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9. 20:42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력사문헌자료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고구려는 705년의 력사를 거쳐 28명의 왕이 있었는 데, 그중 18개의 왕릉이 길림성 집안 동구(洞沟)옛무덤군에 분포됐다. 그 가운데서도 장군총(将军坟)은 이미 확인된 왕릉 중 제일 완벽하게 보존된 하나로서 뾰족한 추형(锥形) 외관으로 하여 《동방의 피라미트》로 불리우고 있다. 장군총은 고구려 제20대왕 장수왕의 릉묘로서 장수왕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인 기원 5세기 초에 세워졌다.
청조 동치(同治)말년에 중원의 재해민들이 봉쇄되어 있던 장백산으로 들어오면서 웅장한 이 무덤을 발견하고 변강을 지키는 장군의 릉묘로 여기고 《장군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장군총은 북쪽으로 룡산, 서쪽으로 우산(禹山)과 린접해 있으며 남쪽에는 압록강이 흐르고있다. 앞쪽으로 호태왕비를 마주하고 고구려왕 수도인 국내성이 멀리 내다보인다. 장군총은 지세가 우월하고 건축이 웅장하다.
장군총은 화강암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석조(石条)를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다. 밑부분은 정방형에 가까우며 기단(基壇)의 한변 길이는 31.58메터, 1100여개의 석조를 22층으로 쌓아올린것으로서 높이는 12.40메터에 달한다.
묘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5메터, 높이가 5.5메터로서 바닥에 두개의 크기가 부동한 석관이 놓여있다. 관두껑돌은 50여톤의 거대한 화강암석판이다. 릉묘 천정은 한개 변이 13.2~13.7메터이고 매개 변마다 20여개의 구멍이 나있다.
장군총은 거대한 석조사이에 조약돌을 메워놓았으며 자신의 무게로 하여 외부로 생기는 장력이 생겼다. 이런 장력을 상쇄(抵消)하고 견고성을 보장하기 위해 매면에 10톤짜리 거석 3개씩 눌러놓았는데 현재는 11개만 남아있다.
이런 거대한 돌들은 전부 22키로메터 밖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것이라고 한다. 운수도구와 기중도구도 없었던 1500여년전, 고구려 장인들은 빙상운수와 통나무를 굴리는 방식 및 비탈에 흙을 채우는 등 방식으로 한장한장씩 운반해왔고 또 한장한장씩 쌓아올렸다. 장군총의 건설은 고구려인의 총명재질을 충분히 반영했다.
장군총은 장수왕이 기원 427년에 고구려 수도를 평양을 옮기기 전에 이미 지어졌으며 장수왕이 세상을 뜬후 장군총에 시신을 묻었다.
장군총릉원은 설계가 완벽하고 석조공예가 정교하고 세밀하여 고구려석조릉묘중 최고급 건축에 속한다.
장군총
장군총옆에서 사진촬영을 하고있는 관광객
1호 무덤(陪坟).
길림신문
동방의 금자탑, 장수왕릉(장군총) |
집안(集安)에 남아있는 만 2천여 개의 묘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능으로 거대한 크기와 빼어난 조형미를 갖추어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
장군총 1930년대 모습
성균관대 박물관이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 통구 12호의 벽화(행렬도·왼쪽 사진)와 장군총의 1930년대 모습을 19일 처음 공개했다. 사진은 일제 총독부 박물관장을 지낸 후지타 료사쿠 경성제대 교수가 촬영한 것이다.
|

3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 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基壇)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 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礫石)을 깔아 능역(陵域)을 표시하였다. 널방[墓室]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天障石)이 있는 굴식[橫穴式]이며, 2개의 널받침[棺臺]이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현지 중국 학자들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급의 무덤인 태왕릉(太王陵)·
|
|
장군총
[동명왕릉 - 평양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릉 (북한 평양)]
위 무덤은 북한이 [고구려시조 동명왕릉]이라고 발표한 것.
저 무덤이 [고구려시조의 릉]이던 아니던 간에
양식으로 보아 광개토대왕때의 고구려무덤보다 더 전 것.
그런데 그때 이미 피라미드에 흙을 덮는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하단만 돌피라미드고 그 위는 흙이 보인다.
안에는 변형된 작은 피라미드 모양이 있다.
[동명왕릉 묘실을 바라본 광경]
[동명왕릉 묘실의 천정구조]
- 천정 주위로 벽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저 때 이미 [고분 벽화]를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장군총에는 그림도 전혀 없다.
