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 ㅡ 고구려 고분벽화

2013. 5. 14. 08:43향 이야기

 

 

 

 

1. 5~6세기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의 생활을 묘사했다!~

 

 

"안녕하세요 고두심입니다.

시대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 문자기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인들은 문자보다 더 생생한 기록을 남겼는데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 고분벽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5~6세기 고구려의 가장 화려한 모습을 담고 있는 고분벽화를 만나보겠습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4기를 한곳에 모아봤습니다.

어떤 것이 있는지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와!~무덤이라기보다는 고대미술관에 들어온 기분입니다.

그런데 저기 모서리에 그린 기둥이며 보루가 마치 실제 집을 표현한 것 같지 않습니까?

 

고구려 고분벽화는 무덤 주인이 실제 살았던 집은 물론이고,

생전의 생활을 아주 자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평남 강서 덕흥리고분.

 

저기 가운데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이 무덤 주인인데요

이름은 진이고 유주자사라는 고위직 공무원이었습니다.

 

저기를 보면 유주자사라는 분이 각지에서 모인 태수들에게 업무보고를 받고 있지요.

또 한쪽에서는 임명장을 주는 듯 하구요.

이 벽화를 통해서 여기가 무덤의 주인이 공적인 업무를 보는 사랑채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쪽에 방이 또 하나 있는데요 들어가볼까요?

 

이쪽에 방은 안채, 즉 살림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당에서는 말을 타고 과녘을 맞추는 놀이를 하고 있구요,

이런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걸로 봐서 마당이 무척 넓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저쪽에는 침실입니다.  

 

주인이 안쪽에 앉아 있는데

낮에는 휘장을 거둬 생활을 했고,

잠을 잘 때는 휘장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번엔 거실을 한 번 구경해볼까요?

 

 

 

고구려 수도 집안에 있는 무용총 벽화입니다.

 

이 벽화에는 고구려 저택의 응접실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요,

평상이 여러 개 모여있고, 사람들이 그 평상에 신을 신고 올라갑니다.

 

당시만 해도 마루 전체에 구들을 깔지 않고

한쪽 구석에만 놓는 쪽구들을 했기 때문에 좌식과 입식을 겸했다고 합니다.

 

마침 손님이 와서 접대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어떤 음식을 대접했는지 볼까요?

 

 

 

여기 시종의 모습을 볼까요?

손에 칼을 들고 있는데요, 추운 지방이라 고구려인들은 육식을 즐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고기음식을 내놓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시종은 손님 앞에 먹기좋게 고기를 잘라줬을테구요.

 

자, 이번에는 황해도에 있는 안악3호분으로 가보겠습니다. 

고구려 저택에는 안채 앞으로 이런 부속건물이 있었습니다.

 

 

 

다락처럼 보이는 이곳이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입니다.

곡식창고에서 곡식을 꺼내서 이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습니다.

 

다 찧은 곡식을 우물로 가져가서 씻습니다.

두레박을 내려서 두여인이 물을 길러 올리는 모습이 보이죠?

 

집안에 이렇게 푸주간도 있었죠.

방금 사냥이라도 한 것처럼 고기가 아주 가득합니다.

 

여기가 고구려의 부엌입니다.

 

아궁이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고,

시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습니다.

 

시종들이 부지런히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요,

부엌 가득 놓여있는 단지나 항아리들에는 각종 장이나 술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2. 고구려 고분벽화속 '고비(高鼻)'!

                    고구려에는 서역인들이 살고 있았다!~  

 

 

지금까지 벽화속에 담겨있는 고구려 저택의 모습을 보셨는데요,

이번에는 저택 밖깥에서는 어떤 일을 하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 수도 집안에서 발견된 장천1호분속에 그려진 벽화입니다.

 

10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벽화속에는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씨름을 하는 사람, 사냥을 하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춤추는 무희...

 

어떠세요?

한편으로는 무척 여유로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역동적인 고구려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고구려의 벽화속에는 아주 특이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벽화속에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코가 무척 높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모습의 서양인들 모습이 분명한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에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을까요?"

 

중국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고분은 현재까지 모두 2만여 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벽화가 남아있는 고분은 총 100여 기.

대부분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조성되었다.

 

 

최근 벽화를 도굴 당해 충격을 안겨준 장천1호분.

다행히 도굴되기 전 촬영이 남아있어 실물을 만나볼 수 있다.

 

이것이 백희기악도다.

