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퍼옴>신라시대 한반도와 서아시아의 문화교류 - 한양대 이희수 교수

2013. 7. 16. 02:19우리 이웃의 역사

 

'그들은 왜 천축으로 갔을까?'

에 대한 토론자료가 될 수 있을지도......

 

'그들은 왜 신라로 왔을까?'

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도.....

 

첨부파일 신라 서아시아 교류.pdf

 

쌩유

출처 : 실크로드문화연구소
글쓴이 : 비단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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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X 파일     / 다음 카페우리역사문화연구회

 

    청나라(靑) 임금이 왜 신라(新羅)를 사모하는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세운 왕의 이름을 우리는 누루하치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들의 성(性)은 무엇인가?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府儀)의 성도 당연히 애신각라이다. 

  “애신각라”라는 성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는가?

애각(愛覺) 신라(新羅)라,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신라(新羅)? 삼국시대의 그 신라? 그렇다. 그 신라다. 다름 아닌 그 신라다. 청나라와 신라가 무슨 관계냐고? 다름 아니라 청나라의 왕족과 신라의 왕족은 멀리멀리 가면 그 뿌리가 같다.
사실이냐고? 지금부터 이 이야기에 얽힌 기 막힌 사연을 따라가 보련다. 물증은 없으나 너무나 확연한 심증을 드러내는 고대사 X 파일의 첫 장면이다.

 

   우리가 오랑캐 청나라라고 알고있는 만주족이 세운 첫 나라는 청나라가 아니다. 대진국(발해)이 망한 후 북방 종족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그중 거란(글안)족이 세운 나라가 요(僚)이고 만주족이 세운 나라가 금(金)이다.
나중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가 되는 시점에서 이때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할 정도로 “金”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데, 바로 이 金이 “심증”의 근거다.
   金이라고 써놓으면 이 성씨를 가진 사람이 워낙 많아서 두 셋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언가? 신라 가 워낙 오래전에, 그리고 오랜동안 나라를 유지했기에 왕족의 숫자가 이리 많아져 이제 와서는 나라 성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정도가 되었다.

 

   남과 북의 보스가 죄다 김씨니 신라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 든다.
그런데 만주족의 나라이름이 金이라니!
김씨더러 너는 만주족 출신이다, 라고 하면 아마 열받는 정도가 아니고 이빨을 악물고 명예회복을 하러 덤벼들 사람이 한 둘이 아니리라. 그러나 어쩔 것이랴, 그 말은 사실이다.

 

    신라계 김씨의 조상은 김알지가 대표하는 부족으로, 박혁거세와 석탈해 다음으로 왕족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왕은 세습이 아니라 여러 종족 중 한 종족이 번갈아가며 맡아 하였는데 종국적으로 김씨종족이 왕족을 맡아 나라를 이끌어 나간 것 은 우리가 익히 일고 있다.
    김알지는 어디서 왔는가? 만주에서 왔지.(물론 종족 연원이라는 의미이며 지역적 의미는 아니다) 신라족을 구성하는 주 요한 종족인 김씨족은 우리가 알다시피 신라의 중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을 지킨 왕조이다.

 

    사실상 신라왕족을 칭하는 김 씨족의 근원은 어디일까? 김씨들 스스로도 잘 알지못하는 이 부분은 그저 경주김씨라는 관향명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살펴본다면, 경주, 서라벌, 금성, 동경으로 칭하는 신라의 도읍이 현재의 경상도 경주라고 명시해 놓은 책자나 문헌은 없다!) -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어쨌든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것도 크게 나쁠 것 없다.

 

   특히 여기에는 상당히 신비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인디아나존스를 능가하는 모험의 세계가 가득하다. 아마 21세기 우리 문화·경제권의 영화소재의 상당부 분은 여기서 가져올 수 있으리라.)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이 이야기들은 다큐멘터리의 소재감으로는 아주 적절하다. 특히, 동방과 서방을 마구 넘나드는 기마종족(스키타이족)의 이야기를 꾸밀 때면 빠질 수 없는 것들이다.

 

    카스피해와 흑해부근의 스키타이 유물과 한반도 신라의 그것은 너무 닮아서 러시아 학자들조차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KBS 일요스페셜.97.3) 특히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金冠)은 스키타이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줄줄이 달린 곡옥은 지금도 흑해남부와 터키지방에서 발굴되는 스키타이 종족의 그것과 너무 똑같다!  고구려와도 다르고 백제와도 다른 이 금관의 주인공들의 강역은 카스피해 근처다.

 

    이런 추정이 틀리더라도 최소한 동일한 문화를 뿌리고 가지고 그곳과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같은 유물과 같은 문화양식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그들이 같은 연원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완강히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에서 “추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실증이란 문헌에 의지하는 것이고, 결국 문헌을 남기지 못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동방스키타이족은 “역사도 아니”라 는 주장을 하는 주요 근거로 남용된다.

 

    그것도 주로 식민사학자나 그 후계자들(주로 관변사학자)이 잘 쓰고 우리도 그 바탕에서 교육을 받았길래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 살짝 눈을 돌리면 그 유명한 토인비의 가설은 “추정”을 위한 논리틀이다.
   이것은 영국사람 것이라 인정해주고 조선사람이 이런 틀을 만들면, 실증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사이비고 도라이고 괴변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더군다나 문헌 대신 그 광대한 영역에 흩뿌려 놓은 흔적만 보아도 기마종족의 역사가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마종족을 “페라스키야”라고 불렀다.

 

   말을 탄 야만족이라는 이 뜻은 알고보면 “페라”와 “스키야”의 합성어인데, 페라는 “페르”,“펴라” 등과 같은 어원으로 고대 동,서,중앙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던 “불 (fire)” “벌(field)”의 뜻이다. 어떤가? 발음도 비슷하지 않은가? 평양도 이 어원에서 왔고 부여도 이 어원에서 왔다.
    더욱더 신기하게는 페르-샤(터키지방의 고대제국)도 똑같은 의미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 다. 불을 신앙하는 불종족인 셈이다. 강역이 여기까지 가는데, 당신은 만주족이 그저 만주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거기서 왔을 것이라 믿는가?

 

    만주족의 또다른 호칭인 “여진(女眞)족”만해도 그렇다. 그 말은 이두문자다. 즉, 한자의 음을 빌려 호칭을 적어놓은 것이다.
    이 여진이라는 말이 숙신(肅愼), 조선(朝鮮), 주신(珠申)과 똑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가? 그 말은 “밝은 온누리”를 뜻하는 말로써 마찬가지로 박달(밝은 들), 배달과 같은 뜻이라는 말을 그대는 아시는가?

 

    단지 우리 민족(현재의 대한민국경제권을 형성하는)만이 아니고 고대 기마종족 전체가 밝은 들판을 지향해 뻗어나가는 이념(준 이념이라고 해두자)을 공유했다는 추정을 그들의 흔적에서 찾아내는 것이 그대는 도라이들이 하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말텐가?
    만약 그렇다면, 단언하건데, 그대는 없다. 못난 것은 우리들이지 그 넓은 광역을 누비던 우리 조상들이 아니다. 경주 김씨들은 경주에 정착하기 전만해도 카스피 해와 태평양 사이를 오가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황금족이라 칭하였으며 자칭 황금족들은 반도경주에서만 정착한 것이 아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대륙과 만주 곳곳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밝다는 뜻을 가진 金이라는 뿌리말을 지켰고 한 가지가 신라(새라불, New Land/Field)를 세웠고, 통일의 전통을 이어받고자 한 후금(황금족의 후예)의 누루하치는 중원을 제패했다.

 

    물론 이 때는 이미 우스꽝스러운(북방 기마종족들의 입장에서 보면)“단일민족”으로 전락한 근조선(이씨조선, 고조선과 구분되는)은 그들을 오랑캐라며 중국편을 들었지만, 누루하치의 신라사랑은 변함이 없었다고나 할까?

 

    고대사 X파일 첫장면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강조한다. 사실 중국역사의 속을 들여다보면 “상상”을 넘어 선 “공상”이 난무하고 이런 이야기들을 학계의 거두들이 마치 대단한 이론인 것처럼 내세우면 그게 곧 사실의 역사로 추인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이런 상상력을 내세우면 어떻게 될까? 당장 얼마전 SBS 방송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온 사람들처럼 “도라이”취급을 받을 뿐이다. 물론 이 사람 들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도 못하나?

 

    아니 아메리카에 들어온 것치고 원래 아메리카적인 것이 있었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거기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유입된 사람들의 인종통합 실험장이었다. 따라서 중국종족의 것만 있었다고 한다면 웃기는 이야기다.
하다못해 그들 종족은 수시로 다른 민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고대는 물론이고 근세의 청나라도 그렇고 1000년만 넘어가면 몽고족의 원나라가 그렇다. (5호16국 시대에서 5胡가 누구인가? 북방 오랑캐 아니던가?)

 

    고대 소아시아와 우랄산맥, 중앙아시아를 마구 휘둘러 다니던 여러 제국의 역사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코난, 바바리언”이라는 영화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고대 세계사의 수수께끼인 “스키타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분명 오늘 김씨 성을 가진(김알지 계열을 말함. 김수로 계열은 다음에 이야기하겠음)사람들의 뿌리라고 믿는다.
   바바리언, 스키타이, 야만족이라고? 아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고 아마 스키타이들은 말도 탈 줄 모르는 채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을 “패쇄적이고 우둔하고 느린 곰탱이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혹시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위대한 “말(言)의 문화”가 사라졌다는 자막을 보신 일이 있는가? 사라져버린 X파일을 찾는 것은 그들을 선조로 인정하는 우리들의 몫이다.

 

    독자여러분, 제발 상상력을 죽이지 마시라. 오늘의 비참한 신세 때문에 과거를 상상할 힘을 잃는 것은 미래에 대한 꿈도 버리는 짓이다.
이 상상력만 살아있다면, 제깟 춘추사관과 식민사관을 순간에 깔아뭉갤 무궁무진한 흔적들은 아시아 전역에 살아있다. (최소한 몽고가 지배했던 영역은 스키타이들의 것이다)

 

    때가 되면 죄다 살아나 춤을 출 것인즉, 그 때를 기대해보자!

일민족이라는 환상
    영어로 “똥”을 무어라할까요?
답. “덩”
영어로 “보리”를 무어라할까요?
답. “바리”
영어로 “엄마”를 무어라할까요?
마마”
보셨는지 모르겠으나 “혹성탈출”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핵전쟁으로 궤멸한 인류의 뒤를 이어 원숭이들이 문명을 주도 한다.
원숭이들은 과거에 지구상에 자기들보다 우수한 “인간”이라는 종족이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시간터널을 통해 불시착한 우주조종사 주인공들은 이 악몽 속에서 인류의 어리석음을 깨달아 간다.

 

    그런데 이런 영화에 나오는 원숭이들 같은 사람들이 있는 데, 바로 중국사람들이다.
중국 땅에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 현재 중국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조상이 지어놓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중국종족의 뿌리를 북경원인에 까지 연결시켰지만, 이건 황하지방이 사람 살기에 적당하다는 이야기일 뿐 그들의 조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황하지방과 그 이북지방에서 출토되는 고대유물은 “스키타이(기마종족)”의 양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중국종족은 그들의 역사시대를 줄기차 늘여서 은(殷)나라와 그 이전의 하(夏)나라도 같은 계보에 넣는다.
이것은 엄청난 잘못으로, 지금 미국땅에 살고있는 유럽이민들이 자기 조상을 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현재 중국정부는 아예 만주땅의 역사유물에 대해 “조선족”의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민족에 대한 민감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데, 그래서 그 땅이 태고적부터 중국소유라고 믿는 서양인들에게는 사진촬영을 허용한다.
하기야 서양인들에게 극동이란 일본과 중국일 뿐 다른 종족들에게는, 특히 과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중국을 탓하기 전에 곰곰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우리의 연원을 정확하게 알 고있을까?
문교부 검정 국사교과서를 보면 우리의 뿌리는 북방 스키타이가 두 갈래,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한 갈래 정도로, 주로 세 갈래길로 유입되었다고 설명한다.

 


    한반도와 만주를 대강의 강역으로 하는 우리 옛조상들은 주로 우랄알타이어를 쓰는 계통으로 우랄산맥에서 태동하여 카스피해와 알타이지방에 널리 퍼져있는 종족을 기원으로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설명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특히 언어에 있어서는 아주 원초적인 언어들이 주로 아리안계(인도/그리스 등)여서 우리 조상이 과연 북방종족만으로 구성된 것인지는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거기다가 직접적인 증거가 바로 김수로 계열의 김씨종족이다. 가야라는 나라를 세운 김수로왕과 허황옥왕후는 분명히 인도에서 왔다고 삼국사기에 적혀있다.
이 정도의 종족이 이주하여 토착민족과 함께 고대국가를 세울 정도라면 최소한 캘트족이 살던 영국에 앵글로색슨족이 이주한 것과 같은 규모이다. 따라서, 기록에 없는 것까지 합친다면 우리 민족의 구성은 엄청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단일종족이 아니었다!
단일종족이 아닐 뿐만아니라 다종족 연합국가였다! 고구려(高句麗)라는 말은 고씨의 구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말자 체는 이두로서 “가우리”의 음을 빌린 글자다.
가우리? 가운데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뜻을 한자로 옮기면 “중국 (中國)”이다! 중국은 근대에 와서야 그들의 이름을 중국이라고 썼으니 이 나라이름의 특허권은 원래 고구려에 있었던 셈 이다.
특히 고구려를 우리 민족의 옛 조상들이 세운 나라로 인정한다면, 당신은 우리 민족이 원래 단일종족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시는 셈이다.

 

    민족국가라는 것 자체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고대국가의 구성이 다민족 연맹체라는 사례는 너무 흔하다. 따라서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단일민족”을 교육받고 자랑스럽게 여겨온 사람에게 너네 조상은 “혼혈민족”이었다고 한다면? 필자에게 숟가락 놓으라고 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쩌랴? 고구려는 기마종족 연맹체였다. 기마종족에는 부여족(해모수/고주몽 계열)을 중심으로 여진, 돌궐, 선비, 숙신, 말갈, 몽고, 거란, 예맥, 흉노 등의 여러 종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조선의 역사를 찾으려면 중국이 오랑캐로 묘사한 북방종족을 설명한 부분 까지 참조해야한다고 믿었다.
은나라 시대의 기록에서 보이는 구려(九麗,句里)라는 명칭이 바로 기마종족 연맹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 강역이란 또 대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만주와 요동과 한반도 북부 정도가 아니라 서역까지 연장할 수 있다.
    실제로 돌궐이 오늘의 터키지방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기마종족의 강역이란 유라시아 전체를 포괄한다. 그 가운데 고구려는 비교적 동방에 있다는 것이며 백제만해도 그 강역이 베트남과 말레이까지 미친다는 조사결과를 참고하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실크로드란 기마종족들이 말타고 닦아놓은 길이었던 셈이다. 고구려의 멸망은 바로 이 연맹체의 분열과 관계가 있다.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대등하게 겨루던 무력이 하루 아침에 사라질리는 없고, 당나라와 신라가 이 강역을 접수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도 근거가 있는 소리다.
연맹의 핵심만 무너졌을뿐 각 종족정부는 그대로 살아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그대로 대진국(발해)로 이어진다.
    당나라가 원한 것은 강력한 연맹의 와해였을 뿐, 당나라는 그 영토를 빼앗을 힘도 다스릴 능력도 없었다. (중국은 끝내 만리장성 이북을 접수하지 못한다. 만주가 중국 땅이 된 것은 청나라가 망한 최근의 일이고 일본이 톡톡히 공헌했다.)

 

    대진국과 고구려는 사실 그 구성조건이 똑같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단일민족이고 대진국에서는 다종족(지배계층만 우리 민족)이라는 논리는 어거지에 불과하다. 부여족의 리더쉽이 고구려에 비해 약해졌다는 설명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한 추정이다.

 

    자 이제, 문제의 실마리가 풀린다.
우리는 흔히 현재의 내 모습과 환경을 중심축에 놓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한다.
    덕분에 공통의 민족적 울타리에 사는 우리에게 “나라”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모습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이 편견만 넘어선다면 현재의 영토개념이 아닌 지배력 개념의 강역과, 현재의 민족개념이 아닌 종족연맹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다가온다.

 

    우리가 조상으로 생각하는 열국시대(원삼국시대)사람들은 사실, 문화적으로 공통적 경향을 가진 다양한 종족집단이었다. 그중 주로 기마종족의 연맹체를 이루는 것이 고구려를 비롯한 동이족 집단들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족은 동이족과 뚜렷이 구분되는 정착민족의 특성을 개발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권을 형성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또한 먼 옛날에는 우리와 같은 뿌리였을 수도 있으며 이런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은 최대한 오래전으로 잡아도 주나라 이후이다.

 

    따라서 삼황오제나 요순시절까지는 그 민족적 구분이 확연하지 않다. 중국과 우리를 갈라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 시대를 동아시아라 부를 수 있을 지언정 중국과 한국과 일본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고대사를 보는 관점중 “단일민족 국가”라는 개념은 엄청나게 큰 선입견이다. 그런 해석방법으로는 실체를 볼 수 없다. 정말! 우리 선조들이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가 아메리카 합중국의 모델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장점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이 흔적을 모두 잃어버렸다. 물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다시 그 때 그 형식을 실 험해볼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른바 광역경제·문화권(블록)이라는 개념이 그 하나의 암시다.
    고대의 강역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꼭히 이해하려한다면 이런 경제권, 문화권 개념을 떠올리는 것이 좋겠다. 그러고 보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발상이 꼭 틀린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20세기의 첫 시도자(일본)들은 공영이 아니라 자기들만 살기를 바랬다. 그래서 오히려 기마종족을 뿌리로 가졌던 민족들을 서로 원수로 만들어버렸다. (중국 조선족에게 사기치는 걸 보면 우리도 별다르지 않다. 같은 말을 쓰는 동포에게도 그러니!)
    기회는 다시 오고있다. 고구려라는 연맹체를 화두를 다시 앞세운다면, 중국땅을 따먹어서 민족정기를 회복하자는 조금은 유치한 발상을 벗어날 수 있다. 이제 땅을 따먹는 시대는 갔다.
    홍익인간의 이념은 땅따먹기로 실현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문화고 경제고 리더쉽이다.
그런 점에서 김구선생은 영원히 나를 울리는 선각자였다. “내가 바라는 조국은 무력이 강한 나라가 아니며 경제가 뛰어난 나라가 아니다. 무력은 자기를 방어할 정도면 족하고 경제는 밥을 굶지 않을 정도면 족하다. 내가 바라는 조국은 우수한 문화로 사해동포를 이끌 수 있는 문화민족이다...
     문화의 힘이 곧 경제력인 오늘, 한 겨울 구들장과 화덕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여러분은 고구려의 유산을 문화적으 로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그 거대한 동아시아 연맹의 펄럭이는 깃발을...

 

 


리를 누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첫째, 둘째 글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하든, 다시 여기서, 나의 이야기가 대단한 논문이나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여기 저기서 곁눈질로, 혹은 어깨너머로 줏어듣고 훔쳐본 장똘뱅이의 시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써내려간 글이라는 점을 알려드린다.
    제목을 X파일이라 붙여놓은 만큼 신기한 이야기가 나와야겠지만 그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는?”이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독자들 머리에 당장 떠오르는 것은 “신라”다. 그러나 정답은 “단군조선”이다. 왜 우리는 단군조선을 나라로조차 여기기 싫어하고 있을까?

 

    하느님의 서얼 환웅과 마늘 먹은 곰 사이에서 난 단군이 나라를 세웠고 뒤에는 중국에서 흘러온 기자나 위만에게 강탈당했고 그러다 한나라와 싸워 망해버렸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운 단군조선의 모습이다. 나는 이 상태에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가 없다. 설화의 한토막으로 시작하기에 이 시대는 너무 중요하고 중요한 우리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1984년 김정빈이라는 소설가가 쓴 “단(丹)”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로 등장한 후 얼마 안있어, 시중에 “환단고기 (한단고기,桓檀古記)”라는 황당한 책이 나왔다.
    그야말로 우리가 알고있던 민족고대사의 정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정말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 책은 사학계는 물론이고, 목마르게 전씨 아저씨 치하의 답답한 대한민국을 탈출하고 싶던 젊은 사람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환웅이나 단군은 모두 왕조의 이름이고 그 이전 환인시대의 12지파중 하나가 수메르요 우르요 우리라는, “수수께끼의 고대문명”을 논한 것같은, 나라 역사가 일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책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젊은 사학도들이 충격을 받고, 주류사학계로 진출하기를 거부했다.(내가 알고있는 사람만도 꽤 된다)
    하지만 변변한 연구없이, 사학계는 이 책을 위서(조작한 책)로 규정했다. 한마디로 역사학적인 동화책에 불과하며, 희망 사항을 연대기로 조작해 잘 정리한, 치밀한 가짜라는 것이었다.

 

    그 증거는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고, 이 책의 편찬자인 계연수라는 사람은 대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편찬연대도 기껏해야 1920년이며, 그 전에 있던 책을 가지고 재편집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소리고, 이런 식의 책을 죄다 인정해주기 시작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죄다 한 권씩 만들어서 이러네 저러네 할 것이므로 인정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취급하지도 않겠다는 태도였다.

    더군다나 이 책은 그 근거가 되는 고문서, 예를 들면 천부경을 묘향산의 암벽에 새겨진 글에서 떠왔다(탁본)는 기괴한 전설의 고향 수준이어서, 대종교를 위해 계획적으로 조작했다는 의심이 가는가 하면,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의 무덤이 발견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을 써놓는 등, 아예 최근에 와서 밝혀진 것들을 엮어놓는 치명적 실수까지 범했으므로, 짜가 치고는 상당히 노력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짜가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답답한 고대사의 비밀을 중국의 그 많은 위서들이 줄줄줄 풀어헤치고, 일본역사의 최초기록인 일본서기마저도 위조로 볼 수 있는 많은 내용이 있는데, 상당히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조작이라해도 철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가치를 지닌 천부경 때문에, 또는 환인, 환웅, 단군조를 한 사람이 아닌“왕조”로 서술하면서 민족의 창세기에 서 대진국(발해)에 이르는 역사를 총괄하고 있어 사람들을 기분좋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물론 국사 시험과는 무관하다)

 

    독자 여러분! X파일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가장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사건이 바로 우리민족의 20세기말을 장식하는 환단고기 사건이다.
    우리는 의식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일 20세기 후반에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민족사의 대사건으로 기록될, 희귀한 사건이다.
    일만년을 꿰뚫는 역사책이 어디서 숨어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무슨 “쇼”하는 것처럼 나타날 수 있는가? 이게 우리의 슬픔이고 아픔이고 기쁨이다.
    나는 단언컨데,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닐 뿐만아니라, 위서라해도 우리가 지켜 야할 자존심이다. 이런 책을 면밀한 연구도 없이 무시하는 태도 자체가 바로 식민사학이 뿌리까지 오염시킨 우리의 초라 한 발상법이다.

 

    만약 이 책이 일본에서 나타났다면? “빛나는 일본고대사의 비밀을 드디어 풀다!”라고 학계의 거두들이 나서고,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설립하고, 문부성에서도 틈틈히 작업내용을 국제언론에 언급하고, 과정은 공개하지 않더라도 기자회견에 난리법석을 떨면서... 황국 신민들은 그야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미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의 임나일본부 사건에서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국제 사학계의 아무런 공감과 동의 없이 교과서에 “꾹”찍어서 가르치고 있다. 문헌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학설”이야 교과서 왜곡시비에 휘말리지도 않을 것이고, 어쨌든 암묵적으로 그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면 효과야 똑같은 거다.(실제로 일본 고대사의 진위를 따지는 소장학파들도 임나일본부를 심정적으로는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근거를 만들어서까지 바꾸는 이유가 무얼까? 오늘 우리가 잘난 사람이 되려면 내 조상도 잘나야겠다는 비록 옹졸하지만 치열한 발상법으로 그들은 동양의 자존심을 지키는 맹주가 되었다.
    그 열등감을 본받을 필요가 없으되, 있는 것마저 버리는 우리의 치졸함을 깨우칠 타산지석은 충분히 되렷다.
    위서시비 따위는 학술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조작된 부분을 밝혀내고 다른 사서와 비교해서 그렇지 않은 부분을 취하면 된다. 고대사 문헌연구는 언제나 비교연구와 취사선택의 문제일 뿐, 완전히 옳은 책도, 완전히 틀린 책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환단고기가 비록 후대의 편집자의 시각이 들어갔을지언정 완전히 조작된 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 중국의 역사책은 안 그런 것이 어디 있던가? 우리가 택스트라고 일컫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조차 춘추필법이라는 왜곡과 과장의 시험장이었다!
   중국책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우리 쪽에서 나온 책은 중국책에 비추어보아 위서다?
그러나 백번을 양보해서 “위서일 수도 있잖은가?”라는 반론에 점잖게 말씀드리자면, 고려조까지도 이런 류의 서적들은 “공인역사”로는 등장시키지 못하되 삼국유사같은 식으로 유포할 수 있을 정도로 공공연한 것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 고대국가를 서술했고 그 역사가 중국보다 위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완전히 금서로 낙인찍혀서 소지나 배포를 금지당했다.

 

    그런 책이 발견되면 “사문난적”으로 찍혀서 완전히 집안이 박살났다.(우리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장미의 이름”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조차 “웃음이 경건함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서가 된다)
    조선 세조(수양대군) 때, 수 백종의 수 십만권을 거두어 없애버렸고, 그 중 몇 몇 견본을 궁중 서각에 보관했는데, 일제 시대에 와서 “조선사편수위원회”가 이걸 조직적으로 없애버렸다.

 

    이 때, 조선조로 전해지던 이른바 비전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 속에 있는 내용들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것이기도 했건만...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우리민족의 출발을 찾는다해도 환웅은 등장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웅배달국은 거대한 연맹국가로 바이칼(배달)호를 기준으로 부채꼴 모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시기적으로는 대략 BC 3898년이었다.

 

    18대를 전하고 1500년을 지속한 왕조였으니 환웅이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한 왕조의 이름이라는 이야기다.
마지막 환웅에 이르러 우리가 선조로 섬기는 단군왕검을 추대해 단군조선을 창건하는데, 중국에서 요임금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단군조선은 국가체제를 삼신사상에 두고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신(진)한, 변(불)한, 마(말)한이 그것 이다.
세 개의 한국 이야기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신채호선생이 밝힌 강역으로는 신조선(진한)이 시베리아에서 내몽고를 거쳐 만주 이북과 황하 이북을 차지하고, 말조선(마한)이 연해주와 동 만주, 한반도와 중국 동부해안을 위시하고, 변조선(불한)이 황하와 서역에 이르는 강역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삼조선이 깨지면서 삼한의 후예들이 옛 고조선의 이름을 걸고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바로 우리 가 알고있는 삼한시대이다. 이 때가 우리 종족의 열국시대로서, 부여, 신라, 고구려, 마한, 백제 등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이후 아시다시피 우리는 오랜 삼국시대를 지나서 대진국과 신라의 남북국시대, 그 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다.

 

 

    어쨌거나 환단고기라는 책을 통해 재정립하면, 단군조선이란 한 사람의 단군이 살았던 몇 백년 시기가 아니라 일천오백 년 환웅왕조의 신시배달국이 분열의 기로에 서자 삼한사상으로 새로운 종족연맹국을 세우고, BC 2333년부터 BC 295년 까지 왕조를 유지하며, 부여(해모수)와 고구려(고주몽)로 그 계통을 이어준 고대 아시아의 굳건한 강역, 문화공동체였다.

 

   우리가 알고있는 단군신화는 그 아득하고도 끝없는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해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일연승려의 한 방편이었다.
일연승려가 이런 신화를 엮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이 매우 일반적이었던 배경이 숨어 있다.
    실제로 환단고기의 대부분은 고려시대에 작성한 것들이다. 최근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소장파 학자들에 의하면 “가짜 책 시비”보다는 “연구대상”이라는 생각으로 느리지만 서서히 일어나 퍼지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위서가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사의 비밀을 풀 열쇠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발간 초기에, 열에 들떠 국수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예 배척하던 경향에 비하면 상당히 진보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고대사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와 중국과 일본과 다른 소수민족 전부의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진지한 태도가 필요하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박현씨에 따르면, 환단고기의 책중 하나인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대진국(발해)의 문제(文帝)의 연호가 대흥(大興) 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없었다. 중국 사서에는 발해를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제후로 묘사 하였기 때문에 연호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발해의 정효공주의 묘비가 1980년에 발견되었다. 이 비문에는 문제의 연호가 글자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적혀있었다!
    정말 위서라면 1980년 이후에 발견한 이 사실을 환단고기에 집 넣어야 하는데...?
    민족이 기마종족의 특성을 잃고 대륙중국의 부분으로 전락하면서 우리의 손을 떠나 금서로 낙인찍힌 채 “비전(秘傳)” 으로 떠돌아야했던 고대제국의 기록이 20세기에 들어와 자신의 모습을 찾기 시작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눈물 나게 기쁘다. 나는 너무 고맙다.
    우리가 못나서 환단고기는 일본서기만한 대접을 못받고 있지만, 나는 안다, 때가 되면 다들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돌아왔지만 결국 우리의 뿌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게 도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가?”라는 반문과 “니나 잘해”라는 멸시 속에서도 나는 빛나는 민족혼을 지키던 몇 몇 선인들, 우리에게 한글이라는 문화의 요약본을 지켜준 사람들을 기억한다.

