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23. 08:04ㆍ들꽃다회
창덕궁 후원 뇌다회(雷茶會) - 셋
번개다회
20140516 맑음
옥류천(玉流川) 권역에서.........
창덕궁 안내도
.
- 기존에 소개된 창덕궁 후원 설명문(예)
옥류천 일원 안내판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 동궐도(東闕圖) 중 옥류천 권역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을 했고 가로 576cm 세로 273cm 이며 국보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작연대는 순조 26년에 지어져 순조 30년에 불타버린 환경전이 그려져
있고, 순조 31년에 착공하여 순조 34년에 중건된 통명전과 경복전은 건물이
없이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1826년~1828년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궁 안에 실재하던 모든 전당과 누정, 다리, 담장은 물론 연못, 괴석위의 동궐도(부분)는 16첩 동궐도 중 옥류천 일대를 나타낸 부분화이다.
태극정(太極亭) 동쪽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남향으로 반간의 툇마루가 있는 초가는
현재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정면 5간 측면 1간의 농산정(籠山亭)은 동궐도와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나, 취한정(翠寒亭)에서 농산정으로 가는 석교(石橋) 건너
농산정 앞에 보이는 생울타리인 취병(翠屛)과 아치형 취홍문(翠虹門)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농산정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바구니 농(籠)이 상징하는 작은 수랏간의
용도와 근위 수행원들의 휴식공간을 겸한 농산정과 청의정, 태극정, 소요정 등의
상림삼정(上林三亭)을 구획하려는 의도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상림삼정들 간에는
큰 나무 한그루 없이 사방이 툭터져서 어느 한 정자에 앉아서 다른 두 정자들을 서로
잘 볼 수 있는 시각적으로 연결된 한 공간에 속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상림삼정과
농산정 사이에는 몇그루의 큰나무들로 시선 차단용 조경을 한 것으로 보아서도
이러한 의도적인 배치는 남녀의 구별과 상하의 계급적 질서가 뚜렷한 성리학과
후에 이를 발전시킨 주자학에 영향을 받은 원림영조법(苑林營造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취한정(翠寒亭)
취한정의 주련(柱聯)의 시(詩)
一庭花影春留月(일정화영춘류월) 온 뜨락의 꽃그림자 봄은 달을 붙잡고
滿院松聲夜聽濤(만원송성야청도) 상림* 가득 솔바람소리는 밤파도소리 듣는 듯
九天露湛金盤重(구천로담금반중) 높은 하늘에 이슬 짙어 태양이 침침히고
五色雲重翠蓋凝(오색운수취개응) 오색의 구름이 드리워 푸른 지붕을 감싸네
寶扇初開移玉座(보선초개이옥좌) 화려한 부채 막 펼쳐 옥좌를 옮기시니
華燈錯出暎朱塵(화등착출영주진) 꽃등불이 어지러이 붉은 장막을 비춘다.
*1 상림(上林) : 옥류천 일대의 숲.
鸞輿逈出千門柳(난여형출천문류) 임금의 가마가 버들숲을 지나와
閣道廻看上苑花(각도회간상원화) 다리**에서 고개돌려 상림원 꽃 바라보네
種成和露桃千樹(종성화로도천수) 복숭아숲의 열매에는 이슬이 맺혀있고
借與摩霄鶴數群(차여마소학수군) 하늘 높이 학 여러 무리에 내어 주었네
拂水柳花千萬點(불수유화천만점) 물을 스치며 버들개지 천만송이 피었네
**2 각도(閣道) : 하늘 나라 임금님이 사는 자미궁(紫微宮)에서 은하수를 건너 영실
별자리에 잇는 별궁 리궁으로 갈 수 있게 연결한 높은 구름다리가
바로 각도라는 별자리이다.
※당초에는 8개의 사각기둥에 12개의 주련(柱聯)이 걸려 있었으나
현재는 1개가 없어져 11개만이 걸려 있다.(문화재청 자료)
푸르고 서늘한 취한정(翠寒亭)
창덕궁 옥류천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취한정은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 이전부터 독서와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된 듯 하다.
취한(翠寒)”의 뜻은 “푸르고 서늘하다(翠寒)"는 의미이다. 취(翠)는 푸른빛, 한(寒)은
차갑다는 뜻으로, 푸른 숲으로 감싸여 서늘하다는 의미이다 “.
중국 송나라 효종(孝宗, 1127~1194년)이 대궐 안에 취한당(翠寒堂)을 짓고
그 안에서 대신들과 정무를 처리한 일이 있다고 하었다.
취한정에 대한 숙종과 정조의 시(詩)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1720년 이전에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임금이 옥류천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소박한 정자이다.
취한정제영(翠寒亭題詠)
/ 숙종(肅宗)
綠陰芳草政堪賞(록음방초정감상) 녹음방초는 참으로 감상할 만하고
檻外長留瀑布聲(함외장류폭포성) 난간 밖에는 오래도록 폭포 소리 머물다.
驟雨今過風暫歇(취우금과풍잠헐) 소낙비 막 지나고 바람이 잠시 멎었는데
園中葉葉聽蟬鳴(원중엽엽청선명) 정원 속의 잎들마다 매미 소리 들린다.
森森簇簇總環亭(삼삼족족총환정) 빽빽이 솟아 나서 온통 정자를 두르니
冒雪凌寒色愈淸(모설릉한색유청) 눈보라 추위 이겨 빛이 더욱 맑도다.
愛爾獨持君子節(애이독지군자절) 사랑스러울손, 너 홀로 군자의 절개 지녀
不變夷險一心貞(부변이험일심정) 평탄하든 험하든 변함없이 한 마음으로 곧구나.
취한정(翠寒亭)
/ 정조(正祖)
澗翠空晃開畵境(간취공황개화경) 계곡의 푸르름이 아른아른 그림 경치 열어 주니
庭松偃蹇聞琴聲(정송언건문금성) 뜨락의 소나무 누운 채 거문고 소리 듣도다.
