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의 제다법에 관한 고찰

2014. 8. 26. 14:47차 이야기






       


다산(茶山)의 제다법에 관한 고찰  제다 문화사 

2011/05/03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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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의 제다법에 관한 고찰


                             박희준(한국발효차연구소 소장)



1.서론

2.다산 이전의 제다법에 관한 고찰

3.다산의 제다법의 형성과정

 1)아암혜장을 만남---餠茶시기

 2)아암혜장 입적후---團茶시기

4.다산의 제다법

 1)구증구포의 茶餠

 2)일쇄차

5.결론

 

 


1.서론


이문회우(以文會友). 글로써 벗을 모은다는 뜻이다. 이 말을 차인들은 이차회우(以茶會友)라고 바꾸어 쓴다. 차로서 벗을 모은다는 말이다. 글과 차에는 함께하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글이란 말은 학문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으리라. 우리나라 차문화사를 찾다보면 차와 글(학문)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차와 글(학문) 그리고 시를 나누던 역사속의 차인들이 남긴 기록들이 바로 오늘의 우리나라 차문화사를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고 우리나라 차문화사를 미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가운데 다산 정약용이라는 우리의 위대한 스승을 잊을 수 없다. 생각하고 실천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바탕으로 한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 차문화 또한 다산 정약용의 세례를 받아 우리차 또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게 된다. 그를 따르던 후학들과 함께 한 다신계(茶信契)의 바탕이 차이고 보면, 다산 학문의 그 바탕에 차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영정조에서 구한말의 고종에 이르기 까지, 시대의 격동기처럼 우리 차문화 또한 대변혁기에 맞이한다. 이 대 변혁기에 우뚝 선 다산과 그 주변의 인물들의 기록을 통해 우리차문화사에 잘못 해석되거나 왜곡되어 왔던 부분을 살펴보고, 우리 제다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하고자 한다.

지난 30여 년간 우리나라 차문화사는 <동다송>과 <다신전>을 남겨준 초의선사에게 집중 조명하였다. 그 결과 “초의선사가 다산에게 차를 가르쳤다”, “다산이 차를 처음 접한 곳은 유배지인 강진이고, 그곳 백련사의 혜장스님에게 차를 배웠다”는 주장이 아무런 검토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어 발견되는 여러 기록들은, 지례 짐작의 추측과 고정관념들로 가득한 조선후기 차문화사에 새로운 수정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의선사가 우리나라 차문화사에 끼친 업적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초의선사는 다산이라는 큰 산을 넘어서는 우리차문화의 중흥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은 그동안 있어왔던 선행연구들을 바탕으로, 차인으로서의 다산 정약용을 새롭게 조명하여, 다산 이전의 제다법과 다산이 남긴 제다관련 기록을 재검토하여 다산이 정립한 제다법을 고찰하고자 한다. 다산의 제다법이 밝혀져야 초의선사의 제다법 또한 밝혀지는 것이기에 이 글은 전래의 제다법에서 초의선사의 제다법으로 이어주는 고리역활을 할 것을 믿는다.

 



 

2.다산 이전의 제다법에 관한 고찰


   우리는 차문화를 이천년 역사 또는 천년이 넘는 역사로 자랑하지만 ,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차에 관련된 전문서적들이 조선조 후기에나 등장을 한다. 물론 일상적인 것이기에 기록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나 전화로 유물이나 유적이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이웃 중국이나 일본의 예를 보면 시대별로 대표적인 차전문서적이 존재한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 빈곤감이 적지 않다. 뿐만아니라 세계의 차시장에 역사적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차가 통용되는 것을 보면 아쉬움과 함께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200년전 다산이 차인으로서 위대한 점은 지금보다 더 열악한 조건들 속에서 우리나라 차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서 차 재배와 제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서 새로운 차시장을 개척하고자 하였던 점이다. 그렇다면 다산이 새롭게 연 우리 차문화의 지평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위해서는 우리나라 차문화사의 전반적인 접급을 하여야 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제다부분에 관하여 조명해보고자 한다. 과거의 기록들은 차가 있었다, 차를 심었다, 차를 마셨다는 기록은 많지만, 어떻게 차를 만든다는 기록은 귀하다. 그런 가운데 정민교수가 발굴한 <부풍향다보>와 기존의 <동의보감>에 차기록은 우리나라 제다문화사를 복원하는데 좋은 밑그림이 된다. 먼저 <동의보감>과 <부풍향다보>의 차기록 가운데 일부를 살펴본다.

