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7. 07:50ㆍ우리 이웃의 역사
마르코 폴로
1254경 베네치아 또는 베네치아령 달마치야 쿠르촐라~1324. 1. 8 베네치아.
베네치아의 상인·탐험가·여행가.
폴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초판(1477)의 표지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Travels of Marco Polo>에 나타난 ... |
1271~95년에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여행했으며 17년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이 경험을 기록한 여행기 〈밀리오네 Il milione〉는 흔히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Travels of Marco Polo〉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리학의 고전이 되었다.
폴로 집안
마르코의 길을 닦아준 것은 아버지인 니콜로와 삼촌 마페오의
선구적인 노력이었다.
폴로 집안은 오랫동안 중동 지역과 교역을 하여, 상당한
재산과 명성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폴로 집안이 실제로 귀족 가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베네치아처럼 공화주의와 중상주의의 전통을 가진 도시에서는
귀족 신분이 중세의 전형적인 의미를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폴로 가족은 통찰력이 있고 기민하며 용감했던 것 같다.
1260년경에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변화를 내다보고
그곳에 있는 부동산을 현금으로 바꾸어 보석에 투자한 뒤,
볼가 강으로 떠났다.
이곳에서는 몽골 제국의 서부 영토를 다스리는 베르케 칸이 계절에 따라
사라이나 불가르에 머무르고 있었다.
폴로 가족은 몽골 제국의 이 지방 궁정에서 수완을 발휘하여 재산을 2배로
늘린 것 같다.
그들은 정치적 사건 때문에 귀국길이 막히게 되자, 동쪽의 보하라로 갔다가
1265년에 몽골 제국의 수도로 황제의 여름 주거지였을 상도(上都: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에 나오는 도원향으로, 내몽골 자치구 뒤룬 현
[多倫縣] 서북에 있었음)에서 여행을 끝냈다.
위대한 황제 쿠빌라이 칸(세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이들은 결국
쿠빌라이가 교황에게 보내는 사절이 되어 유럽으로 돌아갔다.
쿠빌라이는 '7개 학문에 정통한' 지식인 100명을 보내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이들에게 주었다.
이들은 또한 선물도 가져왔고, 예수가 부활할 때까지 누워 있던 예루살렘의
성묘에서 타고 있는 등잔의 기름을 조금 갖고 돌아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마르코는 1254년경에 태어났다(이 연대는 그의 생에 일어난 주요사건들의
연대가 그렇듯이 추정에 불과함). 베네치아에서 보낸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라틴어를 거의 또는 전혀 배우지 않은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는 15(또는 16)세 때인 1269년에 동방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마르코의 동방 여행
니콜로와 마페오가 돌아온 것은 교황(클레멘스 4세)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들은 새 교황이 선출되기를 베네치아에서 끈기있게 기다렸지만,
2년이 지났는데 후임자가 선출되지 않았다.
초조해진 폴로 가족은 마르코를 데리고 다시 여행길에 나섰다(1271).
팔레스타인에서 교황 특사인 피아첸차의 테오발도는 몽골 제국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들에게 주었다.
폴로 가족은 다시 여행길에 오른 지 며칠 지나기도 전에 친구 테오발도가
교황(그레고리우스 10세)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아크레로 돌아가서, 정식 신임장을 받고 2명의 수사와 동행하게 되었다.
이 소규모 원정대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나 2명의 수사는 곧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폴로 가족만 여행을
계속했다.
이 여행가들은 아크레에서 아야스(마르코의 글에서는 '라이아초', 즉 지금의
터키 남동부의 이스켄데룬 만 또는 알렉산드레타 만에 있는 유무르탈리크)로
갔다.
1277년초에 이들은 아마 오늘날 터키 동부에 있는 에르주룸과 오늘날
이란 북부에 있는 타브리즈를 통과한 다음, 산적들이 출몰하는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페르시아 만 연안의 호르무즈 해협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폴로 가족은 인도와 그 너머까지 바닷길로 항해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육로를 통해 몽골 제국의 수도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곧 다시 길을 떠나 오늘날 이란 동부에 있는 호라산 지역을 향해
'지독하게 건조한' 사막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차츰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좀더 살기 좋은 지역에 이르렀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발라시안)은 이들을 기쁘게 했다.
마르코는 1년 동안 그곳에 머물자고 제안한 것 같다.
오랜 질병(아마 말라리아)은 이 지역의 온화한 기후로 완전히 나았다.
