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로차원고 - 4. 봉황새를 기다리며

2014. 8. 26. 14:34차 이야기






       


죽로차원고 - 4. 봉황새를 기다리며  제다 문화사 

2010/03/0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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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황새를 기다리며

 

   대숲의 햇차가 싹을 내밀던 지난 4월, 나는 곡성의 죽로차를 찾으러 나섰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곡성의 차지킴이들 얼굴에서 햇차의 수확을 맞이하는 기쁨보다 급하게 변화고 있는 차시장의 흐름에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계속되는 식품안정성에 대한 문제와 농축산물 수입개방의 압력 속에서 과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평생 땅만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분들에게 곡성차의 원형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스런 일일 수 도 있었다.

 

   곡성군 농업기술센터의 신진용씨를 통해 곡성군이 가지는 자연환경과 재배환경적 특성을 들었다.

어느 곳보다 큰 일교차와 안개일수가 많다는 것은 차재배의 긍정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녹차연구회의 변기찬 다농이 채다를 할 사람이 없다는 푸념 아닌 걱정을 털어놓을 때 곡성차가 지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두운 마음으로 빗발이 간간히 뿌리는 섬진강변을 따라서 태안사로 찾아갔다.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뒤 처지지 않을 섬진강 길. 분홍빛을 떨구고 있는 복숭아 강둑에 피어난 노란 유채꽃, 무엇보다도 물오른 산빛 물빛 들빛을 볼 때 마다, 내가 전생에 어떤 좋은 일을 하여 이런 무량대복을 받아서 해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가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높지도 깊지도 않은 그윽함이 동리산 태안사의 한 매력일 것이다. 공양을 마치고 나오시는 각일 주지스님이 차실로 안내를 한다. 오신지 얼마되지 않아 절의 내력을 잘 모르다고 하면서, 옛 문건들의 사본과 사진을 내놓다. 진본들은 아니지만 쉽게 볼 수 없던 태안사의 옛모습 속에서 차향기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마치 예전에 겨울산에 푸른 잎만 보면 찻잎인가 달려가서 확인하고, 누가 썼는 지도 잘 모르는 옛 문헌을 고서점에서 뒤지던 30년 전의 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 죽로차가 귀하듯 내가 찾는 곡성의 차기록도 그렇게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접어두었던 태안사에 관련한 것들을 알아가면서 내가 알게된 새로운 것들과 조각맞추기를 하였다. 함께 나누면서 태안사의 감추어졌던 차향기가 아련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옻칠한 검정 바루에 파란 청솔방울을 담기를 좋아했던 다송자가 바로 옆에라도 계시는 듯, 정갈한 차실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스님의 차이야기를 들었다. 혜철선사의 부도탑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나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 차(茶)자가 들어간 주련을 선원(禪院)의 기둥에서 발견한 것이다.


   태안사를 방문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이 주련은 마치 대나무 밭에 숨겨진 죽로차와 같이 늘 그곳에 있었는데, 이제사 이 주련이 눈에 띄다니....앞서 인용한 시를 다시 한번 인용한다

 

       一粒粟中藏世界    한 알 좁쌀 속에 세계가 감추어져 있으니

       反升鐺內煮山川    반 되 들이 쇠솥에 산천을 달인다네

       香浮鼻觀烹茶熟    떠오는 향기에 코 열리니 차는 벌서 익었고

       喜動眉閒煉句成    즐거이 양미간 펴며 시 한 귀절을 어렵사리 이루네

 

    이 시에서 나는 좁쌀 한 알을 아주 어린 차싹인 맥과(麥顆)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차싹을 좁쌀로 표현한 옛 차시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좁쌀같이 어린 찻잎 하나에도 온 세상이 감추어져 있으니

       반 되 들이 작은 쇠솥에다 산천을 달인다네

 

   물론 좁쌀 한 알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산의 애제자이자 추사와 친교를 맺고 있던 황상의 당호인 일속산방(一粟山房)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한없이 무거운 무게로 다가온다. 나는 중얼거린다. 좁쌀 하나에 온 우주가 담겼있을 줄 뉘 알았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마시는 차한잔은 어떠한가? 그 차 한잔에 온 우주가 담긴 줄은 나는 왜 몰랐을까? 그때 뜬금없이 각일스님이 나에게 부탁을 한다.“처사님, 차실이름 하나 지어 주시오”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차한잔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그 숙제를 수첩 속에 담아 놓고, 죽곡면 당동의 죽로차밭을 찾아간다.

 

   곡성군 일대에서는 비교적 큰 야생차밭이라고 안내를 미리 받았다. 순천 선암사 숲속의 칠전 차밭이나 , 요사이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담양의 죽로차밭에서 만들어진 죽로차밭에 대한 선입관을 가진 나는, 당동 죽로차밭을 보는 순간 나를 당황하게 한다. 먼저 멀리서 바라다 보았을 때 차밭의 군락지가 꽤 넓다는 것에 놀라고, 방풍림처럼 대나무숲을 바리깡 밀듯이 밀어놓은 것에 두 번 놀랬다.