그러나 심한 훼손으로 내용을 알아보기 쉽지 않다.

 

백희기악도에는 어떤 그림들이 그려져 있을까?

 

장천1호분 발굴보고서를 찾아보았다.

이것은 1970년 발굴 당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묘사도다.

지금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되어 나타나 있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벽화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고비(高鼻)'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고비(高鼻)',

'코가 높고 크다'는 것이다.

 

백희기악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40명,

그 중 코가 큰 사람은 모두 9명이다.

 

뭔가에 놀라 넘어진 이는 코가 크다.

도망가는 남자도 맨발에 코가 높다.

 

남자들 뿐만이 아니다.

수레를 끄는 여자들도 코가 높다.

 

마부로 보이는 두 남자들은 한눈에도 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도 코가 높고 큰 편이다.

 

 

 

벽화속에 등장하는 고구려 남자는 눈썹이 가늘고 코가 작은 편이다.

따라서 고비인들은 고구려인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여인도 코가 큰 여인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장천1호분 백희기악도에 등장하는

코가 높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역계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머리모양은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를 늘어트린 상태에서 자기일들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들은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교류 과정에서

북중국의 어떤 지역에서 흘러들었거나

아니면 내륙아시아의 유목 계통 사이에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5세기 중엽 고구려에는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북연이 멸망하자 주민들이 대거 고구려로 망명하는데 

그 행렬이 무려 80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연나라 임금이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4년(436년)

 

 

 

그 사건이 일어나기 100여 년전,

갈족이 중국 동북구에 후조를 세웠다.

 

후조는 이내 전연에게 멸망당하고,

갈족은 북연에 의해 통합된다.

 

이때 살아남은 갈족은 훗날 북연이 망하자

고구려로 향하는 망명대열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용성에 살았던 민족구성을 보면

고구려인들도 있고, 중국 한족도 있고,

북연을 세운 선비족의 모용씨도 있는데,

그외 잡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이 잡족에는

후조를 세우는데 활약한 갈족이라든가 여러 계통의 종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연 멸망 이후 흘러든 많은 종족 가운데

서역 계통의 사람들도 섞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그러나 학자들은 서역인이 들어온 가장 큰 이유로 문물교류에 두고 있다.

 

"불교 전래와 관계해서 얼굴이 거무튀튀한 서역 계통의 승려들이 고구려까지 오는거죠.

먼 지역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벽화가 보여주는 것이죠.

모델이 중국쪽의 미술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죠."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고구려 벽화속에 서역인은 또 있다.

 

씨름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메부리코에 눈이 부리부리하다.

맨손으로 힘을 겨루고 있는 이 남자도 서역인이다.

이렇듯 당시 고구려에 많은 서역인들이 살고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속에서 만날 수 있는 외국인들입니다.

한눈에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벽화속에 이 외국인들이 서역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역이라는 말은 중국 한나라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중국 서쪽에 있는 타림분지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일컬어 서역이라고 했는데요,

그후로는 점차 범위가 넓어져서 멀리 인도까지 서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멀리 고구려까지 들어가 살고 있었던 것이죠.

 

고구려 벽화속에 서역인들은 불교와 관련해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몰이꾼처럼 허드레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고구려사회에 오래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고구려와 서역의 교류가 그만큼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각종 곡예, 악기 요고, 빙빙 도는 춤!~

          고구려의 다양한 놀이문화는 서역으로부터 전해졌다!~ 

 

 

서역인외에도 고구려 고분벽화속에는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단서가 또 있다.

 

장천1호분 백희기악도에는

고구려인들의 다양한 놀이문화가 소개되어 있다.

 

두사람이 힘과 기술을 겨루는 씨름, 춤과 음악, 서커스도 보인다.

이 사람은 하늘 높이 공을 던져올리고 있고,

한쪽에서는 바퀴를 이용해 묘기를 펼치고 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 위치한 수산리 고분.

 

이 고분벽화에도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곡예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원래 모습을 복원해봤다.

 

 

 

다양한 곡예가 등장한다.

 

바퀴던지기, 높은 장대위에서 걷기, 공과 막대기를 번갈아 위로 던져올리는 묘기도 보인다. 

이렇듯 곡예는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대표적인 놀이문화의 하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내몽고에서 발견된 고분벽화에도 고구려와 비슷한 곡예가 등장한다. 

  

중국 내몽고 허린거얼 고분 벽화.

