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1. 13:43ㆍ우리 이웃의 역사
고려국(918-1393) 35대 국왕(1392-1393) 이성계실록(1392년 7월 30일 – 8월 20일)
http://blog.naver.com/msk7613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
1392년 7월 30일 고려국(918-1393) 35대 국왕 이성계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일의 교서(敎書)에 기재된 먼 지방으로 귀양보낼 사람은 무릉(武陵)·추자도(楸子島)와 제주(濟州) 등지로 나누어 귀양보내기를 청한 것에 답하기를 “교서(敎書)에 이미 ‘내가 오히려 이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했는데, 지금 또 여러 섬으로 나누어 귀양보낸다면 이는 신(信)을 잃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이 없는 땅에 귀양보낸다면 의복과 음식을 어찌 얻겠는가? 반드시 모두 기한(飢寒)으로 죽게 될 것이다. 이 무리들이 비록 기내(畿內)에 있더라도, 다시 어찌 모의(謀議)하겠는가?” 마침내 여러 주(州)에 나누어 귀양보내니, 이에 우현보(禹玄寶)는 해양(海陽)으로 귀양가고, 이색(李穡)은 장흥부(長興府)로 귀양가고, 설장수(偰長壽)는 장기(長鬐)로 귀양가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연변(沿邊)의 주군(州郡)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사자(使者)를 각 도에 보내어 우홍수(禹洪壽) 이하의 사람에게 곤장을 집행하되 차등이 있게 하니, 양광도(楊廣道)에는 상장군(上將軍) 김로(金輅)가 가고, 경상도에는 상장군 손흥종(孫興宗)이 가고, 전라도에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황거정(黃居正)이 가고, 서해도(西海道)의 서북면(西北面)에는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장담(張湛)이 가고, 교주(交州)·강릉도(江陵道)에는 예빈 경(禮賓 卿) 전이(田易)가 가게 되었다. 교서(敎書)가 처음 내리니 정도전(鄭道傳)이 이색(李穡)을 자연도(紫燕島)로 귀양보내고자 하여 경기 계정사(京畿 計程使) 허주(許周)로 하여금 잡아 보내게 하였다.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를 어렵게 여겨, 그 구처(區處)할 것을 물으니, 정도전이 대답하기를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하였다. 조금 뒤에 이색을 장흥(長興)으로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나오게 되니, 정도전의 계획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중추원사(中樞院事) 김인찬(金仁贊)이 졸(卒)하니 이성계가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를 증직(贈職)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김인찬은 무재(武才)가 있었고 이성계를 잠저(潛邸) 때부터 따라 시위(侍衛)의 공로가 있었으며, 개국(開國)할 때에 당하여 임금을 추대하는 데 참예하였다. 8월 1일 이성계가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8월 2일 공신 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였다. 현량(賢良)을, 대간(臺諫)과 6조(六曹)의 1원(員)마다 각기 산관(散官) 4품 이하와 6품 이상의 3인씩을 천거하게 하였다.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을 제정하였다. 대개 처음에 유품(流品)에 입사(入仕)하는 것을 7과(科)로 만들어 ‘문음(門蔭)’이니, ‘문과(文科)’니, ‘이과(吏科)’니, ‘역과(譯科)’니, ‘음양과(陰陽科)’니, ‘의과(醫科)’니 하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이를 주관하고, ‘무과(武科)’니 하는 것은 병조(兵曹)에서 이를 주관하는데, 그 문무(文武)·잡과(雜科)에 합격한 출신(出身) 문자(文字)는 고려(高麗)의 처음 입사(入仕)하는 예(例)와 같게 하고, 연갑(年甲)·본관(本貫)·증조(曾祖),조(祖),부(父)인 3대(三代)를 명백히 써서 대간(臺諫)에서 임금이 관원을 서임(敍任)한 뒤에 그 사람의 성명·문벌(門閥)·이력(履歷)을 갖추어 써서 대간(臺諫)에게 그 가부(可否)를 구하던 서경(署經)하되, 7과(科)를 거쳐 나오지 않은 사람은 유품(流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며, 매양 제배(除拜)할 때마다 맡은 관청에서 그 출신(出身) 문자(文字)를 상고하고 난 후에야 고신(告身)을 내어주는 출사(出謝)에 서경(署經)함을 허락하였다.
