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22. 18:21ㆍ우리 이웃의 역사
“최근 200여 년의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로스차일드 가는 두 가지 큰 사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건 다름 아닌 전쟁과 혁명이다. 전쟁이든 혁명이든 교전에 임하는 쌍방 모두 규모가 상당하고 조직적인 폭력 행동을 위해 필연적으로 대량의 자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ㅡ 닐 퍼거슨(Niall Ferguson, 하버드 대학 역사학과 교수)
때는 1866년 7월 3일의 여명 즈음이었다. 이날 보헤미아의 사도바 마을(지금의 체코 경내) 쾨니히츠레그 요새 부근에는 새벽부터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3만 5,000여 명에 이르는 부대원들은 사납게 내리는 비를 뚫고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젊어 보이는 병사들의 윤곽 뚜렷한 얼굴에서는 긴장과 흥분, 기대가 잔뜩 흘러넘쳤다. 이들은 다름 아닌 프로이센의 엘베(Elbe) 군단 병사들로, 모두 자신들이 공격해야 할 적이 20만 대군의 오스트리아 - 작센 연합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수적으로만 보면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올, 프리드리히 카를 친왕이 지휘하는 8만 5,000명의 프로이센 제1군단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원래 프로이센 총참모장인 헬무트 몰트케(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 장군의 전략적 배치에 의하면, 훗날 프로이센의 빌헬름 2세가 되는 황태자가 직접 지휘하는 제2군단의 10만 대군 역시 동시에 이 공격에 참여해야 했다. 그러나 이 부대의 주둔지가 전보로 연락이 가능한 범위 밖에 있었던 탓에 제때에 명령을 받아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다.
* 프로이센(preussen) 프러시아로도 불리는 독일의 전신 국가
그럼에도 엘베 군단은 지나치게 서둘렀다. 이로 인해 이들은 자신들의 공격선을 충분하게 넓히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의 화력은 제1군단의 공격 루트를 뛰어넘어 국면이 일거에 혼란에 빠졌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대군의 반격을 받아 집중 포격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아침 11시가 돼서는 공격이 완전히 저지당해 급기야 예비대까지 투입해 적의 정면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사실 이때가 오스트리아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기병대를 동원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면 프로이센의 대군을 격퇴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중했던 오스트리아의 사령관 베네데크 원수는 기병을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로써 쌍방은 혼란한 전장에서 상당 기간 대치를 계속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황은 프로이센 군대에게 훨씬 더 불리했다. 패배는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 몰트케와 함께 전선을 누볐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갑자기 뭔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전장의 동쪽 몇 킬로 밖에서 나무 모양의 물체들이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몰트케는 망원경으로 그 모습을 잠깐 살펴본 다음, 직접 군대를 독려하기 위해 전선으로 달려온 바로 옆의 빌헬름 1세에게 흥분에 겨운 어조로 황급히 말했다.
“폐하, 우리는 이 전투에서 이길 뿐 아니라 전체 전쟁에서도 확실하게 이기게 됐습니다.”
그가 단정적으로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목격한 나무처럼 움직이는 물체들이 바로 프로이센 제2군단의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참이나 떨어져 있던 2군단은 어떻게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게 됐을까?
빌헬름 1세의 행동에 답이 있다. 엘베 군단과 제1군단이 오스트리아 군대에게 고전하자 지체하지 않고 전령을 불러 30킬로미터를 내달려 자신의 명령을 황태자에게 전달하도록 한 것이다. 제2군단은 이 명령에 따라 즉각 북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오후 2시 30분, 제2군단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북쪽 방어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오스트리아 군대의 방어선은 곧 무너졌다. 승리를 목전에 뒀던 베네데크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후 3시에 병사들에게 전 방어선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군대의 공세는 대단히 맹렬했다. 오스트리아 제1군단 역시 이에 기병을 내세워 반격을 가했다. 그래야 포병 부대와 인근 부대의 철수를 지원, 엄호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오스트리아 제1군단의 피해는 엄청났다. 20분 만에 무려 1만 명의 병사들이 전사할 정도였다. 제1군단이 거의 궤멸됐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전황이었다. 그러나 이 반격으로 오스트리아 군대는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결국 약 18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완전히 포위를 뚫고 바늘구멍에서 벗어나듯 성공적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프로이센 군대는 한때 위태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했던 사도바 전투를 결정적인 승리로 이끌었다. 10일 후 프로이센 군대는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까지 압박해 들어갔다. 빈에서 고작 6킬로미터 떨어진 브로츠라프 요새 역시 공격해 점령했다. 빈을 함락시키고 오스트리아를 정복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때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국왕 빌헬름 1세와 수상 비스마르크, 총참모장 몰트케 장군 등이 뜯어말리기 어려울 만큼 격렬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빌헬름 1세의 생각은 간단했다. 지척 거리에 있는 빈을 내친 김에 확실하게 공략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군인의 시각을 가졌던 몰트케 장군의 입장 역시 비슷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꽉 잡아 일거에 고립무원 상태가 돼버린 빈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달랐다. 오히려 ‘숙성된 포도주에 물을 부어 중화’ 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때 빌헬름 1세에게 빈에 대한 공격을 포기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의 생각은 오로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상황을 이용해 하루라도 빨리 오스트리아와 정전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만 맞춰져 있었다. 