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관곡지에서

2014. 8. 30. 05:55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시흥 관곡지(官谷池)에서


                        / 20140827 수요일, 갬 & 맑음



 금강초롱을 보고온 그 이튼날

함께 가신 일행께서 연락을 주셨다.


시흥 관곡지에 붉은 꽃이 피는 회화나무가 있으니

함께 보러 가자는 전갈이다.

시흥 관곡지에 오전에 도착하여 보니 

회화나무의 꽃들은 이미 지고 난 후라

작고 길쭉한 열매 꼬투리들이 커가고 있었다.


이왕에 나선 김에 시흥시에서 조성한 연꽃테마공원을 둘러보다.

당초 계획은 연꽃밭 정자에 올라 

연향을 훈향(薰香)하며 들꽃다회를 할 예정으로

그리 가볍지 않은 차배낭을 메고 갔었으나

일행 중 한분이 오후에 집필사무실에 간다고

하는 바람에 다음으로 미루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차산에 올라

한강을 굽어보며 홀로 들꽃다회를 하다.







백련(白蓮)


















































홍련(紅蓮)







황련(黃蓮)








































 전당연 : 옥순(玉純) 


- 강희맹이 중국사신길에 남경 전당지에서 연씨를 얻어와 사위집인 안동 권씨 가문의

작은 연지에서 키워온 꽃잎의 끝부분에만 분홍색이 드는 품종.


일찍 꽃이 피는 종류의 연으로 이미 끝물이다.

담 너머로 들여다 본 안동 권씨 한옥저택  앞마당의 작은 연지에서는

이미 연꽃이 다 지고 연밥만이 익어가고 있었다.








분홍연






              시흥시 향토유적 관곡지


    관곡지(官谷地)는 조선전기의 명신(名臣)이며 농학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姜希孟, 1424~1483)선생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평소 농학 발전에 대해 깊은 연구와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은 

세조 9년(1463년)에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다.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씨를 채취해 귀국한 후, 

당신 안산군(安山郡) 초산면(草山面) 하중리(下中 里)였던 

현 시흥시 하중동의 작은 연못 (위치:하중동 208)에 재배를 하게 되었다.

 

   강희맹 선생이 채취해온 전당연은 다른 연꽃과는 달리 꽃의 색이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꽃의 끝부분은 담홍색을 띠는 연꽃이었는데, 

이 품종은 이 곳에서 재배에 성공함에 따라 이후 널리 퍼질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안산군의 별호를 세조 12년(1466년)부터 '연성(蓮城)'이라 

부르게 되기도 하였다. 

이후 관곡지는 수초가 성하여 황폐해졌는데, 헌종 10년(1844년)에 

안산군수로 부임했던 권용정이 이듬해 봄 장정들을 동원하여 못을 파내게 하였다. 


  여름이 되자, 연꽃의 잎이 중국 전당의 것과 같이 두 줄기 자라나게 되었다.

권용정은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이계조에게 서목을 올려 

못을 관리하기 위하여 여섯명의 연지기를 두도록 청하였는데, 

이 서목이 받아들여져 관곡지에는 연지기가 배치되었으며, 

혹시 연지기에 결원이 생기면 마을 주민이 이를 대체하도록 하였다. 

이들 연지기에는 각종 노역, 부역, 포세, 양곡세를 제외시켜주고 

오직 못만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이로부터 전당연의 종류가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내력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유는 권용정이 관곡지의 유래와 수축 경과, 

연지기 배치에 대한 사항을 정리하여 '연지사적 (蓮地事蹟)'과 

'연지수치후보초(蓮地修治後報草)'라는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관곡지는 강희맹 선생의 사위인 사헌부 감찰 권만형의 가문에서 

현재까지 대대로 관리해 오고 있다. 


현재 관곡지 옆의 너른 들판에는 시흥시에서 연꽃테마공원이 

조성되었으며 연을 재배하고 있다.







 분홍옥순(玉純) 


- 홍련과 옥순의 자연교배종으로 당초의 옥순보다는 분홍색이 진하다.








홍련


























겹홍련







강희맹이 씨를 얻어온 옥순이 : 반개화주(半開花株)








옥순이 : 만개하였을 때.














옥순이와 홍련의 자연교잡종으로 보인다.
































물칸나







옥순이와 홍련의 자연교잡종으로 보인다.







옥순이























































속동문선 제1권 (續東文選 第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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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辭)
향산사(香山辭)

강희맹(姜希孟)

산이 높고 깊어 가볼 수가 없기에 / 山之高深兮不可以往觀
오뚝이 앉아 늙으며 이 속세에 사네 / 兀然成老兮薄此塵寰
머리털 희끗희끗 관 속에 가득 / 鬢髮蕭疏兮戴盈冠
세월이 하도 빨라 홍안이 시들었네 / 白日易暮兮凋朱顔
오로가 몸에 감겨 허리와 다리 시큰하니 / 身纏五勞兮腰脚酸
험한 산, 위험한 바위를 내 어이 올라가리 / 陟巚凌危兮羞所難
꿈에는 높은 봉에 오르건만 / 朝馳神遊兮躡巑岏
깨고 나니 그대로 누워 있는 몸 / 返故居兮形開質頑
서로 가는 스님 보내며 긴 탄식을 발하노니 / 送師西歸兮發長歎
날개 없어서 함께 오르지 못함이 한이로세 / 恨無翼兮同躋攀

[주D-001]오로(五勞) : 의서(醫書)에, “사람의 병드는 원인에 오로(五勞)가 있다.”하였는데,
 심로(心勞)ㆍ신로(腎勞) 등 다섯 가지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옥순이 반개화주 


- 꽃봉오리일 때에 꽃잎 전체가 연분홍색이였다가 

만개하면서 

연분홍색은 꽃잎 끝부분에만 남는다.