수령(守令)의 전최법(殿最法)을 제정하였다. 무릇 대소(大小) 목민관(牧民官)들은 모두 30개월로써 1고(考)로 삼고 임기가 차서 대체(代遞)된 뒤에 경력(經歷)한 녹봉(祿俸)의 달을 계산하여 같은 부류를 선발해서 승진 제배(除拜)에 빙고(憑考)하고, 그 수령(守令)의 욕심이 많고 잔인 포학하고 무능하고 유약하고 게으르고 용렬하여 직무를 감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각 도의 감사(監司)가 그 실상을 조사하는 데 따라 모두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게 하고 이내 본도(本道)의 한량관(閑良官) 내에 공평하고 근실하고 청렴하고 재능 있고 재주와 덕망이 다 갖추어진 사람을 추천해 뽑아서 임시로 사무를 대리하게 하고 예수(禮數)로써 임명하여 공무를 집행하게 하며 직명(職名)을 위에 보고하여 계문(啓聞)에 빙고(憑考)하게 해서 제수(除授)하고 그 덕이 있고 재능이 있어 공적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재임(在任)에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하여 쓰게 하였다. 도당(都堂)에서 대장경을 조각하기 위하여 설치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폐지하기를 청하였다. 8월 5일 도당(都堂)에서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를 폐지하기를 청하였다. 8월7일 강씨(康氏)를 세워 현비(顯妃)를 삼았다. 왕자(王子)를 여러 군(君)으로 봉(封)하여, 이방우(李芳雨)는 진안군(鎭安君)이라 하고, 이방과(李芳果) 는 영안군(永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 節制使)로 삼고, 방의(芳毅)는 익안군(益安君)이라 하고, 이방간(李芳幹)은 회안군(懷安君)이라 하고, 이방원(李芳遠)은 정안군(靖安君)이라 하고, 서자(庶子) 이방번(李芳蕃)은 무안군(撫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 節制使)로 삼고, 부마(駙馬) 이제(李濟)는 흥안군(興安君)이라 하여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삼고,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의 아들 이양우(李良祐)는 영안군(寧安君)이라 하였다. 왕요(王瑤)를 봉하여 공양군(恭讓君)으로 삼아 간성군(杆城郡)에 두고, 요(瑤)의 아우 우(瑀)는 귀의군(歸義君)으로 삼아 마전군(麻田郡)에 두어서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를 주관하게 하고, 고려의 왕대비(王大妃)안씨를 봉하여 의화궁주(義和宮主)로 삼았다. 전주(全州)를 승격시켜 완산부(完山府)로 삼고, 류구(柳玽)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 각 도의 수령(守令)과 유학 교수관(儒學 敎授官)과 역승(驛丞)에게 본직(本職)을 그 전대로 주었다. 8월 8일 이방원을 동북면(東北面)에 보내어 4대(四代)의 능실(陵室)에 제사를 지내어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고, 이내 능호(陵號)를 올리니, 황고(皇考)는 정릉(定陵), 황비(皇妣)는 화릉(和陵), 황조(皇祖)는 의릉(義陵), 황조비(皇祖妣)는 순릉(純陵), 황증조(皇曾祖)는 지릉(智陵), 황증조비(皇曾祖妣)는 숙릉(淑陵), 황고조(皇高祖)는 덕릉(德陵), 황고조비(皇高祖妣)는 안릉(安陵)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를 마전군(麻田郡)에 옮겨 봉안(奉安)하여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개성 소윤(開城 少尹) 함부림(咸傅霖)을 경상·전라·양광도(楊廣道)에 보내어 수령(守令)의 유능하고 유능하지 못한 것과 민간(民間)의 기쁘고 근심되는 것을 살피게 하였다.