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 - 의무려산 / 다물역사자료관 外

2013. 5. 14. 08:47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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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진 의무려산(北鎭 醫巫閭山)

 

.북진 의무려산(北鎭 醫巫閭山)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

. 단군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 백악산아사달

. 3천년 전 단군조선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天祭)의 산-의무려산

. 고조선과 고구려,고려,조선시대 선인들의 혼이 담긴 의무려산

.“아침해가 가장 일찍뜨는곳”대조양(大朝陽)

 

1.북진 의무려산 설명(北鎭 醫巫閭山 說明)

의무려산(醫巫閭山) 요녕성 금주시 관할시인 북진시(北鎭市) 관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심양시에서 서쪽으로 2시간 30분거리, 대련에서 서북방향으로 4시간거리, 금주에서 동북방향으로 1시간 거리에 있다.

북진의 의무려산“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라 하여 옛적부터 세파

에 지친 사람들이 이 산을 찾아와 하늘에 고하고 아픔과 슬픔을 치유받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다 하며, 무속과 불교,선교(도교)의 수행자들이 하늘과 인간의 중개자로 하늘의 뜻을 받들고 신과 인간을 이어주어서 많은 도량과 사제들이 흥성하던 곳이며, 현재도 많은 도량의 옛유적이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도인들이 수행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원과 기복을 하며 그 응답을 받아 신령스런 산이라 하여 일년에 한번씩은 꼭 찾는다고 한다.

내몽고 적봉시 하가점 동쪽으로 150여 km쯤 떨어진 곳엔 산맥에 가까운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이 솟아 있고 그 너머 다시 200여 km 떨어진 곳에 역시 산맥 형태인 ‘의무려산’(醫巫閭山-백악산 아사달)’이 솟아있다. 의무려산은 해발 866.6m 높이이지만, 평야지대에 있는 까닭에 우뚝서 있어서 너른 평야지대에서 바라보면 그 위엄과 자태가 신령스러워 경외감을 갖게 한다.

의무려산은 중국 12대 명산 가운데 하나이자 장백산, 천산과 더불어 동북지역 3대 명산이다.

아울러 장백산(長白山).천산(千山)과 더불어 중국 동북지역의 3대 명산 중에서도 신령스런 산으로 불리우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다.

중국 황실에서는 3천년 전 주나라 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며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무속과 불교와 선교(도교)의 도량지였다.

또 의무려산은 기자(箕子)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며, 한편 단군조선,고구려,발해,고려의 옛 영토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연행사들은 옛 선조들의 혼이 살아 숨쉬는 북진의무려산을 찾아 옛민족혼을 상고하곤 하였다.

의무려(醫巫閭)는 대릉하와 요하사이에 위치한 현()으로 옛 역사의 기록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의무려의 지역에 있는 의무려산은 큰산의 독립된 명칭이 아닌 평야에 남북으로 길게 연이어진 산줄기로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아주는 자연적인 성벽역활을 할 수 있게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산의 형태가 흰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흰바위산(백악)으로 불리워지는 아름다운 산이다.

북진시의 의무려산은 하나의 산이라기 보다 산맥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총 10개의 풍경구로 나누어져 있다.

1.대관음각풍경구(大观音阁风景区)

2.대조양경구/국가삼림공원풍경구(大朝阳景区/国家森林公园风景区)

3.청암사풍경구(青岩寺风景区)

4.오불사풍경구(五佛寺风景区)

5.천선관풍경구(天仙观风景区)

6.대호화풍경구(大芦花风景区)

7.영산풍경구(灵山风景区)

8.쌍봉산풍경구(双峰山风景区)

9.제왕곡풍경구(帝王谷风景区)

10.고성풍경구(古城风景区)

 

.성모(聖母)구름상과 청암성모상

 

.청암사 삼신령(靑岩寺 三神靈)

.청암사(靑岩寺)

 

 

.의무려산 천신녀상

 

 

.의무려산 망해사

.의무려산 천제혈(天祭穴)