 

고차 --작살차 성질은 약간 차며 서늘하다(冷)고도 한다. 맛은 달고(甘) 쓰며(苦) 독이 없다. 기를 내리고 오랜 식체를 삭이며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오줌을 잘 나가게 한다. 소갈증을 낫게 하고 잠을 덜 자게 한다. 또한 굽거나 볶아서 먹고 생긴 독을 푼다. 나무는 작고 치자나무 비슷한데 겨울에 잎이 난다. 일찍 딴 것은 작설이고 늦게 딴 것은 명이다. 이름은 5가지가 있는데 차, 가, 설, 명, 천이다. 옛사람들은 차의 싹을 작설(雀舌), 맥과(麥顆)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주 어린 잎을 말한 것이다. 즉 납다(臘茶)라는 것이 이것이다. 어린 잎을 따서 짓찧어 떡을 만든다. 어느 것이나 좋은 불을 거쳐야 한다. 엽차는 천이라고도 하는데 잎이 센 것을 말한다[본초] 수족궐음경에 들어가는데 뜨겁게 마시는 것이 좋다. 식혀서 마시면 담이 몰린다. 오랫동안 먹으면 기름이 빠져서 여위게 된다[입문].

苦茶 작살차 性微寒 一云冷 味甘苦 無毒 下氣 消宿食 淸頭目 利小便 止消渴 令人小睡 又解炙炙病 樹小似梔 冬生葉 `早採爲茶 晩採爲茗 其名有五 一曰茶 二曰檟 三曰蔎 四曰茗 五曰荈 古人爲其芽 爲雀舌 麥顆 言其至嫩 卽 臘茶是也 採嫩芽 搗作餠 竝得火良 茗或曰荈 曰葉老者也 <本草>入足手厥陰經. 飮之宜熱 冷則聚痰 充腹去人脂 令人瘦 <入門>

----<<동의보감>>에서

 

 

고차(苦茶) 즉 쓴 차는 일명 작설(雀舌)이라고 한다. 조금 찬 성질이 있지만 독성은 없다. 나무가 작아 치자(梔子)와 비슷하다. 겨울에 잎이 나는데, 일찍 따는 것을 ‘차(茶)’라 하고, 늦게 따는 것은 ‘명(茗)’이 된다. 차(茶)와 가(檟), 설(蔎)과 명(茗)과 천(荈) 등은 채취 시기가 이르냐 늦으냐로 이름 붙인다. 납차(臘茶) 즉 섣달차는 맥과차(麥顆茶)라 한다. 여린 싹을 따서 짓찧어 떡을 만들고 불에 굽는다. 잎이 쇤 것은 천(荈)이라 한다. 뜨겁게 마시는 것이 좋다. 차가우면 가래가 끓는다. 오래 먹으면 사람의 기름기를 없애 사람을 마르게 한다.

苦茶一名雀舌. 微寒無毒. 樹少似梔. 冬生葉, 早採爲茶, 晩爲茗. 曰茶曰檟, 曰蔎曰茗曰荈, 以採早晩名. 臘茶謂麥顆. 採嫩芽, 搗作餠, 並得火良. 葉老曰荈, 宜熱. 冷則聚痰, 久服去人脂, 令人瘦.

<<부풍향다보>>에서

 

 

   여기서 우리는 <<부풍향다보>>가 <<동의보감>>을 원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1610년대에 쓰여진 <<동의보감>>과 1750대에 쓰여진 <<부풍향다보>> 사이에는 기록상 변화가 없는 전승이 이루어져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동의보감>>에 집약된 차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이나 지식이 그대로 1750년까지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를 도표로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표1

<<東醫寶鑑>>

<<扶風鄕茶譜>>

비고

苦茶 작살차

苦茶一名雀舌.

이름

性微寒 一云冷 味甘苦 無毒 下氣 消宿食 淸頭目 利小便 止消渴 令人小睡 又解炙炙病

微寒無毒.

약성과 효과

樹小似梔 冬生葉 `

樹少似梔. 冬生葉,

차나무의 모양과 생태

早採爲茶 晩採爲茗 其名有五 一曰茶 二曰檟 三曰蔎 四曰茗 五曰荈

早採爲茶, 晩爲茗. 曰茶曰檟, 曰蔎曰茗曰荈

차의 명칭

古人爲其芽爲雀舌 麥顆言其至嫩 則臘茶是也

以採早晩名. 臘茶謂麥顆.

차의 채취 시기

採嫩芽 搗作餠 竝得火良

採嫩芽, 搗作餠, 並得火良.

