석조둑에 핀 찔레나무
( - 윗 詩에 연결된 운연구 韻聯句....)
/ 서영순 徐英淳
어기장류총울처 御氣長留蔥鬱處 하고 성상님의 기운이 숲속 깊은 곳까지 오래 머물어 있고
춘심부적등한사 春心不寂等閒楂 하네. 봄을 맞는 마음 고요하지 않아 한가로운 뗏목 같구나.
/ 김정집 金鼎集
월당수박고어방 月堂繡箔高於舫 하고 달님은 금박 수놓은 것 처럼 배 위에 높히 떠오르고
풍파은당전사거 風擺銀塘轉似車 로다. 바람은 은빛 연못을 수레와 같이 휘저어 놓도다.
/ 홍종응 洪鐘應
은일금배춘담탕 恩日金盃春澹蕩 하고 세자의 은혜 금잔에 넘쳐 봄날을 조용히 쓸어내리고
가등옥촉야번화 歌登玉燭夜繁華 하구나. 노랫소리 커지면서 옥촛대의 밤은 더욱 화려하구나.
/ 김병소 金炳韶
채정화영소향압 彩亭畵永銷香鴨 하고 정자의 단청그림은 오래되어 향오리 벽화가 사그라지고
화벽운고의묵아 畵壁雲高矣墨鴉 하도다. 벽화에는 높다란 구름위에 갈가마귀가 그려져 있도다.
( - 아래에 계속...... )
궐내각사
( - 윗 詩에 연결된 운연구 韻聯句....)
/ 조병헌 趙秉憲
소숙풍념금람결 小淑風恬金纜結 하며 맑은 바람이 가늘게 불어 금빛 매듭을 가만히 흔들며
심원화힐수병차 深園花纈繡屛遮 하구나. 금원 깊은 곳에 꽃들이 무늬비단 병풍을 두른 듯 하구나.
/ 서재순 徐載淳
난대염한은선악 蘭臺染翰恩先渥 하고 난대에 오른 신료들에게 성상의 크신 성은이 두터웁고
용각갱시농문과 蓉閣賡詩籠雯誇 하도다. 부용각에서 세자의 운에 맞추어 시를 지음은 분에 넘치도다.
( - 아래에 계속...... )
******* 아래의 인용문은 <국조보감> 제82권 문조대리2(순조 28년 기축 1892년)의 기록으로
부왕인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가 노대신 김사목의 구순잔치를 직접 챙기시고,
호남과 삼남의 기민(飢民)들의 구제를 위하여 곡물과 내탕금의 하사를 직접 명하고,
부패관리들을 엄벌에 처하라는 것을 명하는 것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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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대리 2 |
순종 29년(기축, 1829) |
○ 1월. 인정전의 뜰에 나아가 대전에 하례를 올렸다. 예를 마치고 중희당(重熙堂)에 전좌(殿座)하여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 영중추부사 김사목(金思穆)이 90세가 되었다. 영(令)하기를,
○ 호남의 고을들이 사사로이 기민(飢民)을 구제할 것을 논의하므로, 비국에 명하여 곡물을 떼어주고 내탕전 5천 꿰미를 내려주었다.
○ 영하기를,
○ 영하기를,
원서동 쪽 담장에 핀 붓꽃
( - 윗 詩에 연결된 운연구 韻聯句....)
/ 이겸수 李謙秀
앵전호음가여골 鶯囀好音歌唳滑 하니 시를 노래하니 꾀꼬리 지저귀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니
학참화기무용사 鶴參和氣舞容舍 하구나. 노랫소리에 맞춰 춤출 때 학춤이 저절로 나오는구나.
/ 정성우 鄭性愚
화이포금환위시 花疑鋪錦環爲市 하며 꽃들은 시장에 둘러친 포장 비단처럼 머뭇거리며
수접유상곡사파 水接流觴曲似巴 도다. 물가의 유상곡수에서 그 꼬리를 잡고 시를 짓도다.
( - 아래에 계속...... )
붓꽃과 씀바귀.....그리고 배경의 식물은 벌개미취
원서동 쪽의 담장을 따라 핀 붓꽃.....
( - 윗 詩에 연결된 운연구 韻聯句....)
/ 조제만 趙濟晩
시속앵화수봉관 時屬鶯花隨鳳管 하고 시절을 쫓아 꾀꼬리와 꽃들은 생황소리를 따르고
악동어조족오사 樂同魚藻簇烏紗 하도다. 즐거움은 물고기와 물풀 처럼 세자와 신료가 어울리도다.
/ 홍의석 洪義錫
아장초거파문동 牙檣初擧波紋動 하는데 돛대 위에 초승달 걸려있고 물결은 점점 이는 데
금예최개화고과 錦蘂催開畵鼓過 하도다. 비단같은 꽃술 빨리 열리도록 그림을 두드리도다.
( - 아래에 계속...... )
*1. 쌍봉-관雙鳳管 : 두관(管)을 합하여 십이율(十二律)을 정하고, 관 끝에 두 개의 혀를 두고 봉황 모양으로 새겨 머리를 삼은 관악기. 좌우에 각각 네 개의 구멍이 있는데, 왼쪽 관은 황종(黃鍾)에서 중려(仲呂)까지, 오른쪽 관은 유빈(蕤賓)에서 응종(應鍾)까지 소리를 낸다.
수령 750여년 된 향나무....
원서동 쪽의 사고석(四鼓石, 四塊石) 담장 아래 화계(花階)에 핀 작약
- 작약 앞에는 옥잠화 종류.....
( - 윗 詩에 연결된 운연구 韻聯句....)
/ 이규헌 李奎憲
주발황봉초염염 酒發黃封初灎灎 하고 술항아리 봉함 열자 처음엔 일렁일렁거리고
화증홍우정사사 花蒸紅雨正斜斜 하구나. 꽃잎은 이리저리 날려 붉은비가 내리는구나.
/ 홍기주 洪耆周
강릉삼축가갑하 岡陵三祝歌甲嘏 하며 신료들은 언덕에서 세자를 칭송하는 노래부르며
어수일당이오아 魚水一堂迩午衙 하누나. 한집에 모였던 주상과 신하들이 가까운 마을로
어수선하게 돌아가누나.
/ 문조효명익황제 文祖孝明翼皇帝
소소만가전구보 蘇小慢歌傳舊譜 하나니 옛 악보 전해지는 노래 몇곡되지 않아 다시 되살리니
죽지성헐주비파 竹枝聲歇奏琵琶 하도다. 묻혀있던 죽지사 찾아내어 비파로 연주해 보도다.
*******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시절에 16명의 신료들과 함께 태액지인 애련지에서
시서화(詩書畵) 다회(茶會)를 열어 중신들과 신진 사대부들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운연시(韻聯詩)를 함께 지어 봄날 궁궐 후원의 정경을
담담하게 그렸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는 시서화다회를 톻하여 지어진 운연시는 대리청정하고
있는 효명세자에게 지나친 아부나 곡학아세를 배제한 채, 세자와 신료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각자가 가진 문학적인 역량을 가감없이 표현하여 놓았다.
여기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신료들을 "오랜 친구 같은 신하" 또는
"신하이자 동시에 벗"으로 대하는 효명세자의 대범함과 정치적 도량의 크기를
이 운연시가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운연시의 역활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왕권강화와 외척들의 발호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각종 궁중예악을
활용한 점도 무시할 수 없으나, 위의 운연시 다회 처럼 세자와 신료들과의 격의없는
대화와 소통을 통하여 새로운 국정운영의 원동력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정치의 장에서도 이러한 전래관습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시서화 다회의 형식이나 내용은 오늘날의 관습에 맞추어 그때그때 적절하게
정하면 될 것이다.
******* 신료 臣僚 - 이 말을 전제주의적 절대 왕권시대에 쓰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에도
되돌아 볼 필요성이 대두된다. 신료는 "벗이자 신하", 또는 "신하지만
친한 친구" 라는 의미의 말이다.
서구에 비하여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정착과
많은 희생과 시행착오가 있었던 민주화운동 과정을 거친 현재까지에도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이 선거로 선출한 위정자들이나 입법부 선량들이
당선 후, 집무 중에도 그들을 뽑아준 국민들이나 평생을 바쳐 국가를
위하여 불철주야를 막론하고 애쓰온 관료들에게 과연 "벗 같은 국민"
"오랜 친구 같은 관료"로 대한 적이 몇번이나 되었는지 크게 반성하고,
만약에 그렇게 여기거나 대한 적이 드물다면 하루 빨리 우리 선조
위정자들의 얼을 본받기 위한 철저한 자기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선거과정 중에는 마치 머슴이나 하인의 역활인 국민의 공복(公僕) 즉
심부름꾼이 되어 드리겠다고 스스로 공약하던 분들이 당선 후에는 아직도
관존민비의 적폐에 자신도 모르게 탐닉하고 있다면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이십년 가까이 국민소득 2만불 수준을 뛰어
넘지 못하고 있는 경제적인 답보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물이 낮은 곳으로만 흘러가듯이 스스로를 낮출 때, 위정자들이나
선량들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게되고, 국민들이 가진 모든 역량과 창의성을
국가발전을 위하여 매진하여 달라고 요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소위 말하는 보수와 진보 당파의 구분이 없이 모두에게 해당된다.