佳山未許遊人到(가산미허유인도) 아름다운 산은 노는 사람이 이르기를 허락지 않으니
可愛幽禽隔樹鳴(가애유금격수명) 숨은 새들이 숲 저편에서 우짖는 것이 사랑스러워라.
- 다음 카페 <詩가 흐르는 강> 농월님의 글 중에서
옛 천문(古天文)으로 본 취한정의 이름
- 옛 천문으로 보면 찰 한(寒)자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상징하는
은하수 한(寒)字이다. 이 밖에도 나중에 나라 한(漢)자로 불리워지는
漢자도 한고조(漢高祖)가 한나라를 건국하기 전에는 은하수 한(漢)字로
쓰였다.
하늘 나라 임금님이 사는 자미궁(紫微宮)에서 은하수를 건너 영실
별자리에 있는 별궁 리궁으로 갈 수 있게 연결한 높은 구름다리가
바로 각도(閣道)라는 별자리이고, 진시황의 호화궁전인 아방궁(阿房宮)에도
이 각도(閣道)가 있었다. <사기 史記>의 "진시황 본기"에 아방궁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 이에 위수(渭水)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각을 지었는 데, 동서의 넓이가 500 보이며,남북의 길이가 50장(100미터)
으로 윗쪽에 1만명이 앉을 수 있으며, 아랫쪽에는 5장(10미터) 높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사방에 구름다리를 만들어 궁전 아래에서 남산(南山)에 까지
통하게 하였으며, 남산 봉우리에 누각을 세워 표시했다.
구름다리를 지어서 아방을 위수를 건너 함양에 이르게 함으로써, 북극성으로
부터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건너서 영실성(營室星)에 이르는 모양을
나타냈다. 아방궁은 완성되지 않았으나, 완성된 뒤에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방에 궁전을 지었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궁형(宮刑), 도형(徒刑)을 받은 70만여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게 하거나
여산(驪山)을 조림하게 하였다." (안상현 著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별자리>)
이 옥류천 일대의 정자들은 아방궁과는 전혀 반대로 호화롭지 않고, 서민적으로
꾸며져 있고, 심지어 현존하는 청의정과 동궐도에 나오는 태극정 동쪽에 있는
세간 규모의 집은 초가지붕일 만큼 일반 백성들인 민초(民草)들의 주택에
가까이 가려는 소박한 형태를 띈다.
그러나 이 작고 소박한 상림삼정(上林三亭)의 원림에는 하늘을 지상에다
재구성하는 원대한 이상이 숨겨져 있는 원림영조배치가 돋보이는 것이
이 옥류천 일대의 자랑스러운 상림원(上林苑))의 구성이다. 상림원이라는
이름에는 지상에서 으뜸가는 원림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 천상(天上)의 원림
(園林)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이 청의정이나 태극정의
배치나 청의정의 360도 방향의 선자서까래 등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으나, 우리 천문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는 이를 쉽게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것도 인조 때 이를 조성한 영조도감(營造都監)을 맡은 분의
뛰어난 안목 때문이 아닌가 하고 여겨진다.
단청이 단순한 취한정의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
막 운 ( 寞 云 )
/ 成 宗 (1457~1494) 李 悊
ㅡ 고요한 다실에서 왕후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ㅡ
색비이화미칙가 色比梨花味則加 찻빛은 배꽃을 닮았지만 맛은 더욱 뛰어나고
과후추정옥천사 過喉秋井玉泉斜 가을 샘물을 마시나니 옥류천의 샘이 기운 듯 하네.
송요미가동조환 松醪未可同朝喚 동기간 아침에 불러 송엽주 마시기에는 마땅치 아니하고
죽엽나감일가차 竹葉那堪一斝嗟 죽엽주를 옥잔에 마셔 보아도 절로 탄식만 나오는구나.
청복경연선손치 淸馥更憐先噀齒 맑은 향기 안타깝게 여겨 치아에 먼저 굴려 보니
연자수식욕경사 軟姿誰識欲傾紗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자태 그 누가 알리요.
상여한불지위조 相如恨不知爲早 서로 함께 뉘우치나 아직 이르다는 것 아지 못하고
다음환청승작차 多飮還淸勝雀茶 작설차를 많이 마셔 맑은 마음 되돌려 보려 하네.
******* 성종대왕이 왕후와 단 둘이서 차를 대작할 때,
찻물은 옥류천 어정(御井)에서 샘물을 길어다 쓴 것으로 보인다.
작 약 / 창덕궁 낙선재 후원 화계에서
작약과 괴석 ㅡ 괴석 받침돌에는 삼신산을 상징하는 소영주라는 글짜를 새김
/ 2013.5.17. 부처님 오신 날에
< 숙종대왕의 茶詩>
작설차철료음(雀舌茶歠了吟 )
/ 숙 종 (肅 宗)
- 과인이 홀로 다실에 좌정하여 손수 작설차를 달여 마시며
차에 대하여 읊노라
세인기주배다빈 世人嗜酒杯多賓 하나 세상사람들이 많은 손님들과
술잔들기 좋아하지만
오독생평작설감 吾獨生平雀舌甘 하노라. 나는 평생 작설의 감칠 맛을
홀로 즐기노라!!
식후온전수의음 食後溫煎隨意飮 하고, 밥먹은 후 뜨겁게 달여놓아
마음가는 대로 마시고,
미가기강우무감 味佳氣降又無酣 하도다. 맛이 뛰어나고 기氣도 내리며
또한 취하지 않도다.
******* 국왕이 차를 홀로 마실 때에는 상궁이나 내관의 도움이 없이
손수 팽다(烹茶)하며 자기 수양의 도구로 삼고 있음이 이 詩에
잘 나타난다.