 

 

.의무려산 선경(仙境)

 

 

 

 

 

 

 

 

 

 

 

 

 

 

 

 

 

 

 

 

 

 

 

 

 

 

 

 

 

2.북진 의무려산 역사(北鎭 醫巫閭山 歷史)

 

    의무려산의 이름은 의(醫)와 무(巫), 려(閭)로서 “치료하다”“무당”, “마을의 문”의 뜻이며 만주어로는 “크다”의 뜻이다. 합치면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란 뜻이 된다. 신정일치시대의 “무(巫)”는 천제를 담당하였고 “군왕(君王)”은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 신정(神政)을 함께 주관하여 강력한 지도자이며 사제로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렸기에 의무려산은 신정일치의 중심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무려산은 단군조선을 외부로부터 보호해주는 자연성벽으로 예부터 백악산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아사달평양-백악산 아사달-장단경-아사달로 옮겨갔다가, 아사달에서 산신령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단군조선이 도읍을 여러 번 옮겼고, 단군조선이 도읍지를 옮길 때마다 산을 배후로 하여 전면이 평야로 이루어진 평양이라는 지명이 따라 갔을 수도 있다. 예로부터 도읍지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 최고로 하여 많은 왕조들이 도읍을 정할 때 이 원칙을 삼았었다.

 

    의무려산은 3천년 전인 주나라 때 동북방의 진산(鎭山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수나라 때 북진묘가 들어선 뒤 명나라 때 `북진의무려산지신'으로 봉해졌으며, 청대까지 나라의 제사를 지낸 곳이다. 북진묘는 598년에 건립되었고 북진은 당나라 때인 8세기께부터 도교(선교)와 불교사찰이 본격 들어서면서 신성한 터로 자리잡았다. 북진현내에 있는 숭흥사쌍탑은 중국 요나라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비정하나 역사서인 금주현지에 기록된 바로는 당정관18년(644년)에 건축된 것으로 그시기 이곳은 고구려의 통치지역으로 고구려불교양식으로 추정되는바 진실한 역사복원이 필요한 부분이다.

.3천년 전 단군조선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天祭)의 산-의무려산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주봉이 866.6m로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무려산은 3천년 전 주(周)나라 시대부터 시작해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열두 곳의 진산(鎭山) 가운데 하나였다.

순임금시기에 중국12대 진산중의 하나로 봉해졌으며, 서한시기(西汉时期)중화 “오악오진(五岳五镇)”중 북쪽의 진산(镇山)으로 정해졌다.

 

    중국오악(中国五岳)은,동악태산(东岳泰山),서악화산(西岳华山),남악형산(南岳衡山),북악항산(北岳恒山),중악숭산(中岳嵩山)이며, 오대진산(五大镇山)은 북진유주의무려산(北镇幽州医巫闾山-今辽宁省北镇市), 남진양주회계산(南镇扬州会稽山-今浙江省绍兴市), 서진옹주오산(西镇雍州吴山-今陕西省宝鸡市),동진청주기산(东镇青州沂山-今山东省临朐县),중진기주곽산(中镇冀州霍山今山西省霍州)이다.

 

   아사달의 백악산은 단군조선이 중화민족으로부터 밀려 동쪽으로 온 까닭에 그 아픔을 치료하고 위로하는 영산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 “의무려산”으로 명명되었다.

무속과 제천(祭天)과 선인(仙人)의 산‘의무려산’은 예부터 하늘의 천제에게 제를 지내던 곳이다.

천제를 지내던 유적이 지금도 의무려산에는 존재하고 있다.

산아래의 도읍인 북진에는 594년 수나라시대에 건립(594년)된 북진묘가 있어 평상시 천제(天祭)를 북진묘에서 지냈으며 특별한 날에는 의무려산의 천제혈(天祭穴)인 백운관 아래의 관음각동굴천제혈에서 천제(天祭)을 지냈다.

