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21. 22:38ㆍ들꽃다회
창덕궁 후원 뇌다회(雷茶會) - 둘
번개다회
20140516 12시경.... 맑음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纜池) 권역
동궐도(東闕圖) - 부분 애련지, 관람지 존덕정 부분
대한민국의 국보 | |
동궐도 (고려대학교 소장본) | |
지정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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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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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조선 순조 24년(1824년)∼30년(1830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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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 | 고려대학교, 동아대학교 |
동궐도(東闕圖)는 조선후기 순조 연간에
도화서 화원들이
조감도식으로 그린 궁궐 그림이다.
동궐도는 현재 두 점이 전해지는데,
두 점의 동궐도는 채색과 배경산수 표현 등에서 약간의 차이만 보일 뿐,
규모와 표현 방법이 동일한 작품이며
두 점 모두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여
본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려대소장본
고려대소장본 동궐도는 모두 16폭으로 1폭은 상하 6면으로 접혀져 있으며 첩자(帖子)로 꾸며져 있다. 화첩 표면에는 적색지(赤色紙)로 외곽을 두른 조그마한 장방형(長方形)의 백견(白絹)에 '동궐도 인일(東闕圖 人一)'이란 표제(表題)가 적혀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천(天)'과 '지(地)'의 각각 다른 궁궐도(宮闕圖)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매면(每面) 가로 36.5cm, 세로 45.5cm 크기의 백견(白絹)에 그려진 화첩 6면을 위·아래로 연접(連接)하여 첩자로 만든 것이 16첩인데 이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 이으면 총 길이가 가로 576cm, 세로 273cm가 된다.
동아대 소장본은 현재 16폭 병풍으로 꾸며져 있으나
원래는 고려대소장본처럼 16개의 화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총 길이는 가로 584cm, 세로275cm이다.
제작연대
작품의 제작연대는 그림에 그려져 있는 건물들의 상태와
《순조실록(純祖實錄)》·《궁궐지(宮闕誌)》·《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등의
문헌내용을 통해 파악되는 각 건물들의 소실 여부와 재건 연대 등을 비교 고찰함으로서 추측될 수 있다.
이에 따라 동궐도는 순조 24년(1824)에서 30년(1830)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동궐도 화법 및 평가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두 궁의 전각과 다리·담장은 물론
연꽃과 괴석 등 조경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경이 되는 산과 언덕 부분의 묘사방식은 남종화(南宗畵)의 준법을 따르고 있으나,
채색을 써서 입체적으로 그린 건물의 표현과 자연스러운 원근 처리 등에 있어서는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작품은 도화서 화원들의 원숙하고도 절묘한 기법으로 그려진 우수한 작품으로서
《궁궐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이 보다 입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과학기술사의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각종 건물·시설·명칭 등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동궐도는 당시에 유행했던 화풍을 파악할 수 있는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자료일 뿐만 아니라,
건축·조경·과학기술사·궁궐사 등 각 분야의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화려하고 장엄했던 조선후기 궁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옛 모습을 잃은 현재의 궁궐들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동궐도
이 문을 지나다니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문(不老門)
- 이 불로문 앞의 애련지의 연꽃 처럼 살 수 있다면 늙지 않거나
적어도 천천히 늙을 수는 있다.
그러나 천천히 늙는다고 해서 저승이 멀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진 문으로 창덕궁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돌문이다. 세로판석에 돌쩌귀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나무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전해진다.
‘궁궐지’에 의하면, 불로문 앞에는 불로지(不老池)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앞에 불로문이 있어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문은 하나의 판석을 ㄷ자 모양으로 깎은 뒤 다듬은 것이다. 문의 윗부분에 전서체로 불로문이라 새겨져 있다. 지금의 불로문은 창덕궁 궁궐 배치도인 ‘동궐도(東闕圖)’에 나와 있는 모습과 일치하지만 주변 풍경은 그림과 많이 다르다. 마치 종이로 오려낸 듯한 단순한 형태이지만 두께가 일정하게 돌을 다듬은 기술이 세밀하다. 불로문과 잇달려 있는 담장과의 조화로움에서도 전통 조형물의 우수함을 엿볼 수 있다.
애련지(愛蓮池)에 심어져 있는 수련(睡蓮)
-우리 궁궐의 연지에는 우리 토종 자생연꽃인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그려져 있는 작고 소박한 연꽃인 각시수련이나 개연, 남개연, 왜개연
등을 심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으나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곳이니
문화재관계 전통조경 자문위원들과 실무자들에게 맡겨야 할 일이다.
남개연 : 연밥(씨방)이 붉은색
왜개연 : 연밥이 노랑색
개연 (노랑색 꽃)과 변이종 개연(붉은색)
각시수련
애련지와 애련정(愛蓮亭) ....... 그리고 뿌리 깊은 금강송
-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인 애련지(愛蓮池)는 창덕궁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애련지 북쪽에 서 있는 간결한 정자가 애련정(愛蓮亭)이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方池)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입수구가 독특한 데,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물길을 따라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애련지의 물가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이다, 건물을 받치는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사방으로 평난간을 둘렀는데, 낙양창 사이로 사계절이 변하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愛蓮亭記)’가 ‘궁궐지(宮闕志)’에 전한다.
애련지 동쪽 연지둑에 뿌리가 노출된 금강송을 보자 오늘은 왠일인지,
세종 때 훈민정음 반포와 함께 지은 용비어천가가 떠오른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정인지 외
▣ 원문과 풀이
제1장
海東(해동) 六龍(육룡)이 샤 일마다 天福(천복) 이시니. 古聖(고성)이 同符(동부)시니.
[풀이] 우리 나라에 여섯 성인이 웅비(雄飛)하시어, (하시는) 일마다 모두 하늘이 내린 복이시니, (이것은) 중국 고대의 여러 성군(聖君)이 하신 일과 부절을 맞춘 것처럼 일치하십니다.
- 조선 건국의 천명성, 정당성
제2장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풀이]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찬란하게 피고 열매가 많습니다.
원천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아니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갑니다.
- 조선의 영원한 발전 기원
제3장
周國大王(주국 대왕)이 豳谷(빈곡)애 사샤 帝業(제업)을 여르시니.
우리 始祖(시조)ㅣ 慶興(경흥)에 사샤 王業(왕업)을 여르시니.
[풀이] 주나라의 대왕이신 고공단보께서 빈곡에 사시면서 제업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우리 시조이신 목조께서 경흥에 사시면서 왕업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 유구한 조선 왕조의 기초
[배경 고사]
- 전절 : 주(周)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것은 무왕(武王) 때에 이루어졌지만, 그 제업의 기초는 시조 후직의 12세손 고공단보가 빈곡에서 조상의 업적을 이어받고 덕을 쌍아 국인(國人)이 다 추대했을 때 부터이다.
- 후절 : 목조가 전주에서 살다가 삼척을 거쳐 함경도 덕원부로 옮기니, 170여 호의 백성이 그를 따랐다. 그 후 원나라에 귀화하여 경흥 동쪽으로 이사하였는 데, 거기에서 원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아 우리 나라 동북면의 민심이 목조께로 돌아가니 조선 왕업의 기초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제4장
狄人(적인)ㅅ 서리예 가샤 狄人(적인)이 외어늘 岐山(기산) 올샴도 하 디시니.
野人(야인)ㅅ 서리예 가샤 野人(야인)이 외어늘 德源(덕원) 올샴도 하 디시니.
[풀이] (주나라 태왕 고공단보가) 북쪽 오랑캐 사이에 사시는데, 그들 오랑캐가 침범하므로 기산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시도다.
(익조가 목조 때부터 살던) 여진족 사이에 사시는데, 그들 여진족이 침범하므로 덕원으로 옮기심도 하늘의 뜻이시도다.
- 조선 왕조의 천명성(天命性)
[배경 고사]
- 전절 :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가 빈곡에 살고 있을 때에, 적인(狄人)의 침범이 잦으므로 피폐(皮弊)와 견마(犬馬), 주옥(珠玉) 등을 주어 달랬으나, 이에 응하지 않으므로 칠수(漆水)와 저수(沮水) 두 강을 건너 기산 밑에 가서 살자, 빈곡 사람들이 따르는 자가 많아 시장과 같았다.
- 후절 : 목조(穆祖)의 뒤를 이어 익조(翼祖)가 오동에서 원나라 벼슬인 오천호 소장(五千戶所長)으로 있으면서 인심을 얻으니, 여진(女眞) 장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므로 적도(赤島)로 피하였다가 덕원으로 옮겼다. 이에 경흥 백성들이 따라 옮기는 자가 많아서 시장과 같았으니, 이것이 다 하늘의 뜻이라 하였다.