태어날 때의 사회적 경제적인 혜택이라는 것도 모두 놓아버리고,
자기 주변 사람들에 그동안 받아왔던 존경과 우대 속에는 질시와
날카로운 비판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조용히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하면
된다. 그러면 자신의 위상이 이 드넓은 우주속에서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창덕궁 금원과 우주를 닮은 많은 누정들을 통하여
우리 선조들이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던져주신 화두(話頭)이다.
철지난 작약 꽃
후원에서 돈화문으로 가는 길.... 궐내각사 서쪽.....
궐내각사로 통하는 문 - 돈화문으로 나가는 길 입구에서....
돈화문과 회화나무.....
돈화문
늦게 잎이나는 회회나무 신록과 돈화문
회화나무 씨앗이 떨어져 어린 나무가 다시 자라나고......
- 이 어린 회화나무가 고목이 되어가는
몇 차례의 시간의 수레바퀴(時輪)가 구를 때 까지
이 창덕궁이라는 공간(空間)은 남아 있을 텐가 .......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계(仙界)인 창덕궁 후원은 수많은 시공간
속에서 영원할 수는 없을 테지만,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아름답고
휼륭한 교육의 장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램을 감히 기도하여 본다........
돈화문 앞에서 되돌아 본 회화나무......
돈화문 입구에 미리 맡겨놓은 북가방을 찾으려 갔다가 만난 학생들....
- 학교에 과제물 제출을 위하여 우리옷 입고 궁궐나들이를 준비하고.....
사진 촬영을 해도 되느냐고 물어보자 기꺼이 포즈를 취하여 준다....
궁궐 이야기...창덕궁 [연경당 권역]
12월 8,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궁궐 이야기...연경당 [권역]
10-h-4 수인문修仁門
위치와 연혁 : 연경당의 안채 정문이며 장락문을 들어서면 서쪽에 있다. 장양문이 남성의 공간인데 비해 수인문은 여성의 공간이어서 행랑채와 높이가 같은 평대문이다. 일부 해설서에서 장양문은 솟을대문으로 높이 세우고 수인문은 평대문으로 세운 것에 대해 조선의 남존여비 사상 때문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지나친 확대 해석이다. 여성은 초헌을 탈 일이 없으므로 굳이 솟을대문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며, 실생활에서의 기능에 따라 문의 높이를 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뜻풀이 : '수인(修仁)'은 '인(仁)을 닦는다'는 뜻이다. 인(仁)은 『논어』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 공자의 핵심 사상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의 글씨 중 '修(수)'자는 통용자인 '脩(수)'자로 썼다.
10-h-5 청수정사淸水精舍
위치와 연혁 : 연경당의 동쪽 행각이다.
뜻풀이 : '청수정사(淸水精舍)'는 '맑은 물이 두르고 있는 정사'라는 뜻이다. '정사(精舍)'는 '학문을 강론하는 집' 또는 '정신을 수양하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 절이라는 의미로도 널리 쓰이지만 여기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10-h-6 선향재善香齋
위치와 연혁 : 연경당 동쪽에 있는 14칸짜리 건물로 책들을 보관하고 책을 읽는 서재이다. 가운데 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에 설치한 차양이 다른 건물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이다.
뜻풀이 : '선향재(善香齋)'는 '좋은 향기가 서린 집'이라는 뜻이다. 책을 보관하던 곳이기에 좋은 향기란 책 향기를 가리킨다.
10-j-6 선향재善香齋의 주련
뜻풀이 :
(1) 道德摩勒果(도덕마륵과)
도덕은 마륵(摩勒)의 과일이요,
(2) 文章鉢曇花(문장발담화)
문장은 우담바라의 꽃이로다.
황금 과일처럼 고귀한 도덕과 우담바라 꽃처럼 진귀한 문장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도덕과 문장을 갖춘 사람을 찬양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마륵은 금중에서도 가장 훌륭하다는 자마금(紫磨金)을 말한다. 우담바라는 불교에서 전륜성왕(부처)이 나타날 때 핀다는 상상의 꽃이다. 우담바라는 한자로는 優曇婆羅, 優曇波羅, 優曇跋羅華, 優曇鉢華, 優曇華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한다.
(3) 張子野詞伯(장자야사백)
장자야(張子野)는 사(詞)에 뛰어난 문인이고,
(4) 李將軍畵師(이장군화사)
이장군(李將軍)은 그림에 특출한 화가로다.
사에 뛰어났던 장선(張先, 990~1078년)과 그림에 뛰어났던 이사훈(李思訓,651~716년)을 찬양한 표현이다. 장자야는 송나라 사람인 장선을 가리키는데, 사(詞)에 뛰어나서 남조 때의 유운(柳?, 465~517년)에 비견되었다. 당나라 화가 이사훈은 벼슬이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에 올랐으므로 대리장군(大李將軍)으로 불렸고 그의 아들 이소도(李昭道) 역시 산수화에 능하여 소리장군(小李將軍)으로 불렸다. 이들 부자는 북종화(北宗畵)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또는 이들처럼 뛰어난 문인이나 화가를 비유적으로 칭찬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5) 汝南尋孟博(여남심맹박)
여남(汝南) 땅으로 맹박(孟博) 1)을 찾아가고,
(6) 高密訪康成(고밀방강성)
고밀(高密) 땅으로 강성(康成)을 방문한다네.
후한(後漢)의 명사인 맹박, 즉 범방(范滂, 137~169년) 2)이나 강성, 즉 정현 3)과 같은 훌륭한 학자를 그들의 고향으로 찾아가서 만나고 교유(交遊)하고 싶은 소망을 나타내었다. 하남성 여남 지방은 범방뿐 아니라 진번(陳蕃)·설포(薛包)·황헌(黃憲)·원안(袁安) 등과 송나라 때 범중엄(范仲淹, 989~1052년)·주돈이 등의 명사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산동성 고밀은 정현의 고향이다.
(7) 細讀斜川集(세독사천집)
사천(斜川)의 문집을 세밀히 읽고,
(8) 新烹顧渚茶(신팽고저다)
고저(顧渚)의 차를 새로 달이네.
독서하며 차를 마시는 담박(淡泊)한 생활을 읊었다. 사천은 송나라 때 문인 소식의 아들인 소과(蘇過, 1072~1123년)의 호이다. 하남성 허창현(許昌縣)의 지명이기도 한데, 소과가 여기에 살아서 호로 삼았다. 고저는 절강성 장흥현(長興縣)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차의 명산지인데 이 곳에서 난 '고저차(顧渚茶)'가 유명하다.
제작 정보 : 송나라 시인 육유 4)의 칠언율시 「재중농필우서시자율(齋中弄筆偶書示子聿)」<원전 1>에서 함련(含聯)의 앞 두 글자씩을 생략한 것이다. 거의 모든 주련은 원래 시의 구절을 그대로 따 온 것이 일반적인데, 이처럼 7언시를 줄여서 5언시로 만든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점이다.
(9) 養竹不除當路筍(양죽불제당로순)
대 기르기 좋아하여 길에 자란 죽순도 베지 않고,
(10) 愛松留得礙門枝(애송류득애문지)
솔을 사랑해 문 가린 가지도 남겨 두었네.
자연을 사랑하여 인위적인 손상을 가하지 않는 천연스런 삶을 읊었다. 당나라 승려 관휴(貫休, 832~912년) 5)의 「산거시(山居詩)」 이십사 수(二十四首)<원전2> 중 제 8수의 함련에서 따온 구절이다. '門(문)'은 대부분의 문헌에 '人(인)'으로 되어 있다.
경복궁의 함화당에도 같은 문구의 주련이 있다.
(11) 史編作鑑推君實(사편작감추군실)
역사를 편찬함은 『자치통감(資治通鑑)』 6)을 지은 사마군실(司馬君實)을 추대하고,
(12) 賦筆凌雲擬子虛(부필능운의자허)
부(賦) 짓는 솜씨는 구름을 뛰어넘는 기상의 자허(子虛)에게 비기네.
앞의 구절은 『자치통감』을 지은 송대(宋代)의 명신 사마광(司馬光, 1019~1086년)이 역사의 대가로 추앙을 받는다는 뜻이며, 뒤의 구절은 사부(辭賦) 7)를 짓는 문장 솜씨가 한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8년)와 같은 문장의 대가에 견줄 만하다는 뜻이다. 군실은 사마광의 자이다. 자허는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에 나오는 인물인데, 여기서는 사마상여를 가리킨다. 구름을 뛰어 넘는 기상이라는 것은 사마상여가 「대인부(大人賦)」를 지어 바쳤을 때 천자가 크게 기뻐하면서 "구름을 타고[凌雲] 훨훨 날아오르는 기상이 있도다."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원전 3> 뒤 구절의 문맥으로 보아 앞 구절도 사마광처럼 역사에 뛰어난 인물을 견주어 칭찬하는 것이다.