   그리고 차밭(아니 얼마전 까지도 대밭 약 6,000평)을 들어가면서 밀생한 차나무의 굵기를 보건데 제법 오래된 것이라는 것에 세 번 놀란다. 이 차밭의 주인은 곡성녹차연구회의 박춘식회장이었다. 이 대밭을 사서 보니 그 안에 차나무가 있었다는 데, 처음엔 대나무가 너무 우거져서 들어가기 힘들 정도 였다고 한다. 그래도 차철이면 이웃 구례에서 차를 따러 오는 것을 보았고, 윗대 어른들께 차를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고 하였다. 이곳 당동에 곡성관아터가 있었다. 어쩌면 이 곡성관아가 죽로차밭의 기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대를 베고 드러난 찻잎들은 너무 반가웠지만 따서 그 본색을 드러낼 준비가 아직 덜 된 것이 아쉬웠다. 유기농 차밭에서 풀과의 전쟁이 필수이듯이, 이곳 죽로차밭은 대나무와의 전쟁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당동 죽로차밭을 보면서 그동안 고민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차밭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함께 하였다. 건강한 차와 맛있는 차 그리고 많은 수확량 어쩌면 이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다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산의 수도암을 들렀다. 다른 곳에 이미 다 진 산벚나무 꽃이 달려 있고 진달래가 덤성덤성 보인다. 이름 그대로 아직 초봄의 기운이 남아있다. 차를 찾아보았지만 그런 우리를 알 수 없는 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계시던 일소스님이 ‘여긴 추워서 차가 없어요.’ 그랬다 그 곳에는 차는 없었다. 그러나 차를 사랑하는 한 차인이 있었다. 스님 신도가 만들어 보내준 우리 발효차 한 잔은 한기를 느끼던 나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무심한 듯 차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이곳 곡성으로 나를 불러 내린 곡성현감 신순에 대해 알려줄 옥과의 신인수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광주로 나들이를 갔다가 일부러 이번 취재 때문에 서둘러 돌아왔다고 했다. 작은 시골 다방으로 갔다. 신인순씨도 신순과 같은 고령신씨라 고령신씨 문중으로 신순에 대한 물어보자 고령신씨 대종회에 연락을 취하고, 늘 궁금하던 이에이리가 곡성에서 만났던 정봉태의 후손들에게 까지 연락을 하여주었다. 정봉태가 소장하였던 책들의 소재파악을 하였으나 지금 곡성에 없다는 것만 확인하였다. 그리고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곡성의 역사와 문화를 그리고 우리차를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은근한 내공이 느껴졌다. 가까운 시간 안에 문화해설사로 봉사하는 신인수의 눈을 통해서 곡성을 다시 한번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시 섬진강 강변의 새롭게 재현된 추억의 기찻길을 생각해 보자. 옛 기관차를 관광열차로 꾸며놓은 일본 시즈오까의 한 차밭이 생각난다. 녹차축제 기간 동안 기차역을 차실로 꾸며 놓았는데, 82세의 한 할머니가 따뜻한 차한잔을 정성을 다해서 우려서 건네 주셨다. 그때 나는 그 할머니에게 ‘이곳 사람들, 차를 왜 마셔요’ 하고 물었다. ‘차를 마셔서 건강하고, 차를 만들어서 밥 먹고 살고, 무엇보다도 차를 좋아하는 벗들을 만나지요’라고 하는 그 할머니의 대답에 나는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일본의 녹차강국이란 힘은 바로 이런 할머니의 생각과 실천적 행동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건강한 차, 경제성이 있는 차, 그리고 문화적 연결고리를 갖춘다는 것은 차산업조직을 갖추는 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골 촌로의 평펌하고 쉬운말 속에 나름대로 스스로 터득한 진실이 숨어있었다. 몇가지 정보를 확인하고자 농업기술센터의 신진용씨에게 전화를 하려고 명함을 찾았다. 그 명함에 정답이 있었다. <자연 속의 가족마을>.나는 그것을 차문화 함께 녹여보았다. <곡성, 자연속의 차인 마을>

 

   이제까지 자하 신위에게 보내진 곡성의 죽로차에서 1936년 이전에 ‘음건증청’의 발효 잎차로 발전해나가는 곡성죽로차의 모습을 여러기록들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그 중심에 다송자가 있었을 것이다.

   차는 우리 역사 속에 발전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였지만, 최소한 내것을 남의 것이라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 망각 속에 잊혀진 곡성의 죽로차와 음건증청 발효차는 곡성차의 가능성을 키워주는 밑거럼이 될 것이다. 또한 <조선의 차와 선>에 보여주는 곡성차는 죽로차에서 임야에 산재한 차로, 생태적 환경변화를 하고 있고, 떡차에서 잎차로 변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을 오늘의 말로 표현하면 친환경재배와 제다기술의 혁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찻잔을 나를 맑게하고 나를 비우는 키에 다송자의 차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적용시켜도 조금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주1)

시절이 태평하면 봉황이 난다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이고 대나무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안고

단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이 봉황의 신화가

 

도선은 조선풍수의 대가이고 윤다는 광자대사이다.

 

“짐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란세를 구제하기 위해 흉폭한 무리들을 주살하였으니, 어떻게 하면 생민(生民)을 잘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되 “전하께서 오늘의 묻는 그 마음을 잊지 않으시면 국가가 부강하고, 생민(生民)이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