북진묘는 594년 수나라시기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요순시대부터 12대진산으로 불리운 것으로 보아 훨씬 이전인 단군조선시대에 건립되었음을 상고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고려,조선시대 연행사들의 혼이 담긴 의무려산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순 때부터 12대 명산의 하나로 불렸다. 이 산이 신령한 산으로 꼽혀 절, 문묘, 전각, 정자 같은 것들이 많이 지어졌고, 산기슭엔 북진고성도 있다. "황산의 기묘함(黃山之奇), 아미산의 수려함(峨嵋之秀), 태산의 웅장함(泰山之雄), 계림의 아름다움(桂林之美)을 모두 갖추었다"고 자랑하는 이곳은 이제 가족과 연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동호족 말로 의무려란 말은 크다는 뜻이라고 한다. 의무려산은 중국12대명산으로 수나라때는 "광녕공", 요.금나라때는 "광녕왕", 원나라때는 "정덕광녕왕", 명나라때는 "북진의무려산지신"으로 봉해져 불리워졌다.

 

    무수한 중국 시인들이, 중국으로 가는 조선의 연행사신들이 의무려산의 수려함을 노래했다.

의무려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선조 7년인 1574년 조선학자 허봉(1551~1588)이 중국을 방문한 뒤 쓴 `하곡선생조천기에 남아 있다. 이후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중 한명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월사 이정구(1564~1653)가 1604년 세자책봉을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여러차례 중국을 방문한 뒤 중국 문인들의 요청으로 간행한 `조천기행록'과 `백사선생집' 속에 도화동 유람기를 쓰면서 연행사신들에게 본격 소개됐다.

중국 연행사신들은 북경으로 오가는 왕복여정 중에 광막한 평야에 불쑥 솟은 의무려산에 올라 지친 심신을 달래며 느낀 감회와 탄성을 기행문과 기록에 담아냈다.

 

   조선 연행사로서 처음 이 산을 올라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월사 이정구(1564~1653)였고, 그로부터 1백여년의 세월이 지나 노가재 김창업이 1712년에 이정구의 유람기를 손에 들고 의무려산에 올랐다. 김창업은 의무려산에 오른 감상을 그림을 그리듯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음각(觀音閣)을 지나 산 정상의 절벽에 잇대어 있는 조그만 절 관음사(觀音寺)에서 숙박을 하였고, 샘물이 달고 이슬 같다는 감로암(甘露庵)을 찾았으며, 바위틈으로 난 나무 뿌리를 휘어잡고 있는 관제묘(關帝廟) 옛터로 올랐다. 특히 '도화동(桃花洞)'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여기가 바로 조선에는 없는 선경이라고 감격했다. 도화촌은 의무려산의 남쪽에 있으며, 예전에 1천 그루의 복숭아꽃이 있어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데, 실제 현재도 1만 그루도 넘을 복숭아가 농원에 즐비하다.

   김창업 이후 50년이 흐른 뒤 담헌 홍대용(1731~1783)이 이 산을 또 유람하고 돌아와 '의산문답(醫山問答)'이라는 철학소설을 남김으로써 의무려산은 연행길의 명소가 됐다.

 

.“아침해가 가장 일찍뜨는곳”대조양(大朝陽)

   의무려산의 주요풍경구는 관음각풍경구(觀音閣風景區)와 대조양풍경구(大朝陽風景區)이다.

아침해가 가장 일찍뜨는 의미의 대조양(大朝陽)이 의무려산 산맥의 한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대조양(大朝陽)이란 순수 우리말로 “아사달(阿斯達)이라 하며 아사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아침의 땅”이라는 뜻이다.

 

   “아침이란 뜻은 점점 밝아와 사면을 밝힌다”라는 뜻이다.

아사“아침을 뜻하며 서서히 가장 먼져 밝아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 “땅,대지”이며 아사달이란 결국 “아침해가 가장 먼저 밝히는 땅”이란 장소가 되는 것이다.