 

    아무리 걷어들여 태워없애고 죽이고 멸족시킨다며 겁을 주어도, 어쩌겠는가!
   아직도 아이를 업어길러 안짱다리를 만드는 우리 기마민족의 면면한 전통을 누가 어떻게 없애겠는가. 더 늦기 전에 지키면 그것은 우리 것이다.
   걸어놓으면 멋있던 바지였는데, 입기만 하면 맵시가 죽어버리는 내 안짱다리가 오늘은 어쩐지 자랑스럽다.
말(馬)이 없다고 뭐 문제가 있으랴, 나는 언제나 저 넓은 광야를 선인들과 함께 달리며 푸른 꿈을 꾼다.
이 꿈을 여러 독자들께도 나누어 드리고 싶을 뿐이다.

 

 



는 오랑캐가 자랑스럽다.
    “∼ 무찌르자 오랑캐! 몇해 만이냐!”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 북한괴뢰를 뜻하던 이 말은 중학교 들어가서 북쪽의 중국놈(되놈)들을 뜻하는 말로 바뀌 었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정확한 의의(의미가 아님)를 알았는데, 중국이 아닌 종족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아니, 우리도 중국종족이 아니기는 마찬가진데, 우리는 오랑캐가 아니고 북쪽에 사는 족속들은 오랑캐라고? 그러나 한 편으로 중국말에는 특별히 “오랑캐”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한자숙어로 “이이제이 (以夷制夷)”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이 숙어를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린다”고 훈을 단다. 우리가 만약 제 정신을 가진 종족이라면 이렇게 훈을 달지는 못한다. 우리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증거다.
    이 숙어는 화하족이 이족끼리 싸우도록 해서 이족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족이 누구인가? 키고고(丈), 활 잘쏘는(弓) 夷족이 아닌가? 동쪽에 살던 夷족, 즉 동이(東夷)가 바로 우리다.

 

    우리 종족끼리 열터지게 싸우도록 해서 우리 종족을 다스리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얼마나 못났으면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린다구 지나족의 전략에 박수를 쳐야 하는감? 오랑캐라는 호칭에는 자신을 중국사람으로 착각하던 우리 역사의 슬픈 시절의 참담함이 숨어있다.
    이 말의 정확한 어원은 고려시대부터이다. 몽고족의 침략을 받던 시절이었는데, 몽고족의 전위부대를 맡았던 부족이 바로 몽고족 중에서도 “오리랑카”부족이었다. 이 말을 풀어보면 “오리랑-카”인데 오리랑이 아리랑과 정말 닮았다는 강력한 심증을 갖고보면 궁금증이 더해간다. 이 부족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던지, 이 말탄 야만족을 경멸하면서도 무서워했던 고려사람들은 몽고족을 “오랑캐”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자자손손 물려주어서 아직도 쓰고있다.

 

    몽고에 속한 한 부족의 이름마저 기억시킬 정도로 잔혹했던 모양 이다. 정말 오랑캐들이다. 이 오랑캐를 뜻하는 중국말은 꽤 많다. 우리가 오랑캐로 통일시키기는 했지만 동서남북이 모두 달랐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고 한자는 기억못해도 음은 기억나실 테다. 그중에서 우리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 동이(東夷)라고 배운 것은 아직 기억하실 테고.
    하지만 중국이 자신과 오랑캐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 전은 아니다. 진시왕이라고 불리는 진나라의 창건 자가 대륙을 통일한 시점부터 오랑캐라는 구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때 나라의 이름 진이 지금의 지나, 곧 차이나 (China)다.

 

    그렇다면 종족적으로는 언제 갈라졌을까? 중국족이라는 종족이 적극적으로 우리와 구분되는 사건은 바로 우리가 은허라는 유적과 갑골(거북이뼈)로 기억하는 중국 땅의 고대국가인 은나라의 패망이었다. 여기서 잠시 이른바 중국의 국가계보를 이어보자. 삼황오제 - 요·순 - 하 - 은 - 주 -춘추전국 - 진 ...
    삼황오제는 그들도 최근에 들어서야 역사시대로 인정할 만큼 아리송한 신화이다. 불행하게도 이 시기에 해당하는 기록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고려시대에 와서 옛기록을 참고하여 지었다고 하고, 위서니 아니니 하는 논쟁에 휩싸여 있는 “환단고기”에서 보면 삼황은 아니더라도 오제시대를 우리는 환웅(배달검) 왕조시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 뒤에 나타나는 요순의 기록도 분명치는 않다. 중국의 기록과 함께 우리쪽 기록에서는 요임금이 나라를 건설하던 시기가 환웅배달국의 혼란기였고 이 혼란기를 틈타 여러 제국들이 들어서며 이 중 하나가 요임금이었다고 한다. 연대기적으 로 보아도 이 시기가 바로 단군조선이 서는 시기이다. 그 다름이 하-은-주라는 중국고대국가인데 하나라와 은나라는 중국역사라고 보아야할지 불분명하다.
    즉, 황하지방의 역사라면 몰라도 화하족(중국족)의 역사라고 하기엔 미심쩍다는 것이다. 알고보면 이것은 한나라 시대에 와서 “소급적용” 한 중국국가들이다. 그 증거로 은나라와 주나라 간의 피의 살육전을 들 수 있다. 하나라와 은나라의 정권교체가 비교적 쉬웠던 반면에 은나라와 주나라의 교체는 “피가 강을 이루도록”살육을 통해 이루어졌고, 은나라의 후손들은 중국에 흡수되지 않은 채, 굶어죽거나(백이숙제) 망명하거나(기자) 조선족으로 흡수된다.

 

    은나라는 그 유물을 보아 알 수 있듯 정착민족과 기마민족의 문화가 혼합된 형태를 띤다. 그들은 기마민족의 일파로 중국땅에 정착했던 것이다. 그들이 패망후 고조선으로 흡수된다는 것은 그들의 뿌리가 중국의 화하족보다는 기마종족에 가까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 편 주나라는 비교적 뚜렷하게 기마종족과 구분된다. 그러나 부근 종족과 완전히 구분되는 모습을 보이는, 중국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은 뒤에 있는 진시황 이후이다.그나마 진시왕이 춘추전국을 통일하기전,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들 중 몇몇 나라는 사실 종족적으로는 동이족에 속하는 나라들이다.
    춘추전국을 통해 사실상 중국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이를 하나의 맥락으로 통 일하는 것이 진시황이다. 그러나 통일중국의 첫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진나라의 역사는 고작 30년이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하나의 계기였으며 하나의 모델을 보여준 “사건”일 뿐이었다. 그 후 지리한 분열과 통합과정을 거쳐, 한나라에 와서 중국은 비로소 자기정체성을 가진 종족국가를 형성한다. 漢이라는 나라야말로 진짜로 중국적인 화하족 의 나라였던 셈이다.
우리가 그들의 글자라고 일컫는 한자(漢字)도 바로 이 때부터이고 사기열전도 이 때 쓴 책이다. 비로소 이 때부터 그들은 자신들과 남들을 구분할만큼 개성을 갖기 시작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역사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바로 다른 종 족과의 차별을 분명히 하고 계통과 법통을 세우는 전형적인 작업으로 우리 민족의 삼국사기(고려시대)나 고려사(조선시대) 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성을 갖는 것은 좋은 데, 이 때부터 죄다 자기 거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삼황오제는 물론이고 뿌리가 불분명한 요순시대, 멸족시키려 들었던 은나라에다, 춘추전국의 잡종민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죄다 자기들이 봉한 것이 되었다. (우리가 배우는 한사군도 이 때 나온 것이다. 한사군은 사실 한나라 동북에 있던 고조선중 번조선의 제후국으로 옛 조선 때 부터 존재하던 나라들이었다. 결코 새로 세운 나라가 아니다. 이 이야기도 다음에 한다)
    바로 이 때부터, 열등감에 쉽싸인 화하족이 역사까지 조작하면서 우리를 비하해 부르기 시작한 것이 “오랑캐”다. 그런데 차마 동쪽 오랑캐들은 다른 종족들과 같은 수준으로 욕을 못하고 “키크고 활 잘쏘는” 인간들로 묘사를 했다가 가끔 군자의 나라라고 치켜주기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중국 역사서들에서 보면 요순시절부터 무언가 일이 안되면 동방선인이 나타나 갈 길을 가르쳐주는 데, 동쪽 나라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면 될 것을, 꿈에 신선이 나타나느니, 동쪽 바다에 거북이가 뜨는데 등 위에 글자가 써있다느니, 기가막히게 환상적인 일이 일어난다. 하도의 낙서(주역 전의 희역), 우임금의 치수방법, 홍범구주, 진시왕의 불로초가 그런 예이다. 차라리 죄다 꿈결이라 하고 말 일이지 왜 하필이면 동쪽으로 가면 그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그    런데 바로 이 때부터 우리 종족은 자기 정체성을 잃기 시작한다. 열국의 분열과 삼국의 정립을 거쳐 결정적으로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옛 연맹동족을 치고, 무너진 벌판에 남북국(대진국과 신라)이 들어서 누가 오랑캐가 더 아닌가를 경쟁하더니 급기야, 고려에 들어와서는 오랑캐들과 싸우기 위해 중국의 송나라와 연합하다가 거란에게 깨지고 몽고에게 깨지면서 악독한 적개심을 오랑캐에게 품기에 이르렀다.

 

    "연맹"이란 일단 무너지면 다시 합치기가 전혀 모르던 종족과의 연합보다 힘들다. 우리 종족의 지리멸렬은 민족성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고대국가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을 때 여기에 적응하기 위한 종족들의 대응이 시작되었다. 나름대로 과거의 연맹체라는 정체성에 묶여있던 우리는 상대적으로 고대국가 형성에 빨랐던 중국 화하족보다 느린 진보를 보였다.
    강력한 국가체제를 위해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이고 중국을 따라잡기에 애쓰는 과정에서 우리가 중국 것을 받아들인 셈이 되었다. 근대 이후의 우리와 일본의 관계처럼 문화의 역수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중국보다 덜 떨어진 나라였는가? 아니다. 우리 종족의 왕조들은 대개 한 번 세우면 천년 이상이고 가장 짧았던 고려가 400년을 넘는데, 중국에는 이 정도 나라도 없다!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야 그렇다지만 이 시기에 분화되기 시작한 여러 오랑캐 종족중 우리는 연맹의 장점을 잃어버리고 급속히 중국화한 일부종족의 후예일 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오랑캐족의 천덕꾸러기 신라가 정체성을 이어나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르른 반면 북방 오랑캐족은 세계사에 남을 거대국가를 세웠으면서도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맥을 잇는 것만 역사는 아니다. 시간 속의 한 때를 섬광처럼 반짝이는 오랑캐 조상들이 나는 자랑스럽다. 수만년 의 인간역사도 이 거대한 우주시간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한 때 오랑캐였다!”

 



사를 보는 나의 눈 - 쉬어가는 고개
    먼저번에 재미없는 화하(華夏)족 지나의 계보를 계속 따진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오랑캐들의 계보와 비교해보기 위해서 이다. 큰 흐름으로 보면, 역사가들의 입장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두 입장을 간략히 설명해 보겠다.
    첫째번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기나긴 세월을 거쳐 지정학적인 강약의 좋은 점과 피해를 같이 맛보며 대륙과 해양의 문화를 흡수하고 침략과 강탈을 이겨내며 굳건히 버텨 오늘날의 자기정체성을 이룩한 것으로 본다. 강대국 중국과 겨루어 대등했던 때도 한 때 있었을 정도로 대단했고 문화적으로도 고유성을 가지고 중국을 흡수하고 일본을 지도했으며 동아시아의 아름다운 나라로 그 모습을 아로 새겼다고 평한다. 특히 주목해야할 집단이 바로 신라다.

 

    신라는 고구려의 대륙성과 백제의 해양성을 흡수통일하지는 못했으나 중국과 분명히 다른 우리만의 고유함을 지키고 발전시켰으며 동아시아의 수 많은 종족들이 중국으로 흡수되어 가는 동안 우리 민족 이 자기모습을 지키는 기초를 닦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도 끝에 붙은 조그마한 나라였지만, 마치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구석진 곳의 고유함을 세계적인 문화로 발돋움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첫번째 입장이다. 
    두번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의 역사는 중국과는 반대로 원래의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는 흐름을 보인다. 환웅의 신시배 달국과 단군조선이 워낙 광대하고 강한 나라였던지, 종족의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은 중국과는 반대로 통합(統合)이라는 흐름이 아니라 이산(離散)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전국시대에 중국땅에 있었던 그 많은 나라들 중 절반이 우리 종족의 나라였으나 각개분열로 중국역사에 흡수되고 말았고, 중원과 북방, 만주, 몽골고원, 시베리아의 여러 동족들도 제 각기 나라를 세워 서로 치고받기 시작하면서 종족분화는 물론, 각 종족도 문화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거야말로 잘 나가던 집안이 형제간에 싸움질로 쫄딱 망하는 모습, 그 자체다! 특히 고구려의 멸망은 기가 막힌 민족사의 절단이었다.

 

    맏형 고구려가 무너짐으로써 우리는 거대한 중국과 외롭게 싸워야했으며 이 과정에서 약소국으로 전락했고 단군조선 시절의 빛을 잃은 채 살아남기 위해 사대(事大)해야했다. 고구려와의 단절을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수많은 노력들은 사대주의 정파와의 싸움에서 지고 또 져서 결국 한말의 국권 상실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가 회복해야할 것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라는 것이 두번째 입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보는가? 독자 여러분은 아마, “고대사 X파일”이라는 글을 짓는 사람이라 당연히 두번째 사람들의 입장이리라 여기시겠지만, 나는 두 생각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난 번에 말했던, 역사의 아이러니가 내 입장이다. 거대종족의 연맹체를 꿈꾸는 것은 한편으로 오늘의 우리가 보잘 것 없기 때문이고, 작은 나라지만 고유의 문화를 간직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거대종족의 연맹체가 사실은 “민족국가” 라는 입장에서 보면 도대체 공허한 울림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이다.
    고구려를 정통으로 하는 민족사를 서술하면서 단일민족을 운운하기가 나는 쑥스럽고, 그렇다고 신라를 버리면 우리의 지금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 혼란에 빠져있는 외로운 학인(學人)이다. 내 역사관점의 한계라고 자인한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 설명한 두 관점의 공존을 용인하는 “자랑스러운 오랑캐의 역사”라는 관점을 내세운다. 이것은 사 실을 보는 관점으로써 신채호 선생의 그것과 김용옥 선생의 그것을 빌려온 것이다. 두 유형의 오랑캐중 나는 아직 어느 것이 더 자랑스러운지 결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둘다 너무 극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아직 내 겨레의 자기정체성에 대해 확신을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다시 바꾸어 말 하면 우리 민족이 현재의 상태를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미래가 안보인다는 의미다. 미래가 안보이니 과거를 해석하기가 어렵다.

 

    가엾은지고. 어쨌거나 나를 과대망상이라 부른다면, 신채호도 뒤지지 않는다. 과대망상이라, 내 방 책장에는 아직도 군대시절 잡지에 서 오려만든 신채호선생의 액자가 날마다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분을 과대망상환자로 (진심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그분을 진지한 연구와 끝없는 노력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우리 겨례의 눈을 띄워준 분이라고 생각한다.

 

    김용옥도 마찬가지다. 내가 존경하는 이 동양학자는 직설적인 강의와 선정적인 표현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꽤 많은, 이 시대의 천재다. 단순히 동경제대를 들어가기 위해 한 달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했다거나 대만국립대와 하바드를 동네학원 들어가듯 쉽게 다녀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는 “한자”로 적힌 우리 옛문헌을 “번역”해야한다고 감히 주장한 정통파중 단 한 사람이다. 우리 옛문헌이 외국어로 적혀있다는 말이 아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그 사상을 계승하기에 너무도 변란이 많았던 우리시대의 지성으로는 저 거 대한 조상들의 머릿속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번역서 한권 없이 원효가 어쨌다느니, 성리학이 어쨌다느니 하는 것이 정말 웃긴다는 분노서린 한탄을, 주류학계에 마구 날릴 용기를 가진, 진정으로 노력하는 사람, 진정한 천재다.
    만약 나에게 권한이 주어진 다면 “나는 이 사람을 일본 열도와도 바꿀 마음이 없다”고 선언하고 싶다. 동시대의 사람에게 이런 면류관을 주기에 우리는 너무 작은 사람들이어서, 신채호 선생도 그 시대에는 기인으로 취급당 하며 감옥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너무도 쓰라리게 살다 가셨다.

 

    그가 남긴 조선상고사의 외로운 빛이 아닌들, 우리가 어찌, “위대한 오랑캐”라는 상상이나 감히 할 수 있었을까. 그저 곰의 자손이라는 자기멸시 속에서 토끼만한 나라를 지키느라 죽을 고생 다하며 더러운 짓 다했기에 세계사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함석헌의 절망노래로 만족해야 했겠지.
   독자 여러분중 아마 몇몇 분은, 글을 짓는 나를 “과대망상”에 걸린 환자로 생각하시리라. 한 편으로는 그런 모습이지만, 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한 민족국가 시대에 살고있다. 몇몇의 합중국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지구상의 사람들은 “민족”을 단위로 나라를 세우고 삶을 영위한다.

 

    이 관점에서 먼 과거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모순과 허점 투성이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이 수도 없이 나타난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아니”라고 한다든가, 우리 생각에 맞게 억지로 바꿔 버린다면 해석이 아니라 “조작”이다.
    역사에는 추정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견지한다는 “관점”이 있을 때 정당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 정말 잘났다는 자기기만이 아니라, 진실을 회복함으로써 상처난 우리 자존심을 치료하는 꾸준한 작업이다.
   이것은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 소공녀의 이야기와도 비슷한 것이어서, 조금 동화스럽기도 하지만, 충분히 필요한 작업이다. 물론 시험에는 안나오는 이야기를, 가끔 이런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하는 나에게 던지는 가당찮다는 시선을 경험한 필자로서는, 마구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중국을 정벌하고 일본을 가라앉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문화주체의 역할을 스스로 인정하고 남에게 인정받으려면 자신의 계통에 대해 나름대로 주장하는 바가 뚜렷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을 뿐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발흥하고 민족국가가 생성되면서, 각 민족은 별 상관도 없던 왕족의 역사와 그 이전의 역사까지 죄다 “민족의 역사”로 포장하기에 이르렀다. 면면한 실천과 끊임없는 정진으로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상식적인 주장에서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각들이 “역사”라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조상들의 재미난 흔적보다는 이 철학일지도 모른다.
   역사에 대한 생각(철학)은 곧바로 사실을 담고 조리하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어떤 그릇이냐에 따라 담긴 사실은 어떤 모습과 색깔을 품는다. 오늘 흐트러진 우리의 현대사가 담을 수 있는 진실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한다면, 작아진 우리가 담을 수 있는 저 거대한 조상들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더 초라한 스스로를 느끼고 이 작업을 포기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시라!
역사를 통감(通鑑)이라고 불렀던 우리 선인들의 뜻깊은 생각을. 그들은 그들 대에 아무런 소용이 없을 실록을 오백년간 임금도 못보게 한 체 써왔고, 그 덕분에 우리는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오백년 왕조의 실록을 가진 민족이다.
    지구상에 오백년씩 왕조를 유지한 종족이 과연 얼마나 되던가? 그리고 오백년간 실록을 써온 종족국가가 얼마나 되던가? 하물며 그 전통은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고 저 먼 옛날, 단군조선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천년이 넘는 단군조선과 부여족의 여러 나라들이 기록한 사서들은 이제는 연기로 화한지 오래된 비기(秘記)가 되었지만, 그 정신만은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정신을 혼란한 틈새에 놓쳐버린다면, 그 죄를 조상과 후손들에게 어찌 갚을 수 있겠는가...

 

 


랑이는 어디로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중국에 불교를 전할 뜻을 세우고 히말라야를 넘어 동쪽으로 갔다. 이처럼 뜻을 세운 사람 하나의 흔적도 분명히 남아있는데 거대한 종족의 무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역사를 찾는 후세의 노력부족에서 원인을 찾아야하는 문제겠지만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사례 하나를 들어 우리의 상상력을 비약시켜보자.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이것이 곰 토템족과 호랑이 토템족의 투쟁으로 곰족이 승리한 역사의 기록이라는 점은 역사가들도 지지하는 설이다. 곰족이 우리가 말하는 단군조선의 정통구성원이었다면, 호랑이족은 누구였으며 정통성 다툼에 패배한 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단군신화에서 나타나는 상징성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실제로 역사와 연결시켜보자. 단군왕검의 출현은 환웅 신시배달국의 분열과 멸망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환웅이 아들을 보고 아들이 왕이 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왕조와 왕조의 교체를 너무나 함축적으로 설명한 신화다.

 

   창세기 1장1절과 2절 사이의 간격만큼 먼, 그런 거리를 단 한 사건으로 연결한다. 신화의 용도는 그런 것이다. 천년의 비약이 환웅과 웅녀의 가족사에 숨어있는 셈이다. 이 연결고리에 곰과 호랑이의 설화가 끼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 원래 함께 살았던 곰과 호랑이가 단군을 기점으로 헤어진다는 의미다. 그것도 마늘과 쑥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곰은 환웅의 적통을 이어받을 옥동자 단군을 낳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도망간다. 그리고 그 후로 그들의 흔적은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호랑이는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호랑이족이 정통성에 패배해 권력을 잃고 피지배층이 되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 멀리멀리 다른 땅을 찾아 떠나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을 찾아떠나보면 호랑이 토템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동북부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설화가 전하고있고 산동성에서 청나라때 발견되어 다시 세워진 고대 사당에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판박이한 듯한 그림이 있는데, 여기서는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적통을 잇는다.
    호랑이라는 점만 빼면 단군신화와 이야기 줄거리가 같은 벽화가 걸린 이 사당의 이름을 “무씨 사당”이라고 한다. 나는 호랑이족의 출현을 중국왕조의 출현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때만 해도 중국적 특징보다는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이 더 많은 고대중국의 국가다.
    실제로 초대 단군시대는 중국의 요임금과 맞물려 있고, 한단고기가 주장하는 대로 라면 요임금은 한웅시대에 배달국에 도전했던 황제(黃帝) 헌원 이후 최초로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인 나라을 세운 중국왕이다.

 

    한단고기가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요임금이 중국의 동북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임금의 어머니는 동쪽 바다로 놀러갔다가 용에게 겁탈당해 요임금을 낳는다. 특히 요임금이 천거하여 왕이 된 순임금의 아버지는 고수라는 사람으로 중국이 아닌 동쪽나라의 관리였다.
    한단고기의 연대기를 믿기만 한다면 순임금이 고조선 관리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증거할 수 있다. 이 때만 해도 중국과 조선이 민족국가로 분리된 때가 아니었으므로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즉, 요임금이나 순임금은 중국보다는 우리종족에게 더 가깝다는 의미다.(그러나 일단 국수주의적인 해석은 삼가자)
    요순 뒤를 잇는 하나라와 은나라에 와서 드디어 우리는 호랑이의 정체를 본다. 환웅의 배달국에서 함께 살았던 곰과 범은 아마도 누가 진정한 계승권자냐라는 적통의 문제로 갈라선 것으로 보인다. 단군신화는 그 사실을 매우 상징적이지만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범은 못 참고 갔고 곰은 사람이 되어 적통을 이엇다는 거다.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곰족과 갈라선 범족은 이미 환웅시절부터 광범위하게 대륙에 흩어져있던 夷족(배달족)을 결합하여 곰족의 조선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그 첫나라가 은나라다.
   그들이 배달범족이다. 상상을 돕기 위해 이렇게 정리해 보자. 한웅의 신시배달국 시절에 많은 종족들이 연합을 이루어 살았다. 물론 그중 적통은 고조선으로 나라를 이어간 곰족들이지만 다른 많은 종족들(말갈,선비 등등)과는 형제국이었을 것이다.
   적통을 잇는 과정에서 범족이 분리되자 그들은 곰족과 대립하게 되었고 다른 형제국들과는 달리 중원으로 흘러들어가 중국족, 즉 화하족과 혼혈문화를 이룬다. 중국문화 자체가 혼혈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상당부분 기마종족의 특징을 지키며 나라를 이어간다.

 

   이 배달범족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 고유성을 지켰을까? 지금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흙탕에 묻혀 고유함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는 상당한 사료를 근거로 이 흔적을 한나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우선 주나라에 패퇴한 기자가 동북으로 가서 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의 왕이 되는 장면에서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연대기로 보면 진시왕 시절에 해모수가 부여를 세우고 조선을 폐했으므로, 한나라에 망했다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이 번조선이다.)
    성삼문이 읊었다는 백이숙제의 수양산 이야기도 이 시절의 것이다. 하는 짓으로 보아 틀림없이 배달족이다...

 

   이야기를 이어보면, 은나라가 망한후 주나라가 섰지만 많은 수의 배달범족이 여전히 중국땅에 살았다. 그래서 광범위한 혼혈이 이루어지고 이 때문에 옛조선의 동이족은 더욱 이들을 동족 취급하지 않는 데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사기열전”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 갈래인 배달범족의 나라다. 공자가 인자의 나라인 동쪽 나라로 가고 싶다고 한 것은 바로 그들의 원래 출신인 배달나라로 가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가 보기에 모략과 후안무치가 난무한 중원에 비해 동쪽나라의 태평성대는 거의 환상이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사람들이 다 타락한 지금에 와서, 태평성대의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오히려 모사와 정쟁으로 점철된 사기열전은 잘 팔릴지언정 교화와 훈시로 가득한 옛조선의 기록은 정말 재미가 없다. 사기열전에 나오는 춘추시대의 나라들 중 거의 반이 배달범족의 나라였다. 이런 기록은 그들이 조선과 적절히 연합하기도 하고 적대하기도 하면서 나라를 운영했다는 사소한 기록을 죄다 훑어봐야 가능한 어려운 작업이다.

 

   사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는 것이 중국대륙 내의 배달범족 국가다. 그들이야 혼혈문화로 뒤덮이기 시작했던 초대 단군시절부터 조금씩 배달족의 순수성, 즉 기마종족적인 요소와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은나라는 틀림없이 기마종족적 요소가 강한 북방민족의 후예였고, 주나라 동북을 차지한 연나라는 그 국민들 대다수가 漢족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는 주나라 무왕의 아우가 풍속을 바꾸는데 삼년이 걸렸다고 고백한 틀림없는 배달범족 국가이고 송(宋)나라와 위(衛)나라도 배달범족국가라는 증거가 많은 나라들이다. 배달범족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보아야 하지만 한웅배달국 시절에 중국에 터를 잡은 배달국가,
즉 동이(東夷)가 아닌 다른 夷족 국가로는 제나라와 래나라, 오월동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다. 특히 패왕 항우로 유명한 초나라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을 구성하는 종족들은 주로 蠻夷(만이), 淮夷(회이), 萊夷(래이) 등의 초기 배달족이다. 배달국에 있었던 아홉가지 夷족(九夷)의 후손들인 셈이다. 여기까지 오면 머리가 어지럽고, 박창규와는 사귀지 않는 것이 좋다고 느끼실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고있는 것일까? 만약 박창규가 맞다면 내가 알고있는 것은 무언가? 중국이 우리라고? 이 녀석이 제 정신인가? 우리가 알고있는 문헌으로의 역사란 중국족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책에 의지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쓰기 시작한 책에서 시작하는 역사라... 예를 들어 이런 얘기는 어떨까? 이건 정말 학술적이 라기보다는 상상력에 의지해 술 마실 때나 꺼내는 추론이다.