제다방법

茗或曰荈 曰葉老者也<本草>

葉老曰荈,

제다시기에 따른 차의 분류

入足手厥陰經. 飮之宜熱 冷則聚痰

宜熱. 冷則聚痰,

음다법

充腹去人脂 令人瘦 <入門>

久服去人脂, 令人瘦

차의 단점

 

 

여기서 나오는 차를 만드는 제다법인 ‘어린 잎을 따서 찧어서 떡을 만드는데 좋은 불을 쓰야 한다’는 기록은 우리나라 차문화사를 새롭게 쓸 기록이 된다. 바로 홍차제다법과 흡사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가 양호에게 말한 작설차는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차였기에 중국의 차와는 다르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장에서는 그냥 병차(餠茶)라고 하기로 한다. 뒤 부분의 ‘좋은 불을 쓰야 한다’는 부분의 해석을 순서상 건조부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앞부분에 생략된 살청부분으로 볼 것인가 하는 해석의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조 대표적 차인 작설차가 떡차일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물론 잎차가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이 떡차와 같이 그 제다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다산은 <각다고>에서 차의 형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편차(片茶)와 산차(散茶)이다. 편차는 쪄서 만들어 모양틀에 채워서 가운데를 꿴다. 다만 건주(建州)와 검주(劍州)에서는 찐 뒤에 갈아서, 대나무로 틀을 만들어 건조실 안에 두므로 가장 정결하다. 다른 곳에서는 만들지 못한다.

凡茶有二類。曰片。曰散。片茶蒸造。實捲摸中串之。惟建劍則旣蒸而研。編竹爲格。置焙室中。最爲精潔。他處不能造。<각다고>에서

 

 

여기서 편차는 떡차, 산차는 잎차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살펴볼 때 다산시대에 조선 지식인이 알고 있었을 조선시대에 전승된 제다법을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2 표에서 *는 제다과정에서 표현 되지않은 과정

<<동의보감>>

<<부풍향차보>>

<각다고>의 편차(片茶)

비고

일반

건주와 검주의 편차

어린 찻잎을 딴다

採嫩芽

어린 찻잎을 딴다

採嫩芽

*

*

<각>에서 채엽이 생략되었다.

찐다

찐다

<<동>>과 <<부>>에서 찌는 과정이 기록에서 생략되었다. 또는 찌는 과정이 없었다는 두가지 해석은 앞으로 우리차문화사의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찧는다

찧는다

*搗

간다

각다고의 일반적인 차에 찧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떡을 만든다

作餠

떡을 만든다

作餠

틀에 넣어 찍는다

捲摸

*捲摸

떡을 만든 과정과 틀에 넣어 형태를 만드는 과정은 하나로 보인다. <각>의 일반적인 방법에서 꿰는 방법은 다경에서 비롯한 것인데, 우리나라에도 전승되어 돈차의 형태로 남아있다.

꿴다

좋은 불로 말린다並得火良

좋은 불로 말린다

並得火良

*焙

대나무로 틀을 만들어차를 말리는 방 둔다.

編竹爲格

置焙室中

 

 

다산이 <각다고>에서 기록하고 있는 차는 육우의 <<다경>>과 채양의 <<다록>> 등 중국 당송대의 제다법이다. 여기에 아직 산차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시 중국이 산차의 시대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산차가 일반화 되기전 단계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러한 점은 <각다고>에서 산차를 만드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쉬움을 지나, 그 당시 일반적인 차가 떡차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뿐만아니라 <각다고>와 <아언각비>의 기록 등 여러 기록 들 속에서 여기서 우리는 다산이 중국 차문화사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는 점을 놓치면 안된다. 물론 이는 다산이 강진의 초당시절을 지나면서 더욱 축적된 것이겠지만, 차생산의 기반을 조성하여 조직하고 확대하여 유통을 아울러 생각하고 실천한 다산은 조선차문화사의 정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

 


 

3.다산의 제다법의 형성과정


1) 아암혜장을 만남--- 병차(餠茶)시기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오기 전부터 차를 알았다. 그런 다산이 강진에서 차에 빠지게 되는 것에는 백련사의 아암혜장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만남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산은 아암혜장에게 차를 비는 <걸명소>를 쓰고, 또 한편 다음과 같은 차를 만들 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혜장 상인에게 보내 차를 빌다[寄贈惠藏上人乞茗]의 한부분에서는 차를 말리는 법과 우려서 마시는 방법이 나타나 있다.

 

 

불에 쪼이고 햇빛에 말리기를 법대로 해야지만 / 焙晒須如法

물에 담갔을 때 찻물빛이 해맑다네 / 浸漬色方瀅

 

 

    여기서 불에 쪼이고 햇빛에 말리기(焙洒)를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아암혜장의 제다방법이 이해된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배(焙)는 분명 불에 쬐여 말리는 행위이고, 쇄(洒)는 햇빛에 말리는 행위, 즉 포쇄(曝洒)는 바람에 쏘이고 햇빛에 말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해석여하에 따라 잎차가 되기도 하고 떡차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햇빛에도 말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침지浸漬)라는 표현은 물에 담근다는 뜻으로 해석여하에 따라, 솥에 넣어 끓인다는 말도 되지만 뜨거운 물에 차를 담군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오늘날의 포다(泡茶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에 대한 답신으로 보이는 <견월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 일부를 옮겨본다.