정사각형 모양으로 돌들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게 쌓아올린 형식.
변형된 피라미드다.
위와 같이 동명왕릉때는 이미 무덤 건축구조가 많이 달라져 있다.
동명왕릉도 위 각저총과 구조가 비슷하다.
[고구려 덕흥리 벽화고분]
위 덕흥리 고분은 수백자의 글자가 발견되어서 유명한 [유주자사 진]의 무덤.
그런데 이 고분에 쓰여진 것이
이 고분을 [광개토대왕 18년]에 만들었다는 것.
즉 광개토대왕과 같은 시대의 무덤.
이 고분은 피라미드 형식이 좀 남아있긴 하지만
이미 많은 변화를 보인다.
진짜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이 무덤과 비슷한 형식으로
크기만 클 것이다.
즉 장군총을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무덤으로 볼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
벼농사, 금속문명도 일본에 가르쳐준 한국
[현재의 태왕릉 - 누군가에 의해서 거의 훼손되었다.] |
[백제 무령왕릉 내부 - 온통 벽돌]
[출처 - 동아일보]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만 [호태왕]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방울의 [호태왕]이 광개토대왕이고
진짜로 이 [호태왕 방울종]이 [태왕릉 피라미드]에서 나왔다면
[태왕릉 피라미드]는 더더욱 광개토대왕릉이 될 수가 없다.
광개토대왕 때의 신묘년(辛卯年 : 391년)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던 해.
18세 젊은 왕이 즉위하면서 이미 능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얘기인가^^
만약 위 방울의 [호태왕]이 광개토대왕을 뜻하는 것이라면
위 방울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그 즉위를 하늘과 선조에 고하는 행사를 태왕릉에서 했다는 얘기가 된다.
방울종을 만들고 피라미드에서 [즉위식]을 했다는 얘기.
만약 [태왕릉 피라미드]가 어느 고구려 임금의 무덤이었다면
피라미드 위에 올라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대왕의 무덤 위에 올라가는 일은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고구려 당시에도 [태왕릉 피라미드]는 고대의 것이었고
그래서 거기서 즉위행사를 했다고 본다.
[태왕릉 피라미드]가 선조들이 만든 신성한 제단임에는 분명하므로.
또한 그래서 고구려인들이 피라미드위에 누각을 세웠을 수는 있다.
[태왕릉 내부]
[태왕릉 내부]
출처 - http://cafe.naver.com/8653kpi.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379
충남 부여 송국리 석관묘
대구 달서구 대천동 석관묘 [연합뉴스 2006-11-15 ]
-------------------------------------
고대한국계 추정 이집트 왕족들
위 사진은 요녕(만주 서부) 홍산문명의 피라미드 무덤.
일종의 돌관(석관)묘인데
겉모양은 피라미드.
그런데
압록강 주변에는 장군총, 태왕릉 말고도 한민족 피라미드들이
무려 1만2천기나 있다.
황하문명의 뿌리라는 만주서부 홍산문명이라는 것도
[환인 환웅 배달문명]의 한 지류(가지)에 불과하다.
만주남부 압록강 지역에 널려있는 저 한민족 피라미드들.
이에 대한 발굴은 중국당국이 이미 오래전에 했고
유물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동북꽁정.
때가 되면 중국당국은 세계에다 대고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이다.
' 고조선사도 쭝국역사라고 보고...근거는 없지만...허험...
그러므로 고조선 전 역사도 쭝국역사라고 보고...흐허허험...
그러므로 저 피라미드들도 쭝국역사라고 보고...크하하하...
거래서 피라미드도 쭝국의 창조물이고...캬캬캬캬...
사실은 북한까지 다 쭝국거거던~~~
그냥 우기면 다 우리거거든~~~"
이런 의도로
동북꽁정을 지나서 그들은 '탐원꽁정'이라는 이름까지 붙인것.
탐원이란 근원을 찾는다는 것인데
탐원꽁정이란 중국의 근원만 찾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고대한국문명을 통째로 삼키시겠다는 말씀.
사실 으스스한 짓거리다.
허나 그들이 세계 학자들을 모두 포섭하기는 불가능할 것이고
결국 동북꽁정, 탐원꽁정은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양심적인 학자들은
동북꽁정, 탐원꽁정을 우려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수는 없으므로.
결국 중국에 망신만 갖다 줄 것이므로.