“아침해가 가장 먼저 밝히는 땅”이란 장소에서 천제를 지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우리가 현재 쓰는 단어중에 달이란 의미를 쓰는것을 보면

밝달(밝은 땅)

양달(해가 비추이는 땅)

응달 (해가 비추이지 않는 어두운 땅) 등이다.

   또한 “아사달은 평양”이란 의미도 있다.

“단군왕검이 아사달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다”하였으며

“이후 백악산아사달로 다시 도읍을 옮기었다(서기전 2,311)”

“아침해가 가장 먼저 밝히는 땅”,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인 의무려산과 대조양은 온통 흰백색으로 이루어진 백악산아사달이며, 백악산아래에는 드넓은 평야가 대해까지 펼쳐진 곳이 바로 북진시의 의무려산이다.

대조양풍경구의 주어인 대조양의 뜻은 “아침해가 가장 일찍뜨는곳”이란 뜻으로 순수 우리말로“아사달”이다. 의무려산은 온산이 화강암석으로 이루어져 하얀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대조양과 백악산아사달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많은 사람들은 요녕성 조양을 아사달이라 한다. 조양이란 지명이 아사달이란 뜻이기 때문이고 조양의 주변지역에서 구석기와 청동기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양시의 명칭은 명대이전에는 없었고 이후부터 조양이란 지명을 사용했다.

의무려산의 대조양(大朝陽)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지명으로서 참된 백악산아사달로 추정된다.

대조양풍경구에는 상중하 삼청관(三淸館)이 있으며 그곳에는 천신(天神)을 모시는 사당(祠堂)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천신(天神)은 바로 우리의 조상, 환인.환웅.환검(단군왕검)이 아니던가!

원시천존(元始天尊), 영보천존(靈寶天尊), 도덕천존(道德天尊)등의 천신사당과 영존이 모셔져 있다.

 

3.북진 의무려산 탐방(北鎭 醫巫閭山 探訪)

1)북진시 개요(北鎭市 槪要)

북진시는 요녕성 금주시 관할시로 심양시에서 서쪽으로 2시간 30분거리, 대련에서 서북방향으로 4시간거리, 금주에서 동북방향으로 1시간 거리에 있다.

북진시는 1995년 북녕시로 명칭되었다가 2006년 북진시로 옛 명칭을 찾게 되었다.

중국 역사서 주례《周礼》의 기재에 의하면 중국에는 5대 진산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동진청주기산,서진옹주오산,남진양주금계산,북진의무려산,중진기주곽산을 5대진산이라 칭한다.(东镇青州沂山,西镇雍州吴山,南镇杨州金稽山,北镇医巫闾山,中镇冀州霍山 合称五座镇山)

또한 의무려산은 요순시대부터 중국 12대 명산중의 하나로 칭하였다.

북진은 한나라시기에 무려현, 당나라시기엔 무려수착등 의무려산의 명칭으로 지역명이 불리워졌다.

의무려산에는 많은 명사찰과 도량들이 곳곳에 보존되어 이 지역민들과 주면 지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현재 북녕(北寧)에서 북진(北鎭)으로 이름이 바뀐 광녕(廣寧)은 명나라 때부터 북방의 이민족을 감시하는 중요한 군사기 지였다. 순무(巡撫)와 총병(摠兵)의 지휘 아래 대규모 군사가 주둔했던 곳으로, 성곽 위에는 창검과 깃발이 늘어서 있어 조선 사신들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광녕성 한가운데에는 이성량(李性樑)의 패루(牌樓)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성량은 16세기 후반 요동 지역을 책임졌던 군인으로 그 할아버지는 죄를 짓고 압록강을 건너간 조선 사람이었다. 이성량의 아들은 이여송(李如松)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이끌고 와서 평양성에서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패루는 문()처럼 생긴 석조 건축물로 용이나 호랑이 등이 문양을 정교하게 새기고, 공적을 기록하였다. 이성량이 오랑캐를 정벌한 공을 기려 세운 이 패루는 산해관 동쪽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여 사신들이 꼭 둘러보는 명물 이었다. 광녕의 북쪽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의무려산의 신을 모신 북진묘(北鎭廟) 또한 조선 사신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또한 숭흥사쌍탑(崇興寺双塔)의 복수기(復修記)의 비문에는 “사찰은 당태종 정관18년(644년)에 건립되었고 2좌의 탑이 있으며 당태종이 고구려 정벌시 지경덕이 감수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북진묘는 수나라시대인 594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그 시대 북진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고구려시대의 불교사찰과 탑과 천제를 지내던 유적으로 추정 할 수 있다.