마르코는 또한 이 시기에 남쪽 지역(아프가니스탄의 다른 지역, 힌두쿠시
산맥에 있는 카피리스탄, 지금의 파키스탄에 있는 치트랄, 그리고 카슈미르 등)
을 방문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도중에 모은 정보만으로서는 그가 어느 지역을 지났으며
무엇을 묘사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폴로 가족은 바다흐샨을 떠나 파미르 고원을 향해 바한(보칸) 계곡을 올라갔다.
그들은 여행 계획에 따라 결국 파미르 고원을 횡단했는데, 이 일정표는
오랫동안 많은 논의와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산맥의 북동쪽으로 내려간 그들은 오늘날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新彊維吾爾自治區]에 있는 카스가르(지금의 카스)에 도착했다.
이제 폴로 가족은 실크로드(비단길)에 올라 있었고, 그들의 진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오아시스(야르칸드, 허톈[和],
카르칸, 로프노르 호)를 따라 추적해 갈 수 있다.
이 오아시스들은 오늘날 간쑤 성[甘肅省]의 둔황[敦煌]인 중국 국경 지방의
사주(沙州)로 가는 길에 징검돌처럼 놓여 있다.
폴로 가족은 사주에 도착하기 전에 주로 이슬람 교도가 살고 있는 지역을
여행했고, 그리스도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 교도, 불교도, 마니교도,
조로아스터 교도도 만났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전혀 다른 문명이 지배하는 드넓은 간쑤 성(마르코는
'탄구트'라고 불렀음]에 들어갔다.
폴로 가족의 여행 계획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 쑤저우[肅州]와
간저우[甘州]에 이른 다음, 닝샤[寧夏] 지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이 몽골 제국의 여름 수도인 상도로 곧장 갔는지, 돌아서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1275년(최근 일본 학자 오타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274년) 폴로
가족은 다시 몽골 궁정에 들어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유와 교황의 편지를
그들의 후원자인 쿠빌라이 칸에게 바쳤다.
마르코의 중국 체류
그후 16(또는 17)년 동안 폴로 가족은 황제의 영토, 특히 카타이(Cathay:
지금의 중국 북부)와 망기(Mangi:또는 Manzi, 지금의 중국 남부)에서 살았다.
이들은 황제가 여름 주거지인 상도에서 겨울 주거지인 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北京])로 옮길 때 함께 따라갔을 것이다.
불행히도 마르코의 책 〈밀리오네〉는 부분적으로만 전기이자 자서전이다.
따라서 이 책만 보고는 폴로 가족이 그동안 어디에 갔고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몽골족이 한족을 의심했기 때문에 외국인을 많이 고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폴로 가족이 이 잡다한 사회에 가장 훌륭하고
성공적으로 적응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정확히 얼마나 성공적이었을까?
그들은 어떤 특별한 능력으로 쓸모있는 존재가 되었을까?
이런 점들은 몇 세기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뚜렷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은 기술직에 고용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사이안푸'(지금의 샹양[襄陽]) 포위 공격 때 군사 고문으로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기록은 일관성이 없다.
마르코의 말에 따르면, 이 도시는 아버지와 삼촌의 설계도에 따라 만든
'거대한 투석기'(돌이나 화살 같은 날리는 무기를 쏘는 기계 장치) 덕분에
결국 함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스럽다.
마르코 폴로는 젊은 나이(20세 정도)에 중국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어를 전혀 몰랐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쓰이던 많은 언어들
가운데 일부(아마 몽골족이 사용하던 튀르크어, 아랍어에 동화한 페르시아어,
쿠빌라이 칸은 낯선 나라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기 때문에 마르코를
총애했다.
황제는 자주 그에게 현지조사 임무를 주어 몽골 제국의 먼 지역으로
그를 파견했다.
마르코는 이런 임무를 띠고 중국 남서부의 윈난 성[雲南省]에 간 적도 있었고,
윈난 성을 지나 미얀마의 타가웅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중국 남동부 지역을 방문하여, 몽골족이 얼마 전에 정복한
인구 밀집 지역과 '킨사이'(지금의 항저우[杭州])를 열정적으로 묘사했다.
마르코가 원(元) 제국을 제2의 고국으로 여겼다는 증거는 풍부하게 남아 있다.
마르코는 개인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록에는
공백이 많지만, 낭만적인 영웅 숭배자들은 이 공백을 열심히 채워넣었다.
그들은 마르코가 공주들을 매혹시키고 여러 지방을 다스린 훌륭하고
젊은 궁정 신하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마르코 폴로 신화는 몇 세기 동안 널리 퍼졌고,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
및 극작가들에게 주제를 제공한 적이 많았다.