 

 

늦물차가 이미 쇄지는 않았는지 두렵습니다. 그러나 불에 쪼이고 햇빛에 말리기가 잘되었으면 삼가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晩茗恐已老蒼 但其焙曬如佳 謹玆奉獻也 不備

 

 

   이 기록으로 만으로 볼 때, 아암혜장이 다산에게 차를 가르친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산이 아암혜장에게 차를 가르치고 있다. 이 편지글에 나오는 배쇄법(焙曬法)은 잎차인지 떡차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니면 건조방법인지도 모른다. 해남에서 예전부터 있었다는 황차(黃茶)의 원형을 찾는 일에 있어 첫 단추는 여기서 찾아진다. 수룡색성이 만든 차를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듣고 아암혜장은 차를 보내지 않고 다음과 시를 보낸다. 그 가운데 차와 관련된 부분만 살펴본다. 이 시는 <연파잉고>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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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따는 사람들에게 들으니           聞諸採茶人

가장 귀한 것은 대숲에서 난다지요   最貴竹裏挺

이맛은 세상에서 드문 것            此味世所稀

마실 때 차게하면 안됩니다          飮時休敎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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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밤 은병에 물을 길러서         淸宵汲銀甁

긴 낮에 돌 솥에 삶아야지요         長日鬻石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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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성이 나누어 드렸으니             賾也有分施

또한 맑게함에 도움이 되셨으리      亦足助淸瀅

 

 

    여기서 우리는 다산이 찾아냈다는 죽로차의 원형을 알게 된다. 당시 차를 따는 사람들 사이에는 대숲 속의 차가 좋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다산은 현실화 시키면서 이유원이 기록한 초의의 보림사 죽로차가 탄생한다. 또한 우리 전래의 다탕법은 차를 뜨겁게 마신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우려내는 방법 또한 솥안에서 오랫동안 끓여서 먹는 전탕법과 포다법이 함께 호남일원의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다산이 호남지방의 사찰에서 내려오는 차와 음다법을 체득하는 한 순간이 그림처럼 적혀있다.한 실학의 틀속에 만들어진 다신계와는 또 다른 불교계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전등계(傳燈契)의 수룡색성과 철경응언이 다신계절목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은 이채롭다. 수룡색성과 철경응언은 아암혜장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1801년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이 차생활에 흠뻑 젖어들게 되는 것은 바로 백련사의 아암혜장 덕분이다. 다산과 아암은 1805년 첫 만남을 가진 후, 이들 사이에 주고 받은 차와 시문 들은 우리들에게 빙그레 웃음을 짓게한다. 그 가운데서도 1805년에 쓰여진 다산의 <걸명소>는 마치 다산이 스폰지처럼 차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게 한다. 그리고 수룡색성이 차를 보내준 것에 감사를 하는 시 등은 아암혜장의 제자인 수룡색성의 차만드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다음은 <색성이 차를 보내와 사의를 표하다[謝賾性寄茶]> 란 다산의 시이다.

 

 

아암혜장공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      藏公衆弟子

색성이 가장 기걸하다네                 賾也最稱奇

화엄경 교리를 이미 터득하고            已了華嚴敎

아울러 두보의 시까지 배운다네          兼治杜甫詩

좋은 차도 꽤나 잘 만들어서             草魁頗善焙

진중하게 외로운 나그네 위로했다네      珍重慰孤羇

 

 

   여기서 선배(善焙)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차를 잘 만든다고 하였지만, 그차가 덖음차인지 아니면 찐 뒤 불위에 말리는 떡차인지 잎차인지 알 수는 없다. 배쇄법이란  큰틀에서 보면 덖어서 햇빛에 말린 잎차가 아닐까?

1805년 아암혜장에게 보낸 다산의 <걸명소>에서, 다산이 보내주는 차를 즐겨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차를 연구하는 모습이 처음 보인다.

 

 

나그네는 요즘 차 욕심쟁이가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글 가운데 묘한 깨달음은 육의 다경 세편과 완전히 통하니---/ 旅人近作茶餮 兼充藥餌 書中妙辟 全通陸羽之三篇

---<걸명소>에서

 

 

   여기서 아암혜장의 차에 반하여 차의 원전인 <다경>을 섭렵하고 있는 다산을 발견하게 된다.