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대학사(大學士) 민제(閔霽)에게 명하여 문묘(文廟)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게 하였다. 8월 9일 봉상시(奉常寺)에 명하여 4대(四代)의 신주(神主)를 만들게 하였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최영지(崔永沚)를 보내어 평안도인 서북면을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8월 11일 이성계가 여러 신하들의 조회를 앉아서 받았다. 왕위에 오른 이후로 겸양(謙讓)으로써 조회를 받을 적에는 반드시 섰었는 데, 이 날에는 여러 신하들이 땅에 엎드려 앉아서 받기를 굳이 청하므로 이에 앉았다. 예조 전서(禮曹 典書) 조박(趙璞)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신 등이 삼가 역대(歷代)의 사전(祀典)을 보옵건대, 태묘(太廟)·적전(籍田)·사직(社稷)·산천(山川)·성황(城隍)· 공자(孔子)인 문선왕(文宣王)의 석전제(釋奠祭)는 고금(古今)에 널리 통행(通行)되었으며 국가의 상전(常典)인 것입니다. 지금 1년 12월의 정령(政令)을 기록한 예기(禮記)의 편명(篇名)인 월령(月令)의 규식(規式)대로 아래에 갖추어 기록하오니 유사(攸司)에 내려 때에 따라 거행하소서. 천자가 동지(冬至)에 하늘에 제사하는 환구(圜丘)는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 여러 신묘(神廟)와 여러 주군(州郡)의 성황(城隍)은 나라의 제소(祭所)이니, 다만 모주(某州), 모군(某郡) 성황(城隍)의 신(神)이라 일컫고, 위판(位板)을 설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매양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전물(奠物)·제기(祭器)·작헌(酌獻)의 예(禮)는 한결같이 조정(朝廷)의 예제(禮制)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봄·가을에 장경(藏經) 하루에 1백 자리를 베푸는 백고좌(百高座)의 법석(法席)과 7소(所)의 친히 행차하는 불도에 관계되는 온갖 일을 하는 깨끗한 마당인 도량(道場)과 여러 도전(道殿), 신사(神祠),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인 초제(醮祭) 등의 일을 고려의 군왕(君王)이 각기 일신상의 소원으로써 때에 따라 설치한 것을 후세의 자손들이 구습(舊習)에 따라 혁파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천명(天命)을 받았는데 어찌 전폐(前弊)를 그대로 따라 하며 떳떳한 법으로 삼겠습니까? 모두 폐지해 버리기를 청합니다.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고려의 혜종인 혜왕(惠王) · 현종인 현왕(顯王) ·원종(元宗)인 충경왕(忠敬王) · 충렬왕(忠烈王)은 모두 백성에게 공이 있으니, 또한 마전군(麻田郡)의 태조묘(太祖廟)에 붙여 제사지내게 할 것입니다.” 하니 이성계가 도당(都堂)에 교지를 내리기를 “봄·가을의 장경(藏經) 백고좌(百高座)의 법석(法席)과 7소(所)의 도량(道場)에 대하여, 그 것의 처음 설치한 근원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8월 12일 조박(趙璞) 등이 또 상서(上書)하기를 “고려의 성종인 성왕(成王)이 중화(中華)를 우러러 사모하여 문물(文物)을 흥하게 해서,백성이 그 은혜를 받고 있으며, 문종인 문왕(文王)은 근신(謹愼)하여 부조(父祖)의 왕업을 지켜 세상을 태평하게 만들어 백성들이 그 생업을 안정하였으며, 공민왕은 두 번이나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고례,백제,신라인 3한국(三韓國)을 다시 일으키고, 상국(上國)을 잘 섬겨 한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모두 동방에 공로가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또한 마전군(麻田郡)의 태조묘(太祖廟)에 붙여 제사지내게 하소서.”하니 이성계가 이를 윤허(允許)하였다.