반면에 좀더 냉정한 비평가들은 당시의 중국 기록에 마르코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그러나 그는 중국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까? 16, 17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리 마터우[利瑪竇]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18세기 화가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랑 시닝[郞世寧]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중국 기록에 나오는 이런 이름들이 바로 마테오 리치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또한 마르코의 기록이 황제 측근들의 비공식 자문 위원회에서
주워 모은 정보라기보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 같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아마 그 중간일 것이다.
마르코는 황제를 위해 임무를 수행한 것 이외에 소금 및 전매행정에 관해서도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정부의 이 부서에서 책임있는
지위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밀리오네〉의 일부 판본에 따르면, 마르코는 1282~87년에 양저우[揚州:
간쑤 성 소재]라는 도시를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거의 믿을 수 없고, 한 구절에서 추측한 것일 뿐이다.
베네치아 귀환
1292년경(오타기의 주장에 따르면 1290년)에 몽골족의 한 공주가 바닷길로
페르시아에 가서 아르군 칸의 왕비가 될 예정이었다.
폴로 가족은 공주를 수행하여 페르시아로 가겠다고 제의했다.
쿠빌라이 칸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허락을 내렸다.
당시 쿠빌라이 칸은 거의 80세에 가까웠고, 그가 죽으면(그결과 정권에
변화가 일어나면) 소규모 집단으로 고립된 외국인들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그들이 고향 베네치아와 가족들을 보고 싶어한 것도 당연했다.
600명의 궁정 신하와 선원을 거느린 공주와 폴로 가족은 1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취안저우[泉州] 항구를 떠나 남쪽으로 항해했다.
함대는 참파('참바', 지금의 베트남)에 들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섬과
말레이 반도에도 들렀다.
수마트라 섬(작은 자우아)에서 5개월 동안 머문 것은 우기의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마르코는 북극성이 수평선 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후 함대는 니코바르 제도(네쿠베란) 근처를 지나, 실론(세일란) 섬에서
다시 육지에 닿았다.
중국 배들은 그후 인도 서해안과 페르시아 남쪽을 지나 호르무즈에 닻을 내렸다.
그후 원정대는 호라산으로 갔지만, 아르군 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마흐무드 가잔에게 공주를 넘겨주었다.
폴로 가족은 결국 유럽을 향해 출발했지만, 이 시점에서 그들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아마 타브리즈에 몇 개월 머물렀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몽골을 떠나 그리스도교도의 땅인 트레비존드에
도착하자마자 힘들게 벌어들인 수입을 거의 다 빼앗겼다.
그들은 좀더 지체한 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1295).
그들이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여긴 친지와 이웃들이 그들을 극적으로
알아본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폴로 전설의 일부이다.
마르코가 돌아온 직후,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경쟁 관계에 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1298).
마르코는 베네치아 해군 함장의 고문관으로 참전했다가 9월의
크루조라 해전에서 패함으로써 포로가 되어, 결국 제노바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이 감옥에서 절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가 피사 출신의 포로인 루스티첼로(또는 루스티차노)
를 만난 것이다.
10년쯤 전에 멜로리아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여겨지는 루스티첼로는
저명한 모험소설 작가이며 당시 가장 인기있는 주제인 기사도와 그 전승의
전문가였다.
마르코는 아시아에서 지낸 25년에 대해 보고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베네치아어나 프랑스-이탈리아어(13, 14세기에 유행한 이상한
복합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집필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루스티첼로가 곁에 있기 때문에, 마르코는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쓰게 할 수 있었다.
채택된 언어는 프랑스-이탈리아어였다.
이리하여 위대한 책이 한 쪽 완성되었다.
다행히 마르코는 곧 풀려나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법률 서류의 증언을 통해
부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그는 그리 많지 않은 재산을 관리하면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70세 때
세상을 떠났다. 마르코 폴로가 죽을 때 책에서 날조한 '거짓말'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자신이 실제로 본 것의 절반도 채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대꾸했다.
그가 유언장에서 '타타르인 노예' 한 명을 해방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노예는 아마 동아시아에서 베네치아까지 줄곧 마르코 폴로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밀리오네〉의 성격과 내용
마르코 폴로의 실제 성격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
그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상 그의 책에서 추론한 것뿐이다.
마르코가 책을 구술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고, 많은 부분이
구두로 한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루스티첼로가 줄곧 그같은 수동적인 입장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보면, 특히 전투 묘사에서는 루스티첼로가
자신의 성격과 자신에게 익숙한 표현법을 내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자체는 당장 성공을 거두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지리학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라무시오는 "몇 개월도
지나기 전에 이 책은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이 책을 역사나 지리 또는 기행문이 아니라
환상적인 모험소설로 읽었다.