강희맹 (姜希孟)의 생애



   돈녕부 지사 강석덕(姜碩德)의 차남이자 소헌왕후의 조카이며, 

문종,세조와 이종간이다.(강석덕은 세종의 아랫 동서)[1]

세종 29년(1447년) 문과 친시에 을과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예종 때 남이를 죽인 공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성종 때에는 이조판서·좌찬성 등을 지냈다.


     그는 서화와 문장이 뛰어났으며, 그가 죽은 뒤 서거정에 의하여 유고가 편찬되었다. 

저서로 <사숙재집> <촌담해이> 등이 있다.

142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44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라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장과 서화에 모두 뛰어나 

도화서의 제조를 맡기도 하였다.[1] 

묘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87호로 지정되어 있다.[2]


                                         - 위키백과 자료에서 .....


****** 강희맹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지은 강희안(姜希顔)의 친아우이다.








속동문선 제1권(續東文選 第一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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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賦)
쌍계재부(雙溪齋賦)

강희맹(姜希孟)

신도 왼편 경계 / 神都左界
성균관 동쪽 가녁에 / 泮宮東隈
풍운이 모여 흩어지지 않고 / 風雲儲其不散
골짜기 깊고 훤칠한데 / 洞壑窈而重恢
아름다운 나무가 울창하고 / 鬱交柯兮佳木
돌계단에 아롱진 이끼 / 斑石磴兮莓苔
냇물이 두 갈래로 나뉘어 / 川分派兮釵股
돌웅덩이를 지나 감돌며 / 承石窩兮盤洄
구슬을 울리는 듯 / 或淙潺而鳴環兮
살랑살랑 흐르다가 좍좍 떠들어대네 / 或㶁汨而喧豗
물이여, 너는 골짜기에서 얼마쯤 흘러나와 / 曾出洞兮幾許
이렇듯 문파를 흘려 재주를 기르느냐 / 潤文波兮育才
범인들은 보고도 몰라 / 凡庸晲視而莫察兮
이 좋은 땅을 숲에 묻히게 하였으니 / 令勝地埋沒乎草萊
하늘이 아끼고 땅이 비장한 이 곳은 / 固天慳而地祕兮
현영을 기다려 반드시 개척되느니 / 待賢英而必開
어와, 금헌선생은 / 於是琴軒先生
자영의 후손 / 紫纓之孫
화벌의 계통 / 華閥之胄
세속을 싫어하고 도를 즐기니 / 厭紛樂道
명랑한 정신에 빼어난 기상 / 神朗氣秀
백가서에 정통하고 / 膾炙墳典
글씨도 잘 써 / 糠粃史籀
젊은 나이에 노성한 그릇 / 羌年少而器老
덕도 많고 재주도 부하네 / 固德全而才富
가슴 활짝 헤치니 광풍제월 / 豁胸襟兮霽月
높은 기운이 우주에 드날리네 / 騁逸氣兮宇宙
귀가자제 버릇을 버리고 / 脫氣習兮紈綺
천석의 고황을 안았으니 / 抱膏肓兮泉石
칩영에 몸이 매었으나 고상한 생각이며 / 縶纓簪而遐思兮
그대로 조시를 못 떠나고 있으면서도 / 淹朝市以滯跡
이제 서울안을 훑어보아 / 爰相觀於都中兮
구석구석 다 찾았네 / 靡荒陬而不索
반수를 찾아 돌아가다가 / 尋泮水以探討兮
마침내 그 근원에서 좋은 곳을 얻으니 / 竟窮原而有獲
산을 등진 남향한 자리 / 實面陽而負陰兮
집터도 좋을씨고 / 宜君子之攸宅
가시덤불 베어내고 깊고 좁은 곳 넓히고 / 乃翦荊棘闢深窄
재목을 모으고 이엉을 이어 집 한 채 지어내니 / 誅茅鳩材爰始規畫
뜰은 말을 돌릴 만하고 / 庭可旋馬
마루는 자리를 벌일 만한데 / 堂容列席
질박도 않고 사치도 않게 / 不朴不侈
한 자, 한 도도 격식대로 / 靡違度尺
밝은 방 여니 명랑하고 / 開煥室以明朗
바람 맞이하는 헌함은 탁 트였네 / 疏風而四闢
선생이 그 안에 거처하며 / 先生偃息乎其中
조석으로 노래부르면서 / 嘯歌乎昕夕
우주의 신비를 관찰하고 / 乃妙觀於玄化
사시의 변천을 눈으로 보네 / 覩四時之流易
청양이 철을 알아 / 至若靑陽應候
봄빛이 하늘에 차면 / 韶華彌空
언덕의 풀이 뾰죽뾰죽 / 岸草欲芳
흙이 차츰 풀리고 / 土脈初融
시냇가의 버들 누른빛 흔들고 / 溪柳搖黃
동산의 복숭아꽃 빨간빛 자욱 / 園桃蒸紅
맑은 바람에 푸른 솔이 노래하는데 / 淡風煙兮碧松
명륜당에선 글공부하는 소리 / 咽絃誦兮夫子之宮
쌍계 해맑게 흘러 / 雙溪泓澄以流注兮