제7장
블근 새 그를 므러 寢室(침실) 이페 안니 聖子 革命(성자혁명)에 帝祜(제호) 뵈니.
야미 가칠 므러 즘겟 가재 연니 聖孫 將興(성손 장흥)에 嘉祥(가상)이 몬졔시니.
[풀이] 붉은 새가 글을 물고 (문왕의) 침실문 앞에 앉으니 거룩한 임금의 아들(무왕)이 혁명을 일으키려 하매 하느님이 주신 복을 미리 보이신 것입니다.
뱀이 까치를 물어다가 큰 나뭇가지에 얹으니, 거룩한 임금의 성손(聖孫)인 태조가 장차 일어남에 있어 경사로운 징조를 먼저 보이신 것입니다.
- 조선 건국에 대한 하늘의 계시
[배경 고사]
- 전절 : 주나라 문왕(文王) 때 천명을 받아 표시로 붉은 새가 다음과 같은 글을 물고 문왕 침실문에 와 앉았다. “부지런한 사람은 길(吉)하고 게으른 사람은 망한다. 의리(義理)를 지키는 사람은 흥하고 사욕(私慾)을 탐하는 자가 흉(凶)하다. 무릇 모든 일이 억지로 하지 않으면 사곡(邪曲)이 생기지 않고, 굳세지 못하면 바르지 못한다. 사곡(邪曲)이 일면 망할 것이고, 굳센 사람은 만세를 누린다. 인(仁)으로써 얻고, 인(仁)으로써 다스리면 백 세를 누릴 것이고, 불인(不仁)으로써 얻고 불인(不仁)으로써 다스리면 당세(當世)를 마치지 못하리라.”
- 후절 : 도조(度祖)가 행영(行營-야영을 하는 곳)에 있을 때, 까치 두 마리가 영중(營中)의 나무에 앉았다. 도조(度祖)가 그것을 쏘고자 하니 휘하 군사들이 모두, “몇 백 보나 되는 먼 곳이니 맞히니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도조(度祖)는 활을 쏘아 두 마리의 까치를 땅에 떨어뜨렸다. 마침 그 때 큰 뱀이 나와서 물어다가 나무 위에 가져다 놓고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며 모두 칭송하였다.
제8장
太子(태자) 하히 샤 兄(형)ㄱ 디 일어시 聖孫(성손) 내시니이다.
世子(세자) 하히 샤 帝命(제명)이 리어시 聖子(성자) 내시니이다.
[풀이] 태자(계력)를 하늘이 가리시어 그 형(태백)의 뜻이 이루어지시매, 그의 손자 무왕을 내리신 것입니다.
세자(환조)를 하늘이 가리시어 원나라 황제의 명령이 내리시매, 이 태조를 내리신 것입니다.
- 천명에 의한 이 태조의 탄생
- 이하 생략 -
- 다음 카페 <만암>의 역사이야기 만암 님의 글 [용비어천가 원문 및 풀이} 중에서
애련지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의두합 권역 ..... 그리고 뿌리깊은 금강송
승재정과 관람지 남쪽 기슭에 피어있는 매발톱 그리고 노랑꽃창포
관람지(觀纜池) 와 관람정(觀纜亭) 그리고 배경의 육모정인 존덕정(尊德亭)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 중 하나이다.
연못가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합죽선(合竹扇) 모양의 정자인 관람정이 있다.
한반도처럼 생겼다 하여 반도지(半島池)라 불렸다가 관람지(觀纜池)로 명칭이 바뀌었다.
1908년 무렵 제작된 동궐도형(東闕圖形)에 묘사된 연못은 호리병 모양이었으나
고종 때 일제가 연못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고쳤다고 한다. 함경도 지역을 남쪽에,
경상도·전라도 지역을 북쪽에 배치하여 한반도의 지형을 바꿔놓았다고 알려지면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관람지 [昌德宮觀纜池] (두산백과)
- 위에 인용한 고려대 소장본 <동궐도(1824~1830년 제작 추정)>에는
방지(方池)가 남북으로 2개가 배치되어 있고, 관람정은 동궐도를 그린
순조 24~30년간에는 지어지지 않고 그 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승재정(勝在亭) 동남쪽 관람지 기슭에 있는
아름드리 밤나무의 그늘이 넓게 드리웠다.
밤나무와 승재정
- 밤나무는 밤을 심으면 십수년이 지나가도 밤의 겉껍질이 썩지 않고
싹이 터서 근본을 잃지 않는 나무라고 귀하게 여겨 종묘나 사당에 모시는
위패를 만들 때에 이 밤나무로 만든 얇은 판재를 많이 썼다.
승재정 :
창덕궁의 후원 반도지(半島池)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정면 1칸, 측면 1칸에다 겹처마에 사모지붕을 한 작고 간결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각 칸마다 창호를 달았으며 살창이 독특한 문양을 가지고 있다.
정자의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승재정이 언제 건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카테고리[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승재정 [昌德宮 勝在亭]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승재정 [昌德宮 勝在亭] (두산백과)
관람정(觀纜亭)
- 한반도의 모양을 닮았다는 반도지(半島池)에 있는 정자이다.
1820년 경에 제작된 조선시대 궁궐을 묘사한 동궐도(東闕圖)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자의 모양은 부채꼴 선형(扇形)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으로 매우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건물의 일부가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며 6개의 원주(圓柱)를 세우고 원주마다
주련(柱聯)을 달았으며 난간을 돌렸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추녀마루 6개가 각각 3개씩
모였으며 그 사이에 용마루를 설치하는 양식을 취하였다.
건축적이기보다 공예적인 수법을 많이 구사한 정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관람정 [昌德宮觀纜亭] (두산백과)
관람지 서쪽 기슭에 승재정 앞에 서있는 아름드리 밤나무와 그림자
관람정 남쪽의 관람지 동쪽 기슭에 핀 붓꽃
- 정자나 집 주변에 심는 붓꽃은 남색의 꽃잎이 짙은 하늘색을 닮아
초여름날을 시원하게 해주는 시각적인 효과도 있으나,
붓꽃의 꽃봉오리가 글씨를 쓰는 모필(毛筆)을 닮아서 늘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고 장래 명문장가가 되라는 기원을 담고 있는 조경식물이다.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과 배경의 육각정인 존덕정 그리고 폄우사(砭愚榭)
폄우사 : 창덕궁 후원의 존덕정 서쪽에 있다.
‘폄우(砭愚)’란 ‘어리석음을 고친다’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1827년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고, 정조 때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궐도>에는 ‘ㄱ’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一’자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온돌방 2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된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이며
마루 쪽은 정면과 측면을 개방하여 평난간을 둘렀다.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댄 초익공 형식의 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덕궁 폄우사 [昌德宮砭愚榭] (두산백과)
숙선옹주의 다시(茶詩)
매화나무 집에서
늦도록
차를 마시니
오동나무
난간에 깃든
새가운다
누가
옥피리 소리를
듣는가
솔숲 사이에서
푸른 샘이
솟는다
---- 숙선옹주의 차시를 다향과묵향이 적다 ----
숙선옹주는 정조대왕의 딸이며 또한 그 유명한 홍현주의 부인이다.
홍현주가 누구인가! 당대의 내노라하는 초의선사와 다산과
완당과
함께 차를 즐기며 인생을 논한 다인의 대가이다.
숙선옹주의 시어머니가(홍현주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버금가는
영수갑
서씨이다
숙선옹주가 대청마루에서 차 한잔 마실때 노을이 지는 초저녁인 것 같다
서방님은 차를 얻으러 대흥사 초의스님께
가셔서 계시지 아니함에
님을 그리며 차를 마시는데 대청마루 문이 활짝 열리어져있으며
뒷뜰에 매화나무와 오동나무가 있었나 보다
그 오동나무에 집을 짖고 사는 새도 때가되어 제집 찾아 오는구나
그런데 어디선가 그냥피리도 아니고 옥피리 소리가 들려오니
차향기와 함께 크~~~~ 차맛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차맛이 소나무 밭에서 마치 푸른샘이 솟는것 같은 기분이로구나
- 차인(茶人) 복합커뮤니티 <다헌정> 다향과 묵향님의 글 중에서
*** 숙선옹주와 홍현주의 묘소는 양주시 회암사 앞에 있다가
신시가지개발로 인하여 고양시 서오릉지구로 이장하였는 바,
뜻있는 역사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일이다.
문화재란 원래에 있던 곳에서 그 가치를 더욱 발휘하게 되고
신시가지일수록 획일적인 도시계획 구획보다는 시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녹지공간으로 이 숙선옹주 부부의
묘소 만큼 휼륭한 공간을 찾기가 어려울 텐데......