'꽁정파'는 [진실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부터
1.장군총
2,3. 서울 석촌동 고분
[서울 석촌동 고분]
장군총 태왕릉과 마찬가지로
서울시 석촌동 피라미드들도 백제 때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백제보다 훨씬 더 전 것들이라는 근거는 많다. 평양 단군릉
평양 단군릉
|
출처;한국고대사
장군총과 황금비율
[황금비율]이라는 말이 있다.
위에 나오는 [0.618] 이라는 유명한 숫자.
[황금 비율]이라는 숫자.
위 사각형은 사람이 가장 안정감을 느낀다는 비율의 사각형.
[ 가로 : 세로] 가 [1: 0.618]
사람들이 가장 편안해 한다는 비율이기 때문에
명함, 신분증 등도 대체로 이러한 비율로 만들고
건축 등 실생활에 무척 많이 적용되는 비율.
( 검색해 보시면 [황금비율(= 황금분할)]에 대해서 많은 자료가 나옵니다.)
[장군총]
후대에 즉 고조선, 고구려, 발해 때 정상에 누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돌피라미드는 자체는 이미 고대한국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장군총.
장군총, 태왕릉은 고구려보다 훨씬 이전의 작품 <- 관련글
이 장군총에는 어떤 [황금비율]이 숨어 있을까.
[출처 - http://myhome.shinbiro.com/%7Ekbyon/khome.htm]
옆에 기댄 돌 등을 빼고 재면
장군총의 순수한 피라미드는 위와 같은 길이와 높이.
[가로 대 세로]의 비율은 [29.34 : 11.28]
즉 [1: 0.384] 정도가 된다.
황금비율은 [1 = 0.618 + 0.382] 인데 장군총은 [0.384]가 나오는 것.
[0.382]와 [0.384]의 차이 즉 [0.002]는
오랜 세월, 거대한 돌로 만든 공사등을 고려할 때 무시해도 좋을 만한 수치.
즉 장군총은 [1 = 0.618 + 0.382]라는 [황금비율]로 만들어진 것.
처음에 만들어질 때부터 일부러 이러한 [황금비율]로 만들어진 것.
즉 장군총은 황금비율로 만들어졌는데
[여백의 미]를 살려서 작은 부분인 [0.382]를 취했다.
장군총의 더욱 자세한 실측도면이 있다면 많은 황금비율과
기하학이 숨어있겠지만 지금은 후일을 기약한다.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피라미드]
위 피라미드들의 꼭지점 간 거리 비율 역시 [1: 0.618] 즉 [황금비율]로 보인다.
만주 집안의 [황제묘 태왕릉 장군총]의 거리 간격 역시
[1: 0.618] 즉 [황금비율]로 보인다.
고대한국 3연성 피라미드 <- 관련글
서울 석촌동 피라미드는 위와 같이
큰 피라미드 제일 위단의 크기와 작은 피라미드 밑단 크기를
[1: 0.618] 즉 [황금비율]로 맞춘 것으로 보인다.
위 그림은 [1: 0.618] 비율로 작아지는 사각형들을 연속하여 그린 것.
- 원래부터 세상에서 유명한 그림.
서울 석촌동 피라미드는 위와 같이
큰 피라미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올려놔야 완성된다.
큰피라미드 1단과 3단 그리고
작은 피라미드가 연속하여 황금비율[1: 0.618]로 작아지는 모습.
즉 큰 피라미드가 작은 피라미드와 떨어져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피라미드라는 상징적인 표현.
예를들어 큰 피라미드에 부모가 묻히고
작은 피라미드에 자식이 묻혔을 경우 이런 구도가 또한 상징적.
위 그림은 [황금나선구조]로 유명한 그림.
석촌동 피라미드의 모습에서 [황금나선구조]가 연상됨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뜻있는 수학자분들의 세밀한 분석이 요망된다 하겠다.
피라미드가 이집트에서 한국으로 왔을까?
아니다.
유물 유적은 고대한국인들이 이집트로 가서
피라미드 건축을 전파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에서.
'우리 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흥리 고분 外 (0) | 2013.05.31 |
---|---|
동명성왕릉과 정릉사 / 평양 (0) | 2013.05.30 |
무용총 ㅡ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5세기초~중 (2) | 2013.05.29 |
각저총 ㅡ 집안 5세기초~말 (0) | 2013.05.29 |
고구려 고분벽화 동영상ㅡ 강서대묘 (0) | 2013.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