석탄을 내려가 더욱 영롱쿠나 / 下石灘而玲瓏
선생이 새로 지은 봄옷을 입고 / 先生於是佳春服之旣成
관동 6, 7명을 짝하여 / 偕六七之冠童
증점의 비파를 울리다가 뜻을 말하면서 / 鏗點瑟以抒情兮
기수에 목욕하는 높은 자취를 사모하네
/ 慕浴沂之高蹤
4월달 청화한 계절 / 至若淸和届節
녹음이 깔렸는데 / 綠陰重浮
제비는 솔솔 바람에 / 紫燕兮輕風
꾀꼬리는 저 높은 언덕에 / 黃鸝兮崇丘
이윽고 더운 햇볕이 중천에 올라 / 俄畏景之當天
붉은 구름도 머물러 떠나지 못할 때도 / 駐彤雲兮不流
푸른 쌍계는 싸늘히 흐르며 / 雙溪淸泠寒碧
웅덩이에 슬슬 감도는데 / 盤渦旋油
선생이 세모시 적삼으로 바람을 쐬며 / 先生披細葛以涵風
서늘한 그늘아래 서성대누나 / 趁涼陰而夷猶
혹시 장마비가 지리하고 / 其或梅雨翛翛
음침한 구름이 먹먹하여 / 陰雲漠漠
앵두 열매는 타는 듯 / 山櫻兮欲然
새들도 날개가 젖어 갈 곳을 몰라 할 제 / 濕鳥兮無托
쌍계가 여러 냇물을 받아 형세가 커져 / 雙溪承衆流以勢大
빈 산에 쾅쾅 쏟아져 흐르네 / 響空山而噴薄
선생이 이에 지팡이를 손에 쥐고 / 先生於是枯藜在手
짚신을 발에 신고 / 草屩承脚
근본이 있으면 줄곧 흐르고 / 思有本之不捨
근원이 없으면 금방 마르는 물의 이치를 생각하네 / 料無源之易涸
이윽고 가을 되어 금풍이 설렁대고 / 至若金風槭槭
하늘은 해맑은데 / 瑤宇湛湛
가벼운 서리가 수풀에 내려 / 抹輕霜兮林表
단풍잎이 무르익으려 하고 / 絢殷紅兮欲酣
국화는 산기슭에 향기롭고 / 菊芳兮山阿
연잎은 찬 못에 거꾸러졌다 / 荷倒兮寒潭
기분 더욱 상쾌하고 한편으로 쓸쓸도 하니 / 增爽塏以淒澟兮
멋대로 그윽한 경지를 탐방할 때로구나 / 恣躬搜與幽探
쌍계가 거울처럼 맑고 쭉빛처럼 파란데 / 雙溪澄淸若鏡綠淨如藍
선생이 이에 술병을 열고 냇물가에 앉아서 / 先生於是開芳樽以臨流
아름다운 손들과 함께 노니네 / 與佳客兮相參
혹시 매미소리 그치고 / 其或玄蟬響息
밝은 달이 떠올라 / 素月騰輝
사람 없는 고요한 밤에 / 夜岑寂以無人兮
뜰안에 귀뚜라미 울 적이면 / 咽寒螿兮庭闈
쌍계는 싸늘히 달을 비추어 / 雙溪泠泠以耀月兮
찬란한 은과 수은을 뿌린 듯 / 爛銀汞之四圍
선생이 이에 / 先生於是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아양곡을 타는구나 / 撫枯桐以奏曲兮
이윽고 겨울 / 托洋峨於瑤徽
북풍이 울부짖고 / 至若朔吹號怒
장림이 텅 비었는데 / 長林一空
추위가 사람에게 다가오니 / 閔薄寒之中人兮
등걸을 피워서 방을 덥히네 / 煨榾柮以煖烘
쌍계는 얼음이 얼어 아로새기고 / 雙溪成氷以雕鏤兮
거문고를 울리듯 징동댕동 / 鳴琴筑而丁東
선생이 이에 / 先生於是
저녁 술에 얼근히 취하여 자용구를 입고 / 倚暮酣襲紫茸
양지 언덕에 서성대며 / 立陽坡而延佇兮
낯을 에는 바람을 쏘이네 / 傲刮面之陰風
혹 검은 구름 뭉게뭉게 모이고 / 其或頑雲結葉
함박눈이 꽃처럼 나부껴 / 密雪飄花
공중에 체 치며 젓나무에 쌓이고 / 篩空羃檜
구렁을 메우고 벼랑에 가득할 제 / 塡坑滿崖
쌍계가 얼어붙어 소리가 없고 / 雙溪凍合以無聲兮
은 배암처럼 구불구불 달리면 / 走蜿蜒之銀蛇
선생이 이에 비단장막 젖히고 / 先生於是
사창을 열어놓고 / 揭錦帳拓窻紗
양고주를 따르며 / 酌羊羖之美醞
섬섬옥수 시켜서 등을 긁히며 / 令纖手以搔爬
아름다운 노래에 기쁨이 더해 / 度妙曲而增懽
만당의 화기가 봄인 듯하네 / 譪一堂之春和
네 철이 분분히 번갈아드나 / 紛四序之代謝兮
광경은 이렇듯이 그지없으니 / 信光景之無窮
지척에 속세를 격하여서도 / 隔凡塵於跬步兮
완연히 여기는 선경이로다 / 宛一入乎壺中
노래로 고하여 가로되 / 誶曰
지신이 기다림이 있어 / 地靈有待
비장을 열게 하였네 / 發祕藏只
가시덤불 베어내자 / 剗乃荊榛
흙이 단단하고 / 土燥剛只
뜰은 말을 돌릴 만하고 / 庭可旋馬
손이 마루에 오르네 / 客登堂只
지은 집 아늑할사 / 築室孔安
군자가 편안하네 / 君子寧只
군자가 편안하거니 / 君子寧只
천 년이나 살리로다 / 享千齡只
거듭 고하기를 / 重爲告曰
산중에 깊이 갇혀 오막살이에 살면 / 汨囚山兮蔽蓬蓽
세속을 영영 떠나 혼자서 즐기니 / 甘長往兮樂幽獨
성조를 멀리함이 무엇 즐거운가 / 奚所樂兮逭聖朝
물고기와 벗하고 사슴과 짝하는 것 / 侶魚蝦兮友麋鹿
나는 이 쌍계를 사랑하노니 / 我愛雙溪兮
강호도 아니요, 산림도 아니라 / 匪江湖與山林
벼슬에 얽매어서도 마음은 연하로세 / 跡拘簪組兮煙霞心
나도 가서 좇으려 하나 동부가 깊도다 / 欲往從之兮洞府深
무엇으로 선물할까 쌍남금으로 하리라 / 何以贈之兮雙南金

[주D-001]문파(文波) : 학문하는 반궁(泮宮) 앞으로 흐르는 물이기 때문에 
문파(文波)를 흘렸다 한 것이다.