경제성과 획일주의가 낳은 단견들이 쌓여서 도시개발이 끝나면
베드타운 위주의 삭막한 공간이 되고, 이러한 경제성과제일주의가
모여서 개발이 끝나고 일정기간이 흐른 후 대형사고가 야기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당국자들과 도시계획 입안과 설계관계자들이
하루 빨리 깨닫기를 바란다.
****숙선옹주의 다시(茶詩) 한편을 더 소개한다.
우연히 읊다(偶吟)
숙선옹주(淑善翁主, 1793~1836)
윤번좌청태 潤邊坐靑苔 시냇가 푸른 이끼 낀 돌에 걸터앉아
팽다소송엽 烹茶燒松葉 솔잎 불사르며 차를 달인다.
경배복음시 傾盃復吟詩 찻잔을 기울이며 시를 다시 읊노라니
화간희백접 花間戱白蝶 꽃 사이로 흰나비가 노니누나.
- 출전 : < 선언실권, 宣言室券 >
정조의 부마인 해거도인 홍현주(海居道人 洪顯周)가 초파일에
집집마다 여자의 숫자대로 지붕 위 장대 끝에 초롱을 매달고
관등놀이를 하며 관등연을 베푸는 관등절(觀燈節)을 묘사한 시를 소개한다.
해거도인 홍현주는 초의선사가 이 해거도인을 위하여 <동다송 東茶頌>을
지은 것이라는 것을 동다송 서문에서 밝히고 있을 정도로 조선조 후기의 차문화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역활을 한 다인(茶人)이다.
남산산장의 관등절날 저녁에 南莊燈夕
홍현주 (洪顯周 , 1793~1865)
만호등초상 萬戶燈初上 일만집의 초롱불 막 피어 오르니
흔연객도계 欣然客到階 기뻐하는 나그네 계단에 이르네
생가하처비 笙歌何處沸 생황소리 그 어느 곳에선가 끓어오르고
준연차한배 樽硯此閒排 술통과 벼루 여기에 한가로이 물리친다.
정좌심상옥 靜坐尋常屋 여염집을 찾아들어 고요히 앉아
평림십이가 平臨十二街 열두 거리를 평화롭게 바라보네
경간홍소별 更看紅燒別 붉은 연등 불빛 다시 살펴보며
다정자고시 茶鼎煮枯柴 차솥에 마른 섶 지펴 차를 달이네...
- 송재소, 유홍준 외 4인 共著 < 한국의 차문화 천년 1권>
- 조선 후기의 차문화 詩에서 발췌 ,
돌베개, 2009년 6월 발간
보주형 정료대(寶柱形 庭瞭臺) : 복앙련형 주두 화사석(複仰蓮形 柱頭 火捨石)에 복연엽형(覆蓮葉形)
기둥하부를 갖는 정교한 조각 솜씨가 뛰어난 작품이다.
사각기단 위에 팔각기단부과 기둥부의 삼원상(三圓狀) 그리고 연주문(連珠紋) 등을
돋을새김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정료대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큰 사찰에 있는
오륜탑(五輪搭)을 보는 느낌을 준다.
***** 오륜탑 :
정료대의 복앙련형 주두의 윗면에 사각의 구멍이 뚫려져 있어서 관솔 뿐만 아니라
등유를 부어 불을 켤 수 있게 하였다.
대개 궁궐에서 쓰는 등유는 대개 열매나 씨앗에서 짠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였고,
특별한 경우에는 쉬나무의 씨앗에서 짠 그으름이 없는 쉬나무기름을 사용하였다.
쉬나무는 창경궁에서 종묘로 연결되는 육교 앞 문 좌우로 몇그루가 보인다.
연지 옆에 정자를 짓고 두 기둥 초석은 연못 속에다 세우는 것은
지구의 자전의 영향을 상쇄시킬 수 있도록 연지의 수면에 반사되는
별자리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함이다.
이때에 연못 둑에 있는 나무나 조경석들을 가로 세로로 연결하는 가상의 선을
천구(天球)의 경위도선으로 삼아 천문을 관찰하면 하늘을 바로 올려다 보는
것보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쉽다. 이러한 천문관측 목적 때문에
정자가 있는 연못에는 연꽃을 빽빽하게 밀식하지 아니하고 경위도를 파악하기
용이하게 화분에 심어 일정한 간격으로 가라 앉혔다.
이러한 천문관측 목적 때문에 연지의 주위 테두리는 사각인 방형(方形)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고 또한 주간의 조경상 목적이나 삼신산(三神山) 사상으로
연지에 석가산(石假山)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천원지방형(天圓地方形)
연못이 우리 전통조경양식으로 굳어진 것이지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
라는 사상 때문에 천원지방형 연못을 판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북방유목민 출신의 동이족은 파미르 고원에서부터 동쪽으로 이동할 때나
유목생활 중에 천문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였고, 그 실례는 고구려에 만들어진
석각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등을 통하여서 알 수 있다.
최근에 천문학자들이 이 고구려천문도에 나타난 별자리들을 역추적하여 관측지를
계산한 결과 북위 39도선으로 그 관측지는 이북의 평양이나 집안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근처에 있는 일대로, 고조선의 첫도읍지였던 평양은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으로, 고구려의 처음 도읍지 평양은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으로 소장파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졌다.
따라서 위의 소장파역사학자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관측점은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으로 추정되며, 이는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고천문학을 이용한 관측점의 분석과도 일치점이 있다.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그리고 28수
조선조 태조 때, 고구려의 천문도를 복원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이 천문도 석각본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쟁 중에 강물에 빠져 없어졌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탁본(印本)을 지닌 사람 또한 없어지고 말았다.
전하(태조 이성계)께서 (조선의) 임금이 된 초기에,
잃어버렸던 천문도를 바친 자가 있어 전하께서는 그것을 보물처럼 중히 여겼다.
(右天文圖石本舊在平壤城因兵亂于江而失之歲月旣久其印本之在者亦絶無矣
惟我殿下受命之初有以一本投進者殿下寶重之)
- 권근의 [양촌집(陽村集)] 천문도시(天文圖詩), [대동야승(大東野乘)]-
<자미원 하늘엔 우리 조상의 별이 총총해>
천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 조상이 고대에 천문학의 선진국이라고 말한다.
우리 조상이 고대에 천문을 살펴 제사를 지냈다는 말이다.
제사의 대상으로 삼은 별이 북극오성(北極五星: 작은곰별자리)과 북두칠성이었다.
이들 별은 우주를 주재하는 신으로 보았고, 우리 조상들이 이들 별에서 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북극오성엔 우주의 중심에 떠 있는 북극성이 있고, 이 북극성과 일렬로
황후(皇后), 서자(庶子), 천제(天帝), 태자(太子)라는 별들이 나란히 서 있다.
우리 선조는 언제부터인가 민족의 기원을 이들 별자리에서 찾았다.
황하유역에 살면서 동양권에서 처음 천문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삼국유사나 한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신화’는 민족의 기원을 이들 별에서
찾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북극성은 천주(天樞)라고 하는데 우주의 주재신을 상징하는 별이다.
황후는 곰할머니인 웅녀(熊女), 서자는 서자한웅(庶子桓雄), 천제는 한인천제(桓因天帝)를
상징한다.
북극오성은 임금이 계시는 구중궁궐에 해당하는 별이고 북두칠성은 정승판서가
나라 일을 살피는 조정을 상징하는 별이다. 이 별이 우리의 별임을 중국의 최고 천문서인
보천가(步天歌)나 중국의 사서(史書)인 진서 천문지(晋書 天文志)에서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최고 천문서인 보천가에서 북두칠성을 우리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최초로 쓰여진
보천가(아마 후대로 내려오면서 중원을 통일한 한족에 의하여 첨삭이나 변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에서 ‘삼한(三韓)의 주인이 청구칠흑자(靑丘七黑子)’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북두칠성을 우리조상의 별로 보고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진서천문지에서도 28수의 끝별 자리인 진성(軫星) 분야에 청구칠성이 속해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우리의 역사서인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 문신 李承休 지음)는
고구려가 일어난 것을 북두칠성이 일어난 것에 비유하고 있다.