 

2)북진묘(北鎭廟)/ 북진신사(北鎭神詞)

 

 

 

 

 

북진신사는 요녕성 금주시관할 북진시의 서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거리 240m, 동서거리 109m,면적26,000평방미터로서 중국5대 진사묘중 유일하게 완전 보존된 고건축 산신묘로 수나라시대(594년)에 건축되어 여러차례 중수되었다(그러나 순임금시기의 기록으로 보아 훨씬 이전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한다).

주요건축물들은 갈산식목재구조로 지붕은 유리와로 되어 있으며 산세에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배열되어 있다. 신사묘뒤의 동북각은 4m높이로 청나라 건륭황제가 장기를 두던 곳이기도 하다. 서북쪽에는 천연기석으로 된 병풍같은 취운정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바위를 보천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북진신사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신의 보호를 기원하였다.

북진신사가 위치하고 있는 북진묘는 금나라때에 재건되었으며 명,청대에 재건과 확대건설되었으며 역사적 예술가치가 인정되어 1988년 중국의 중요 문물보호단위로 지정,공포되었다.

의무려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북녕시 한쪽 언덕받이에는 북진묘(北鎭廟)가 궁궐처럼 권좌를 틀고 있다. 먼 옛날 순()임금이 중국의 명산 12곳에 진묘를 세우면서 의무려산을 동북지방의 진산으로 삼고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는 묘당으로 세운 것이다. 묘당 안에는 건륭제가 연경과 심양을 오갈 때마다 여기에 들러 지은 시를 새긴 56개의 비석이 정전(正殿) 앞마당에 3열 횡대로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의무려산엔 청나라 건륭제가 "조선 사람들이 새겨둔 글귀가 많으니, 기자의 홍범구주 문화가 지금도 전해오네(多有朝鮮人勒句, 箕疇文化至今漸)"라는 구절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시내에는 요나라 때 세운 숭흥사(嵩興寺) 쌍탑이 그림처럼 서 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로 영원백(寧遠伯)을 지낸 이성량(李成樑)의 묘도 있다.

조선학자들이 남긴 무수한 흔적은 청의 건륭제가 의무려산을 여러차례 둘러본 뒤 지은 “무술어제의무려산사영”이란 시에서 “산위에 새겨진 많은 조선인의 글들, 발해·고구려·기자의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왔네”라고 읊은 데서도 입증된다. 이 비석은 현재 의무려산에서 2㎞ 떨어진 북진묘내 비림에 남아 있다.

북진묘는 의무려산의 산신을 모시는 도교(선교) 사원이다. 연암 박지원도 이곳에 들러 두루 살피면서 북진묘를 보고 “높이는 너덧 길이나 되고 그 구조의 정교함이나 조각의 세밀함이 거의 사람의 힘으로 미치지 못할 만큼 잘 되었다. 정전의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이랑 같으며, 거기에 새긴 글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복을 기원한 말들이다.”고 했다.

의무려산은 요동벌이 끝나는 곳에 우뚝 솟아 고대 순임금 시절부터 청나라에 이르기 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전국 열두 명산 가운데 하나이다. 북진 시내는 명나라 장수 이성량의 패루이다. 이성량은 본래 조선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20년 동안이나 요동.요서 지역의 군벌로 군림했다. 임진왜란때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온 이여송은 그의 아들이다. 이성량은 명나라 200년 역사상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사람으로서 명나라 장수가 된 인물로 만주 전역의 군사권 뿐만 아니라 경제권도 쥐고 있었던 총관이었다.