2)아암혜장 입적 후--단차(團茶)시기


   그러나 그 뒤 13년이 흘렀을 때(1818년) 강진을 떠나는 다산은, 차를 구걸하는 다산이 아니라 차를 생산하는 차농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먼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아암혜장이 1811년 입적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산에게 차를 보내주던 든든한 차후원자를 일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를 채워준 사람은 자연히 수룡색성과 아암혜장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초당에 정착한 지 6년이 되는 해 (1814년 )에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1839)와 주고받은 <이산창수첩(二山唱酬帖)>에 다산이 차를 만들기 시작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비 그친 뒤 새 차가 깃발을 펼치기 시작하니     雨後新茶始展旗

차말리는 배롱과 차 맷돌을 조금씩 정돈한다     茶篝茶碾漸修治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차세금(茶稅)이 없었으니   東方自古無茶稅

앞마을 개가 짖어도 염려하지 않는다            不怕前村犬吠時

 

 

  여기에 나오는 다구(茶篝)와 차를 가는 다연(茶碾)은 다산이 직접 차를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다구는 차를 말리는 배롱(焙籠)을 말한다. 아암혜장이 입적한 다음 다산은 다산 스스로 차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때 수룡색성과 같은 승려들에게 전승되었던 전래의 제다방법이 전하여졌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다연이 차를 마시기전 차를 가는 다연이 아니라, 마른 차를 다시 갈아서 떡을 만들 때 쓰여지는 것이라면, <다경>식 거친 떡차가 아니라 채양의 <다록>에 나오는 가루가 고운 떡차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산거잡영>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다산이 직접 차를 갈았던 흔적을 보여준다.

 

 

차멧돌을 빙글빙글 직접 갈아보네 茶碾旋旋手自磨

 

 

  또한 <송파수작>의 다섯번째 시에서는 <다경>을 뛰어넘는 다산을 발견하게 된다

 

 

수공을 가장 많이 들여 국화 족보 엮었고 最有手功編菊譜

다경에 주석 달 마음은 전혀 없어라 絶無心事注茶經

 

 

   닭을 치기 시작한 아들에게 닭을 키우려면 <계경(鷄經)>을 쓰라고 한 다산이었다. 차에 흠뻑 빠져 있던 다산은 이미 <다경>의 묘리를 체득하고 새로운 경계로 차를 생산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그러기에 다경의 주설 달 마음은 전혀 없다고 한다. 당시 다산의 곁에 있던 윤외심(尹外心)은 차가 새로 만들어지자 이렇게 노래한다. 다산의 <우세화시집>에 나오는 윤외심의 <신차>를 살펴보자.

 

 

문득 잇빨과 양볼 사이에 침이 샘솟고     忽覺津津動頰牙

선생의 붓 아래 꽃이 피어난는 듯하네     先生筆下宛生花

사향의 매운 향기가 떠오는 듯            麝臍酷烈浮香氣

작설은 뾰족하게 새싹이 돋아나도다       雀舌尖新迸早芽

차를 가는 범식은 정채의 솜씨에 의거하고 碾硏法依丁蔡手

맵고 단 성미는 심서가에 알맞으리        辣甘性合沈徐家

시를 이루매 용육을 얘기한 내가 우스워라 詩成笑我談龍肉

오직 산나물은 그 맛을 자랑할 만하다오   獨有山茹味可誇

 

  이 시에서 다산의 제다방법은 육우의 <<다경>>식 제다방법이 아니라 채양의 <<다록>>의 제다방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맵고 단 성미란 표현 속에서 차의 건조 방법이 일쇄차(日曬茶)일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렇듯 다산은 아암혜장이 입적한 뒤 제자들과 차를 만들면서 기존의 차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차인들 가운데 직접 차를 심거나 차를 만드는 일에 관여한 기록은 참으로 귀하다. 함양다원을 일군 김종직과 차를 심었던 유방선, 차를 직접 만들어 벗들에게 선물한 매월당 김시습 등이 아마도 조선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실체가 어떤한 것이였는지 알기가 쉽지않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오면 차를 만들고 나누는 여러 기록들이 문집마다 산견된다. 차를 가꾸고 재배하여 차를 만든 확실한 기록은 아마도 우리는 다산과 그 후학들이 남긴 <다신계절목>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다신계절목>에는 8가지 약조가 있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 약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곡우날 어린 차를 따서 덖어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근을 만든다.이 잎차 한근과 떡차 두근을 시찰과 함께 부친다.

穀雨之日 取嫩茶 焙作一斤 立夏之前 取晩茶 作餠二斤 右葉茶一斤餠茶二斤 與詩札同封

 

 

    다신계절목이 쓰여진 것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가 풀려난 1818년 8월 그믐, 다산이 1801년 강진으로 유배로 온 지 18년 뒤의 일이다. 이 기록을 비추어 보면 다산과 다산의 후학들이 이미 잎차와 떡차를 만드는 제다기술을 습득한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제다기준으로 비추어 보면 잎차 한근(600g) 떡차 두근(1200g)이라는 작은 양지만, 곡우날과 입하전이라는 시간적 제한을 둔 것은 어린차와 늦차라는 채다엽의 기준과 함께 제다에 어떤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곡우날 딴 찻잎으로는 잎차를 만들고, 입하전에 딴 차로는 떡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오늘날 잎차 위주의 제다기술보다도 다양한 차만드는 기술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찻잎을 따는 인원에 대한 약조 또한 간단하지 않다.

