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 말씀의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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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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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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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7장에 나오는 ‘성전 설교’의 상황과
그 귀결을 묘사하는 이야기이다. 26장 전체를 차지하는
이 내용은 예레미야의 제자인 바룩을 통하여 전해졌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주님의 경고를 전하는 설교를 하자,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그를 죽이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그들은
그분의 지혜와 기적에 놀라면서도 못마땅하게 여기며 무시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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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6,1-9
유다 임금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내리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집 뜰에 서서,
주님의 집에 예배하러 오는 유다의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의 악행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려는 재앙을 거두겠다.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 ─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주님의 집에서 예레미야가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온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모두 마쳤을 때,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그를 붙잡아 말하였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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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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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성경을 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말씀에 대한
더 강한 적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이러한 자세는, 비록 양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악행을 저지르며 잘못된 길을 가는 유다 백성을 꾸짖고,
또한 회개하지 않으면 닥칠 파국을 외쳤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경고에 그 누구보다도 예민해야 할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는 대신에 오히려 백성을 부추겨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고향 나자렛에서 말씀과 행위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예수님에 대한 냉담한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주님 말씀의 깊은 지혜에 놀라워하면서도 시기하는 마음과
알량한 자존심을 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하여
그들 앞에서 ‘발생’하였건만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선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로 돌려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유다인들의 살의나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노골적 거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교묘한 방식으로
복음이 우리를 관통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복음이 우리를
‘비켜 가게’ 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은근히 느끼는 ‘복음의 기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의 뜻에 따른 생각과 삶 속에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세상 흐름의 가치관에 따른
안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8월에 우리는 ‘복음의 기쁨’이 인생의 참행복임을 새롭게
깨닫도록 해 주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교황님의 말씀은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사하신 ‘영원히 새로운’ 복음이
지금 우리를 관통해야 함을 힘 있게 말씀하실 따름입니다.
우리가 교황님을 합당하게 맞이하는 것은,
거창한 행사보다 먼저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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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고통의 길 주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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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리듬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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