(13) 瀑布之餘雲盡水(폭포지여운진수)
폭포의 밖에서는 구름이 온통 물이 되고,
(14) 茯苓其上樹交花(복령기상수교화)
복령(茯苓)의 위에서는 나무가 꽃과 어울렸네.
거대한 폭포의 주변에 물보라가 일어 구름을 형성하고 그 구름이 또 물방울로 화하는 모습과, 뿌리에 복령이 난 나무가 우뚝 서서 꽃을 피운 모습을 표현하였다.
복령은 버섯의 일종으로 소나무를 벤 뒤 5~6년이 지나면 그 뿌리에서 자란다. 『회남자』 「설산(說山)」 편에서는 "천 년 된 소나무 밑에는 복령이 있다(千年之松, 下有茯苓)."고 하였다. 웅장하고 신비한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다.
(15) 却對眞山看畵圖(각대진산간화도)
문득 진짜 산을 대하니 그림을 보는 듯하도다.
실제의 산을 눈 앞에 보니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말이다. 송나라 시인 정구(程俱, 1078~1144년)의 시 「희제화권(戱題畵卷)」의 함련 중 한 구절이다.<원전 4>
짝이 되는 앞 구절은 분실되었다. 분실된 앞 구절은 다음과 같다.
如今掃迹長林下(여금소적장림하)
이제야 깊은 숲 아래서 속객 자취 쓸어버리고,
10-h-7 우신문佑申門
위치와 연혁 : 연경당 사랑채의 북쪽 담장에 있는 문이다.
뜻풀이 : '우신(佑申)'은 '돕기를 거듭한다'는 뜻이다. '신(申)'은 '거듭'이라는 의미이다. 즉 하늘이 나라를 돕기를 거듭한다는 말이다. '우신(佑申)'이 단어로 독립되어 쓰인 용례는 문헌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그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예조참판 서명응(徐命膺, 1716~1787년) 8)이 상소하여 「천우 오장(天佑五章)」의 시(詩)를 올렸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순 임금은 오십에도 부모를 생각하였는데, 우리 임금은 지금 팔십에도 사모하신다. 하늘이 내려 보시며, 도우심을 거듭하도다[保佑申申]. 거듭 도우시는 것은 무엇인가? 긴 눈썹으로 천년을 장수하시는 거라네. 남쪽에 남극성이 있어, 우리 동방(東方)을 비추도다. 붉은 대궐 뜰에 임하여 빛을 발하니 아름답고 빛나서 그 상서로움이 밝도다. 상서로움이란 무엇인가? 만수무강하심이로다.' 라고 하였다."<원전 5>
10-h-8 통벽문通碧門
위치와 연혁 : 연경당 안채에 있는 반빗간(부엌)으로 가는 문이다.
뜻풀이 : '통벽(通碧)'은 '푸른 곳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벽(碧)'의 의미는 '벽산(碧山, 푸른 산)'이나 '벽성(碧城, 신선이 산다는 성)' 등이 될 수 있는데, '벽산' 정도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부엌으로 가는 문이라는 기능에 비추어 보면 이름과 어울리지 않으며 따라서 이 문은 기능과는 상관없이 일반적인 관례대로 전아(典雅)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h-9 태일문太一門
위치와 연혁 : 연경당 사랑채 뒤로 가는 문이다. 농수정(濃繡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앞 쪽에 있는 일각대문이다.
뜻풀이 : '태일(太一)'은 도가적(道家的) 용어로서 '우주 만물의 본원'이라는뜻이며 '도(道)'와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 『장자(莊子)』 「천하(天下)」 편에서"관윤(關尹)과 노담(老聃) 9)은 그 기풍을 듣고 기뻐하여 항상한 허무의 도를 세우고 태일(太一)이라는 절대의 도를 주로 삼았다."<원전 6>라고 하였다. 당나라 성현영(成玄英, 601?~690년) 10)은 태일을 "'태(太)'는 광대하다는 명칭이고'일(一)'은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지칭한다. 큰 도가 넓고 아득하여 둘러싸지 않음이 없으며 만물을 담아서 통하여 하나가 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태일이라고 한다."<원전 7>라고 풀이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 11) 「대악(大樂)」 편에서는 "도라는 것은 지극히 정밀하여서 형체를 지을 수도 없고 이름할 수도 없다. 억지로 이름한다면 태일이라고 한다."<원전 8>라고 하였다.
10-h-10 정추문正秋門
위치와 연혁 : 연경당 안채 동문에서 사랑채로 가는 문이다.
뜻풀이 : '정추(正秋)'는 '한창 무르익은 가을'이라는 뜻으로, '중추(仲秋)'와 같은 말이다. 『주역』의 「설괘전(說卦傳)」 12)에서 '태(兌;☱ )'괘를 설명하며 "태는 바로 가을이니, 만물이 기뻐하는 바이므로 '태에 기뻐한다'고 하였다."<원전 9>라고 하였다.
10-h-11 소양문韶陽門
위치와 연혁 : 연경당 사랑채의 동문이다.
뜻풀이 : '소양(韶陽)'은 '밝고 아름다운 봄빛'이라는 뜻이다.
10-h-12 태정문兌正門
위치와 연혁 : 연경당 안채에 있는 서행각(西行閣)의 가운데 문이다.
뜻풀이 : '태정(兌正)'은 '곧고 바르다'는 뜻이다. '태(兌)'는 '곧다', '통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주역의 괘 이름이기도 하여 방위로는 서쪽을 나타내는데, 이 문이 서행각에 있으므로 방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정'은 왼쪽의 정추문의 뜻풀이에서 든 용례에서와 같이 "태는 바로 가을이다[兌正秋也]"라는 표현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10-h-13 소휴문紹休門
위치와 연혁 : 농수정의 동문이다.
뜻풀이 : '소휴(紹休)'는 '아름다움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이다. 『한서(漢書)』13)「무제기(武帝紀)」에는 "집사에게 조서를 내려 청렴한 이를 흥기시키고 효자를 천거하여 거의 풍속을 이루어 성인의 훌륭한 업적을 이어받았다."<원전 10>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주석에서 안사고(顔師古, 581~645년) 14)의 말을 인용하여 "휴(休)는 아름답다는 뜻이고 서(緖)는 업적이라는 뜻이므로 이는 선대 성인의 아름다운 업적을 이어받는다는 말이다."<원전 11>라고 풀이했다.
10-h-14 농수정濃繡亭
위치와 연혁 : 연경당의 동쪽 돌계단 위에 지은 정자이다. 겹처마 네모지붕으로 꼭대기에 절병통 15)이 꽂혀 있다. 정면 측면이 각 1 칸씩이고 완자[卍字] 무늬의 사분합(四分閤) 16) 문으로 구성하여 모두 들어 올릴 수 있게 했다.
뜻풀이 : '농수(濃繡)'는 '짙은 빛을 수놓는다.'는 의미이다. 연경당의 구석 깊숙이 자리하여 녹음에 둘러싸인 풍경을 표현한 이름이다.
10-j-14 농수정濃繡亭의 주련
뜻풀이 :
(1) 五色天書詞絢爛(오색천서사현란)
오색의 임금 조서(詔書)는 글이 아름답게 빛나고,
(2) 九重春殿語從容(구중춘전어종용)
구중궁궐 봄 전각(殿閣)에는 말씀 조용하시네.
임금이 나라의 일을 훌륭히 수행하고, 태도나 행실에서도 모범을 보이는 것을 찬양하고 있다. 임금은 언행이 진중하고 과묵한 것을 미덕으로 보았다. 고려 시대의 김부식(金富軾, 1075~1151년)의 「등석(燈夕; 관등절 저녁에)」이라는 시에 "임금께선 공손·과묵하고 음악과 여색을 멀리 하시니 / 궁녀들아 온갖 패물로 치장함을 자랑하지 말라."<원전 12>라는 표현이 있다.
(3) 春水方生華來鏡(춘수방생화래경)
봄 물은 막 불어나고 꽃은 거울에 비쳐오니,
(4) 吾廬可愛酒滿床(오려가애주만상)
내 오두막 사랑스럽고 술은 상에 가득하네.
봄을 맞아 불어난 물이 화사하게 핀 온갖 꽃들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묘사하면서, 그 가운데 소박한 오두막집에서 술을 마시며 자족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거울(鏡)'은 맑은 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앞 구절은 도연명 17)의 작품으로 알려진 「사시(四時)」<원전 13>에서 '봄 물은 연못마다 가득하고'라고 한 표현을 응용했고, 뒤의 구절은 역시 도연명의 「독산해경(讀山海經; 산해경을 읽으며)」<원전 14>에서 '뭇 새들은 깃들 곳에 즐거워하고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 '즐거운 마음으로 홀로 봄 술을 마시며 정원의 채소 뜯어 안주를 한다'라고 한 것을 응용한 표현으로 보인다.