 

    사기열전은 이미 한나라라는 화하족의 나라가 선 다음에 나온 책인데, 여기 보면 진시황은 중국땅에서 배달족의 영향을 몰아내기 위해 장성을 세우고 옛기록을 태우고 유(儒)라고 부르는 지식인들을 매장한다.
    儒, 지금은 공자학파로 부르지만 그때만해도 공자를 비롯해 제자백가를 모두 유라고 불렀다. 이를 제사장적인 전통을 가진 기마민족의 지식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많다.(주무왕이 기자에게서 배운 사례 등) 단군왕검이라는 제사장적 전통이 곰족의 것이라면 儒라는 지식인적 전통은 배달 범족의 것이었던 셈이다.
   진시황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배달족의 나라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끝내 완성하지는 못하고 전국을 맞는다. 유방과 항우의 혈전으로 삼천만에 달했던 중원의 인구는 육백만으로 줄어들었다. 배달범족은 이 때 씨가 말라버린 셈이다. 이 때부터 “중국”이 섰다. 漢나라다. 그 한나라가 사기열전을 썼다!
    제 종족 이외의 종족을 죄다 제거하고 그 땅에 있는 옛것을 죄 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역사전환의 출발점"이다...
   호랑이들은 서쪽으로 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진시왕 때 망했다가 다시 일어나 한나라와 중원을 놓고 일전을 벌인 초(楚)나라는 만이(蠻夷)땅에 살던 웅역이라는 사람의 조상에서 비롯된다고 사기열전에 적혀있다. 근원을 잘 알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사마천의 의도를 잘아는 나는 패왕 항우가 배달범족의 마지막 왕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말? 정말! 장기둘 때 생각나겠네? 응! 언제나 초나라를 아래로 취급하는 것, 바꾸면 안되나? 바꾸자!

 

 



미가재(神風), 고베(神戶), 고맙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공업”과목을 지도하던 선생 한 분이 우리 아해들에게 이런 강의를 했다...
   " 우리가 산업적으로 뒤진 건 개방을 늦게 한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버릇 때문이다. 형광등을 켤 때 반짝거리며 방전을 유도하는 것을 우리는 "깜빡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램프의 특성은 방전을 유도하기 위해 전류를 모으는 것이기 때문에 영어로 Grawing Ramp(키우는 전구)라고 한다. 기능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명칭이다... ...이것보다는 못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스타트(start) 다마”라고 한다. 형광등의 불을 켜기 위해서는 일단 이 전구로 기능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런데 우리 말로는 무어냐? “깜빡이”다. 그저 겉으로 깜빡거린다고 기능이나 속성과는 상관없는 겉모양으로 이름을 지어놓고 부른다. 이 얼마나 생각이 모자란 짓이냐. 이런 생각의 깊이로는 선진국 이야기를 꺼내지도 마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사실은 사실 아닌가. 우리는 그걸 깜빡이라고 부른다. 형광등에 달린거나 차에 달린거나 마찬가지다. 유리 닦는 소제용 청정액을 우리는 “칙칙이”라고 부른다. 칙칙 소리내며 분사되니까. 그렇지 않은가. 이게 저열하다면 저열한거다.
    어디 그런 것이 한 두가지인가? 고대사 X파일이 갑자기 문명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로 전환했나? 정말 당황스러우실 분도 계실거다. 근데 이 간단한 이야기에 숨어있는 무궁한 역사를 찾다보면 우리는 다시금 “문화”의 영속성 앞에 너무 초라한 우리 개개인을 발견한다.
    한자로 깜빡인다는 말을 명멸(明滅)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깜빡”의 본 뜻도 모르고 그저 그렇다고 알고 있다. (물론 이미 알고계신 분에게는 실례겠지만) 이것은 죽은 언어다. 뜻도 모르면서 쓰는 말은 죽었다. “깜빡”을 분해해보자. 깜은 검다는 뜻이다. 즉 어둡다는 상태다. 때로는 음양의 음으로도 쓰인다. 백제의 서울이었던 웅진(熊津)은 이두문자다. 우리 말로 옮기면 감나루, 곰나루가 된다.
   곰 웅자를 쓴 것이 바로 이 “깜”자를 쓰기 위한 거라는 뜻을 아시는 분은 잘 없다. 단군신화에도 웅녀가 나온다. 왜 웅녀인가. 곰녀다. 감이 태음신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일본말에 이 흔적이 남아있다. 가미가제(神風)라고 알고있는 단어의 가미는 神을 뜻한다. 고베의 고자도 한자로 쓰면 神이다. 한자의 뜻과 음을 다르게 쓰던 이두는 일본말의 한자읽기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고스란히 8세기 이전의 우리 종족이 쓰던 말을 간직하고 있다.
    8세기 이전에 우리말과 일본말은 구분할 수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 말에도 흔적은 남아있다. “고맙습니다”라고 한다. 뜻을 알고나면 “감사합니다”라는 형식적 의례보다 더 깊은 이 말을 안쓰고는 못배긴다.
    “고맙다”는 말은 “고마같다”는 뜻으로 “어머니신같은, 태음신이신 어머니신같은 분”이라는 뜻이다. 따스하고 정겨운 대지의 신, 어머니 같은 은혜를 칭송한다는 의미다. 어찌 사의를 느낀다는 한자어 “감사”에 비기겠는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당신은 상대방의 행동을 내 어머니처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뜻을 보내는 것이다. “빡”은 밝다는 것이 그 어원이다. 밝달이나 배달, 한자로 朴, 白, 金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해모수의 解자도 알고보면 이 밝다는 뜻이고 환하다는 뜻의 “桓”이나 “한”도 알고보면 환하다는 뜻, 밝에서 나왔으며 빛과 별 등의 뜻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주로 태양신을 뜻하는 밝신은 그 형태를 밝달나무나 천신의 의미로 아로새겨왔다. 이 뜻을 아는 몇몇 박씨들은 자기 성을 한글로 쓸 때는 아예 “박”이 아니라 “밝”이라고 쓴다.
    “밝혁거세”가 원래 의미에 맞다는 이야기다. 이 태양신의 의미는 더욱 발전되어 주로 “니마”,“님”, “임”등의 뜻으로 썼다. 고려와 조선시대 시를 보면 “임이시여”라고 부르는 것은 다같이 태양같은 존재이던 임금을 뜻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님”이 무엇을 뜻하는지 왜 묻나? 님이라는 존재는 항상 태양같은, 강한 존재를 일컫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을 뿐 특정한 무엇을 지칭하지 않는다. 일본(日本)을 “니혼”이라고 하는데 태양신을 “니”로 부르는 것도 그 흔적이다. 이제 王을 뜻하는 우리말 “임금”이 왜 그런 뜻을 지니는지 알 수 있다. 니마와 고마가 합친, 태양과 태음이 합친 존재를 우리는 임금이라고 불러왔다.

 

   서까래 세 개를 진 왕이 아니라 이를테면 천자(天子)의 의미로 하늘과 땅을 주재하는 인격의 대표라는 의미이다. 이런 식으로 찾다보면 드디어 “깜빡”이라는 말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어떤 이는 말의 음양성이 알타이어의 특징이라고 한다. 맞다. 알타이지방이나 우리나 말의 음양성이 뛰어나다. 특히 음적인 것, 여성적인 것이 앞서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면 남녀(男女)라고 할 것을 “년놈”이라고 한다든가 노소(老少)를 “애어른 할 것 없이”로 순서를 바꾸고, 주야(晝夜)를 밤낮으로 바꾼다. 결국 이런 여성성을 가장 잘 간직한 것이 일본말의 가미라고 볼 수 있다.

 

    일본말에서는 가미가 곧 신이다. 여성신이 천신인 셈이다. 단군조선의 삼한중 변한의 역할이 바로 태음신의 기능이었고 변한의 적통을 이어받은 일본이 이런 말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환웅도 마찬가지다. 환하다는 한에 웅이라는 뜻을 붙이면 임금, 임검의 뜻과 같다. 그래서 이 말을 절대로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가 아니다. 단군이나 환웅이나 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니사금”이라는 신라왕을 지칭하는 이두도 알고 보면 “닛금”, 즉 “임금”이다. 임금이라는 말은 천신의 뜻을 따라 땅과 사람을 다스리는 역할이었으므로 마한, 마립간, 말칸, (징기스)칸의 “한(칸,간)”과도 어의가 상통한다. “한”이라는 말은 이 모든 것을 어우르는 뜻이다. 몽고가 유라시아를 제패하고 세운 나라가 죄다 “한국”이다. 왜 한국인가? 그들은 우리와 같은 “밝달”, “배달”의 자손이다.

 

    밝은 들을 향하여 끝없이 정진하는 모험정신의 나라, 밝달이다. 그래서 세우는 땅마다 “환한 들판”, “큰 나라”라는 뜻으로 “한국”을 세운다. 조선(주신,숙신,여진)도 경계라는 뜻(만주말에 남아있다)이므로 우리 종족들은 “밝음”을 지향하던 원초적 이상을 공유하는 셈이다.
   박창규! 그만 우려먹어라. 깜빡이 하나 가지고... 그러나 독자 여러분, 어찌 이 깊고 오래된 뜻을 형광등 깜빡이에 쓴다고 “저열”한 생각의 깊이를 욕하겠는가? 그로잉 램프나 스타트 다마가 훨씬 좋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말이다. 문제는 이 뜻을 잃어버린 우리일 뿐, 말과 생각에 음양과 오행이라는 지표을 세워 지켜나가던 조상들이 아니다.

 

    윷놀이에 말이 왜 다섯개인가? 공기놀이에 공기돌은 왜 다섯개인가? 왜 윷놀이는 뒤집고 엎어지는데 따라 말을 가르는가? 왜 공기놀이의 끝은 손등에 올려놓은 공기돌을 손바닥으로 뒤집어 잡는가? 왜 그런가? 왜!
   이쯤하면 우리같은 못난 후손들이 다들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차라리 일본말고 미국한테 식민지 생활했으면 영어라도 잘 했을텐데”하는 생각을 할 때를 대비해 이렇게 일상의 면면에 옛 정신의 밝은 뜻을 숨겨놓은 의미를 짐작하실테다.
   물질로 세계를 제패한다해도 제정신이 없는 민족은 한 마디로“없다”. 미국이 왜 그 짧은 역사를 뒤집고 뒤집어 수많은 정신을 재발견하고 재창조하는지, 그 뜻을 모르시겠는가. 어느 회사동료의 말처럼,

 

    그들은 아직 XT급(최초의 PC)에 불과하던 컴퓨터로 사람을 달에 보낼 “모험”을 하던 나라다. 벌써 30년전 이야기다. 태극무늬에서 카오스를 떠올리면 이미 늦었다. 건과 곤에서 이진법과 컴퓨터를 떠올리면 이미 늦었다. 64괘에서 인공지능을 떠올리면 이미 늦었다.
    문제는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 아니라 그 정신을 우리 스스로 구현하는 일이다. 평양땅에 있던 한사군 낙랑을 가르치고 곰의 아들 단군 한분이 한 대를 전한 옛조선을 가르치면서, 포용할 줄 모르는 고집과 독선때문에 한반도로 줄어든 “단일종족”을 가르치면서 조상의 빛난 얼을 운운하는 팔자좋은 세태에 왼 “얼”? 정말 얼치기가 웃을 얼빠진 소리다.

 

    나는 기억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국사시간을. 학생과 선생이 서로서로 제 나라 역사를 비웃으며 나중에는 그것이 곧 정권에 대한 일종의 도발이라고 정당성을 부여하던 비참한 교과서 읽기를 기억한다.
   오죽하면 생활관에 들어가서 지금은 어느 대학 교수로 간 당시 3학년 국사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민족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 ‘한 눈 없는 어머니’라는 이은상의 독백을 기억하던 우리 몇몇이 못나도 내나라 내민족이랍시고 손을 들자 선생님은 열변을 토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이 지역을 근간으로 삶을 영위하던 만주족, 거란족, 몽고족, 여진족들 다 어떻게 되었느냐? 없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당당하게 버티고 있지 않느냐!” 그 다음에 손을 들어보라고 하자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형제 종족국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며 중국에 흡수되어가고 그러다 살아남은 이 나라가 자랑스럽다고 손을 들었다. 상대적으로 우수하대서 손을 들었다. 모르면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나는 지금 자랑스레 손을 들 수 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손을 번쩍 지켜들며 “만약 우리가 그 정신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전혀 달라질 우리 미래를 꿈꾸며 자랑스러운 내 나라 내 민족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손을 번쩍 든다.

 

 



, 캐쉰, 개소문, 개금
    연개소문이라고, 고구려의 마지막 재상(대막리지)이었던 사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른바 쿠데타로 왕을 바꿔앉힐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누렸고 당나라의 두차례 침입을 단호하게 막아낸 사실이나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삼형제가 분열한 것이 고구려 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리 문외한인 분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하다못해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활을 쏘아 당태종 이세민의 눈을 맞힌 일 (그후에 그 상처가 악화되어 당나라의 창건자인 이 사람은 죽는다)을 우리는 우리 민족사의 자랑거리로 두루두루 이야기 듣고 배웠다.

 

   이세민이 누구던가. 중국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를 구가한 “당나라”를 창건한 사람이 아니던가. 이 사람과 가장 대등하게 겨루던 연개소문은 그저 수비가 아니고 아주 전략적이고 공격적으로 당나라에 맞서 고구려를 굳건하게 지켰고 고구려의 강역을 넓힌 것으로 평가를 받고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다.
   우리가 연개소문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게 다다. 이 사람이 죽고 고구려가 꺽어졌는데 이것은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다. 동아시아의 재편을 가져오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 몇 십년, 아니 몇 년만에 필름을 고속으로 돌리듯 일어난다.

 

    이 시기는 일본의 고대사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백제가 해체된지 겨우 팔년만의 일이며 백제와 고구려의 호족출신 망명자가 대규모로 발생하는 시기이다. 일본과 한반도 상의 국가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판도를 결정적으로 다르게 만든 연개소문의 죽음은 사실, 수수께끼에 가려있다. 이런 이야기에는 으레 야사가 끼어들게 마련인데, 여러 야사와 주장을 종합해 박창규가 재구성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라.(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를 기초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고구려의 한 지방제후(또는 고급관리)였던 연국혜라는 사람의 아들로 성씨가 있던만큼 무게있는 집안의 자제였다. 연국혜가 자식이 없다가 쉰 살(50세)이 되어 아들을 보니, 너무 기뻐 이 아이 이름을 쉰 살에 낳았다하여 “갓쉰”동이라 불렀다. (만주의 구전민담/ 전설“갓쉰동전”) 갓쉰을 만주말로 발음하면 “캐쉰”이고 이를 이두로 옮기면 “개소문(蓋蘇文)”이다. (연국혜가 50이었는지, 연국혜의 아내가 50이었는지는 불확실) 낳은지 몇 해 안되어 길을 지나던 仙人(스님이나 도사 정도)
이 연국혜를 불러 상담하기를, “이 아이가 한 나라를 세울 큰 웅지를 갖고 태어났지만 운수가 매우 박하여 일찍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국혜가 몹시 슬펴하면서 방법이 없겠느냐고 하자 “딱 하나 방법이 있는데... 아이를 지금 당장 강보에 싸서 멀리 달딸국(후에 당나라가 되는 당시 수나라의 제후국)에 갖다 버리라(바리공주 이야기나 성경의 모세이야기와 흡사한 모드다)” 고 하자 연국혜가 그리하면 이 아이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자 그러기 위해 아이에게 정표로 등에 “갓쉰(개소문)”이라 새기고 15세가 되기 전에는 찾지 않는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점점 흥미 진진해짐... 나는 이 이야기를 “갓쉰동전”으로는 못듣고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때 외할머니의 친구였던 우리 담임선생님이 선물로 준 옛날 이야기책에서 읽었다.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구도나 이야기전개가 신채호가 인용한 갓쉰동전과 똑같다.
    그러나 상상력과 추리력을 좀 더 발휘하면 이것을 이런 설화로 파악하기보다는 고구려 변방의 한 제후국이었던 나라의 왕이 근접한 강력한 나라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했던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다.
    지금처럼 민족국가의 경계선이 확실한 상태를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일은 아주 흔한 일로, 고구려가 AD313년에 호동왕자가 정벌해서 무너뜨렸다고 외워서 시험치는 낙랑공주의 나라 낙랑(한사군의 하나라고 알고있는)도 지방토호국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없어져버린 한나라(AD221이면 이미 조조와 유비와 손권의 삼국시대가 펼쳐진다)가 사군을 유지한다는 것도 우스운데 그런 사실을 국사책에 실어놓고 “진정한 독립은 이때부터”라고 시험치는 우리도 참 우습다.

 

   자,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자. 달딸국으로 버려진 갓쉰동이는 달딸국의 변방 토호였던 어느 집안에서 거두어 기르는데, 꿈에서 큰 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강가에서 갓쉰동이의 바구니를 발견한 이 토호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이 집에는 딸이 셋이 있었는데 셋째딸이 갓쉰동을 잘 챙겨줘서 갓쉰동은 무럭무럭 잘 자랄 수 있었다. 내가 읽은 옛이야기책에는 셋째딸이 갓쉰동과 비슷한 연배로, 갓쉰동이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 즈음에 “아씨”방에 들어가 마지막 액운을 없애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한편 신채호의 이야기 전개는 더욱 나가서 아예 이 집이 바로 이세민의 집이었으며 한 눈에 호적수를 알아본 이세민은 철저하게 갓쉰동을 감시하고 이 집에서 함께 자란 셋째 딸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는 20세기 초반의 한반도 중부지역 민담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풀다보면 인질이 되었건 액운을 없애려 했건 갓쉰동이 적국으로 “잠입”한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여기서 여러 사정과 문화를 익혔던 것은 사실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이야기를 비약하면 이런 활동의 와중에 이세민과 맞부딛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유력한 맹주로 떠오르던 당고조의 아들 이세민(이방원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을 탐찰하지 않고 달딸국을 보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이런 활동을 벌이다 이세민에게 발각되어 잡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액운이 다 풀린 갓쉰동은 셋째딸과 결혼해 잘살기도 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훌륭한 왕이 되기도 하고 달딸국을 합쳐서 큰 나라를 세우기도 하는 등 설화 속에서 맹활약을 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실제로 연개소문의 당나라에 대한 대비책은 그 전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그가 쌓은 천리 장성은 만주와 요동의 각 거점을 연결하여 매우 효과적으로 방어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이 거점을 기반으로 공격을 시도하여, 당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놓아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것은 그 전시대, 을지문덕이 이루었던 살수대첩과는 형태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사정에 몹시 밝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용맹했던 연개소문이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병일 수도 있고, 과로사일 수도 있지만, 너무 이상하다. 내가 보기에 이 장면은 당나라의 반간계(내부분열 계략)를 당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연개소문 사후에 아들 삼형제가 분열하고 이중 남생이 당나라군을 이끌고 길잡이를 해서 쳐들어오는 일에 가면 이 심증은 확신에 가까워진다. 앞선 X파일에서 주장했듯, 당나라가 원한 것은 고구려라는 강력한 연맹의 해체였으므로 전략 거점에서 군사를 소비하지 않고 막바로 길을 질러 고구려 중심부를 치는 전략이 주효했던 셈이다.
    번번한 정벌을 모두 실패로 마감한 당나라는 이세민이 활에 맞아 죽은 이후 정공법으로 고구려를 해체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내부의 종족들간에 대립과 갈등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고구려 해체이후 거란과 말갈 등의 족속들이 갑자기 부각되는 장면도 나의 이 추리를 더욱 띄운다.
   이들 종족은 고구려시절에도 연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갑자기 고구려땅에서 이들이 나라를 세우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어떻게 본다면 이동에 능했던 기마종족의 문명은 어쩌면 이미 마지막에 와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위기를 “정착”이라는 주제로 넘기려했던 고구려왕족의 전략은 “연맹”보다 “중앙집권적 왕조”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이미 진시왕이후 꾸준히 실현해온 당나라의 중국에 비해 너무 환경이 열악한 상태에서 추진된 중앙집권의 노력은 연맹종족의 반발을 불러왔고 그 조짐은 이미 오래전에 가시화되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잇단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다시 한 번 결집하던 종족연맹은 결국 연개소문 대에 와서 찬란한 마지막 촛불을 펄럭이다가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당신은 왜 을지문덕이 살수대첩 이후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는가? 그렇게 대단한 장수였고 업적이었다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에 모자람이 없을텐데 말이다.
   야사에는 을지문덕을 선비족의 장군으로 말한다. 종족연맹의 처지에서 그가 임무를 수행한 후 고구려 왕조사에서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유추하면 고구려의 해체라는 역사적 사실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고구려의 운명은 곧, 세계사적으로도 농경민족적 패러다임이 “선진적”이 되는 대전환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만에 하나 연개소문이 죽은 것이 아니고 아들들의 쿠데타로 물러난 상태였다면? (방원과 방간에게 밀려난 이성계처럼)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연개소문은 망명을 택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연대기적으로도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도 큰 일이 일어나는데 백제계 천지왕을 폐하고 고구려계 천무왕이 등극한다. “大海人”이라고 일본서기가 써놓은 “천무천황”은 어디서 건너온 망명세력인지 불분명하지만 백제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신라계라고 한다, 허나 법흥왕 이전까지 신라를 고구려의 속국으로 여겼다, 그러니 고구려계가 아닐까?)
   연개소문이 지은 병서를 그의 호를 따서“金海兵書”라고 불렀는데 고려때까지도 쓰인 병법서였다. 김해와 대해는 정말 종이 한장 차이다. 이두로 따져도 김해, 금해, 큰해(큰바다)다. 연개소문(갓쉰)의 별명은 “蓋金”이기도 하다. 개금蓋金과 김해金海와 대해大海와 천무, 나의 상상력을 마구 긁는다.
정말 연개소문은 어디로 간 것일까?

 

 

 

라불, 사로, 계림, 금성, 동경?
    역사가 옛날로 갈수록 지리(地理)의 문제는 첨예한 논쟁거리다. 대부분의 역사논쟁에서 현재 우리가 역사(歷史)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그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땅에 살던 자신들의 종족적 옛조상이나 다른 종족의 것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정립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지역이 아니고 문화라면 시들시들할 것도 지역문제만 나오면 날카롭다.
   해묵은 독도논쟁이나 뜨거운 감자인 일본의 한반도 경영설(임나일본부설), 백두산 정계비 등등은 물론이고 한사군의 위치, 대진국(발해)의 위치 등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있는 것들이 많다. 이 문제는 또한 일단 설정한 내용을 고고학이나 문헌으로 증빙하는 실증사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신라의 수도로 알고있는 경상도 경주는 그곳에서 많은 신라고분과 절터, 돌조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추정이 가능하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과 고고학적 논증을 합쳐 그곳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고 금성이고 동경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백제의 경우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백제가 해상국가였고 중국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삼국 중에 가장 능했으므로 중국 고분과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중국 것이라고 알고있는 것 중의 많은 것들이 백제의 것이다. 하다 못해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의 도읍은 거의 엉터리이며, 김부식의 의도적인 왜곡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국 책만을 가지고 백제의 위치를 추정한다면 아마 알고계시는 것과 엄청 달라서 매우 기쁘시거나 속상하실텐테, 이것은 다음번에 풀어보겠다. 어쨌거나 지역의 문제가 실증 만의 문제인가 하는 문제는 한 가지만 알고 두 번째는 모를 때 그런 것이다.

 

   이제부터 두번째는 무엇이고 그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신라의 서라벌이나 고구려의 국내성이나 백제의 한성 등 기마종족의 도읍은 주로 “벌”이다. 불, 부여, 부리, 벌, 펴라(평양) 등 신성한 벌의 의미이며 이것은 나라, 누리 등의 강역과 일정한 차이를 가진다. 누리가 강역이라면 불이나 벌은 그 중에서 도읍에 해당한다. 그런 면에서 “신라”를 서라불, 새라불로 읽으면 그것은 “벌”이고 새라, 사로, 새나라로 읽으면 “누리”를 의미한다.
   어쨌거나 기마민족의 도읍형태는 정착민족인 중국의 그것과 달라서 상당히 유동적이다. 일찍 농경종족으로 정착한 중원의 민족과는 달리 기마종족의 도읍은 “계속 이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도읍을 옮기는 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다. 계속 밝은 들판을 찾아 “아사달”을 옮기는 특성을 고구려의 흩어진 고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스키타이 종족의 대부분이 이런 이동식 도읍을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이것이 마치 몽고족의 천막촌과 비슷한 형태를 가졌을 것이지만 나라와 도읍이 생기는 옛조선 이후로는 어느 정도 규모와 기능 면에서 천막촌을 넘어섰다. 이른바 “성곽”이 보이는 시점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성곽은 정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머무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건국후 일정기간을 넘기고 고대국가로의 기틀을 잡는 시점인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오면 이런 이동식 수도를 정착식으로 바꾸려고 군왕들이 상당히 노력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때부터 이동식 도읍이 아닌, “정착성 천도”가 나타나는데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신라는 진흥왕 이후다. 가장 늦은 나라는 물론 고구려였다.

 

    백제는 초기부터 중국땅에 원거리 식민지를 두고있어 도읍이 그저 이동거점에 불과했으므로 비교하기가 어렵다. 물론 신라는 기록에 보기를 도읍을 옮긴 사실이 드물다. 그러나 신라가 원래 6부족이 통합한 형태로 출발한 것과 “새땅(새라불,서라벌)”이라는 도읍명칭을 기억한다면 이런 추정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신라가 어디서부터 옮겨왔는지는 전혀 기록이 없다. 그들이 처음부터 지금의 경상도에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필자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시라. 신라를 계림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계”자는 꼬꼬닭을 의미한다. 이를 음으로 그대로 옮긴 말로는 “길림”이 있고 뜻을 우리말로 풀어놓은 것은 대구의 옛명칭인 “달구벌(닭벌)”이 있다.

 

    이처럼 한 지방의 명칭이란 전이에 전이를 거듭하는 법이어서 지금의 명칭이 그때 그대로라고 믿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경상북도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落陽”이었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국토의 절반 이상이 신라다. 하다못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옛이름이 신라(사로-서라벌-셔블)가 아닌가!
   아직까지 나는 기억한다. 대구에서 태어나 16년을 살았던 나는 경주에 갈 기회가 많았다. 다보탑, 첨성대, 안압지, 포석정이니 하는 것들을 찾아가보면 어린 아이 장난감 수준이어서 “실망”만을 안고 돌아온다. 이게 천년고도라고? 그렇다니 믿어야지 하면서, 아, 우리는 겨우 이거란 말인가...
    석굴암도 나를 감동시키지는 못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하면 뭣 하나, 이 산골에 암자하나 덩그렇게 있는, 그래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자랑하라고? 그래서 그 후로 경주에는 안갔다. 서울 와서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간다길래, 화딱지가 나서 사흘내내 문 닫고 소주만 마셨다. 물론 내 불량기가 경주 탓은 아니다.
    이런 실망은 아무리 에밀레종의 신비와 그윽한 신라불상의 미소가 세계적인 거라고 해도 달래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황룡사 9층탑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단층건물만 즐비하던 경주에 황룡사 9층탑은 거의 20층 빌딩의 높이고 경주시 어디서나 보이는 첨탑이었고 황룡사 절터는 불국사의 20배에 해당하는 크기로 지금도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큰 첨탑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전망할 수 있는)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왕의 위엄을 진짜로 상징하던 대궐은 어디있었나?

    없다!!! 없다! 궐터가 없다.
천년왕국의 수도에 궁궐도 궁궐터도 없고 무덤과 절만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사실인가? 사실이다. 이거야말로 불가사의 중에 불가사의다. 500년 조선왕조만해도 4대문 안에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 경희궁(이중 창경궁과 경희궁은 일제가 완전히 없앴고 경복궁과 창덕궁은 뼈대만, 덕수궁은 흔적만 남았다. 차라리 운현궁(?)은 온전히 있다.)5개가 있다.
   그런데 천년동안 왕조를 유지한 신라의 도읍에, 한 번도 옮긴 적이 없는 서라벌에 궐터가 없다! 왕들이 죄다 중이었다? 왕들은 절에 살았다? 왕들은 다 구름 위에 살았다? 일년내내 여행만 다녀서 필요없었다? 황제가 지방을 순시하고 세우는 것이 순수비다. 이 순수비를 세웠다는 것은 스스로 황제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황제의 나라 신라에 궁궐이 없고 천년이 지난 지금 궐터가 사라지고 없다?