[주D-002]천석(泉石)의 …… 안았으니 : 당 나라 전암(田巖)이 벼슬을 마다하고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임금이 지나다가 묻은 말에 답하기를, 
“신(臣)은 연하고질(煙霞痼疾)이요, 천석고황(泉石膏肓)입니다.” 하였다. 
그것은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성벽(性癖)이라는 뜻이다.

[주D-003]선생이 …… 사모하네 : 공자가 한가한 때에 여러 제자에게 뜻을 물었더니, 
다른 이는 각각 포부를 말하는데 증점은 비파를 타다가 놓으며, 
“저는 모춘(暮春)에 춘복(春服)을 새로 지어 입고 
관자(冠者) 5~6명과 동자(童子) 6~7명을 데리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고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시 읊으며 돌아오리다.” 하였다.

[주D-004]무엇으로 …… 하리라 : 진(晉) 나라 장재(張載)의 〈
의사수(擬四愁)〉에서 나온 한 구절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 한국고전종합DB 자료 중에서.... 발췌






홍련(紅蓮)


































                        애련설(愛蓮說)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



 

내가 오직 연을 사랑함은                  予獨愛蓮之(여독애련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고        出於 泥而不染(출어어니이불염)  

 

맑은 물결에 씻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濯淸漣而不妖(탁청연이불요)

 

속이 소통하고 밖이 곧으며                 中通外直(중통외직)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기 때문이요.   不蔓不枝(불만불지)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고,                   香遠益淸(향원익청)

 

우뚝 깨끗이 서 있어                          亭亭淨植(정정정식)

 

멀리 바라볼 수는 있으나                    可遠觀 而 (가원관 이)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不可褻玩焉 (불가설완언)

연꽃을 사랑한다. 

 

 

                            출처: 2014년7월 19일자 조선일보에서 인용 편집 보완 

                             

 


* 연꽃을 군자의 꽃이라 말했던 주돈이의 연꽃 사랑은 각별하다.

 

    위의 글귀가 들어있는  수필(說)   전체를 소개한다.

 

(뜨거운 여름이 되니 곳곳의 연못마다 연꽃 세상으로 변한다.

어디 부여 궁남지며, 전주의 덕진 연못이며, 함평의 연꽃축제뿐이랴.

불같은 여름에 물만 보아도 시원한데 거기에 피어난 연꽃을 바라보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청량함을 더해주는 즐거움이다. 

둥둥 떠 있는 얼음물 위에 수박화채 같은 시원함이다. 

더욱이 연꽃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에 이르면 더더욱 그렇다.

꽃에도 격조가 있고 나름대로의 품격이 있나보다.

여름 한 더위를 연꽃처럼 보내고 싶어서,

연꽃에 관한  짧은 수필 한 편을 소개한다. )

 

 



                       애련설(愛蓮說)


         주돈이(周敦頤: 1017 -1073, 중국 북송) 손광성 역


 

   물과 뭍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에 피는 꽃 가운데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런데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은 그 많은 꽃 가운데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당(唐)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모란(牧丹)을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연꽃을 사랑한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며,

맑은 물결에 남실남실 씻어도 조금도 요염한 빛이 없다.

속은 텅 비어 욕심을 비운 사람 같고 겉은 항상 꼿꼿한 몸가짐으로 서 있으며,

서로 얼기설기 얽혀서 넝쿨 지는 일도 없고 가지를 무성하게 사방으로 뻗어

세력을 확장하는 일도 없다.


   은은한 향기는 멀수록 오히려 맑은데,

게다가 언제나 정결하게 우뚝 서 있는 모습에 위엄이 서려 있으니

멀리서 우러러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서 어루만지며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국화를 보고 세속을 떠나 숨어 사는 선비와 같은 꽃이라고 하고, 

모란을 두고 돈 많은 부자와 권력을 쥔 귀인과 같은 꽃이라고 한다면 

연꽃은 높은 인품을 지닌 군자와 같은 꽃이라고나 할까?


   아, 슬프다. 국화를 사랑한다는 말은 도연명 이후에 들어 본 적이 드물구나. 

그러니 세상에서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몇이나 더 있을는지. 

     의당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많을 테지만.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의미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함을 뜻합니다.

 

   유교(儒敎)는 북송(北宋) 중기에 주돈이(周敦頤 : 1017-1073)가 나와서《태극도설(太極圖說)》과《통서(通書)》를 저술했고, 그 뒤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사서(四書 : 大學·中庸·論語·孟子)를 정하여 성도(聖道)를 밝히었으며, 주자(朱子)가 이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서의 경학(經學)을 수립하여 소위 송학(宋學)을 대성(大成)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풂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은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애련설(愛蓮說)〉 한 편은 글 안에 도학(道學)의 향기도 풍기지만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춘릉(春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속이 담박 솔직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고 평하고 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앞에서 말한 뜻이거니와,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에 비유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출처 : 엠파스 한국학마당
















단원 김홍도의 하화청정도(荷花淸淨圖)


                         




하화청정도(荷花淸淨圖)


   연꽃은 불교의 상징화이나 주돈이(周敦?, 1017~1073)의 <애련설(愛蓮設)>에서처럼 

기존의 사군자와는 별개로 홀로 덕을 지닌 군자로 지칭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자태는 화조화의 소재로 일찍 그려졌고 시문(時文)으로도 빈번히 읊어졌다.


   화사한 설채뿐 아니라 먹만으로도 그려져 문인화의 한 소재로도 부각되었다. 

화조화로는 연꽃만이 아닌 그 아래 깃이 고운 오리나 호반새등을 함께 그리기도 했다.


   보존상태가 양호한 이 그림은 붉은 색의 연꽃과 싱그러운 푸른 연잎 등 

선명한 설채와 섬세한 묘사기법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다. 


