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전쟁] 오펜하임 : 쾰른의 금융 패주 / 화폐전쟁 제2부

2014. 6. 22. 18:34우리 이웃의 역사






       


[화폐전쟁] 오펜하임 : 쾰른의 금융 패주  화폐전쟁 제2부 

2013/05/2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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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4년 아브라함 오펜하임은 로스차일드 가의 창시자인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손녀인 23세의 샤를로테 베이푸스와 결혼하는 기쁨을 맛봤다. 이후부터 그의 앞길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부와 권세가 날로 커져 부의 경우 장인과 처삼촌들에 필적하게 됐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의 재정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던 암셸, 오스트리아 금고 열쇠를 쥐고 있던 살로몬, 런던 금융 타운을 좌지우지하던 네이선, 이탈리아 세수(稅收)를 장악하고 있던 카를, 파리의 은행을 완전히 정복한 제임스 등이었다.

 

  천하의 로스차일드 가와 사돈 관계를 맺은 오펜하임 가도 물론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유대인 중에서 최고 계급이었던 ‘궁정(宮廷) 유대인’ 에 속했다. 집안의 융성은 1789년 아브라함 오펜하임의 아버지인 살로몬 오펜하임이 겨우 열일곱 살의 나이에 본(Bonn)에서 오펜하임 가 은행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중에 이 은행은 쾰른으로 기반을 옮겼다. 나이는 어렸으나 아버지를 따라 금융시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살로몬 오펜하임은 이미 신흥 자산 계급의 재력이 급속도로 확장되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봉건 귀족 세력이 점차적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사실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챘다.

 

  사회 주도적인 지위에 있던 세력이 다른 각종 사회 그룹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상실해갈 때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권력 투쟁에 따른 분열 국면이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도 이런 현상은 늘 반복돼왔다. 이를테면 주(周)나라 천자가 힘을 잃으면서 춘추오패(春秋五覇) 시대가 도래한 것 외에 동한(東漢) 제국의 해체와 이에 따른 삼국의 정립(鼎立), 진(晋) 왕조 내부의 분열과 오호(五胡)의 득세, 당(唐)나라의 번진(藩鎭) 할거와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의 도래 등이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왕조들이 통제력을 상실하자 곧바로 권력 진공 상태가 도래한 다음 내외부의 신흥 세력이 급부상하여 사회를 완벽하게 재편한 것이다.

 

  서양 역시 동양과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이윤 추구를 핵심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가 18세기 말엽 유럽 대륙에 날로 세력을 떨침에 따라, 사회 각층을 속박했던 기존의 봉건 귀족 통치와 종교의 신권 세력이 무너져 내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쇠락한 사회 전통 권력의 기반은 이처럼 뿌리째 흔들렸다. 대신 금전의 권력이 각종 사회 구조의 틈과 권력이 무너져 내린 폐허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을 구가했다. 이들은 서로 결탁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한 다음 모든 사회 시스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살로몬은 이런 시세를 너무나도 잘 읽었다. 전통적인 궁정 대출이나 화폐 교환 사업에서 정부 채권의 인수 및 시장간 차익거래(Inter-market Arbitrage) 등의 신흥 사업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결정은 바로 내려졌다. 이 결정은 당연히 성공으로 연결됐다. 1810년 오펜하임 가 은행의 자산은 100만 프랑에 이르러 일류 은행 가문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야심이 끝이 없었던 살로몬은 이 정도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곧 로스차일드 가의 성공 모델을 따라 방대한 금융 제국으로 발전하겠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세우고, 이를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사업 수법이 탐욕스럽고 마지노선이 없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오죽했으면 나중에 사돈이 되는 로스차일드 가에서조차 그를 몹시 부담스러워 했을까? 이 사실은 1814년 3월 18일 로스차일드 가가 암스테르담의 합작 파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오펜하임 가의 수법에 대해 경계할 것을 일깨운 내용이다.

 

 

  “우리는 제임스가 있는 그곳(파리의 로스차일드 지점)과 쾰른의 오펜하임 가에서 보낸 자금이 당신들에게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뻤습니다. 쾰른의 오펜하임 가에서는 우리 사촌형을 통해 다시 일단의 자금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오펜하임 가에서 보내는 물건에 대해서는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자세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탐욕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매번 규칙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상한선 없는 주문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익은 모두 그 사람들 것이 되고 맙니다.”