- 중략 -
한글학자인 한갑수 선생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1971년 당시 주 이태리
문덕주 대사로부터 주선을 받아서 이태리 정부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이태리 관광장관이며 세계적인 대석학인 자코모 박사로부터 “솟대”를 비롯한
11가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를 설명해 주자 자코모 박사가 2시간이나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 후
“코리아 당신의 나라가 세계에서 단독으로 최고 선진국입니다. 왜냐 면
당신 나라가 확실히 세계에서 제일 먼저 절대자를 모신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희랍사람이 아니라 한국이 단독으로 세계에서 제일
선진국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나의 학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 조상은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알려주기 4000년 전(BC 4000)에
절대자 하느님을 먼저 알고 있었으며, 고대 이집트인들 보다 2세기 반에서
2세기 전에 황하 연안에서 인류문명을 싹 틔었다. 음력을 BC 2357년에
만들었는 데 지금까지 1/100의 오차도 없어 수정을 한적이 없었고,
이 당시에 황하유역에는 중국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자코모 박사가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으로 미루어 우리 선조가 황하 유역에서 현재 중국의 천문도로
알려진 천문도의 원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 노중평 님의 <자미원 하늘엔 우리 조상의 별이 총총해>에서 발췌
존덕정(尊德亭)과 관람지 권역에서 유일한 맞배지붕형 건물인 폄우사(砭愚榭)
- 폄우사에는 사분합 들문이 있는 우물마루 대청마루칸과 온돌이 있는
내실 한칸이 있어서 날씨가 궂은 날이나 겨울철에도 밤늦게 까지 인근의
관람정, 존덕정과 승재정에서 책을 읽거나 천문을 공부하다가
식은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장치를 배려하고 있다.
밤이나 궂은 날씨에 습기에 젖기 쉬운 한지로 만든 각종 서책이나 천문도,
각종 시첩이나 시서화두루마리(詩書畵捲)을 보관하고 말리는 용도로도
이용되었다.
존덕정으로 건너가는 아치형 석교 건너편에도 네모난 정료대가 하나 더
배치되어 있는 데, 밤늦게 까지 천문공부나 시회(詩會) 등을 하다가
몸을 녹이려고 석교를 건너 다닐 때, 안전한 이동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이 사각의 정료대 윗면에 있는 화사석(火捨石) 부의 사각으로 파진 등곽(燈槨)이
건너편에 있는 보주형(寶柱形) 정료대의 것 보다 훨씬 크고 정료대의 높이가
낮으막한 것으로 보아 이 사각 정료대가 주조명시설이고 보주형 정료대가
장식성이 강한 보조 조명시설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의 다시(茶詩)>
증 인 (贈 人)
- 다실에서 시경(詩經)을 읽다가,
부친 장조황제(莊祖皇帝 , 사도세자)를 그리며 짓다.
晴天麗日動遊絲하니 청천여일동유사 맑은 하늘 고운 햇볕 아래 거문고를 타고 싶어지니
景物媚人總可詩로구나 경천미인총가시 아름다운 경치 아첨하는 사람 모두 詩로구나!!
漏永銅壺觀理夜하는데 누영동호관리야 물시계와 구리 찻주전차를 바라보니 밤이 깊어 가는 데
波淸太液講經時하도다 파청태액강경시 맑은 파도 일렁이는 차 마시니 경연이 따로 없도다!!
徽醺乍喜茶烟細 하고 휘훈사희다연세 약간 졸리우나 가는 차연기 잠시 나를 기쁘게 하고
久坐還隨鶴步移 하네 구좌환수학보이 오래 앉아 있으니 학의 걸음처럼 한바퀴 돌아보고 싶네
悵望春明門外路 하나니 창망춘명문외로 밝은 봄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노라니
思君不見倍吾思 로구나 사군불견배오사 뵈올 수 없는 부황(父皇)이라 그리웁기 한량없구나
- 최지영 著 <조선 왕궁과 사림 士林의 다도>에서 발췌,
민속원, 2009년 7월 발간
존덕정의 두기둥 초석이 존덕지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연못에서 노니는 청둥오리들....
존덕정(尊悳亭)과 은행나무
창덕궁 후원 반도지에 있는 정자로, 인조 22년(1644)에 지어졌다.
육각형으로 되어 있어 처음에는 육면정이라고 불리다가 후에 존덕정으로 바뀌었다.
천장은 전체적으로 육각의 형태에 안쪽 가운데에 다시 육각의 반자를 둔 구조이며,
천정부에 화려하게 그려진 청룡황룡도가 위엄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존덕정 지붕 안 북쪽에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라는 정조의 글이 새겨진 나무판이 걸려있다.
정조의 호이기도 한 이 문구는 ‘세상의 모든 시냇물이 품고 있는 밝은 달’이란 뜻으로,
정조 자신이 만백성을 골고루 보살피는 절대 군주로서 신하들에게도 강력한 충성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왕의 권위와 자신감을 보여준다.
- 다음 문화유산 자료 중에서
궁궐 이야기.....창덕궁 [관람정 권역]
12월 21, 2010 | Article Posted By - Bruce, Seoul
Image via Wikipedia
궁궐 이야기....창덕궁 [관란정 권역]
http://blogs.afterabc.co.kr/bruce/
11. 관람정觀纜亭 권역
11-h-1 관람정觀纜亭
위치와 연혁 : 일명 반도지(半島池) 가에 놓인 부채꼴 모양의 정자이다. 『궁궐지』에는 선자정(扇子亭)이라고 나와 있다.
『동궐도』에는 관람정이 보이지 않고, 반도지 또한 두
개의 방형 연못과 한 개의 원형 연못으로 나뉘어 있다. 한편 순종 때 그려진 『동궐도형』에는 연못이 호리병 모양으로 합해져 있다. 아마 이때에도
배를 띄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궐도형』이 그려진 이후, 즉 순종 때 일제 강점기에 반도 형태의 연못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뜻풀이 : '관람(觀纜)'은 '닻줄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뱃놀이를 구경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다. 람(纜)은 닻줄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뱃놀이를 의미한다.
제작 정보 : 서체는
행서이다.
11-j-2
존덕정尊德亭의 주련
위치와 연혁 : 관람정이 있는 연못을 내려다 보는 언덕에 있으며 1644(인조 22)년에 세웠다. 『궁궐지』에 의하면 존덕정 옆에 반월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반월지가 지금의 반도지로 변형된 듯하다. 원래는 육면정으로 불렀으나 나중에 존덕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숙종이 존덕정과 관련한 친필 시 등을 여기에 걸기도 했으며, 선조와 인조의 어필도 이곳 존덕정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헌종 연간의 존덕정 현판은 헌종의 어필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존덕정의 내부는 매우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 육모정의 가운데는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황룡과 청룡이 희롱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 정자의 격식이 상당히 높았음을 보여 준다.
존덕정 북쪽 창방에는 정조(1752~1800년)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가 나무판에 새겨져 있다. 1)
뜻풀이 :
(1) 盛世娛遊化日長(성세오유화일장)
태평성세에 즐겁게 놀며 덕화(德化)의 날은 기니,
(2) 群生咸若春風暢(군생함약춘풍창)
온갖 백성 교화되어 봄바람 화창하네.
임금의 교화가 잘 이루어진 세상에서 백성들이 태평한 삶을 누리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덕화는 옳지 못한 사람을 덕으로 감화시키는 것이고, 함약(咸若)은 제왕의 교화(敎化)를 칭송하는 말이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서 "?, 咸若時, 惟帝其難之(아, 너의 말이 옳으나 다 이와 같이 함은 요 임금도 어렵게 여기셨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뜻풀이 :
(3) 庶俗一令趨壽域(서속일령추수역)
뭇 백성들 한결같이 태평성대로 나아가게 하고,
(4) 從官皆許宴蓬山(종관개허연봉산)
근신(近臣)들도 모두가 봉래산 잔치에 허락 받았네.
정치가 잘 이루어져 백성들이 편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어울리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수역(壽域)은 태평한 세상을 뜻한다.
뜻풀이 :
(5) 艶日綺羅香上苑(염일기라향상원)
고운 봄날 비단 치마는 상림원(上林苑)에 향그럽고,
(6) 沸天簫鼓動瑤臺(비천소고동요대)
하늘까지 치솟는 피리소리·북소리는 요대(瑤臺)를 뒤흔드네.
궁궐 후원에서 즐겁게 놀이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상림원은 한나라 때 임금의
동산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궁궐의 후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상림원은 원래 진(秦)나라 때도 있었으나 황폐해진 것을 한 무제(武帝)가 수복하여
확장시켰으므로 상림원은 주로 한나라 궁궐을 일컫는다. 요대는 전설 속의 신녀(神女)가 산다는 누대로 아름다운 누대를 뜻한다. 비단 치마는
궁녀들이 입고 있는 실제의 치마일 수도 있고, 후원에 난만하게 피어 있는 꽃잎을 비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송나라 왕조(王操)의
「낙양춘(洛陽春)」<원전 1> 중 경련(頸聯)에서 따 온 구절이다. 왕조는 송나라 때 강남의 문인으로 자는
정미(正美)이다.