 

"예를 들어서 여기 공놀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구요.

여기 특이하게는요 바퀴에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아마도 이 손잡이를 이용해 바퀴곡예를 벌였을 거라 싶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바퀴는 아닌 것 같아요."

                                                                             - 고승길 교수, 중앙대 연극학과 

 

이 벽화에는 후한시대 유행했던 곡예가 총망라되어 있었데 

방울받기(농환 弄丸), 수레바퀴쳐서올리기(무륜 舞輪),  

그리고 다섯 개의 탁자위에 올라가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재주안식오안(安息五案)이라고 한다.

 

도립(倒立)물구나무서기를 해서 부리는 재주를 말하고 

곡예 중에는 칼로 위험한 묘기를 부리는 재주도 있다.

 

이 묘기들이 이후 고구려 벽화속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팔청리 곡예도 벽화속엔 칼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보인다.

내몽골 벽화속의 칼재주 장면과 거의 흡사하다.

 

쓰촨성 이빈 애묘 출토 연희 화상석.

 

그렇다면 고구려와 중국에서 유행한 곡예는 어디서 온 것일까?

 

중국의 역사서 <사기>는

현재 곡예가 페르시아, 즉 서역에서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돌체 마임연구소.

 

과연 고구려의 곡예는 어떤 수준이었을까?

제작진은 현재 국내 단 하나의 공연단체를 찾았다.

제작진은 이 단체에게 수산리 고분벽화를 보여주었다.

벽화속의 인물처럼 여덟 개의 공과 막대기를 던지는 묘기가 가능할까?

 

"공이 하나 정도는 가능하겠죠.

그런데 운동에너지가 다른데 공과 막대기를 같이 쓴다는 건, 

그림에서처럼 다섯 개의 공과 세 개의 막대기를 같이 던지는 것은 불가능할거다 봅니다." 

                                                                                                               - 최규호 

 

공던지기는 공의 개수와 공을 던지는 방식에 따라 난이도가 다르다.

중국의 화상석에는 공을 원형으로 던지는 방식이 보인다. 

장천1호분 곡예꾼은 공 여섯 개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한층 발전시킨 것이 공과 막대기를 같이 던지는 수산리고분의 곡예다.

   

"고구려인들은 서역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더욱 발전시켜서 그들만의 독창적인 곡예를 만들어냈는데요,

 

1,500년이 지난 지금 고구려인들의 곡예를 그대로 재현해내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고구려인들의 곡예는 무척 뛰어났습니다.

 

자, 여기를 보실까요!

그 유명한 안악3호분 대행렬도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행렬도에서 고구려 철갑기병에만 주목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행렬도속에는 고구려 문화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나 알려주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악기들입니다."

 

황해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3호분.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거대한 무덤속엔 화려한 벽화가 남겨져 있다.

대행렬도엔 철갑기병과 함께 수십 명의 악대가 행진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악기를 사용했을까?

 

 

"담고라고 하는 악기, 그 뒤에 소, 그리고 각이라고 하는 악기가 있구요..."

                                                               - 권오성 교수, 한양대 국악과

 

대행렬도의 악기는 타악기와 관악기로 구분된다.

 

메는 과 메는 종은 타악기다.

담고라고 불리는 타악기 뒤에는 관악기 이 있다.

 

이들은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

 

지난 6월 일본의 한 신사에서

고구려의 음악이 연주된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진은 그 신사를 찾았다.

 

일본 도쿄 오타마 이나리 신사.

고마가쿠 나소리 공연.

악단의 연주에 맞춰 암수용 한쌍이 즐겹게 노는 모습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이 1,500년부터 일본 황실에서 전승되고 연주되어 왔다는 고마가쿠, 즉 고구려악이다.

고마가쿠에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악기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산노쓰즈미(장구), 고마부에(고려적)

 

"일본의 아악에 속해있는 고마가쿠(고구려악)는

고대의 한반도에서 유입된 춤과 거기에 수반되는 음악으로

오랫동안 일본에서 전승되어 내려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선반도에서는 고대의 것이 사라졌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전승되어 내려온 음악과 춤의 종류입니다."

                                             - 미타 노리아키, 미즈호 가가루키아 주석악사

 

고마가쿠가 고구려 음악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산노쓰즈미라는 악기다.

 

최근 경기도 성남시 이성산성 발굴지에서 출토된 한 유물이 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던 이성산성의 저수지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마치 작은 장고를 연상시켰다.