 

 

  살로몬 오펜하임은 전략적 연맹에 눈을 돌릴 줄도 알았다. 그는 이를 위해 결혼을 통한 인맥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는 노력 역시 잊지 않았다. 1813년 그의 노력은 첫 결실을 맺었다. 고작 열다섯 살에 불과한 자신의 딸을 프랑스 파리의 저명한 유대계 은행 가문인 풀드 가의 아들 베네딕트 풀드(Benedict Fould)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그의 눈은 과연 정확했다. 이후 풀드 가는 나폴레옹 3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프랑스 황제로 등극시키는 저력을 과시했다. 당연히 이 결혼 동맹을 통한 유대는 프랑스 자본 시장에 대한 오펜하임 가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두 집안이 공동으로 6만 프랑을 출자해 만든 유명한 풀드 - 오펜하임 은행(House of B. L. Fould & Fould-Oppenheim)은 바로 이 끈끈한 유대의 산물이었다.

 

  1815년 프랑스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참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의 결과는 프랑스에게 더 큰 수모를 안겨줬다. 배상금이 너무 가혹했던 것이다. 특히 과거 수없이 프랑스에 정복당한 뼈아픈 경험을 했던 프로이센은 이 과정에서 집요한 입장을 보였다. 전쟁 배상금을 무려 1억 7,000만 탈러(Thaler, 프로이센 은화 1탈러는 3.54프랑임)나 요구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이 거금을 지불하기란 사실 불가능했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엄청난 사업을 대가로 받을 수 있었다. 이때 오펜하임 가의 본거지인 쾰른과 라인 지구는 프로이센에 의해 라인 주로 편입되었다. 신생 프로이센의 신민이 된 오펜하임 가는 사돈인 풀드 가와 접촉을 시도해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결국 1818년 오펜하임 가는 사돈 가문과 베를린의 전통적 금융 명가 멘델스존 가까지 끌어들여 5,250만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대리 지불하는 계약을 성사시켰다.

 

  여기에서 잠깐 멘델스존 가에 대해 알아보자. 일단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계 은행 가문 중 하나라는 사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재미있는 것은 19세기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지휘자인 펠릭스 멘델스존이 이 가문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그의 할아버지가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모세 멘델스존이라는 사실까지 더하면 이 가문이 결코 녹록한 집안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일찍이 “나는 어려서 저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나중에는 유명한 아들의 아버지가 됐다.” 라고 언급하면서 뿌듯해 한 바 있었다. 이처럼 여러모로 유명했던 멘델스존 가의 은행은 1850년을 전후해서는 러시아 차르의 황실 지정 대리 은행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이들 가문은 방대한 규모의 러시아 국채를 유럽 시장에서 인수하는 사업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이들은 이 사업을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할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1818년 11월 4일, 오펜하임 가는 전승국의 배상청산위원회와 오랜 협상 끝에 최종 협의를 이끌어내는 역량을 발휘했다. 내용은 14일 내에 파리에서 5,250만 프랑을 조달해 아헨(Aachen)의 배상청산위원회에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또 이에 따른 자금 조달과 환어음, 운송, 보증 등의 각종 수속에 드는 비용은 0.75%로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는 오펜하임 가가 40만 프랑에 이르는 엄청난 수입을 올리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오펜하임 가로서는 일종의 벤처 투자를 한 셈이었다. 하기야 이 사업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동산과 부동산을 담보로 걸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이들은 이 벤처 투자에서 보란 듯 성공을 거둬 주변에서 찬사를 듣기도 했다.

 