그로서는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의 일원에서 배제시키기만 하면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히 빌헬름 1세는 계속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고 공격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다급해진 비스마르크는 바로 승부수를 띄웠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사표를 내겠다는 협박을 가한 것이다. 심지어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겠다는 위협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논쟁은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결과는 비스마르크의 승리였다. 빌헬름 1세는 매우 고통스런 어조로 공격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그의 본심이 아니었다. 국가 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당시의 기록도 ‘빌헬름 1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대국적인 견지의 양보’ 를 한 사실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 독일 연방(Deutscher Bund) 당시 프로이센은 소독일주의 하의 통일, 오스트리아는 대독일주의 하의 통일을 주장. 전쟁도 이런 의견 차이 때문에 일어났음. 이때 비스마르크는 대독일주의 통일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의 체면을 세워주고 통일에서 배제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고 생각했음
얼마 후 프로이센은 정말 땅 할양도 배상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이른바 성하지맹을 오스트리아와 체결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그저 독일 연방에서 퇴출되는 운명만 감수하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누가 보더라도 엄청나게 유리한 전황임에도 불구하고 빈을 공격해 전과를 확대할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세계 전쟁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 성하지맹(城下之盟) 성 아래에서의 맹세. 굴욕적인 강화나 항복을 의미
그러면 비스마르크는 왜 사표와 투신까지 거론하며 빌헬름 1세를 위협하는 배수의 진을 쳤을까? 왜 국왕의 뜻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빈을 코앞에 둔 프로이센 군대의 진격을 반대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의 해답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유럽 세력의 균형을 위한 전략적인 고려와 관계가 있었다. 달리 말해 다른 유럽 국가들이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철저하게 격파하여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급작스레 발돋움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프로이센 군대가 계속 빈을 공격하여 점령할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열강은 분명 무력간섭을 통해 프로이센의 독일 연방 통일을 저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18만 명에 이르는 오스트리아 대군이 포위를 성공적으로 돌파한 다음 수도 빈을 전력을 다해 지키려 했다는 사실 역시 비스마르크가 소극적으로 나온 이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프로이센은 사도바 대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대군의 주력 부대를 완벽하게 섬멸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급하게 공격에 나선다면 성공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비스마르크는 걸출한 전략가답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상황을 판단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비스마르크는 걸출한 전략가라기보다 행운이 뒤따른 모험가였다. 4년 후에 일어난 보불 전쟁의 뒤처리를 보면 이렇게 단언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게 취했던 입장과 완전히 딴판인 자세를 보였다. 우선 패전국 프랑스를 너무 심할 정도로 몰아붙여 알사스와 로렌 두 지역을 할양하도록 강요했다. 또 전쟁 배상금 50억 프랑도 물어내도록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자존심과 자부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자연스레 프로이센에 대한 앙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를 미래 독일의 진정한 전략적 적국인 영국에게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사실 독일은 작심하고 프랑스에게 모욕을 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훗날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갈등을 이용할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단기간에 세계적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겠다는 목적을 실현하려 했다면 더욱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단견(짧은 안목)은 독일에게 강력하고도 정복하기 어려운 적을 만들고야 말았다. 더불어 독일의 부상을 어떻게 해서든 막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영불 동맹까지 초래했다. 독일이 훗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참패한 것은 비스마르크의 멍청한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빈을 코앞에 두고도 갑작스레 전쟁을 중지한 배후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7주째에 이르렀을 때, 대군을 빈 코앞에까지 진군시킨 그의 자금 동원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프로이센 군대가 직면했던 당시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프로이센의 역사적인 급부상 과정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금융이라는 파워가 발휘한 결정적인 역할에 대해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과 혁명 뒤에 숨어 있는 금융 파워를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역사의 전모를 제대로 밝힐 방법이 없다.
▣ 출처 : 화폐전쟁 2 : 금권천하(랜덤하우스), 쑹홍빙 지음. [출처] [화폐전쟁] 갑작스레 멈춰버린 전쟁|작성자 레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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