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전쟁] 사무엘 블라이흐뢰더 : 로스차일드 가의 대리인 / 화폐전쟁 제2부

2014. 6. 22. 18:23우리 이웃의 역사






       


[화폐전쟁] 사무엘 블라이흐뢰더 : 로스차일드 가의 대리인  화폐전쟁 제2부 

2013/05/19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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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은 유럽 동부와 서부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베를린은 유럽의 지리적 중심이자 교통의 축으로서의 역할을 아주 오래 전부터 담당해왔다. 이로 인해 유럽 전역의 상인들은 늘 베를린에 운집했다. 자연스럽게 유럽 각국의 화폐들 역시 베를린에서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베를린이 로마 제국 시대부터 화폐 교환 센터가 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위상은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한 이후 더욱 강화됐다. 화폐 교환 센터로서의 필요성 역시 보다 더 분명하게 요구됐다.

 

  이때 베를린의 금융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블라이흐뢰더 가를 일으킨 중시조는 사무엘(Samuel)이었다. 주요 사업은 베를린의 현지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매매하면서 남는 차액을 챙기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가 이런 채권을 발행한 주요 목적은 전쟁 중에 남편이나 아들을 잃은 가정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데 있었다.

 

  블라이흐뢰더 가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1828년 전후였다. 이 시기에 로스차일드 가와 상업적 합작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는 그야말로 유럽 금융 권력의 최정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거물 집안과의 합작 관계 강화로 블라이흐뢰더 가는 어떤 베를린 은행 가문보다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더구나 그들은 1830년 이후 로스차일드 가로부터 정기적으로 커미션도 받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당시 베를린에서 명성을 날리던 멘델스존 가 등의 기존 은행 가문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났다.

 

  블라이흐뢰더 가는 이후 로스차일드 가의 일관된 지휘와 도움을 통해 런던과 파리,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빈, 나폴리 등의 금융시장에서 각종 금융 상품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기회를 보다 확실히 움켜쥐게 되었다. 당시 유럽 시장에서 채권과 화폐의 가격은 도시마다 달랐다. 따라서 이들 각 지역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이익을 도모하는 방법은 단 하나 외에는 없었다. 바로 정확한 정보와 적절한 시기를 꽉 잡는 것이었다.

 

  금융업 종사자들이 이 정보들에 목을 맨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보는 정말 그렇게 대단했을까? 오늘날 내로라하는 국제적인 정보 기구들이 사실은 이들 국제 은행 가문들의 상업 정보 전달 시스템의 기초 위에서 건립되었다는 사실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당시 이들 중에서 가장 선진적인 정보 시스템을 구축한 주인공은 단연 로스차일드 가였다. 광대한 정보망의 구축 범위나 신속성을 비롯해 비밀 유지, 정확성, 복잡한 정도 등의 정보 전달 시스템이 각국 정부의 시스템을 가볍게 압도할 정도였다.

 

  블라이흐뢰더 가는 이런 현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1830년대에 줄곧 로스차일드 가의 정보 전달 네트워크에 편입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사실 베를린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이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파리에서 붙인 편지 등을 베를린에서 받으려면 최소한 6일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로스차일드의 정보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5일이면 충분했다. 하루 차이가 대수롭지 않은 시간일지 몰라도, 이는 엄청난 상업적 이익과 직결됐다. 로스차일드 가는 결국 오랫동안의 관찰을 거친 다음 블라이흐뢰더 가를 자신들의 정보 시스템에 점차적으로 합류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1831년 블라이흐뢰더 가는 베를린에서 로스차일드 가의 충실한 대리인 자리를 완전히 굳혔다. 그들은 프로이센의 내정 및 금융시장과 관련한 각종 정보 등을 로스차일드 가에 부단히 전달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이때 이 가문이 흘린 다른 고급 정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를테면 네덜란드 국왕을 비롯한 유럽의 강력한 5개 정권이, 새로 탄생한 벨기에에 보인 정치적인 태도, 폴란드의 모반에 대한 러시아 차르의 태도와 입장 등이 로스차일드 가에 그대로 흘러 들어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블라이흐뢰더 가는 유럽에 만연했던 전염병의 상황, 1848년 혁명에 대한 베를린의 동향 등과 관련한 정보도 자세하게 수집하여 로스차일드 가에 보고하는 성의를 보였다. 한마디로 로스차일드 가가 사들인 황금과 채권의 안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수없이 기울였다. 말할 것도 없이 블라이흐뢰더 가가 수집, 전달한 정보들은 로스차일드 가가 구축한 유럽 정보 시스템 내에 차곡차곡 쌓였다. 또 로스차일드 가는 이 정보들을 토대로 유럽 각국의 내정과 외교 정책에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미쳤고, 전 유럽의 금융시장에서는 더욱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 1848년 혁명