11-h-3 승재정勝在亭
위치와 연혁 : 폄우사(?愚?) 남쪽의 가파른 언덕 위에서
관람정을 굽어보고 있는 정자이다. 연경당 뒤편에 있는 농수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1907년 8월에 순종이 즉위하고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그 해 10월부터 창덕궁 수리에 들어갔는데 이 때 관람정 등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뜻풀이 : '승재(勝在)'는 '빼어난 경치가 있다'는 뜻이다. '승(勝)'은
'아름답고 빼어난 경치나 고적(古跡)'을 가리킨다.
11-j-3 승재정勝在亭의 주련
뜻풀이 :
(1) 龍蛇亂?千章木(용사난획천장목)
용과 뱀은 천 그루 거목(巨木)을 어지러이 휘감았고,
(2) 環?爭鳴百道泉(환패쟁명백도천)
패옥(?玉)들은 백 갈래 샘물을 울리는구나.
용과 뱀처럼 구불구불 감고 올라간 넝쿨이 수많은 거목들을 마구 휘감고, 여러줄기의 샘물이 옥으로 만든 보물들이 울리는 듯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정경을 묘사했다. '천장목(千章木)'은 '천 그루의 나무', 즉 수많은 나무를 뜻한다.
장(章)은 큰 나무를 세는 단위이다. 임천(林泉)의 승경(勝景)을 묘사한 것이다.
(3) 披香殿上留朱輦(피향전상류주련)
피향전(披香殿) 위에서 임금 수레 머무니,
(4) 太液池邊送玉杯(태액지변송옥배)
태액지(太液池) 연못가에 옥 술잔을 보내오네.
연못가의 전각에 임금의 수레가 행차하여 주연(酒宴)을 베푸는 모습을 그렸다. 왕안석(王安石, 1021~1086년) 2)의 「화어제상화조어(和御製賞花釣魚: 임금이 지은 「상화조어」에 화답하다)」<원전 2> 중 함련(?聯)에서 따 왔다. '피향전'과 '태액지'는 원래 한나라의 궁전과 연못 이름인데, 후대에 관습적으로 궁궐안의 전각과 연못을 일컬을 때 두루 쓰였다. 3) '피향(披香)'은 향기가 무럭무럭 풍긴다는 뜻이다.
11-h-4
폄우사
위치와 연혁 : 존덕정의 서남쪽 산기슭 언덕에 있는 정자다. 효명세자가 들러서 독서하던 곳이다. 건립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궁궐지』에 정조가 지은 「폄우사사영(砭愚榭四詠)」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80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궐도」에는 폄우사 정면 1칸에 직각 방향으로 담장이 이어져 맞배지붕의 세 칸짜리 건물이 있다.
뜻풀이 : '폄우(砭愚)'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말로 쓰인다. '폄(砭)'은 '돌침'인데, '돌침을 놓아 병을 치료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북송의 성리학자인 장재(張載, 1020~1077년) 4)가 글을 가르치던 서원(書院)의 동쪽 창문에 「폄우(砭愚)」라는 제목의 글을, 서쪽 창문에 「정완(訂頑)」5)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 붙여 경계의 지침으로 삼은 적이 있다. 그는 나중에 이를 「동명(東銘)」과 「서명(西銘)」으로 바꾸었다.
'사(榭)'자를 '활터에 세운 정자'로 풀이하고 폄우사를 사정(射亭), 즉
활터에 세운 정자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글자는 높은 터에 지은 목재 건물을 뜻한다. 『서경』에서부터 용례가 보이는데
『서경』의 주석에 의하 면 흙이 높은 곳을 '臺(대)'라고 하고 나무가 있는 곳을 '榭(사)'라고 한다고 하였다.<원전 3> 그러나
후대에는 그런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누각이나 누대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이 글자에서 오른쪽 '射(사)'는 형성(形聲) 문자에서 단순히 음을
나타내는 부분이며 '활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11-j-4 폄우사의 주련
뜻풀이 :
(1) 南苑草芳眠錦雉(남원초방면금치)
남쪽 동산에 풀 고우니 아름다운 꿩이 졸고 있고,
(2) 夾城雲㬉下霓旄(협성운난하예모)
협성(夾城)에 구름 따뜻하니 무지개가 내려오네.
고운 풀밭 위에서 아름다운 꿩이 한가롭게 졸고 있는 풍경과 따뜻한 봄날 피어 오르는 구름을 배경으로 무지개가 걸린 성곽의 모습을 묘사했다. 협성은 양변을 높은 담장으로 쌓아 그 사이로 통행하게 만든 길, 또는 성곽의 바깥 둘레에 다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예모(霓?)'는 무지개라는 뜻이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 6)이 지은 「장안잡제장구(長安雜題長句)」 육수(六首) 중 제 3수<원전 4>의 함련(?聯)에서 따왔다.
(3) 絶壁過雲開錦繡(절벽과운개금수)
절벽에 구름이 지나가니 수 놓은 비단이 펼쳐지고,
(4) 疎松隔水奏笙簧(소송격수주생황)
성긴 솔이 물 건너 편에서 생황을 연주하네.
자연이 만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과, 생황
소리처럼 들리는 운치 있는 솔바람 소리를 묘사하였다. 두보 7)의 시 「칠월일일제종명부수루(七月一日題終明府水樓)」<원전 5> 중 제
1수의 경련(頸聯)에서 따온 구절이다.
(5) 林下水聲喧笑語(임하수성훤소어)
숲 속 아래 물 소리는 웃음 소리인 양 떠들썩하고,
(6) 巖間樹色隱房櫳(암간수색은방롱)
바위 사이 나무 빛깔은 방 창살을 숨기고 있네.
물 소리가 웃음 소리처럼 즐겁게 들리고, 바위 사이에 자라난 나무들 속에 거처하는 집이 보일락말락 숨어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숲 속의 즐겁고도 그윽한 생활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당나라 문인 왕유 8)의 작품으로, 「칙차기왕구성궁피서응교(?借岐王九成宮避暑應敎)」<원전 6> 중 경련에서 따온 구절이다.
앞 구절의 '笑語(소어)'가 '語笑(어소)'로, 뒤 구절의 '巖間(암간)'이 '巖前(암전)'으로 된 곳도 많다.
(7) 華閣條風初拂柳(화각조풍초불류)
아름다운 누각에 한 줄기 바람은 버들을 막 스치고,
(8) 銀塘曲水半含苔(은당곡수반함태)
은빛 연못 물굽이에는 이끼 반쯤 머금었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묘사한 시구이다. 화각(華閣)은 단청을 칠해 그림같이 아름다운 누각을 뜻한다.
이는 당나라 시인 무평일(武平一, ?~741년) 9)의 「봉화입춘내출채화수응제(奉和立春內出綵花樹應制)」<원전 7> 중 경련에서 따온
구절이다.
11-h-5 빙옥지氷玉池
위치와 연혁 : 1688(숙종 14)년에 천수정(淺愁亭)의 터에 청심정(淸心亭)을 짓고 그 앞의 바위를 파서 조그마한 돌 연못을 만들었다. 이것을 빙옥지라 한다. 현재 청심정의 현판은 걸려 있지 않다.
뜻풀이 : '빙옥(氷玉)'은 '얼음과 옥'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또 '빙옥'은 고상하고 정결한 인품을 비유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빙자옥질(氷姿玉質)'은 얼음이나 옥같이 맑고 깨끗한 자질, '빙기옥골(氷肌玉骨)'은 얼음같이 깨끗한 살결과 옥같은 뼈대라는 뜻으로 미인 또는 매화를 형용한다.
제작 정보 : 청심정 앞에는 돌 연못을 바라보는 거북의 조각상이 있는데, 그 거북의 등에 새겨진 금석문이다. 윗부분에 작은 글씨로 '御筆(어필)'이라고 되어있어 임금의 글씨임을 나타낸다.
11-j-6
청심정淸心亭의 주련
위치와 연혁 : 존덕정 뒤쪽 산 중턱에 지은 네모난 정자이다. 1688(숙종 14)년에 천수정 터에 청심정을 짓고, 그 앞의 바위를 네모나게 파서 빙옥지를 만들어 두었다. 현재 청심정에는 현판은 걸려 있지 않고 네 기둥에 주련이 걸려 있다.
뜻풀이 :
(1) 松排山面千重翠(송배산면천중취)
산허리에 늘어선 솔은 천 겹으로 푸르고
(2) 月點波心一顆珠(월점파심일과주)
물 속에 비친 달은 한 덩이 구슬이로다.
청심정이 위치한 공간을 묘사하고 있다. 위 구절은 청심정이 있는 산중턱에 소나무가 무성함을 설명했고, 아래 구절은 정자 앞에 있는 네모난 돌 연못인 빙옥지에 달이 비치는 정경을 표현하였다.