 

    독자여러분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실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안다. 어느 고대, 중세국가건 일단 도읍을 정하면 맨 먼저 하는 일은 궁궐 짓는 일이다. 궁궐을 짓기 위해 터를 정하고 성곽을 그린다. 도읍의 문을 달고 주문(主門)과 궁궐의 대문을 잇는 큰 길을 낸다. 이 길에 돌을 박아 진흙탕이 되는 것을 막는다. 궐을 다 지으면 길을 세우고 집들을 들인다. 외곽의 성에 망루를 세우고 돌담을 쌓아 요새를 만든다. 이 표준은 중원과 만주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안틀리다. 어느 나라도 자기나라 서울에 절과 무덤과 탑과 제단을 쌓으면서 궁궐을 안만드는 기이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풍파에 시달려 땅으로 가라앉는다 해도 천년이다. 천년도읍의 궁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평양이고 개성이고 하다 못해 예성강 하구언덕에도 궁궐터는 남아있다. 그런데 천년신라의 도읍에 궐터가 없다니, 이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누가 좀 찾아주시라. 못찾겠으면 확실한 이유라도 일러주시라!
그러나 독자 여러분, 삼국사기를 아무리 읽어도 신라의 서라벌이 지금의 경상도 경주라는 이야기는 없다. 정말? 정말! 그래서 나는 짐짓, 경주가 정말 서라벌인가? 하는 해괴하고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도 상상력이라면 상상력이다. 이거, 무덤터 아냐? 이거 지방 토호의 소왕국 터 아냐? 진짜 신라의 서라벌은 다른 곳에 있는거 아냐? 물론 단정은 못하지만 이런 상상을 쭉 하던 중 이런 상상을 기상학적으로 증빙하는 어느 기인 학자를 만나 상상력이 확신으로 변했다. (이 학자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이렇게 엄연한 문제를 우리는 잊어버린다. 이거야말로 정말 문제다. 왜 없나! 대답해라. 아무도 문제를 안삼는다. 궁궐터를 누군가 묻어버리고 산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불타 없어졌더라도 있어야할 것 아닌가?

 

   이 문제를 신라와 이웃했다는 백제로 옮기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거기는 궐터는 커녕이고 지방토호의 대가집 흔적도 없다. 낙화암? 고란사? 당신은 지금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있는가?
   삼천궁녀와 소정방이 낚은 백마강의 용을 당신은 정말 믿는건가? 백제,Hundred government 해상제국 백제의 자존심을 이렇게 뭉게도 되는건가?
나는 못믿겠다.
   사실 고대사 X파일이라는 구상을 하게된 것도 바로 이 수 없는 불가사의에 쌓인 적막한 세월의 말없는 아우성을 누군가 들으려고 해야하지 않겠냐는 등골 오싹한 바람소리 때문이었다. 뉴욕(New York)사람들이 만약 옛날부터 요크(York)는 아메리카에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것도 웃기는 거 아냐?
이 문제도 비슷한 듯한데? 정말 웃긴다. 이거 정말 어떻게 된건가?
우리가 꿈꾸는 거 아냐?

 

 

 


Hundred Government, 백제百濟의 꿈
    전편의 흥분이 다음 편에 이어지기는 쉽지가 않은데, 생각이 백제를 취급하는 우리의 정서에 이르면 그 오해와 왜곡의 참담함이 심해서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전편에 이어 백제 이야기를 해보자.
   백제를 이토록 얼토당토 않은 흑막에 꼬이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한사군”이다. 이 문제만 풀면 고대사에서 백제의 지리적 문제는 거의 풀 수가 있는데, 생각을 뒤집지 않는한 문헌과 고고학적 사실을 아무리 밝혀도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여기에는 김부식과 식민사학계와 그 후계자인 이병도계가 아주 큰 공헌을 했으므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알고있는 사실이 “틀렸다” 또는 “틀렸을 수 있다”를 전제해야만 “상상”이 가능하다.

 

   우선 한사군이다. 한사군의 위치는 사실, 문헌으로 이미 밝혀놓았다. 누가? 중국사학자들이. 어떻게? 그들로서는 한국이나 일본이 “한사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그런데 문헌으로 증빙하기 힘들고 무리수가 많은 “낙랑군-대동강유역”을 들이밀었다가는 한사군 자체가 공격당할 수 있으므로 어딘지는 알지만 나서서 언급은 안한다는 입장이다.
   한사군중 가장 문제가 되는 낙랑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낙랑군에 대요수(大遼水)가 흐른다는 “요사지리지”의 기록에 비해 우리는 일본사학계가 정설화한 지금의 대동강 유역을 죽어라 외워야한다.
   고구려 유역에 살았던 거란족에 비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고대사 지리를 확실히 모르는 상태였다. 거기다 우리는 이 한나라가 쳐들어온 이 싸움에서 고조선 왕까지 죽었다고 배우며 연도까지 외웠다. BC 108! 고조선 멸망. 고구려의 한사군 회복 AD313, 콘스탄티누스 기독교 공인!

 

   그런데 중국측 기록을 살펴보면 죽었다는 것은 조선왕 뿐 만이 아니다. 조선을 멸망시켰다는 이 싸움에서 한무제는 사령관 세 사람을 참수해버린다! 싸움에 이긴 장수가 세력이 커지자 제거한다든가 하는 일은 있어도, 싸움에 이겨서 적국의 왕을 죽이고 제후국을 네 개나 설치한 장군들을 죽여?
    사실을 말하자면 한나라는 싸움에서 졌고, 얻은게 없었다. 그래서 장군들을 처형해서라도 민심을 수습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요동과 황하 동북쪽에 있었다는 조선족 네 나라를 자기네 제 후국(태수)으로 봉한다. 조공도 안바치는 나라들을 제후로 봉했다고 선전을 하려니, 거꾸로 전쟁에 이겼다고 써야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차라리 조선을 쳐서 한사군으로 봉했다는 사기열전은 귀엽기나 하다. 그러나 엄연히 각종 고대지리지에 나오는 한사군의 영역을 한반도 안으로 끌어와서 고구려의 코아래 낙랑이 있었다고 믿게 만드는 일본 제국주의족의 능력을 우리는 정말 칭찬해야할 것이다.

 

   고구려가 함락시킨 낙랑은 낙랑현이 아니라 낙랑국이다. 이 당시 “낙랑”이라는 나라 이름은 매우 흔하며 (낭낭, 낙선, 낙랑), 고조선 시대부터 축제(제사)기능을 수행하던 부족의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하다못해 낙랑은 이두문자로 “나라”의 음사다. (내가 만약 조선족 제국주의자라면 낙랑군이 지금의 일본열도 “나라”현이라고 우길텐데, 아깝다...)
    조금 길어졌지만 이 문제는 상당히 “크리티컬”한 사안이므로 짚고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가 멸망시킨 고조선은 도대체 어느 나라인가? 한나라 이전의 진시왕때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졌다. 해모수의 반란으로 고조선의 단군은 임금자리를 버리고 떠나버린다. (한단고기-단군세기)

 

    이미 옛조선의 법통을 이어받은 북부여가 들어섰는데, 왠 조선침략? 문제는 이렇다.
    조선은 나라를 세개로 분리하여 다스리는데 이것이 바로 삼한, 삼조선이다. 흔히 진한, 마한, 번한(변한)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삼기능 체계라고 신채호선생이 밝혔다. 고려의 최영장군이 왜구와의 전쟁에서 이긴 이성계에게 “삼한을 다시 일으켜 세울 그대”라고 칭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나오는 삼한이 옛조선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한강 이남의 삼한은 옛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일 뿐, 최영이 말한 삼한이 아니다. 바로 그 삼조선 체계가 무너지고 그중 맏이격인 진조선의 단군이 임금위를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의 법통을 북부여가 이어받는다.
   마한과 번한은? 마한은 진한의 남쪽이었으므로 당연히 지금의 한반도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유민들이 세운 진한과 번한보다 한강이남의 삼한에서는 마한이 가장 큰 나라로 나오는 것이다. 번한은 요서지방에 실재로 존재했는데 이 지역이 바로 은나라때부터 중국유민을 흡수하던 옛조선의 강역인 셈이다.
    삼조선 체계가 무너지고 진한의 뒤를 이어 북부여가 들어섬으로써 실질적으로 옛조선은 없어졌지만, 번조선은 기씨(기자와 다름)조선에서 위만의 위씨조선으로 명맥을 이어나가다가 한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한무제의 침략에 맞서 1년간이나 버텼다는 사실은 국사책에도 있다. (거란족들은 이 번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요사를 보면 단군조선 40대 운운하며 위씨조선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입장이다)
   이 위씨조선 땅에 설치한 것이 한사군인데 그 위치는 지금의 요동과 요서지역이다. 지도를 보면 지금의 압록강 위로 다시 한번 이마가 튀어나오고 그 위로 강이 많은 지역, 바로 그곳이다.
    어쨌거나 한사군이 실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것은 조선의 법통을 계속 이어가는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조선 변방의 사건일 뿐이었고 이것조차 실제로 한나라의 영향력은 미치지 못했던 문헌상의 군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낙랑유물은 무엇인가?
   구자일씨(역사연구회 시삽. 신경정신과 의사)가 조사한 것을 기초로 설명해보자. 『한사군 영역의 대부분인 낙랑과 대방지역을 백제가 차지했다. 이 땅을 놓고 초기 백제와 고구려가 싸움을 벌인다. 그러다보니 중국측 기록에 고구려왕과 백제왕을 낙랑태수, 낙랑왕, 대방왕으로 봉하는 장면이 숱하게 나온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가 대동강 유역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그것도 아니다. 백제땅 낙랑과 대방은 요서에 있다. 요동을 고구려가 차지하는 백제 중기에 와서야 백제는 대동강 이남으로 밀리는 데 요서 경영은 국사책에도 있다. 그런데 한반도 한 가운데인 대동강이 한사군 낙랑이라는 것은 문헌을 따져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의 대동강 영역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백제초기와 중기”의 것이다.

 

    도대체 전라도 땅에는 아무리 살펴봐야 없는 백제왕들의 무덤이 바로 우리가 “낙랑군”의 것으로 알고있는 그것들이다. 무덤이 중국식인 것은 당연하다. 백제는 영토가 중국(요서, 산동, 강남)과 한반도, 일본열도에 모두 있었다.
   양식이 그 당시 중국 영토 안에 있던 것과 틀리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오히려 이 점에서는 국사학계가 낙랑이라고 우기는 대동강 유역과 요서의 낙랑, 대방유역, 중국 산동지방과 일본의 동시대 유물을 비교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백제가 중국에서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선봉장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해상제국의 양식이 가장 화려하고 중국적이라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은 항상 신라 것을 촌스럽게 여기며 한 수 가르쳐주려고 노력했는데, 고대 설화에 나오는 백제 석공 아사달과 그 연인 아사녀의 이야기도 한 예이다.

 

   한 마디로, 대동강유역에서 나오는 유물양식이 고구려적이지 않고 중국적이라고 해서 “낙랑군”의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사대주의적이다. 그것은 백제의 것이기에 중국풍일 뿐이다. 무령왕릉이 서역(인도)식이라고 충청도가 인도의 군현이었다고 주장할 셈인가?
    그렇다면 백제의 위례성, 한성은 어디인가? 이 지역은 산동, 요서, 요동, 한반도를 죽 이어보면 금방 떠올릴 수 있다. 가장 중심적인 지역이 바로 요수(요동과 요서를 가르는)지역인데, 문헌상으로도 여기는 백제의 출발지다.
   최초의 위례성은 바로 여기였다. 하지만 비류와 온조의 백제가 온조 백제로 통합되면서 도읍을 지금의 압록강부근으로 정한다.(초기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
그러다가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금 더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는데 이곳이 평안도와 황해도로 추정되는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이다. 문헌적, 지리적 증거가 그대로 있지만 지면관계로 이 내용을 모조리 적어놓지는 못한다.

 

   다만 예성강의 상류를 “위라천”으로 부르고 거기에 “부여면”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있다. “위례성강”의 줄어든 말이 “예성강”인 셈이다. 여기에는 기록에 묘사된 각종 터(문,집터,비석)과 강줄기의 모습이 매우 흡사하다. 여기가 중기의 한성일 가능성이 높다.
    한수라고 부르던 강도 엄연히 당시 기록에서 한수와 한강이 모두 나오므로 한강이 지금의 한강이라면 한수는 구분해서 써야했는데 못난 후손은 이것도 못 구별했다.
   “한”이라는 말뜻은 크다는 뜻도 있지만 “하나된”다는 뜻도 있다. 큰 강인 한강과 구별하려고 뜻으로 옮긴다면 “대동(大同)”처럼 적당한 단어가 어디있는가? 산동, 요동과 요서를 경영하던 중기백제 시절에 정착한 도읍이 지금의 평양인 백제의 한성이다. 물론 이 한성은 장수왕 이후로 고구려의 땅이 되어버리고 백제의 흔적은 없다.
    이곳이 고구려 영역이 되어버리자 백제의 유적은 더욱 보전하기 힘들게 되었다. 몇 번에 걸친 수복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면서 본국 백제와 요서 백제를 육로로 잇는 고리는 완전히 끊어졌다.

 

    하지만 한수지역에 백제가 도읍했던 것은 사실이므로 백제의 주요 근거지는 충청도 전라도가 아니라 평안도와 황해도라는 이야기다. 그래야 요서를 경영했다는 기록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 훗날 후기 백제에 와서 이 지역마저 신라에게 내주고 완전히 주저앉았다는 설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부분도 백제가 동북보다는 중국대륙의 양자강 유역과 일본에 더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백제의 몰락을 확증하는 증거는 아니다.
   어쨌거나 이 때부터 백제는 왜국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초기 백제는 베일 정도가 아니라 암흑에 가려있다. 왕이 몇명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김부식이 백제를 완전히 떨거지 취급한 탓도 있지만, 백제는 우습게도 너무 커서 왕도 많았다.
    아마 근초고왕부터는 일본도 경영한 모양인데 이렇게 되니까 한반도, 요서, 산동, 중국남동부, 일본을 잇는 거대한 해상제국의 모습이다. 다른 학설로, 이미 학자들 사이에 "합의"하고 있는데, 백제가 단일왕조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땅의 왕과 일본땅의 왕, 본국의 왕이 중복되면서 문헌적으로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송나라에 왕을 인정(아그레망, 封)해달라고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12왕이 나온다.
   낙랑왕, 왜왕 등등등... 이렇다보니 “구심력”이 약해진다. 위로는 고구려 옆으로는 중국의 제국들, 아래로는 신라와 싸워야하는 해상제국 백제의 고민이라... 그러나 후대 장보고에서 보듯 그들은 이미 베트남과 말레이반도까지를 자기들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른바 "담로"라는 백제의 강역은 아직도 다무리, 대수(큰물,大水)라는 지명의 흔적으로 중국 해안을 따라 말레이반도까지 살아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백제의 해상근거지인 도읍을 왜소하게 묶어묶어 “낙화암”과 “삼천궁녀”같은 헛소리나 믿고있다.
   비단장수를 왕서방이라고 하는데, 이 왕씨는 어디서 왔을까?

 

   보통 한국의 왕씨들은 조선초에 멸족되었던 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 전全씨니 옥玉씨니 하는 성들이 고려태조 왕건의 성씨를 잇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왕씨는 여餘씨, 해解씨와 더불어 초기 백제귀족의 성씨였다. 구자일씨가 쓴 책에 보면, 동성왕 때의 남제서라는 기록에 “용양장군 낙랑태수 모유, 건무장군 성양태수 왕무, 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 등의 관직명이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비단장수 왕서방의 전신은 배(船)타고 말(馬)장사하던 백제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이 왕서방같이 우리에게 친근하면서도 어쩐지 우리 민족과는 다른 중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열려있는 나라가 백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에 빠진다. 백제는 무엇인가? 고구려의 시조와 같은 핏줄에서 튀어나온, 먼 옛날 단군조선이 설 때 중국땅으로 대거 옮겨간 배달범족(호랑이족)같은 존재들인가? 아닌게 아니라 백제가 양자강 유역을 다스릴 때, 중국 문헌에는 백제를 가리켜 래이(萊夷)라고 부른다.
   이들의 흩어짐도 그와 같았으니 백제가 해체되자 중국에 있던 백제땅은 그 이름조차 잃어버린다. 우리의 고민은 그래서 이유있다. 지금의 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백제땅이랍시고 그 땅 출신인 대통령후보들을 “백제후보”라고 부르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착각하지 마시라! 해체된 백제의 그 거대한 흔적을 보고있노라면 지중해의 “로마”를 떠올릴 수는 있어도 특정지역을 차별하는 꼴사나운 오늘날의 우리가 아무데나 쓰는 비유로는 적당치가 않다.
   땅만으로 백제를 떠올린다면 동아시아 해변은 죄다 백제다! 백제 문화를 하나도 잇지 못하고 백제 왕의 무덤조차 중국 군현의 것으로 가르치는 우리에게 백제의 꿈이란, “Hundred Government 백제”란 짊어지기 힘든 짐이리라...

 

 

 


(日本,니뿌리,닛뽕,니혼)은 또 무언가?
   현대사를 함께 지내면서 가장 껄끄러운 이웃은 여전히 일본이다. 여러 가지 증거가 과거 우리와 같은 종족이었던 이 나라는 이제 언어와 풍속이 틀린 분명히 다른 나라이고, 과거야 어쨌든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경쟁력”을 자랑한다.
   동아시아는 물론 범 아시아 몽골리안의 대표주자로 선진국 정상회담에 등장하는 유일한 나라이며 그나마 일본이 있었기에 아시아에도 사람이 사는 것으로 서양사람들이 알고있었다. 대국으로는 중국을 쳐주지만 역시 현재 동양을 대표하는 것은 일본문화이다. 일본은 현 시대의 중국인 셈이다.
   그러고보면 고대에는 조선족이, 그 후로는 중국이, 근대로 와서는 일본이 중국의 역할을 맡고있다는 내 추측이 가당찮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은 약간씩 다른 모양이다. 지진과 화산폭발로 바다에 가라앉아버렸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적개심에서부터, 그들의 편협한 문화적 특성을 꼬집어 경제대국은 가능하지만 문화중국은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있는가하면 그들이 이룩한 현재의 모든 면을 본받아야 할 진정한 선진국이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필자의 견해로는 단순하거나 복잡하거나간에 우리가 일본을 보는데는 상당히 감정적인 격앙의 모습이 숨어있다. 이것은 식민지 지배라는 씻기 힘든 상처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식민지 지배가 항상 덜떨어진 왜놈에게 당한 참기 힘든 치욕이라는 생각이 더 큰 이유다.
   쪽발이 왜놈들이 어쩌다 운을 타서 서세를 등에 업고 스승의 나라를 짓밟았다... 대충 이런 생각의 뼈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왜놈들이 광개토왕 비문까지 조작하며 고대 삼국시절에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하고 일본서기의 연대를 조작해 만세일계 천황가를 뽐내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다.
   제깟놈들을 우리가 언제 사람으로나 생각했는줄 아는가. 그렇게 가르치고 가르쳐도 야만족 근성은 못 고친다더니... 만약 독자들중 위에 쓴 것처럼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필자의 견해를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란다.

 

    이것은 현재와 과거를 어우르는 “오해”를 벗겨내기 위해 필자가 상당히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다. 이것도 역시 미래를 위한 것으로, 우리가 잘나기 위해 한 고민이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본을 가르쳤다는 주장은, 내가 생각하기에 근거가 없다. 담징과 왕인과 조선조의 통신사를 말하지만, 그 정도로 가르쳤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가? 그 정도는 문화교류로 볼 수 없는가? 서역에서 불교문물을 가지고 와서 중국불교를 이루었다고해서 중국이 인도에게 배웠다고 하는가? 만약 그것이 가르치는 것이라면 우리도 죄다 중국에서 배웠고 중국은 우리의 스승이다.
   맞다. 우리가 일본을 가르쳤다는 이유없는 우월감은 우리가 중국에게서 배웠다는 근거없는 열등감의 다른 쪽 면이다. 우월감은 열등감과 동전의 양면이라고 했던가... 문화가 대륙에서 와서 섬으로 갔다는 것도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나 법칙은 아니다.

 

    지중해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은 반도나 대륙이 아니라 섬에서 시작했다. 그렇다고 섬에서 모든 문명이 시작했다는 반대생각도 신빙성이 없다. 그래서 이런 근거없는 우월감에 지탱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우선, 도대체 현재의 일본을 구성하는 민족구성원의 연원은 어디일까? 학계의 주장대로라면 남방종족과 중국, 기마민족, 원주민을 다양하게 어우르는 구성원이어야하지만 문화적 특성으로 보아 그들은 우리와 연원이 같다.
    7세기 이전으로 가면 우리와 말도 비슷한 흔적이 문헌상에 나타난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고 우리말로 읽어야만 뜻이 풀이되는 이두가 매우 많다. 지금의 일본말은 7∼8세기를 전환점으로 급속히 고유한 일본말로 전환되었다.

 

    이미 옛조선 시절부터 일본으로 이주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봐서 일본에 정착하기 시작한 많은 수의 사람은 대륙이나 북방 기마민족 출신일 것이다. 다만 최초의 왕은 가야계가 분명하다. 김수로왕과 흡사한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자세한 문헌고증은 여기서 생략한다. 그 후로 줄곧 일본땅은 “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번국이었다.
    특히 초기 왜가 신라의 왕자를 인질로 끌고갈 정도(박제상 이야기)로 힘이 세다는 것은 신라보다 더 빠르게 고대국가를 형성했던 가야나 백제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는 힘들다.
   그 후로 광개토왕에 이르기까지 왜는 주로 백제계의 영향을 받는다. 이 부분이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단순히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있지만 어느 정도였을 까? 결론부터 말하면 왜는 곧 백제였다. 백제가 요동과 요서의 낙랑, 대방을 경영하던 초기에 고구려 는 아직도 백제만큼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백제는 마찬가지로 산동과 일본을 경영하면서 때로는 중국 양자강 깊숙히 옛 오나라와 월나라를 경영하기도 했는데, 북위서나 남제서에 이런 증거들이 숱하게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왜? 백제는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상에서 백제만큼 흔적없이 사라진 고대 국가가 있었는가? 가야는 신라가 흡수했고 고구려는 발해가 이어가지만 백제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 많던 영토와 강역을 두고 그렇게 사라져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일본을 잘 해석하면 그 물음에 답을 얻을 수 있다. 광개토왕 비석에 왜가 한반도 남부로 쳐들어와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에 글자가 한자 빠져있는데 이것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서로 유리하게 해석하려고 수십년간 논쟁을 거듭해왔다.
   논쟁과는 별도로 일본은 이것을 공식역사로 가르친다. 그러면 어느 것이 맞는가. 내 생각은 왜가 쳐들어와서 백제와 신라를 정복했다는 구절이 맞다! 정말? 너 죽을래?  박창규, 너 민족이니 종족이니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결국은 친일파 죽일놈이구나!!! 옳아,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대동아가 어떠니 기마민족이 어떠니 하더니 다 속셈이 있었구나. 회사일로 일본사람도 만난다더니 이 자식이 어느새 완전히 친일, 숭일론자로 바뀌어가지고선...

 

    하지만 흥분할 필요는 없다. 전제하지 않았던가? 왜가 곧 백제였다고... 어찌된 일인지 살펴보자. 백제는 일본을 개척해 분봉왕을 두었는데 이를 “왜”라고 불렀다. 왜왕은 주로 왕자나 왕의 사촌, 왕의 동생 등등을 보냈는데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일본여왕이 의자왕의 누이였다는 사실은 대충 알고계실 것이다.
   다시 구자일씨를 인용하면, 광개토왕 비문이 설명하는 이 당시는 백제왕이 일본왕의 이복동생이었다. 고구려의 침입으로 다급해진 이복동생이 구원을 요청하자 군대를 보내주었고, 군대를 보낸 김에 이복동생(진사왕)을 없애버리고 아들(아신왕)을 백제왕 자리에 앉혔다.
   도매금으로 신라까지 뭉개버린 것이다. 이러자 광개토왕께서 열을 받으셨다. 그래서 밀고 내려간다. 원상복구! 여기서 보이는 관계는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때 왜국 왕이 응신천황이었는데, 이 사람은 기실 백제의 침류왕이었다. 침류(枕流)라는 왕의 이름이 나타내듯 떠돌아다니던 이 사람을 삼국사기는 즉위한지 일년만에 죽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추정해보건데 침류왕은 할아버지가 근초고왕이고 아버지가 근구수왕으로 일본 신공황후의 아들과 같은 인물이다. 이 사람이 아버지 근수구왕이 죽자 백제왕으로 즉위했으나 1년만에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왜국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이복동생인 진사왕이 침류의 아들인 아신왕에게서 왕위를 빼앗는데, 이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자기 조상이랍시고 상세히 기록한 일본서기에 비해 삼국사기는 대충대충 써놓은 것이다. 구자일씨의 이 설명은 어느 해석보다 합리적이로 논리적이고 “문헌중심”적이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백제본기, 당시 중국 기록을 차근차근 살피면 장난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무령왕은 일본말로 사마(斯摩), 음으로 시마, 즉 “섬”인데, 일본으로 가던 중에 섬에서 낳았다.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 일본에서 한살 때 태자가 된다.(숙부가 그렇게 한다) 그 때 고국에서는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이 차례로 집권하는데 동성왕은 중국땅에서 북위와 싸워 수십만대군을 격살한 사람으로 개로왕때 잃었던 고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이 규모는 고구려의 살수대첩에 버금간다. 어쨌거나 동성왕도 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좌평(국방장관)에게 살해되었다. 따라서 적통을 잇기 위해 왜국 무왕이었던 무령왕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왕위를 잇는다.
   물론 왜국에서는 무령왕의 동생이 왕위를 잇는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고 초기 백제시절부터 계속 있어왔다. 왜국이 예비 왕들의 경영수업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백제가 고구려에게 낙랑, 대방과 산동을 잃고 지금의 대동강(한수) 이남으로 밀리고 종국에는 각 지역의 경영지마저 고구려 유민과 중국에게 접수당하며 중국사와 일본사, 발해사로 편입되고 만다.
   왜국역시 백제의 해체를 기점으로 과거의 한반도, 중국, 요동/요서 세력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백제의 고대사를 풀면 드디어 우리 고대사 전체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 우리 고대사가 도륙당하는 원인은 한중일 삼국체제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역사를 이리저리 왜곡하는데, 그중 가장 역사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들은 잘 올라가봐야 조상이 가야고 백제고 신라고 고구려고 부여인데다가 그들 나름의 독자적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도 조선에서 삼국이 해체되고 남북조(발해-신라)가 성립된 시기에나 가능했다.
    그러다보니 일본은 백제의 해체이후 실질적으로 일본을 건국한 셈이었고 다른 고대국가와 균형을 맞추려다보니 일본서기의 연대를 수백년이나 앞당기는 조작을 감행해야만 했다! 이 연대기 조작은 최근 거의 확실하게 판명되었고 백제의 연대기와 비교해 분석해보면 실제로 조작내용을 판별할 수도 있다.
    결국 사라진 백제는 일본이 모두 끌어안은 셈이다. 하다못해 일본건국에는 부여유민과 고구려계 유민들이 대거 참여하며, 유입과 혼합을 거듭하는 문화적 성격은 현재 일본의 특성이기도 하다.

 

    만주에서 발흥한 발해가 과거 고구려의 영역을 재수복하고 신라가 백제의 강역을 거의 접수했지만 백제가 보유했던 해상제국의 특질을 모두 잃어버려, 더 이상 우리 종족이 해상제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없어졌다.
   신라말기에 나타난 장보고는 잠시, 옛 백제의 해상주도권을 회복하려고 하지만 이 미약한 시도마저 보수화하는 신라정권이 압살하고 만다. 우습게도 해양제국의 흔적은 “왜구”라는 극동 바이킹의 모습으로 근근히 이어내려갔다.

 

   최근 일본만화가 많은 논란거리다. 일진회라는 만화 속의 폭력서클을 본받은 폭력배들이 학교폭력의 진원지로 지적받으면서 “소탕”의 대상으로 일본만화뿐만 아니라 도매금으로 우리 만화까지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문화라고 하면 왜설스럽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고 더럽고 뭐 그런 것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만화를 나쁘다고 주장하는 어른들조차 고스톱에 빠져 일본 그림으로 가득한 화투를 열심히 친다. 아예 민속놀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 일본에 대한 근거없는 적개심은 여전하다. 겁이 나니 막는거다. 저열한 것은 겁나지 않으나 진정으로 그들의 수준이 높으니 마지막 남은 우월감마저 무너질까 겁나는 거다.
    우리가 지극히 탐내는 상으로만 봐도 그들은 이미 49년의 노벨물리학상(유가와 히데끼, 중간자)을 필두로 50년대에 베니스영화제의 작품상(구로자와 아키라, 라쇼몽)에 이어 68년에는 노벨 문학상(가와바따 야스나리, 설국)을 받는다.
   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같은 사람은 제국주의를 철저히 반성하는 지극히 양심적인, 훌륭한 사람으로 그들의 지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들의 실체는 야쿠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들의 에미메이션(만화영화)을 보면 기마민족의 신화적 상상력을 진정으로 복원했다는 생각이 든다.
테크놀로지와 신화를 결합시킨 일본의 만화가 세계를 제패하는 동안, 우리도 물론 노력을 많이 했지만, 결국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는 “왜설(倭說)적 포르노”로 단죄받을 뿐이다. 4330년(1997년) 지금, 일본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천년전 일본은 작은 백제였다. 그래서 왜가 한반도를 지배했대도 흥분하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우리와 다른, 왜국을 조상으로 받들어 모시는 일본이 한반도를 그림자처럼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말과 글이 틀릴 뿐 생각과 방법은 그들의 것이 아닌가..., 안 그런가?