(5) 如斯嘉會知難得(여사가회지난득)
이 같은 좋은 모임을 얻기 어려움 알겠는데,
(6) 常駐詩人若有緣(상주시인약유연)
항상 머무는 시인은 마치 인연이나 있는 듯하네.
이처럼 아름다운 모임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여기에 항상 머무는 시인은 마치 인연이나 있는 듯 그런 아름다운 모임을 만나 무척 기쁘다는 뜻이다.
(7) 漢魏文章多古質(한위문장다고질)
한(漢)·위(魏)의 문장은 예스럽고 질박한 맛이 많으며,
(8) 春秋風日長精神(춘추풍일장정신)
춘추(春秋)의 풍기(風氣)는 정신을 길러 주도다.
앞 구절은, 한나라·위나라 때의 문장은 수식과 기교가 적어 예스럽고 질박한 기풍이 많았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의 문예적 가치를 평가한 말이다. 다음 구절의 '춘추풍일(春秋風日)'은 '봄 가을의 날씨'라는 뜻이지만 앞 구절의 '한위문장(漢魏文章)'과 대구의 격이 잘 맞지 않아 '춘추(春秋)'를 역사서이자 경전인『춘추(春秋)』의 의미로, '풍일(風日)'은 '풍기(風氣)'의 의미로 풀었다. 즉 춘추필법(春秋筆法) 18)의 엄정한 기풍이 정신을 고양시켜 준다는 뜻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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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맹박은 범방의 자이고 강성은 정현의 자이다.
2) 후한 환제(桓帝) 때 외척과 환관들이 결탁해 횡포와 정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범방은 이 때 청류당(淸流黨)의 편에서 정절을 지켜 이름이 높았다.
3) 정현에 대해서는 1-h-1 돈화문 참조.
4) 육유에 대해서는 7-j-1 낙선재의 주련 참조.
5) 관휴는 당말 오대의 승려로 절강성 출신이다. 수묵화에 능했다. 꿈에 본 십육나한을 그렸는데, 그 형상이 매우 괴기해 '응몽나한(應夢羅漢)'이라고 불렸다.
6) 『자치통감』은 편년체(編年體)의 대표적 역사서로서, 전국시대부터 오대까지 1362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했다.
7) 사부는 초사(楚辭)형식에서 비롯된, 산문에 가까운 운문이다. 한 무제 때 사마상여 등이 궁정에 초청되어 활동하면서문학의 한갈래로서 중추적 지위를 얻었다.
8) 서명응은 조선후기 학자이다. 북학파의 경향을 띠었다. 자는 군수(君受), 호는 보만재(保晩齋)·담옹(澹翁). 1759(영조35)년 왕명으로 악보를 집대성해 『대악 전보(大樂前譜)』『대악 후보』를 간행했다.
9) 노담은 노자다.『장자』에서는 노담과 관윤을 하나의 학파로 보았다.
10) 성현영은 당나라 태종 때 활동한 도가의 도사로, 장자를 풀이한 『주소(註疏)』를 썼다.
11) 『여씨춘추』는 진 (奏)나라의 승상 여불위(呂不韋)가 빈객(賓客)을 모아 편찬하게 한 사론서(史論書)이다. 「대악」 편은 음악을 논한 장이다.
12) 설괘전은 주역 팔괘의 성질과 방위, 자연 현상 등 상징하는 바를 설명한 글이다.
13) 『한서』는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서이다. 기원전 3세기 한 고조에서 왕망(王莽, 기원전 45년~기원후 23년)까지 229년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14) 안사고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학자이다. 그는 『한서』의 여러 주석들을 집대성 해 주석을 달아 『한서』의 해석에 중요한 근거를 마련했다.
15) 절병통은 궁전이나 정자의 지붕마루 가운데에 세우는, 기와로 된 항아리 모양의 장식이다.
16) 사분합문은 문짝이 넷으로 되어 좌우와 위아래로 여닫는 문을 이른다.
17) 도연명에 대해서는 9-h-1 기오헌 참조.
18) 공자는 춘추를 정리하면서 자신의 시각에서 미묘한 필삭(筆削)을 가하였는데, 이를 춘추필법이라고 한다. 그 특징은 대의명분과 객관성을 엄중히 여기는 역사기록체라는 것이다.
<원전 1> 육유, 「재중농필우서시자율」, "左右琴樽静不譁 放翁新作老生涯 焚香細讀斜川集 候火親烹顧渚茶 書爲半酣差近古 詩雖苦思未名家 一窗殘日呼愁起 袅袅江城咽暮笳."
<원전 2> 관휴, 「산거시」 이십사 수, 제 8수"心心心不住希夷, 石屋巉岩鬓髮垂. 養竹不除當路筍, 愛松留得碍人枝. 焚香開卷霞生砌, 卷箔冥心月在池. 多少故人頭盡白, 不知今日又何之."
山居诗二十四首
数声清磬是非外,一个闲人天地间。
绿圃空阶云冉冉,异禽灵草水潺潺。
无人与向群儒说,岩桂枝高亦好扳。
难是言休即便休,清吟孤坐碧溪头。
三间茆屋无人到,十里松阴独自游。
明月清风宗炳社,夕阳秋色庾公楼。
修心未到无心地,万种千般逐水流。
好鸟声长睡眼开,好茶擎乳坐莓苔。
不闻荣辱成番尽,只见熊罴作队来。
诗里从前欺白雪,道情终遣似婴孩。
由来此事知音少,不是真风去不回。
万境忘机是道华,碧芙蓉里日空斜。
幽深有径通仙窟,寂寞无人落异花。
掣电浮云真好喻,如龙似凤不须夸。
君看江上英雄冢,只有松根与柏槎。
鞭后从他素发兼,涌清奔碧冷侵帘。
高奇章句无人爱,澹泊身心举世嫌。
白石桥高吟不足,红霞影暖卧无厌。
居山别有非山意,莫错将予比宋纤。
鸟外尘中四十秋,亦曾高挹汉诸侯。
如斯标致虽清拙,大丈夫儿合自由。
紫术黄菁苗蕺蕺,锦囊香麝语啾啾。
终须心到曹溪叟,千岁槠根雪满头。
慵甚嵇康竟不回,何妨方寸似寒灰。
山精日作儿童出,仙者时将玉器来。
筠帚扫花惊睡鹿,地垆烧树带枯苔。
不行朝市多时也,许史金张安在哉。
心心心不住希夷,石屋巉岩鬓发垂。
养竹不除当路笋,爱松留得碍人枝。
焚香开卷霞生砌,卷箔冥心月在池。
多少故人头尽白,不知今日又何之。
龙藏琅函遍九垓,霜钟金鼓振琼台。
堪嗟一句无人得,遂使吾师特地来。
无角铁牛眠少室,生儿石女老黄梅。
令人转忆庞居士,天上人间不可陪。
五岳烟霞连不断,三山洞穴去应通。
石窗欹枕疏疏雨,水碓无人浩浩风。
童子念经深竹里,猕猴拾虱夕阳中。
因思往事抛心力,六七年来楚水东。
尘埃中更有埃尘,时复双眉十为颦。
赖有年光飞似箭,是何心地亦称人。
回贤参孝时时说,蜂虿狼贪日日新。
天意刚容此徒在,不堪惆怅不堪陈。
翠窦烟岩画不成,桂华瀑沫杂芳馨。
拨霞扫雪和云母,掘石移松得茯苓。
好鸟傍花窥玉磬,嫩苔和水没金瓶。
从他人说从他笑,地覆天翻也只宁。
腾腾兀兀步迟迟,兆朕消磨只自知。
龙猛金膏虽未作,孙登土窟且相宜。
薜萝山帔偏能湄,橡栗年粮亦且支。
已得真人好消息,人间天上更无疑。
岚嫩风轻似碧纱,雪楼金像隔烟霞。
葛苞玉粉生香垄,菌簇银钉满净楂。
举世只知嗟逝水,无人微解悟空花。
可怜扰扰尘埃里,双鬓如银事似麻。
千岩万壑路倾欹,杉桧濛濛独掩扉。
劚药童穿溪罅去,采花蜂冒晓烟归。
闲行放意寻流水,静坐支颐到落晖。
长忆南泉好言语,如斯痴钝者还稀。
一庵冥目在穹冥,菌枕松床藓阵青。
乳鹿暗行柽径雪,瀑泉微溅石楼经。
闲行不觉过天井,长啸深能动岳灵。
应恐无人知此意,非凡非圣独醒醒。
慵刻芙蓉传永漏,休夸丽藻鄙汤休。
且为小囤盛红粟,别有珍禽胜白鸥。
拾栗远寻深涧底,弄猿多在小峰头。
不能更出尘中也,百炼刚为绕指柔。
业薪心火日烧煎,浪死虚生自古然。
陆氏称龙终妄矣,汉家得鹿更空焉。
白衣居士深深说,青眼胡僧远远传。
刚地无人知此意,不堪惆怅落花前。
露滴红兰玉满畦,闲拖象屣到峰西。
但令心似莲花洁,何必身将槁木齐。
古堑细烟红树老,半岩残雪白猿啼。
虽然不是桃源洞,春至桃花亦满蹊。
自休自已自安排,常愿居山事偶谐。
僧采树衣临绝壑,狖争山果落空阶。
闲担茶器缘青障,静衲禅袍坐绿崖。
虚作新诗反招隐,出来多与此心乖。
石垆金鼎红蕖嫩,香阁茶棚绿巘齐。
坞烧崩腾奔涧鼠,岩花狼藉斗山鸡。
蒙庄环外知音少,阮籍途穷旨趣低。
应有世人来觅我,水重山叠几层迷。
自古浮华能几几,逝波终日去滔滔。
汉王废苑生秋草,吴主荒宫入夜涛。
满屋黄金机不息,一头白发气犹高。
岂知知足金仙子,霞外天香满毳袍。
如愚何止直如弦,只合深藏碧嶂前。
但见山中常有雪,不知世上是何年。
野人爱向庵前笑,赤玃频来袖畔眠。
只有逍遥好知己,何须更问洞中天。
支公放鹤情相似,范泰论交趣不同。
有念尽为烦恼相,无私方称水晶宫。
香焚薝卜诸峰晓,珠掐金刚万境空。
若买山资言不及,恒河沙劫用无穷。
<원전 3> 『사기』,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飄飄有凌雲之氣."