이 구절은 본래 당나라 백거이 10)의 칠언 율시 「춘제호상(春題湖上)」<원전 8>의 함련 두 구절을 딴 것이다.
(3) 巖桂高凝仙掌露(암계고응선장로)
바위의 계수나무에는 높이 선장(仙掌)의 이슬이 맺히고
(4) 苑蘭淸暎玉壺氷(원란청영옥호빙)
동산의 난초엔 맑게 옥병의 얼음이 비치네.
위 구절은 청심정 주위 바위에 자라는 계수나무에 신선의 이슬이 맺혀, 이
이슬을 먹으면 정자의 주인 또한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암시를 한 것이다. 선장은 신선의 손바닥을 뜻한다. 아래 구절은 정자 주인의 정신 세계가
높고 맑음을 '난(蘭)'과 '옥호빙(玉壺氷)'이란 시어를 빌려 표현한 것이다. 옥호빙이란 옥병 속의 얼음이란 뜻으로 정신 세계가 깨끗함을
상징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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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과 번역은 서향각의 편액 참조.
2) 왕안석은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자는 개보(介甫),호는 반산(半山)이다. 부국강병을 위한 신법(新法)을 제정하여 실시하였고, 뛰어난 산문과 서정시를 남겨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3) 창덕궁에서는 애련지 연못 가에 '태액'이라는 전서가 있다. 태액의 자세한 풀이는 9-h-8 태액 참조.
4) 장재의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이다.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조화시켜 우주에 대한 일원론적 시야를 설파하였다.
5) 정완은 어리석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6) 두목에 대해서는 10-j-1 연경당의 주련 참조.
7) 두보에 대해서는 11-h-1 관람정 참조.
8) 왕유에 대해서는 7-j-10 한정당 기둥의 주련 참조.
9) 무평일은 당나라의 시인으로, 원래의 이름은 견(甄)인데 평일(平一)이라는 자로 더 유명하다.
10) 백거이에 대해서는 9-h-8 태액 참조.
<원전 1> 왕조, 「낙양춘」, "帝里山河景莫裁 就中春色似先來 暖融殘雪當時盡 花得東風一夜開?日綺羅香上苑 沸天簫?動瑤臺 芳心只恐煙花暮 閒立高樓望幾回"
<원전 2> 왕안석, 「화어제상화조어」, " 幄晴雲拂曉開 傳呼仙仗九天來 披香殿上留朱輦 太液池邊送玉杯 宿蘂暖含風浩蕩 ?鱗淸映日徘徊宸章獨與春爭麗 恩許?歌豈易陪."
<원전 3> 『서경』 「태서(泰誓) 상」, "惟宮室臺?陂池侈服, 以殘害于爾萬姓"; 이에 대한 채침의주(註), "土高曰臺, 有木曰?."* 이덕수, 『新궁궐기행』(대원사, 2004), 345쪽.
<원전 4> 두목, 「장안잡제장구」(제 3수) "雨晴九陌鋪江練 嵐嫩千峰疊海濤 南苑草芳眠錦雉 夾城雲暖下霓? 少年羈絡靑紋玉 遊女花簪紫?桃江碧柳深人盡醉 一瓢顔巷日空高."
<원전 5> 두보, 「칠월일일제종명부수루」(제 1수) "高棟曾軒已自?, 秋風此日灑衣裳. ?然欲下陰山雪, 不去非無漢署香. 絶壁過雲開錦繡,疏松夾水奏笙簧. 看君宜著王喬履, 眞賜還疑出尙方."
<원전 6> 왕유, 「칙차기왕구성궁피서응교」 "帝子遠辭丹鳳闕 天書遙借翠微宮 隔窓雲霧生衣上卷?山泉入鏡中 林下水聲喧笑語 巖間樹色隱房? 仙家未必能勝此 何事吹笙向碧空."
<원전 7> 무평일, 「봉화입춘내출채화수응제」,"?輅靑?下帝臺 東郊上苑望春來 黃鶯未解林間? 紅蘂先從殿裏開 ?閣條風初變柳 銀塘曲水半含苔 欣?睿藻光韶律 更促霞觴畏景催."
<원전 8> 백거이, 「춘제호상」, "湖上春來似?圖, 亂峯圍繞水平鋪. 松排山面千重翠, 月點波心一顆珠. 碧?線頭抽早稻, ?羅裙帶展新蒲. 未能抛得杭州去, 一半勾留是此湖."
- http://blogs.afterabc.co.kr/bruce/ 블루스 님의 글 중에서
*******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이동변천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있어서 아래에 소개하여 드릴까 합니다.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1. 머릿글
고구려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존재한다. 『한서지리지』의 현도군 속현 중에 이미 ‘고구려현’이 존재하였으며, 『신당서』에서는 『고려비기』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90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건국시기는 『삼국사기』등의 공식 기록인 기원전 37년보다 훨씬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심도있게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등의 공식 기록인 기원전 37년 건국하여 기원 후 668년 멸망하기까지 약 700여 년 동안 일어났던 고구려의 수도 변천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는 졸본성(BC 37년 ~ AD 3년)에서 건국하여, 국내성(AD 3년 ~ 209년), 환도성(AD 209년 ~ 247년), 평양성(AD 247 ~ 342년), 환도성(AD 342년 ~ 343년), 평양 동황성(AD 343년 ~ 427년), 평양성(AD 427년 ~ 586년), 장안성(AD 586년 ~ 668년) 등으로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수도 변천 과정은 고구려 역사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천도시기와 도읍의 위치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2. 본 글
고구려의 수도 변천과정의 큰 흐름을 보면 ‘고구려는 추모왕이 요동에서 개국하였으며, 산상왕 시절 ‘발기의 난’과 뒤이어 동천왕 시절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을 겪으면서 요동의 동쪽 천리 밖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장수왕 시절 서천하여 다시 요동으로 되돌아 왔으며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는 요동에서 시작하여 요동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추모왕이 나라를 연 졸본성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며,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遼陽市 일대이며,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 일대이다.
이제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고구려의 수도 위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러 수도들 중 특히 위에서 언급한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및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는 고구려 수도 변천사의 핵심이며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명확히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세 곳의 위치를 파악함으로써 기록이 부족한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도 유추할 수 있다. 참고로 관련사서들의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타베이스를 인용한다.
(1) 추모왕 졸본성
1) 도읍시기 : BC 37년 ~ AD 3년까지 40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
졸본성은 고구려 시대의 전천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의하면 위도 39도에서 40도 사이에 위치하였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시대의 요동군 요동성에 위치하며, 바닷가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졸본의 서쪽 성산城山 위에 위치하였다. 이 모든 조건들을 완벽하게 만족하는 곳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6회) <졸본성의 위치> 참조)
(2) 동천왕 평양성
1) 도읍시기 : AD 247 ~ 427년까지 180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遼陽市 일대
<사료 1>『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일대이다. 그러므로 하북성 요동의 동쪽 끝인 칠로도산七老圖山으로부터 동쪽 천리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부근이 된다(아래의 지도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과 주변 형세도’ 참조).
<사료 2>『후한서』 ‘군국지’에 유주 각 군의 위치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곡군 : 낙양 동북쪽 3,200리 요서군 : 낙양 동북쪽 3,300리 요동군 : 낙양 동북쪽 3,600리 현도군 : 낙양 동북쪽 4,000리 낙랑군 : 낙양 동북쪽 5,000리
『후한서』 ‘군국지’ 의 기록은 상곡군으로부터 요서군, 요동군, 현토군, 낙랑군의 상대적 위치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상곡군은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이다. 상곡군의 위치는 연나라 5군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므로 재야사학이든 통설이든 그 위치는 일치한다. 한나라 시절 상곡군의 치소는 저양현沮陽縣으로 대략 현 북경 서북쪽의 거용관 부근으로 비정된다. 위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상곡군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는 400리 이다. 그러므로 요동군 양평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일대 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1,000여리 물리치고 연5군인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상곡군에서 요동군이 1,000여리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또 중국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는 갈석산을 중심으로 연5군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 내용과 일치한다(『기주협우갈석도』는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2회>” 참조). 그러므로 고구려 시대의 요동군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통설에서 요동군 양평으로 비정하고 있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은 상곡군에서 2,000여리나 떨어져 있다.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위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요동군 치소인 양평에서 낙랑군 치소까지의 거리는 1,400리이다. 요동군 치소인 양평에서 요동군의 끝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 거리가 400여리 이므로, 결국 낙랑군의 치소는 요동의 동쪽 천리밖에 있었다. <사료 1>의 『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는 기록과 『후한서』 ‘군국지’의 낙랑군의 거리 기록이 일치한다.