그리고 뜨겁게 달여놓고(溫煎)라는 싯귀에서 숙종 임금님이
마시고 있는 차가 차화로(茶爐)에서 오래 달이는 떡차 계통의
발효차임을 유추할 수 있다. 화로불이 식어가도 차솥(茶钂)이나
찻주전자(茶鑵)에 오래 달여두고 마음가는 대로 수시로 마시고
있음을 이 한시漢詩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소요정에서 본 옥천암, 청의정과 태극정.....
어제시(御製詩)가 새겨진 소요암(逍遙岩)
- 소요암에 새겨진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는 인조임금의 친필이며
시(詩)는 숙종임금의 작품이다.
飛 流 三 百 尺 비 류 삼 백 척
遙 落 九 天 來 요 락 구 천 래
看 是 白 虹 起 간 시 백 홍 기
飜 成 萬 壑 雷 번 성 만 학 뢰
폭포는 삼백척인데
멀리 구천에서 내리고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어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
***** 숙종대왕의 싯구<멀리 구천에서 내리고>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청의정의 태양, 태극정의 태양과 달 등 음양이 어우러진 태극(太極).....
옥황상제가 사시는 하늘의 은하수를 의미하는 옥류천(玉流川)....
이 구천을 유유히 소요하다가 피곤한 몸을 잠시 쉬기 위한 소요정과
소요암 위의 유상곡수에 떠도는 찻잔이나 술잔 표주박을 권커니 잣커니
마시며 여는 시서화다회(詩書畵茶會) .....
상림삼정을 품고 있는 옥류천 권역은 하늘궁전(자미원 紫微垣)을
지상에다 재현해 놓은 별천지인 선계(仙界)라고 아니할 수 없다.
봄가뭄이 심하여 소요암 너럭바위에 인공으로 판
유상곡수(流觴曲水)와 작은 폭포의 물이 많이 말랐다.
- 유상곡수가 있는 소요암 바로 옆의 너럭바위가 세심대(洗心臺)
비스듬이 서 있는 천년고목 주목과 소요암 그리고 유상곡수
- 너른 암반인 소요암(逍遼岩) 옆의 세심대에 약간의 인공 홈을 파서
수로를 만든 유상곡수(流觴曲水)....
이 세심대의 유상곡수에서 큰 나무발우(鉢盂)를 닮은 다완(茶椀)을
띄워놓고 원효스님이 전하신 진한 가루차를 저은 무애차(無碍茶)를
신하들과 나누어 마시며 다완이 앞에 도착하는 사람이 시 한수를
짓고 이 무애농차(無碍濃茶)를 돌려 마시며 백성들의 화합을 위한
탕평책 등을 논의하는 모습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요지음의 정치인들 - 남의 당파의 잘못이나 허물만을 반복적으로
지적하며 민의수렴(民意收斂)이라고 착각하고 나라의 실제 주인들인
국민들의 표나 구걸하고 있는 수준미달인 듯한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이 창덕궁 후원을 둘러보고 우리 선조님들의 탕평책과 화평책 그리고
우리의 선조 위정자들의 부단한 자기계발(自己啓發)을 위한 성찰(省察)과
더 나아가서는 밤에 가만히 정자나 너럭바위에 홀로 앉아서 광대무변한
우주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인 초록별과의 관계,이 아름다운 초록별에서
우리 나라가 갖고 있는 위상, 그리고 우주 속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자기성찰(自己省察) 등에 대하여 다시 되돌아보고, 국가위급상황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인 강무(講武) 등 실제적인 대비책에 대한
사전훈련과 점검 그리고 국가미래의 발전상에 대한 구상 등등에 대하여
끊임없는 노력과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저만의 기우일까??
과거 중국에서도 법가(法家)나 형가(刑家)들이 득세할 때에는 국가발전에
과 국민복리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서 정국을 운용하기보다는 과거에 이미
저질렀던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 위주로 국가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민심이 흉흉해지고 경제발전은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처벌을 두려워한 범죄자들은 법가(法家)들과 사전 결탁하여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오죽하면 북방 동이족들이 중원대륙을 통치한 몽골족의 원나라 시대에
중국은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나라가 되어 중동과 유럽 제국의 문화와
문물교류가 활발해져서 국부(國富)를 축적할 수 있었고, 아라비아의 천문학,
동방정교 계통의 기독교인 경교, 회교, 인도의 힌두교 까지 다양한 종교문화를
를 받아 들일 수 있어서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와 부(富)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찬가지로 북방 동이족의 한 갈래인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에는
중국의 강토가 지금의 강토 영역보다 훨씬 넓은 강역을 개척하여
청나라 황실의 영향하에 두었으며, 이 넓은 강토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물동량의 증가로 막대한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족(漢族)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왕조에서는 한족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조세부담을 낮추어주고 또한 부패관리들에
대하여서는 엄벌에 처하고, 신진 세력들의 등용을 위한 과거제도의 실시
등으로 한족 중심의 황실이 지배할 때 보다도 오히려 백성들의 삶은 더욱
윤택하였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등 남의 아픔을 이용하여 당파적인 선거전략으로 이용하는
등의 득표우선주의라는 발상도 가만히 살펴보면 경제 제일주의 또는
조기성과 우선주의라는 조급한 마음에서 기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조들이 정자나 원림의 이름으로 많이 붙인 세심정, 세심대 등의 의미를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되새겨 보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현실 상황이다.
< 정조대왕 茶詩>
登洗心臺賞花口占示諸臣和之以茗熟爲令
등세심대상화구점시제신화지이명숙위령
/ 정 조(正祖)
- 정조 15년(辛亥 , 1791년) 춘삼월 왕은 신하들과 세심대에 올라
꽃을 완상하면서 찻자리를 펼쳐놓고 차화로에 불을 피우고
차솥을 올려놓고 시 한수 짓고 나서, 여러 신하들에게
차(茗)를 달이면서 차가 뜸이 들어 익을(熟) 때까지
과인이 지은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 시서다회(詩書茶會)에는75세의 공조판서(工曺判書)
이민보(李敏輔), 65세의 제학(提學),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수어사(守御使)가 참석하였다.