8월 13일 고려국 태조의 주상(鑄像)을 마전군(麻田郡)으로 옮겼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령을 내려 한양(漢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게 하였다. 8월 15일 올량합(兀良哈)이 왔다. 3사 우복야(三司 右僕射) 이염(李恬)을 한양부(漢陽府)에 보내어 궁실(宮室)을 수즙(修葺)하게 하였다. 8월 18일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였다. 8월 19일 사헌부 대사헌 남재(南在)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인주(人主)의 동정(動靜)은 모든 백성이 보는 바이며 뒷 세상에서 본받는 바이온즉 창업(創業)의 군주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이 달 16일의 도승지(都承旨) 신(臣) 안경공(安景恭)의 전지(傳旨)를 보옵건대 온정(溫井)에 거둥하실 때에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 외에 각 사(司)의 숙위(宿衛)또는 임금에게 근시(近侍)하던 성중 애마(成衆愛馬)들에게 시종(侍從)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일의 간요(簡要)함을 숭상하시어, 만약 예절 갖추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신다면 대간(臺諫) · 2군(二軍)·6위(六衛)의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 도합 16명이 한 자리에 모여 군사(軍事)에 대한 일을 의논하던 중방(重房) · 조회(朝會)의 의례(儀禮)를 관장하는 통례문(通禮門) · 사관(史官) 각 1원(員)씩이 호종(扈從)하게 하여, 뒷 세상에서 경솔한 행동을 할 단서(端緖)를 개시하지 말도록 하소서.”하니 이성계가 그대로 따랐다.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이 이성계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여러 공신의 부인들도 또한 중궁(中宮)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문하부 낭사(門下府 郞舍)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이인수(李仁壽)는 본디부터 재주와 덕망이 없으며 다만 음식을 요리하는 일만 알았을 뿐이온데, 지금 새로운 정치를 하는 시기를 당하여 외람히 추부(樞府)에 오르게 되니, 사림(士林)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관직을 파면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하니 이성계가 장무 낭사(掌務 郞舍)인 류두명(柳斗明)을 불러 “누가 이 의논을 꺼내었는가?”하니 “신이 장무(掌務)가 된 까닭으로 먼저 의논을 꺼내었습니다.”하니 이성계가 이르기를 “이인수가 비록 불초(不肖)하지마는 내가 그로 하여금 병권(兵權)을 잡지 못하게 하고, 또 정병(政柄)을 잡지 못하게 하고 다만 대궐 안에서 쓸 음식물을 만들던 요리사인 사옹(司饔)만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 하물며, 지금 온천(溫泉)에 수가(隨駕)하고 있으니 다시 청하지 말라.”하였다. 8월 20일 어린 서자(庶子) 이방석(李芳碩)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 처음에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이성계가 강씨(康氏)를 존중하여 뜻이 이방번(李芳蕃)에 있었으나, 이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사적으로 서로 이르기를 “만약에 반드시 강씨(康氏)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 아들이 조금 낫겠다.”고 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이성계가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장자(長子)로써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써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하니, 이성계가 드디어 뜻을 결정하여 세자로 세웠다.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위차(位次)를 정하게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고려 왕조의 임금의 자리는 공민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요망한 승려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사이를 틈타 도둑질해 차지하여,주색(酒色)에 빠져 무도(無道)한 짓을 하고, 마음대로 살육(殺戮)을 행하였으며, 무진년에 함부로 군대를 일으켜 장차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려고 하는데, 여러 장수들이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키니,우(禑)는 그제야 그 죄를 스스로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전했으니, 왕씨(王氏)가 이미 끊어진 것이16년이 되었는데, 그래도 오히려 종친(宗親) 중에서 택하여 정창 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로써 임시로 국사(國事)를 서리(署理)하게 하였다. 요(瑤)는 혼미(昏迷)하여 법도에 어긋나서, 먼 앞날을 헤아리는 대체(大體)를 잊고 눈앞의 작은 이익만 보고, 그 사친(私親)이 있는 것만 알고 공신(功臣)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전제(田制)는 그 경계(經界)의 바른 것을 싫어하고, 공름(公廩)은 자식과 사위의 봉양(奉養)에 다 없어졌으며, 무릇 정인(正人)·군자(君子)에게는 다만 시기하고 꺼릴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죄를 가하고자 하며, 참소하고 아첨하여 면전(面前)에서 알랑대는 자에게는 다만 친근히 할 뿐만 아니라 빠짐없이 임용하여, 상벌(賞罰)은 규칙이 없어서 국법(國法)을 무너뜨리고, 용도(用度)는 절제(節制)가 없어서 백성의 재물을 해치게 하였다.
인아(姻婭)와 부인과 환관인 부시(婦寺)의 말만 듣고, 곧은 말을 하는 선비는 모두 내쫓았으니, 백성이 원망하고 신(神)이 노하여, 요얼(妖孼)이 자주 일어나고, 화란(禍亂)의 기미가 날로 발생하여 그치지 않았다. 문하 좌시중(門下 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문하 시랑 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 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의안 백(義安 伯) 이화(李和)·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장사길(張思吉)·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인옥(趙仁沃)·중추원 학사(中樞院 學士) 남재(南在)·예조 전서(禮曹 典書) 조박(趙璞)·대장군(大將軍) 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등은 천명(天命)의 거취(去就)와 인심(人心)의 향배(向背)를 알고, 백성과 사직(社稷)의 대의(大義)로써 의심을 판단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과궁(寡躬)을 추대하여 대업(大業)을 함께 이루어 그 공이 매우 컸으니,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작게 되어도 잊기가 어렵도다!