 

양쪽은 둥근 북처럼 생기고,

가운데 허리가 잘록한 이 악기는 요고라고 불리는 악기다.

 

요고는 고구려에서 흔히 사용되던 악기로

본의 산노쓰즈미도 이 요고가 변형된 것이다.

 

"삼국시대 기록이나 그림으로 전하던 목재악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특히 이 요고의 경우에는 고구려 벽화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악기가 남쪽까지 전파되었다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배기동 교수, 한양대 박물관

 

 

요고는 고구려 벽화에 자주 등장한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당나라에서는 도자기로 요고를 만들어 사용을 했고,

 

투르판(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쿠처(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쿠처 키질석굴 벽화)에 이르기까지

요고는 아시아 전역에 널리 사용된 악기였다.

 

중국의 <악서> 권 125에 따르면

 "요고는 남만의 천축(인도)에서 나왔다"고 한다.

 

인도의 요고가 고구려까지 들어간 것이다.

 

"이 악기는 인도의 다마루라는 악기입니다.

보다시피 이것은 우리나라 장구의 할아버지격인데

이 악기는 인도에서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악기는 리듬악기로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데

이 악기가 진양악서에는 요고로 소개되어 있고

그것이 고려조에서 사용되었던 요고로 생각되고

바로 이 악기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그 요고와 같은 계통의 악기라 생각합니다."

                                                              - 전인평 교수, 중앙대 창작음악학과

 

요고를 복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요고의 수종 분석을 의뢰했다.

발굴된 요고의 파편을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결과 요고에 사용된 나무는 밤나무로 밝혀졌다.

 

"밤나무는 탄닌이라는 떫은 성분이 있어 내구성이 좋은 목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건조가 좀 어렵구요, 단단해서 건축자재나 지구재, 실질적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는데요,

강도가 필요한 부분에 많이 이용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김수철,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목제보존담당 

 

한국의 전통악기를 제작해온 장인 박성기(궁중악기 대표)가 요고 복원에 나섰다.

 

형태와 크기는 이성산성에서 발굴한 것에 맞추기로 했다.

먼저 밤나무를 요고 형태로 깍아나갔다.

워낙 단단한 터라 다른 나무의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너무의 변형을 막기 위해 칠을 하고 나무의 양옆을 쇠가죽으로 덮어씌웠다.

 

고구려인들은 요고로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

 

7세기 당나라 궁궐에서는 10부기라는 불리는 국제음악회가 열렸다.

 

* 10부기 - 연악, 청악, 서량, 고려, 천축, 구자, 소륵, 안국, 강국, 고창 - <구당서>

 

 

 

구당서에는 당시 10부기에 참가했던 각 악기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구려의 악기는 서량, 구자의 악기와 상당수 일치한다.

 

서량은 지금의 양저우지역, 구자는 중앙아시아의 구처다.

고구려는 소륵(카슈가르), 안국(부하라)과도 여러 악기를 공유하는데 둘다 먼 서역의 나라다.

 

"수나라, 당나라때의 장안으로 여러 지역의 음악이 들어왔는데

우리나라에는 고구려의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서역의 음악이라는 것이 장안의 궁중에서 교류가 된 거죠."

                                                                                               - 권오성 교수, 한양대 국악과

 

고구려와 서역 음악의 교류를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서역의 쿠처로 향했다.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위치한 쿠처.

 

한나라때 서역도호부가 설치된 이곳은 중국이 경영한 서역문화의 핵심지로

고구려 장군 고선지가 활약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쿠처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곳에 오아시스가 있다.

오아시스 앞으로는 거대한 석굴이 서 있다.

 

키질 석굴은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던 3~4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절벽에 굴을 파고 그 내부에 석굴과 불상을 꾸미는데

키질 석굴의 벽화는 쿠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다.

 

키질 38석굴천궁기악도에는  

쿠처에서 사용한 악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완함횡적이다.

 

완함은 손으로 줄을 타는 관악기,

횡적은 가로 부는 현악기다. 

 

비파.

키질 벽화에 등장하는 악기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실총엔 완함이, 5회분 4호묘에서는 횡적이 있다.

 

쿠처인들 남녀노소가 즐긴다는 무카무

1,500년 된 쿠처의 전통 노래춤과 음악이다.

 

중앙아시아의 쿠처와 고구려 음악의 공통점은 악기외에 또 있을까?