<원전 4> 정구, 『북산집(北山集)』 「희재화권」,"五載京鹿白?鬚 丹靑遐想寄衡巫 如今掃迹長林 下却對眞山看?圖 胷中雲夢本無窮 合是人間老?工 常恨無因繼三絶 倩人拈筆寫胸中."
北山小集卷第十一
信安 程 俱
松風往還
戯題?卷
五載京塵白?䰅 丹青遐想衡巫 如今掃迹長林
下却對眞山看?圖
胷中雲夢本無窮 合是人間老?工 常恨無因繼三
絶 倩人拈筆冩胷中
<원전 5> 『영조실록』 44년 9월 12일(丁酉),"禮曹參判徐命膺上疏, 進天佑五章, 詩曰, ...(중략)...舜以五十, 后今八旬. 天監在下, 保佑申申. 申申伊何, 眉壽千春. 維南有極, 照我東方.載臨?庭, 載揚之光. 郁郁煌煌 昭厥禎祥. 禎祥伊何, 萬壽無疆."
<원전 6> 『장자』 「천하」, "關尹老聃聞其風而說之, 建之以常无有, 主之以太一."
<원전 7> 위 구절에 대한 성현영의 소(疏), "太者廣大之名, 一以不二爲稱. 言大道曠蕩, 無不制圍, 抱囊萬有, 通以爲一, 故謂之太一也."
<원전 8> 『여씨춘추』 「대악」, "道也者, 至精也,不可爲形, 不可爲名, 彊爲之, 謂之太一."
<원전 9> 『주역』 「설괘전」 제 5장. "兌, 正秋也,萬物之所說也, 故曰說言乎兌."
<원전 10> 『한서』 「무제기」 "深詔執事,興廉擧孝, 庶幾成風, 紹休聖緖."
<원전 11> 위 구절에 대한 안사고의 주석,"休美也, 緖業也. 言紹先聖之休緖也."
<원전 12> 김부식, 「등석」, "城闕沈嚴更漏長 燈山火樹璨交光 綺羅??春風細 金碧鮮明曉月凉華蓋正高天北極 玉爐相對殿中央 君王恭?疎聲色 弟子休誇百寶粧."
<원전 13> 「사시」,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峯 秋月揚明輝 冬嶺秀孤松." 이 시는 도연명의 작품을 모은 문집인 『도정절집(陶靖節集)』에 실려 있어 오래 전부터 도연명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도연명의 작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화가로 이름난 진(晋)나라의 고개지(顧愷之,345?~406년)의 작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원전 14> 도연명, 「독산해경(讀山海經)」, "孟夏草木長 繞屋樹扶疎 衆鳥欣有託 吾亦愛吾盧旣耕亦已種 時還獨我書 窮巷隔深轍 頗回故人車 欣然酌春酒 摘我園中蔬 微雨從東來 好風與之俱 汎覽周王傳 流觀山海圖 傘仰終宇宙 不樂復何如."
궁궐 이야기.....창덕궁 [연경당 권역]
11월 22,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궁궐 이야기..창덕궁- 연경당권역
10-h-1 연경당演慶堂
위치와 연혁 : 진장각(珍藏閣)이 있던 자리에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해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요청하여 세웠다고 전해진다.<원전 1> 그러나 일부 사료에는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경축 의식을 거행할 곳으로 건축했으며 '연경'이라는 이름도 이 때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경당은 속칭 궁궐 안의 99칸 집으로 유명하지만 순종대에 간행한 『궁궐지』에 따르면 실제로는 연경당(사랑채) 14칸, 내당(內堂: 안채) 10칸 반, 선향재(善香齋) 14칸, 농수정(濃繡亭) 1칸, 북행각(北行閣) 14칸 반, 서행각(西行閣) 20칸, 남행각(南行閣) 21칸, 외행각(外行閣) 25칸으로 모두 120칸이었다. 궁궐 안의 다른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화려하게 한 것에 비하여 이 집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둥 위에 공포 1)를 두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처음 지었던 연경당은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연경당'은 이곳의 건물군(群) 전체의 이름이면서 사랑채의 당호이기도 하다.
사랑채인 연경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 집인데 이 집 주인의 일상 거처이다. 대궐에서 퇴궐하면 이 방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또 문객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뜻풀이 : '연경(演慶)'은 '경사(慶事)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연(演)' 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늘이다(延)', '널리 펴다'는 뜻이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1827(순조 27)년 효명세자가 대조(大朝: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사스런 예(禮)를 만났고 마침 연경당을 낙성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고 한다.<원전 2>
10-j-1 연경당演慶堂의 주련
뜻풀이 :
(1) 秦城樓閣烟花裏(진성누각연화리)
진(秦)나라 성의 누각은 연화(烟花) 속에 있고,
(2) 漢帝山河錦繡中(한제산하금수중)
한(漢)나라 황제의 산하는 금수(錦繡) 속에 있네.
청명(淸明)절을 맞은 도성(都城)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시 구절이다. 연화는 안개 속에 쌓여 있는 꽃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봄 경치를 은유한 표현이고, 금수는 수 놓은 비단이라는 뜻으로 풍광이 아름다울 때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진나라는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였고 한나라는 중국에 문화의 번영을 가져온 나라이므로 모두 중국을 비유하고자 관습적으로 끌어왔다. 두보의 시「청명(淸明)」 이수(二首) 중 제 2수<원전 3>에서 따 온 구절이다.
제작 정보 : '한제(漢帝)'가 여러 시선집에는 대부분 '한주(漢主)'로 되어 있으나 의미에 차이는 없다.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董其昌(동기창)'2)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3) 臨事無疑知道力(임사무의지도력)
일에 임하여 의문이 없으니 도력을 알겠고,
(4) 讀書有味覺心閒(독서유미각심한)
글을 읽음에 참맛이 있으니 마음 한가로움을 깨닫네.
도를 깨달아 막힘 없고 만족스러운 마음을 갖고, 책이나 읽으면서 한가한 삶을 누리는 경지를 노래한 작품이다. 송나라 승려 각범(覺範, 1071~1128년) 3)의 「이십일우서(二十日偶書)」 이수(二首) 중 제 2수의 <원전 4>함련(含聯)에서 따 왔다.
제작 정보 : '심(心)'이 다른 문헌에는 '신(身)'으로 된 곳이 있다. 좌측에 쓰인글씨는 불명확하지만 형태로 보아 '옹방강(翁方綱)'을 모사(模寫)하면서 잘못새긴 것으로 보인다. '方綱(방강)'과 '覃谿(담계)'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어 청나라 학자 옹방강 4)의 글씨임을 알려 준다. 담계는 옹방강의 호이다.
(5) 雲裏帝城雙鳳闕(운리제성쌍봉궐)
구름 속 도성에는 한 쌍의 봉궐(鳳闕)이요,
(6) 雨中春樹萬人家(우중춘수만인가)
빗속의 봄 숲에는 수많은 인가로다.
구름 속에 우뚝 솟은 궁궐의 모습과 봄비 내리는 중에 숲속에 싸여 있는 평화로운 민가의 모습을 묘사했다. '봉궐'은 궁궐을 달리 부르는 말인데 한나라 때 궁궐 꼭대기에 구리로 만든 봉황을 설치한 데서 유래한 호칭이다. 당나라 시인 왕유의 「봉화성제 종봉래향흥경각도중 유춘우중 춘망지작 응제(奉和聖製從蓬萊向興慶閣道中留春雨中春望之作應制); 임금께서 지으신 「봉래궁에서 흥경궁을 가는 도중에 봄비 속에 머물면서 봄 경치를 바라보며」라는 작품에 화답하여 짓다)」<원전 5>에서 따 온 구절이다.