  프랑스의 2월 혁명을 비롯해 전 유럽을 휩쓴 혁명을 의미함

 

  그러나 1830년대와 40년대의 베를린 금융시장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가장 두드러진 금융 상품은 철도 채권 정도였다. 따라서 프로이센 정부가 외부의 ‘자본 유치’ 를 위해 로스차일드 같은 큰손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로이센은 온갖 방법을 동원한 끝에 마침내 철도 산업에 로스차일드 가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 산업 전체에 대한 로스차일드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커져 나중에는 여러 철도 회사의 이사까지 맡기에 이르렀다.

 

  1836년은 로스차일드 가에게 특별한 해였다. 바로 영국 은행 책임자이자 전체 가문의 리더였던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세상을 떠나고 파리의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장문인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블라이흐뢰더 가가 제임스 로스차일드에게 다시 집안의 운명을 맡기던 초기에 양측의 관계는 매우 불평등했다. 무엇보다 블라이흐뢰더 가는 더 많은 이익을 제임스 로스차일드에게 보장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로스차일드 가가 제공하는 금융 네트워크의 특권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제임스 로스차일드는 블라이흐뢰더 가에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고, 항상 그들에게 로스차일드 가의 이익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다그쳤다. 이 경고는 사실 로스차일드 가가 블라이흐뢰더 가와의 합작에 완벽하게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더불어 그들이 줄곧 새로운 대리상 및 합작 파트너를 찾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의미했다.

 

  블라이흐뢰더 가는 이 특수한 채널을 더욱 확실히 유지하기 위해 항상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했다. 특히 1840년에 폭발한 독일 금융시장 대위기 때에는 자신들의 커미션까지 희생해가면서 로스차일드 가의 이익을 챙겨주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났지만 쌍방의 합작은 여전히 로스차일드 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나중에는 블라이흐뢰더 가가 커미션을 받지 못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적지 않은 손해를 감수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됐다. 물론 블라이흐뢰더 가로서는 로스차일드 가와 사업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양측의 관계는 종속 관계라고 해도 좋았다.

 

  양측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사무엘 블라이흐뢰더가 로스차일드 가의 빈 책임자인 살로몬 남작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열일곱 살 먹은 아들 게텐(Gethen) 블라이흐뢰더를 살로몬 남작에게 추천하는 진지함과 충정을 보였다.

 

 

  제 모든 충심과 가장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남작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남작께서는 너무나도 넓으신 아량과 선의의 감정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총애를 많이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됐습니다. 이는 마치 모래와 흙에서 솎아낸 티끌과 같은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남작께서는 너무나도 고귀하고 너무나도 착하신 귀인이십니다. 남작께서는 또 저를 대가문을 위해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도록 해주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살아 있기만 하다면 남작의 초상화를 영원히 저의 마음 속에 새겨두고자 합니다. 저는 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저의 은인이신 남작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지금 저에 대한 사랑과 가호를 제 아들에게도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너무나도 절절한 이 편지를 세상에 남겼던 사무엘 블라이흐뢰더는 1855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아들 게텐은 그의 염원대로 순조롭게 블라이흐뢰더 가의 새 장문인이 되었다. 바로 이 19세기 중엽 독일에도 산업혁명 열풍이 맹렬한 속도로 불어 닥쳤다. 베를린의 금융시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산업 발전에 힘입어 전대미문의 번영을 구가하기에 이르렀다. 블라이흐뢰더 가의 상황만 놓고 볼 때, 이들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여전히 로스차일드 가와 맺고 있던 요지부동의 상업적 관계였다. 이 합작 모델은 게텐이 등장하고부터 더욱 더 공고해지게 되었다. 동시에 게텐 역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서서히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베를린의 다른 많은 유대계 은행 가문들과 협력해 방대한 이익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어 사업 범위를 더욱 넓혀 야금, 철도 건설 등의 산업에도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들의 가장 중요한 합작 파트너는 다름 아닌 쾰른의 오펜하임 가였다.

 

▣ 출처 : 화폐전쟁 2 : 금권천하(랜덤하우스), 쑹홍빙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