  당시 프로이센의 전통 은행 가문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사업은 돈이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각종 수속비가 결코 많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무엇보다 그처럼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은화를 운송할 적지 않은 인력과 말들을 먹여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무장 호송의 번잡함이나 복잡한 과정 역시 골칫거리였다. 여기에 국제 은행 가문과 사업 및 인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법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5,250만 프랑의 자금을 유대계 은행 가문이 통제하고 있는 프랑스 자본 시장에서 할당해 모집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전쟁 배상금 조달 사업은 오늘날 중국 은행 간의 거래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단기금융채(Short-term Financial Bonds)나 중기채권(Medium-term Note) 발행보다 못한 사업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오펜하임 가는 이런 거액의 현금 교환과 지불이라는 쉽지 않은 작업을 파리와 쾰른 은행을 통해 환어음 한 장을 주고받고서 간단히 끝내버렸다. 오펜하임은 40만 프랑을 가볍게 벌어들인 것이다. 낙후하기 이를 데 없었던 프로이센의 은행 시스템은 갑자기 나타난 신흥 금융 인맥 네트워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풀드 가와의 결혼 동맹 이후 유럽 자본 시장에 대한 오펜하임 가의 영향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물론 이때 로스차일드 가는 여전히 유럽 금융시장에서 두말이 필요 없는 패주 중의 하나였다. 1826년 오펜하임 가와 로스차일드 가와의 사업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살로몬 오펜하임은 거의 매일 프랑크푸르트, 빈, 파리, 런던, 나폴리 등의 로스차일드 가와 밀접한 사업 정보를 교환했다. 이때는 특히 독일의 라인 강 일대의 관광자원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던 시기여서 자연스럽게 라인 강 일대는 영국 상류 사회 인사들이 선호하는 관광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들 부호 중 일부는 너무 많은 현금을 가지고 관광하길 원치 않았다. 오펜하임 가는 곧 이 사실에 착안해 로스차일드 가와 새로운 합작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영국 로스차일드 가가 발행한 신용증을 가진 고객에게 라인 강 일대의 오펜하임 가가 현금을 제공하는 사업이었다. 이로써 두 가문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이때 살로몬 오펜하임은 가문의 사업을 점차 아들인 아브라함 오펜하임에게 물려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펜하임 가는 로스차일드 가가 추천한 고객을 잃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샤를로테 베이푸스와 결혼한 1834년을 기점으로 오펜하임은 탄탄대로를 달리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이를 위해 결혼식 직후 처삼촌들이 있는 유럽 각 도시를 신혼여행지로 선택하고 인사를 올리는 영민함을 발휘했다. 아브라함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로스차일드 가의 다섯 형제 중 가장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영국의 네이선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그의 장점을 다시 한 번 부각시켰다.

 

 

  “남작 전하! 2년여 전 전하께서는 고객을 우리 쾰른 가문에게 추천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실수로 전하가 추천해준 고객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는 우리를 굉장히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최근 저는 운 좋게도 전하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이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저는 전하의 보살핌 아래에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주제넘게도 전하께서 우리 양 가문의 관계를 종전처럼 회복시켜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 가문을 샤프하우젠(Schaffhausen) 가보다 먼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우리 가문과의 합작과 관련해서는 전하께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제 부탁을 전하께서 받아주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최고의 경의를 갖고 전하께 영광스럽게도 이 편지를 씁니다.”

 

 

  그렇다고 오펜하임 가가 로스차일드 가에만 목을 맨 것은 아니었다. 다른 가문들과도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어 합작의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1830년 이래 합작 관계를 맺은 한스만(Hansemann) 가가 대표적 사례이다. 오펜하임 가는 이들과 철도와 해상 운수업 융자 사업에서 함께 손을 잡았다. 또 라인 철도 프로젝트 투자를 위해 새로운 주식회사 형태의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산업이 고속도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전 지역은 심각한 자금 부족 현상을 겪게 되었다. 거의 모든 회사들이 신용 한도에 내몰렸다. 사업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던 아브라함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즉각 산업과 투자를 대상으로 한 신용보험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처가인 로스차일드 가는 큰 힘을 보태는 성의를 보였다. 이후 아브라함은 세계 최초의 재보험회사를 설립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 재보험(reinsurance)

  보험 계약상의 책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다른 보험자에게 인수시키는 보험

 

  1842년에 아브라함 오펜하임은 훗날 독일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베를린의 유명한 유대계 은행 가문인 블라이흐뢰더 가와도 튼튼한 상업적 연계를 구축했다. 이 이후로 오펜하임 가의 유럽 내 인맥 네트워크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적어도 쾰른의 금융계에서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당연히 프로이센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나아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도 결코 가볍게 보지 못할 영향력을 가진 국제 은행 가문으로 발돋움했다.

 

▣ 출처 : 화폐전쟁 2 : 금권천하(랜덤하우스), 쑹홍빙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