 

"쿠처음악에는 우리나라 도드리음악과 아주 흡사한 게 있습니다.

악사는 큰악기를 연주하는데 '덩~딱!~ 덩~딱!~' 이러한 장단입니다.

                                                                                     - 전인평 교수

 

도드리장단은 인도의 음악에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서역과 고구려에서 이와 같은 장단이 공통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도드리장단으로 요고를 연주해봤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요고와 현악기가 함께 연주되었음을 말해준다.

5회분 5호묘에는 이처럼 거문고와 요고가 함께 연주되는 장면이 보인다.

 

"거문고의 저음과 이 요고악기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이 요고악기가 고음보다는 거문고의 저음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 길석근, 국립국악원 정악단

 

서역과 고구려음악은 악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안악3호분 후실 무악도에는 연주자 옆에 무희가 등장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무희는 발을 꼬고 있다.

발을 꼬는 무용은 인도 전통춤 까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을 꼬는 자세는 제일 먼저 무대에 올라가서 처음 시작할 때 하는 자세가 되겠습니다."

                                                                                               - 오인우, 까탁무용가 

 

그렇다면 인도의 춤이 고구려에 전해진 것일까?

 

까탁외에 인도춤과 고구려의 춤의 공통점은 또 있다.

빙빙 도는 동작이다.

 

고구려춤을 기록한 신당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또 한 기록은 호선무춤이 사마르칸트에서 온 춤임을 기록하고 있다.

 

"고리춤호선무인데 바람처럼 빠르게 돈다." - 신당서 21 예악지 11.

 

"사마르칸트 춤은 바람처럼 빠르게 돌아서 호선무란 이름을 얻었다." - 구당서 지9 음악2.

 

"조그만한 원형의 양탄자 위에서 바람처럼 빨리 도는 동작을 위주로 하는 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 당시 고구려 시대때 가장 대표적인 춤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박재희 교수, 청주대 무용학과

 

중국 돈황의 석굴에도 호선무를 추는 무희가 등장한다.

중앙아시아의 호선무가 인도, 중국, 고구려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아 대륙적인 것도 가지고 있으면서

또 고구려 풍토가 만들어내는, 또 고구려 인간 만들어내는 그런 관점에서

고구려의 춤과 곡예는 정말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가 오늘날 세계화,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만

1,500년전 고구려이지만 오늘날에 못지않는 세계화,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 고승길 교수, 중앙대 연극학과

 

 

4.  가연, 당이 달린 바지, 점무늬옷!~

           고구려인들의 의상은 아시아 북방유목민족 계통!~ 

 

 

"지금 제가 연주한 것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로 알려진 거문고입니다.

학자들은 이 거문고도 외국의 악기를 개량한 것이라 말합니다.

 

작고 귀엽게 생긴 이 악기는 고분벽화속에 등장하는 요고입니다.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악기와 고구려인들이 추었던 춤은

멀리 인도에서부터 고구려까지 동아시아 일대가 공유한 국제문화와 같은 것입니다.

 

영토를 확장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국제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제가 입고 있는 이 의상도 고분벽화속에 고구려의 귀부인이 입고 있었던 옷입니다.

여기서도 고구려의 국제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숙명여대 채금석 교수와 함께 고구려벽화속에 나타난 의상들을 살펴보았다.

 

무용총 수렵도에서 활을 쏘는 이 남자는 소매가 좁은 저고리에 바지를 입고 있다.

무척 활동적인 모습이다.

 

"한국사람들이 속하고 뿌리를 내렸던 지역은 동북아시아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체로 기마와 수렵생활을 주로 했습니다.

 

말을 타고 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생활에 편리하도록

좁은 소매나 좁은 바지가 아주 적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채금석 교수, 숙명여대 의류학 전공

 

고분벽화를 토대로 채금석 교수가 복원한 옷이다.

성별이나 신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고구려 의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구려인들의 의상에 구조적 특징을 보면

전체적으로 직선적인 재단과 또 소매는 직선적인 소매가 붙어있고

길이는 엉덩이선을 지나는 둔부선입니다.

 

앞이 열려져 있고, 목둘레선에서 옷의 가장자리에는 선이 붙어 있습니다.  

 

또 허리에는 를 매도록 되어있는, 

또 양쪽으로 팔을 벌리면 T형을 이루는데 이러한 스타일을 카프탄스타일이라고 하고,

 

이러한 스타일의 옷은 우리 고구려 뿐만 아니라

북방계통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입었던 저고리 스타일입니다."