가일방춘절 暇日芳春節 에 꽃이 만발한 어느 한가로운 봄날에
심대세속훤 心臺洗俗暄 해보자 세심대의 따사로움으로 속진을 씻어보자.
양산진일호 兩山眞一戶 하고 두 산은 마치 한 집과 같이 가까웁고
천수역동원 千樹亦同園 하는구나 이어진 숲으로 한 원림내에 있는 것 같구나!!
염염청광정 豔豔天光靚 하고 하늘빛은 봄날의 농염함으로 단장하고
등등지세존 登登地勢尊 하네 오르고 또 올라도 지세 또한 포근하네.
좌간다호발 坐間多皓髮 하니 찻자리에 앉은 老臣들의 백발이 늘어가니
내세우금준 來歲又今樽 하세 내년에도 오늘처럼 술잔을 기울이세 !!
소요정, 소요암의 유상곡수....
어정(御井)
- 우물 연봉(蓮峰)이 있는 뚜껑돌이 두개로 나누어져 있어
물의 기운을 상징하는 음수(陰數) 2를 사용하였다 .
辛亥三月上詣宣禧宮歷臨洗心臺賞花御製命侍臣賡和
신해삼월상예선희궁역임세심대상화어제명시신갱화
이날 찻자리에 참석한 열여섯 명의 재신(宰臣)들 중의 한사람인 이조판서
홍양호 洪良浩가 지은 정조의 명에 의한 화답시이다. 본관은 풍산 豊山,
초명 初名은 양한 良漢, 자 字는 漢師, 호 號는 이계 耳溪이다.
경종 4년(1724년)에 태어나 순조(純祖) 2년(1802년)에 졸 卒하였다.
일난용기전 日暖龍旂轉 햇살 따사로운 봄날에 용깃발은 나부끼고
화영봉취훤 花迎鳳吹喧 꽃들은 떠들썩한 생황소리를 맞이하네.
청란수곡수 淸鑾隨曲水 맑은 차 담긴 방울잔 유상곡수를 따라 흐르니
행악항명원 行幄抗名園 이동식 차일막이 아름다운 원림에 거슬리누나.
백악신도장 白嶽神都壯 백악동천의 기세가 비롯 장엄하고
홍운보탑존 紅雲寶榻尊 저녁노을 임금의 탑상 앞에 비끼어 있네.
신장모희기 宸章侔喜起 대왕님의 싯귀에 모두들 기뻐하며 따르니
화기일구준 和氣溢衢樽 화기 또한 십자모양의 찻잔에 넘쳐납니다.
*** 봉취(鳳吹) : 생황은 그 모양이 봉황을 닮고 그 소리가 봉항의 울음소리를 닮은
여러개의 대나무로 만든 국악기 중에 유일한 화음악기(和音樂器)이다.
청란(淸鑾) : 방울모양으로 만들어 물위에 쉽게 띄고 쉽게 가라앉지 아니하게
만든 찻잔(또는 다완茶椀)이나 술잔.
행악(行幄) : 원행 갈 때 야외에 설치하는 이동식 천막.
신장(宸章) : 임금, 스승 ,윗어른의 문장에 대한 존칭어.
집 신宸 字로 유상곡수에서 무애농차를 마셔서 이미 한솥밥을 먹은
한집 식구라는 표현을 강조한 詩句임.
구준(衢樽) : 윗부분을 열십자 모양으로 만든 찻잔이나 술잔으로 쓰이는 음료수 잔.
청의정과 주변의 모내기용 논....
- 청의정의 초가 지붕은 추수가 끝난 후 이 논의 볏짚으로 이엉을 얶어서 이었다.
<승지 이만수 李晩秀가 지은 화답詩>
洗心臺賡韻
세심대갱운
승정원 承政院 승지 承旨 이만수 李晩秀가 정조의 명에 의해 지은
화답시구이다. 본관은 연안 延安, 자는 성중 成中, 호 號는 극원 屐園,
서소주인 書巢主人이다. 영조 28년(1752년)에 태어나 순조 20년
(1820년)에 졸하다.
제신관례수 諸臣寬禮數 여러 신하들은 모두 예의에 억매이지 말고
천허취중헌 天許醉中喧 성상님께서 차와 술에 취하여 떠들석함을 허락하셨으니.
일세농화절 一歲弄花節 일생에 한번 이 꽃피는 게절을 희롱하며 놀아봅시다.
천가방수원 千家芳樹園 전각이 많은 궁궐의 꽃나무 많은 후원에서
춘선신조득 春先宸藻得 봄날 먼저 성상님께서 내리신 순채국을 마셨네.
대자가림존 臺自駕臨尊 누대에 임금님의 수레가 임하셨도다.
경회지다일 慶會知多日 이런 경사스러운 모임은 앞으로도 여러 날이 있겠지만
봉래유법준 蓬萊有法樽 전하께서 내리신 술동이가 있으니 선경이 따로 있을소냐!!
- 최지영 著 <조선왕궁과 사림 士林의 다도 茶道> 중에서 일부 발췌
민속원, 2009년 8월 발간
***** 승지 이만수가 어명을 받잡고 시서다회(詩書茶會)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의 흥을 돋구기 위하여 임금님과 신하들 간의
중간의 입장에 서서 소통과 흥취을 위하여 애쓰는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휼륭한 詩이다.
승지 즉 요지음의 비서의 역활을 충실히 하고 있는 광경을
이 시詩로써 대하니 이 시를 쓴 세월의 간격을 떠나서 자기의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중간관리의 모습에 웬일인지
입가에 흐뭇한 미소마저 띄게 하는 시詩이다.