 

 

 


불사와 석굴암, 그 차이는?
    펄벅의 ‘대지(大地)’라는 소설로 만든 미국영화가 있다. 미국 사람이 중국인 분장을 하고 중국인 행세를 하는, 내가 보기에는 조금 웃기는 영화였는데(소설은 재미있었다), 당시 이 영화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역시 “메뚜기 씬”이었다.
    거대한 메뚜기떼가 산과 들을 뒤덮자 한 순간에 일년 농사는 완전히 끝나버린다. 사람들이 달려나가 삽으로 두들겨 죽이고 밟고 온몸으로 뒹굴어 눌러도 오히려 메뚜기떼는 사람까지 물어뜯는다. 그 장면은 내가 국민학교 시절, 제사 시간을 기다리며 KBS 명화극장에서 본 이후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광활한 대륙의 땅위로 검은 구름처럼 달려드는 메뚜기떼, 그 고난이 오히려 어떤 광대함의 부러움을 주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메뚜기떼가 우리 나라에도 있었단다. 정말? 그래! 이번에는 위서시비가 있는 한단고기를 인용하거나 이런 저런 정황으로 추정하는 것 말고, 정확한 기록에서 근거를 댈 수 있다. 그것도 정사(正史)라고 공인받는 “삼국사기”에 있다.

 

    신라와 백제에 메뚜기떼가 “창궐”하는 것이다. 한두번도 아니고! 물론 조선시대 기록에 우리가 메뚜기떼로 고생했다는 기록은 없다. 시대가 고대라 별 게 다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나 멀리 2000년 전까지 가봐야 한반도의 지형과 기후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많은 풀이 산과 들에 우거진 한반도에, 삭막한 초원지대에서 풀을 남김없이 뜯어먹으며 떼지어 새로운 먹이를 찾아 몰려다니는 “메뚜기떼”가 날아다녀? 메뚜기야 우리 나라에도 널려있지만 그네들은 절대로 떼지어 날아다니는 종은 아니다. 이건 분명히 다른 종이다. 어쩌다 한 번 중국땅에서 날라온 메뚜기떼일까? 아니다. 그것도 신라땅에 창궐하는 메뚜기떼의 기록은 여러번 나온다.

 

    신라에 오려면 황해를 건너서 와야하는데, 메뚜기떼가 항공모함을 타지 않는한 바다를 떼지어 건넌다는 것은, 이기 무신 소리고? (택도 없는 소리, 먼 거리를 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북으로 해서 요서로 해서 요하를 건너서 요동을 지나서 압록강을 건너고 청천강도 건너고 대동강도 건너고 한강도 건너고 산마루를 수십개 넘어넘어 문경새재까지 날아와야하는데, 이거 어째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삼국사기에 정말 그런 말이 있나? 번역 잘 못한 거 아냐? 그런데, 삼국사기를 뒤적여보면 메뚜기만 문제가 아니다.
화산이 폭발한다!
    그것도 신라 수도 금성 옆에 토함산이 불기둥을 마구 토해내고 요즘 치수로 수백 미터 가량 불기둥이 치솟는다. 김부식이 돌았나? 내가 토함산을 수도 없이 갔지만 거기가 천 년 전에 화산이었다고 하면 아는 사람은 나보고 다 “미친 놈”이라고 웃을거다.
    에라 이, 토함산이 어떻게 화산이냐! 옛날에는 화산이었다고? 야 이놈아, 흔적이라도 있어야할 것이 아니냐! 용암은 커녕 용암 씨나락 까먹은 것 같은 돌멩이(현무암 류) 하나 없는 산에서 천 년 전에 화산이 폭발해서 불기둥이 치솟았다고?

 

    정신차려라...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같은 해에 신라에는 홍수가 나고 백제에는 가뭄이 든다! 백 번 양보해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아무리 기상이변이라고 해도 화계장터를 경계로 한 쪽은 가뭄이 들고 반대쪽은 홍수가 날 수 있는 일인가? 그것도 장마철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기상대에 20년간 근무하던 정용석이라는 사람이 이 기록을 죄다 조사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연대기와 기상기록을 배열해보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김부식의 실수다. 연대기와 기록을 잘못 쓰고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한반도에 있었던 일로 착각한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별자리 기록마저 중국대륙에서 관찰한 것과 같을 수가 있는가.
    다른 하나는 삼국사기는 정확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도대체 고대 삼국은 우리가 알고있는 한반도의 강역과는 영 인연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길래 메뚜기도 가능하고 화산과 지진, 백제홍수와 신라가뭄도 가능하다.

 

    독자들께서 어느 가능성을 선택하건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 나라(고려)가 공식적인 역사서를 작성하는 것은 심심풀이 땅콩이나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의 계보를 정리하고 대외적으로 체통과 위신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그 시절의 지성의 방향과 정치의 상황을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출사표까지 던지며 역사서를 편찬하겠는가.
    그리고 그 시절의 최고실권자였던 김부식은 신라계 귀족이었고 왠만하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을 지우려고 들었던 사람이다.
    하다못해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의 유언이 삼국사기에는 안나온다. 그러니 이 기상기록을 왠만하면 신라땅에서 경험이 가능했던 것으로만 재구성하려고 들었을텐데, 거기엔 분명히 메뚜기떼가 날아다니고 토함산이 불을 뿜는 화산이다.

 

    심심하면 신라의 10월에 눈이 내리고 4월에는 서리가 내린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고 비일비재하다. 필요하시다면 자료로 정리해서 드릴 수도 있다. 우리는 정말 옛날부터 이곳에서 살았을까? 우리가 틀림없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믿는 2000년 전의 기록은 정말 파면 팔수록 해괴하다.
    한반도와 만주가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 귀신들의 땅일까? 이거야말로 경주에는 왜 궐터가 없는지 묻지 않고도 충분히 제기해야할 의문이 아닌가. 비교적 냉정한 사학자들도 이 문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리고 기상학자와 천문학자의 몫으로 돌릴 뿐이다.

 

    나는 그러고싶지는 않지만 능력이 없어서 “기상대 정년퇴직자” 정용석씨의 주장밖에 더는 알 수가 없다. 누군가 해명을 해주면 좋겠지만 주류사학계에서야 이딴 문제로 논쟁을 할리 만무하고 재야사학자들도 “실제”보다는 그 시대의 “정신”을 읽는데 골몰하고 있어서 정용석씨만 도라이 취급을 받을 뿐이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있는 “상식”을 간단히 부수어버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 고대사는 거친 삼베옷처럼 다듬을 부분이 너무 많은 상태라 “교과서”는 하루 아침에 죄다 거짓말이 되어버릴 수 있다.

 

   전편에 밝혔듯이 구자일씨는 지리한 지리공부를 통해 대동강 유역이 고구려가 아닌 백제의 땅임을 밝히고 있다. 그 지역의 유물이 사실은 백제의 것이며 백제의 주요 강역이 지금의 압록강을 중심으로 요동 한 가운데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끔 TV를 보아 알듯이 압록강은 그 당시에 국경역할을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강이다. 물론 상류로 올라가면야 다르지만 식량난으로 시달리는 북한주민들이 맨몸으로 탈출을 시도할 정도로 작은 강줄기다. 우리가 지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고 해서 그 선입견으로 고대사의 강역을 바라본다면 이런 부분을 슬쩍 지나치기 쉽다.

 

    또 기록대로 지도 위에 그리면 그 끝이 한반도 황해도까지 연결되는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만리장성을, 우리는 진시왕이 지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진시왕은 오래전부터 구축해오던 성과 성을 연결하여 길게 뻗은 장성을 구축했을 뿐이며, 그 시절에 다 끝난 것도 아니어서 명나라때까지 작업을 계속한다.
   그 만리장성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이렇게 국력을 소모하며 “종족을 방위하는”(나라가 아니다) 성을 쌓아야할 정도로 북방세력은 강력했다. 우리가 조상이라 믿고있는 옛조선과 부여와 고구려가 모두 그 북방민족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종족들이 좀더 서쪽으로 갈 수는 없었을까?
   남진길이 막히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이 아닌가. 신라는 어떤가? 우리는 죽어라 신라와 경상도를 같은 것으로 각인시키지만 지금의 경상도는 신라가 패망한 후 밀려든 유민들의 지역촌일 수는 없을까?

 


   당나라와 문화를 겨루던 천년 신라가 남긴 것이 경주라는 것을 나는 도저히 인정하기 힘들다. (경주 출신들은 죽이려고 할테지만)
   경주는 신라의 그야말로 따라지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절대로 신라의 서라벌이 경상도 경주라는 글귀가 없다. 서라벌과 금성의 면적과 규모만해도 지금의 경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김대성이 짓기 시작해 그가 죽은 후에 완성되었다는 석불사는 과연 토함산의 석굴암일까?
   삼국사기에도 석불사를 “불을 뿜는” 토함산 기슭에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석불사의 규모나 기능도 석굴암같은 암자는 아닌 듯하다. 이른바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 만드는 사찰이란 수양을 위해 짓는 암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더구나 석굴암의 불상은 바위를 깎아 세웠다는 석불사와 다르다.
   흙산 속에 굴을 파고 돌을 세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 사니 우리 조상도 옛부터 여기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죄송하지만 틀린 생각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 지구상 많은 지역의 사람들은 원주민이 아니다. 그리고 한반도와 동아시아 고대를 연결시키는 이런 위치지정은 우습게도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니네는 모르지만 우리는 니네 역사를 알아. 여기가 거기야.”이런 식이었다. 물론 학계의 토론과 공인이라는 그럴듯한 절차를 거치기는 한다. 상당부분이 일본이 조선을 경영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로 보좌하기 위한 고대사 연구의 결과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고대사의 강역은 죄다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도대체 사실은 무엇인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진다. 그러나 “정설”과 “가설”에 같은 비중을 두고 접근한다면 의외로 문제를 쉽게 풀 수도 있다. “정설”도 정설이 되기 전에는 가설이었다. 정설에 배치되는 가설이라고 정설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더군다나 과학법칙도 아닌 흐릿하고 아스라한 고대사의 강역문제는 “정설”이 그야말로 “현재의 편견”이고 선입견일 수도 있다.
   합리적? 김유신이 강건너고 바다건너고 고개넘고 산을 넘어서 고구려군대 피해가며 어렵게 어렵게 말도 안되게 당나라 군대에 식량을 지원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느라 고생 안하는게 합리적인 거 아닌가?

 

 


대사 X 파일 - 동아시아 고대사의 남은 이야기
   고대사 X파일을 시작할 때, 그 때 생각을 다시 한 번 돌이키면, 여전히 그건 술안주였다. 그러나 술안주라고 다 흘러가는 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술자리가 파장에 이르면 주빈(주인빈대)은 술값에 달하는 올바른 소리 한마디 쯤은 해야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술을 마시는 역사적 의의를 설명한 다음 술자리를 옮기거나 파하자고 제안한다. 오늘 이야기가 거기에 해당한다.
   고대사 X파일을 연다는 것은 옛적의 신비한 그 무엇을 찾는다는 뜻도 있다. 그러나 X파일이라는 것은 본래 뜻은 과거에는 비밀이 아니었지만 어떤 이유로 현재는 비밀에 싸여있어 왠만한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는 정보가 되어버렸음을 의미하는 만큼, 우리가 왜 이 엄연한 사실일지도 모르는 “사실”에 가까운 추정과 그 정보를 X파일로 취급하게 되었는지, 만약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대개 이런 이야기는 현대사와 더불어 시작하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우리종족의 영역은 영토에 있어서 자꾸만 좁아져왔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과거에 얼마만큼 넓었냐 하는 것에는 다른 생각들이 많지만 어쨌거나 좁아졌다는 것은 다들 인정하신다. 그러나 영토가 아닌 것으로 치면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우리의 영향력이 단군 이후 최고의 시대라고 이야기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 위태하긴 하지만 객관적인 경제력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표일 것이다. 반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리 종족은 18세기 이후 밀어닥친 거대한 서구문명의 그것을 막아내기에 급급하고 자기 것을 보호하기에 급급했을 뿐 결코 그들의 흐름을 이끌거나 주체적을 대응하지 못했다. 혹자는 그것이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결합한 형태여서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문화라는 것은 정치경제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한 집단의 사는 방식이므로 한 집단의 총체적 모습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축소”의 흐름은 최근세기가 아니라 옛부터 시작되었다.
   한웅배달국의 해체와 단군조선의 성립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이런 흐름은 우리만의 것은 아니었고 세계사에 보이는 모든 민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멀고 먼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통합제국도 자기정체성을 찾는데 여간 어려움을 겪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지금의 중화민족은 장개석과 마오쩌뚱(모택동) 이후에, 이민족의 말발굽에 이리저리 채여서 도대체 정체가 없던 것을 재구성한 모습이다. 이 시기에 중국은 대대적으로 과거역사를 재구성하기 시작했고, 북방민족의 정복에 가려있던 “중화”라는 공룡알을 캐냈다.

 

    기왕에 그들이 차지하던 땅에서 나온 유물들이 그들의 “중화”를 증명하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은 우리도 잘 알고있다. 비교적 이런 자랑거리를 자기들 스스로 내세우기가 뭣한 일본민족은 이 당시, 때로는 정복과 파괴, 때로는 왜곡과 창제를 거듭하며 자신들의 역사를 그럴듯한 만세일계 천황조로 창출해냈다.
   그들은 전제적 제국주의 체제로 황국신민을 교육시키고, 식민지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그들의 콤플렉스 중국과 전쟁을 벌이더니 결국 세계의 맹주 미국과도 일전을 불사하는 잘못된 투혼을 발휘했다. 일본역사는 이 시기에 성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우리는 그 시작을 “명치유신”이라는 정변에서 찾는다.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면서 이런 일들을 하고있을 동안 우리는 거의 그들의 좋은 말로는 동맹군, 나쁜 말로 식객이 되거나 더 운이 나쁜 경우에는 총알받이로 목숨을 소진당하며, 조국을 다시 찾는 험난한 여정에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주체들은 저 거대한 발해땅을 누비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바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원자폭탄 때문이라고 알고있는 일본의 항복은, 만주에 주둔해있던 그들의 주력 관동군의 어이없는 괴멸때문이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다음에도 히로히토는 “끝까지 싸울 것”을 거듭 천명했지만, 소련이 쳐내려온다는 위협에 직면한 군 내부의 동요와 조직적인 독립투쟁 세력의 민중봉기로 관동군이 순식간에 와해되어 버리자 끝까지 싸우려던 욕심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천황제의 존속을 타협조건으로 소련을 저지하기에 바빠진 미국에게 백기를 건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처한 동아시아의 상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한 사람의 인생을 가늠하기 힘들었던 그런 상황을 태평성대에 사는 우리가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몇몇 선각은 민족역사를 다시 찾는 각고의 노력을 거듭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름, 신채호나 박은식 선생이 그런 분이다. 이들은 변화무쌍한 세계사의 흐름을 주체적으로 맞이하여, 맘으로는 성리학자였던 그들의 신념체계까지 진보시키는가 하면 몸으로는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었다.
   그들은 진정 우리의 자랑이다. 그들이 쓴 책 하나 장정판으로 없는 오늘도, 전쟁과 망명의 그 좁은 협곡에서 민족사의 대계를 다시 정리하던 그들의 모습만 생각하면... 독자 여러분,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 마구 울고있다. 소리는 못내고 줄줄 흐르는 눈물이 앞에 가려 글을 쓰기가 힘들다.

 

   그러고도 우리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조국을 되찾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거대 강국의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다시 한번 희생되어야 했다. 나라는 갈라지고 찢어져, 식민지 이전보다 더 초라한 모습으로 풀죽은 조상신명의 유혼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저 만주벌과 남양에 이름없는 뻣가루로 남아있을 사람들 앞에 우리는 도대체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세계화와 선진국을 부르짖는 오늘날도 우리는 여전히 한치의 앞날도 바라볼 수 없는 암흑 속을 헤메며 한 세기 전의 살벌한 개항전야를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지난 한 세기동안 “전통”이라는 주제를 떠올릴 겨를이 없을 정도로 어지럽고 험난한 길을 걸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환경이 많은 것을 갉아먹어도 잃어버린 것을 찾고자하는 강렬한 생명력이 있다면 고사직전에 간 나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나는 지금 우리 민족문화의 실태를 그렇게 본다. 죽기 직전의 거대한 고목이다. 속상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야흐로 지금의 세상은 엄청난 통합의 물결로 출렁거리고 있다. 우리가 기왕에 우리의 전통을 방법론으로 세워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바에야 남의 것이라도 확실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고대사를 읽으며 밤을 지세운 나는 현재를 읽는 거울이라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지루한 중세를 지나 변화의 시대였던 고대사에서 우리에게 거울이 될 모습(패러다임)을 찾았다.

 

    우리는 한 때, 주신(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종족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적이 있다. 현재 중국과 극동문명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그 문명의 실체를 나는 우리 종족의 것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지금은 많은 나라로 갈려있지만 고대 어느 시절에 우리는 하나의 종족으로, 경쟁과 협조를 통해 문명을 일구었으며 그것으로 “동아시아”라는 문화의 특성을 설명할 전형까지 찾아낼 수 있다.
    그 증거들은 널려있지만 정작 주인인 우리는 관심이 없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문화적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사이를 굴러다니는 특성이 있다.

 

 

    사실 그 어떤 원형도 확언할 수 있는 “알”은 아니다. 문화의 “알”은 어쨌거나 여러 영향을 받으며 변형하고 진화한 여러 것의 화합물이다. 그러나 모든 문명이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감히, 반만년을 넘게 이어온 우리 문화가 이 지구상에 남아있는 여러 문화권과 겨루어 보존하고 이어가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야한다.
   신라만큼만 외세를 이용할 줄 아는 대한민국이라면... 영토를 축소시켰다고 욕하는 신라만큼만 자기정체성을 고민하고, 자기가 나가야할 곳을 찾아 헤메며, 실력을 기르고 상황을 알아 주변을 자기 몸 안에서 녹여내 완연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달라진다고 나는 확신한다.
하물며 사해를 교통하던 백제와 통합의 이상을 꿈꾸던 중원의 패자 고구려에 이른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원형가치로 다시 돌아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꿈꾸어야한다.

 

   이 간단한 택스트가 우리 종족의 계통이고 실체고 미래다. 고대사에서 일어났던 문명의 거대한 전환은 우리 민족에게 여전히 시련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종족연합 단군조선에서 열국시대로 접어들어 방향을 모색했고 대표적 삼국으로 체제를 수렴시켜 결국 현 시대의 민족적 원형을 일구어냈다. 이 고통스런 과정이 없었다면 “우리”라는 정체성은 없을런지도 모른다.
  비록 이 과정에서 우리가 포용했어야할 몇몇 전통을 실수로 잃어버렸지만 우리는 이 과정을 세계 어느 민족보다 슬기롭게 헤쳐나왔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죽자사자 서로 쌈질만 일삼으며 오그라든 우리의 모습을 고대사에 투영시키지 말자. 그 반대로 문명의 전환기를 용맹하게 맞던 우리 선조를 기억하자. 그들은 실패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였으되, 다만 우리처럼 비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주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세계사의 객꾼이다. 그나마 목숨걸고 돈을 벌어 구걸꾼 신세를 면하는가 했는데......
   세계사가 거대한 문명전환을 시도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무엇을 내어놓을 것인가? 이것이 한국, 동아시아 고대사 X파일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암호다.

 

 

 

 

 


징가제트와 노랑머리 핑키 - 쉬어가는 고개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정확히 말하자면 2학년 겨울방학때, 이른바 “두발 자유화”라는게 있었다. 선배들이나 후배들이나 그 정확한 연원을 잘 모르시겠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80년 7월에 과외를 완전히 금지한 이후로 단계적으로 밟아오던 학원자율화 조치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 학번은 고등학교 3학년을 다니면서 머리를 기를 수 있었다. 물론 “자율화”다 보니 이웃 사립학교(중앙일보에도 교장과 재단의 전횡으로 기사 났던, 상문고등학교)에서는 여전히 머리를 짧게 깎고 다녔다.

 

    그런데 그 1년동안 교복은 자율화를 못해서 일본식 검은 동절기 제복 (아마 대부분의 선배들이 이 옷을 입고 학교를 다녔을 것이다)에 머리를 기른 폼이 아주 볼 만했다. 아침나절에는 학생이다가 단추나 깃을 하나 풀면, 영낙없는 장기 정학생인데 저녁에는 누구나 사복을 입고 거리를 배회하니, 그당시 졸업생과 재학생을 구분할 길은 정말 막막했다. 나도 이 기회를 놓칠새라 주민증 검사를 안하는 디스코장이며, 생맥주집이며, 잘 나가면 민속주점(요즘으로 치면 소주방)까지 갈만한덴 다 갔다.
    그렇게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무척 즐겁게(?) 보냈다. 근데 이 머리라는 놈이 요상한 것이어서, 그 짧은 머리도 조금 길었다고 남들 다 하는 파마가 하고 싶어서, 친구와 꾀를 짜내어 요즘으로 치면 스트레이트 파마에 해당하는 핑클 파마를 하고, 그렇게 다니면 들키는게 시간문제니까, 곤로에 다려서 머리를 펴는 고대기로 쭉쭉 펴서 파마를 완성시켰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80년대형 스트레이트 파마의 창조였다. 우리가 이 파마에 성공하자, 대놓고 곱슬거리는 머리를 못하는 많은 우리의 친구들이 이 미용실을 들락거렸다.

 

    당시에 파마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것처럼 번져서, 이용이라는 가수의 곱슬거리는 머리는 젊음의 상징인양, 70년대의 장발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하긴, 요즘은 또 조금도 곱슬거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상승무드를 타고있어서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는 여자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이건 좀 이상하다. 우리는 동양인 중에서 몽골계통이고 이 인종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 바로 “곧게 뻗은 머리(직모)”다. 그런데 그 직모를 왜 스트레이트로 편단 말인가. 물어보면 “웨이브”지게 한다고는 하는데. 곧게 뻗은 머리를 다시 곧게 뻗친다는 것이 영 어색하다.
    그게 어색해서 그런지, 이제는 물감을 들이는 풍조도 많아서, 그냥 까만 머리는 촌스러운 것의 대명사가 되었고, 기왕이면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똥색”이 첨가된 갈색형에서부터 서양사람도 잘 안하는 시뻘건 머리(가수 이소라형)색깔이나 아예 노랗게 만들어서 출신성분을 가장하기도 하고 여러 색깔로 치장해서 한때 토인이었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자기 스스로의 취향대로 이렇게 자기를 가꾸는 것에 대해 아무런 편견이 없다.
    단지, 자기가 한 표현에는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옳겠기에 내가 받는 느낌을 이야기할 뿐이다. 여자들 이야기만 한 것 같지만, 가슴에 털 났다고 자랑하는 남자들도 별로 다른 모티브는 아니다.

 

    머리결이 지나치게 곱슬거리는 사람도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인종보다는 흑인종에 대해 조금 더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지나친 곱슬은 “혼혈”이나 혼혈조상이 있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는데 그래서 내가 어릴 적에는 “곱실배”라고 이런 머리의 아이들을 놀렸다.
    속상하게도 이런 머리의 여학생에게, 학칙이었던 “단발머리”는 “천형”이었다. 뭉실뭉실 떠서 어릴 적의 마이클 잭슨 펑키스타일을 연상케하는, 이 머리를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들을 때마다 연상하곤 한다.

 

    X파일 두번째에서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을 거두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는데, 오늘은 혼혈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디로 흘렀나를 한 번 짚어보자. 우리는 원래 황인종에 직모였는데 이리 저리 섞이다보니 곱슬머리도 늘고 코크고 눈이 쑥 들어간 양코배기 닮은 사람도 늘었다?
   역사를 보면 가끔씩 언급되지만 처용(아라비아인)이나 박연(네덜란드)같은 사람이 분명히 이 땅에서 자손을 이어갔으니 그런 증거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나도 대충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왠만한 것도 다 뒤집어버리고 싶은 이 반골기질이 이 자연스러운 설명을 곧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자연스러운 설명을 듣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형태는 너무 다양하고 현란하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특히 기골이 장대한 것은 고대 중국책에서도 수시로 언급하고 하다못해 종족의 이름을 키 크다는 뜻과 활 잘쏜다는 뜻의 夷자로 붙여놓았겠는가.

 

    그런데 그 후로 무슨 연유에서 이렇게 키작은 민족이 되었을까? 못먹어서? 그럼 그 때는 얼마나 잘 먹었길래? 신라 미추왕릉에서 발견한 화려한 목걸이의 상감유리 장식에는 오똑한 코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흰색 피부의 여자얼굴이 새겨져있다.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외국인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하긴 십팔사략에서도 황제(黃帝)가 백녀(白女)를 찾았던 이야기는 나온다. 그렇다고 해도 신기하지 않은가? 어디 이뿐인가? 말만해도 그렇다.
    천년 정도가 걸려야 조금씩 바뀐다는 원초적 단어들, 즉 하늘, 해, 달, 별, 물, 풀 이런 단어들은 지금 터키지방에 가보면 전혀 다르다. 우리를 그들과 같은 알타이어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장의 구조적인 특징과 몇 가지 음운법칙이 같기 때문인데, 단어가 이렇게 다르니 같은 어족이라는 말을 그렇게 믿고싶지는 않다.
    오히려 아리안 어족들의 단어들과는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다.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만 더 들어보자. 「하나 둘」과 그리스어의 「에나디오」, 우리말 「가(GO)」와 영어 「고」, 「와(COME)」와 힌디어 「와오」, 「예(YES)」는 그리스어로 「네」, 영어로는 「예스」다. 우리말 「입(口)」은 영어의 「입술(lip)」이고 「잎(잎사귀)」는 영어로도 「잎(leaf)」다.

 

    고대영어로 가면 우리말 「여의다(죽다)」와 고대영어「예더」, 「없애다(죽이다)」와 고대영어「없스뢰」가 비슷하다. 「불(fire)」는 그 극명한 예인데, 현대영어에서야 「파이어」고 고대영어에서는 「푸-ㄹ-」이다. 고대그리스어로는 「퓌」이고 이란어로는 「풀」인 이 발음은 우리 조상들이 「부여, 부루(해부루), 부리, 패리, 펴라, 평양」으로 계속 이어쓰고 있다.
    그 흔적이 실크로드를 통해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 - 소아시아 - 아프가니스탄 - 인도 - 태국 - 중국 - 한반도 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말의 원초적 단어를 구사하던 종족은 오히려 이 계통이고 이 계통의 종족이 원주민이었으며 후에 북방기마종족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보면 혼혈의 문제는 오히려 반대편에 설 수도 있다. 원래 우리 종족은 서양인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고대 중국인들이 자신들과 우리 종족을 구분하며 키가 크고 머리결이 아름답다고 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으와!!! 우리 민족의 원래 시작은 노랑머리에 파란눈일 수도 있다는 이 말이 충격적이라면 아직 상상력을 회복 못하고 계시다는 증거다.
    물론 이 가능성은 옛조선 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하지만 그렇다해도 고증이 아주 빈약하다. 그래서 생각에 따라 증거를 세우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역사적 사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고대 “미이라”는 이런 점에서도 충격적이다.(96년) 중국 학술계가 주저주저하는 사이에 비밀이 새나가자 하는 수 없이 발표했던 그 미이라는 노란 머리칼을 가진 서양종족이었다. 선대문명이 죄다 자기 종족것이라고 우기는 중국사람들에게 이정도로 치명타를 가할 것은 그리 흔치않다. 문화는 속일 수 있어도 인종마저 바꿀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실크로드도 없던 시절에 동서교류가 있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색깔이 햇볕에 타서 지금처럼 변했다고 우기기도 뭣하고, 쉬쉬하다 발표는 했지만 연구는 안한다. 왜 그 연구를 해야하나? 우리 중꿔사람 돌았나해? 장개석이 총통이던 본토 중국시절, 역사학자들이 고대사를 편집해온 것을 보고 책을 집어던지며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중국 역사책 써오랬지, 오랑캐 역사 써오랬냐!”
    그러나 어쩌겠는가. 학자양심상 고대사는 우리꺼 아니라해. 우리는 항상, 왜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흘러왔다고만 생각할까? 우리가 그곳 어딘가로 흘러갈 수는 없었을까? 그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문명의 발상일 수 없을까? 과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의 우리다.