                                                                                                  - 채금석 교수

 

소매나 도련에 다른 천을 대는 가연장식은

고대 수메르인에서부터 이슬람지역, 쿠처에서도 나타나는데

고구려의 겉옷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활동성을 고려한 북방민족의 의상은

고구려인들이 입고 있는 바지에서도 드러난다.

 

"각저총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포즈를 보면 다리를 거의 90도 각도로 벌리고 앉아 있습니다.

해서 당이 달려있는 바지와 달려있지 않는 바지를 살펴볼 때

당이 달려있는 바지는 이렇게 90도 각도가 용이하고 활동성에 편리함을 줄 수 있는데요,

그러나 당이 달려있지 않는 경우를 보면

다리를 벌린다거나 말을 타거나 달릴 때 상당히 불편한 것으로 보입니다."

                                                                                                         - 채금석 교수  

 

당을 댄 바지

북방기마민족들이 공통적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점무늬 옷입었던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점무늬 옷은 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무늬였다.

중국 여인들의 화려한 옷에도 점무늬가 들어가 있다.

신강 투르판 지역에서는 점무늬 옷이 실물로 발견되기도 했다.

 

신강 투르판 아스타나 39호묘 출토 옷감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옷감 위의 점무늬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현재 학계에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양경애 교수는 가장 간단한 염색법인 홀치기기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고분벽화를 살펴봤을 때 홀치기기법을 할 때 콩을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콩을 사용했다는 문헌적인 증거는 아직 찾지못했지만

보통 이런 작은 무늬들이 반복해서 나오기 위해서는

작은 곡물이나 아니면 돌맹이 같은 것을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경우에는 한반도나 중국에 자생했던 콩을 손쉽게 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콩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양경애 교수, 충청대학 패션산업디자인과

 

일정한 간격으로 묶인 옷감을 붉은 염액속에 넣었다.

옷감에 물이 들 때 실로 묶인 부분만 염색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홀치기기법이다.

 

염색이 끝난 후 실을 풀어봤다.

마름모 모양의 무늬가 생겼다.

 

실을 묶은 간격과 콩의 색깔에 따라  무늬와 색깔도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점무늬 옷들도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구려의 옷, 그 속엔 세계가 담겨있다.

 

 

5. 초원길을 통한 적극적 문물 교류!~글로벌 고구려!~

 

 

"고구려는 다양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지금 고구려 강서대묘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걸작이라고 꼽히는 사신도가 있는데요,

좌청룡우백호, 남주작북현무가 그것입니다.

 

중국 산서 태원 금승촌 7호 당묘.

여기 이것은 중국 산서성에서 발견된 것으로 사신도 중에서 백호를 그린 것입니다.

 

중국의 벽화들은 대체로 생활풍속도를 바탕으로 하여 사실적입니다.

사신도의 백호를 그대로 호랑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그림을 한 번 비교해보겠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소재나 기법면에서 더욱 세련되게 중국의 벽화를 뛰어넘는 완성도를 보입니다.

 

 

 

이 벽화는 일본 다카마스 총에서 발굴된 고분벽화인데 사신도 중에서 천무를 표현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다카마스 총의 사신도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외국의 문화를 고구려 고유의 것으로 잘 소화를 시켜서

더욱 수준높은 문화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서역의 문물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서역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서역으로 가는 길 하면 보통 이 비단길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그러나  고구려는 서역으로 통하는 또 다른 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역으로 가는 대표적인 길은 실크로드다.

 

그 실크로드 위에 돈황석굴이 있다. 

천여 개의 석굴엔 불상과 다양한 벽화가 남겨져 이곳은 세계고대미술관이라 불린다.

  

 

 

이것은 돈황석굴 220호 내부에 그려진 벽화다.

벽화의 한쪽에는 각국의 사신들이 모여있는데, 그 중에 한사람이 특이한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에 깃이 달려있는 이것은 고구려조우관이다.

 

 

 

당나라 시대 외국의 사절단을 그린 왕회도(629년)에도 고구려 조우관이 등장한다.

백제, 신라의 사신과 함께 당나라에 온 고구려 사신이 조우관을 쓰고 있다.

돈황벽화에서 조우관을 쓴 인물은 바로 고구려 사신인 것이다. 

