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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초대는 결코 빈말일 수 없습니다.
하늘의 비가 땅을 적셔 풍요롭게 하듯, 주님의 말씀은 메마르고
힘겨운 우리 삶에 생기를 주고 알찬 열매를 맺게 합니다.
주님의 초대에 감사와 기쁨으로 응답하며
이 거룩한 미사에 합당하게 참여하도록 마음을 가다듬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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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를 전한 뒤 이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가르친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는 법이 없으며,
반드시 그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앞으로 계시될 영광에 비하면
지금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속량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이 아니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대하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
세상 걱정이나 자신의 안락, 재물의 유혹에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결실을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풀이해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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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땅에서 싹이 돋아나게 한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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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18-23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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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9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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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비극과 의지를 노래하다가
옥사한 시인 이육사의 명시 ‘광야’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시인이기도 한 교사가 오랫동안 어린 학생들과 함께한
문학 수업 시간에 느낀 것을 전하는 책을 읽었는데,
이 시구에 관하여 토론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으며 문득 이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 시를 가르치며 일제 암흑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이육사 시인의 고귀한 삶을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그는 이육사 시인에 대하여 ‘스스로의 삶을 씨앗으로 뿌린 이’였고,
자신의 삶 자체를 뒤에 올 이들을 위한 헌신이자 투신으로서
마흔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다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희도 이렇게 씨앗을 뿌릴 수 있겠니?”
이에 대한 한 학생의 솔직한 반응이 흥미 있는
토론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됩니다.
“대뜸 은수가 ‘저는 안 뿌릴 거예요.’ 한다.
툭 던지듯 목소리도 컸다. 그 도발적인 대답에 내 마음이 출렁했다.
씨앗을 ‘못’ 뿌리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안’ 뿌리겠다고?
그것을 이리 당당하게 말한단 말이지?
‘씨앗을 안 뿌리겠다는 말은 용기가 없어서
못 뿌리는 것이 아니라 뿌릴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말이네?’
‘내가 열매를 다 먹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뿌려요?’
‘흠, 그래? 그럼 네가 지금 따 먹고 있는 열매들은
다 네가 뿌린 씨앗이니?’ 아이는 순간 멈칫한다.”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한 아이들은 다행히 이어지는 토론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 올바른 일, 가치 있는 일의 씨를
뿌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삶인지를 조금씩 발견하고 인정해 갑니다.
교사인 저자도 아이들과 가진 이 대화 뒤 이러한 확신을 더해 갑니다.
조향미 시인의 『시인의 교실』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옥한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새로이 깨닫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육사 시인이 그러했듯 다른 이들과 앞날을 위하여 묵묵히
‘씨 뿌리는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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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씨 뿌리는 이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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