경복궁 옆 선희궁(현 서울농학교) 뒷산 세심대에서 이와같이
국왕과 대신들이 시서화다회(詩書畵茶會)를 열고
노신(老臣)들에게 차와 술을 내려 그들을 위로하고
시詩를 서로 주고 받는 아름다운 광경을 위의 정조의
어제시와 이조판서 홍양호와 승지 이만수의 화답 갱화시를
통하여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요지음 흥행위주로 제작방송되고 있는 TV 드라마나
궁궐비사들을 각색한 소설 등의 문학작품들에서는
후원이 국왕이나 왕자들이 궁정 여인들과의 유흥을
위한 놀이공간으로 많이 소개되고 있으나, 이 후원은
예악(禮樂)을 통한 왕권강화, 화합과 소통을 위한
시서화(詩書畵)모임과 천문공부를 겸한 치열한 자기계발을
위한 원림의 기능과 함께 사색당쟁으로 갈라진 당파들을
함께 국정에 참여시키기 위한 국정통합의 장으로 그 실제적인
효용성을 가지고 있는 궁내 원림(苑林)으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었음을 느껴볼 줄 알아야 한다.
******* 네이버 블로그에 이 정조대왕과 신하들의 시서화다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정조편>과 <승정원일기> 등을 종합하여
번역 소개한 글이 있어서 참고로 아래에 싣는다.
아래 인용글의 내용 중에는 이 경복궁 옆 선희궁 뒷산인 세심대에서
임금이 무관들에게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사냥을 겸한 일종의 군사훈련인 강무(講武)가 자주
열렸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꽃을 넣은 떡을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춘삼월에 진달래 꽃을 넣고 찹쌀을 지져 떡을 만드는 화전(花煎)놀이를
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봄철 세심대에서 시서화다회를 연 연유에 대한 대한 정조의 말씀이다.
"그리고 봄철에 행차할 때마다 반드시 옥류동천(玉流洞川) 세심대(洗心臺)에
오르는 것은 단순히 꽃구경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장조(莊祖:장헌세자)를
여윈 나의 종천지통(終天之痛)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내년 봄에는 올해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한가하게 쉬는 데에 가깝기에
행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너희들은 이러한 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뒷날 내가
행차할 때에 반드시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와서 만나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어 손수 지은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고 이에 대해 화답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대궐 근방의 가까운 마을에 사는 조관과 일반 백성들 중에서
80세 이상이 된 사람들에게 쌀과 연어를 하사하였다.
1791년 3월 17일 22대 국왕 정조(正祖)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을 참배하고 봉안각(奉安閣)을 봉심(奉審)하였으며, 장조(莊祖:장헌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연호궁(延祜宮)·의소묘(懿昭廟)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장보각(藏譜閣)을 살펴보았다. 정조가 근신들과 함께 옥류동천(玉流洞川)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잠시 쉬면서 술과 음식을 내렸다. 정조가 오언근체시(五言近體詩) 1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1762(영조 38)년인 임오년에 사당을 지을 땅을 결정할 때 처음에는 이 세심대(洗心臺) 아래로 하려고 의논하였으나, 그 때 권흉(權兇)이 세심대(洗心臺) 아래 땅이 좋은 것을 꺼려서 창경궁 동쪽 기슭에 옮겨 지었으니, 함춘원의 경모궁(景慕宮)이 그 것이다. 그러나 함춘원의 경모궁(景慕宮)이 궁 터가 좋기로는 도리어 이 세심대(洗心臺)보다 나으니 하늘이 하신 일이다. 내가 아버지 장조(莊祖:장헌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을 배알(拜謁)할 때마다 늘 이 선희궁(宣禧宮) 북원(北園) 뒤 1백여 보 가량 되는 곳에 있는 세심대(洗心臺)에 오르는데, 이는 아버지 장조(莊祖:장헌세자)를 여윈 나의 종천지통(終天之痛)을 달래기 위해서이다.”하였다.
1792년 3월 20일 정조가 도총관 이민보(李敏輔)에게 이르기를, “작년 봄 나의 시에 ‘좌중에 백발이 많으나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을 기울이세.’란 구절이 있었는데, 지금 또 경들과 함께 이 모임을 가졌으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날씨 또한 매우 화창하니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다시 전날 놀던 곳을 찾아보련다.”하고는, 편여(便輿)를 타고 옥류동천(玉流洞川) 세심대(洗心臺)에 올랐는데 연로한 여러 신하에게 각각 구장(鳩杖)을 하사하여 오르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정조가 직접 율시(律詩) 한 수를 짓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라고 명하였다. 이병모(李秉模) 등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 때마다 반드시 이 세심대(洗心臺)에 오는 것이 어찌 단지 꽃을 구경하는 즐거움 때문이겠는가. 내가 특별히 이 세심대(洗心臺)에 대해서 은근히 잊지 못할 것(아버지 장조(莊祖:장헌세자)를 여윈 나의 종천지통(終天之痛))이 있는데, 여러 신하들은 과연 모두 아는가?”하였다.
