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힘 개마무사(鎧馬武士)
투구·갑옷 입힌 말 서양보다 10세기 앞서
말도 무장시킬 정도로 철 제련기술 탁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건이 있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탁월한 지도자와 우수한 장병들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무리 많은 부하와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효율적인 작전을 구사하지 못하면 패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병력의 수에서는 비록 열세이지만 장병들의 사기가 드높고 지도자가 유효적절한 작전을 구사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전쟁사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직접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장병들에게 아무리 어려운 전투라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자신이 벌인 전투는 반드시 이기며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장병들의 사기는 올라간다. 이러한 믿음을 장병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적보다 더 좋은 무기를 지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전투에서는 장병들에게 질 좋은 갑옷, 방패, 장창, 활 등을 지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안악 3호분 대행렬도. 개마무사들이 주인공을 호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바로 현재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한국인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아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 인근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을 호령하면서 사상 최대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고구려 인들의 강인한 개척 정신에도 있지만 동시대의 다른 나라에 비추어 최첨단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鎧馬)'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말조차 강철로 된 장비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런데 고구려 기병의 경우에는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시켰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소유하고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영유한 이유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과 다른 철기 제작기술
세계적으로 볼 때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이란, 팔레스티나 등지에서는 기원전 1200∼1000년경에 연철을 열처리하여 강철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대 유럽에서 생산된 철기는 전부 연철이고 주철은 그보다 늦어 14세기경 독일의 라인 지방에서 처음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누어지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되었다.
철갑옷과 철기로 무장한 고구려병사.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반면에 선철(주철)은 보통 백색주철과 회색주철로 나누는데, 백색주철은 탄소가 탄화물 형태로 결합되어 흰색을 띠므로 백색주철(철탄소합금계 가운데서 용융점이 가장 낮은데도(1,130도) 주조성이 좋으며 강도가 높고 내마모성이 좋다)이라고 부르며 회색주철은 탄소가 흑연형태로 포함되면서 겉면에 퍼져 회색빛을 띠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한편 강철은 선철보다 보다 높은 온도 즉 보통 1,500도 이상에서 가열하여 탄소와 그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강철을 만드는 비법은 철의 용융점이 1,539도이므로 제련로 안의 온도를 1,500도 이상 올리는 것이다.
고고학사에 의하면,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도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되어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동부에서 강철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추정하며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에 성공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국의 영향을 도입하여 우리나라의 문화가 진전되었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기원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들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에서는 그 당시에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 되는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세고 조직도 훼리트와 뻬를리트가 함께 존재하며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이다.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줄칼은 년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는데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다.
철은 온도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되는데 기본 방식은 유사하다. 당시 철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이다.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선철생산 공정은 철광석을 일정한 덩어리로 만들어 숯을 여러 층으로 엇바꾸어 넣고(용재로 석회석을 소량 삽입) 밑에서 불을 지핀 다음 송풍관을 통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이때의 연로로도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하는데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050∼1,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되어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로 되며 1,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갈라진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다. 여기에서 선철을 다시 녹여 1,500도 정도로 온도를 높여 강철을 만드는데 과거의 제철 능력으로 볼 때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온도인 1,500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강철을 만드는데도 비밀이 있다. 숯(탄소)를 적절하게 배합시키면 제련로 안의 온도가 1,200도가 되어도 철의 용융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철 속에 탄소가 4..3퍼센트 정도 들어가면 철탄소합금의 용융점이 1,130도로 낮아지며 1,200도 정도에서도 탄소를 적절히 융합하면 철이 용융하는 것이다.
제련과정을 거쳐 뽑아낸 철을 괴련철(잡쇠덩이)이라 하는데 아직 불순물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다시 괴련철을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가고 단단한 철만 남는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고조선의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한반도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생산된 강철은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기술이었다.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최초의 개마무사
험한 산악지대가 많은 지리 조건 때문에 고구려는 필연적으로 내구력과 기동력이 유리한 기마병을 군 편성에서 가장 중요시했다. 그리고 기마병을 철기로 무장시키려면 먼저 철기를 생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구려에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강철 무기가 발달한 것은 고구려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데다가 고조선으로부터 뛰어난 제련기술을 이어받은 뒤에 그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고구려 개마는 크게 세 부분, 즉 말의 머리에 씌우는 말투구, 말갑옷, 말장구로 나뉜다. 말투구는 말머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통철판을 말머리 모양으로 오려서 둥그렇게 감싸 덮었다. 콧구멍 부분은 드러내거나 숨을 쉴 수 있도록 주름을 잡았고 타격을 받지 않는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쇠투구와 쇠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에게까지 쇠갑옷을 입힌 고구려의 중무장 기병들은 적에게 공포와 위협의 상징이었다. 개마무사들은 전투 제일선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고 방어전에서는 전면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호벽이었다. 개마무사들은 적의 활공격은 물론 웬만한 창으로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군은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3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에서 말투구와 말갑옷을 비롯한 개마 모형이 나왔고 3세기 중엽에는 고구려군 기병의 절반을 '철기'가 차지했다는 사실은 개마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고국원왕의 무덤이나 덕흥리 벽화무덤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면 행렬도에 왕과 귀족의 수레 제일 근처에 개마무사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고 있다. 이는 전투시나 행군시 개마무사들이 항상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개마는 13세기에야 나타난다.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다량의 개마가 출현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의 개마가 얼마나 빠른 시기에 도입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경제력과 말갑옷과 같은 우수한 장비의 대량 생산이 고구려의 국방력을 급속히 강화하여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에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다. 이 당시의 정복 전쟁에서 개마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