 

북진묘비림(北鎭廟 碑林)

의무려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북진시 한쪽 언덕받이에는 북진묘(北鎭廟)가 궁궐처럼 권좌를 틀고 있다. 먼 옛날 순()임금이 중국의 명산 12곳에 진묘를 세우면서 의무려산을 동북지방의 진산으로 삼고 산신령에게 제사지내는 묘당으로 세운 것이다. 묘당 안에는 건륭제가 연경과 심양을 오갈 때마다 여기에 들러 지은 시를 새긴 56개의 비석이 정전(正殿) 앞마당에 3열 횡대로 늘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의무려산엔 청나라 건륭제가 "조선 사람들이 새겨둔 글귀가 많으니, 기자의 홍범구주 문화가 지금도 전해오네(多有朝鮮人勒句, 箕疇文化至今漸)"라는 구절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시내에는 요나라 때 세운 숭흥사(嵩興寺) 쌍탑이 그림처럼 서 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로 영원백(寧遠伯)을 지낸 이성량(李成樑)의 묘도 있다.

 

3)숭흥사 쌍탑(崇興寺双塔)

 

 

선탑쌍표(禪塔双標) 라고도 불리우는 승흥사쌍탑은 금주시 관할의 북녕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요()나라와 금()나 라 시기에 건립된 2개의 자매탑으로, 8각형의 전탑(8각면에 불상조각)이며, 탑 모양도 같고 층수도 13층으로 같다.

동서 방향으로 43m 떨어져 있다. 모두 벽돌로 쌓은 쌍탑은 밀산식구조로서 하부의 탑받침돌은 탑신을 보호하기 위해 후 세에 증건하였으며 매층마다 조각한 꽃무늬가 다르다. 제하층에는 부증력사와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상층에는 두공이 있 으며 두공에는 곡수,만자란반이 조각되어 있다. 상층의 돌계단에는 동으로된 거울이 3면에 있으며 다양한 각종 조각들이 새겨져있다. 쌍탑의 보존상태는 매우 완전한 상태이다.

탑의 북쪽에 숭흥사[崇興寺]가 있어 숭흥사쌍탑이라 불린다. 동쪽에 있는 탑은 높이 43.8m이고, 서쪽에 있는 탑은 높이 42.7m이다. 탑 아래의 수미좌(須彌座)에는 벽돌 재질의 두공(斗拱)과 난간, 앙련(仰蓮)이 장식되어 있다. 난간에는 '만()' 자를 비뚤어지게 새겨놓았다. 수미좌 허리 부위의 모퉁이마다 조각된 역사(力士)는 살아 숨쉬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제1층 탑신이 높고 2층 위로 올라갈수록 처마가 좁아지는 밀첨식(密檐式) 탑으로, 제1층 탑신의 정방향 4면의 중앙에 벽 돌로 아치형 불감(佛龕)을 만들고 그 안에 좌불상(坐佛像)을 조각해놓았다. 불감 밖의 양쪽에는 보살이 서 있고 그 위에 보개(寶蓋)와 비천상(飛天像)을 장식하였다. 제1층 탑 처마 밑에는 벽돌로 두공을 장식하였다. 제1층 탑신을 제외한 각 층에는 내물림 구조로 처마가 밖으로 내밀어져 있다. 탑찰(塔刹)의 연좌(蓮座)·보병(寶甁)·찰간(刹竿)·보주(寶珠) 등은 지금까 지도 보존상태가 완벽하다.