 

 

차 따기의 부역은 사람마다 수효를 갈라서 스스로 갖추되, 스스로 갖추지 못하는 사람은 돈 닷푼을 신동에게 주어서 귤동마을 어린이를 고용하여 차따기의 수효를 채우게 한다. 採葉之役 各人分數者備 以其不自備者 以錢五分給信東 令雇橘洞村兒 採茶充數.

 

 

입하날 뒤에 잎차와 떡차를 읍내에 들여보내면 읍내에서는 토포사편으로 유산에게 부친다. 立夏之後 葉茶餠茶 立送于邑中 者邑中 討捕史送于酉山

 

 

   이 2개의 기록은 찻잎을 따는 인원의 규약과 만들어진 차를 부치는 방법과 시기까지 정확하게 명시하여 놓고 있다. 여기서 신동은 귤동에 거주하던 윤씨 문중의 한사람으로 추측되고 유산은 다산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 뒤 13년이 흘렀을 때 차를 구걸하는 다산이 아니라 차를 생산하는 차농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먼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아암혜장이 1811년 입적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산에게 차를 보내주던 든든한 차후원자를 하나 일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를 메꾼 사람은 자연히 수룡색성과 아암혜자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다신계절목>과 같이 방외의 연고자들의 모임인 <전등계>에도 <전등계절목>이 있을을 지도 모른다. 그 절목을 찾을 수 만 있다면 아암혜장이 입적한 뒤 다산이 차를 생산한 배경을 살필 수 있을지 모른다.

 



 

4.다산의 제다법


1)구증구포(九蒸九曝)의 다병(茶餠)


   강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강진에서의 차인연이 계속된다. 그가운데 1830년 강진 백운동 이대아(李大雅)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다산의 떡차 제조방법에 대해서 잘 설명되어 있다. 차와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기로 한다.

 

 

   지난번 보내준 차와 편지는 가까스로 도착하였네. 이제야 감사를 드리네. 올 들어 병으로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에 힘입어서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 주기 바라네. 다만 지난 번 부친 떡차는 가루가 거칠어 썩 좋지가 않더군.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조금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알겠는가?

向惠茶封書, 間關來到, 至今珍謝. 年來病滯益甚, 殘骸所支, 惟茶餠是靠, 今當穀雨之天, 復望續惠. 但向寄茶餠, 似或粗末, 未甚佳. 須三蒸三曬, 極細硏, 又必以石泉水調勻, 爛搗如泥, 乃卽作小餠然後, 稠粘可嚥, 諒之如何? <이대아에게 보낸 편지>의 부분

 

 

   여기서 비로소 다산이 만든 떡차의 실체가 드러난다.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또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는 이 구절은 우리차문화사에서 외국차에 대한 응전을 제다법의 혁신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즉 ‘삼증삼쇄’의 세 번 찌고 세 번 햇빛에 말리는 이 방법은 앞으로도 우리가 새롭게 조명하여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다산은 진적 세 번이 아니라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햇빛에 말린다고 하였다. 범석호가 병오년에 회포를 기술한 시 십 수를 차운하여 송옹에게 부친다[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는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여기서 송옹이 바로 앞선 기록의 윤외심이다.

 

 

다경에서 새어서 흘러나온 구증구포법 /     洩過茶經九蒸曝

많은 것이 귀찮아 닭은 한 쌍만 기른다오 /  厭煩鷄畜一雄雌

 

 

<걸명시>와 <걸명소> 보다 다소 늦게 쓰여진 이 시에서 다산은 <다경>에서 어떤 암시를 받고 새로운 제다방법을 생각하던 중, 그 뒤 아암혜장이 입적한 뒤 몸소 차를 만들기 시작하였을 것 같은 아주 강한 암시를 받는다. 사실 다산의 구증구포법의 발단은 이 시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과언이 아니다. 이 시와 앞의 편지에 나타난 다산의 제다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를 순서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찻잎을 딴다

2.세 번 찌고 세 번 햇빛에 말린다. (또는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햇빛에 말린다)

3.곱게 간다.

4.돌샘물로 반죽을 한다

5.차떡을 만든다.

6. 건조한다.

 

 

    여기서 찻잎을 따고 건조하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지만 대체로 단차를 만드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조금 찰져서 먹을 수 있다네 (稠粘可嚥)’이 부분은 다산이 제조한 음다법에 새로운 조명을 하여야 할 것이다. 차떡은 물에 들어가서 그대로 엉겨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루가 풀리고 그 가루까지도 마실만 하여야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차가 바뀌면 음다법이 바뀐다는 것을 여기서도 적용된다. 다산의 차가운데 우리가 다시 한번 주목하여

 

 

2)다산의 일쇄차(日曬茶)


    다산의 차가운데 우리가 다시 한번 주목하여할 차가 있다. 바로 일쇄차다. 그간의 문맥으로 보면 다산의 일쇄차는 떡차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1818년에 쓰여진 <다신계절목>과 1823년 귀양에서 풀려난 다산을 찾은 제자들과의 문답내용을 기록한 <다산제생문답(茶山諸生問答)>의 내용은 상반되게도 잎차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먼저 <다신계절목>의 차생산 부분을 살펴보면 곡우날 어린잎으로 불로 쬐여 잎차를 만들고, 입하날 늦차를 따서 떡차를 만든다고 하고 있다.