   화면 하단에 일정 범위에 담청(淡靑)을 옅게 입혀 수면 분위기만 암시적으로 

나타냈다. 화면 우측에 뾰족한 둥근 꽃잎을 지닌 첨원대판연화(尖圓大瓣蓮花)는

 화사함을 뽑내며, 화면 좌측에 꽃잎을 지운 연밥을, 그리고 연잎 또한 이미 

잎 가장자리가 말아 들어가는 것과 피려고 하는 연잎인 장방하(將放荷)와 

접혀진 연잎 등 다양한 형태이다. 화면 좌상단에는 짝짓기 중인 붉고 푸른 잠자리를 

나타내 만개한 연꽃과 더불어 시선을 양분케 한다.


 

- 네이트 지식에서....
















황련(黃蓮)


































튜우립 파프리카







푸름이터널( Green Tunnel ) 에서 ....



































황련






























연꽃과 민화  그림 나라 

2005/08/05 14:29

복사http://blog.naver.com/solbiyaa/12001603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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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화(民畵)는

 단순한 장식 그림으로 다남(多男),부귀공명(富貴功名),길상(吉祥) 등의 의미를 담은 민중의 그림이다. 
   근대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民畵'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지만 이러한 민중의 그림은 '세화(歲畵)'에 그 바탕을 두고 '속화(俗畵)'라는 장르 밖의 시각으로 당시에는 일상적으로 불려졌다.
   특히 민화는 관청 도화서(圖畵署) 화가의 규식적인 틀을 벗어나 넓은 개념으로 민중의 생활문화 공간이 창출한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의미를 눈으로 확인시키는 그림이다.

   이런 민화 속에서 우리는 연꽃에 관련된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연꽃은 순결,’순수한 마음’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는 연꽃은 거머리가 득실거리는 더러운 진흙에 뿌리를 내리지만 물밖으로 웅장한 잎과 맑고, 순박한 꽃을 피어 올려 험난한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고달픈 중생을 구원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으로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으로 추앙받았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흙탕물에 피지만, 조금도 그 더러움에 물들지않고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혼탁한 사바세계에 살아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진여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보살(菩薩)은 홀로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피안열반의 세계로 건너가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생사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화과동시(花果同時)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을 연밥(연실.蓮實)이라 하는데, 즉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인과(因果)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인과(因果)의 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중생들은 이 인과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온갖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연꽃의 봉오리는 마치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연꽃의 생김새를, 축을 중심으로 방사되는 바퀴살에 비겨, 연꽃은 윤회(輪廻)의 가르침을 표상하는 것으로도 여긴다. 따라서 연꽃은 윤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고구려와 백제 고분 벽화에서 연꽃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쌍영총(雙楹塚)의 경우, 천장 중앙에 큰 연꽃이 배치되어 천계(天界)의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 백제의 부여 능산리 고분벽화의 경우 천장에 그려진 연화운문도(蓮花雲紋圖)는 우미하고 섬세한 백제적 감각으로 천계를 나타내고 있다.

    연꽃은 바퀴같이 생긴(法輪) 꽃 모양과 진흙 수렁에 뿌리를 내리고 맑은 꽃을 피우므로 부처 또는 그 대좌의 상징으로 쓰인다. 특히 꽃잎 하나하나가 바퀴살과 같아, 현존의 끝없는 순환에 관한 가르침을 암시한다. 불타는 신성한 연꽃위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흔히 묘사된다. 또, 연꽃은 팔보(八寶), 즉 불타의 발바닥에 그려진 상서로운 기호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연꽃 그림은 불교와 관련된 이외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우리나라에서는 즐겨 그려지고 있으며, 기쁜 감정을 끌어 올리고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시원한 그림으로 존중 받았다. 흙탕물 같은 더럽혀진 연못에서도 곱고 사랑스러운 꽃이 핀다고 하는 감동은 자연히 연꽃에 대한 정감을 끌어 올렸을것이다
 
 
우리의 민화에서는 종교적이든 아니면 종교를 떠나서든 연꽃이 자주 등장한다 .
그 중 꽃과 새가 어우러지고 나비가 나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을 화조도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징을 담고 있기도 한다.
 
 
민화 관련 사이트
 
http://www.minhwa.co.kr/ 
http://www.folkart.co.kr/main/index.htm 
 


 
 
<연압도>


 
 
<연화쌍압도>
 
 
 
우리 나라의 민화는 문자도에서도 연꽃이 쓰여짐을 볼 수 있다.
 
 
 

 


 


 
 
또한 현대에 그려지는 민화 중에서 
이충휘씨의 작품에 연꽃을 주제로 한 연화도를 살펴 볼 수 있다.
 
http://www.hyangto.pe.kr/L13.htm
네이버 블로그 <솔비야> 솔비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출처] 연꽃과 민화|작성자 솔비야

******* 민화 그림이 배꼽일 때 수정버턴을 꾹!! *******













관곡지 주변을 지나는 길에 이 묘를 보고 아하, 이 근처에 강희맹의 묘가 있었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정작 관곡지 연꽃테마파크의 연꽃이 만발한 시기가 되어서야 강희맹 선생이 생각났습니다. 사실, 처음엔 요기가 강희맹의 묘인 줄 알았다는~ ㅎ. 


관곡지와 시흥연꽃테마파크에는 손이 닿지 않는 곳 연못 위에 피어 아름다운 꽃, 애타게 바라만 보아 더 애틋한 연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 고고함을 간직하고 은은한 향기를 품은 연꽃. 

중국에서 맨 처음 연꽃씨를 가져다 심은 곳이 관곡지, 그렇다면 중국에서 연꽃씨를 가져온 이는 누구?
조선 시대 강희맹 선생이 1463년 중추원 부사(사신)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면서 연꽃씨를 우리 나라에 들여왔고 그 연꽃씨를 처음 재배한 곳이 지금의 시흥 관곡지라고 합니다. 연꽃을 볼 시기가 되자 생각나는 사람, 강희맹은 누구인가요?