이 모험소설에서는 쿠빌라이 칸이 아서 왕과 같은 부류에 속해 있고,
중국은 기사들이 꿈꾸는 환상적인 곳에 있는 새로운 고장이었다.
이 모든 일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오래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전문적인
사본 필경사나 아마추어들이 수십 부씩 책을 베꼈고, 그 과정에서 의역을
하거나 각색하기도 했다.
또한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낯선 이름들은 사본을 달리할 때마다
다르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결과 오늘날의 해설자들은 원본 재구성이라는 과업에 직면하여
포기하고 만다.
사실 〈밀리오네〉의 믿을 만한 원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에는 수많은 언어와 방언으로 씌어진 갖가지 형태의 필사본이
약 140종류나 남아 있다.
이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자료들은 중세부터 내려온 가장 끈질긴
문헌학적 문제를 대표한다.
마르코 자신도 생애의 마지막 20년 동안 여러 권의 사본을 만들면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편집자들, 예를 들면 원문을 라틴어로 훌륭하게 번역한 탁발수사
프란체스코 피피노는 마르코의 서술이나 해석의 많은 부분이 경건하지
못하거나 거의 이단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원문을 심하게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마르코 폴로는 이 책을 직접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방대한 우주 구조론
(아시아에 관한 모든 논의에 종지부를 찍을 책)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세계의 묘사 Divisament dou Monde〉였음은
의미심장하다. 마르코는 교조적인 야망을 위해 개인적인 회상을 많이
희생했다.
여행과 그 과정 및 계절에 관한 세부 묘사는 생략된 경우가 많다.
개인적 감정이 담기지 않은 객관적인 거리에서 강력한 광안 렌즈를 통하여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광경들을 관찰했다.
〈밀리오네〉에서 마르코는 정해진 여행 계획표를 따르고 있지만,
샛길로 들어가 자신이 아니라 친척이나 친지가 방문한 곳들을 묘사한
경우도 많다.
그가 주제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예는 메소포타미아, 그리스도교도를
암살한 이슬람교도 집단과 그들의 성채, 사마르칸트, 시베리아, 일본,
인도, 에티오피아,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묘사이다.
〈밀리오네〉가 그 고장 고유의 일상어를 이용한 교훈문학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면 이 작품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문학작품의 예는 중세에 많이 볼 수 있다.
〈밀리오네〉라는 대중적인 제목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터무니없이 과장된 이야기'라는 개념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폴로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별명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별명은 아에밀리오네(Aemilione:큰 에밀)가 와전되어 '밀리오네'만
남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시인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이 걸출한 동시대인에 대해 끝까지 침묵을
지킨 것은 의미심장해보인다.
단테는 이 책을 거짓말로 꾸며낸 이야기이며, 위험한 이단적인 이야기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마르코는 당시의 정설에 따르면 아무도 살 수 없는 적도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했는데, 이것은 특히 놀랍게 여겨졌을 것이다.
평가
이런 논쟁이 거의 7세기 동안 계속된 결과, 마르코의 평판은 극적인
부침을 겪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천재이며, 가장 양심적인 관찰자이고,
쿠빌라이칸의 궁정에서 출세한 관리이자 위대한 몽골족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범세계적 아시아에 정통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제 자랑만 늘어놓고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허풍쟁이, 항구와 시장에 떠도는 소문을 그대로 믿는 떠돌이, 교양이나
상상력이 거의 없고 유머 감각은 전혀 없는 인물로 여겼으며,
특히 중국의 만리장성과 차(茶), 극동 지방의 표의문자에 대해 그가
언급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좀더 균형잡힌 견해를 가지려면 많은 요소들, 특히 원문에 얽힌 문제와
중세의 세계관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의 학문과 연구는 그의 작품에 새로운 깊이와 넓이를 주었다.
마르코가 남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는 대부분 근거가 없거나 왜곡되어
있지만,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충실하게 보고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어쨌든 마르코의 설명은 중세인들의 마음에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었다.
서양의 지평선이 넓어짐에 따라 마르코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졌다.
일본에 대한 묘사는 1492년에 저물어가는 해를 향하여 여행을 떠난
콜럼버스에게 뚜렷한 목표를 설정해주었고, 향신료 생산 지점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서양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지역을 찾아나서 향신료 교역에서
오랫동안 계속된 아랍 상인들의 독점 상태를 깨뜨리도록 고무했다.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풍성한 새로운 지리적 정보는 유럽인들이
대규모로 대양을 항해한 15세기말과 16세기에 널리 이용되었다.
F. Maraini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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