숭흥사쌍탑은 중국 요나라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중국학자들은 비정하나 역사서인 금주현지에 기록된 바로는 당정관18년 (644년)에 건축된 것으로 그시기 이곳은 고구려의 통치지역으로 고구려불교양식으로 추정되는바 전문가들의 지세한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중국 사서 기록)

清康熙年间广宁(今北镇)知县张文治在《广宁崇兴寺复修记》碑文中写道:“寺建于唐贞观十八年,太宗征高丽旋师命尉迟敬德监修,并建浮图二座。

在北镇曾流传一首民谣:“唐修塔,朱修圈,大清家修佛殿。”也表明塔是唐朝所修。

(청나라 강희황제때에 장문치의 광녕숭흥사 복수기의 비문에는 사찰은 당태종 정관18년(644년)에 건립되었고 2좌의 탑이 있으며 당태종이 고구려 정벌시 지경덕이 감수하였다.)

북진의 전래 민요에 의하면 당조시에 탑을 건립.

 

4)청암성모(靑岩聖母)

 

 

 

 

청암사는 북진시 의무려산 남부의 아름다운 풍경구에 위치하고 있다. 북진시 사찰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곳으로 요서 및 동북지방의 도.불교성지이다. 요녕성의 도.불자들은 필히 1년에 1회이상 방문을 한다. 청암사는 상.하 양원이 있으며 산문 입구에 들어서면 조박초가 친필로 쓴 청암사의 현판이 있으며 돌로 깔아놓은 도로를 따라 들어서 봉우리로 둘러쌓인 산기슭에 다다르면 청암사 하원이 있다.

1960년대 중국에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옛것을 배척하는 홍위병들의 고적파괴운동이 있어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조박초는 모택동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다. 모택동은 조박초에게 권한을 주어 조박초의 친필이나 지정한 유적은 홍위병들이 파괴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박초는 금주,의현,북진,안산,요양등 요녕 주요지역의 문화유적을 지정하였는데 특히 청암성모와 북진묘등에 애착을 가졌다 한다. 그 덕분에 지금은 파괴되지 않는 보물유적이 되어 있다.

청암사 하원산문에는 천개역정이란 현판이 쓰여져 있으며 사원에는 대웅보전,천왕전,배전,신당등 불사가 있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상,남해대사등의 여러 불상들이 모셔져 있으며 깨끗하게 정돈된 사찰은 기세가 웅장하고 아름답다. 상원은 절벽에 건축되어 그 경치가 경이롭고 아름답다.

청암고찰이란 산문을 들어서면 절벽옆으로 수백미터의 돌계단(1008계단)이 있고 인공으로 파낸 깊이5.5미터의 석동굴이 있으며 그 동굴안에는 관음노모상이 있고 옆에는 18나한상이 있다.

동북고적견문에 의하면 1,700여년전 푸른 암석으로 노모상(석조관세음불상)이 조각된 후 좋은날을 택하여 불상을 모시고자 하였는데 동굴입구가 작아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중 한사람이 “만약 관음노모가 목을 비스듬히 하면 들어갈수 있다”고 농담으로 얘기 하였는데 정말로 관음노모상이 고개를 비스듬히 세워 동굴안으로 들어갈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관음노모상에게 불공을 드린후 급하게 나와 관음노모상의 비스듬한 목의 원상복귀를 빌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관음노모상은 목이 기울어진채로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진후 관음노모상은 살아있는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추앙을 받아 많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전한다.

민간에 내려오는 효녀의 이야기는 청암성모의 신묘함을 전해준다.

병든 노모를 모시고 사는 효녀는 노모의 병을 고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의원조차도 고칠수가 없어 애태우며 기도를 하였다. 어느날 꿈에 청암성모가 나타나 나뒹굴어져 있는 청암성모상을 바르게 모셔둔다면 노모의 병을 고쳐주겠노라 약속을 하였다 한다.

효녀는 수소문을 하여 청암성모가 있는 곳을 찾아내 정성을 다해 나뒹굴어져 있는 청암성모상을 제자리에 바르게 모신후 치성을 드리고 산을 내려와 집에 돌아오니 노모가 건강하게 맞이 하였다 한다.

이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갔고 청암성모를 찾아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재물,건강 등과 사업성공,자녀진학등 신비스럽게도 기원이 많이 이루어졌다 한다.