 

    그러길래 우리 옛조상들이 생각했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누구에겐가 무엇인가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단순히 사대주의의 결과로 뿌리를 내린 발상법의 주체성 상실을 넘어서 우리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이 자존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건강하고 풍성한 몸을 얻어도 그것은 맘이 없는 반쪽자리일 뿐이다. 언제나 열등에 휩싸인 배부른 쪽박(거지)일 뿐이다.
    우리는 간단한 과거마저 잊고산다. 하물며 “고대”라는 이름 앞에서는 어디서 왔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흔히 우리가 ‘오키나와’라고 부르는 류우큐우 열도(홍길동의 유구국)는 1879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말이 다르고 종족이 다른 남방의 독립국이었다. 청나라 조공국이었던 이들을 점령한 일본은 그들의 말을 바꾸고 2차대전 중에는 학살극을 벌이더니 여기다 미군기지를 세워 이제 오키나와가 한 때 “일본이 아닌 나라”였다고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우리의 국기라고 생각하는 태권도가 바로 이 오키나와 테(手)에서 왔다. 이것이 당수(唐手), 즉 공수(空手)이며 가라테이다. 가라테는 일본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식민지시절을 거쳐 해방후 조선의 전통무술이었던 택견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둔갑한다.(전통택견과 태권도가 흐름이 전혀 다른 것은 현재 밝혀지고 있다)
   김용옥 교수가 주장한 이 이론을 내가 받아들인 까닭은, 그렇다해도 도대체 태권도가 어떻게 될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어디서 왔는지를 잊어버리고 현재 있는 것을 옛부터 있었다고 믿어버렸다면 류우큐우의 공수도가 우리의 고유무술인 발차기 태껸으로 둔갑해도 할 말이 없다. 설령 그것이 가능했더라도 우리는 가라테가 옛부터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곡해했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껸이 있었길래 태권도가 가능했다. 손동작 품새위주의 가라테를 완전히 발차기 중심으로 전환시켜버린 태껸의 전통(경기나 시합할 때 손쓰면 이건 완전히 병신)이 이렇게 살아 숨쉬길래 태권도는 우리의 국기일 수 있다. 태권도 경기할 때 보듯, 춤추듯 펄쩍펄쩍 뛰어가며 기회를 봐서 발을 내지르는 이 모양새는 분명 당수(공수)는 아니다.

 

   발차기를 싫어하는 민족이었다면 그 짓이 눈에나 들었겠는가. 그런 역사적 눈길은 우리 문화의 많은 부분을 보는데 필요하다. 우리가 어릴 적, 우리의 눈을 잡아끌었던, 그 시절 우리를 휘어잡았던 만화들중 상당수가 일본만화라는 사실을 알고 계실테다.
    여자라면 "캔디"가 그렇고 남자라면 "바벨3세"가 그렇다. 바벨3세의 그 거대한 스케일에 일단 찬사를 보낸다. 거대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 바로 전 세대가 즐겨찾던 산호선생(대주신제국사의 저자다)의 "라이파이와 녹색마왕" 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늦어서, 시대에 맞지 않게 약간 이른 감이 없지 않았던 반면, 바벨3세는 소년지가 마구 퍼지던 70년대를 주름잡으며 우리의 상상력을 쉴 새 없이 휘저었다.

 

   거대한 새(로프로스)와 걸어다니는 로보트(포세이돈)는 당시 상상력의 한계를 넘은 발상이었다.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표범(로뎀)은 몇 년 전에 미국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새로 나타난 특수멀티합금 인조인간에서나 기술상으로 구현할 수 있었던, 지금보아도 엄청난 상상력이다. 이것을 벌써 이십년 전에 우리는 보고자랐다.
   일본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최소한 기원후의 세월에 대해서는 처절한 노력으로 뿌리를 찾아다녔다. NHK가 돈이 많아 실크로드를 답사하고 히말라야와 중원과 만주와 시베리아를 뒤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후손에게 심어줄 옛 기마종족다운 원대한 도전정신을 복원시키기 위해서, 현세에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고대와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을 같이했다.

 

    그 시절, “마징가Z”가 있었다. 조종석에 앉아 로보트를 조종한다는 이 기발한 발상은 장난감계에 대 혁명을 가져와서 지금 우리나라 꼬마들이 갖고 노는 변신로보트의 할아버지 격에 해당하는 마징가제트가 전 일본과 한국을 주름잡았다.
   그런데 무쇠로 만든 인조인간 로보트 그레이트 마징가 제트의 머리 위에 솟아난 뿔은 도대체 무언가? 고구려 투구다! 고비사막과 천산산맥을 헤매고 다녀도 그 투구는 찾을 수 없지만, 그들은 저런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고대를 복원해내고 있다. 내가 일본 만화영화를 보며 그 수많은 노랑머리 요정 핑키들이 등장해도 일본사람들이 서양편향적이라고 욕하지 않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시겠는지,
   내가 누군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지만 오로지 현재의 나만은 아닐테니...

 

 

 


, 훈민정음, 가림토. 길고긴 여정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서 만들었다는 한글은 내가 알기로는 세종임금이 처음 만든 것이 절대로 아니다. 불쌍한 백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도 있고, 한글을 만들어서 지었다는 책이 찬송가인 '용비어천가'였으니, 목적은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기록한 바에 따르면 한글을 만들기 위해 세종임금은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신숙주를 시켜 몇 번이나 중국에 가서 음운학 자료를 가져오도록 하는가하면 체계적인 문자구조에 신경을 많이 썼고 직접 연구에 참가하기도 한다. 한글은 처음에는 한문발음을 정확히 하도록 하는데 그 기능을 두었다. 한문발음이 지역마다, 책마다 다르게 발음되는 것 을 막기 위해 음을 표시할 때 한글을 사용한 것이다.

 

   이 때는 한글이 아니고 언문이었던 이 글자로 백성들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없고 붙이는 방이나 공문서를 언문으로 만든 적도 없었으므로 어린 백성을 생각했다는 담화문을 나는 믿지 않는다. 실제로 일반백성들을 예나 그 후나 까막눈이었다. 오히려 언문을 쓴 사람들은 양반집 아녀자나 아전(이방 등)들이었으니 후기까지도 “잡스러운 소설”이나 규방의 심심풀이로 썼던 이 한글은 문자로서의 생명이 위태로왔다!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나쁘게 생각해서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개발했다가 아무도 안쓰고 “언문”취급하다가 이렇게 잘 사용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다. 일제가 권장한 것이 아니고 민족의식과 민중의식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문자의 필요성이 급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글을 이용한 최초의 대규모 번역사업은 우리 고전번역이 아니고 예수교“성경”이었음을 알고 계시는지.

 

 

    이제 우리는 세계에서 문맹율이 가장 낮은 나라다. 한글을 최초로 전용한 독닙신문 이후 최근에 와서 신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책과 자료가 한글을 전용하고 있다. 전용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표준화의 시대, 정보화의 시대, 컴퓨터의 시대에 이렇게 좋은 도구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한글을 만드는데 어떤 자료를 참조했는지는 세종실록에 자세히 있으므로 그걸 찾아보면 연원도 밝혀볼 수 있다. 세종임금이 그토록 아끼고 신뢰했던 정승 최만리가 죽자고 반대를 하는데 이유가 이렇다. “이 글이 옛 글과 비슷하여 중국에 오해를 살 수가 있고...
   이게 무슨 말인가? “옛글”이라니! 그리고 “중국의 오해”라니! 아닌게 아니라 한글을 만드는데 녹도문인 옛날(古) 전(篆)자를 참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글과 전자는 전혀 비슷하지 않으므로 전자 이전에 있었던 어떤 고대글자를 가리키는 모양이다. 그럼 그게 무슨 글자였는가?
   위서라는 한단고기에 보면 38글자인 “가림토”글자가 나와있다. 3세 단군 가륵이 소리를 적기 위해 글자를 만드는데 한글의 전신이라고 보면 틀림없는 모양이다. ㅍ 위에 점이 붙은 것도 있고 △ 위에 가로로 선을 그은 것, 工, X, M을 닮 은 글자가 있기는 하지만 한글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자모음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너무 태연스레 말하니까 “내가 학교다닐 때 자느라고 못배웠나?”하실 분이 계실텐데 학교에서 가르쳐준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위서라는 한단고기에만 실려있는 내용이니 의심받아 마땅하다.

 

    이거야말로 위서의 증거가 아닌가. 세종임금 이전 에 쓴 문헌중에 이런 글자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바위 덩어리에 새긴 것조차 없다. 그러니 현세에 있는 것을 조금씩 고 쳐서 한단고기라는 데다 떡하니 실어놓은 것 아니냐... 그런데 말이다. 물론 한반도에는 없지만 증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두실 필요가 있다.
연도가 정확하 지는 않지만 82년 경에 KBS에서 기획특집으로 “신왕오천축국 전”을 방영한 적이 있다. 여기보면 혜초스님이 갔다는 천축국, 즉 서역의 어느 한 지방을 가는데, 거기 간판이 “한글과 너무 흡사해서” 발음을 그렇게 해보니 그 지방 사람들 발음과 정말 “비슷한” 것이다. 신기해하는 PD가 뜻을 물으니 그건 전혀 달랐다. 하지만 그 지방에는 그런 글자가 많아서 계속 고개를 설레거리며 발음을 했다.
    한글의 본질적인 구조가 산스크리트어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설은 심심찮게 있어왔다. 古篆이라는 것이 바로 산스크리트 문자가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나도 이 학설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증명하기는 너무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인도의 아쇼카왕 비문에 한글과 비슷한 글자가 있다고 “치앙마이”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김병호(전직 UN고문관, 소설“고구려를 위하여”저자)씨가 전해주고 있다.

 

   이런 식의 흔적은 한 둘이 아니다. 일본의 고대유물에 새겨진 신지문자나 만주와 경상북도 경산에서 탁본한 고대문자 (문화일보.96)는 이런 종류의 문자가 고대에 실재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만주탁본의 경우에는 한단고기에 적힌대로 읽을 경우 일부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다. 한글은 그 모음의 형태가 미노아의 쐐기 문자와 형태가 같다.
   가림토나 고린토(성경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고린토(도))가 발음이 유사하다는 착각을 하면서 보면 정말 비슷한 구조로 만들었다. 수평선과 수직선, 그리고 점으로 기본구조를 이루는데 구조가 단순하지만 뜻이 깊다. 이것이 천지인(하늘/땅/사람)을 의 미하는 것은 알고 계실테다. 자음의 형태는 발음하는 사람 입과 혀와 이와 목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미 인 도와 서역에 남아있는 유적의 그림과 그 형태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글자를 어느 한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보다는 많은 종족과 시간 속에서 이 글자를 사용하던 종족집단이 각기 자기 필요에서 기준을 잡고 정리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한글에 관해서는 특히, 우리 말의 원초적인 단어가 인도아리안 계통(영어나 그리스어와 계통이 같은)과 흡사한 것이 많기 때문에 충분히 산스크리트와 소아시아의 아이디어를 빌려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가능성은 고대의 옛조선에서 이런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지 못하란 법이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사람의 한웅과 한사람의 단군을 교육받은 우리에게야 물론 “청천벽력”이겠지만 사실이 어느쪽일지는 알 수 없다.(아직은) 만약 이 글자를 그렇게 오래 전에 만들었다면 왜 널리 사용하지 못하고 흔적이 없어져버렸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표의(상형)문자가 고대의 각양각색의 종족을 표준화하기에 유리한 반면 표음문자는 쉽게 배울 수는 있지만 여러 종족이 공통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글자다. 표음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종족이 문화단위의 민족으로 결집되고 어느 정도 사회가 공통적이고 안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사투리가 섞이긴 해도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는 종족집단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가림토는 널리 보급하는 보급형이 될 수 없었다. 중원과 서역, 만주라는 다양한 지역을 아우르던 종족들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표음문자는 위력을 잃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당시 동아시아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경쟁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한자의 연원이야말로 “중화적” 이라 는 말 그대로 많은 부분을 우리 종족이 관여했다. 한자의 시초로 여겨지는 갑골문자만해도 배달범족 은나라의 작품이 아니던가.
   우리 역시 근 수 천년을 한자를 써왔다. 이건 분명히 우리 글자다. 영어에 라틴어원이 있다고 다 버렸다면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나오는가? 한글전용을 나는 과학기술적인 용도에서 그렇게 하자는 것이지 한자가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자가 우리 것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중국의 대표사전이라고 일컫는 강희자전을 보면 발음기호를 한자로 적어놓았는 데, 이걸 중국사람들은 발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발음이 안되니 발음기호를 표시해 놓은 것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우리나라 사람이 이 발음기호에 따라 그 글자를 발음하는 것은 매우 쉽다.(이 이야기는 내가 입사할 당시 회사연수원에서 한단고기의 저자 임승국교수가 강연한 내용이다)
   왜 한글의 연원이 문제냐고? 그건 이렇다. 세종임금이 창제했다고 사실로 인정해버리고 나면 시험치는데는 편하지만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는 문화민족이 할 일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연구의 손길을 놓고만다면 일본 고대의 신지문자에서 한글이 왔다고 일본사람들이 주장해도 별로 할 말이 없다. 중국사람들이 만주의 유적을 뒤져 자기네들이 만들어준 것이라고 주장해도 대항할 수 없다. 역사란 정말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연구하는 것이다.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런 작업을 누가 할 것인가?

 

   죄다 손놓고 있다. 덕분에 이 신비한 옛글자의 연원은 가끔씩 파편처럼 날아오는 여행가들의 수기에 실려있을 뿐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주류 역사학계에 이 문제를 들이밀 수는 없다. 그 학계야 일제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나라 오그라들이기 집단들이니 한대도 맡기고싶지 않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역사학자들은 패거리다.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학회에서 주류의 주장에 벗어나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배척당하고 그 결과, 밥벌이도 잃는다. 교수니 편찬위원이니 하는 직함의 후보에서 아예 검은 줄이 쫙 그인다는 의미다. 누가 미친놈이라는 소리 들어가면서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러다보니 이런 비주류 이야기는 주로 재야사학계의 일부와 개인연구자들이 맡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세력이 약하고 돈이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다. 여러분이 그들을 도우고 싶다면 도라이 취급을 안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진지하다. 한글이 어디서 왔건 우리가 이렇게 잘 쓰고있으니 분명 문화적인 소유권자는 우리이다. 그러나 필자가 한글의 연원을 따져보자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옛 흔적이나 여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이다. 시종일관, 필자는 우리 종족의 연원을 찾아야한다고 강조하는데, 이제 슬슬 그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된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을까?

 

 

 


리랑 아리랑 멀고먼 아리랑
   일본 고대문명의 꽃을 우리는 아스카(飛鳥)라고 부른다.
세계사 책에도 나오고 국사책에도 나오니 들어보셨을 것이다. 야마토 문화시대 전에 성립하는 이 문화는 그 형식이나 특징이 그 후의 것과 상당히 달라서 일본의 근원을 밝혀줄 좋은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한자를 잘 보시라. 비조(飛鳥)라, 왜 아스카라고 부르는 한자를 비조라고 써놓았을까? 아스카의 아스는 “아사”와 같은 어원이므로 아침을 뜻한다. 멀게는 밝은 땅을 찾아간다는 우리 기마종족의 전통이 배어있는 이름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해뜨는 동쪽을 아시아라고 불렀던 것을 되새기면 이 이름의 연원은 억수로 깊다.
    기마종족의 영역이 멀게는 소아시아와 핀란드에서 동쪽 만주까지 뻗쳤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언어의 보존이다. 그런데 왜 비조인가? 일본말로는 아무리 풀어도 절대 안나온다. 그런데 (여류)문학가 이영희씨가 간단하게 이 이두를 풀었다.

 

    8세기 이전의 일본고대어는 거의 한반도 말이라는 힌트에서 줄줄줄 풀어가는 ‘노래하는 역사’라는 책에 보면, 비조를 순수하게 조선말로 옮기면 “나는 새”,“날새”다. 우리 말에 새벽이 오고 해뜨는 걸 뭐라고 하는가? “날 새-앴다”말이야. 그래서 아침을 “날새” 즉 “飛鳥”라고 이두로 쓴 것이다. 아스카, 비조, 날새, 아침, 정말 기가 막히는 추리다.
    근데 사실이냐고? 이 정도 추리는 사실로 쳐준다. 단군의 도읍이 “아사달”이다. “아침의 땅”, “해뜨는 땅”, “아스카”다! 네번째 X파일에서 오리랑카라는 몽고부족이 오랑캐의 어원임을 알려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스키타이의 이동흔적을 따라가면 비슷한 말이 마구 나타난다. 오리랑카 뿐만 아니라 오리, 아리가 붙은 말로는 소아시아를 뜻하는 “빛은 동방에서 부터”의 「오리엔트」, 이두문자로 받침을 떼고보면 그대로 아리가 되는 「압록」이나 나라이름으로 잘 쓰는 「낙랑」도 그렇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아리랑」에서 시작하는 단어는 멀리까지 가서 “우랄” “알”타이, “아리”안, “알라”신까지, 거대한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
    아시다시피 우랄산맥은 그리스 신화의 우라노스(제우스의 할아버지격)에서 비롯했다. 하기야 이집트의 “피라밋”은 누가 피라밋이라고 불렀는지 알수 없다. 일설에는 그리스어로 피르(PYRO, 불, 열)와 AMID(MESOS, 메소스-중심에서 비롯한 말)라고 하는데, “피르”야말로 “페르”, “불”, “펴라”, 우리말 부여, 평양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찾아가면 우리말의 원초적 단어인 “알”의 어원을 우랄 알타이뿐만 아니라 지중해까지 뻗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나는 아직도 “아리”의 정확한 본뜻을 모른다. 여러 가지 추정은 있지만 다 그럴싸할뿐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를 아연 실색하게 하는 흔적이 있어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할 처지에 이르렀다. 독자 여러분은 그리스 신화를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는 사실 그리스인들이 아니고 그리스인들 이전에 살았던 선주민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스 신들의 근거지를 올림푸스라고 부르는데, 가만 보니 “올”자가 무척 닮았다. 너무 지나친 비약이라고? 그럴 수도 있다.
    계속 가보자. 올림푸스가 어디었느냐는 추측에 대해 현재까지 서양학자들은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고 추정한다. 발칸 반도의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로 쓰는 단어가 호(胡)자다.

 

   글자를 잘 뜯어보면 옛날(古) 월(月)족이다. 오리, 아리, 올자를 한자로 옮기면 무어라 쓰겠는가? 당연히 ‘月’자다. 月氏국이라는 나라도 있었는데 배달국중에서 조선으로 적통을 잇는 곰족과 중원으로 들어가 은나라를 세우는 범족 이외에, 옛 배달국 근친후손들을 胡족이라고 불렀고 단군시대에 와서는 동호(東胡)라는 나라도 있었다.
    동호라니? 동쪽으로 간 옛날 월씨족?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올림푸스와 동호는 연결시킬 가능성이 많다. 기마종족의 영역을 생각하면 이건 상당히 가능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신화의 하는 짓이 우리 고대설화와 엄청 많이 닮았다는 사실에서 이 가능성은 오로지 상상력의 문제일뿐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은 콩쥐팥쥐와 신데렐라가 왜 그렇게 닮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콩쥐팥쥐와 신데렐라는 인류사의 보편적인 흐름이라, 닮았대도 근원이 같다는 증명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삼국유사의 경문왕 이야기와 귀가 길어져 당나귀처럼 되었다는 “미다스왕”의 그리스 신화를 놓고는 그런 이야기를 못하실 거다.
   둘다 귀가 길다래진 임금님의 비밀을 참지 못해 발설한다는 이야기고, 둘다 고대문헌에 적혀있어서 현세에 지어내기 힘든 “증거”다. 정 인정하기 싫으시다면 “실크로드”를 통해 주고받은 이야기라고 해두자.

 

    하기야 X파일 두번째 글에서 똥과 덩, 보리와 바리를 이야기 드린 적이 있지만, 차마 파리와 플라이, 모기와 모스키토가 닮았다는 이야기는 너무 우스개같아서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상상력을 상실하면 “원/투/쓰리”와 “하나/둘/셋”이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절대로 못한다. 아프가니스탄의 하나둘셋은? “약/두/세”다. 그리스어로는 “에나/디오/트리아”다. 이탈리아어로는 “우노/두에/트레”다.

 

    신채호는 우리 고대민족의 하는 짓이 중국과 닮기보다는 오히려 터키나 그리스와 닮았다는 주장을 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스개라도 이런 증거를 들어 우리 종족의 영역과 이동경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력의 발전에는 매우 좋다.
    역사란 어쩌면 상상력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과 희망을 재편집하고 거기에 미래를 얹는..., 각설하고, 아리랑과 아시아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증거다. 기억하시라 월씨족과 아리안과 오리엔트와 올림푸스를. 이 상상력의 비약이 마음에 안든다면 아시아라는 말을 쓴 사람이 그리스 사람들이고 그 말의 흔적을

 

    일본말의 아사와 우리 말의 아침이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시라.
그러나 마음에 안드는 분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한다. 지중해는 사실 땅을 끼고 있는 내해(內海)에 가깝다. 지중해라는 말도 중앙을 뜻한다. 지중해 아래쪽 바다를 홍해라고 부르고 위쪽 바다를 흑해라고 부른다. 누가 이렇게 불렀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여튼 옛날부터 이렇게 불렀다. 그래서 영어로도 붉은 바다고 검은 바다다.
    그런데 그 바다에 가보면 여전히 푸르다. 왜 붉어야했고 왜 검어야했을까? 모르는 여행자는 흑해가 정말 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홍해는 붉은가? 그렇다고 우겨도 하는 수 없지만, 음양오행에서 북방은 검은 색이다. 흑해! 남방은 붉은 색이다.
    홍해! 한반도 서쪽바다를 내해로 삼던 우리 조상은 음양오행의 가운데(中) 색깔을 붙여 누런 바다“황해”라 불렀다. 북쪽은 검고 남쪽은 붉다는 생각, 지중해와 흑해와 홍해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종족들이 붙인 이름이다. (동은 청색, 서는 백색이다)음양오행을 아직도 중국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X파일 첫번째 글부터 다시 읽어서 여기에 다다르시길 바란다.
    (중국거라면 “양음오행”이지 절대 “음양오행”이 아니다. 맛과 멋, 알과 얼, 모음의 점 하나로 완벽히 음양을 전환시킨다. 년놈vs남녀, 밤낮vs주야를 기억하시라, 농담.) 자, 지금부터는 모두가 박창규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들으시라.
 

 

    지중해 가운데 있는 섬, 크레타에는 신전과, 봉선을 위한 크노소스라는 제단이 있다. 그들이 섬기는 여신의 이름은 코레(kore)다. 가운데 바다의 한 가운데 있는 섬, 그곳에 제단을 쌓는다. 바로 강화도 마니(마리)산과 같은 형식이다. 옛 고구려의 뜻이 가우리이고 이는 가운데를 뜻한다. 구려, 구리라는 옛 조선족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아스라한 아시아의 맨 서쪽에 살았던 사람들과 아스라한 아시아의 동쪽에 살았던 사람들... 올림포스, 고린도, 파르나소스 같은 이름들은 그리스 사람들이 붙인 것이 아니다. 한단고기에 나오는 옛글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가림토(加臨土)이다. 단기고사에서는 이 가림토를 “산수가임다(刪修加臨多)”라고 부른다. 우리 말의 원리가 숨어있는 고대언어를 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알고있다. 진시왕과 알렉산더가 죄다 불태웠다는 “산스크리트(산수가임다)”어 문서...
   

 

   크레타와 구다라, 듣고보면 비슷하지만 일본어에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른다. (“별로다, 좋지 않다”라는 뜻의 일본말“구다라 나이”는 “백제에 없다”는 뜻이다) 크레타는 단순히 섬이름이 아니라 그 지역을 다스렸던 강력한 종족의 이름이다.
크게 솟은(크노소스,∀,소머리) 마리산, 크레타, 코레, 고구려, 구다라 이들은 지역과 역사를 떠나 죄다 한 화살로 쭉 꿰어들일 수 있는 하나의 연결, 상상력의 회오리지대이다. 더 묻지 마시라. 상상력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증빙이 없으니 X파일이다. 1987년 6월 “호헌철폐” 시위가 한창이던 그 무렵, 나는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함께 부를 수 있었던 두 가지 노래를 아직도 기억한다.

 하나는 애국가였고 또 하나는 아리랑이었다. 둘다 장중한 슬픔을 지닌 노래였다. 왜 슬픔일까? 콱 막힌 세상과 콱 막힌 우리 시대에 콱막힌 주제를 놓고 뜨거운 여름을 지세던,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아픔이고 슬픔이던 시절에 우리는 아리랑을 불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 오랜 세월을 불러온 노래, 이 촌스런 노래를 부르며 노을이 넘어간다...

 

   아무리 무너지고 찢어져도 잊지않고 기억하는 우리 고향의 언어 아리랑. 멀리 왔다, 아스카(飛鳥)와 (소)아시아에서 출발한 우리의 여정은 이렇게 지중해와 아사달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명의 공간터널
    우리 종족의 연원을 따져보기로 작정한 첫 파일부터 지금까지, 사실 필자는 잘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며 논리의 비약을 시도했다. 필자로서는 사실의 중요함보다 발상법을 전환하고 멸절된 상상력을 회복하도록 독자여러분을 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증명”이나 “증거”의 문제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왠만한 독자가 아니면 반론을 위해 끌어댈 증거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을테니, 이 주류이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근거 정도는 사방에 깔려있다. 그 때문에 설을 풀면서도 염려는 안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상상력의 뚜껑을 열어놓은 채, 훌쩍 뛰어넘어 볼 생각이다. 상상력을 위한 유체(영체)이탈, 스타게이트, 뭐 그런 종류다.

 

    우리 종족의 고대 문화 중에 특징적인 것이라면 주로 중국이나 여타 종족들과 구분되는 것인데 그중 하나로 제천의식을 들 수 있다. 애니미즘(정령신앙)과 토테미즘(종족상징신앙) 같은 보편적인 원시종교와는 상당히 다른 “수준높은”의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무속으로 격하시키는 주류학계에 비해 필자는 이것이 유대민족의 유일신 신앙에 비견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대국가들 중 유일신 개념이나 삼신(삼위일체)개념 등의 철학적 신관(神觀)을 갖고있던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의 “천자”개념은 한나라 이후에나 정리된 것이고 보면 종족의 시작을 하느님(환인)의 아들에서 그려내는 종족은 그리 흔하지 않다.(임금이라는 말의 구성이 그렇다)
거기다가 그 형식도 아주 독특한 것이어서 고산숭배, 즉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피라밋 신앙과 흡사하다.
왜 우리나라의 무덤은 높다랗게 솟은 산모양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 형식을 가진 종족이 그리 흔하지 않다. 거기다가 소도와 솟대라는 것은 매우 특이한 양식이다. 특히 하늘과 연결점을 찾기 위한 솟대야말로 아직까지 시골마을에 잔치가 있으면 높다란 나무를 세우는 풍속으로 남아있고 새 모양의 높은 나무문을 세우는 일본풍습과 더불어 우리의 먼 근친(아마 고구려 유민)으로 여겨지는 태국 치앙마이 부족도 이 습속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일본으로 가면 이 솟대 위에는 새가 앉아있는데 이건 바로 전편 "날새/아스카"에서 말씀 드린바 있다. 문화란 하나의 본뜨기, 흉내내기다. 문화란 그 전형(前形, 以前의 形態)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저 “창조된” 문명이란 없다.
   혹시 조물주의 천지창조가 그랬을지는 몰라도 여기에도 체계와 철학이 필요하다. 사람의 것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렇다면 높은 산에 올라가 하늘을 섬기고 솟대를 세우고 소도에 함부로 안들어가던 이 문화습속을 그저 “어쩌다보니”생긴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근대성의 특징인 “합리적”인 것이 아무 소용없는 분야가 바로 고대문명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원시에서 문명으로 진화했다고 믿고있다. 그 증거로 물질문명을 든다. 편리해진 것들과 세세히 분화된 것들을 들며 옛 것을 원시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차대전 때 일이다. 폴리네시아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미군이 임시활주로를 설치하고 본국에서 화물기를 띄웠다. 여기 살던 원시부족은 얼굴이 하얀 신의 족속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커다란 나는 배에서 무언가 네모난 것을 꺼내는데 거기에는 온갖 먹을 것, 입을 것, 기이한 장구들이 죄다 들어있었다. 원시부족은 이것을 자세히 볼 수 없었고 기껏 경험한 거야 먹는 것이 모두였지만, 그들은 이제 신앙할 것이 생겼다. 네모난 화물을 만들어 이리 저리 옮기면서 “먹을 것”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화물신앙”이다.