윤4월 9일 정조가 전교하기를, “지난 번 주교(舟橋)를 완성한 뒤에 일을 감독한 여러 신하들에게 특별히 놀이를 하게 한 것은 노고를 보답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부여한 점이 없지 않았다. 옥류동천(玉流洞川) 세심대(洗心臺)를 설치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평범하게 등림(登臨)하는 곳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 아버지 장조(莊祖:장헌세자)를 여윈 나의 종천지통(終天之痛)을 달래고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이었으니 병조 판서의 서문(序文)에서도 그 대략을 말하였다. 대저 사람이 화합하면 천지의 조화(調和)도 응하는 것이니, 놀이를 하는 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또한 세도(世道)에 관련된 것이다. 근일 풍속이 자못 소조(簫條)함을 깨닫겠으니, 잔치도 벌리고 놀이도 하여 화기(和氣)를 인도할 수 있는 잔치나 놀이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름다운 풍속이 아니다. 이후로는 경들부터 힘써 화합하고 즐기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라.”하였다. 1794년 3월 13일 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을 참배하고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시신(侍臣)들에게 밥을 내려주고 여러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였다. 선희궁의 소원(小園)에 도로 와서 화전(花煎) 놀이를 하면서 정조가 칠언 절구로 시를 짓고는 군신들에게 화답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1795년 3월 7일 옥류동천(玉流洞川)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였다.정조가 도총관(都摠管) 이민보(李敏輔)에게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에 경들과 함께 올라왔었다. 1791(정조15)년인 신해년 봄에 내가 지은 시(詩) 가운데 ‘자리에 앉은 많은 백발 노인들,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 들으리. 좌간다호발 내세우금준(坐間多皓髮 來歲又今樽)’라는 구절이 있었고, 그 이듬 해의 이 모임에서 지은 시 가운데에도 또 ‘마음에 맞는 동서울 노인, 탈없이 시짓고 술잔 드누나. 회심동낙노 무 우시준(會心東洛老 無 又詩樽)’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 모두가 경을 가리킨 것이었다. 오늘의 놀이 역시 경이 전담케 해야 하겠다.”하고, 이어 편여(便輿)를 타고서 선희궁(宣禧宮) 북문(北門)을 나갔다. 나이 60세가 넘은 신하들에게 모두 지팡이를 하사하여 산을 오르는 데에 편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옥류동천(玉流洞川)을 따라 수십 보(步)를 지나가서 세심대에 이르렀다.
정조가 장막을 친 자리에 올라가 앉아 영의정 홍낙성(洪樂性)과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불러 보았다. 정조가 이르기를, “매년 이 때가 되면 꼭 이 세심대에 오르는데 이는 경치좋은 곳을 찾아 꽃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곳은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우려 할 때 터를 잡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한가하게 즐기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옛날 을묘년에 나라의 경사가 있고나서 고(故) 중신(重臣) 영성군(靈城君)*이 여러 경재(卿宰)와 함께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뻐하면서 축하하는 마음을 편 적이 있었다. 그 때 영성군이 지은 시 가운데 ‘해마다 태평주(太平酒) 들며 길이 취하리. 매년장취태평배(每年長醉太平杯)’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필운대가 바로 이 세심대이다. 경들은 혹시 그런 일을 들어 알고 있는가.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경사스러운 해이다. 경들이 고사(故事)를 엮어 기술하면서 옛 사람들과 아름다움을 짝하여 오늘날의 태평스러운 기상을 표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이 달 안으로 날을 잡아서 이 곳에 와 모였고 보면 올해의 이 놀이 또한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영성군(靈城君) :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또 이르기를, “지금부터 10년 뒤의 갑자년은 바로 경모궁의 혼인 60주년 회혼(回婚)인 중근(重巹)이 되는 해이다. 그 때에 헌경왕후 홍씨인 자궁(慈宮)께서 현륭원(顯隆園)에 가시어 참배하는 일이야말로 정리상으로나 예법상으로나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번에 자궁(慈宮)의 행차를 모시고 갔다가 환궁한 뒤에 수라(水剌)에 사용하는 기명(器皿) 등속을 그냥 수원부(水原府)에 놔두도록 하였는데 이 것도 나에게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10년이 지난 뒤에 경들이 다시 행차를 모신다면 어찌 희귀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경들의 근력(筋力)을 보건대 모두 걱정할 것이 없겠다.”하였다. 이어 초계 문신(抄啓 文臣) 김근순(金近淳)에게 명하여 세심대 밑에 거주하는 조관(朝官)과 유생들을 불러와 대기시키도록 하였다. 또 승지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정조가 직접 지은 소서(小序) 및 칠언(七言)의 소시(小詩)를 쓰라고 하고,신하들에게 회답하도록 명하였다. 또 세심대 남쪽에 작은 표적을 설치한 뒤 자리에 참석한 무신 및 문신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하였다. 또 세심대 아래에 거주하는 무신 및 행차를 따라 온 장교(將校)들도 모두 활쏘기 시합을 벌이게 하고 상을 나눠주도록 명하였다. 꽃을 넣어 지진 떡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이우진(李羽晋)·류사모(柳師模) 등에게 명하여 유생 등 여러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한껏 취하고 배불리 먹게 하는 동시에 이 날의 즐거움을 기록하게 하였다.