 

 

곡우날 어린 차를 따서 덖어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근을 만든다.이 잎차 한근과 떡차 두근을 시찰과 함께 부친다.

穀雨之日 取嫩茶 焙作一斤 立夏之前 取晩茶 作餠二斤 右葉茶一斤餠茶二斤 與詩札同封

 

 

즉 그간의 기록들로만 보면 잎차는 불에 쬐여 만들고(焙), 떡차는 햇빛에 말리는 것(曝晒)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다산제생문답>에서는 어린차를 햇빛에 말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올 때 이른 차를 따서 말려두었느냐? 來時 摘早茶付晒否

대답하기를 못했습니다. 曰 未及

 

 

    여기서 우리는 어린차로 만든 일쇄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이 다신계절목에서 말한 어린 찻잎으로 만든 잎차일까? 아니면 어린찻잎으로 만든 떡차일까? 어느 과정에서 햇빛에 말리는 공정이 들어갈까? 여기서 우리는 다산이 처음 접했던 아암혜장의 배쇄법(焙曬法)으로 만든 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배(焙)를 차를 말리는 공정이 아닌, 가마솥 덖음으로 말해도 무방하다면, 우리나라 호남지방의 잎차 만드는 방법은 차를 덖어서 햇빛에 말리는 방법이 채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다산 또한 이 방법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일쇄차는 발효차가 아닌 오늘날 말하는 불발효차인 녹차에 가까운 것으로 그 당시 청나라에서 전하여진 황차(黃茶)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한다. 당시 활동하던 여항시인인 조재삼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신라사에, 흥덕왕 때 재상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앗을 얻어 지리산에 심었다. 향과 맛이 당나라보다 낫다고 한다. 또 해남에는 옛날에 황차(黃茶)가 있었는데,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정약용이 이를 알았으므로, 이름을 정차(丁茶) 또는 남차(南茶)라고 한다.


羅史興德王時, 宰相大廉, 得種於唐, 種智異山. 香味優於唐云. 又海南古有黃茶, 世無知者. 惟丁若鏞知之, 故名丁茶又南茶.

 

 

  다산이 알고 있었던 잎차의 제다방법은 바로 덖어서 햇빛에 건조시키는 방법이었다. 차의 건조에 있어 많은 기록들은 차를 불에 말려야지 햇빛에 말리면 안된다고 한다. 같은 시대의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신은지>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차의 건조법을 소개한다.

 

 

차는 불에 말려야지 햇빛에 말리면 못 쓴다. <신은지>

茶宜焙不宜晒。 <神隱 >

 

 

    다산 또한 <각다고>에서 차를 말릴 때 대나무 시렁을 만들어 건조실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다산이 일쇄건조를 주장하는 구증구포나 삼증삼포의 방법을 채택하였고, 잎차에서는 배쇄법을 왜 사용하였을까? 이부분에 있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연구를 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만 그 당시 오늘날처럼 조선 차계를 강타하던 보이차의 열풍을 떠올리면서 이 글의 마무리 짓고자 한다. 다산은 바로 쇄청 보이차의 열풍 속에서 우리차 속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다산의 차에서 맵고 단 맛이 난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른바 만든지 얼마되지 않은 보이차에서 나는 쇄청미(曬靑味)의 매운 듯한 맛을 다산이 추구하였는지도 모른다. 다산의 일쇄차는 잎차이거나 떡차이거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산화발효차가 아닌 쇄청건조차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렇다고 백차나 산화발효차인 홍차형 차일 가능성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다산이 재인식한 해남황차는 산화발효차인 홍차형 차가 아니라, 여러번 찌거나 여러번 덖거나 오랫동안 차가 열을 머금었을 때 생겨나는 민황(悶黃)형 황차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접근은 본인이 <황차변증설>이란 글로 부분 정리하여 놓았다.