제작 정보 : '운리(雲裏)'가 '설리(雪裏)'로 되어 있는 문헌도 있다. 좌측에 '董其昌書(동기창서)'라고 쓰여 있어 동기창의 글씨임을 알려 준다. 경복궁의 함화당, 창덕궁의 한정당에도 같은 내용의 주련이 있다.
(7) 瑞氣逈浮靑玉案(서기형부청옥안)
상서로운 기운은 아득히 청옥안(靑玉案)에 떠 있고,
(8) 日華遙上赤霜袍(일화요상적상포)
햇빛은 멀리 적상포(赤霜袍) 위로 솟아 오르네.
주변 공간을 신선들이 사는 세계에 빗대어 신선의 책상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신선의 옷자락에는 햇빛이 솟아오른다고 묘사하였다. 청옥안은 청옥으로 만든 책상이라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신선의 책상을 말하며, 적상포도 신선이 입는 도포로 모두 선계를 가리킨다. 당나라 경위(耿湋, 734?-787?) 5)의 시 「조하기한사인(朝下寄韓舍人)」<원전 6> 중 함련에서 따 온 구절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米芾(미불)'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미불 6)은 북송 시대의 서화가로, 소동파, 황정견 등과 친교가 있었다.
뜻풀이 :
(9) 雲近蓬萊常五色(운근봉래상오색)
구름은 봉래궁(蓬萊宮)에 가까워 늘 오색 빛이요,
(10) 雪殘鳷鵲亦多時(설잔지작역다시)
눈은 지작관(鳷鵲觀)에 남아 오랫동안 쌓여 있네.
봉래궁이 하늘에 드높이 솟아 구름이 가까이 떠 있으며 항상 상서로운 오색 빛을 띠고 있고, 지작관의 응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는 말이다. 봉래궁은 원래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궁전의 이름으로 쓰였다. 중국 당나라 때 장안의 용수산(龍首山)에 있던 대명궁을 봉래궁이라고 고쳐 불렀다. 지작관은 한나라 때 감천원(甘泉苑)에 있던 누관(樓觀) 7)의 이름인데, 이 누관이 크고 높아서 깊은 응달이 졌음을 말한다. 두보의 「선정전퇴조만출좌액(宣政殿退朝晩出左掖; 선정전에 조회를 마치고 저녁에 문하성을 나서며)」<원전 7> 중 경련(頸聯)에서 따온 구절이다.
宣政殿退朝晚出左掖 | |
唐
· 杜甫 || 杜甫专辑 | 唐
时作品 | |
全文: 天门日射黄金榜,春殿晴曛赤羽旗。宫草微微承委佩, 炉烟细细驻游丝。云近蓬莱常好色,雪残鳷鹊亦多时。 侍臣缓步归青琐,退食从容出每迟。 |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米芾(미불)'이 적혀 있다.
(11) 山中老宿依然在(산중노숙의연재)
산 속의 노스님은 늘 그대로 앉은 채로
(12) 案上楞嚴已不看(안상능엄이불간)
책상 위에 『능엄경(楞嚴經)』을 이미 보지 않고 있네.
걸림 없는 무애(無碍)의 경지에서 경전마저 초월한 불립문자(不立文字) 8)의 생활을 하는 노스님의 초탈한 생활을 읊은 시구이다. 『능엄경』은 심성의 본성을 밝힌 불경의 하나로 선종 승려들이 많이 연구했다. 이는 송나라 시인 소식의 「증혜산승혜표(贈惠山僧惠表)」<원전 8>중 함련에서 따온 구절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劉墉(유용)'이라는 글을 적었다. 유용은 청나라의 서예가로서 옹방강과 동시대 인물이다.
뜻풀이 :
(13) 名將存心惟地理(명장존심유지리)
명장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오직 지리(地理)뿐이요,
(14) 聖門傳業只官書(성문전업지관서)
성인 문하에 업을 전하는 것은 다만 관서(官書)일 뿐이네.
명장은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지형의 이치를 잘 알아야 하고,성인의 문하에서 업을 전수하는 것은 오직 관서로써 한다는 말이다. 관서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제작 정보 : '李丙熙印(이병희인)', '三州後人(삼주후인)'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이병희는 호가 농천(農泉), 농암(農巖)이며 대구 출신으로 군수를 지냈다. 행서와 초서에 능했으며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활래정(活來亭) 주련을 비롯해 수많은 고택과 사찰의 주련을 썼다.
뜻풀이 :
(15) 九天日月開新運(구천일월개신운)
구천(九天)의 해와 달이 새로운 운을 열어 주니,
(16) 萬里雲霞醉太平(만리운하취태평)
만리의 구름과 노을은 태평에 취해 있네.
드높은 하늘의 해와 달이 국가가 새롭게 발전할 운을 열어 주니 만리에 걸쳐 떠있는 구름과 노을도 태평에 취한 듯 붉게 물들어 있다는 말이다. 구천은 드높은 하늘이라는 뜻으로, 궁궐이라는 의미도 있어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쓰였다. 나라가 새로운 기운을 받아 태평성대를 이룬 모습을 노래한 구절이다.
제작 정보 : '이병희인(李丙熙印)', '삼주후인(三州後人)'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17) 千里春風回碧巒(천리춘풍회벽만)
천리에 봄바람은 푸른 봉우리를 돌아오고,
(18) 南極祥光兆吉昌(남극상광조길창)
남극성(南極星)의 상서로운 빛은 길상(吉祥)을 알려오네.
천리 멀리에서 불어온 봄바람은 푸른 산봉우리를 휘돌아 오고, 수명을 주관하는 남극성은 상서로운 길조(吉兆)를 보여 준다는 말이다. 남극성은 남극노인성으로 인간의 수명을 주관한다고 여겨져 장수를 축원할 때 곧잘 언급되었다.
제작 정보 : '李丙熙印(이병희인)', '三州後人(삼주후인)'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19) 請於上古無爲世(청어상고무위세)
상고 시대와 같은 무위(無爲)의 세상에서
(20) 長作天家在野臣(장작천가재야신)
길이 천자의 백성이 되기를 청하네.
요순 임금이 다스리는 무위지치(無爲之治)의 세상에서 오래도록 벼슬도 하지 않는 평범한 백성이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노래하였다. '무위'는 백성을 교화하거나 인위적 통치를 하지 않아도 세상이 잘 다스려짐을 뜻한다.<원전 9>
제작 정보 : '李丙熙印(이병희인)', '三州後人(삼주후인)'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21) 功崇六宇郭中令(공숭육우곽중령)
공이 온 세상에 높은 이는 곽중령(郭中令)이요,
(22) 荷香風共聖之淸(하향풍공성지청)
연꽃 향기 바람과 함께 하는 이는 성인 중에 맑은 사람일세.<원전 10>
명신 곽중령(郭中令, 697~781년)과 같이 높은 공을 세우는가 하면, 연꽃처럼 맑은 백이(伯夷) 10)의 정신을 본받기도 한다는 뜻이다. 곽중령은 당나라의 곽자의(郭子儀)인데, 그는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자식도 많아 팔자 좋은 사람의 전형으로 일컬어진다.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치거나 물러나 절조를 지키는 출처(出處), 행장(行藏)을 읊은 구절이다.
제작 정보 : '李丙熙印(이병희인)', '三州後人(삼주후인)'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뜻풀이 :
(23) 兩京名詔皆高士(양경명조개고사)
두 서울 11)에 조서로 부르는 자는 모두가 고사이니,
(24) 四時和氣及蒼生(사시화기급창생)
사시에 온화한 기운이 온 백성에게 미치네.
온 나라에 조서를 내려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 올리라는 명을 내리니 거기에 응해 온 인물들이 모두 고상한 선비들이어서, 이들에 힘입어 훌륭한 정치를 행하여 언제나 온화한 기운이 백성들에게 미친다는 말이다. 고사(高士)는 인격이 높고 성품이 깨끗한 선비를 뜻한다.
제작 정보 : '李丙熙印(이병희인)', '三州後人(삼주후인)'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25) 山靜日長仁者壽(산정일장인자수)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 어진 이는 장수하고,
(26) 月明人影鏡中來(월명인영경중래)
달 밝으니 사람 그림자가 거울 속에 비춰 오도다.
고요한 산 속에서 참된 성정을 기르면서 밝은 달밤에 연못가를 산책하는 모습이다. '거울 속'은 거울처럼 맑은 물을 가리킨다. 첫 구절은 『논어(論語)』의 「옹야(雍也)」편에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활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원전 11>라는 내용을 응용한 표현이다.