<사료 3>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에 “동경요양부는 원래 조선 땅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조선으로 갔다. 그래서 그를 조선에 봉하였다(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 周武王 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하였다. 요나라 동경요양부는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이다. 『요사지리지』는 요령성 요양시 일대를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다음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천왕 평양성 기록과 일맥상통한다. 동천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료 4>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기록에 “21년(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전란으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왕험王險에 가서 도읍하였다’(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하였다.
<사료 종합> 『삼국지』『후한서』『양서』 등에 의하면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었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은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칠로도산七老圖山이 하북성 요동의 동쪽 경계이다. 그러므로 동천왕의 평양성은 칠로도산으로부터 천리 밖에 있는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가 된다. 또 『후한서』 ‘군국지’의 낙양으로부터 유주 각 군의 거리 기록에 따르면, 상곡군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의 거리가 400리이다. 그러므로 후한 시대의 요동군 양평이 대략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일대가 된다. 또 요동군 양평에서 낙랑군 치소까지 거리가 1,400리인데 요동군 양평에서 요동군의 끝인 칠로도산까지 거리가 400여리 이므로 결국 낙랑군 치소는 칠로도산에서 천여 리 동쪽에 위치하게 된다(위의 지도 ‘『삼국지』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과 주변 형세도’ 참조). 이는 『삼국지』『후한서』『양서』등에서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 『요사지리지』 ‘동경요양부’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동천왕의 평양성은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로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되었다. 마찬가지로 『후한서』 ‘군국지’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인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즉 『후한서』는 ‘동이열전 고구려’에서는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하였고, 동시에 ‘군국지’에서는 낙랑군이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는 것으로 기술하였다. 즉 『후한서』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동천왕의 평양성 시절, 한나라 낙랑군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평주에 속하였으므로 고구려의 수도가 위魏나라와 진晉나라의 영토가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장수왕의 평양성에서도 나타난다. 즉 한족의 사서들은 고구려의 평양성들을 한결같이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의 역사가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를 파악한 뒤에 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3) 장수왕 평양성
1) 도읍시기 : AD 427 ~ 668년까지 242년간 도읍
2) 도읍위치 :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 일대
<사료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의 기록에『15년(427)에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十五年 移都平壤)』하였다.
<사료 2> 『송서』는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로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이 고구려국은 현재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을 지배하고 있다(東夷高句驪國, 今治漢之遼東郡)』 『송서』 ‘고구려’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 이라 한다(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송서』 ‘백제’
위 『송서』 ‘고구려’ 기록에서 장수왕 시절의 수도 평양성이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송서』 ‘백제’ 기록은 고구려가 요동 동쪽 1천여 리 밖의 동천왕 평양성에서 요동군에 있는 장수왕 평양성으로 천도한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료 3>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출생지가 요동군 평양성으로 나온다.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 ...중략... 넓고도 신령스러운 바다여! 수많은 강물이 모이는 곳.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於廓靈海百川注焉東明之裔 寔爲朝鮮)』 『연남산묘지명』
『공의 성은 천이며 휘는 남생이고 자는 원덕으로서,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다(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 『연남생묘지명』
위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연남산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조선을 계승하였으며, 평양을 조선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 『연남생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료 4> 『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의하면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다 (高麗之地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수서』 ‘배구전’
『『당서』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지금의 해주).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한나라가 3군으로 나누어 다스렸다(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治三郡)』 『삼국유사』 ‘고조선’
『18년(607) 처음에 수양제가 계민의 장막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여 그와 더불어 황제를 만나 보았다. 황문시랑 배구가 황제를 설득하며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기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 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十八年初 焬帝之幸 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隠與之見帝 黄門侍郎 裴矩 說帝曰髙勾麗本 箕子所封之地 漢晉皆爲郡縣 今乃不臣別爲異域 先帝欲征之久矣但)』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사료 5>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대청광여도』『청국지지』 ‘연혁도’ 등에 고죽국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표기되어 있다(아래의 지도 ‘『당토명승도회』에 나타난 고죽국과 고조선성’ 참조)
<사료 종합> AD 462년 송나라 효무제 시대에 편찬된 사서인『송서』는 장수왕의 평양성에 대하여 한나라의 요동군 지역이며,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었던 동천왕의 평양성에서 서쪽으로 천리 이상 이동하여 한나라 요동군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내용을 잘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연남산묘지명』과 『연남생묘지명』은 고구려가 최후를 맞이한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의하면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땅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대청광여도』『청국지지』‘연혁도’ 등에 고죽국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수왕의 평양성은 한나라 시대의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였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동천왕의 평양성과 장수왕의 평양성은 거리가 동서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후한서』 ‘군국지’는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고, 위에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당서』 ‘배구전’은 장수왕의 평양성을 기자를 봉한 땅이자,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한족들의 사서는 고구려의 평양성들을 모두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술하였다.
(4) 고구려 시대 4곳의 평양성
고구려 시대에 4곳의 평양성이 있었다. 첫째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고조선 평양성, 둘째로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의 동천왕 평양성, 셋째로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의 장수왕 평양성, 넷째로 현 한반도 북한지역의 평양성이다.
앞에서 『연남산묘지명』에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東明之裔 寔爲朝鮮)”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조선을 계승한다는 뚜렷한 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여러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마다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누르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곳 평양성이 고조선의 왕검성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족의 역사서들은 이 4곳의 평양성마다 한나라 낙랑군 지역이라는 기록을 남겨 고구려 역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사서들에 나오는 한나라 낙랑군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알아야 고구려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① 고조선 평양성
고조선 평양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이다. 이곳은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었으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지였으며,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다(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5회>’ 참조). 고구려가 이곳을 평양성으로 삼았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정시 만성현의 연혁을 『중국백과사전』에서 살펴보면 만성현滿城縣의 옛 이름이 영락현永樂縣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락현 : 동위 흥화2년(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나누어 영락현을 설치하여, 낙랑군에 속하게 하고 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제 때 영락현을 창려군의 치소로 삼았다. 북주 때 영락현을 북평 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나라 개황3년(583년)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예속시켰다. 대업3년(607년)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여 영락현을 관할하였다. 당나라 무덕4년(621년) 영락현을 다시 역주에 소속시켰다. 천보원년(742년)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永乐县 :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중국백과사전』‘영락현’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동위 흥화2년(540년)에 영락현을 설치하고 낙랑군의 치소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현의 이름을 영락현으로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의 시호이다. 현의 이름에 광개토태왕의 시호를 사용한 것은 광개토태왕이 요동과 낙랑 등을 모두 회복하고 이곳을 평양성으로 삼아 거주한 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간접적인 증거라 하겠다. 마찬가지로 천보원년(742년)에 영락현을 만성현滿城縣으로 개명한 것도 이곳이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② 동천왕 평양성
동천왕 평양성은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이다. 산상왕과 동천왕 시절은 고구려에게 큰 시련의 시기였다. 고구려는 산상왕 시대에 ‘발기의 난’으로 나라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고구려의 서부지역이었던 하북성 요동이 모두 공손씨에게 넘어가고 고구려는 멀리 동쪽으로 천도하여 새로 나라를 세웠다(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3회>’ 참조). 그리고 뒤를 이은 동천왕 시절에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을 당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동천왕은 분열된 고구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과 평양성 천도를 합리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의 『삼국사기』 기록과 같이 동천왕의 평양성이 본래 고조선의 왕검성이었다는 설을 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1년(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그곳으로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그가 왕이 되어 왕검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했다(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조선의 왕검성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지이고,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스스로 동천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이라고 하였으므로, 한족의 역사가들은 동천왕의 평양성을 한나라 낙랑군이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고구려 역사의 대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본래 한나라 낙랑군이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로 동쪽으로 2천여 리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③ 장수왕 평양성
장수왕 평양성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이다. 장수왕은 선대의 광개토태왕이 산상왕 시절 ‘발기의 난’으로 잃어버렸던 요동을 다시 회복하였으므로, 고구려의 본래 고향인 요동군으로 되돌아가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다. 또한 요동군은 해양세력의 중심지로 대륙을 경영하는데 꼭 필요한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천도를 하기위해서는 180년 동안 동천왕 평양성에서 세력을 형성하였을 기득권층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하여,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야 말로 진정한 고조선의 왕검성지역이라는 설을 유포할 필요가 있었다.