1795년 3월 10일 22대 국왕 정조(正祖)가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였다. 여러 각신(閣臣)의 아들·조카·형제들도 참여하였는데 모두 54인이었다. 말을 타고 가면서 신하들에게 말을 타고 따라 오도록 하였다. 어수당(魚水堂) 앞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하였다. 천향각(天香閣)에 어좌(御座)를 설치하고 대신과 각신(閣臣)에게 술병과 안주 그릇을 하사하면서 각자 마음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쉬게 하였다.정조가 존덕정(尊德亭)의 서쪽 태청문(太淸門) 안의 막차(幕次)로 거둥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정조가 장조(莊祖:장헌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 배알(拜謁) 후 오르는 세심대(洗心臺)의 대자(臺字) 운(韻)을 써서 입으로 칠언(七言)의 소시(小詩) 한 수(首)를 지어 읊은 다음 대신과 제신(諸臣)에게 화답하라고 명하였다. 정조(正祖)가 부용정(芙蓉亭)으로 거둥하여 태액지(太液池)의 서쪽인 부용정(芙蓉亭) 안에서 못 안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수조(垂釣)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못가에 빙 둘러서서 못 속에 낚싯대를 던졌는데,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남쪽에서 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동쪽에서 하고 유생들은 북쪽에서 하였다. 정조가 낚시로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으며 신하들과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하였는데, 다 끝나고 나서는 다시 못 속에 놓아 주었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1798년 11월 6일 육상궁(毓祥宮)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봉안각(奉安閣)·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을 참배하였다. 또 창의궁의 장보각(藏譜閣)·의소묘(懿昭廟)에 작헌례를 거행하고, 선희궁의 재실(齋室)에 나아가 지영(祗迎)한 조관(朝官)들과 유생 및 어린이들에게 음식을 내렸다. 교시하기를, “내가 매번 이 마을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마을의 젊은이들을 불러보는 것은 대개 선조(先朝)에 고향과 같이 여긴 성스런 뜻을 본받아서이다. 그리고 봄철에 행차할 때마다 반드시 옥류동천(玉流洞川) 세심대(洗心臺)에 오르는 것은 단순히 꽃구경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장조(莊祖:장헌세자)를 여윈 나의 종천지통(終天之痛)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내년 봄에는 올해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한가하게 쉬는 데에 가깝기에 행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너희들은 이러한 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뒷날 내가 행차할 때에 반드시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와서 만나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어 손수 지은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고 이에 대해 화답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대궐 근방의 가까운 마을에 사는 조관과 일반 백성들 중에서 80세 이상이 된 사람들에게 쌀과 연어를 하사하였다.
청의정과 모내기를 위하여 갈아놓은 논
이번의 후원 관람은 지난 4월 처럼 자유관람이 아니라 문화해설사가 일정한
단체인원을 인솔하고 안내와 설명을 해주는 단체관람이였다.
우리 일행은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해설팀을 따라다녔는 데, 영어듣기가 부족하여
그냥 눈으로 구경하면서 뒤처져서 따라다니다 보니 옥류천 권역에서 팀을 놓쳐버렸다.
이왕 늦은 것...... 다음의 한국어 해설팀을 기다리기로 하고 다음 팀이 올 때까지
무료하게 보내는 동안 태극정 뒷마당에서 간단한 번개다회 - 정말 번개불에 콩구워
먹는 듯하게 잠간 동안의 뇌다회(雷茶會)를 하였다.
급한 대로 동계용 해먹을 뒷마당에 펴서 다포(茶布)를 대신하고
등산용 손수건을 깔아서 임시 찻상(茶床)을 만들었다.
동계용 해먹인 한단소(桓檀巢).....
- 사진 맨아래에 있는 연꽃 그림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연꽃으로
꽃이 작고 소박한 개연, 남개연, 왜개연 등의 우리 토종 연꽃을 그린 것이다.
이 토종 연꽃들은 한반도 일원 뿐만 아니라, 중국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의
저습지에서도 잘 자라고 있다.
동계용 해먹에 있는 글씨는 갑골문체의 산행오계(山行五戒)......
태극정 기단에서 바라본 청의정(淸漪亭)과 어정(御井)
태극정에서 바라본 농산정(籠山亭)과 소요정(逍遼亭)
그리고 주목나무 고목과 느티나무....
- 창덕궁 후원 옥류천 일대에 자리한 농산정은 온돌방 2칸과 대청마루
2간 그리고 부엌 한간을 갖춘 다섯간 규모의 맛배지붕 건물이다.
이 곳에서 옥류천 일대로 나들이한 임금을 위해 다과 등 음식을 장만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가 있던 해에 수원 화성으로
떠나기 전 가마를 메는 연습을 실시하면서, 참가한 신하들에게 이곳에서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제사를 지내기 전 재숙을 한 기록도 있어 여러 용도로 이용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태극정(太極亭)에서 바라본 소요정과 옥류천 권역 들머리에 있는 취한정...
지리산 야생녹차와 김해 장군차로 만든 황차(黃茶)로
초여름 날씨에 흘린 땀을 보충하여 본다.....
이 때만 하여도 우리 일행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청의정과 당번주초석(幢幡柱礎石)
- 모내기 등 왕실행사 때에 "농자천하지대본" 등의 당번이나
각종 시회 詩會 등의 모임에서 시제 詩題 등을 내거는 나무기둥을
고정하는 주초석..
청의정, 태극정, 그리고 농산정
동궐도의 그림에서 보면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등의
상림심정(上林三亭)에서 농산정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시선차단용
큰 나무들과 생울타리인 취병 翠屛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이 나타난다..
청의정 기둥 사이로 바라본 태극정과 농산정.
청의정, 태극정,소요정과 작은 수랏간 용도로 사용된 농산정
- 상림삼정(上林三亭)과 부속건물인 농산정(籠山亭 : 대바구니 籠)
청의정의 우물마루
- 난간에 안상형(眼象形) 풍혈(風穴)을 내었고,그 윗단에 연화형(蓮華形)
동자주(棟子柱)를 세워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물을 상징하는 연꽃을 위에 바람을 상징하는 풍혈을 아래에 둔 것은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감리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천정단청의 연꽃이
하늘연꽃(天蓮)을 의미하고 이들 연꽃형 동자주는 공중의 많은 하늘연꽃들
즉 세자와 왕자들을 의미하고 있고, 아울러 다른 은하계의 수많은 태양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우주관을 건축의장(建築儀匠)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에 있었던 황룡사 구층목탑이 의미하고
있는 것 처럼 인근의 아홉나라의 복속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웃나라들과의
다툼이 없는 화평 즉 태평성대를 추구하고 있는 건축의장이다.