판3사사(判三司事) 윤호(尹虎)·공조 전서(工曹 典書) 이민도(李敏道)·대장군(大將軍) 박포(朴苞)·예조 전서(禮曹 典書) 조영규(趙英珪)·지중추원사 조반(趙胖)·평양 윤(平壤 尹) 조온(趙溫)·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조기(趙琦)·좌부승지(左副承旨) 홍길민(洪吉旼)·성균 대사성(成均 大司成) 유경(劉敬)·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정용수(鄭龍壽)·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장담(張湛) 등은 모의(謀議)에 참여하여 과궁을 추대하였으니, 그 공이 또한 크며, 도승지 안경공(安景恭)·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김균(金稛)·전 한양 윤(漢陽 尹) 류원정(柳爰廷)·전 지신사(知申事) 이직(李稷)·좌승지 이근(李懃)·호조 전서(戶曹 典書) 오사충(吳思忠)·형조 전서(刑曹 典書) 이서(李舒)·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 조영무(趙英茂)·전 예조 판서 이백유(李伯由)·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이부(李敷)와 상장군(上將軍) 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과 사헌 중승(司憲 中丞) 심효생(沈孝生)·전의감(典醫監) 고여(高呂)·교서감(校書監) 장지화(張至和)·개성 소윤(開城 少尹) 함부림(咸傅霖) 등은 고려 왕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과궁에게 뜻을 두고 오늘날까지 이르도록 지조를 굳게 지키고 변하지 않았으니, 그 공이 칭찬할 만하다! 위에 말한 사람들에게는 차례대로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그 포상(褒賞)의 전례(典禮)는 유사(有司)에서 거행할 것이다. 중추원 사(中樞院使) 김인찬(金仁贊)은 불행히 죽었지마는, 일찍이 극렴 등이 의심을 판단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과궁을 추대할 때에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도왔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아울러 극렴의 예(例)에 의거하여 시행하라.”하였다.
사헌부에서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이 생각하옵건대, 편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잊지 아니하고, 지치(至治)때에도 어지러움을 잊지 아니함이 나라를 다스리는 떳떳한 법칙이라 여기옵니다. 전하께서 관인(寬仁)의 도량과 용지(勇智)의 자질로써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문득 동국(東國)을 차지하여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각기 업(業)에 안정하고 있사오나, 세상이 이미 편안하고 다스려졌다고 해서 다시 먼 앞일을 헤아리는 생각이 없으면, 왕업(王業)을 창건하여 좋은 계획을 자손에게 전해 주는 계책에 어떻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천성이 살리기를 좋아하시어 죄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각기 생명을 보전하게 하시니, 큰 은혜와 지극한 덕은 하늘처럼 다함이 없습니다. 왕씨(王氏)는 5백 년 동안에 종친(宗親)과 거실(巨室)이 노비(奴婢)를 많이 모아서, 혹은 천여 명까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죄가 있어 귀양간 사람의 그 노비(奴婢)가 흩어져 도읍 밖에 있으면서 귀양간 곳에 왕래하고, 도읍에 드나들게 됩니다. 지금은 비록 국가에서 방비가 있지마는 태평이 오래 계속되면 원망을 쌓은 무리들이 실로 번성해질 것이오니, 기회를 타서 움직인다면 걱정이 적지 않을 것이옵니다. 고려 시대 5도(道) 양계(兩界)의 역자(驛子)·진척(津尺)·노비(奴婢),천민(賤民)이 거주하는 부곡(部曲)의 사람들은 모두 태조(太祖) 왕건 때에 명령을 거역한 사람들이었으므로, 모두 천역(賤役)에 당하게 했던 것입니다. 성덕(聖德)이 너그럽고 넓음이 왕씨(王氏)보다 훨씬 지나쳐서, 죄가 있는 사람도 비록 천역(賤役)을 면해 주었지마는 그 노비(奴婢)는 온전히 줄 수 없사오니 적당히 헤아려서 정하여 준 외의 나머지는 모두 관(官)에 소속시키소서.”하니 이성계가 명령을 내려 고려의 종친(宗親)과 양부(兩府) 이상의 관원에게는 노비 20명을 주고, 이하의 관원에게는 노비 10명을 주고, 그 나머지는 관(官)에 소속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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