조선 초기 세종 세조 성종 대에 걸쳐 활동했던 뛰어난 학자이자 관리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인 사숙재(私淑齊)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진주강씨로 조선 초기 시 글씨 그림으로 유명한 강희안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1424년 태어난 강희맹은 1447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좌랑, 집현전 직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세조 9년(1463)에는 중추원 부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성종 13년(1482)엔 좌찬성을 역임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쳤습니다. 살아 생전에는 이곳에서 기거하지 않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줄곧 이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사숙재 강희맹(1424∼1483) 선생의 묘가 있는 사당 연성재 앞에 마주섭니다.


묘역 입구에서 선생의 재사(齋舍)인 연성재(蓮城齋)를 먼저 만납니다만 문은 굳게 잠겨있었습니다.

야트막한 담장을 따라 뒤로 돌아드니, 

강희맹선생의 묘역과 최근에 세운 듯한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고 그 옆으로 강희맹의 형 강희안선생을 모신 단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신식 신도비 위쪽으로 강희맹 선생의 묘역 왼쪽 아래에는 성종 19년(1488)에 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서거정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이 글씨를 썼다는 이 신도비는 묘와 함께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각 안에서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강희맹선생의 묘 및 신도비는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기념물 제87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관리는 진주강씨 종친회에서 맡고 있습니다. 양 옆 갈래로 난 계단을 올라 만나는 묘가 강희맹의 묘입니다. 그 아래 위에도 묘가 있습니다.


강희맹은 자는 경순, 시호는 문량, 호는 사숙재·국오(菊塢)·운송거사(雲松居士)·무위자(無爲子)·만송강(萬松岡)이며 본관은 진주입니다. 옛 양반들은 어릴 적부터 자 , 호, 시호라 하여 부르는 별칭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강희맹은 문장 실력이 뛰어나 당대 으뜸이요, 그림과 시에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강희맹은 최초로 농서를 저술한 농학자로 <금양잡록> <촌담해이> <사시찬요> <사숙재집>등의 농서를 저술하였으며 <신찬국조보감>과 <경국대전> <세조실록> <예조실록> 등 역사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고, 성종 때는 <동문선>과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서례> 등 역사적인 가치가 높은 저술의 편찬에도 참여해 학자로서의 위상을 떨쳤다고 합니다.

묘는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독특한 모습의 문인석이 있습니다만 생전 그의 성품을 닮아 장명등이나 망주석 따위는 세우지 않아 단촐한 모습이었습니다.


묘는 높이는 3m, 둘레가 7m가 되니 가히 고분에 견줄 만큼 크고 높다랗습니다.

묘비에는 '議政府左贊成晉山君文良公姜公之墓 貞夫人安氏?葬(의정부좌찬성진산군문량공강공지묘 정부인안씨부장)'이라 명문되어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강희맹의 묘 앞 석상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귀를 푹 덮는 모자를 쓴 독특하고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옷매무새는 단조로운데 조선시대 전형적인 문인석은 전기에는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고 홀은 든 모습이었으며 후기에는 금관조복에 홀을 들고 있지만 강희맹 묘역의 문인석은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맞잡은 자세로 기본적인 양식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문신상과는 달라보입니다. 

강희맹의 묘 아래에는 신도비 비각이 있으며 사당을 중심으로 맞은편으로 형 강희안의 묘가 보입니다.

또한 강희맹의 묘역 옆줄로 선생의 양부인 강순덕(이숙번의 사위. 사헌부 감찰)의 묘를 비롯하여, 선생의 장남 강구손, 강태수, 증손 강복지, 고손 강극성의 묘 등이 세로 한 줄로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 앞에는 하지골(荷池谷, 연꽃 연못의 뜻)이란 마을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단지의 아파트로 조성되어 있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강희맹의 묘를 살펴보고 내려오는 길에 연성재를 살짝 엿보았습니다. 연성재 뒤 건물은 강희맹의 시호인 문량을 써 문량공사우라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사우니 영우니 하는 말들은 사당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연성재를 돌아 강희맹의 형 강희안의 묘로 발길을 옮겨봅니다. 


강희안의 묘에서 바라본 동생 강희안의 묘입니다. 맨 왼쪽에 있는 것이 강희안선생의 묘이고 가운데는 그의 후손들의 묘입니다. 처음에는 후손들의 묘가 있는 곳에 강희안의 묘가 있겠지 생각했지 뭡니까. 왜냐하면... 가운데이니까요~. ㅎ. 


강희안선생은 자는 경우, 호는 인제, 강희맹의 형입니다.

희맹 또한 시, 그림, 글씨 등에 뛰어나 세종때에 안견, 최경 등과 더불어 3절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1441년(세종23)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재, 돈령부 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여 1443년 정인지등과 세종이 지은 정운 28자에 대한 해석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과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했으며, 문집으로 원예에 관한 <양화소록>이 있으며 그림으로는 <고사관수도> <산수인물도> <강호안거도> 등이 전하는데 산수화, 인물화 등 모든 부문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비문으로 보아 강희안의 묘는 위에, 아래에는 배위 김씨 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옆으로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만 부인의 묘소 크기가 매우 왜소합니다.




500여년의 연꽃 이야기가 숨어있는 연성마을 관곡지
 시흥연꽃테마파크에서는
,

오는 8월 11일(토) ~12(일)일에 연꽃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연꽃이 다 지기 전에 다시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글. 사진 이은주 (경기소셜락커 esilvia)




- 경기도 공식 블로그 < 달콤한 나의 도시 경기도 > 글 중에서 전재 ......