위 『연남산묘지명』의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君諱男產遼東朝鮮人也)』는 기록처럼 당시의 고구려인들은 장수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조선성(왕검성)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위의『수서』『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서 수양제 시절의 황문시랑 배구裵矩의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조선 땅’으로 기록한 것도 장수왕의 평양성을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동천왕의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역사가들은 장수왕의 평양성도 한나라 낙랑군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본래 한나라 낙랑군이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④ 한반도 평양성 현 북한 평양지역은 상고시대 마한 또는 마조선의 수도였다. 그리고 대무신왕 15년(32)에 고구려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최씨 낙랑국의 수도였다. 『주서』『북사』『수서』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삼경三京을 두었는데, 평양성과 국내성과 한성漢城을 말한다. 현 북한 평양에는 ‘한성漢城’이라 새겨진 성벽각자가 발견되어, 평양지역은 고구려의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인 한성漢城으로 비정된다. (http://coo2.net/bbs/zboard.php?id=qna&no=2894 참조)
현 북한 평양지역이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주류세력들이 한반도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교가 성행하면서 기자로부터 정통성을 찾는 과정에서 북한 평양지역이 자연스럽게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북한 평양지역이 고조선의 왕검성이자 한나라 낙랑군으로 굳어진 배경에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일제는 한반도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반도는 옛날부터 한사군의 땅으로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유적‧유물들을 조작하여 식민지 역사관을 만들었고, 오늘날 주류사학계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주류사학계 스스로가 중국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5) 기타 고구려 수도
추모왕의 졸본성, 동천왕의 평양성, 장수왕의 평양성은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나머지 고구려 수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① 유리명왕 제1국내성
유리명왕의 제1국내성은 207년간(AD 3년 ~ 209년) 도읍하였으며, 도읍위치는 난하 중류의 현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寬城滿族自治縣 일대로 비정한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가. 졸본성에서 제사지낼 돼지가 달아나서 국내 위나암에서 찾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내성은 졸본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는 점.
나. 국내 위나암은 산수가 깊고 험준하며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험한 산과 큰 강물이 흐르는 지형이라는 점.
다. 유리명왕 28년(AD 9)에 부여 사신이 왔을 때 왕이 부여왕에게 회답하기를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 하였다. 국내성은 바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라.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세 아들인 남생, 남건, 남산이 대립하였을 때, 남생이 웅거한 성이 국내성이었다. 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당나라 황제가 남생에게 특진特進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남생을 현도군공으로 봉한 것은 남생이 웅거한 국내성이 현도군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 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사료들을 종합하면 국내성은 현 중국 하북성의 난하 중류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마침 그곳에 해발 1,977M의 도산都山이라는 산이 있다. 도읍이 있었던 산이라는 의미이다. 이 도산都山 일대를 고구려의 제1국내성(제1환도성)으로 비정한다.
② 산상왕 환도성(제2국내성)
산상왕의 환도성(제2국내성)은 38년간(AD 209년 ~ 247년) 도읍하였으며, 도읍위치는 현 중국 요령성 조양시 일대로 비정한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괄지지』를 인용하여 “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인데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하였고,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지』 ‘위지동이전 동옥저’ 기록에 불내성不耐城은 단단대령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단단대령은 유리명왕의 제1국내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사이에 존재해야 하므로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을 나누는 칠로도산七老圖山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내성不耐城인 국내성과 인접한 환도성은 칠로도산七老圖山 동쪽으로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조양시 일대로 비정된다.
③ 평원왕 장안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긴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평양성이 곧 장안성이라고 하였다. 장수왕의 평양성과 평원왕의 장안성은 거의 비슷한 위치로 파악되므로 별도의 고증은 생략한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 리이다. 국도는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 일컫는다(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復有國內城·漢城, 並其都會之所, 其國中呼爲 「三京」)』『수서』 ‘고구려’
3. 마무리 글
지금까지 고구려의 수도변천 과정을 살펴보았다. 앞에서도 누차 언급한 바와같이 고구려 수도 변천사의 핵심은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및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를 올바로 파악하는 일이다. 이들 지역은 사서와 유적을 통하여 명확하게 그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추모왕의 졸본성은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위치하였다. 추모왕의 졸본성과 동천왕의 평양성 사이의 거리가 동서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장수왕의 평양성도 요동군에 위치하였으며, 동천왕의 평양성으로부터 서쪽으로 1천여 리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이와같이 고구려의 천도는 동서로 1천여 리 이상의 거리를 이동하였다.
그런데 통설의 고구려 수도 변천과정은 어떤가? 졸본성(요령성 환인지역)에서 국내성(요령성 집안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후 산상왕의 환도성과 동천왕의 평양성은 계속 국내성 지역을 맴돌고 있다. 여러 사서에서는 분명히 동천왕의 평양성은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천왕의 평양성이 계속 국내성(요령성 집안지역) 부근을 맴돌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통설에서 고구려 시대의 요동의 위치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삼국지』등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상실했을 때의 강역이 분명 사방 2천리라 하였다. 그런데 통설은 요동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으로 비정함으로써 요동 동쪽의 고구려 강역이 사방 1천리도 될 수 없게 되었다. 고구려의 강역이 1/4 이하로 축소된 것이다. 그로 인하여 동천왕의 평양성이 국내성지역에서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동할 공간이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송서』와 『연남생묘지명』을 참조하면, 장수왕의 평양성은 요동 동쪽 1천여 리에 있었던 동천왕의 평양성에서 서쪽으로 1천여 리 이상 이동하여 요동군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통설은 어떤가? 장수왕의 평양성이 뜬금없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고 한다. 한반도 평양은 통설을 따르더라도 한나라 낙랑군지역이다. 『연남생묘지명』에는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멸망 당시의 평양성 위치와 관련하여 『연남생묘지명』보다 더 확실한 유적은 없다. 그러므로 통설에서 장수왕 평양성을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한 것은 잘못이다. 아울러 통설에서 주장하는 모든 고구려 수도들은 사서와 유적들을 토대로 그 위치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고구려는 애초부터 통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요령성 환인지역 같은 첩첩산중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었다. 발해만을 배경으로 하는 해양세력의 중심지인 하북성 요동에서 건국하여 일찌감치 해양세력인 동이족의 대표주자로 부상하였다. 그리하여 북방 유목세력의 대표주자인 흉노족와 남방 농경세력의 대표주자인 한漢족과 더불어 대륙의 패권을 다툰 아시아의 강자였다. 이제 북방 유목세력과 남방 농경세력과 동방 해양세력 등 아시아 대륙의 3대 세력이 펼치는 흥미진진한 역사속으로 뱃머리를 돌린다.(다음호 계속) |
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 사람이 하늘이다
여러 마리가 아니라 오리 한쌍......
이로서도 시심(詩心)을 불러내기에는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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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 사람이 하늘이다
관람정에서 존덕정과 폄우사로 가는 아치형 석교(石橋)
존덕정과 줄기가 둘로 뻗은 금강송......
국수나무
국수나무 - 작은 꽃이 모여 있는 것이 휼륭한 밀원식물(蜜源植物)이 된다.
벌과 나비가 모여드는 것을 보면서 왕과 세자들은 이름없는 작은 풀꽃 - 민초(民草)들의
노고와 근면함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궁궐의 조경에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돌 하나에도 경관을 통한 배움과
정서 함양을 위한 숨은 배려들이 담겨져 있다.
누운주목나무
취규정(聚奎亭)
- 후원에서 다른 건물들에서 멀찍이 떨어진 언덕 위에 외따로 있어서
다른 당우(堂宇)에서 새어나오는 광해(光害) 없이 천문을 공부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정료대 등의 설치된 조명시설이 없다. 오직 이동 중에는 휴대용 초롱 등을 이용하고
이 취규정에서는 초롱의 불을 끈채로 홀로 밤하늘을 쳐다보며 천문을 익히기에
알맞는 장소이다. 물론 혼자서 독서를 하거나 사념에 잠기기에 좋은 곳이다.
관람정 권역에서 처럼 연지(蓮池)에 비친 수면반사 효과가 없이 직접
맨눈이나 관측용 망원경으로 천문을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관람지 권역이
초보용 천문교육장이라면, 이 취규정은 복습용 혹은 그 다음 단계의 천문
관측장소나 깊은 사색의 공간으로 휼륭한 곳이다.
취규정(聚奎亭)
이 정자는 인조 18년(1640)에 세운 정자로, 창덕궁 후원 존덕지에서
옥류천 쪽으로 가는 언덕 위에 서 있다. ‘학자들이 모인다’라는 뜻의
취규정(聚奎亭)은 휴식과 독서를 위한 공간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에 사방이 트인 초익공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한벌대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사다리형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엮었다. 정자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 중앙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다. 전면의 중앙 칸 외에는 모두 난간이 둘러져 있다.
때죽나무 - 가을에 까맣게 익는 열매는 가볍게 볶은 다음
기름을 짜서 등유로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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