사업성공을 위해 소원을 빌었던 한 기업가는 마침내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소원을 이루어준 청암성모에게 감사의 불공을 드렸으며 마침내는 많은 돈을 들여 청암성모상에 금을 입혀 현재는 금불상이 되어 있다.

매년 2월19일,6월19일,9월19일의 전통묘회기간에는 많은 인파들로 발디딜틈이 없을정도로 붐빈다.

사람들이 청암성모가 있는 곳까지 1008계단을 한계단, 한계단 기원하면서 오르는 모습은 경건과 엄숙함이 장엄한 광경을 보여준다.

상원을 지나 계속 산정으로 오르면 대지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는 문수원이 있으며 산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기암괴석들과 수려한 자연풍치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청암사경구의 우측 산정에는 고려성이 있어 이곳이 고구려,고려의 영토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5)관음각풍경구(觀音閣風景區)

 

 

 

 

 

관음각풍경구는 주산으로 의무려산북부의 동측에 있으며 북진고성으로부터 6킬로미터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관음각은 요나라시대에 건립되었으며 명대에 청안사(清安寺)로 이름되었고 후에 관음각(观音阁)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수분과 천제혈,망해정,백운관,옥천사등 산사의 유적이 많으며 산은 온통 흰백색의 장관이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 신령스러움을 내뿜으며 절로 경건함과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대관음각의 팔경은 도은곡(道隐谷),성수분(聖水盆),광관정(旷觀亭),여공암(吕公岩),도화동(桃花洞),망해사(望海寺),운소송(雲巢松),남천문(南天門)으로 그 아름다움은 보는이들의 감탄과 경이로움을 갖게 한다.

산의 입구에 다다르면 표지문(标志门)이 있는데 길이 20미터,높이12.5미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문이 산세의 아름다운 모습을 배경으로 오는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으며 산문을 들어서면 옥녀상(玉女像)이 맞이 하는데 옥녀상은 만주족의 여신상으로 만주족 선조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친필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 새겨진 웅장한 돌기둥을 만날 수 있다. 산문을 따라 오르면 눈앞에 떡 버티고 있는 백운관(白雲關)이 눈앞에 그 웅장함을 나타낸다.

백운관의 정상엔 망해정(望海亭)이 있는데 망해정에 오르면 저멀리 요동벌판이 펼쳐지고 멀리 아스라이 발해가 보인다.

또한 산중턱에 길이 45미터,높이 10미터의 도은곡(道隐谷)이라 하는 대석붕(大石棚)이 나타나는데 신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기적이라고 한다. 또한 5~600인 머물수 있으며 역사적인 고증에 의하면 고대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던 신성한 곳이라 한다.

의무려산 중턱까지 올라 성수분(聖水盆)에서 케이블카(閭山索道)를 타고 왼쪽 능선을 넘으면 옥천사(玉泉寺)에서 남쪽으로 멀리 바라 보이는 발해(渤海)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자그만 정자에 앉아 백두산, 천산(千山)과 함께 중국 동북 3대 명산이라는 의무려산의 절경을 감상하노라면 신령스러움에 경외감을 자아나기에 충분하다. 음산(陰山)산맥 의 가지인 의무려산은 길이 45㎞, 넓이 630㎢이고, 이름난 봉우리만도 50개가 넘는다. 또한 옥천사로 가는 산길에 우연히 발견 성곽은 화강석으로 쌓은 고구려의 산성양식으로 이곳이 고구려의 영토임을 증명한다.

관음각은 북진의무려산의 주산으로 신령스러움과 경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망해정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욕심에 대한 죄스러움과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신선이 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6)대조양풍경구(大朝陽風景區)

 

 

 

 

 

세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료해주는 신령스러운 영산 의무려산(靈山 醫巫閭山) !

3천여년전 고조선 시대부터 하늘에 제사지내던 제천의 산-의무려산 !

의무려산 관음각풍경구(醫巫閭山 觀音閣風景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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