 靜一堂遺稿附錄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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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一堂筆帖跋 癸巳[花山權用正] b_111_60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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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於孺人。爲外族。始拜孺人于藥峴第。見其斂襟危坐。氣容靜肅。如對神明。問余所讀何書。又曰。此兒有心。余時雖幼。猶竦異之。及歸問于家大人。乃知孺人德行。實女中君子也。其後又聞孺人善文章工楷書。而秘不示人。余思欲一覽而不得。然先妣與孺人相善。數數致書111_604c問訊。諺字端好。詞理懇到。於是默有所推想者焉。旣而舍伯父誦孺人二詩。且爲之跋。余遂得見其詩。而筆則未也。歲壬辰。孺人下世。坦齋文乃以孺人墨蹟示余。字畫勁正純古。絶無柔媚之態。余不覺凜然起敬。如童年拜孺人時也。又觀遺稿。其詩文皆從義理性命中出。鑿鑿如五穀。淡淡如玄酒大羹。令人充然有得。於是益知孺人天姿之高。學力之深。而其文詞筆法。有所自而然也。孺人備經艱楚。素多疾病。又無血嗣。天之報施。一何舛也。然嗇其祿于身。而昌其名于後。亦理也。以天地之久而視百年。猶一瞥也。其得失孰多少哉。坦齋丈方搜111_604d輯遺稿。將以付梓。又收筆蹟。帖而粧之。欲壽其傳。余竊願載名於末。謹書如右



사숙재집(私淑齋集)   /    강희맹 사숙재집解題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私淑齋集
판심제  私淑齋集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05年刊
권책  12권 5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3.2×16.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소장도서번호  4-6092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2
 저자
성명  강희맹(姜希孟)
생년  1424년(세종 6)
몰년  1483년(성종 14)
 景醇
 私淑齋, 雲松居士, 無爲子
본관  晉州
시호  文良
특기사항  徐居正과 교유
 가계도
 姜淮伯
 都巡問使
 姜碩德
 知敦寧府事
 靑松沈氏
 領議政 沈溫의 女
 姜希顔
 府尹
 姜希孟
 