제작 정보 : '李丙熙印(이병희인)', '三州後人(삼주후인)'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27) 半窓?影梅花月(반창소영매화월)
창 한 켠에 성긴 그림자는 달빛에 매화요,
(28) 一榻淸風栢子香(일탑청풍백자향)
책상에 맑은 바람은 측백의 향기로세.
매화나무 가지에 달이 떠올라 성긴 매화 가지의 그림자가 창문에 비치고, 측백나무 향기가 섞인 바람이 책상 위로 불어오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속세를 벗어난 듯한 맑고 깨끗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첫 구절은 북송 때의 시인 임포(林逋, 967~1028년)의 시 「산원소매(山園小梅)」에 나오는 "맑고 얕은 물가에는 성긴 가지 비껴 있고 / 달 뜨는 황혼녘에 은은한 향기 도네(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는 구절을 응용한 표현이다. '백(栢)'자를 우리나라에서는 『두시언해』 이후로 흔히 '잣나무'로 번역하지만 원래는 측백나무를 뜻하므로 여기서는 원 뜻대로 번역하였다.
제작 정보 : '李丙熙印(이병희인)', '三州後人(삼주후인)'의 낙관이 새겨져 있다.
뜻풀이 :
(29) 山逕繞邨松葉暗(산경요촌송엽암)
산길은 마을을 두르고 솔잎은 짙은데
(30) 柴門臨水稻花香(시문임수도화향)
사립문은 물에 가까워 벼꽃은 향기롭네.
마을을 둘러 산길이 나 있고 산에 자란 솔잎은 짙은 그늘을 이루고 있는데, 사립문은 물 가까이 있어 벼꽃 향기가 바람에 풍긴다. 시골 산촌의 한가롭고 정겨운 모습을 묘사하였다. '邨(촌)'은 '村(촌)'과 같은 글자이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春畹 于湘蘭(춘원 우상란)'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참고 :于湘兰,中国清朝官员,于1860年(咸丰十年)接替雷以镇,于台湾担任台湾府台湾县知县,
管辖约今台湾南部之嘉义县、嘉义市、台南县、市全境及高雄县部份区域。
뜻풀이 :
(31) 於此閒得少佳趣(어차한득소가취)
이 곳에서 한가히 약간의 아름다운 흥취 얻으니,
(32) 亦足以暢敍幽情(역족이창서유정)
또한 그윽한 정을 펼치기에 족하도다.
일상에서 잠시 동안 아름다운 흥취를 얻어 그윽한 마음 속 정을 펼쳐 보는 소박한 정취를 노래하였다. 뒷 구절은 중국 진나라 때의 서예가이자 문인인 왕희지(王羲之, 307~365년) 11)의 「난정기(蘭亭記)」에서 "비록 성대한 거문고와 피리소리는 없지만,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를 읊으니 그윽한 마음 활짝 펴기에 충분하도다.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라고 한 표현에서 따 왔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鐵保(철보)'라는 글이 적혀 있고'鐵保私印(철보사인)'이라는 낙관과 그의 호 매암(梅庵)을 나타내는 '某庵(매암)'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12) '某(매)'는 '梅(매)'의 본자이다.
(33) 淸興高於將上月(청흥고어장상월)
맑은 흥은 솟아 오르려는 달보다 높고,
(34) 深情溢比欲開尊(심정일비욕개준)
깊은 정은 열려고 하는 술독에 비할 만큼 넘친다네.
밝은 달밤에 벗과 더불어 잘 익은 술을 마실 때의 맑은 흥취와 깊은 정을 노래하고 있다. '尊(준)'은 '樽(준)'과 같은 글자로 쓰였다.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전생 허내선(?生 許乃善)'이라는 글이 적혀 있고 '전생(?生)'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외관상 '善(선)'자가 안보이나 보수 과정에서 지워진 것이며 건탁(乾拓)을 해 보면 확인된다.
*** 참고 : 花香元亮籬前酒,雨墊林宗野外巾。許乃善 / 元明清民國老對聯
(35) 僮約屢申松菊徑(동약루신송국경)
노복과의 약속<원전 12>도 소나무와 국화의 길에서 자주 하였고,
(36) 水租先報芰荷洲(수조선보기하주)
수조(水租)도 마름꽃과 연꽃이 핀 물가에서 먼저 받았네.
자연을 사랑하여 항상 소나무와 국화가 자란 길을 노닐므로, 노복과의 약속도 이 곳에서 하게 된다. 또 마름꽃과 연꽃이 피는 물가가 좋아 수세(水稅)를 받는 보고도 이런 곳에서 받다는 뜻이다. 수조(水租)는 수세(水稅)를 뜻하는 듯한데,봇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내는 세금이다. 한나라 신행(愼行)의 「진부암급간이종원도색제(陳傅巖給諫以種園圖索題)」 이수(二首)<원전 13> 중 경련(頸聯)에서 따 온 구절이다.
*** 참고 : 江鄉已牢落冬候更蕭條風葉鳴孤樹霜溪影一橋沿塘收蟹籪逺市插魚標雀鼠何多耗年荒爾獨驕 陳傅巖給諫以種園圖索題二首
身在元龍百尺 樓菴居那便署休休 慣聽絲竹知魚樂 別築陂塘領鶴游 僮約屢申松菊徑 水租新報芰荷洲 黃橙綠橘皆垂實 嵗計如農亦有秋
/ 敬業堂詩集 : 卷二十三 - Chinese Text Project Wiki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成親王(성친왕)'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성친왕은 건륭제의 열한 번째 아들 영성(永?, 1752~1823년)의 봉작이다. 특히 해서에 뛰어났고 추사 김정희도 그의 글씨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뜻풀이 :
(37) 春雨杏花虞學士(춘우행화우학사)
봄비에 살구꽃은 우학사(虞學士)가 노래했고,
(38) 酒旗山郭杜司勳(주기산곽두사훈)
주막 깃발 산 성곽은 두사훈(杜司勳)이 읊었다네.
송말 원초의 성리학자 우집(虞集, 1272~1348년) 13)과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803~853년) 14)의 작품에서 한 부분씩 인용하여 봄날의 아름다운 정취와 산촌의 반가운 주막의 모습을 읊었다. 앞 구절은 우집이 「풍입송 기가경중(風入松 寄柯敬仲)」이라는 사(詞)에서 "살구꽃 봄비 내리는 강남이라네(杏花春雨江南)"라고 쓴 것을 가리키고, 뒤의 구절은 두목의 시 「강남춘(江南春)」에 "물가 마을산 성곽에 주막 깃발 펄럭이네(水村山郭酒旗風)."이라는 구절이 있음을 말한것이다. 우집은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를 지냈기 때문에 우학사라고도 했으며 두목은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기 때문에 두사훈이라했다.
명나라 주무서(朱茂曙)의 시 「진회하춘유즉사(秦淮河春遊卽事)」<원전 14>에서 경련(頸聯)을 따 왔다. 명나라 진욱(秦旭, 1410~1494년)의 「주중기흥(舟中紀興)」에 "東風兩髩雪?? 一枕蘭舟酒半酣 不似邵菴虞學士 杏花春雨憶江南"이라고 하였는데, 전(轉)·결(結)구에 유관한 표현이 보인다.
*** 참 고 : 欽定四庫全書
石倉歴代詩選巻四百三十一
明 曹學佺 編
明詩次集六十五
夏鍭
舟中紀興
東風兩髩雪?? 一枕蘭舟酒半酣 不似邵菴虞學士
杏花春雨憶江南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笛樓 溫忠彦(적루 온충언)'과'小有山房(소유산방)' 등의 낙관이 있다. '彦(언)'자가 이상한 형태로 보이나 보수 과정에서 잘못 칠한 것이며, 건탁(乾拓)해 보면 분명히 확인된다.
(39) 樂意相關禽對語(낙의상관금대어)
즐거운 뜻 서로 관계하여 새들은 마주하여 지저귀고,
(40) 生香不斷樹交花(생향불단수교화)
향기 풍겨 끊이지 않으니 나무는 꽃과 서로 어울렸네.
즐거운 마음을 나누는 듯이 서로 마주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과, 끊임없이 향기를 풍기며 서로 어우러진 초목·화초들의 풍광을 노래하였다. 송나라 시인 석연년(石延年, 994~1041년) 15)의 「금향장씨원정(金鄕張氏園亭)」<원전 15>에서 경련을 따 왔다.
*** 참고
제작 정보 : 왼쪽에 글씨를 쓴 사람을 나타내는 '卓秉恬(탁병념)'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탁병념(1781~1855년)은 여러 관직에 있었던 청나라의 문신이다.
10-h-2 장락문長樂門
위치와 연혁 : 연경당의 정문이다.
뜻풀이 : '장락(長樂)'은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고전에 쓰인 예로는 『한비자(韓非子)』 16) 「공명(功名)」 편에 "존엄한 군주의 지위를 가지고 충신을 제어하면 오랜 즐거움이 생기고 공명을 이루게 된다."<원전 16>라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제작 정보 : 낙선재의 대문 이름도 똑같은 장락문(長樂門)이다.