 

    아프리카 오지의 부족이 하늘을 나는 커다란 새(항공기)가 자기 조상들의 정령이라고 믿고 수풀과 나무로 비행기 형상을 만들어놓고 자나깨나 보초를 세우는 이야기는 몬도가네로 잘 알려져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솟대”가 그것과 흡사하다는 것을 필자는 주장한다. 세워놓으면 멀리서 잘 보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기능은 없는 상징물이 이 솟대다.
    한 마디로 높다란 기둥, 첨탑인 셈인데, 이게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하늘과 맏닿겠다는 의지는 높이 평가해야하지만, 아무리 원시부족이라도 하늘이 한 없이 높다는 것 정도는 느낌으로 알테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닿는 높이고 하늘과 연결되려는 과욕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 솟대는...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궤(레이더스라는 영화에 나오던) 위에 천사의 날개모양을 닮은 모양의 “케루빔”이 있다.
 

 

    야훼(여호와)는 이것을 통해서 말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솟대 위의 날새, 피라미드 위의 제천의식, 소도(숲)과 에덴동산, 무언가 고대사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설명하려는 건 아닐까? 박창규, 너 드디어 돌았구나. 민족역사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건 어쨌거나 애국심이라고 봐주겠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거야! 나도 모르겠다.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봉선이라는 의식을 예로 들어 무언가 특이한 것이라는 상상을 이야기해보겠다. 봉선(封禪)이란 중국의 천자가 태산에 올라가 드리는 하늘에 대한 예이다. 禪과 같은 뜻이 壇(단)이므로 이 의식역시 처음에는 단군임검이 하던 것이라는 알 수 있지만 중국천자로 패권이 넘어간 이후의 이야기만 하기로 하자.

 

    사기에 보면 천제의 예에 대해 방법이나 모습은 잘 전해주지 않지만, 제나라 노인의 말을 인용하여 봉선이라는 것은 “죽지 않는 말(言)”이라고 풀이해놓았다. 죽지 않는 말(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여기에 사용하는 그릇 중 핵심이 되는 것이 보정(寶鼎)이라는 것인데 청동으로 만들어 무언가를 밀봉하는 것으로 그 용도가 매우 불투명한 그릇이며 은나라 때부터 사용했다.
    그런데 이 그릇 안에 들어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집트 피라밋에서 발견된 “달걀”이나 경주 155호 고분에서 발견된 “썩지 않은 계란”은 밀봉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고대기술을 보여준다. 사직단도 이와 비슷한 전통으로 조상의 영혼을 모셔놓아 왕조을 잇기 위한 방편으로 “천년사직”이라는 말의 유래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왜 달걀인가? 이게 무엇의 상징인가? 이 오래된 전통의 시작인 봉선의 예에서 사용했던 이 보정이라는 그릇 안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놀라지 마시라. 왕의 정액이다! 봉선의 예란 천자의 정액을 밀봉하여 보관하는 의식이었다! 동굴에 들어가 나무를 흔든다는 봉선행위에 대한 문헌표현은 실제행위이든 상징이든 성행위를 의미한다. 왕의 성행위는 곧 제천의식이었다.

 

그    런데 왜 밀봉을? 왜인가? 후대에 보이는 계란같은 상징으로만이 아니고 왜 실물을? 그들은 자신의 왕조를 영생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씨앗을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실제로 사용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천년이 지나 사직이 희미해지면 이 보정을 개봉하여 원래 왕족의 핏줄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던, 상당히 실질적인 용도였던 것이다.
    이런 "방법론"의 상징이 바로 무덤 속의 계란이고 사직단이고 옥쇄였던 것이다. 내가 상상하기에 이 방식이 초기에는 가능했는지 몰라도 쓰다가(!), 후대에 와서 상징으로만 남아 사직단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에는 정말 가능했는가? 정말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발상은 인공수정이 가능한 오늘날에나 쓰일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천년이 지난 후 보정을 개봉하여 천왕족의 부활을 노리는 천년왕국의 의식, 봉선! 과연 이 아이디어가 원시적일까? 고만해라 창규야. 술 맛 떨어지게 지저분한 이야기가 웬말이냐! 좋다. 그만하자. 허나 오늘 우리가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이야기가 고대에는 지극히 신성한 의식이었다는 것만 기억해 두시라.
우리가 고대사 X파일 내내 고민했던 우리 종족의 이동 문제도 이런 식으로 풀면 무조건 아스라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천문학  지식이 있었다. 그래서 나라의 도읍을 항상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 있고 해가 춘분이나 하지에 신전의 정문으로 비치는 지점에 정했다.

 

    영국 스톤헨지(고대 거석배열)가 하지에 태양을 맞추어 정렬되어있고 피라미드가 정확히 동서남북으로 한 면씩 바라보고 있고 그 방향은 춘분에 태양이 뜨는 정동으로 서있는 것도 같은 유래다. 고대의 모든 건축은 사방팔방의 방위와 천문학적 지식을 동원해 지은 그 시대 과학(?)의 표상이다. 왜,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그래야만 했는지는 어쨌거나 수수께끼지만, 이 지점은 대략 천년에 한 번씩 바뀐다는 사실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
지축이 삐뚜랑해서, 지구가 팽이처럼 자전을 하길래 생기는 이 세차현상이 “특정한 어느 종족의 대규모 이동”을 일으킨다! 이 세차의 변화는 서에서 동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동에서 서로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정한 기한을 두고 벌어지는 이 자전축의 이동현상을 이집트인들은 시리우스 사이클이라고 불렀고 그 주기는 대략 1460년이다.

 

   고대사를 훑어보면 대략 천년에 한 번씩 대규모 민족이동이 일어나고 그 한 가운데는 수수께끼의 종족, 스키타이들이 버티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아니다! 기마민족이 모두 유목민족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들은 왜 옮겨야했을까. 그리고 왜 멈추었을까?
    만약, 만약! 그들 스스로 깨달은 지혜가 아니라면 그 고도의 지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는 남은 시간동안“역사인류”의 피안에 억겁으로 묻혀있는 이 발자욱을 찾아서 가야한다. 우리는 정말 어디에서 왔을까. 왜 칠성별(플레이아데스)인가. 왜 시리우스인가. 왜 오리온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억겁을 가르는 시공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는가.

 

 

 


명의 시간터널
   과연 문명은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최근 들어 이런 생각에 부쩍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첨단산업을 업종으로 삼는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 생활에 지장이 있다고 감각적으로 알아채면서도 이 화두는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종말이니 개벽이니 하면서 이 세상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많은 예측과 예언 앞에, 떨리고 두려운 자기 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망을 보고싶어하고 확실한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설”만 난무할 뿐 “방법론”은 없다.

 

    전편의 "문명론"에서 질려버리셨다면, 더 읽으실 필요는 없다. 나는 이 글에서 어지럽지만 방법론에 가까운 발상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미래를 보기 위해 과거로 가자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주문은 아닐테지만. 우리는 흔히 고대사를 생각할 때, 오늘날보다 덜떨어진 사회를 생각한다.
    우리가 영상매체를 통해 보는 것이 대부분, 불편해뵈는 옷가지나 촛불, 호롱불 등등에다, 세수는 비누로 하나? 이빨은 치약으로 닦나? 하는 일상사에 부딪치면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되는지... 거기다가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라는 시대구분과 “수렵-농경-산업-정보화 사회”라는 문명구분을 외우고나 면 정말 내가 사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 시절인지를 부득부득 외우지 않아도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우리가 실제로 살아온 세월만큼 “진보”나 “진화”의 모습을 확실히 잘 증명하는 것이 있는가.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발전하는 것이다. 누가 그걸 부정하는가. 세상은 더욱 살기 좋아진다. 이건 상식이다. 증명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진리다! 근데, 안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엔트로피”, “노동의 종말”의 저자 제레미 레프킨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먹을 과실이 떨어지고 수렵할 동물이 줄어들자 인류는 하는 수 없이 채집생활을 포기하고, 심고 기르는 농경사회로 갔다.

 

    인구의 증가로 농경사회를 지탱하기 힘들게 되자 이 사회도 해체되는데, 특히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에너지(주로 나 무)가 고갈되자 “나무”보다 훨씬 채집하기 힘든 “석탄”으로 가야만 했다. 석탄을 쓰려니 온갖 공해를 무릅쓰면서라도 효율있는, 필요한 기계를 만들어야 했다. 이제 우리는 석탄을 다 써버리고 훨씬 큰 채굴비용이 드는 석유마저 몽땅 다 써 버리는 에너지 고갈을 향해 대책없이 치닫고 있다.
    그 앞에는 위험성과 비용에 있어 과거와는 수치단위를 달리하는 원자력이 버티고 서있지만, 만만하게 이용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한번 써버린 에너지를 다시 쓸 수 있는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며 결국 이런 식으로 에너지는 사라진다.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보존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가 쓸 수 있는 모양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엔트로피 법칙, 열역학 제2법칙이다. 아주 최근까지 인류는, 지구의 에너지체계가 열역학 법칙중 제 1법칙의 지배만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업사회는 이런 착각을 몇십년만에 무너뜨렸다. 엄청난 공해의 위력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두번째 법칙을 기억하지 못할 뻔 했다.

 

    우리 지구가 닫힌 세계라는 점을 명심하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은 어김없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 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어떻게 진단하든 우리는 막대한 비용을 써야만 유지가 가능한 역사상 가장 “비효율적인” 시대를 살 고있다. 이처럼 문명의 진보 반대편에는 “자연의 몰락”,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퇴보가 숨어있는 셈이다. 결국 “진보”라는 문제는 객관이 아닌, 주관적 가치의 문제다.
    20년동안 폭탄테러를 자행하다가 몇 년 전 FBI에 붙들린 “유나바머”는 전직 대학교수(!)였던 문명 혐오론자였다. 그 가 주장하는 바는, 문명이 인간성을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한 번 “기술”에 물든 사람은 종(種)적 인간으로서의 순결을 잃어버리고 기계의 노예가 되고만다. 이제 그는 사람이 아니고 기계의 부속품이다. 그는 기계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기계가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점점 그 최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런 식의 인간성 말살은 자본의 힘이 획책하는 전세계적이고 거대한 음모이며 이대로 가면 인류사회 자체가 절망적인 파국에 이를 것이다. 인간성을 회복할 길은 “기계를 없애는 방법”뿐이다. 그래서 나는 “폭탄”으로 그 기술지상주의자들, 과학적 진보론자들을 응징한다. 멀지않은 장래에 이 문명은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위기에 처할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한 번 무너질 경우 절대 로 회복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엄청난 전문성이 필요한 이 과학기술 문명의 어느 한 축이 전쟁이나 재난으로 붕괴된다 면, 사람들이 살아남은들 어쩌겠는가? 동네사람이 모두 모인다한들 냉장고 한대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가?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나라도 설계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종적 능력으로 가능한 것은 기껏해야 낫과 도끼, 수레와 물레방아 정도가 최상급이다.

 

여   기까지가, 이 수공업 사회가, 자연의 한 축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당신들은 지금 인간이 아니라 기계의 부속품, 일종의 괴물이다. 진정으로 인간성을 회복하고 싶은 사람들이여, 단결하라! 때가 다가왔다!』 폭탄테러를 안하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뉴욕타임즈에 실었던 그의 논문에서 필자가 읽은 내용이다.
만약 여러분이 환경론자나 생태론자가 된다면 인류역사는 그야말로 퇴보의 역사다. 만약 여러분이 문명론자가 된다면 인류의 역사는 아직도 창창히 남은 진보의 역사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우주는 “그 무엇이 진보다”라는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그래서 감히 나는 인류의 역사를 진보와 퇴보가 공존하는 혼돈의 역사라고 부르고 싶다.

 

   현 시대의 이념은 무엇인가? 기술을 복잡하게 하고 일상의 편 리를 위해 온갖 기계를 만들어 일신이 안온해지면 행복은 오는가? 이런 이념으로 보아서 지금을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하는 것인가? 건강을 위협하는 문명질병과 삶의 기반을 침식하는 공해와 정신세계의 파탄은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하찮은 것들인가? 그만해두자.
진화의 방향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생각만 가지고 계실 수 있다면, 문명의 진보와 퇴보를 결정할 시각이 천 편일률적이지 않다는 점만 인정하실 수 있다면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데는 지장없다. 하지만 인류는 진화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으며 아무런 잘못이 없고 순결무구하며 영생발전하리라는 “신앙”을 가지신 분은 더 이상 고대사 X파일의 탐구잔치에 참여하실 필요가 없다.

 

   내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이야기가 아무런 재미도 없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신성모독”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대사를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보다 원시적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관찰을 시작한다. 우선 이것부터가 잘못이다.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규정할 수는 없다. 앞에서 보았듯 삶이란 것 자체가 하나의 유형은 아니다. 다만 우리와 같은 기계문명 을 그들이 가지지 못했다는 점, 우리와 같은 사회시스템을 그들이 영위하지 못했다는 점에 착안해 그들을 원시적이라고 본다면, 그 관점에는 동의하겠다. 그러나 관찰결과가 예상대로 나올까? 여기에 그 작은 사례가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발점으로 보이는 슈메르족(머리가 까만 직모이고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있다)은 메소포타미아 문 명의 셈족이 살기 전에 이 지역에 문명을 일으켰던 종족이다. 이들은 설형문자를 쓴 사람들로 유명하다. 추정연대로 치면 BC 3000년에서 BC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확인한 바로, 그들은 문자를 사용하고 학교가 있었으며, 직업을 상당히 세분화하고 기능도 다양했으며 빈부격차가 있었다. 행정가, 외교관, 사원관리자, 장교, 선장, 세무공무원, 성직자, 감독, 십장, 서기, 기록보관인, 회계인 등이 그들의 직업 이었고 학교에는 교수와 학생 외에 테스트 담당 조교수, 그림 담당 교직원, 수메르어 담당 교직원, 사감 등이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언제적 이야기하고 있는거야? 그게 BC 3000년이라고? 한웅시절이네? 그런게 어디에 적혀있나? 이것들은 슈메르 점토판, 즉 점토에 슈메르 글자로 기록하여 그것을 구워놓은 그들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뒤를 잇는 바빌로니아 지식의 대부분은 이전 종족이던 슈메르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은 천문학과 수학, 문학, 공학에 능했고 우리가 알고있는 상당히 현대적인 사회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신석기시대를 운운하는 시절에 이런 문명이 존재하는 것과 오늘날 기계문명이 원시림의 “야만부족”과 공존하는 것은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런 공존은 아무 문제도 없다. 우리만이 문명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일뿐 초고대문명의 존재는 인류역사 에 큰 누를 끼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착각에 상당히 큰 피해를 준다.

 

    인류사에 갑자기 나타난 이 문명은 그 존재를 의심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한 증거로 웅변하는 고대사의 미스테리 다. 이들은 지구라트와 점토판으로 그들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 기록은 수천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 우리의 교만함 앞 에 작은 화두를 던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기계? 이미 그 시절에 초박막 도금(아주 얇은 도금)을 할 수 있었다. 그 수준은? 오늘날보다 더 낫다! 이거야 유물이 남아있기에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있다. 고대사의 유물이란 그야말로 파편이다. 트로이를 신화로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은 슐리히만이라는 미친 작자가 술수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가멤논과 오딧세우스의 신화가 “사실”이었음을 증명해버렸다.

 

    땅 속 수백 척 속에 묻혀있던 고대의 흔적, 이것은 아주 운이 좋아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 고대사는 흔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실증할 수가 없다. 물론 설령 있다고 해도 우리는 슬쩍 치워버리거나 창고에 넣어버리고 잊어버린다. 그게 맘 편하다. 헷갈리게 하지마라 말이야...
    우리는 원시에서 진보하여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불과 삼사백년 전의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 뛰어난 문명이 있었고 자신들은 자꾸만 그 영민함과 오묘함을 잊어버리며 퇴보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끝 없이 요순시절을 그리워했던 동양과 한도 없이 에덴과 찬란한 황금시절, 그리스와 로마를 지향했던 서양의 르네상스가 왜 다르겠는가.

 

   불과 이백년전에야, “퇴보”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라는 계기로 촉발된 이 변화의 흐름은 결국 생각까지 바꾸었다. “세상은 점점 발전하는 것이다!” 다윈의 자연도태 진화론과 약육강식의 제국주의는 이 가설을 공식화하고 이념화하였다.
    세상을 진화시키자! 전쟁, 선교, 식민지, 개화, 근대화, 국제화, 과학기술혁명... 각양각색의 실천강령에 상관없 이 세상이 진화한다는 이 공식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사라졌다. 불과 사오백년전 유럽에서 일어났던 르네상스란, 아랍세계가 이어왔던 그리스-로마(헬레니즘)의 과학기술을 역수입하려 는 야무진 시도였다는 사실을 모두 잊어버리고, 근대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지구상에 나타난 최초의 문명인인양 행세하면서 그렇지 않은 증거들을 죄다 무시하기 시작했다.

 

    둥근 지구와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하던 천체의 운행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던 이집트와 그리스의 천문학과 수학은 “사라지고” 재발견자였던 코페르니쿠스와 캐플러가 교조로 등장했다. 이미 야자수를 인공수정으로 재배하던 슈메르 농학은 사라지고 멘델이 교조로 등장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죄다 무시해버렸다.
   1000톤이 넘는 돌(돌 한 조각이 천톤)로 세워진 레바논의 고대사원은 그냥 그랬겠지, 이집트 밸리신전에 사용된 200톤의 화강암은 통나무를 밑에 깔아 굴려서 지은거란다. 야 이사람아 통나무가 견뎌나겠니? 지진나겠다. 기자 피라미드의 돌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35개를 지을 수 있다는데, 바퀴도 없던 사람들이 통나무를 굴려서 지었다고? 여러분, 이런 말도 안되는 은폐작업을 “근대과학에 근거한 체계화”로 재구성한 다음, 오늘날 우리가 책에서 배우는 모든 과학기술이 근대서구가 일구어낸“과학”이라며 등장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쟌∼ 슈메르 사람들은 그들의 문자를 진흙판에 구워 새겨놓았다. 우리는 펄프와 CD-ROM을 자랑하며 이 원시문명의 현대적 (?) 사회제도를 기이한 불균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알아두시라, 방부처리한 종잇장은 백년을 채 못가며 CD-ROM은 몇 년 후에 컴퓨터가 바뀌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거나, 불이나 아주 약한 방사능으로도 싸그리 지워질 수 있다.
그래서 아마 더 오래 후에, 사람들은 AD 20세기보다는 BC 30세기의 슈메르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전기(電氣)라도 나가면 아마 볼만할거야...(감옥에서 유나바머가)

명의 시공터널
    금연(禁煙)이라면 당연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금,禁. 금지를 뜻하는 이 글자는 중국, 일본, 한국을 통틀어 표지판에 가장 잘쓰는 글자이기도 하다. 우리 풍속에도 아이를 낳으면 금줄을 드리워서 출입을 막는다.
    그런데, 이 글자를 풀어보면 나무 목(木)자 두개에 볼 시(示)다. 나무목이 둘이면 수풀림이니 숲을 보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무슨 이유에서 금(禁)자는 이렇게 생겼을까? 19세기 말엽, 청나라로 파견된 선교사들은 본토인들 중 영어가 가능한 사람들을 뽑아 중국말로 성경을 가르치도록 지도했다. 그런데, 그들이 가만 보니 이 중국사람들은 성경 이야기를 자신들의 글자를 예로 들어 설명하더란 말이다. 선교사들이 가만 뜯어보니 이런 식이었다.

 

   “에덴 동산 가운데에는 나무가 둘이 있었어요, 林.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였는데, 이건 절대로 보지(示)말라고 했어요. 두 그루의 나무를 보는 것은, 그래서 해서는 안되는(禁) 거죠.” 자신들의 글자의 유래와 히브리 구약의 이야기를 동일시하는 이 방식은 낯선 이방의 이야기라는 거부감을 상쇄시키는 아주 멋진 효과를 가진 설교방법이었다.
   비단 이 글자만이 아니었다. 약간의 은유와 해석을 더하면 많은 글자를 구약과 대비시켜 설명할 수 있었다. 특히 에덴동산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런 엉뚱할 듯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많은 글자가 있었다. 楚(고초)의 옛글자는 나무 사이에 사람이 손을 뻗고있는 형상이며 수풀림 林 아래 여자 女가 있는 글자는 탐할 람자다.
큰 배를 뜻하는 선(船)자는 어떤가? 배(舟) 안에 여덟(八)명의 사람(口)이 있는데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이 여덟이었다.(노아와 세 아들 부부) 마귀(魔)는 또 어떤가? 여기도 두 나무 아래 걸어다니는 악마다. 만들다는 조(造)는 흙으로 무언가 빚어 입이 생기고 걸어다닌다는 의미다.
    이런 글자가 한 둘이 아닌데,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그나저나 고대사 X파일이 드디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다다랐다! 귀신 씨나락 안까먹는 초현대 이야기를 해보자.

 

     잠실 북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그 서쪽에 남에서 북으로 탄천이 흐른다. 근데 한 70년 전에는 북쪽의 한강이 지류고 탄천이 한강의 본류였다! 뭣이? 정말? 음! 한강본류는 잠실운동장 북쪽이 아니고 지금의 가락농수산물 도매시장 북쪽을 흘렀다. 따라서 이 때만해도 잠실과 신천동은 섬이었다! 1927년부터 두 해에 걸쳐 대홍수가 나고 토사가 밀어닥쳐 이 본류를 막아버렸다. 그때부터 지금의 잠실북쪽이 한강 본류가 되었다. 그 때 밀어닥친 토사에 밀리고 밀려서 인조가 청나라에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선서를 했다는 삼전도마저 땅이 되어버렸다.(송파구 삼전동)
    토사가 밀려들어 그 북쪽에는 움푹 팬 땅에 물이 고였으니 이게 바로 석촌호수다. 한 때 이 석촌호수는 모기들의 천국이어서 묻어버릴려고도 했다. 근데 호수를 흙으로 묻어 그 땅을 팔아도 매립비용이 안나오더란다.(70년대) 그러다가 강남 개발 붐을 타고 땅값이 올랐다. 그래서 정부가 한몫 벌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주민들이 이 좋은 환경을 왜 망치려드냐고 결사반대했다.(80년대) 그래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연못이 바로 석촌호수다. 우습지? 강산이 변한다는 게...
아마 한 십년 후면 누가 너섬(여의도)이나 뚝섬이 그 옛날 서울 사람들이 물놀이 다니던 섬이었다고 생각할 것인가.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고 늘 생각은 하지만, 우린 참 어리석다. 홍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홍수하면 노아의 방주 아닌가.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 얼마만큼은 그게 사실이겠냐고 하는게 바로 구약이다. 예수라는 성인이 있었던 신약은 인정하겠는데, 흙으로 사람을 만들질 않나, 갈비뼈로 여자를 뽑아내질 않나, 뭐 어째? 홍수가 났는데 지상의 동물들을 배에 다 태워서 종자를 보존하고, 그래도 모자라 바벨탑을 쌓고, 벼락맞아서 언어가 갈라지고...
그리스 신화처럼 재미도 없는 것이 황당한 이야기만 늘어놓는구만, 하기야 삼황오제 신화에도 여와가 흙으로 사람을 빚어 굽는데 너무 타서 흑인, 너무 설익어서 백인, 적당히 익혀서 황인종이 되었다는 재미난 “전설”은 있더랬지...

 

   그러나 앞선 X파일에서 말했듯 문화라는 것이 하나의 흉내내기라면 전설이나 신화는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분명히 있었던 그 무언가에 대한 반영이다. 이것은 고도의 추상이나 비유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전설을 기록하는 시대의 사람들은 현대사회가 생각할 수 있는 관념이나 은유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확신한다. 출애굽기(이집트 탈출기)에 나오는 불기둥, 일시에 사람을 태워죽일 수 있는 강력한 무기, 애스겔서에 나오는 천사가 앉아있던 거대한 “기계”모양의 탈것(동물처럼 묘사함)은 분명 당시 이것들을 목격하고 기록했던 인류의 문명 발달단계와는 거리가 먼,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영화 “스타게이트”의 상상력은 거기서 가져온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도 아마 그런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성경과 관련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주로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이라면 이런 과거를 대충 사실로 믿고 있을테고, 아닌 사람에게는 남일이지만, 최근 20여년에 걸친 지질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이 홍수는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광범위하거나 국지적인 여러번에 걸친 대홍수의 흔적이 전세계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홍수의 전설은 원래 히브리족의 구약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에 전승되어온 기본 텍스트는 메소포타미아 전설이다. 그 중에서도 슈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전설이야말로 문헌상으로 기록된 최초의 홍수기록이다.
이 기록을 잠시 요약해보자. 바빌로니아판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설화다. 『45만년전에 하늘에서 신들이 강림하였다. 이들을 아눈나키(Anunaki)라고 불렀으며 하늘(An)에서 땅(Ki)으로 온 자들이다. 이 신의 무리중 주신의 이름은 아누(Annu)였고 그는 하늘에 머물렀다. 그의 아들인 엔릴과 엔키가 지상을 다스렸다. 먼저 엔키가 그의 부하들과 내려왔으며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과 광업을 일으켰다. 이들이 지상에 내려와 직접 노동을 하며 문명을 건설하자 엔릴이 내려와 본격적으로 지상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엔키는 바다와 하계의 신이 되었다.

 

    그러던 중 아눈나키들은 과도한 노동에 불만을 품어 반역을 일으켰다. 엔릴과 엔키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을 위해 필요한 “어떤 것”을 만들기로 했다. 반란의 주동자를 재료로 삼아 흙을 섞어 “인간”을 창조했다.
    목표대로 인류를 완성시켜 노동에 활용하자 아눈나키들의 불만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인간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아눈나키중에서는 인간과 교접하여 피를 섞는자 마저 나타났다.
    중요한 몇몇 기술을 인간들이 알아내는 사고마저 생겼다. 이러자 엔릴은 인류의 수를 줄이기로 했다. 처음에는 기근을 일으켰다. 그 다음으로 엔릴은 대홍수를 일으켜 지상의 사람들을 멸절시켰다. 홍수가 끝난 후 지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전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메소포타미아, 정확히 슈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전설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약간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로 구약의 그것과 모티브가 닮아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전승이 히브리 신화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더해 히브리 족이 조상으로 섬기는 인물인 아브람(아브라함)은 슈메르 문명의 본거지인 칼대아-우르 지방출신이다.
   그의 일족이 여기서 출발해 가나안으로 갔으며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꾼 이 “선택받은 자”의 아들이 바로 오늘날 아랍과 히브리(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구약에 나와있는 홍수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같은 전승을 다른 민족적 입장에서 다르게 서술한 것일뿐, 동일한 고대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전승은 아메리카 인디언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내용만 틀릴뿐 모티브가 거의 똑같다. 대홍수는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사실”이었다. 슈메르의 주신은 아누(Annu), 최고의 신을 뜻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말이 우리말의 하느님과 닮았다. “하느”님 이란 말에서 “하(아)”가 뜻하는 것이 하늘과 위와 남성적인 것이라면 “느”가 뜻하는 것은 땅, 아래, 여성적인 것이다.(누리(땅), 누이(누나) 같은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고 며느리, 마누라도 이 어원에서 나온, 여자를 지칭하는 말)
하느님이라는 말은 양성을 모두 지칭하는 뜻인 셈이다. 아(하) - 누(느)! 슈메르어로 안이란 하늘을 말한다. 이것이 동쪽으로 오면서 “한”“칸”으로 바뀐다. 하지만 “아누”는 “하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사용했던 12궁도와 우리의 12간지, 60진법과 60천간, 흑해/홍해와 황해의 오행흔적, 한단고기의 한인 12국에 묘사된 수밀이(須密爾)와 슈메르, 이들이 우리와 관계가 분명히 있다는 심증은 확실하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나타난 아카드 문명이 그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와 힛타이트, 박트리아, 페르샤 등등으로 연결되는데 반해 찬란한 슈메르 문명은 후계를 잃어버린, 바람같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문명”은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 취급을 받지만, 역사적으로 분명히 바빌로니아-그리스-동로마-아랍(오스만투르크 등)-서유럽 르네상스로 그 계보를 잇는다.
    일단 초고대사로 발을 들여놓으면 이 정도의 문제는 별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가 나온김에 잠시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나열해볼까? 혹자는 고대의 건축물이 돌무더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건축물들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건축하기가 간단하지 않은, 매우 정교한 것들이다.
이런 건축물들은 대홍수로 휩쓸려간 여러 유물들과는 달리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남아 과거를 증언하고 있다. 도대체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단적으로 말해서, 기자의 피라밋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다.