비록 주변의 수십평의 논에서 직접 농사지은 볏집으로 초가지붕을 올린
보잘 것 없고 초라하기만 해 보이는 청의정(淸漪亭)이 가지고 있는
다정(茶亭) 영조법(營造法)상의 건축의장 요소는 한국전통건축 뿐만
아니라 인류 건축문화사상 최고의 화려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가치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의 작고 소박한 의두합(倚斗閤)의 한평반 짜리 작은 다정(茶亭)인
운경거(韻磬居)와 이 청의정의 작은 아름다움이 앞으로 자본주의의
경제 제일주의와 조기성과 우선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
삼을 수 있는 규준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운경거라는 이름은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인 정재(呈才)를 재정리하고
춘앵무 등을 직접 창작하신 효명세자의 왕권강화를 위한 깊은 사념의 결과에서
나온 것으로 "편경 경쇠돌의 음운"이라는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예악(禮樂) 관현악곡 연주에서 가장 기본음이 되는 것이 편경의
황종음(黃鐘音)이고 , 이 편경이 없을 때의 기본음이 백악(百樂)의
수장이라는 고구려의 왕산악이 만든 거문고의 황종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편경에 매다는 경쇠돌은 평소에 보관할 때 돌 속의 수분의 함량을 유지하여
절대음률을 보전할 목적으로 땅을 파고 굴 속에서 보관하다가
종묘제례악 같은 궁중 대행사가 있을 때에만 장악원에 잠시 내어주었다고
<장악등록(掌樂騰錄)>에 기술되어 있을 만큼 왕실에서 무엇보다
소중하게 보관하던 편경의 중요재료 돌이다.
모든 일에서 기본과 원칙이 흔들리는 것은 그 기준이 되는 시금석과 같은
규준이 없어서인 경우가 많고, 또한 규준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더 우선시하는 상위 기준을 적용하거나, 아니면 이 규준을 평소에 잘 적용하고
있지 아니하고 자주 되돌아 보지 않는 관행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종묘의 등가와 헌가 악기 도설 《오례의》 |
편종(編鍾) 현재 사용한다.
《문헌통고》
〈소서(小胥)〉에 “대체로 종과 경(磬)을 다는 것은, 반(半)을 도(堵)라고 하고 전부를 사(肆)라고 한다.” 하였는데, 주에 이르기를, “종과 경을 엮어서 달 때, 두 층에 각각 8매(枚)씩 16매를 한 틀 〔簴〕***에 단 것을 도라고 하고, 종 1도와 경 1도를 사라고 한다.” 하였다. 지금의 대성악(大晟樂)이 전대의 제도를 근본으로 하여 역시 16매를 쓰는데, 12매는 정성(正聲)의 종이고, 4매는 청성(淸聲)의 종이다.
(*** 악기다는 틀 거 簴 : 1. 악기(樂器) 다는 틀 2. 종ㆍ경쇠ㆍ북 따위를 다는 틀의 기둥대 )
《주례도》
《예서》에, “종을 다는 틀의 세로로 세운 것을 거(簴)라고 하고, 가로로 댄 것을 순(簨)이라고 한다. 순 위에 숭아(崇牙)를 두고, 거 위에 업(業)을 설치한다. 업 위에 깃〔羽〕을 꽂고, 양쪽 끝에 벽삽(璧翣)을 둔다. 종을 다는 틀은 맹수〔臝〕 따위로 장식하니, 두꺼운 입술에 꽉 다문 입, 튀어나온 눈에 짧은 귀, 큰 가슴에 화려한 꽁무니, 큰 몸체에 짧은 목과 같은 모습이다. 그 소리가 크고 웅장하니, 종에 알맞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편경(編磬) ㅡ 현재 사용한다.
해설은 위에 보인다.
《주례도》
“경을 다는 틀은 날짐승〔羽〕 따위로 장식하니, 날카로운 부리에 갈라진 입술, 작고 가는 눈에 긴 목, 작은 몸체에 납작한 배와 같은 모습이다. 그 소리가 맑고 높아 멀리까지 들리니, 경에 알맞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ㅡ <종묘의궤 제1책>
청의정(淸漪亭)의 우물마루
- 천정부위 태양을 상징하는 하늘연꽃(天蓮)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곧바로 우물마루에 바로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물을 상징하는 연화형 동자주를
세워서 미리 방비하는 관념상의 비보책(備補) 영조법(營造法)을 활용한 예로 보인다.
청의정 당호 편액
청의정 천정 중앙부위 단청 하늘연꽃(天蓮)과
부챗살 형태인 360도 방향의 선자연(扇子椽) 서까래
- 하늘연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앞의 글 < 창덕궁 금원 영화당 다회> 참조.
청성곡(淸聲曲) 한 대목을 다악(茶樂)으로 연주하다....
- 여기 청성곡의 맑은 淸 字는 청의정의 淸자와 마찬가지로
높을 청(淸)의 뜻이다.
외국인 영어해설 단체팀에서 우리 일행이 낙오되자
급히 찾으려 오신 문화재청 창덕궁 궁궐관리사무소 직원분....
궁궐 관리를 위한 CCTV 또는 문화해설사들이나 관람객들의 제보 등등
이중삼중으로 감시망이 펼쳐진 줄도 모르고서 한가하게 번개다회나 하고
있었으니, 젊은 분들에게 창피하기도 하여........... 번개다회를 한자말인
뇌다회(雷茶會)로 급조하게 된 연유이다.
옥류천 권역 들머리부인 취한정에서 다시 돌아본
소요정, 태극정, 그리고 농산정
이제서야 부랴부랴 앞팀이 된 한국어해설 뒷팀을 쫓아가기 시작하고....
취규정을 지나 연경당(演慶堂)으로 가는 길.....
후원 내에서 가장 검박(儉朴)한 정자의 표상인
청심정(淸心亭)은 보수공사로 출입금지.....
연경당 가까이에 있는 애기똥풀 군락지....
- 한달 전 쯤에 후원 자유관람시 왔을 때에는
이곳에 아기 까치들이 모여 있었는 데.....
자유관람은 봄가을 두차례 씩 각각 열흘 동안만 허락된다.
부지런히 뒷팀을 따라가는 일행들.....
발길은 뒷팀을 따라서 연경당으로 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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