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
말씀의 초대 |
글쓴이 : |
|
|
엘리야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엘리사를 만나
자신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운다.
엘리사는 겨릿소로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엘리야를 만나자
자신의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소를 잡아
사람들이 먹도록 내어놓고 엘리야를 따라나선다(제1독서).
‘정직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는 물론 아예 맹세를 하지 말 것이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라고 이르신다(복음).
<엘리사는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19-21
그 무렵 엘리야는 산에서 내려와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는 ‘정직성’ 또는 ‘진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사실 ‘정직’과
‘진실’의 의무 또는 덕목은 모든 종교와 윤리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며,
사회의 법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무척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 시대가
진실과 정직보다는 허위와 왜곡을 일삼는
문화 속에서 병들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정직함과 진실함의 가치는
그의 성향이나 외적 태도를 가리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리’와 어떻게 관련하는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됩니다.
그가 과연 ‘진리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에 따라 깊은
인격적인 차원의 정직성과 진실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진실성’의 덕목을 가리키면서
‘진리’와 같은 말을 사용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담을 그릇이 되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사람의 덕성과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은 진리와 닿아 있고, 인간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께 속할 때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헛되고 과장된 맹세가 아니라
진실하고 겸허한 모습을 강조하신 것은 그러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자신의 ‘진실성’이 시험받는 순간마다 겸허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하며 ‘나의 진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 주여 생명의 말씀이
| | | | | | | | | | |
| |
출처 :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리듬짝)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