 

 

5.결론


이상과 같이 다산 이전의 제다법과 다산이 정립한 제다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차는 작설차이고 그것이 떡차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잎차가 없었던 것이 아니겠지만, 제다방법이 기록된 것은 아직 찾지 못했기에 그것에 대한 언급은 보다 많은 제다관련 자료가 나온 뒤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떡차의 역사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왔겠지만, 문헌상으로는 1610년대 <동의보감>에서 1750년대 <부풍향다보>로 이어지는 긴 흐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홍차형 발효차일 가능성도 함께 살펴보았다. 살청에 해당하는 배(焙)나 증(篜)의 표현이 생략되어진 경우를 배제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지리산일원에서 만들어지는 발효차의 뿌리일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강진에서 육우의 <다경>에 바탕을 둔 병차와 채양의 <다록>을 바탕을 둔 단차를 만들면서 구증구포 또는 삼증삼쇄라는 독특한 제다방법을 채택하여, 당시 거세게 몰아친 중국의 보이차 열풍을 이겨내고 다마무역으로 국익을 더하고자 하였다. 차나무가 환경에 의해 차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현지인들로 전해듣고 죽로차를 창안하고, 제다방법에서는 구중구포, 삼증삼쇄라는 방법을 채택하여 재배환경과 제다방법에서 새로운 차문화의 지평을 열었다. 그렇게 생산된 차는 보림차(寶林茶)라는 이름으로 구한말까지 지속되고 19세기말 우리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다산은 차의 건조에 있어 햇빛건조법인 포쇄법(曝曬法)을 채택하여 일쇄차의 특이한 풍미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옛 고전을 해석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법고창신(法古創新)에 그 바탕을 둔 제다법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차를 생산하면서 다신계라고 하는 공동체로 엮어서 삶의 질을 향상하고, 그 공동체를 다마무역과 같은 차수출입국을 꿈꾸었다. 재배, 제다, 그리고 유통을 고민하였던 19세기 다산의 모습 속에서 나는 무한한 힘을 얻는다. 죽로차가 던져주는 차재배환경에 대한 고민, 구증구포가 암시는 제다기술의 혁신, 그리고 일쇄차가 던져주는 탄산가스를 줄이는 친환경제다법은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는 한국차의 생산과 유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뒤딤돌이 될 것을 믿는다.

또한 이글을 쓰면서 나는 제다용어의 정립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그 한 예로 배(焙)는 살청과 건조의 의미로 모두 쓰이는데, 문맥에 따라 해석할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예로 일쇄차를 들 수 있다. 일쇄차는 건조과정에 해당하는데 일광위조(실외위조)에 이 개념을 적용하는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황차 또한 문헌고증을 하지 않은체, 산화발효차라고 잘못 쓰여지고 한 예일 것이다. 정확한 차에 관한 정보 또한 하나의 경쟁력이다.

정다산이 이 시대 차인들에게 새롭게 살아나서 다양한 재조명을 받는 것은 그가 체득한 ‘법고창신’과 ‘지행합일’ 실학정신 속에 다양한 우리 차문화의 가능성이 숨어 있고, ‘다신계’와 같은 마음의 고향을 역사 속에 마련하여 두어, 오늘날 우리나라 차인들이 언제던지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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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제다학 강사 / 연락처 algacha@naver.com

* * 이 글은 내가 주간으로 있던 2006년 <차와 문화> 봄 해에<조선 후기 제다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주제 아래 발표하였던 <조선 후기 제다에 관한 문헌적 고찰>이라는 글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이 글이 발표하고 난 뒤 한양대 정민교수의 다산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접근을 보았고, 그 자료와 접근을 통해서 나의 천견과 오류들을 인식하고 이 글을 새롭게 쓰기로 하였다. 우리나라 차문화사를 써보기로 한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가 기존에 아는 자료보다 더 많은 기록들이 숨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다기>, <부풍향다보> 등 다산, 추사, 초의, 유산, 황상 등의 새로운 자료가 나올 때 마다 나는 경탄함과 동시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나는 목포대학교 대학원의 국제차문화학 협동과정의 석사학위논문인 <차인(茶人) 정약용 연구>를 박말다님에게서 받는다.----이 논문은 그동안 나 스스로 밀쳐왔던 차문화사에 집필을 채찍질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한다.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박말다님은 다산을 이렇게 재조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유배 전부터 차를 즐겨 마신 차인이었던 다산은 온 산이 차나무인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몸소 차를 가꾸고 제다를 연구했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제다법을 완성시켜 우리 떡차가 중국의 보이차와 당당히 겨룰수 있음을 입증한 제다인으로, 자신의 제다법을 초의선사 그리고 그의 다신계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18세기 차의 중흥기 도래에 중대한 구실을 한 우리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다.”

상당 부분의 잘못이 보이지만 그 당당한 어조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온 산이 차나무인 강진의 다산초당, 제다법 전수 운운과 우리차의 중흥조라는 표현은 보다 신중하여야 하지 않을까한다. 여하튼 초의선사를 중심으로 하였던 조선후기 제다사에 이제 다산 정약용으로 하여 더욱 풍성해진 것은 우리 차계의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다산이 찾아내었던 우리나라 황차는 산화발효차가 아니라 민황형 황차라는 것은 2008년 제 1회 국제차문화학술대회에서 <황차변증설>로 그 논지를 밝혀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