 

   스핑크스 신전에 쓰인 가장 큰 화강암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는 기중기로도 들 수 없다. 그 무겁고 큰 암석을 채굴해 깍아내고 한반도 길이에 해당하는 거리를 옮긴다? 사람의 힘으로? 통나무를 아래에 깔아 굴리면서?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정통 고대사학자들은 최근들어 불리한 증거들이 속출하자 몇천년에 걸쳐 건설한 것이 아니겠냐고 한다. 천년씩 만년씩 일관성있게 추진되는 건축 프로젝트? 이거야말로 공상과학이다. 기자 피라미드에서 출토된 항아리들은 이집트에서 가장 단단한 돌인 현무암, 단암 등으로 만든 돌도자기다. 아시겠는가? 쇠보다 더 단단한 암석을 깎아 속을 파낸 항아리란 말씀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흙을 빚어 구운 도자기가 아니라 죄다 돌로 만든 것들이다. 이걸 손으로 깎아? 돌을 손으로 깎아서 두께 5㎜ 항아리를 만들어? 한 두개도 아니고 똑같은 크기의 것을 수십수백개도 아니고 몇 만개나?
거기다 귀퉁이에 손잡이용 실을 끼우는 구멍은 직경이 3㎜에 길이가 10㎝다. 이건 불가능하다. 오늘날 어떤 기술을 동원하더라도 이루어낼 수 없다. 사실인지 아닌지 기술자에게 물어보시라. 아직 레이저 기술로도 이런 구멍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항아리들은 강력한 강도를 가진 도구로 선반작업을 해도 흠집을 내지 못하는 유물들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박막 금도금이나 고대 그리스의 증기기관, 세차계산용 구리제 톱니시계 등등 이런 사례를 들라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학계의 공식적인 해명은 “노코멘트”다. 우리는 도대체 무얼 배우고 있는가? 구석기에서 신석기? 우습다.
    모든 금속에 金자가 붙는 이유가 뭔지 아시는가? 맨처음 사용한 금속은 금이었다. 돌멩이가 아니시다. 금처럼 요리하기 편한 금속이 있던가? 그 다음이 은이다. 그러고도 안되니 구리와 주석이고 합금이다. 거꾸로 배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미개에서 문명으로 발전한 결과여야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라면? 뒤집어진다. 그레이엄 행콕이라는 사람이 멋들어지게 문학화한 “신의 지문”에는 초고대의 지도가 나온다. 행콕은 “좀 이상하다 그치”에서 그치고 있지만, 16세기의 아랍에서 나온 이 지도는 이미 오랜 옛날에 시간을 측정하고 경도를 재는 과학과 기술이 있었다는 점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대에 관해서는 까막눈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증명한다.

 

    몇 번의 문명이 일어서고 주저앉기를 반복했을까? 우리가 처음은 아니라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앞에 두고 우리는 이것을 어떤 “교훈”으로 해석해야하는가? 필자가 찾아가는 종착지 “아리랑”역은 아직 먼 듯싶은데, 드디어 아무런 정보가 없는 “진짜 상상력 지대”에 도달해버렸다.
   여기서 아무리 슈메르인들의 “아누”와 우리 말 “하느”가 비슷하대봤자 이제 독자들의 상상력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얽매이지 않으실게 분명하다. 내가 진도를 너무 나간거다.
   이런 것들은 단지 에피소드일 뿐인가?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그게 아니라면 또다른 레이더스를 기다리는 어마어마한, 깊고깊은 시간정지대, 진정한 고대사 X파일인가...

 

 


명의 스타게이트
   독자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나는 박씨 성을 가졌다. 멀리 거슬러 가봐야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씨족이다.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신라에 불교를 공인시키는 대가로 죽음을 당한 이차돈도 사실 박씨다. 이차돈이 이씨지 왜 박씨냐고? 이차돈의 “이”자는 다를 이(異)를 쓴다. 김용옥 선생의 풀이대로라면 이 이두문자를 풀어써서 “박 고슴도치” 정도의 이름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얼마나 재미없는 역사를 배웠는지 이것만 봐도 안다. 어쨌거나 그토록 오랜 옛날부터 성씨를 가졌다는 것은 강력한 씨족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인데, 박혁거세 신화는 비록 규모가 단군신화에는 못미치지만 “대단한” 아이디어(?)다.

 

   단군이 하늘님의 아들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는 반면, 혁거세는 아예 알에서 태어난다! 하늘을 나는 말을 타고 올라가고, 몸이 여러조각 나고, 이를 다시 붙이고 하는 신화의 형태는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와 비슷하다. 이런 형식의 신화는 세계공통이다.
    어쨌거나 알에서 태어나는 이 형식은 계속 반복사용(?)되는데,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도 알에서 난다.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저번 X파일에서 보듯, 일종의 “특수종족”을 상징하는 것은 확실한데, 실제로 이것이 어떤 모습의 “혈통계승”의식인지 도대체 감 잡기가 힘들다. 하긴 따지고보면 감 잡을만한 게 그리 많지도 않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는 이 시시한(!) 주제는 질리게 나온다. 히브리 구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예 집단적인 결혼을 행한다. 거기서 태어나는 아해들이 바로 거인족(네피림)이라고 적혀있다.
    이집트 신화에서 하늘의 남신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티탄(거인)족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단군신화도 바로 그 전형에 속한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건 거짓이 아니다.
    독자 여러분은 혹시 이 원시족속들이 이런 일들을 기록할 때 왜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했는지 아시는가? 필자는 산에서 내려오거나 땅으로 걸어온 사람들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꾸며서” 표현할 정도로 다양하고 찬란한 비유의 문학적 소질을 그들이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일 거라고 추정(!)한다. 하늘이 신성하니까? 신성은 누구에게 배웠나? 벼락이 치고 비가 오는 것이 하늘이니까? 그럼 산사태는 안무섭고 지진은 안무섭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결국 두려운 것을 신앙한다는 모호한 결론에 이른다.
    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용납 못하실 독자들도 계시겠지만, 고대인들이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한 번 믿어보자. 아무런 편견없이, 비록 서툴더라도 묘사하는 그 자체를 사실로 인정해보고 들어가자는 말이다.
    우리가 정한 방법론이나 선입견이나 이론을 배제한 채! 그렇게 보면 이 신화의 세계는 즐거움으로 가득차있다. 산해경에 출현하는 그 많은 동물들, 반인반수의 괴인들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고대인들이 기록하려면 그런 방법밖에 더 있겠는가. 머리는 원숭이같고 꼬리는 황새같고 사슴같은 뿔이 달렸으며 몸은 염소의 그것과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게 정말 무언지는 모르지만 이 표현법은 모든 신화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유럽 설화에 출현하는 트롤(꼬마요정)은 실제로 존재하는 부족이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이 소인족은 실제로 무리를 이루어 살다가 18세기 이후 외부침략으로 와해되었고 학살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곡마단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이 요정의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탕으로 부풀려지고 감정이입된 아주 그럴싸한 “이야기화”과정을 보여준다.
    우리 쪽으로 오면 도깨비도 마찬가지다. 도깨비의 전형은 군신으로 널리 숭앙받는 치우한웅이다. 그 마스크는 머리가 청동으로 되어있고 뿔이 났다는 고대기록과 일치한다.

 

    이런 형상은 각 종족의 상상력에 힘입어 많은 이야기로, 많은 조각으로, 많은 문양으로 발전하고 후세의 우리들은 실물보다는 그 상징과 전형만을 본다. 우리는 실제보다 그 형상의 의미가 더 관심있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한 번도 그 신화나 설화에 나온 것을 실제로 형상화해보려 하지 않았던 셈이다.
    아예 처음부터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들어갔다. 용이란 정말로 존재했는지, 용왕은 무엇인지, 왜 알에서 태어나는지, 왜 하늘에서 내려오는지, 왜 인간의 딸들과 교접하는지, 우리는 사실 자체를 물어보기 전에 그 말같잖은 사실들을 우리의 의식과 지성으로 이해하기 위한 “틀”부터 세운다.

 

    그러나 고대사, 더 나아가 초 고대사는 우리의 얄팍한 우월의식으로 재단하기에 그 시공의 깊고 넓음이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인류는 기껏해야 몇 백년의 실천으로 현재의 지성을 이루었다. 이 지성이 존재하는 최고의 것이라는 믿음마저 그 지성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면 어쩌란 건가! 특별한 방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대의 것이 분명한 침술이 우리의 과학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그들의 명상법과 자연조화 패러다임이 미래의 전형으로 추앙받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먼 옛날에서 발전과 진보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주장은 분명히 철회해야한다.

 

    비과학적? 아니다. 우리의 과학이란 불과 몇 십년전만해도 태양흑점과 지구기상과의 관계를 몰랐다. 마야에서는 아예 시계로 만들어놓고 주기를 계산하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알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의 아들과 결혼을 해서 낳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들은 혈통을 보존하고자 했고 그래서 황실과 왕실을 지어내고 이를 보존하려 했다.
   그들은 사람과 분명히 다르다는 일관된 주장이었다. 정말 그랬을까? 정말 그랬다. 주로 신들의 모습(!)은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종족들이었다. 말 안해도 알다시피 오늘날의 백인종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면서 아즈텍을 떠난 케찰코아틀이라는 신을 믿던 인디오들은 스페인의 학살자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채 찬란한 누백년의 문화를 내어주고 학살의 언덕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까만 머리 종족 슈메르의 경우도 다르지는 않다. 그들은 신의 형상을 새겨놓았으며 특히 신의 눈동자에는 파란 보석을 박아놓았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파란눈의 백인들은 초 고대에도 지금처럼 후진국을 쥐어누르던 신적인 존재였을까? 그래서 이런 것들이 남은 것일까? 그래서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들은 그 핏줄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처절한 골육의 장벽을 쌓았던 것일까?
   전설의 뮤우대륙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제임스 처치워드가 발견한 “얼굴이 하얀 신”의 설화는 고대민족들에게 공통적인 것이었다. 이집트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파란눈의 신은 아주 보편적인 개념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인종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은 마빈 해리스의 “작은인간”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완벽한 백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지의 소산이다. 까만 피부의 흑인종이 오히려 더 많은 코카서스 백인종의 DNA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한때 북방의 백인이었을 수도 있고 한 때 남방의 흑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인종문제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찾고싶었던 것은 우리가 어떤 인종이었느냐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는가 였다. 왜 우리 조상중 특정인들은 자신들을 “아리랑”으로 연결시키며 그 혈통을 보존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을까.

 

    왜 그들은 천신의 자손이었던 자신들의 과거를 지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을까. 여기서 필자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고대의 우리 종족은 분명 초고대문명이 말하는 “신”들과 관계가 있다.
   우리의 오랜 조상은 곧바로 “신”들은 아니겠지만 분명 “신”의 피를 이어받은 “신의 아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인류들처럼 여러 가지 방법을 택해 그 적통을 계승하고 지키려 했다.

 

   해모수의 호령거나 박혁거세의 난생묘사는 이런 적통잇기가 한 나라를 일으키는 것과 동일한 가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이러한 우리 배달의 조상들이 자신을 “아리랑”족으로 부르며 그 적통을 주장해오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이 적통잇기의 문화는 “세속적 권력”잇기의 모습으로 문명적 전환을 이룩한다.
    이제 적통을 뒷받침하는 것은 실제로 나타나는 신들이 아니라 정치적 사상과 철학적 관념, 종교적 의례다. 기가 막히게 유대(이스라엘)에서 야훼의 간섭이 없어지는 시점과 중동, 아시아에서 신화적 전설이 사라지는 시점이 일치한다.

 

    이거 뭔가 있다! 특정 종족이 과거 “신”이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그들을 신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도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문명을 건설하고 인류를 다스린다는 신화가 도대체 어떤 사실을 설명하는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이 나는 필요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상상력을 완전히 비약시킨다. 인류의 문명수준과 판이하게 다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 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인도의 고대경전인 리그 베다에는 이미 수만년 전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계를 타고다니며 불을 뿜으며 날아가 작열하는 거대한 화살을 사용하는 신들의 전쟁이 묘사되어 있다.
    모헨조다로라는 유적은 고대어로 “시체들의 언덕”이다. 여기는 엄청난 충격에 의해 사지가 비틀린 채 화석이 되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다. 또한 엄청난 방사선으로 주위의 유적과 맞지 않는 엉터리 탄소측정 연대가 검측된다.

 

   경전에 나온 그대로 버섯구름을 뿜어내는 무서운 화살이 떨어진 자리다. 그들은 케루빔과 불칼로 에덴동산을 지키기도 하며(구약 창세기), 대홍수를 피해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고(슈메르점토판), 인류에게 지혜의 상징인 불을 가져다 주기도 하며(그리스신화 프로메테우스), 핵무기로 전쟁을 하기도 하고(리그 베다), 산 위에 1°도 어긋나지 않는 거대한 직선도로를 건설하기도 하며(안데스 유적), 대홍수에도 끄덕않는 반영구적 구조물을 세우기도 하고(기자 피라밋), 캡슐을 통해 적통을 계승할 우주아이를 내려보내기도 하며(박혁거세), 흙으로 사람을 빚어 창조하기도 한다(삼황오제의 여와).

 

    우리 인류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껏 우리의 연원을 찾아 줄기차게 달려왔지만, 막상 고대에 이르자 “우리”라는 의미가 흐느적거리더니 이제 “우리 인류”로 둔갑해버렸다. 우리가 찾던 정통성의 유산은 알 수 없는 신화 속으로 사라져 우리 이성의 판단과는 궤적을 달리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의 저쪽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이 신의 아들이 우리의 직계조상이라고 선언하고 말텐가? 속상하게도, 신이라 불렀던 존재들이 백인이었으니 모른 척 입다물고 말 것인가?

 

    고대인의 상상과 환상수준이 오늘날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고 감탄하며, 박창규의 주장이 말같잖다고 웃고 말텐가? 나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와서 계속 고대사 X파일을 주장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도 말도 안된다. 이미 나의 이야기는 고대사를 건너와 불가사의의 세계에서 발을 구르며 공룡을 부르고 있다. 발을 구르다보면 어떤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반대로 벌써 해답은 나왔는지도 모른다.
    우리인류는 서구사회의 기준으로 불과 400년전만 해도 지구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태양과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돌며, 지구는 평평하고 먼 바다로 나가면 절벽으로 추락하고 거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믿고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들보다 이성적이고 그들보다 지성적이고 그들보다 합리적이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나 바닷가의 조약돌 하나를 들고 좋아하는 어린 아이같다고 자신의 발견을 표현하던 아인쉬타인의 겸손을 손톱 끝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은 쥐뿔도 없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과거는 다르다. 과거를 향한 오만한 시선을 거두고, 우리보다 더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고대를 재평가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몇 가지는 풀 수 있다. 이것은 당장 필요한 공학기술 몇 가지에 얽힌 문제가 아니라, 우주와 인간을 대하는 우리의 총체적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이다.
이런 태도만 갖는다면 고대사에 X파일이란 없다. 우스꽝스럽게 우리조상 잘났다고 말타고 달리지 않아도 된다.
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 또다른 모헨조다로의 화석으로 남아 길이길이 빛나리라.

 

 

 


대사 X파일을 끝내며
    10월3일이면 개천절이고, 개천절날마다 우리는 신문과 TV에서 단군영정을 본다. 해마다 보는데, 왜 단군께서는 상투가 없을까? 상투가 아니라 머리띠를 한 것같은그 머리는 도대체 무슨 헤어스타일인가? 그때는 상투가 없었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러나 자세히 보라, 정말 답답한 생각을 풀어버리고 자세히 보면, 머리색깔만 다르지, 그리스 신들의 조각상에 나오는 머리, 메소포따미아 조각상, 슈메르 조각상에 나오는 그 머리다!! 아닌가? 지금 당장 서점으로 뛰쳐나가서 확인해보라!! ... 울 어머니 왈, 이기 무신 소리고? 돈 되는거 좀 하그라, 으이?...
우리 집에 있는 종이 피라밋은 교보문고 뒤에 있는 정신세계사 문고에서 산 삼천원짜리지만, 지난 1년동안 최소한 2만원은 벌어주었다. 나는 지난 14개월간 면도날을 여기 넣어두고, 쓰고있다! 길어야 한달만 쓰면 수염을 쥐어뜯어서 갈아치워야했던 쉬크울트라 면도날을, 나는 14개월동안 쓰고있다. 하긴 체코에서는 실용신안 특허로 이런 장치가 등록되어있단다.

 

   우린 어릴적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에서 죽도록 읽어놓고도 이런 “짓” 하면, 어른들이 감히 가만 놔두질 않아서 끝까지 가본 적이 없었지. 그러다보니 그런걸 언제든지 재탕해도 기사가 된다.
   그래서 모래 위에 누각을 쌓고 ‘한강의 기적’이라며 좋아하다가, 그 누각이 바스라지자, 이제는 누구, 어떤 놈이 그랬어! 라며 다 니탓이란다. 우리 모두의 책임은 좋은 말로 내 책임은 하나도 없다는 뜻 아닌가...

 

   치아라 고대사X파일에 왠 현대사를 씹어뭉개나..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지만, 나는 X파일을 매우 싫어한다. X파일 영화야 재미있지만, X파일이라며 등장하는 비밀스러운 그 무엇은, 깨끗하고 밝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권력의 냄새가 잔뜩 묻은 음흉한 그 무엇이, 우리가 당연히 알아야할 그 무언가를 감추고, 그 감춘 것을 파헤쳐내는 손길 위에 칼침을 놓으려 드는” 그런 이미지다. FBI나 CIA의 것도 그렇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X파일도, X파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추정”하는 문서들은 신비스러움보다는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왜 나는 나의 글에 X파일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독자여러분이 내 글에 대해 연상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완강히 부인하기에는 무언가 찝찝한, 그런 진실에 대해 필자가 완강히 저항한다는 뜻이다. 물론 박창규가 이런 글 쓴다고 안기부에서 잡아가지는 않겠지만, 내가 대항했던 것은 “상식”이라는 너무나 거대한 편견의 힘이었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증거라는 명함을 달고 유명인사의 말이라는 간판까지 내걸어야 가능한 “상식”은, 알고보면 전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 인류는 상당히 심각한 편견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다.

 

   학교교육이 그런 편견을 “정규적으로” 재생산한다. 나의 정신적 스승인 라즈니쉬 말대로, 세상에 모조리 미친 놈만 있고 단 하나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놈이 바로 미친 놈이다.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쓸 수 있을런지 감잡기 힘들었던 이 글의 제목에 X자를 붙여버린 것이다.
   누군가 주먹을 쥐고 X파일을 뒤지는 내 얼굴을 패지는 않겠지만, “이런 정신나간 놈을 보겠나”, “평소에도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 사냐”, “돈 되는 거나 좀 파라” 등등의 무언의 분위기는 짬을 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필자를 완전히 눌러버리는 바위덩어리다. 그래서 주저주저 했다. 그러나 처음의 생각과는 반대로 나는 이 글을 쓰며 무척 행복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끝났을 이 행보가 지금 와서 보면 무척 대견하다. 술안주로 글을 쓰는 이 무모한 시도는 의외로 스스로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처음에 우리 민족의 연원을 따져보려고 출발했던 이 글은 우리종족의 연원과 인류의 고대사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주장에 내다르고 싶었지만,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조금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느낌과 함께, 그런 이야기 어디선가 한 번 들은 적이 있다는 정도의 인상만 남긴채 여기서 마무리해야할 모양이다. 글을 쓰면서도 필자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을 뿐,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는 열외의식으로 일관했다. 한마디로 심각한 것은 남들이 해주기를 바라는 얌체속성이다. 물론 그 핑계로 나야 그저 “회사원에, 곁눈질로 배우는 사람”이라는 자기정체성을 항상 들이민다.
우리의 문제다. 우리는 우리 문제를 누군가 풀어주겠지, 하며 오늘도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아질 것인가를 고민한다. 우리가 그러는 한 대통령이 누가 되든 아무 소용없고, 정치인들 욕해보았자 누워서 침뱉기다. 이 글들을 쓰는데 활용한 책만해도 30권에 달한다. 내가 알고있는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거의 다 건드렸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는 않다.

 

   잘난 척 해보려고 도전했다가 아는 것이 바닥난 이 허탈함, 술 자리 안주로는 무궁무진하지만, 글로 쓰면 이렇게 금방 목마를, 건성으로 아는, 부실한 모래 위의 누각들... 그나마 애써서 썼다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아니라서 들쭉날쭉, 헷갈리셨을 것이다. 내 글을 읽고 정연한 논리가 들어온다면, 그분은 앞으로 나와 같이 술 마시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있는 책들은 아주 과학적인 근거를 대는 책에서부터 황당한 주장에 불과한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지만, 나는 편견없이 이 책들을 대한다. 미친 소리를 꿈으로 분류하고 사실성있는 정보를 생시로 구분하면 그만이다. 꿈과 생시는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의 양면이다. 꿈이라고 해서 무시할 필요는 없다.

 

   고대사 X파일을 계기로 필자는 이제 더 넓은 방면으로 이 분야를 파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더 들어간댔자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다. 거기에는 드디어 UFO와 심령학과 정신세계가 나오는데, 나는 이 분야에 대해서는 “실제체험”이 관심있지, 연구는 별로다. 이상이 필자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겠지만, 아마 술자리에서의 일일테다. 고대사 X파일을 통해 우리는 한국사에서 동아시아, 넓게는 유라시아를 건너 이집트와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와 슈메르까지, 시간의 영역도 천년 전에서 수만년 전까지 오고갔다. 이 연재물의 제목이 “한국고대사 X파일”이 아니고 그냥 고대사였던 것은, 처음부터 이런 여정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종족의 고대사를 빌려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변하지 않는 주제가 있다면, 진실에 대한 탐구와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자는 호소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이 좁고좁은 영역에 가두지 말자. 우리 시대를 그 속에 가두려는 바보짓을 그만두자. 우리는 그런 식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열려있는 마음이 영원한 시간과 억겁의 공간의 품으로 우리를 이끈다.
언제나 그랬던 저 먼 옛날부터...

 

 


대사 X-파일 ... (뒷풀이)
    그동안 고대사 X-파일에 보내주신 여러분의 성원과 격려 그리고 관심에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회가 연재되고 난후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고 수고했다는 말로 격려해주신데 대하여 또한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렇게 기쁨마음으로 연재를 마치게 해주신 여러분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의 앞날에 좋은일들 있으시길 바랍니다.
   많은분들이 고대사 X-파일에서 참고한 문헌에 대한 문의를 해오셔서 원저자인 박창규님의 답변을 올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이미 1년이 지난 지난해의 글들이라, 문헌의 종류나 폭도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그 글을 쓰는데 참고한 책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요. 그 후로 저는 유니텔 역사연구회(HRG)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고, 한국고대사보다는 초고대사쪽으로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어서 한국고대사 쪽은 별로 늘어난 문헌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질의해오신 내용에 대답은 해야겠죠. 우선,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정확한 방향을 드릴 수 있습니다. 집중 연구인가, 아니면 입문용인가, 취미삼아 읽으실 것인지, 아니면 재미있는 책을 원하시는지 등등이죠.
   이런 의도에 따라 때로는 이현세의 만화에서부터 한문으로만 된 난해한 책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택 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질의하신 것은, 그쪽 계통으로는 독서경험이 많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아님 죄송) 따라서 쉬운 책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군요. 우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는 박현 교수의 책을 권합니다. 박현 교수는 고대 사학과 출신으로, 이런 류의 재야사학을 이끄는 신진부류라고 할 수 있고, 쉬운 저작을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 -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두산동아) - 한국 고대지성사 산책 (백산서당) - 백문백답 한국사 산책 (백산서당) 책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전혀 어렵지 않게, 간략한 문체로 여러 단원을 이어붙인 내용입니다.

 

   부담없이 쉽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관심이 생기시면 필요분야로 들어가시면 되는 거죠. 저는 체계적인 독서보다는 잡학스타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아이디어가 꼭 역사책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김용옥의 저서나 한국문화에 대한 저서들, 문화인류학, 미스테리, UFO 등등 종류는 아주 많습니다. 저는 이런 연결을 통해 박혁거세나 김알지의 신화가 한반도가 아닌, 실크로드 상의 일이며, 외계인 또는 초고대문명인이 유입되는 사실의 신화화라고 굳게 믿고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신의 지문’같은 초고대문명 해설이나 신화해설도 섭렵해야하는거죠.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한국고대사의 새 지평을 연 건 단재 신채호입니다. ‘조선상고사’라는 불후의 명작을 통해 조선사 연구의 새 지평을 열어제꼈고, 고려의 김부식 이후 줄기차게 주리를 틀어 온 식민사관, 사대사관을 올곧은 주체사관(김일성것이 아닙니다)으로 대체한 첫 인물입니다.
   불행하게도 신채호의 저서는 단행본으로 그럴 듯하게 나온 것이 없고, 기념사업회에서 출간한 전집이 존재합니다. 그것도 구하기가 쉽지 않죠. 따라서 조선상고사를 구한다는 것도 어렵고, 한자가 많은 그 책을 읽는 것도 어려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서면, 좀 힘들어도 조선상고사를 찾아 읽으면 됩니다. 책값이 좀 비싸죠 두 권인데 한 권에 만원입니다. 대부분의 재야사학자들, 특히 고대사 연구자들의 출발이 바로 신채호입니다. 신채호의 학설을 그들이 지지하지는 않지만, 신채호의 책을 통해‘깨는’ 경험을 하므로, 교과서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조금은 허술한 듯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읽는 것입니다.
   요즘은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소설화하는 작업도 많이 있습니다. 오래된 소설중에는 박문기가 쓴 ‘대동이’가 있고, 한겨레신문사에서 출간한 ‘짐은 이것을 역사라 부르리라’라는 책도 있습니 다. 이 책은 진시왕의 이야기인데,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김병호라는 사람도 줄기차게 우리 민족이 남방계라는 설을 주장하다가 최근에 남방문화에 관한 책과 고구려 장군 이정기가 당나라에 세웠다는 나라에 관한 소설도 썼습니다. 책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군요. 전 소설은 안읽는 편입니다. 김병호씨가 나오면 좀 색다른 맛이 드는데, 이 사람의 작업도 이채롭습니다. 서점에가서 김병호의 책을 검색하시면 재미있는 책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읽은 책으로는 ‘멀고먼 힌두쿠시(매경)’가 있습니다. 이건 좀 오래된 것이죠.
   몇 년전에 제가 사서 친구들과 돌려보고있는 만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대쥬신 제국사’라는 만화인데, ‘라이파이와 녹색마왕’을 그렸던 산호라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정확성은 좀 떨어지지 만, 그런데로 볼 만합니다. 저는 그 책 세 권(현재 5권까지 나왔음)을 사서 친구들에게 계속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류 말고 좀더 황당한 부류로 나가자면 끝도 없이 많은데요, 최근이라고 말하기에 조금 지난 감은 있지만 역사동호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고구려,백제,신라의 대륙존재설 공방’입니다.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을 보나, 당나라와의 전쟁기록을 보나,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에 있어서는 설명이 힘들다는 주장이고, 한 편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주장이죠. 여기에 관한 책으로는 정용석 이라는 기상대 은퇴자의 책이 여러권 있습니다.
저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 었다(청노루)’, ‘중원(청노루)’ 두 권을 읽었습니다. 그럴 듯한데, 유물로 증명할 길이 없으니... 아예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면 따로 연락주십시오. 괜히 소개드렸다가, 이런 책을 소개해주다니, 이거 미친녀석 아냐, 이러시면 곤란하거든요.

 

   현재 시중에는 한단고기 류의 책이 나와있지만, 연구자가 아닌 이상 탐독하는 것이 그리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단고기를 읽고나면, 고대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역사를 조작하는데는 한계가 있고, 제 생각에는 위서일 수가 없거든요.
   이렇게 해서 개관을 하신 후에 시간을 내서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를 보시면, 역사적 상상력이 앞으로 다가올 문화전쟁의 시대에 얼마나 거대한 힘이 될 것인지, 감탄하실 겁니다. 그리고 과감히 가위질을 선택하는 우리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슬퍼지기도 하구요. 이래저래 주절거렸습니다만, 문헌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니텔 역사연구회에 들어오셔서 물어보는 방법입니다. 저 보다 많이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료의 편향성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연재한 ‘고대사 X파일’도 여기 연재란에 실려있습니다. 제 자랑같지만, 역동 연재물 사상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죠. 진지한 것보다는 확 튀는 연재물을 신세대가 선호한다는 저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셈인데, 요즘은 그게 속된 말로 얼마나‘쪽팔리는 짓’인지 깨닫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전 참 경박한 놈임에 틀림없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편지 주셔서 고맙구요...
*** 여러분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