 順興安氏
 觀察使 安崇孝의 女
 姜龜孫
 右議政
 姜鶴孫
 司評
 女
 
 成世明
 參判
 女
 
 金誠童
 監察
 女
 
 申濂
 幼學
 女
 
 權曼衡
 司果
 姜希曾
 

기사전거 : 行狀(蔡壽 撰) 및 神道碑銘(徐居正 撰)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종 6 1424 갑진 永樂 22 1 1월, 태어나다.
세종 17 1435 을묘 宣德 10 12 2월, 僧 省桑에게 수학하다.
세종 23 1441 신유 正統 6 18 사마시에 합격하다. ○ 徐居正과 교유하다.
세종 24 1442 임술 正統 7 19 順興 安氏와 결혼하다.
세종 26 1444 갑자 正統 9 21 여름, 李尹仁 등과 함께 衿川 衿州山에서 讀書하다. ○ 겨울, 趙籬 등과 함께 黃山 舍那寺에서 독서하다.
세종 28 1446 병인 正統 11 23 여름, 韓繼禧와 함께 三角山에서 독서하다. ○ 겨울, 金謙光 등과 함께 수원 光敎山 昌盛寺에서 독서하다.
세종 29 1447 정묘 正統 12 24 부친이 蔭補로 忠順衛에 나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사양하다. ○ 가을, 문과별시에 장원하여 宗簿寺 主簿가 되다.
세종 32 1450 경오 景泰 1 27 예조좌랑을 거쳐 敦寧判官이 되다.
단종 1 1453 계유 景泰 4 30 예조정랑이 되다.
단종 3 1455 을해 景泰 6 32 直集賢殿이 되고 이어 병조정랑이 되다.
세조 2 1456 병자 景泰 7 33 다시 直集賢殿 知製敎 經筵檢討官이 되고 얼마 후에 同僉知敦寧府事가 되다.
세조 3 1457 정축 天順 1 34 判典農寺事가 되다.
세조 4 1458 무인 天順 2 35 判通禮門事가 되다. ○ 「國朝寶鑑」 수찬에 참여하다. ○ 10월, 儒臣試藝에서 우등하여 예조참의가 되다. ○ 12월, 모친상을 당하다.
세조 5 1459 을묘 天順 3 36 부친상을 당하다.
세조 6 1460 경진 天順 4 37 僧 一菴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를 유람하다.
세조 7 1461 신사 天順 5 38 상을 마치고 僉知中樞 世子輔德이 되다. ○ 예조참의가 되다.
세조 8 1462 임오 天順 6 39 이조참의가 되다.
세조 9 1463 계미 天順 7 40 중추부사가 되다. ○ 進賀使로 중국에 가서 詩文으로 이름을 떨치다.
세조 10 1464 갑신 天順 8 41 공조참판이 되다. ○ 형 姜希顔이 졸하다.
세조 11 1465 을유 成化 1 42 仁順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이 되다. ○ 예조참판이 되다. ○ 5월, 拔英試 甲科에 합격하여 예조판서가 되다.
세조 12 1466 병술 成化 2 43 7월, 登俊試 갑과에 합격하다. ○ 왕이 關東에 거둥하자 問安使로 行在所에 나가다.
세조 13 1467 정해 成化 3 44 知成均館事와 都摠府 都摠管을 겸하다. ○ 9월, 北征 將卒들을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라는 왕명을 소홀히 한 일로 파직되다. 衿陽別業에 退居하다. ○ 開設된 詳定局에서 「經國大典」의 편찬에 참여하다. ○ 12월, 형조판서가 되다.
세조 14 1468 무자 成化 4 45 9월, 예종이 즉위하자 知經筵事를 겸하다. ○ 南怡가 伏誅되자, 世祖에게 그가 兵權을 맡으면 안 된다고 密啓했던 功으로 翊戴功臣의 號를 받고 晉山君에 봉해지다. ○ 6월, 〈訓子五說〉을 짓다.
예종 1 1469 기축 成化 5 46 봄, 宣慰使로 義州에 나가 중국사신 崔安ㆍ鄭通ㆍ沈澮 등을 맞다.
성종 1 1470 경인 成化 6 47 晉山君에 封해지고, 佐理功臣의 鐵券을 받다. ○ 세조ㆍ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
성종 2 1471 신묘 成化 7 48 判敦寧府事로서 知經筵事를 겸하다.
성종 3 1472 임진 成化 8 49 8월, 세조ㆍ예종실록이 완성되자 梁誠之와 함께 忠州史庫에 奉安하다.
성종 4 1473 계사 成化 9 50 병조판서가 되다.
성종 5 1474 갑오 成化 10 51 1월, 형 姜希顔의 유고인 〈養花小錄〉을 모아 世稿 뒤에 붙이고, 그 序를 짓다. ○ 5월, 「五禮儀」를 撰定하고 序를 짓다. ○ 8월, 徐居正이 편찬한 「東人詩話」의 序를 짓다.
성종 7 1476 병신 成化 12 53 상을 마치고 판중추부사가 되다. ○ 〈祁皇華集序〉를 짓다.
성종 8 1477 정유 成化 13 54 이조판서가 되다. ○ 11월, 교지를 받고 元子를 데려와 양육하다.
성종 9 1478 무술 成化 14 55 徐居正과 함께 「東文選」을 찬진하다. ○ 10월, 판돈녕부사가 되다.
성종 10 1479 기해 成化 15 56 12월, 의정부 우찬성이 되다.
성종 12 1481 신축 成化 17 58 知春秋館 判義禁府事를 겸하다. ○ 徐居正과 함께 「東國輿地勝覽」을 찬진하다.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59 2월, 京畿賑恤使가 되다. ○ 3월, 좌찬성이 되다. ○ 왕이 後苑에 거둥하여 諸臣들에게 排律十韻을 짓게 하다. 이에 居首하여 鞍馬를 하사받다. ○ 7월, 〈飜譯金剛經三家解跋〉을 짓다. ○ 10월, 表從弟 沈貞源의 詩文 「寧州日記」의 序를 짓다. ○ 11월, 부인상을 당하다.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60 2월, 병으로 졸하다. ○ ‘文良’(勤學好問曰文 溫良好樂曰良)의 시호를 받다. ○ 4월, 安山郡 職串里에 묻히다. ○ 왕명으로 문집이 간행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 3월, 아들 姜龜孫이 神道碑(徐居正 撰)를 세우다.
순조 5 1805 을축 嘉慶 10 - 10대손 姜柱善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
- - 1938 무인 - - - 姜大喆이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行狀(蔡壽 撰)ㆍ神道碑銘(徐居正 撰) 및 世祖ㆍ성종실록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成宗의 명으로 1483년에 아들 姜龜孫이 수집ㆍ편차하여 甲辰字로 간행하였다.《초간본》 이 초간본은 徐居正의 序를 붙여 17권으로 印行되었으며, 蓬左文庫 朝鮮本目錄에 의하면 17권 4책의 完本이 日本에 소장되어 있다 한다. 한편 淸芬室文庫目錄에는 초간본의 殘本 3권 1책(권6~8)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12행 19자, 20.5×15.0(㎝), 黑口로 되어 있다.
초간본이 不傳함에 따라 1805년에 10대손 姜柱善 등이 문중에 家傳된 原稿本을 모아 이를 刪略ㆍ정리, 12권 5책으로 편차하여 茂長 禪雲寺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다.《중간본》 이 중간본에는 초간본에 빠져있던 〈衿陽雜錄〉을 편차에 첨입하였다. 이 본은 현재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38년에는 姜大喆이 3권 2책으로 편차하여 晉州에서 新活字로 간행한 바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05年刊 중간본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跋(10대손 姜柱善 撰) 및 成宗實錄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12권 5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483년에 지은 徐居正의 序와 목록이 실려 있고, 권1~5는 詩, 권6~10은 文, 권11은 衿陽雜錄, 권12는 附錄이다.
詩는 各體別로 나누어져 있으며 간혹 편찬자의 小註가 붙어 있다. 권1에는 오언절구 9題, 칠언절구 69제, 권2에는 오언율시 18제, 칠언율시 39제, 권3에는 오언고시 27제, 권4에는 칠언고시 35제가 실려 있고, 권5에는 辭 6편, 賦 2편과 사언시 2제, 육언시 1제, 回文體 1제, 歌辭 1제, 一十體 2제, 讚 3제 등 雜體詩가 실려 있다.
권6에는 疏 3편, 敎書 1편, 祭文 5편, 契文 3편, 疏文 1편, 上樑文 1편, 策 1편이 실려 있고, 권7에는 書 4편, 行狀 4편, 碑銘 2편, 銘 1편, 碑陰記 1편, 傳 1편이 실려 있으며, 권8에는 記 11편, 序 16편, 권9에는 說 8편, 권10에는 跋 6편이 각각 실려 있다.
권11에는 〈衿陽雜錄〉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저자가 衿陽別業에서 지내는 동안 禾稼의 名品과 농사의 어려움 등 농사에 관련된 사항을 기술한 것으로 農家ㆍ農談ㆍ農者對ㆍ諸風辨ㆍ種穀宜ㆍ選農謳로 편차되어 있다. 권미에는 1491년에 쓴 曺偉의 序와 姜龜孫의 跋이 붙어 있으며, 序에 의하면 이 〈금양잡록〉은 문집 초간 이후 별책으로 간행되었다가 중간시에 첨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卷次가 없는 附錄으로 門人 蔡壽가 지은 行狀과 1488년에 徐居正이 지은 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권12의 附錄에는 「海東名臣錄」ㆍ「東文選」ㆍ「東閣雜記」ㆍ「保閑齋集」 등 여러 문헌에서 채록한 저자와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권미에는 중간시에 쓴 10대손 姜柱善의 跋과 刊記가 실려 있는데 跋文에는 成宗時에 간행되지 못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필자 : 吳世玉


- 한국고전종합DB 자료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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