10-h-3 장양문長陽門
위치와 연혁 : 정문인 장락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동쪽에 있으며, 연경당의 사랑채 문이다. 사랑채는 남성의 공간이므로 솟을대문으로 만들었다. 솟을대문은 사대부가 초헌(軺軒) 17)을 타고 드나들 수 있도록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오르게 지은 것이다.
뜻풀이 : '장양(長陽)'은 '길이(오래도록) 볕이 든다'는 뜻이다. '양(陽)'은 볕, 남성, 하늘 등 양기(陽氣)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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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포는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끝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구조물로, 장식의 기능도 겸한다.
2) 동기창에 대해서는 낙선재의 주련 참조.
3) 각범의 성은 팽(彭)씨, 이름은 혜홍(惠洪) 또는 덕홍(德洪)으로 서주(瑞州)에서 태어났다.『임간록(林間錄)』, 『고승전』,『기신론해의(起信論解義)』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4) 옹방강에 대해서는 7-j-1 낙선재의 주련 참조.
5) 경위는 자는 홍원(洪源), 하동(河東)출신이다. 당나라 중기가 시작되던 대력(大曆) 연간(776~779년)에 시로 명성을 얻은 대력 10재자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6) 미불은 자는 원장(元章), 호는 남궁(南宮)·해악(海岳)으로 호북성(湖北省)출신이다. 그림과 문장·서(書)·시 ·고미술 일반에 대해 조예가 깊어 궁정의 서화박사(書?博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7) 누관은 전망과 경치가 좋은 누각.
8) 불립문자란 깨우침은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체험을 중시하는 선종의 구도 방식을 표명한다.
9) 백이는 중국 은(殷)나라 말의 현인이다. 이름은 윤(允), 자는 공신(公信).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의 주왕(紂王)을 치려고 했을 때, 아우인 숙제(叔齊)와 막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
10) 양경(兩京)은 주나라의 호경(鎬京)과 낙읍(?邑), 한나라의 장안과 낙양(洛陽), 북경(北京)과 남경(南京) 등을 가리키는데, 주로 한나라의 장안과 낙양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11) 왕희지는 자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내 왕우군이라고도 불린다. 예술로서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여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예가로 존경받는다.「난정기」는 시모임인 난정회(蘭亭會)의 시집에 쓴 서문이다.
12) 철보에 대해서는 7-j-1 낙선재의 주련을 참조.
13) 우집은 자는 백생(伯生), 호는 소암(?菴)이다. 송대 성리학자들의 도학시를 모은『염락풍아(濂洛風雅)』를 편찬하여, 도학시를'염락시(濂洛詩)'라고 부르는것이 그로부터 유래했다.
14) 두목은 자 목지(牧之), 호 번천(樊川).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는 만당기의 대표적 시인이다. 함축성이 풍부한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15) 석연년은 자는 만경(漫卿)이다. 곧은 절개를 갖고 속세에서 멀리 떠나 글을 쓰는 생활을 했다. 특히 시에 능했다.
16) 『한비자』는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에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 기원전 280~기원전 233년)와 그 일파의 견해를 모아 엮은 책이다.
17) 초헌은 벼슬아치들이 타던 가마를 가리킨다.
<원전 1>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순조 27년, 『궁궐지』에는 순조 28년에 건립하였다고 나와 있다.
<원전 2> 『동국여지비고』 1권, 「경도(京都)」,"純祖二十七年, 翼宗在春宮時, 創建于珍藏閣舊基, 時値大朝上尊號慶禮, 而適成, 故名之."
<원전 3> 『두보』, 「청명」. "此身飄泊苦西東 右臂偏枯半耳聾 寂寂繫舟雙下淚 悠悠伏枕左書空 十年蹴踘將雛遠 萬里秋韆習俗同 旅雁上雲歸紫塞 家人鑽火用靑楓 秦城樓閣煙花裏 漢主山河錦繡中 風水春來洞庭阔 白苹愁殺白頭翁"
*** 참고 :
绣羽衔花他自得,红颜骑竹我无缘。
胡童结束还难有,楚女腰肢亦可怜。
不见定王城旧处,长怀贾傅井依然。
虚沾焦举为寒食,实藉严君卖卜钱。
钟鼎山林各天性,浊醪粗饭任吾年。
此身飘泊苦西东,右臂偏枯半耳聋。
寂寂系舟双下泪,悠悠伏枕左书空。
十年蹴踘将雏远,万里秋千习俗同。
旅雁上云归紫塞,家人钻火用青枫。
秦城楼阁烟花里,汉主山河锦锈中。
春去春来洞庭阔,白苹愁杀白头翁。
<원전 4>
각범, 「이십일우서」 이수, "此生早衰坐世故 末路易歸驚险艱 臨事無疑知道力 讀書有味覺身閑 解醫憂患臂三折 難隱文章豹一斑永?山完山赤頭璨 不令姓氏落人間."
*** 참 고 :
<원전 5> 왕유, 「봉화성제 종봉래향흥경각도중유춘우중 춘망지작 응제」, <원전 6> 경위, 「조하기한사인」. "侍臣鳴?出西曹 鸞殿分階翊綵? 瑞氣?浮靑玉案 日華遙上赤霜袍 花間焰焰雲旗合 鳥外亭亭露掌高 肯念萬年芳樹裏 隨風一葉在蓬蒿." <원전 7> 두보, 「선정전퇴조만출좌액」, "天門日射黃金? 春殿晴?赤羽? 宮草菲菲承委?爐烟細細駐遊絲 雲近蓬萊常五色 雪殘?鵲亦多時 侍臣緩步歸?? 退食從容出每遲." <원전 8> 소식, 「증혜산승혜표」, "行遍天涯意未? 將心到處遣人安 山中老宿依然在 案上楞嚴已不看 ?枕落花餘幾片 閉門新竹自千竿 客來茶罷空無有 盧橘楊梅尙帶酸" <원전 9> 『논어』 「위령공」 편, "子曰, 無爲而治者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이에 따르면 '무위의 세상'이란 요순 시대를 말한다. <원전 10> 『맹자』 「만장(萬章) 하(下)」 "孟子曰,伯夷, 聖之淸者也, 伊尹, 聖之任者也, 柳下惠, 聖之和者也, 孔子, 聖之時者也."라고 한 데서 '성인 중에 맑은 사람'은 백이를 가리킨다. <원전 11> 『논어』 「옹야」편,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원전 12> 한(漢)의 왕포(王褒)가 『동약(?約)』을 지어서 노비와의 계약을 기록하였는데, 그이후 동약이라는 표현은 주인과 노복의 약속을뜻하게 되었다. 청나라 조익(趙翼)의 시 「동약」에, "?約雖頒十數條, 守門奴已出遊?"라고 하였다. <원전 13> 신행, 「진부암급간이종원도색제」, 이수 "身在元龍百尺樓 菴居那便署休休 慣聽絲竹知魚樂 別築陂塘領鶴游 ?約屢申松菊徑 水租新報?荷洲 黃橙綠橘皆垂實 歲計如農亦有秋." <원전 14> 주무서(朱茂曙), 「진회하춘유즉사」,"橋下溪流燕尾分 灣頭新水慣?裙 六朝芳草年年綠 雙調鳴箏戶戶聞 春雨杏花虞學士 酒旗山郭杜司勳 兒童也愛晴明好 紙剪春鳶各一?." <원전 15> 석연년, 「금향장씨원정」, "亭館連城敵謝家 四時園色?明霞 窓迎西渭封侯竹 地接東陵隱士家 樂意相關禽對語 生香不斷樹交花 縱遊會約無留事 醉待參橫月落斜." <원전 16>『한비자』, 「공명」편. "以尊主御忠臣,則長樂生而功名成" Continue Reading
- http://blogs.afterabc.co.kr/bruce/ 블루스 님의 글 중에서
< 헌종대왕의 茶詩 >
자 명 煮 茗
헌 종 憲 宗 , 이 환 李 奐
- 왕궁 유산암酉山庵 다옥 茶屋 송단다실 松檀茶室에서 홀로 차를 달여 마시며 짓다.
활수팽신명 活水烹新茗 하니 물을 끓이며 새차를 달이니
청향투록창 淸香透綠窓 하도다. 맑은 차향 창밖의 숲으로 흐르도다.
세간생해안 細看生蟹眼 하고 자세히 보니 게눈같은 기포가 떠오르고 일완요시강 一梡澆詩腔 이로구나 한 사발의 차는 뱃속을 詩로 채우는 것이로구나!!
******* 신료들 중에서도 젊은 분들의 시는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쓰고도 시문 詩文이 비교적 매끄럽지 못하고 글이 떠도는 듯한 느낌이 있는 데.
이 헌종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단순하다. 육우가 <다경>에서 강조한 차의 정수인 검행정덕(儉行精德)을 그대로 닮은 詩이다.
어찌 학생들의 표정이 사진을 제대로 찍기는 하는거야!! 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어찌 걱정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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