 

"당나라의 주변에 있는 주요한 국가들을 대표해서 사절단을 쭉 보냈는데

그 중에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는 것은 당나라에서 생각할 때

자기들 주변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고구려가 동쪽에 있는 나라 중에서는 가장 대표적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고구려 사절단을 그린 것 같습니다."

                                                                                  - 노태돈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고구려가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동방의 패자로 떠오르면서 중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고구려와 중국의 긴장관계를 알려주는 사건이 있다.

 

"수나라 양제가 돌궐 추장 계민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마침 계민에게 가 있었다.

계민이 감히 우리 사신을 숨길 수 없어 함께 수양제를 만났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18년(607년)

 

고구려는 몽골초원을 장악하고 있었던 돌궐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목민 국가의 수장의 장막에서

수제국의 황제와 고구려의 사신이 마주치는 극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고구려와 주변 유목민 국가 사이 빈번한 왕래와

상호 정치적, 군사적 관계 모색의 한 상징적 사건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 노태돈 교수 

 

중국 요서지방에 위치한 조양

서쪽으로는 중국과, 북쪽으로는 유목민족과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다. 

 

기록에 의하면 조양의 옛 지명인 유성에 고구려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6세기, 이곳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유성(조양) 즉 고구려 시장" - 신당서

 

고구려인들은 북방 유목민족과 접촉하기 위해  어떤 길을 따라 갔을까?

 

조양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올라가면 광활한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초원의 길은 오로혼으로 이어진다.

오르혼 인근 호서 차이나 분지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몽골 오르혼 강 유역 퀼테긴 비.

 

퀼테긴이라고 불리는 이 비석엔 돌궐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비문엔 6세기 이곳을 다녀간 사절단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과연 고구려는 이곳에 왔을까?

 

비문에 사용된 돌궐문자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 투르크어다.

비문을 해독하기 위해 취재팀은 발굴 당시 비석의 사진을 입수한 경상대 정재훈 교수를 만났다.

 

"동면 4행에 보면 초대칸의 장례식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참석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해가 뜨는 동쪽 나라부터 서쪽까지 여러 사신들을 열거하고 있는데요,

저희가 보통 외클리, 무글리라고 부르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고구려를 일컫는 말이라 봅니다." 

                                                                                         - 정재훈 교수, 경상대 사학 전공

  

비문속의 외클리, 즉 고구려였다.

고구려 사신이 초원길을 따라 이곳 오르혼에 온 것이다.

 

조양에서 오르혼으로 이어지는 초원길은 멀리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까지 이어진다.

사마르칸트는 동서양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다.

 

8세기 이 지역을 이슬람이 장악하기전 아프라시압 언덕엔 고대 왕궁이 있었다.

지난 1965년 이 왕궁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궁전의 벽면을 장식한 한 장의 벽화가 세상에 드러났다. 

 

현재 벽화는  인물의 윤곽선만 겨우 구분되는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그런데 희미한 인물의 윤곽선에서 낯익은 형태의 모자가 눈에 뛴다.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이다.

 

 

 

이번엔 발굴 당시의 벽화 사진을 찾아보았다.

12명의 사신을 그린 이 화려한 채색벽화엔 조우관을 쓴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허리에 환두대도를 차고 머리에 조우관을 쓴 이 사람은 고구려 사신인 것이다.

 

벽화의 한쪽엔 소그드어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 사신이 언제 이곳에 다녀갔는지 알 수가 있었다.

 

명문엔 와르후만 왕이 인근 차가니안의 국왕이 보낸 사절을 만나 나눈 대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와르후만 국왕은 어느 시대 사람일까?

 

"와르후만 국왕을 접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와르후만은 중국 당서에 보면

당 고종 영휘 연간(650~655)에 사마르칸트 도독으로 책봉된 인물이라고 나옵니다."

                                                                                                    - 정수일, 고려대 사학과 강사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는 고구려가 멀리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 다녀갔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비단길은 고구려가 서역과 교류할 수 있는 편리한 교통로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비단길 이외에도 북방유목과 서역을 잇는 또 하나의 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초원의 길이었다. 

 

 

 

초원의 길은 고구려와 서역을 잇는 고대 고속도로였다.

고구려는 이 길을 통해 세계와 교류했던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1,500년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습니다.

5세기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는 광활한 대제국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영토를 확장하며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고 아울렀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문물을 주고 받았습니다.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풍요롭고 화려했던 시절을 벽화에 옮겨놓았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5~6세기 고구려는 닫혀있는 고구려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글로벌 고구려였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